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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루에 대하여
희경루라는 누정은 우리 고장에 있었던 공북루라는 누정이 퇴락하여 조선조 문종 원년에 중수한 누정인데 조선조 성종12년 1481년 간행되어 중종 25년 1530년에 증보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光山縣條에 본말이 자세히 나와 있다. 지금 비록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당시 누정의 위치에 대하여도 충장로의 광주우체국 부근을 비롯하여 이설이 분분하며 누정의 기문 내용이 저자 보한재 신숙주의 문집에 실린 글과 일부가 다르고 어촌 심언광의 또 다른 희경루기가 있어 앞서 보한재가 기문한 희경루는 1451년에 세워져 153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뒤 1534년에 중수되어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누정의 제영에 차운한 글이 여러 문집에 보이지만 시기적으로 임란이후 次韻 시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근래 광주시에서 광주향교 천변 부근방향에 시유지를 정리하여 두고 일설에 의하면 후일에 희경루를 복원하리라 하는 풍문도 있어서 관계자들이 공북루 - 희경루(1533 소실) - 중건된 희경루 관계를 올바로 인식하여야 할 것 같아 , 독자 여러분의 질정을 기다리며 원저자의 희경루기를 역문하여 아래에 싣는다,
1) 보한재 신숙주의 희경루기
喜慶樓記 保閑齋集卷第十四 記 (보한재집 권 14 기)
“광산은 전라도의 거읍(巨邑)이다. 옛날에는 누각(樓閣)이 이 고을 치소(治所)의 북쪽에 있었는데, 이름을 공북루(拱北樓)라 했었으나 허물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번에 태수 죽산(竹山) 안철석(安哲石)이 부임하여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정사를 다스리는 바쁜 가운데 틈을 내어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고을에 유람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사실이오. 더욱이 광산은 이 도의 요충지로 사객(使客)이 벌모이듯 하는데, 막히고 답답하고 깊고 가려져서 시원하게 해 줄 길이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모든 부로들이 말하기를, ‘높고 밝고 시원스러운 땅으로는 공북루의 옛터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재목을 모아다가 집을 짓되 옛 건물보다 더 크게 지었는데, 몇 달이 안 되어 완성되었다. 그 칸수를 세어 보면 남북이 5칸이고, 동서가 4칸이니, 넓고 훌륭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이었다. 동쪽으로는 큰 길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긴 대밭을 굽어 보며, 북쪽에는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동쪽에는 사장(射場)을 만들어 덕을 보[歡德]는 장소로 삼으니, 손님과 주인이 이제야 비로소 올라 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이는 태수의 뜻을 고을의 백성들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경술년(庚戌年)에 이 고을 사람 중에 미련한 자가 있어 강등되어 무진군(茂珍郡)이 되었다. 사건은 애매한 데서 생겨서 위로 산천 귀신으로부터 아래로 향곡(鄕曲)의 노소에 이르기까지 모두 억울함을 참고 말하지 못한 지가 1년이 넘었는데, 지금 임금 원년 신미년 여름에 비로소 이 고을 사람(주 :신동국여지승람에는 필문 1인만 )
鄕人順城君。前中樞李公孟畛。田公興。右參贊安公崇善。吏曹判書權公孟孫。仁順府尹金公聽。前同知中樞院事柳公孟聞。藝文提學李公先齊等謀日.
이선제(李先齊) 등이 꾀하여 말하기를, ‘상감께서 대통을 이어 등극하사 유신(維新)의 은택을 베푸시는데, 하나라도 알맞은 자리를 얻지 못할까 염려하시거든, 하물며 우리 주의 오래도록 억울한 것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고을의 부로와 관리들을 이끌고 함께 상소를 올려 간청했다. 그리하여 상감께서 특별히 옛 칭호로 회복하도록 명하시어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고 마침 이 누각마저 낙성되자, 부로들은 모두 모여 태수에게 치하를 드리고 희경루라 이름을 짓자고 요청하니, 이는 고을 모든 사람의 기쁜 경사를 뜻하는 것이다. 태수가 좋다고 하고 또 이 신숙주가 이 고을 사람이라 하여 나에게 기문 지을 것을 명했다.
