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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적인 변화와 전망
― 시대별 고찰과 더불어 앞으로의 전망 모색
<목차>
서론
본론
Ⅰ. 중국정치의 시대별 변화과정
1. 중국 사회주의 탄생 및 다인물 시기 (1915~1949)
2. 모택동 시기의 사회주의 (1949~1976)
3. 등소평의 사회주의 (1976~1997)
4. 강택민 시기의 사회주의
5. 후진타오 시대
Ⅱ. 중국의 통일정책과 전망
1. 중국정부의 통일정책과 발전
2. 홍콩․마카오의 반환
Ⅲ. 21세기 중국체제의 전망
결론
【서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이래 중국은 겨우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그리고 장쩌민(江澤民)이라는 세 명의 링쇼우(領袖: 지도자)만을 허락했다. 마오쩌둥이 평등과 해방이라는 제1차 혁명을 성공시켰다면 덩샤오핑은 1979년 경제발전과 개혁․개방이라는 제2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지명된 장쩌민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중국특색의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혼합체제를 계승시켜나갈 후계자의 지위에서 탈피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화함으로서 전임자들과 같은 반열에서 평가받을 수 있는 지도자로 남고 싶어한다. 모택동 사후 27년, 등소평 사후 6년 가량이 지난 지금의 중국은 경이적인 경제발전, 내치, 미엔즈 (面子: 체면)와 국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공세적이고 실리적인 외교수완, WTO 가입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치성공과 같은 국제적인 위상강화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중국은 어떻게 움직이는 체제인가? 중국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신 중국 탄생이후 54년이라는 기간 동안 중국은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또한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중국 정치의 특징 가운데 인치의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제도화보다는 인물주의 정치체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중국과 덩샤오핑의 중국, 장쩌민의 중국은 과연 무엇을 추구했고 현재의 후진타오 체제가 추구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향후 중국의 권력구도와 체제의 향방을 예측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론】
Ⅰ. 중국 정치의 시대별 변화과정
1. 중국 사회주의 탄생 및 다인물 시기 (1915~1949)
19세기까지 동양의 전통적 맹주였던 중국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의식에 사로 잡혀 개방과 개화에 실패하고 결국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던 중 1915년에 신문화운동과 1919년에 5ㆍ4운동의 와중에 현 중국 사회주의의 모체인 마르크스 연구회가 생기에 된다. 당시 소련에서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가 레닌이 제국주의와 불평등 조약을 폐기해야 한다고 선언하자 중국의 많은 지도층이 이에 공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에는 중국에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그리고 1949년 국ㆍ공 내전의 공산당 측의 승리는 광범위한 사람들이 공산당의 혁명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중국의 1949년 현실은 해안지대나 큰 도시를 제외하고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에는 너무 이른 봉건 농업 국가였다. 따라서 러시아와는 달리 도시의 노동자 중심이 아닌 농민의 혁명운동이 힘을 갖게 되었고 이를 공산당의 창당 초기부터 역설해 온 모택동은 1935년 공산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2. 모택동 시기의 사회주의 (1949~1976)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을 선포함으로써 공산당의 승리와 중국의 공산 혁명완수로 이어지는 새로운 중국의 탄생을 의미하였다.
정권수립 후 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는 우선 엄청난 인플레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때 모택동과 유소기는 중국 사회구조 변혁을 위하여 혁명을 실시하게 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토지개혁과농촌합작사를 건립한 것이다. 유소기는 이를 주관하여 중국 농촌에 당과 군 조직을 침투시키고, 전운은 자본주의 기업을 국유화 시켰다. 이 때 협조한 사람은 국영기업의 간부로 등용됐다.
1) 제1차 5개년 계획 (1953~1957년)
1953년 중국은 피폐된 경제를 회복시키고 중국대륙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공고화했다. 중국이 선택한 공업화정책은 스탈린식 발전모델로서 장기간에 걸친 중앙집권화된 계획경제정책이었다.
이 스탈린식 모델의 주요전략은 자본재산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중공업분야를 크게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 모델은 모든 경제분야에서 달성한 생산목표와 생산량의 결정에서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정책결정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중앙집권화된 관료주의는 대개 국무원의 부장, 부총리 등으로 전문화되었으나, 너무 전문화되어 당 정치국은 사후 승인기구로 변하였다. 이에 모택동은 실무진에서 제외되어 불만을 표시하였다. 스탈린식 모델은 농업분야에서 근본적인 구조적 변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투자에 필요한 저축의 확대도 필요했다. 농업합작사체제의 도입은 농업생산을 증대시키고 개인소비를 통제하므로 농민들의 저축을 증대시키는 농촌경제구조변혁에 필요한 조치였다. 이는 평등보다는 능률의 극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1차 5개년계획은 성공하였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공업의 발전은 농업의 낙후를 초래하였고, 도시의 농촌과 노동자 농민간의 소득격차는 확대되어 갔다. 관료조직은 능률적인 경영이었으나 모택동이 주장해 온 군중노선이 약화되는 문제점을 나타냈다.
2) 대약진 운동 (1958~1959)
대약진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공산혁명을 위해 군중을 동원했던 것처럼 중국의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위해서도 대규모의 군중을 동원했다. 대약진운동은 중국의 풍부한 자원인 인력을 자본재로 전환시키려는 군중운동이다. 대약진운동은 군대와 같은 엄격한 군사적 규율아래서 실업자들에게는 일이 주어졌고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열심히 일할 것을 강요했다. 이는 결국 노동집약과 소규모 생산의 확대를 통해 공업생산력에서의 일대 약진을 성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채택된 것이 바로 군중동원전략이었다. 이 대약진운동은 “이중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날때쯤 중국경제는 자본집약적이며 대규모의 근대적 경제구조와 노동집약적이며 소규모의 전통적인 경제구조가 혼재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근대적인 부문에서는 생산된 제품이 대부분 외화를 획득하지만 전통적 부문의 경우 농촌지역의 소규모 산업이 지역주민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자급자족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대약진하에서 근대적인 경제요소는 전통적인 경제요소에 필요한 자본재를 공급할 필요가 없었으나, 전통적 경제요소는 공업부문의 발전에 필요로 하는 식량, 원자제 등의 유통을 증대시키게 되었다. 토지는 다시 환수되었고 농민들은 자신들의 비용으로 간단한 기구만을 사용하여 관개시설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론적으로 대약진운동을 통한 경제발전 모델은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모델은 비현실적인 기대와 목표달성의 과도한 열성이라는 문제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기존의 농업합작사를 인민공사로 개조시킨 것도 대약진 운동의 핵심사안이다. 인민공사는 본질적으로 합작사보다 더 큰 규모로 농업생산을 집단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농업합작사와는 달리, 인민공사는 하나의 말단 지방정부와 같은 것으로서 농업, 공업, 교육, 사회복지, 보건위생, 공공사업, 군사방위 등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농기구, 가축, 가옥, 합작사에 대한 지분마저도 모두 인민공사에 헌납하여 공동소유로 전환시키게 되었고 농민들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교육이라는 다섯가지의 보상을 받게 되었다. 1959년 봄까지 모두 26,000개의 인민공사가 건설되었다.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에 수 많은 문제점들을 나타냈으나 이 중에서도 특히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가 대약진운동의 추진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 6월 소련과 중국사이에서 경제발전모델에 대한 의견충돌이 원인이 되어 소련이 일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있는 기술자들을 모두 철수시켜 버렸다. 결국 중국은 공업화보다 충분한 식량공급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지도부의 분열과 경제회복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지도층내부의 분열을 초래하였고 경제개발전략 뿐만 아니라 발전전략의 이념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갈등을 빚게 되었다. 모택동의 과오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던 것은 당시 국방부장이며 중앙당치국 위원이었던 팽덕회였다. 팽덕회는 대약진 운동은 공산주의 천국으로 가는 소자본주의자의 광신이라고 비난하였으나 모택동을 꺽지 못하고 모택동에 의해 숙청되고 만다. 이어 모택동은 팽덕회의 숙청에 대해 비판을 받게 되고 주석자리를 당내의 이론가이며 실무가인 유소기에게 넘겨주게 된다.
