공(公)은 서기 1315년 고려말 충숙왕 2년 송경의 일청재에서 탄생하셨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심지가 확고하시어 이백겸(李佰謙)은 그를 진초지강(秦楚之强)이라 칭송하여 호(號)를 진초라 하였다.공은 고려개국공신이고 정일품의 태사(太師)이셨던 용인이씨 길권(吉卷)시조의 13대손으로 휘(諱)는 중인(中仁)이고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며 용인이씨의 중시조가 되는 분이시다. 공은 일찍이 학문에 정진하여 당대에 종장(宗匠)이 되는 등으로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등을 거쳐 벼슬이 문하시중 구성부원군이셨으나 조선 신왕조에서는 벼슬을 받지 않으시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 등 제현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셨으며 장남 사영(士潁)과 장손 백찬(伯撰)이 함께 두 왕조불사의 충절을 지킴으로써 절신의 사표(師表)요 조선 500년 왕조의 정충대절(貞忠大節)에 버팀목이 되셨다. 따라서 당시 세인(世人)들은 공의 높은 지절을 기려 “적적한 두문동에는 외로운 충절만이 해와 별과 같이 빛나고 봉작(封爵)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키니 천추에 명성을 날리었네”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다. 용인이문이 공을 중시조로 모시는 것은 길권 시조로부터 13세(世)까지의 묘를 실전(失傳)한데다 공의 직계자손들이 번창하여 용인이씨 총 종인수의 95% 이상이고 조선조에서 3정승 17판서 등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많이 배출되어 문중위상을 크게 드높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시조묘는 용인 3대지 명당의 하나인 “들 호랑이가 산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영덕동 자은교촌인 이곳에 군부인 천안전씨(郡夫人 天安全氏)와 합봉으로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1일 후손들이 시향을 봉행하고 있다. 또한 의정부시 소재 송산사(松山祠)애서는 중시조님 등 고려말 6충신을 배향하고 해마다 음력 3월20일 제향을 올리는 한편 파주시 탄현소재 고려대전(高麗大殿)에 중시조님 3대를 포함한 충현공렬사(忠賢功烈士)들을 배향하고 매년 10월초에 추모대제를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