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도 하반기에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 운동장은 인조잔디가 깔리기 전이었고 매주 토요일 오전 9시가 정해진 연습시간이었다. 선수 수급이 어려웠던 우리는 11명을 채우기 조차 쉽지 않았고 그 시간 운동장에는 다른 팀과는 교류가 적었던 한 종교동아리만 자주 모습을 보였다. 우리 매쓰11의 몇몇 선수는 그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심했고 당연히 그들과 친해질 수 없었다. 종교보다 그들의 축구 교류에 대한 폐쇄성과 운동장 사용에 있어서 다른 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함을 자주 지적했던 한 선수는 그로인해 ‘크리스찬 피하리’라는 축명(전 세계 유명 축구선수들의 이름을 흉내 내어 붙인 별명)을 얻었다. 물론 그 팀과 간혹 경기도 했고 경찰까지 출동하는 웃지 못 할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획기적인 사건은 그들과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해 가을 스스로를 1대 기록관이라 칭했던 한 선수가 매쓰11의 활성화와 선수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벌금제도와 포인트제를 도입하였다(물론 앞에서 언급됐던 축명도 그가 만들었다). 이는 놀랍게도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벌금제도는 토요일 오전 9시부터 10분 단위로 벌금을 정해놓고 도착한 시간에 따라 해당하는 벌금을 내도록 한 것이다.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우리네 학생들에게 심리적 압박이 가해졌고 선수들은 대체로 부지런해졌다. 간혹 벌금을 내지 않으려고 버티는 선수도 있었지만 매니저들이 미인계를 발휘하여(본인들의 주장이었고 이에 대해 나는 언급하지 않겠다) 수금이 원활히 이루어졌고 매쓰 회비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포인트제는 매 경기마다 경기상황에 따라 선수들에게 포인트를 부여하는 것이다. 연습이나 경기에 출석한 시각에 따라 출석포인트를, 경기에 승리할 경우 또는 승리하는 팀에게 승리포인트를, 골이나 도움을 기록한 선수에게 공격포인트를, MVP를 뽑아 수훈포인트를 각각 달리하여 점수를 매겼다. 물론 공식경기인 장산곶매기와 전농체전을 A매치, 다른 팀과의 친선경기를 B매치, 자체경기를 C매치 그리고 작은 골대경기를 S매치로 하여 차등을 두기도 했다. 포인트제 또한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특히 별다른 동기부여가 되지 않던 S매치의 경우 선수들이 경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자신의 골과 도움에 더욱 기뻐했으며 자신의 포인트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물론 작은 골대에서의 자책골 해트트릭 같이 본인들은 잊고 싶어 했던 기억들도 지금에 와서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기록관의 목적은 단순히 벌금을 걷거나 점수를 매겨 반짝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기록관이라 칭했고 따라서 그의 최종 목표는 언제나 기록이었다. 그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기억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록지를 만들었고 매쓰의 역사를 남기는 데 성공했다. 벌금도 포인트도 어차피 기록지에 남겨질 일부 항목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기록관은 반은 해냈고 반은 실패했다. 2001년 가을에 치렀던 경기들을 영원히 남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때뿐이었다. 2002년까지 기록관을 유지했지만 그 해의 기록이 거의 남지 않은 점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우선 벌금제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2년 봄 어느 토요일 기록관은 9시 연습에 맞추기 위해 열심히 뛰어 교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시계는 8시 58분을 넘어섰고 벌금규정상 과방 도착시간이 선수들의 출석 시간이었다. 기록관은 전농관 앞에서 여유 있게 걸어가고 있는 동기 ‘피하리 엄니’(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해서 피하리 선수가 ‘어머님’하고 자주 놀렸다)와 후배 한명을 지나치며 뛰지 않으면 늦을 거라 충고했다. 결국 기록관은 8시 59분 40초 정도에 간신히 도착했고 벌금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9시 00분 40초쯤에 아까 그 두 명의 선수들이 도착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기록관은 9시가 넘었으므로 벌금 대상자라고 했고 두 명의 선수는 9시 00분대이니까 벌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기록관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고 마침 자리에 있던 당시 주장에게 벌금을 걷으라고 요청했다(기록관의 생각으로는 요청이었지만 주장이 받아들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 순간 주장은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대립하고 있던 세 명의 선수가 모두 주장보다 선배였으며 약간은 소심한 주장의 성격상 어느 누구의 편을 들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주장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갓 복학한 주장은 기록관과 피하리 엄니 선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선배를 매우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이 너무나 짜증났다고(속으로는 욕이 나왔다고) 진술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상황이 결국 벌금제도의 폐지를 결정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원칙에 따라야 할 것이며 개인적 이익이나 사소한 정에 휘둘리기 보다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아무튼 벌금제도야 어차피 돈이 걸린 문제라 예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벌금제도가 사라진다 해도 기록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 기록관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상상 이상이었다. 먼 훗날 기록관의 얘기에 따르면 그는 당시 자신과 반대편에 섰던 피하리 엄니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친한 친구이기도 했고 또한 9시 00분 40초도 9시라고 우기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재미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견을 어느 정도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이면 융통성 있게 넘어가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동기 뒤에 숨어서 조용히 빠져나가려하는 후배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아 기분이 몹시 상했다고 한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선배들이 서로 다툰다 해도 엄연히 주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 팀의 규정을 확실히 하고 팀원 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한 주장의 소극적인 모습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어쨋든 그 일 때문에 어느 정도 흥미를 잃은 기록관은 개인적인 사정까지 겹쳐 더 이상 기록관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그 때 좀 더 집중하여 기록에 대한 관심이 결실을 맺었다면 2000년대 매쓰11의 모든 역사를 지금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기록관은 팀의 역사도 잃었지만 더욱 불행하게도 자신의 은퇴 경기마저도 흐릿한 기억밖에 남기지 못했다. 물론 후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최근 지라시 기자는 운 좋게도 1대 기록관을 만나 당시 사용했던 기록지를 살펴볼 수 있었고 이를 수정 보완한 최신 기록지를 얻을 수 있었다. 기록지는 <출석일지>, <경기일지(A)>, <경기일지(B)>, <골기록지>, <포인트 현황>, <심판기록카드>, <작전판> 이상 7가지가 있다. 각각의 양식과 사용방법은 첨부한 파일을 참조하면 된다. 어쨌든 기록관은 매쓰11이 만들어갈 새로운 역사가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원하고, 자신의 기록지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며 선뜻 기록지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큼 기록에 애착을 갖는 선수는 아마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기록지를 거의 활용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부디 그를 뛰어넘는 기록관이 등장해서 그의 슬픈 예상이 빗나가기를 희망한다. 물론 사용여부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매쓰경기일지(2014년판)_v1.2.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