유소기의 등장으로 대약진운동이 전면적으로 수정되었다. 이러한 유소기 지도하에 경제회복 조짐이 곧바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은 중국이 처한 상황에 적합하도록 하기위해서는 보다 더 혁신적인 조정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이는 곧 스탈린식 발전모델에 기초한 중앙통제 계획경제가 중국에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4) 사회주의 교육운동 (1962~1965)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곧 문화대혁명의 전주곡이었다. 이 운동의 핵심은 곧 계급투쟁이었으며 이는 모택동이 1962년 공산당 제 8기 10중전회에서 자신의 적극적인 역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했던 내용이었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은 대약진의 실패로 인한 농민들의 불안을 해소하려하였으며, 간부들의 부패를 막고, 파벌주의 극복,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를 증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책방향과 지도자를 바꾸지 못했다.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결과 유소기와 모택동간의 격차가 점점 증대되어 문화대혁명의 투쟁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었다. 유소기와 등소평이 장악하고 있던 당의 주요부서가 모택동의 군중동원노선이 당과 정부의 제도적인 운영방법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이에 반발하고 있었으나 임표가 장악하고 있던 인민해방군은 여전히 모택동 방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모택동 사상을 적용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당의 주요 부서를 장악하고 있는 간부들이나 당내에서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는 간부들은 곧 모택동 자신이 주도하는 변화를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가치체계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이제 중국공산당은 모택동 스스로가 열망했던 것처럼 혁명적 변화의 효과적인 주체세력이 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5) 문화대혁명
과정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중국공산당 제 8기 11중전회에서 철저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16개조의 지침을 승인한 1966년 8월 8일에 시작되었다. 문혁은 경제기반뿐만 아니라 상부구조에도 연관되어 있었다.
제8기 11중전회가 이 16개조 지침을 승인하기 약 9~10개월 전에 이미 극작가인 우 한이 쓴 경극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북경시 부시장이었던 오함은 당시 북경시장이자 정치국원인 평 전과 함께 정치적으로 유소기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오함이 쓴 해서퐈관이라는 경극은 역사 풍자극이었다. 모택동과 그의 추종세력들은 이 경극의 목적이 1956년에 모택동과 대약진운동을 비판하였다가 숙청된 국방부장 팽덕회를 옹호하는 것이라 비난하였다. 당지도부는 처음에는 이 경극의 내용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반대하고 단지 순수한 예술작품으로 간주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지도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모택동의 추종세력이 오히려 비판과 공격을 강화하자 유소기와 팽진은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기구를 설치했다. 최종조사보고서는 유소기가 장악하고 있던 당정치국의 승인을 받았다.
문학논쟁은 점차 군중비판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당과 군의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숙청에까지 이어졌다. 당권파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중국의 2대 명문대학인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의 당위원회까지 번져나갔다.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모택동의 혁명후계자라고 부르짖으면서 “홍위병”을 조직하였다.
중국전역의 고등학교와 대학생들도 자체적으로 홍위병을 조직하여 간부들의 행위와 활동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학생들에게 학교의 간부들과 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체제의 무능으로 인해 취직과 진학의 길이 막혀 있던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적절한 직장과 진출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1966년 홍위병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수업이 중단되었다. 홍위병들 사이에서 파벌싸움과 끊임없는 반목과 갈등은 폭력상태 그 자체였다. 당과 정부의 모든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유일하게 조직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것은 군대밖에 없었다. 홍위병운동은 모택동에 충성하는 극좌파지도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당간부들과 이들의 정책노선상의 이견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 때부터 홍위병들의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고 이는 정책논쟁에 대한 견해를 외부로 알리는 주요통로가 되었다.
1967년 1월과 2월 중국에는 대자보, 표어, 모택동의 깃발과 초상화의 물결속에 수많은 군중의 행진과 군중대회가 끝없이 진행되었다. 혼란과 폭력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유일한 대책은 군대를 개입시켜 질서를 회복하고 무력충돌이나 폭력사태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모택동의 지시로 1967년 1월 인민해방군이 혼란을 진압시키는데 개입되었다. 군의 임무는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생산을 감독하고, 홍위병의 난동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학이나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사상정치교육을 실시하고 모든산업과 당과 정부의 모든 기구를 통제 감독하였다. 군부는 중국전역을 완전히 그리고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되었다. 이에따라 군대가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새로운 조직으로서의 혁명위원회가 당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자 어느정도 질서가 회복되었고 “수정주의”경향은 잠시이긴 하나 축출 또는 제거된 것처럼 보였다.
1969년 4월 제9차 당대회에서 문화대혁명이 종식되었다는 것과 당의 재조직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결과와 평가
▲문화 혁명의 경제적 손실
① 경제적 효율의 전반적인 하락
․공업관리는 거시적 측면에서 미시적 측면까지 전반적인 파괴를 당하였으며, 채산성과 원가에도 염두를 두지 않음으로써 공업의 경제적 효율은 전반적인 하락으로 나타났다.
․고정자산 교부사용률의 하락이 조성되었고, 건설주기가 길어져서 그에 따른 임금도 약 50억에 다다랐고, 평균 1억원당의 투자증가에 대한 생산능력이 감소되었다. 또한 맹목적인 건설, 중복 건설, 조립조건 차이 등의 원인으로 투자의 회수 기간이 연장되었다
․상업방면에서는 자금 이용률이 1957년도 보다 낮아졌다.
․국민소득의 증가는 감소하고 물가소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증가하여서 국민의 생활은 더욱어려웠다. 또한 경제의 발전 속도가 대단히 느려서 1976년에는 국민 수입이 이미 마이너스가 된다.
② 국민 경제의 관리 혼란
1966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는 엄중한 충격을 받아 기구와 필수 설비가 모드 파괴를 당함으로써 모든 계획사업이 정지되었다. 그래서 경제 계획은 번번히 집행되지 못하였다. 또한 중앙과 지방의 관계도 조화롭지 못했다. 중앙의 규정과 제도를 소의 독재정치라고 비판함과 동시에 지방에 많은 대기업과 관리권한을 하방 하면서 각 성에게 조속히 주요 제품의 자급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지역간의 합리적인 경제 원칙에 따라 각자의 비교우위를 발전시킬 수 없었으며 기업의 활력과 자주권이 결여되게 하였다.
③ 비례관계의 심각한 균형상실
․저축률이 지나치게 높아졌다. 또한 저축 내부에는 생산성 저축과 비생산성 저축의 비례가 심각하게 균형을 상실하였다.
․농업 ․경공업 ․중공업의 균형을 상실했다. 지나치게 중공업만을 강조하여 상대적으로 농업과 경공업이 등한시되었다.
․철도건설은 신노선의 건설에만 편중되고, 구노선의 개조에는 소홀히 함으로써 신. 구노선의 건설 비례가 상실되었다.
․본래 취약한 과학과 교육 부분이 문화혁명 때문에 파괴되어. 대학교에서는 전문 지식인을 배출하지 못하였으며, 소학교나 중학교에서도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문맹인이 대량으로 증가하였다.
④ 생활수준의 하락
문화혁명은 국민경제의 전 부분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옴으로써 인민 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 1976년과 1965년을 비교하면 인민의 물질 문화생활 수준은 향상되지 못해 오히려 낙후되었다.
․농촌은 10년간 동란동안 연간 농민 1인당 수입증가는 1원조차 못되었다.
․도시노동자 역시 평균임금은 증가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려 더욱 하락되었다. 또한 도시주민의 의식주와 밀접한 생필품의 소비량에서도 1976년과 1966년 이전을 비교하면 증가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저하되었다.
▲국민 경제 일부 영역에서 얻은 진전
① 농업의 생산조건 개선과 식량생산의 증가
농업 생산조건의 개선된 주요 내용은 수리시설. 농업기계. 화학비료 등의 현저한 증가로 나타났고, 이로써 식량 생산은 비 교적 안정된 성장을 유지했다.
