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431-50번지 김성출씨 집 셋방에서 미군클럽종업원 윤금이씨(당시 26세)가 알몸으로 숨져있는 것이 발견됐다. 당시 윤금이씨는 자궁에 콜라병이 박혀 있었고 우산대가 항문에서 직장까지 27cm가량 박혀 있었으며, 온몸은 흰 세제가루로 뒤덮혀 있었고 입에는 성냥개비가 물려진 채로 온몸이 피범벅이 된 처참한 상태였다. 이 엽기적인 사건의 살해범은 주한미2사단 제20보병연대 5대대 본부중대 소속의 이병 Markle Kenneth Lee(당시20세)였다. 그는 사건 당일 근무지를 무단 이탈해 술을 마신 상태에서 윤금이씨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성관계를 가지려다 사소한 시비로 다투다 이같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한국경찰은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탐문수사 끝에 10월 31일 마클 이병을 검거하였고, 피묻은 셔츠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그러나 미군범죄 수사대(CID)의 신병인도 요청에 따라 아무런 조사없이 마클 이병의 신병을 미군측에 넘겨 주었다. 윤금이씨의 시신은 가족들의 입회하에 경찰에 의해 화장되었고, 미군당국에서는 위로비 조로 50만원을 지급하였다.
국민들의 분노와 '윤금이 공대위'의 결성
먼저 그동안 수많은 미군범죄에 의해 시달려온 동두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동두천택시 노동자들의 미군 승차거부운동, 상점들의 미군손님 안받기 운동이 벌여졌으며, 동두천민주시민회를 비롯한 제사회단체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사건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알려 나갔다. 이런 가운데 11월 7일 '윤금위 공대위'
주최로 시민규탄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2,000여명의 동두천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2사단 정문앞에서 열렸다. 이 집회는 동두천 유사이래 최대규모의 집회였으며, 동두천시는 미군범죄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처음 언론의 소극적 보도로 진상이 알려지지 않다가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국 경향각지에서 국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청년학생들이 미군관련시설에 대한 항의방문과 단식농성 등을 벌였으며 서울, 평택, 수원, 성남, 광주등에서 살인만행에 대한 규탄집회가 열렸고 제 사회단체들의 성명서가 줄을 이었다.
그리고 미국대사관과 의정부 경찰서에는 국민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동두천지역 제사회단체로 구성되었던 대책위원회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등과 연계함으로써 각계각층의 50여개 사회단체와 3정당이 참여한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공동대책위원회'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살해미군의 구속수사와 미국의 공개사과에 대한 요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살해미군에 대한 구속수사와 미국의 사과여부가 국민들의 최대관심사가 되었고, 이를 둘러싼 한,미 정부와 국민들간에 공방이 계속되었다.
초기에 한국정부는 국민들의 비난여론에 밀려 마클 이병에 대한 구속방침을 발표하였으나,미국측과의 협의과정에서 미국측의 거부로 신병인도는 무산되었고 한국정부는 재판권을 행사하되 불구속수사를 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미군당국에서는 유죄확정 이전까지는 신병인도를 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각계각층의 항의와 규탄에도 불구하고 결국 범인의 한국측으로의 신병인도는 무산되었다.
한편 미국측은 공개사과 문제에 대해 '윤금이 공대위'의 요구로 미2사단장 제임스 스캇 소장이 사과문을 보낸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미국대사관과 미8군 사령부에서는 개인적인 비애니, 최선을 다하고 있다느니 하면서 공개사과와 미군범죄 근절대책 마련에 대한 요구를 회피했다.
장기전으로!
그런 가운데 당시의 대통령 선거로 대다수 국민의 관심이 선거로 쏠리게 되자 '윤금이 공대위'에서는 조성된 정세를 효율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윤금이씨 살해미군 구속처벌과 공정한 재판권 행사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등을 벌이면서 지속적이고 장기전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특히 5개월동안 매주 토요일 서울역에서 벌인 서명운동은 사건에 대한 여론의 흐름을 유지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살해미군 한국법정에 세워 심판하다!
이러한 국민적인 운동의 결과로 마클 이병은 93년 2월 17일 한국법정에 살인죄로 세워지게 되었다. 서명운동 등을 통해서 유지된 흐름은 마클 이병의 재판을 계기로 급격히 상승, 발전되어 나갔으며 '윤금이 공대위'는 총력적인 활동을 벌이게 되어 매 재판마다 300∼1,000여명이 재판을 방청하게 되었다.
불구속상태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마클 이병은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폭행사실만 인정할 뿐 살인과 난행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부인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검찰은 재판과정에서 마클 이병의 부인에 대해 형식적인 심문으로만 일관했다.
특히 마클 이병의 동료인 램버트 상병의 범행가담 여부에 대한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검찰은 이 부분을 밝히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재판을 조속히 종결하는데만 급급했다.
그러나 국미들의 비상한 관심과 '윤금이 공대위' 등의 활동은 살해미군에게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을 선고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클 이병은 즉각 항소하였다.
주한미군범죄 근절 운동본부의 태동
1심 선고의 결과로 윤금이씨 살해사건은 몇가지 남은 과제(살해미군의 항소, 신병인도, 손해배상 등)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윤금이 공대위'활동은 일단락되었고, 이때부터 '윤금이 공대위'는 진로에 대한 다양한 모색을 하게 된다.
애초 윤금이씨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모였던 각계각층의 단체들은 활동과정에서 미군범죄의 규모와 그 구조적 원인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미군범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상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체적 준비를 위한 노력에 들어가게 된다. 재정과 인력등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윤금이 공대위'의 활동을 통한 연대의 경험과 각 단체들의 의지가 모아져 93년 10월 26일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운동본부'가 발족하게 되었다. (이후 현재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로 개칭)
항소심, 상고심, 그리고 한국교도소에 수감
마클 이병의 재판결과에 대한 불복으로 진행된 93년 9월에 시작된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마클 이병은 계속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였으나 재판부는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미국정부가 93년 8월 윤금이씨 유족에게 배상금(7천 1백만원)을 지급하였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5년을 선고하는 미온적인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94년 4월 29일 선고공판에서 마클 이병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15년의 원심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마클 이병의 유죄가 확정됨으로써 94년 5월 17일 한국정부는 마클 이병의 신병을 미군당국으로부터 인도받아 천안소년교도소에 수감하였다. 이는 사건 발생 1년 6개월여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