대저 물건이 성취되고 허물어짐에는 운수가 있고 일이 흥하고 폐함에도 때가 있으나, 그 물건과 일에 있어서 시기와 운수가 물건에 합치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광주는 백제 때는 무진주 도독부(武珍州都督府)가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무주(武州)가 되었으며, 고려 태조 때는 광주로 고쳐졌고, 성종 때에는 해양현(海陽縣)이 되었다가 고종 때 다시 광주로 승격되었고, 충선왕 때에는 화평부(化平府)가 되었으며 공민왕 때 다시 광주목이 되었다. 이조 때 와서도 강등되었다가 또 승격되었다. 한번 승격되고 한번 강등되어 흥하고 폐하는 것이 잇달았는데, 역시 각기 그 때가 있었다. 하물며 이 누각을 지음에 있어서도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다가 기공하여 낙성하였으니, 그 시기와 만남이 반드시 운수가 있었던 것이다. 광주는 무등산으로 진산을 삼았으니, 이 산은 남방의 거악(巨嶽)으로 정기를 모으고 길상(吉祥)을 내려 우리의 모든 위인을 낳았고 또 우리의 어진 태수를 얻었으니, 오늘에 이르러 폐했던 것이 흥하고 허물어졌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 어찌 한갓 이 누각뿐이겠는가.” 하였다.
[原文]
光·全羅巨邑也 舊有樓在州治之北 曰拱北 毀已久 今太守竹山安公哲石 蒞州未踰年 政成事多暇 集州之父老而問之曰 邑之不可無遊觀之所 古也 州當一道之衝 使客蜂午 而湮鬱幽蔽 無以宣暢 將何以圖之 咸曰 高明爽塏 無過拱北舊址 於是鳩材經營 增益舊制 不數月而功告成 以間計者 南北五 東西四 宏敝壯麗 甲於東方 東臨大路 西俯脩篁 鑿池其北 種以芰荷 又作射場於東 以爲觀德之所 賓主始有登臨休息之樂 此太守之志 而邑人成之也
歲庚戌 以邑人有不慧者 降爲茂珍郡 事出曖昧 上而山川鬼神 下有鄕曲老幼 抱屈莫能白者有年 上之元年辛未夏
鄕人順城君 前中樞李公孟畛 田公興 右參贊安公崇善 吏曹判書權公孟孫 仁順府尹金公聽 前同知中樞院事柳公孟聞 藝文提學李公先齊等謀日 上嗣登太寶 誕布維新之澤 猶恐一物有不獲其所 況吾州之久屈乎 遂帥州父老人吏 具列上請
上特命復其舊號 爲光州牧 報至而樓適成 父老咸集 致慶于太守 而請以喜慶名樓 以志一州人之喜慶 太守曰諾 又以叔舟在鄕籍之末 命爲之記 夫物之成毀有數 事之興廢有時 若其事與物期 數與時會者 有非人力之所及也 州在百濟 爲武珍州都督府 入新羅爲武州 高麗太祖改爲光州 成宗降爲海陽縣 高宗復陞爲州 忠宣王朝 爲化平府 恭愍王復爲光州牧 至我朝 降而又陞 一陞一降 興廢相因 而亦莫不各有其時 況斯樓之作 起於久毀之餘 而其成也若與期而會者 其必有數存乎其間矣 州以無等爲鎭 是爲南州巨嶽 儲精降祥 生我諸公 又得我賢太守 以有今日 其因廢而興 因毀而成者 豈特一樓也而已哉 一州也而已哉
景泰二年辛未冬十又二月 中直大夫 集賢殿直提學, 知製敎,
世子右輔德兼春秋館記注官,知承文院事 高陽申叔舟泛翁 記
◎ 관련 인물
1. 순성군(順城君) : 양녕대군의 아들 이개를 말한데 양녕의 장인 김한로(광산김씨로 충장공 김덕령의 선대임 )로 광산에 외가의 연고가 있다.