② 석유․화공․야금․기계기업의 건설
원유 매장량을 밝혀서 원유 생산량을 늘려 석유 화학공업도 신속하게 발전되었다. 수력과 화력발 전소를 중점으로 건설하였다.
③ 교통․운수․체신․통신사업의 발전
④ 과학기술에서 얻은 성취
원자탄 폭탄 실험을 행하여 성공하고 미사일뿐만 아니라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운행한 뒤 회수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메벼를 널리 보급하였다.
모택동의 시기 중 1949년부터 56년까지는 비교적 실용적 시기였다. 등소평, 주은래 등이 많은 영향력을 가졌고 모택동 개인 숭배까지도 비난할 수 있었다. 1956년에는 경제적 침체와 인민 내부의 모순 타파를 위한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운동이 전개되었고, 1957년과 58년에 대약진운동을 개시하여 인구의 80%가 넘는 농촌을 집단화하게 된다. 즉 이 시기에 토지개혁, 상조대, 초급합작사, 고급합작사를 거쳐 집단화 정책의 절정인 인민 공사 단계까지 갔다가 실패해 초급합작사 수준에 머물게 됐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숨죽이고 있던 자본주의 요소의 부활과 수정주의 노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게 되고 모(毛)주석을 둘러 싼 좌파 지도자들은 수정주의를 경고하고 계급투쟁의 계승을 촉구했다. 이러한 경향은 온건파 실용 주의자들과의 대립을 일으켰고 그 충돌로 문화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문화혁명은 1966년에 역사 연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의 정치적 의미에 관한 논쟁에서 비롯하여 시작됐다. 모택동은 1966년 5월에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의 강력적 문건인 「5.16촌지」를 통과시키고 좌파인물을 중심으로 문화대혁명 5인 소조를 개편함으로서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의 타파와 신사상, 신문화, 신 풍속, 신 관습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문화대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모든 당권파를 타도하고 유소기, 등소평이 입안한 것이 수정주의이므로 이들과 이들의 추종자들은 모두 수정주의자로 몰려 당에서 숙청되게 된다. 중국의 경직된 정치는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1969년까지는 정치적 마비를 초래하였고 71년 임표사건(주은래의 지원을 받아 임표 세력 숙청)으로 진정되기 시작해 76년에 모택동 주석의 사망으로 해빙되어 수정주의자로 몰려 숙청된 등소평의 시기로 이어진다. 즉, 중국을 일대 혼란으로 몰고 간 문화대혁명 10년의 영향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 피해는 대체로 농촌보다 도시에서 그리고 당정기구와 사회문화, 교육분야에서 엄청난 것이었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은 도시지역과 지식인 사회, 그리고 당정 간부들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줌으로써 장기적인 차원에서 중국사회의 발전에 엄청난 좌절과 후퇴를 초래했다. 그러나 단기적이고 표면적으로 문화대혁명은 중국 경제에 생각보다 덜 피해를 주었다. 그리고 중국사회는 모택동의 사망과 더불어 등소평의 실용적 사회주의 노선에의 길을 걷게 된다.
3. 등소평의 사회주의 -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1976~1997)
1) 등소평의 시대의 개막
1976년 9월 9일. 83세의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국민당군의 대 추격에 쫓겨 대장정이라 불리는 6천 킬로미터의 고난의 피난을 하고 있던 1935년 1월 귀주성의 조그만 도시인 준이(逡義)에서 열린 비상확대회의에서 명실상부한 중국공산당과 홍군(紅軍)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중국의 정치와 이데올로기, 교육, 사상, 문화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 해온 지 41년만이었다. 그의 죽음은 곧정치우선,계급투쟁,대중동원,폭력혁명,이데올로기와 사상 제일주의라는 이른바紅의 시대가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평생을 노선투쟁과 권력투쟁의 심각성과 폐해를 직접 체험했던 마오쩌둥은 자신의 사후에도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업적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철저한 계산에서 사망직전 화궈펑이라는 예상치 못했던 인물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희망은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등소평이라는 작은 거인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그의 탁월한 전략과 영도력을 미쳐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의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4인방(江靑, 姚文元, 王洪文, 張春橋)의 체포와 함께 이제 덩샤오핑은 국무원부총리와 당부주석,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의 자리에 올라 중국의 당․정․군에서 실질적인 권력자로서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2) 현대화노선의 중심 : 하나의 중심
사실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점’이라는 어휘가 정식으로 제기된 것은 1987년의 13大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 사상노선은 이미 등소평 집권 초기부터 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중심이랑 바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으로 장기간에 걸쳐 중국에서 실행되었던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한다’라는 노선의 반동이다. 이는 그때까지 주요모순으로 간주하였던 ‘계급모순론’에서 벗어나 ‘날로 증가하는 인민의 물질요구와 이에 상응하지 못하는 낙후된 생산력’을 현재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으로 규정하면서, 정치제일주의 노선을 경제제일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생산력을 중시하면서 경제발전을 강력히 추진하는 노선은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중국공산당은 등소평 집권 이후의 모든 회의에서 거의 같은 논조로 “중국사회조의가 당면하고 있는 각종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사회주의현대화 경제건설’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기본노선은 결국 1992년의 14大에서 ‘사회주의시장경제(社會主義市場經濟)’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가장 중요한 당면 정치문제가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부문의 현대화, 즉 4개현대화의 경제적 달성이라는 묘한 정치․경제관계를 정립시켜 각종의 조치들을 실행하고 있다. 몇몇 조치들은 때에 따라서 상당한 정치적 부작용을 감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중국지도부의 또 다른 방비책(4항원칙 고수)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현대화 노선의 기초 : 두 개의 기본점
⑴개혁․개방의 견지
1978년 말의 11기 3중전회가 중국개혁․개방의 중요한 시작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회의의 공보(公報)는 중국에서의 개혁․개방정책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4개현대화의 실현에는 생산력의 대폭적인 제고가 필요하다. 또 생산력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산관계와 상부구조를 다각적으로 개선해야 하며 적합하지 못한 모든 관리방식, 활동방식, 사상방식을 변혁시켜야 하는 광범위하고 심대한 혁명이다.” 또 “자력갱생의 기초 하에 적극적으로 세계 각국과 평등호혜원칙에 입각하여 경제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세계 각국의 선진기술과 설비의 도입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대회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개혁․개방노선을 추진하기 위해 중국은 그 이론적 근거를 정립하기에 부심해 왔다. 개혁이론의 제기는 기존 사회주의사회에 대한 재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공산당이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보는 모순론의 재인식을 통해 생산력해방론을 제시함으로써, 개혁이 사회주의․공산주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으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이 출현하였다. 사회주의 초급단계와 개혁의 상관성을 중국공산당은 “반식민지․반봉건사회에서 허물을 벗고 나타난 것으로 당연히 생산력이 낙후되고 생산관계가 완벽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양자간의 모순도 점차 첨예화되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를 완벽히 하는 개혁이 필요하며,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의 개혁은 일종의 절박한 역사적 요구이다”라고 규정하면서 개혁의 이론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이론에 기초하여 중국공산당은 진일보하여 개방에 관한 조치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중국지도부는 역사적인 경험에서 쇄국정책이 중국을 오랫동안 정체와 낙후상태에 머물게 한 중요 원인으로 파악하고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이 개혁․개방이 결합되어 현재의 중국을 이끄는 각종 개혁조치들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⑵ 4항 기본원칙의 고수
4항 기본원칙이라 함은 사회조의노선의 고수, 인민민주독재의 고수, 중국 공산당영도의 고수 및 마르크스레닌주의․모택동 사상의 고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소위 우(右)적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중국공단당의 영도 하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존속의 근본이다. 따라서 이것은 언제든지 모든 정치․경제․문화․사회 등의 사상을 조절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다.
4) 현대화 정책의 실시
전체적으로 등소평 시대의 국가발전정책은 ‘현대화 3단계’라는 3단계 발전론을 통해 그 실천적 방법론을 살펴볼 수 있다. 현대화 3단계 발전론은 1980년에 제기되어 수 차례의 수정을 거쳐 1987년 13大에서 확정되었다. 즉 80~90년의 10년간은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를 해결하며, 2000년까지 소강(小康) 수준을 달성하고, 2050년까지의 중간 선진국에 도달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3단계 발전론에 의거 중국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각종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물론 목표의 설정과 조치의 실행에 있어 선후본말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체계적인 형태를 띠고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⑴ 대내 경제개혁
중국의 경제개혁은 그 폭이나 심도에 있어 일반 사람들의 예상을 넘어서는 정도로 진행되어 왔으며 더욱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제현대화 조치는 기본적으로 몇 시기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는 1979~83년에 걸친 기간으로 농촌경제개혁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가정청부제의 광범위한 도입과 향진기업의 발전이 가장 중요하고 두드러진 정책이다.
두 번째 시기는 도시상공업 개혁시기로서 1984년 12기 3중전회의 결정에 의해 경제개혁의 중심이 농촌에서 도시로 전이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기업의 활력을 주기 위한 권력 하방 조치와 경영책임제의 도입, 가격개혁, 개체호허용 등 소유제 방면에서도 다원화 등이 추진되었다.
세 번째 시기는 과열경제를 진정시키고 경제질서 정돈을 추진하기 위한 긴축정책을 실시하여 개혁의 발걸음이 주춤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천안문 사건이 발생해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다.
네 번째 시기는 1992년 등소평이 다시 과감한 개혁․개방을 주창하는 남순강화를 통해 중국경제에 다시 한번 채찍질을 가하고, 14大에서 사회주의시장경제론으로 시장경제체제를 공식화한 이후 시장화와 국제화를 추진하는 현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등소평이 없는 앞으로도 과거와 같은 추진력을 가질지는 미지수이다.
⑵ 대외 개방정책
개혁의 보조를 맞추어 대회개방정책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다. 우선 1980년대부터 경제특구를 설치해 외국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연해개방도시 및 각종의 개방구․기술개발구․협력구, 최근에는 변경개방도시로의 확대 등 점-선-면-전방위 개방의 형태로 확산되고 있으며 개방체제도 4연 개발로 구체화되었다. 또한 13기 2중전회에서 국제대순환론에 근거한 외향적 경제발전전략도 수립하여 이론적인 근거도 마련하였다. 이 대외개방정책은 소위 3자기업(합작․합자․독자기업)의 도입을 통한 자본과 기술의 도입 및 대외무역 측면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은 광활한 시장을 갖고 있으며 많은 지하자원 등의 매력을 갖고 있어 많은 외국기업들의 진출대상이 되고 있고, 중국 자신도 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국의 발전에 유리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개방정책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⑶ 정치체제개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적인 면에서 개혁․개방의 정책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반해 정체체제 개혁은 상당한 답보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는 정치체제 개혁의 제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보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과거 몇 십 년 간 유지해 온 정치체제의 변혁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등소평은 중국의 정치체제 개혁에 관해 “보다 원활한 경제개혁을 위해서 정치체제도 개혁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정치관리체제의 개혁, 즉 행정효율을 제고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개혁 프로그램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쨌든 중국은 당정분리․기구개혁․새로운 인사제도의 도입․간부의 연령제실시 등의 개혁조치를 내놓았으나, 당이 영도하는 국가체제 속에서 적어도 40년 간 지속되어온 기본구조가 단시간 내에 능률적인 형태로 변화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⑷ 사회주의민주건설
정치체제개혁과 더불어 중국지도부가 강조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회주의민주의 건설이다. 이는 각종 선거제도의 정비 및 기층민중을 관리에 참여시켜 아래로부터의 의견을 수렴하고, 언로를 개방하여 영도계층과 민중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는 형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정책의 추진이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체제의 범위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물리적 제약으로 인해 소위 서방세계의 민주관념은 요원할 수밖에 없으며, 역시 과거의 민주집중제가 내포하는 위로부터의 민주개념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밖에도 사회주의법제건설 등 여러 가지 조치가 있으나, 모두 경제 ‘우’․정치 ‘좌’의 기본 구도를 탈피할 수 없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립 기초노선인 4항기본원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상의 각도에서 볼 때 중국이 추진하는 ‘사회주의 현대화’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정치와 경제의 이원구조, 경제현대화에 경사된 정책, 등소평 노선의 찬양에서 보여지는 개인권위에 대한 강조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권위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중국의 현대화가 경제 방면에만 집중된 나머지 경제는 발전하나 ‘현대화’는 되지 않는 미로에 빠질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5) 등소평의 리더십의 한계 - 6․4 천안문 사태
11기 3중전회 이래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지 10년이 되어갈 무렵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반적인 경제적 퇴조와 몰락에도 불구하고 중국식 사회주의가 낳은 놀라운 성과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도 수반되기 마련인데 그 시정을 요구하는 동시에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화, 즉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학생과 시민들의 참여는 등소평의 정치 리더십이 한계를 드러낸 시점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등소평 리더십의 딜레마는 생산력의 발전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던 그의 예상과는 반대로 생산력의 발전이 오히려 시민운동을 조장하여 정치적인 불안정이 조성되었다는 데 있었다. 즉 경제적 논리로 정치적 문제를 극복하려던 등소평의 중국식 사회주의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1986년 지식인의 민주화 요구 시위와 1989년 6․4천안문 사태로 좌절을 맞은 것이었다. 이는 중국사회주의의 정권 수립 40주년이자 등소평의 개혁․개방 실시 10년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조자양의 개혁정책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자 이붕은 정치개혁의 속도를 완만하게 하자는 내용의 건의를 했으며, 원로들은 책임을 물어 당총서기직에서 사퇴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장 상황에서 1986년 12월 대규모 학생시위로 실각했던 호요방이 198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이를 계기를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천안문 사건 이후, 중공당은 대내적으로는 시위세력을 탄압하고 개혁의 속도와 범위를 축소 조정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서방세계의 정치․경제적 제재와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안정에 최우선을 두어 학생 및 지식인 등 민주화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했다. 이 과정에서 7만 2천여 명의 당원이 제명되었고 25만 6천여 명은 경고 및 징계처분을 받았다. 경제적으로는 치리정돈(治理整頓)의 일환으로 수요억제, 내핍생활 장려, 산업구조 조정, 가격개혁의 잠정적 중단을 실시하여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등 경제적 혼란을 진정시키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서방세계는 중국에 대한 무역금수, 차관금지, 기술협력 제휴 중단 등의 경제적인 제재조치를 취하였다. 1990년 중반에 와서 인플레이션이 완화되었고 국민총생산액은 5%의 성장을 기록하였다. 1990년 1월 이붕은 계엄령 중단을 발표하고 반체제인사를 석방하기 시작했으며, 12월 7일 당중앙은 개혁개방을 계속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이와 같이 안정이 다소 회복되자 서방국들은 중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완화하여 중국 국내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천안문 사건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부조화, 후계자의 불확실성이라는 문제를 남긴 채 매듭지어졌다. 비록 천안문 사건이 정부당국에 의하여 무력으로 진압은 되었지만, 이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며 중공당과 인민간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에 이후 중국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의 재발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강택민 시기의 사회주의
등소평의 사망으로 중국에는 개혁․개방의 조타수가 없어졌다. 등소평에 의해 그의 후계자로 옹립된 강택민은 과거 등의 유훈을 받들면서 나름대로의 정치력을 확보해야 하는 전환기에 처해 있었다. 등소평의 현대화 노선은 연평균 10%에 육박하는 놀라운 경제 성장과 함께 수많은 난제들을 남겨 놓았다. 이러한 과제들은 강택민의 지도부에 넘겨졌다.