2. 전흥에 대하여
1376년(고려 우왕 2)∼1457년(세조 3). 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남양전씨(南陽田氏)의 시조인 전주(田柱)이다. 전주는 고려 왕족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의 아들로 본래 이름은 왕강(王康)이었으나 조선의 개국으로 전 왕조의 왕족이었던 까닭으로 관노로 유배되었고, 왕씨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라는 왕명을 좇아 전(田)씨가 되었다. 전흥은 태종의 처족인 곽추(郭樞)의 노비와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구사를 지내다가 태종 이방원(李芳遠)의 이서(吏胥)로서 1,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성과 이름을 받고 정사좌명원종공신(定社佐命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대호군, 상호군, 의금부제조, 총제(摠制)를 역임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선덕(宣德) 9년 10월에 정조사(正朝使)로서 북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82세로 졸하였고, 경호(敬胡)라는 시호를 받았다. 경(敬)은 일찍 일어나서 공손히 섬긴다는 뜻이고, 호(胡)는 나이 많도록 장수(長壽)한다는 의미이다. 아들이 다섯인데 전가생(田稼生)과 전조생(田稠生)이 1434년(세종 16) 갑인(甲寅)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 2위와 3위로 나란히 급제하였고, 그 외 전수생(田穗生)·전동생(田秱生)이 있다.
1455년(단종 3)에는 나이가 많은 전임 관리의 자손 중에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을 가자(加資)하여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전흥도 전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대상으로 거론되었다.
3. 이맹진(李孟畛)에 대하여
1374년(공민왕 23)∼1456년(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청허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손자이며, 문양공(文襄公) 이종덕(李鐘德)과 정경부인(貞敬婦人) 진주유씨(晋州柳氏)의 아들이다. 지군사(知郡事) 무송윤씨(茂松尹氏) 윤충보(尹忠補)의 딸과 혼인하여 이연기(李衍基)·이유기(李裕基)·이보기(李保基)·이순기(李順基) 네 아들을 두었다.
음직으로 벼슬길에 올라 1410년(태종 10) 좌랑(佐郞)을, 1414년에는 지평(持平)을 지냈다. 1430년(세종 12) 호조참판(戶曹參判), 이듬해에는 경창부윤(慶昌府尹), 1432년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이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하였으며, 1433년에는 진헌사(進獻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439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호조참판, 144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444년 제주도 부근의 섬이 몇인지 조사하여, 보고하고 소산물을 바쳤다. 이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뒤 1445년에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었고, 1448년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1455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노쇠해졌음을 이유로 직책을 사양하였다.
1456년(세조 2) 사육신의 난에서 육촌형인 백옥헌(白玉軒) 이개(李塏)와 뜻을 같이 했던 차남 도총진무(都摠鎭撫) 이유기가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일가족이 노비로 전락하게 되었다.
세조의 특명으로 이맹진는 부자연좌죄(父子緣坐罪)에서 풀려나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으나 아들과 손자의 죽음과 며느리와 딸들이 노비로 전락하게 된 충격으로 이 해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태보(太保)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4. 안숭선(安崇善)에 대하여
1392년(태조 1)∼1452년(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
고조부는 고려 말기의 학자로서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한 축(軸), 증조부는 판문하부사를 역임한 종원(宗源), 할아버지는 선의 개국공신에 오른 경공(景恭), 아버지는 판중추원사를 지낸 순(純)이다. 부인은 송씨(宋氏)로 판전농시사 천우(千祐)의 딸이다.
그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5년에 음보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으며, 1418년에는 사헌감찰에 이르렀다.
1420년(세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조전랑으로 전보되었으며, 1426년 장령이 되었다. 이때 사헌부에서 예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수차에 걸쳐 탄핵하였는데 그가 앞장을 섰다.
이 일로 세종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으며 곧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고, 1429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여 함녕군(諴寧君) 인(裀: 세종의 동생으로 처음 받은 봉군호는 景寧君)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사행은 명나라가 요구한 금은(金銀)의 양이 과다하여 이를 감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에 귀국하자 그는 곧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되었고, 1433년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그 뒤 1437년 3월 대사헌으로 승진될 때까지 승지로 있었다.
1433년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 이로 인하여 세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뒤 그는 조정의 인사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승지의 법제외적 권한이 인사행정에 크게 작용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은 자연히 안숭선 개인에게 집중되었으며, 나아가 승지의 인사행정과 관계되는 업무를 규제하려는 방향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결국 1437년 3월에 안숭선은 대사헌으로 전보되고, 5개월 후에는 승지들의 전주권(銓注權)을 크게 제약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1443년에 형조판서, 1444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집현전대제학, 1445년에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에는 병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이때 정실인사가 문제되어 진천현에 부처되었다가 풀려나왔다.
1450년(문종 즉위)에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근재집(謹齋集)》에 부록으로 유고가 전한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5. 권맹손(權孟孫)에 대하여
1390년(공양왕 2)∼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예천.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목사 상(詳)의 아들이다.
1408년(태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역시 을과로 급제하였다. 검열로 벼슬을 시작하여 1418년(태종 18) 헌납이 되었다.
1419년 병조정랑으로 경차관(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장(諸將)과 발선(發船)을 감독하였다. 이어 1421년 장령이 되고, 이듬해에는 강원도와 평안도에 기근이 들어 굶어죽는 자가 많이 생기자 의정부사인으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어 그들을 구휼하였다.
1425년 강원도찰방으로 나갔으며 1430년에 우사간, 이듬해 동부대언(同副代言), 1434년 좌승지, 1437년 형조참의, 1441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한성부윤·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특히, 세종 때에는 아악 정리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음악가 박연(朴堧)의 의견을 따라 세종의 악장사업에 적극 협력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이조판서로서 의창제도의 근본적인 모순과 운영의 불합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한편, 관리들의 부정·부패·비리를 엄격하게 척결, 추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뒤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6. 유맹문
본관 문화(文化) 거주지 미상(未詳)
전력 생원(生員) 품계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예조참판(禮曹參判)
[부] 성명 : 유관(柳寬) [조부] 성명 : 유안택(柳安澤)
[외조부]
성명 : 안▣▣(安▣▣) [처부]성명 : 홍기(洪璣)
7. 김공청: 불명
2. 어촌 심언광의 희경루기
( 원문 번역 동양문헌학회 최수현)
남녁에서 가장 높은 산은 무등산이다. 그 무등산 주위에 무려 수십개의 고을이 있는데 그 중에서 광주는 가장 큰 고을이다. 고을 이름을 광주라고 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고려사에서 “광주는 전라도의 가장 큰 고을이라”고 하였으며 이집의 시에 “광주는 강대한 지방관서라”고 말한 바와 같이 광주는 토지가 넓고 인구가 많으며 물산이 풍부하여 나주와 전주에 내리지 않는 고을이다.
중앙관서의 관리가 모두 광주를 거쳐 가니 광주는 진실로 전라도의 요충지이다.
이 고을의 북쪽 에 예부터 공북루라는 누정이 있었는데 우래되어 무너졌기로 휴식할 공간이 없었다.
1451년 조선조 문종원년에 고을 현감 안철석이 “공북루의 옛터에 누정을 중건하여 희경루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에 앞서 1430년 세종 12년에 “이 고을의 어리석은 주민 한 사람이 목사를 구타하는 사건이 있었기에 그 벌로 고을을 강등하여 무진현이 되었더니 그 뒤 20여년이 지나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되었는데 그 승격을 알리는 문서가 그 시기에 도착하여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서로 경사스러워 하였기로 그 기뻐하고 경사스러워하는 뜻을 길이 기리기 위하여 누정의 이름을 희경루라고 하였다.“ 한다.