강택민은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유입된 서구의 부패된 사상을 단호히 저지하려 하였다. 도덕적 정립을 하려했던 것뿐만 아니라 경제개혁을 가속화하고 국유기업을 사유화시키는 자유화조치를 통해 등소평의중국특색의 사회주의와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강택민은 1997년 9월의 당대회에서 21세기의 중국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신사고”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등소평이 사망하기 전 이미 강택민은 자신의 생각을 추진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즉 단지 중국의 도덕적 해이를 해결하는 것 뿐 아니라 경제개혁을 가속화하고 국유기업을 사유화시키는 자유화조치를 통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 또는 합법화하려는 방법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강택민의 이른바 “신사고”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정신문명
강택민의 정신문명건설에 대한 추진은 개혁기간동안 전 중국을 휩쓸고 있는 도덕적 및 윤리적 해이와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운동”을 띄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정신문명”이 얼마만큼 강택민 자신의 생각을 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잇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캠페인을 구상한 것은 한 때 당내에서 이데올로기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등력군의 부하들로서 아직도 “좌파”의 잔존세력으로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택민의 내부조직이라는 것도 들려오고 있다. 이데올로기 캠페인은 1996년 10월 14일 제14기 6중전회에서 채택되었다. 사회주의 윤리와 문화적 발전을 촉진하자는 이 결정은 등소평의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이론을 찬양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어오는 기간동안 야기된 사회적, 윤리적, 문화적 생활에 만연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확인하였다.
배금주의, 쾌락과 개인주의성향의 증가 등과 같이 여러 곳에서 도덕적 행위의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 봉건적인 미신과 포르노, 도박, 마약 등과 같은 사회적 해악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유사품과 가짜제품의 생산이 사회적 병리현상이 되고 있으며, 확산되고 있는 부패현상은 당과 정부의 공작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국가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의 장래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하고 의심하고 있다. 윤리적 및 문화적 도덕주의의 증진이라는 상황을 직면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결코 이러한 문제점이 존재하고 있음을 좌시하지 않겠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강택민의 “문명건설”은 애국심, 집단주의, 사회주의의 교육의 중요성 뿐 아니라, “사회적 도덕, 전문적 윤리, 가족간의 미덕”을 제고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의 결정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온 국민이 모두 열심히 일하고 선구자로서의 정신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모택동의 “爲人民服務”(인민들을 위해 일한다), “愛好合作社”(Loving the Collective)라는 표어들을 새로운 사회주의 윤리로서 다시 사용되도록 하였다. 도시주민들에게는 모범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아름다운 환경”, “선량한 사회질서”를 강화하도록 요구되었다. 향촌지역에서는 당의 기층조직을 강화하고, 낡은 관습이나 “불법적인 종교활동”을 타파함으로서 “문명농촌”을 건설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하도록 요구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결정에서는 사회주의 문명건설을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와 빈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유물관과 이상주의”, “사회주의 공유제와 사유제”, “사회주의와 봉건적이며 부패된 자본주의적 사상과 문화”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새로운 이론적 자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부패한 서구의 사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현재 중국정부는 여러 도시에서 인터넷 접속을 금지하고 있다.
매년 6천명의 범죄인들이 도박이나 마약거래와 같은 경미한 범죄로 처형되고 있다. 도시지역에서는 쓰레기를 플라스틱 봉투에 담아 버리거나, 집 앞의 도로를 깨끗이 청소하는 새로운 모범가정을 따라 배우자는 과거 60년대나 70년대에 행해졌던 대중운동이 재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은 이기적인 축재 열풍을 대신할 새로운 도덕적 가치를 설정하였다.
일반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도덕적 문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과 정부 관료들에 의한 만연하고 있는 부패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정부가 부패에 연루된 고위간부들을 처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1997년 9월 제 15차 당대회 개막전날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전북경시장이자 정치국원이던 천 시통이 거액의 공금을 횡령했다고 밝혔다. 8월 25일 중앙기울검사위원회는 진희동이 당적을 박탈당했으며 그가 저지른 범괴에 대해 처벌될 것임을 밝혔다. 물론 그를 정치국원과 북경시장직에서 축출한 것은 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는데 있어서의 당의 단호함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부패는 점점 체계화되어가고 있어서 당과 국가의 조직과 담당 공무원들을 교화하기 위한 “정신문명”이라는 이데올로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엄격한 법집행과 신속하고 공정한 처벌을 통한 법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로서의 시장경제
마르크스가 역사적 유물론이 사회의 특성을 결정하고 공산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여러 단계의 발전단계를 거치면서 그 마지막 단계로서, 즉 공산주의의 도래 직전단계는 성숙하고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사회라고 주장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곧 계급 없는 공산주의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산업화사회에서부터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등소평에 의해 주창된 다소 모호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데 대한 논쟁이 있어왔다. 그 것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인가? 그러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나 자본주의적 실천의 한 형태가 아닌가? 1993년 11월 제 14기 중앙위원회는 중국의 현대화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으며 “사회주의의 기본적인 제도와 연결되었다”고 밝혔다. 보유과 책임을 명기한 주식회사나 “공장장 책임제”와 같은 제도의 도입, 그리고 기업의 합병과 인수, 소형화, 그리고 과거 사회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던 국유기업의 매각 등과 같은 불경스러운 자본주의적 용어들이 도입됨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국가라는 주장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 적절한 표현은 등소평 사후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지도부는 아직도 당내에 잔존하고 있는 “좌경적 인사”의 비난을 막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며, 당내의 이러한 비판세력을 흡수함으로서 당내의 안정과 평온, 그리고 지난 20년간 추진되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경제개혁을 지지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정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1997년 5월 29일 강택민은 중앙당교의 성급 및 주요부처의 고급간부들의 연수과정의 수료식에서 행한 연설에서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놓여있다고 선언했다. 강택민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의 건설이론”에서의 등소평의 공로를 치하하였으며 등소평의 이론은 “우리의 노선, 원칙, 그리고 정책”을 형성하는데 기초로 작용했음을 재강조했다. 그는 또한 등소평의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을 재강조하는 이유를 밝혔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다시 강조하는 이유는 전례없던 기회와 도전, 그리고 개혁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상황을 창조해야한다는 험난한 과업 앞에서, 여러 가지 모순을 해결하고, 상이한 의심들을 명확히 하고, 왜 다른 노선이나 정책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노선과 정책을 수행해야하는가를 정확히 이해하는 관건은 바로 통일된 이해와 중국이 여전히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처해있다는 중국의 기본적인 국가적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 달려있다.
강택민은 또한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있는 사회에서는 기본적인 모순이 존재하며, 이는 바로 “인민들의 증대하고 있는 물질적, 문화적 요구”와 “낙후된 사회적 생산력”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며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노력 중의 하나는 “공유제를 근간으로하고 다양한 소유제를 통한 경제의 공동발전을 위해 소유제의 구조를 더욱 완벽히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현대적 기업제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 선전부 이론국장인 리 쥔루는 사회주의 초급단계가 적어도 100년은 지속될 것이라 예견했다.
강택민은 1982년의 두 번째의 개혁가속화 조치로부터 계약책임제, 그리고 1987년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1992년의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1997년의 국유기억의 쇠퇴에 이르는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들을 정당화하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의 개념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조자양의 고문으로 있다 추방된 옌 쟈치에 의하면 강택민은 정치구조개혁을 연구하던 한 연구소의 책임자로 있다가 1989년 천안문사건 직후 투옥되었다 바오 통의 휘하에 있던 당시 조자양 총서기가 가까운 몇 몇 고문에게 시장경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을 개발하라고 지시했으며 강택민은 바로 이 아이디어를 빌려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10년 전 13차 당대회에서 조자양은 당의 기본노선으로서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개념을 제시했다. 조자양에 의하면 중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놓여있으며 “중국의 인민들은 완전히 발전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노선을 걸을 수 없으며”,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 단계를 “뛰어 넘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조자양은 중국과 같이 낙후된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현상”이라 설명했다. 즉 기본적으로 농업사회는 점차 근대적인 산업국가로 변화하는 단계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의 장기적인 지침으로서 일련의 이론들을 형성시켰다. 즉 현대화과정에서 생산력을 확대하고,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경제 및 기술교류와 협력을 위한 개방정책을 견지하고, “안정과 단결의 기초 위에서 고도의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등이었다. 한 학자는 이를 “시장경제를 이론적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1998년 중앙당교의 한 이론가에 의하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놓여 있는 중국은 “여전히 미성숙한 단계에 놓여있으며, 아직도 사유제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구사회의 전통과 흔적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공유제를 주로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소유제를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의 이론가인 공 스치는 “사회주의는 결코 자연경제상태에서 건설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런한 자연경제상태는 중국 농촌의 상황이자 현재 “상품경제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중국은 “상업, 재정, 기술, 노동시장”을 발전시켜야 하며, “공동 번영”을 촉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중국은 “사회주의 문화와 윤리”를 건설하여야 하며, 퇴폐적인 봉건적 사상이나 자본주의 사상이 유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1987년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의 개념을 옹호하려는 조자양을 위시한 당내 이론가들의 기본적인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속적인 개혁정책을 합리화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개역과정에서 중국은 사회주의를 포기해왔다고 주장한 1976년 등력군의 장문의 논설과 같은 “좌경적”사고를 잠재우고 당의 정확한 노선과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경적” 인사들이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1) 강택민의 정치개혁 구상 (개혁적 이미지)
사실 1998년 가을 전까지만 해도 강택민은 상당 정도 정치개혁을 진행하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었고, 그 개혁의 의지는 중공 제15차 당 대회에서 구체적으로 피력된 바 있다. 실제로 추진된 정치개혁의 성과를 간단히 살펴보면, 크게 다음의 4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법치건설에서 보면, 1997년 10월의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 형법’과 ‘경제 · 사회 및 문화 권리에 관한 공약’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 서명,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중국 정부가 다시 ‘공민의 권리와 정치 권리에 대한 공약’에 공식 서명함으로써 법치건설과 기본인권 보장 방면에서 큰 진전을 보였으며, 또한 1999년 3월 15일 제9기 2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켜 법치 수준을 헌법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제15차 당 대회 이후 이런 일련의 법치건설 노력은 정치개혁 과정의 중대한 돌파구였음에 틀림없다.
둘째, 정치개혁의 일환인 행정부 기구개혁(40개 국무원 기구를 29개로 축소 조정)과 정부 인원의 대폭 축소를 들 수 있다.
셋째, 깨끗한 정치구현의 일환으로, 1998년 7월에 중공중앙은 인민해방군 · 무장경찰 · 사법기관에 대해 일률적으로 일체의 영리 활동을 금지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는 체제 내부의 정치 부패를 근절하는 데 있어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가령 ‘천시통(陳希同)’ 사건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치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강택민의 강력한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넷째, 기층 민주건설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촌민자치와 진장(鎭長) 직접선거가 그 대표적인 예로, 정치개혁과 민주화의 시금석이 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중공 제15차 당 대회의 개혁적 흐름을 타고 당시 중국 사회과학원 부원장이던 리우지(劉吉)를 중심으로 한 중국 사회과학원의 翁傑明․張西明․曲克敏은『與總書記談心』(1996)에서, 許明은『關鍵時刻』(1997)을 통해 강택민의 개혁 지향적인 비전과 이미지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두 책의 집필자들은 강택민을 ‘헌신적 맑스주의자’라기 보다는 ‘중도적 입장에 선 개혁 지향적 실용주의자’, ‘개인주의자’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신 사회주의 전망’속에 서구적 가치나 개인주의 그리고 중국의 전통 문화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쉬밍은 아예 “우리는 일체의 극단주의와 맞서야 하는데, 이런 양극단의 좌파나 우파는 중국에 재앙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는 대담한 경고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남해 내부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이런 개혁 바람을 타고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글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는 보수 좌파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예를 들면, 『交鋒-當代中國三次思想解放實錄』, 『現代化 陷穽』, 『政治中國』, 『中國政治體制改革縱橫談』, 『中國政治體制改革問題報告』등과 같은 개혁 지향적 글들이 베스트셀러로서 서점가를 휩쓸면서 사회 여론을 주도했는데, 그 중 정치개혁의 맥락에서 볼 때 주목할 만한 책은『政治中國』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이 새로운 체제를 선택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제 ‘유한정부’와 같은 주제도 대담하게 정치개혁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필자 중 한 사람인 리우쥔닝은 “시민의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는, 그리고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지 않고서는 시장경제란 단지 허공에 뜬 파이일 수밖에 없기에, ‘헌정’은 ‘한정’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과감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이런 정치개혁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중국관련 유력 해외 영자지인 Far Eastern Economic Review는 강택민을 표지면 특집기사로 다룬 바 있다. 이 글은 당시 강택민의 개혁적인 면과 보수적인 면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지만, 개혁적 이미지를 한층 부각시키려는 내용이 많았다. 다른 한편, 이런 개혁파의 백화제방식사상 해방의 물결에 대해 등리췬을 중심으로 한 당내 보수파는 이 같은 강택민 총서기에 대한 개혁적 이미지가 인민들을 현혹시킨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1998년에 이르러 당내 이데올로기 갈등이 한층 더 두드러지자 중공 중앙선전부는 ‘논쟁을 중지하자(不爭論)'라는 원칙아래 당내 사상 투쟁을 자제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강택민의 이런 개혁 지향적 드라이브의 사회 정치적 배경과 정치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강택민․주롱지는 중국 경제가 효율적이고도 합리적으로 구조조정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 외적 분야에서의 변화가 요구되며, 특히 법에서 정치 영역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변화가 동시에 수반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런 인식의 변화를 촉발시킨 구체적인 일례로 인도네시아 경제위기를 들 수 있다. 중국 내부 정책분석가들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정치위기는 결국 법이나 정치 영역에서의 개혁이 없는 상황에서 단지 경제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35년간의 경제 발전의 노력이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국가 위기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중국 영도층도, 이제 경제 자유화․시장화를 하면서도 정치 영역에서는 여전히 낡은 정치체제를 유지하려다가 결국 심각한 결과를 맞이한 인도네시아 경험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중국도 경제개혁뿐만 아니라 법제개혁․정치개혁도 동시에 추진해야만 경제 발전과 정치․사회적 안정을 확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와 동시에 강택민 자신의 개혁 지향적 이미지 구축의 정치적 의도는 필자가 보기에, 향후 강택민이 명실상부한 제3의 카리스마적 정치지도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이런 합리적이고 개혁 지향적 조치, 즉 ‘백가쟁명․백화제방’을 통해 국민의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정치개혁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서는 듯한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강택민의 정치개혁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1998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다시 보수적인 강경 태도로 선회하게 되었다.
2) 강택민 정치개혁의 이중성과 모순
강택민의 정치적 태도와 이념은 일관되었다기보다는 다분히 개혁과 보수의 이미지를 동시에 드러내는 야누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간의 집권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 스타일로 비추어보면 그는 대단히 탄력적이고 실용적인 맑스주의자이다. 정책이나 치국방책 역시 마치 좌우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이 부단히 움직여 왔다. 때문에 강택민 정권은 ‘동요하는 모순적 정책’들 속에서 경제발전과 정치권력의 독점을 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1996년에 접어들면서 강택민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강정치(pay attention to politics)’론에 이어 ‘정신문명 건설’(精神文明建設) 캠페인을 통해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선전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강정치’론이나 ‘정신문명 건설’ 모두 당내 보수파의 구미에 맞는 이슈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층 더 재미나는 점은 ‘정신문명 건설’ 캠페인이 직접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정신문명의 교육에 일차적 목적이 있었지만 부차적으로는 인민들에게 중국 전통문화의 가치를 환기시키면서, 특히 공자사상을 사회주의에 접목시키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특색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현상은 강택민이 이 당시 상당히 개혁적 성향을 보이면서도 이와 모순적으로 동시에 보수적인 정책을 병행했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강택민의 정치 성향을 다분히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고, 좋게 보면 대단히 실용적이고 탄력적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5. 후진타오 시대
중국공산당이 당대회와 중앙위원회를 통해 순조롭게 지도부 교체를 이룸으로써 이제 중국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됐다.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에 이어 후진타오(胡錦濤)로 대표되는 공산당 제4세대가 추진해 나갈 대내외 정책과 그 결과는 중국의 장래뿐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질서 전반에도 막중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이번 지도부 세대교체는 우선 과거와 달리 별다른 이념투쟁이나 권력갈등의 표출없이 준비된 후계체제로 부드럽게 진행됐다는 점에서, 중국이 그 동안의 개혁개방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동에도 불구하고 확고한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이는 후진타오 체제가 장쩌민 시대와의 차별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개혁개방 노선의 계승과 지속적인 발전에 역점을 둘 것임을 시사한다 하겠다.