1531년 중종년 가을 신한 申澣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정사를 엄정히 하고 청백하게 하더니 2년을 지나 1533년에 희경루가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목사와 주민이 희경루를 중건하고자 제목을 강진고을의 완도에서 구하였으나 수송에 어려움이 있더니 주민들이 가진 곡식과 옷감을 출연하여 그 대가로 수송을 마쳤습니다.
1534년 중종년 봄에 형편에 맞게 공사를 벌렸는데 사전에 계획이 세밀하였으며 공사를 독려하지 않으니 공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피곤하지 않으면서 공사가 순조롭게 추진되더니 몇 달이 아니 되어 완공이 되었다.
높이가 여러 발이로되 특이하게 만들었으며 누정의 앞과 뒤가 전보다 더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고, 낮은 곳은 높이고 좁은 곳은 넖혔는가 하면, 뜰을 평평하게 하고 담장을 둘러쌓고 계단을 단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뚝 솟는 듯 걸연한 구조는 예보다 더 장중하고 소통함과 넓게 펼쳐지는 것이 마치 책갈피의 티끌이 공중에 나르듯 할 뿐 만 아니라 그 경관의 아름다움이 마치 앞서의 쇠약하였다가 다시 일어나고 ,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며, 먼 곳이 가까운 듯하며 산 모양과 물 빛이 아침에 빛나고 저녁에 그늘지며 사계의 변화와 만상의 아름다움 등 무릇 한 고을의 풍광을 가히 앉아서 볼 수가 있었다.
누정은 이미 새로워지고 더하여 단청이 아름다우니 만인이 보는 눈이 경이롭고 놀라워하며, 관리는 관청에서 경하하고 선비는 향교에서 기리며, 주민들은 들에서 노래하면서 모두 함께 그 누정의 완공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목사의 어진 것을 칭송하여 마지않으니 어찌 다만 이 광주 고을의 옛 이름을 되찾는데 그치겠는가? 더하여 목사의 어진 것을 기뻐하고 모두가 경하하는 것이다. 광주는 고려 태조때 부터 처음으로 광주라 이름 하였고, 그 뒤에 승격되어 익주翼州라 하였다가 다시 무진주라 하였으며 다시 강등하여 해양현이 되었더니 다시 화평부라고 하고, 고려 말에 다시 광주로 복구하였다. 1430녀에 다시 강등되어 무진군이 되고 1451년 문종원년에 광주목으로 복구하였다가 1489년 성종 22년에 이 고을 판관이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에 맞았기로 또 다시 강등하여 광산현이 되었으며 1501년 연산7년에 다시 광주목으로 승격하였습니다.
위 아래로 수백 년 사이에 한번 승격되고 한번 강등하는 사이에 주민들의 애환과 고을의 성쇠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승격되면 고을이 발전하고 강등하면 고을이 쇠퇴하였던 것이다.
쇠약해지면 주민의 수치요 승격되면 주민이 기뻐하나 그 기쁨이 오래면 수치가 뒤따르고 수치가 오래가면 기쁨이 다시 왔던 것이다.
바야흐로 그 기쁨을 되찾는 시점에 이 누정을 완공하였으니 진실로 광주 고을의 기쁨과 경사였다. 그 기쁨과 경사로도 부족하여 이 누정을 희경루라 이름하여 후세에 전하더니 불행히 누정이 소실되었기로 다시 중수하여 희경루라는 이름을 길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양심을 장려하기 위하여 사회 풍속을 바꾸어야 함은 고금과 전·후를 막론하고 불변의 법도라는 것을 신목사가 부임하여 더욱 그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옛날에“권세에 따르다가 그 권세가 다하면 외면하던 세태를 바로 잡으려면 그 고을의 수령을 신칙하라” 하였듯이 이 고을에 부임한 목사로 하여금 주민에 사랑하고 과세를 지나치게 하지 않으며 황금을 곡식 보듯이 하고 말을 양 보듯이 하며, 개가 밤에 짓지 않아 도둑이 없어지고 양이 아침에 물을 먹지 않는 상식으로 수령이 목민관의 소임을 다 한 연후에야 비로소 희경루라고 이름한 그 취지에 부합할 것이며 또한 주민으로 하여금 기쁘고 경사스러움을 길이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신목사의 명성이 장차 이 희경루와 더불어 길이 전하리라 믿으며, 이미 덕성을 두루 갖춘 목사의 인품이 이 희경루와 함께 더욱 새로워 질 것이다. 신목사와 나는 같은 해 사마시에 합격 하였는데 그는 문충공 신숙주의 후손이다.