당대회에서 노동자․농민 외에 자영기업가와 지식인까지 공산당원으로서 포용하겠다는 이른바 3개 대표론을 당헌장에 공식 채택한 것도 앞으로의 중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해 나가면서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적 체제변화를 시도해 나갈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1) 후진타오 체제의 과제와 전망
⑴ 3세대의 유산 계승
덩샤오핑(鄧小平)이 생산력 발전을 위해 제시한먼저 부자가 돼라는 선부론(先富論)이 그의 후계자인 장쩌민(江澤民) 시대의 고민이었듯 이는 후진타오 시대에도 고스란히 짐이 되고 있다.부익부 빈익빈‘의 새로운 모순이 다른 욕구간의 충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1990년대이래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빈발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거나 소외된 지역과 계층이 증가하고 상대적 박탈감이 사회주의 이념과 제도를 퇴색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3세대가 연 평균 9.3%의 고도성장을 유지하면서 원바오(溫飽․먹고 입는 것이 해결됨)’ 수준을 달성,샤오캉(小康․일상생활에 걱정이 없으며 다소 여유가 있음)사회를 약속했지만 이를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악화된 응집력을 복구시켜야 한다.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 대책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말은 이제 고정화되었지만 중앙정부의 정책이 지방에서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파룬궁(法輪功)과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인권문제도 4세대가 짊어져야 할 또 다른 숙제이다. 외교면에서도 3세대가 9․11테러사건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신속히 회복시켰지만 언제 새로운 갈등 요소가 등장할지 모른다. 이는중국 위협론을 부추기고 있는 세력이 미국 내에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⑵ 3개 대표론에 따른 변화
3개 대표론은 공산당의 성격과 통치 방식을 이익의 다양화와 사상의 다원화에 대응․변화시켜 정치․사상적 공간과 변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논리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다당제 도입에 의한 공산당 일당 체제의 개혁이나 사회민주당으로의 전환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정치적 다원주의의 도입이 불가능한 현실적 조건 아래서 기존 공산당의 일당 체제를 유지해나가면서 사회분화에 따라 출현한 신흥계급과 집단을 공산당 내부로 흡수해가려는 것이다. 장주석이 2001년 8월 8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 16대 정치보고 등에서 여러 차례 서구 의회민주제나 다당제 및 삼권분립론에 입각한 정치개혁을 배격한 것에서 이를 읽을 수 있다. 따라서 4세대 시대는 3개 대표론을 당내 개혁과 기타 정치세력의 관계 강화를 이끄는 장치로 사용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전망된다. 당내 개혁은 △당의 최고지도자와 중앙위원회간의 제도적 견제 관계 수립 △중앙기구와 지방기구 간의 제도적 견제관계 수립 △당의 각급 조직과 당원간의 제도적 견제관계로 드러날 것이다. 공산당 외 기타 정치세력, 특히 민주당파의 공산당에 대한 견제기능도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파 인물들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중화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는 물론 정부의 행정분야에 상당수 진출해 있기 때문이다.
⑶ 정치개혁
중국이 옛 소련의빅뱅식 변화와는 달리선 경제개혁, 후 정치개혁이라는 점진적 변화를 택했지만 경제발전의 필연적 결과는 민주화 욕구에 따른 정치체제 개혁이다. 16대가 정치개혁과 관련, 사회주의 민주제도를 견지하고 완전하게 한다고 언급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4세대 지도부는 3세대와는 달리 이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16대가 끝난 15일 천안문사태 피해자와 가족 114명이 15일 중국공산당 16대 중앙위원회 앞으로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딩쯔린(丁子霖) 전 교수 등 이들은 사건조사위원회를 설치, 천안문사태에 대해 공정하고 독립적인 조사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또 전인대가6․4사건 피해자 배상법을 제정, 온갖 고통을 겪어온 피해자와 피해 가족에게 상응하는 배상을 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각 당 위원회 서기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야별 당위 설치, 당 기율검사위 권한 강화, 현(縣)급 이상 당대회를 매년 1년 이상 개최, 사법제도 개혁 등을 통해 권한을 분산하고 감독기능을 강조하는 것도 4세대 지도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또 농민들이 촌민선거 등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지만 아직도 중앙과 지방의 중요직 인사는 당과 정부의 임명과 내정에 따라 선정되는 것도 또 다른 불안 요소다.
Ⅱ. 중국의 통일정책과 전망
1. 중국 정부의 통일정책과 발전
⑴ 중국정부가 제기한평화 통일․일국 양제정책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이후, 중국정부의 대만에 대한 방침은 역사적으로 크게 군사 대치와 정치대항시기, 평화통일 일국 양제시기로 구분된다. 먼저 군사 대치와 정치 대항시기(1949-1978년 12월)에서는 군사적인 수단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방침아래 평화추구 정책이 보충되기도 한 시기이다.이 시기에서는 중국이 군사상의 긴장대치 국면에서 대만에 대한 무력 수단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5년 주은래 총리에 의해 평화적 방식의 통일 구상이 처음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평화 통일 일국양제 시기(1979년 1월-현재)에서는 1979년 1월에 전국 인민 대표회의 상무원에서 <대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평화적인 수단으로 통일을 추진할 것을 선포하고 협상을 통한 군사대치 해결과 삼통과 양안간의 정상적인 왕래를 건의한다. 이어 등소평은 일국양제 정책을 제기함으로써 중국정부의 대만에 대한 중대한 정책적 전환이 이루어진다. 일국양제란 하나의 국가에 대하여 두개의 제도의 존재, 즉 중국 대륙은 사회주의 제도를 유지하고 대만은 자본주의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다. 일국양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통일이 실현된후'대만은 특별 행정구가 되어 고도의 자치권을 향유하고 군대도 보유할 수 있으며, 대만의 현행 사회․경제제도, 생활방식은 불변하며 외국과의 경제․문화관계도 변하지 않는다. 개인의 재산․부동산․기업소유권․합법적인 상속권과 국외 투자도 침해받지 않는다. 사법권도 독립하여 최종 판결권도 북경에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제기는 대만 당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되어 1987년 7월 15일 대만․팽호지구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중국대륙에 대한 여론통제 및 양안간 민간 학술교류와 간접무역에 대한 제한도 점차 완화하게 되었다.
⑵ 현재의 양안 관계의 발전
각종의 양안 민간교류가 날로 활발해지고 있고 쌍방 경제무역 관계가 급속한 발전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간접, 단편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1987년 11월 국민당 당국은 3촌이내의 본토 친지 방문을 개방하고 이후에도 개방 범위를 확대하였다. 또한 과학 기술, 교육, 문화, 예술, 신문출판 및 학술교류등 많은 방면에서 밀접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본토를 방문한 대만인은 7백만 명에 가깝고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의 대만 방문도 5만여 명에 달한다. 최근 대만 당국은 중화 인민 공화국 인민의 대만 친지 방문 제한을 대폭 완화하기로 결정하여 중국 대륙의 부부급 이 경제무역 관리의 대만 방문 길을 열어 놓았다. 본토의 문예계, 신문계, 출판계 인사와 과학자, 운동 선수 등은 더욱 빈번히 대만을 방문하고 있으며, 문화교류는 양안 교류중 가장 활발한 분야이다.
⑶ 중국 정부 통일 정책의 새로운 발전
중국은 양안 정세의 변화와 양안관계발전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기존의 '일국양제'정책에 대한 선전과 강조를 강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건의를 제시하면서 통일 정책을 강화․발전시키고 있다. 중국은 1993년 8월 국무원 대만 사무 판공실과 신문 판공실에서「대만 문제와 중국의 통일」백서를 공동 발표하고,1995년 1월에는 강택민이조국 통일 대업의 완성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분투하자라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현단계의 양안 관계발전과 교류협력을 더욱 추진․보완하여 통일 정책을 앞당기고 있다. 이 담화에서는 통일에 대한 중국정부의 의지를 재천명 하였고 양안 회담문제에 관해 더 이상 국공 담판을 제기하지 않고 "양안의 각 당파․각계인사의 참가 및 중국 대륙 참관․방문을 환영함으로써 양안 간의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대만인의 주체적인 주장의 존중과 정당한 권익의 보장을 약속하였다. 또한 양안 경제 무역관계에서는 정치적인 의견대립으로 인한 경제협력의 간섭을 배제하고, 호혜 평등의 기초하에 대만 상인의 투자 권익을 보호하는 민간 협의를 협상하고 체결한다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2. 홍콩, 마카오의 반환 - 일국 양제에 의한 지배원칙
중국이 홍콩, 마카오에 대해 국가 주권을 행사하는 이후, 중화 인민공화국 내에서 대륙은 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하되, 홍콩․마카오의 현행 사회제도는 불변하며 자본주의 제도를 실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50년 동안 유지하고, 홍콩에 고도의 자치를 부여하며 홍콩인에 대한 통치를 인정하겠다는 약속이다. 일국양제의 구상은 대만문제에서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는데 먼저 홍콩과 마카오 문제의 해결에 운용되었다.
Ⅲ. 21세기 중국체제의 전망
세계의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중국이 2020~2030년경에는 경제규모면에서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지도부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고 당면한 장애점 -국민경제의 전체적인 질고 효율의 저하, 경제구조의 비합리와 모순, 특히 일부 국유기업의 활력 저하․부정부패․관료주의와 형식주의 심각성․지역간의 발전격차 심화․인구증가와 경제발전의 환경에 대한 負의 효과 등-을 극복하기 위한 발전전략으로써 체제의 안정과 개혁․개방의 심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중국지도자들은 1978년 12월 당 11대 3중전회 이후 지금까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안정과 주변정세의 안정 및 중국지도자들의 일관된 개혁․개방정책에 기인했다고 보고, 21세기에도 지금까지의 성취가 지속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대내외적 안정과 정책의 연속성이 필수적이라 믿고 있다. 그리하여 등소평 사후 처음으로 수정한 <당장>과 <헌법> 등에서는 ‘등소평이론’ -軟經濟, 硬政治- 을 명문화하고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재확인하였으며, 지도체제도 이에 맞춰 재편하였다. 따라서 향후 중국정치는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보증하기 위한 정치적 안정에 바탕을 둘 것이며, 대외관계는 수용과 협력의 관계로 진전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중국체제가 당면한 주요 문제는 한마디로 정치개혁이 경제개혁에 미치지 못한다는 모순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정치가 경제에 발맞춰 민주화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계속 공산당 1당 독재체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 특히 가장 우려하는 것은 경제적 자유의 증대가 정치변화에 대한 폭발적인 요구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체제가 급속도로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고 발전할 향후 10~20년간은 중국 정치체제의 변화에 가장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이미 이데올로기로서의 공산주의, 즉 무산계급자의 승리라는 붉은 이데올로기는 중국에서 회생불능 상태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집권당으로서의 일당국가체제는 일반적인 관측보다는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중국대륙에서 한 세기 동안 뿌리내려진 중국공산당과 경쟁할 수 있거나 공산당을 대체할 만한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세력의 부상은 현재로서는 상당히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좌’로의 복귀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1979년의 정치체제와 2000년의 정치체제 가운데 1979년 쪽을 택할 국민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중공 지도부 역시 ‘우파’도 경계하지만, ‘좌’로의 복귀를 더욱 엄중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10~20년 중국의 정치체제는 현 체제(공산당)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과 다원주의가 진행될 것이며, 그것도 ‘정치안정=경제발전’이라는 전제하에 개혁의 완급이 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들 역시 정치발전보다는 경제발전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고,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정치불안을 바라지 않고 있는 것이 대세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을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의 욕구분출의 정도에 따라, 직접선거의 범위를 확대하고 인민대표대회의 기능을 제고시키며, 군소정당의 역할을 조정해 가는 방향으로 추진될 것이다. 물론, 중국이 러시아처럼 해체, 분열될 것이라는 주장은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거나 붕괴될 여지가 조금도 없는 상황에서는 현실성이 없다.
요컨대,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의 미래는 다원화된 경제(軟經濟)를 일당체제(硬政治)가 어떻게 컨트롤해 나가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될 것이며, 그것은 21세기 초 10~20년 중국이 시험하고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결론】
이상으로 중국의 정치적 변화 과정을 사회주의 탄생 및 다인물 시기에서부터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그리고 현재의 후진타오 시기에 이르기까지 당시대의 정치적 중심인물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는 ‘인치’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사회의 정치적 특성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중국은 현재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표명하고 있으나 등소평의 경제 개방ㆍ개혁정책 이후 자본주의가 서서히 침투함에 따라 사회적 상황이나 정치적 상황이 변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수많은 학자나 정치가들은 앞으로의 중국의 체제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그 의견을 달리하여 전망을 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적인 개방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경제적 측면을 보완하여 더욱 확실한 새로운 중국식의 사회주의를 만든다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적인 견해를 지닌 관점, 혹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워낙 큰 나라이기 때문에 현재 세계의 민주주의 헤게모니 현상에 연연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관점 그리고 현재까지의 변화 과정이나 추이를 전제로 앞으로 중국 역시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물론 아직 중국에는 민주주의가 시기상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래에도 똑같이 그 전망이 어둡다고 볼 필요는 없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이론과 현실간의 괴리도 넘을 수 없을 만큼 큰 것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은 경제 개방과 함께 많은 자본주의적 요소가 사회 내에 침투하고 있다. 이는 정치체제를 민주화로 변모시키는 사회, 경제적 발전이 큰 밑거름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생활수준이 상당히 향상되면 사회에 더 많은 자유와 선택이 주어진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중국은 경제 개혁ㆍ개방 정책으로 인해 중국 대중들을 외부 세계에 노출시키게 됐다. 계속되는 중국 경제의 발전에 따른 중산 계층의 수적인 증가는 대중 참여 의지를 높일 것이다. 중산 계층과 민주적 엘리트들은 그들의 경제적 이익과 기본권의 옹호를 위해서라도 정치적 대의제와 참여를 요구할 것이다. 이것은 천안문 사건 이후로 시들해진 민주화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중국은 이처럼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면 일당체제인 현재의 정치 내부적 체제를 변형해야 하는 상황에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중국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확답은 시기 상조지만 어느 정도의 예측은 해 볼 수 있다. 중국은 매우 큰 나라이다. 이런 중국이 변해 가는 것은 즉, 세계적 추이가 변해 가는 것과 같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할 일은 이렇듯 변해 가는 중국의 형태를 관심 있게 살피고 그에 따른 우리나라의 위상을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참조>
21세기 중국의 선택/ 김정계 저/ 평민사/ 2000년
한권으로 이해하는 중국/ 강준영․전병곤․지세화 저/ 지영사/ 1997년
중국정치론/ 김정계․ 정치근 저/ 평민사/ 1995년
중국정치사상입문/ 장현근 저/ 지영사/ 199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