일찍이 광주사람 사헌부 집의 정만종으로부터 나에게 누정기를 청하기에 나는 원래 관동사람으로 평생에 호남을 가보지 못하였기에 호남의 강산과 누정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 없기에 진실로 그 기문을 지을 수 없으나 옛 한문공 퇴지의 등왕각기에 비유하여 내 이름을 희경루에 올려 놓는다면 영광이 될 것이므로 이같이 적노라.
1536년 8월 상순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심 언 광 씀.
[原文]
南紀之山 無等最高 邑于其下者 無慮數十 而其中最臣者 曰光 光之爲州 古也 高麗史稱全羅巨邑 李集詩 言南國雄藩 土地之廣 民物之殷 與羅,全二州相甲乙 使客之至 鋒午于此 實一道之衝也 州治之北 舊有樓 曰拱北 歲久頹圮 無觀遊之所 我文宗元年辛未 太守安公哲石 卽舊址而改搆 名曰喜慶 先是 世宗十二年 以州有頑民歐牧使 降爲茂珍郡 積二十餘年 至是 復舊號 爲光州牧 樓成而朝報至 邑人咸喜相慶 樓之得新扁以此 嘉靖辛卯秋 申侯瀚 出牧于茲 政尙嚴明 越二年癸巳 樓失火 侯與鄕大夫士 謀所以新之 乃得材於康津縣之莞島 出贏餘穀布 購募而輸之 至甲午春 量力制役 區畫頗詳 匪督匪程 俾民忘勞 未數月而功告成 高數丈有奇 體勢向背 因舊制而增損之 低者高之 狹者廣之 庭而夷平之 垣而周匝之 階而峻整之 嵬然傑搆 視舊益壯 疏夷暢達 若軼埃壒 而憑空虛者 其臨觀之美 則向之伏者起 隱者顯 遠者近 山容水色 朝輝夕陰 四時之變 萬像之佳 凡一州之勝 可坐而得也 樓旣新 丹雘又施 萬目改視 千夫駭矚 吏慶于官 士頌于庠 民歌于野 皆幸其功之成 而稱侯之賢 不置口 豈但爲茲邑之復舊號而已 亦邑人之喜賢侯而胥相慶也 州自高麗太祖時 始稱光 其後陞而爲翼州 爲茂珍州 降而爲海陽縣 爲化平府 麗季 復陞爲光州 我世宗十二年 降爲茂珍郡 文宗元年 復舊 成宗二十年 邑倅中流矢 又降爲光山縣 燕山七年 復爲州 上下數百年間 一陞一降 而民休戚 俗汚隆 蓋可想矣 陞爲邑之伸 降爲邑之屈 屈而爲民之羞 伸而爲民之喜 喜未久而羞還至 羞旣久而喜復來 方喜之來也 茲樓之作 適與之會 誠足爲一邑之喜慶 喜慶之不足 則又名樓以示後 不幸而樓焚 則必改舊 以壽其喜慶之名 蓋好善惡惡之心 移風易俗之方 古今前後同一揆 而至申侯益闡其猷矣 古有欲袪懷甎之俗 先勅其邑宰 要使官乎是者 勞於撫字 拙於徵科 金如粟 馬如羊 狗不夜吠 羊無晨飮 然後有以副名樓之意 而能使民喜且慶矣 吾知申侯之名 將與喜慶幷傳 而德之在人 亦與斯樓俱新矣 侯與予 司馬同年 高靈申文忠公叔舟之後 嘗因州人鄭執義萬鍾 請記於予 予關東人 平生足跡 一不涉於湖南 江山樓亭之勝 曾無登望之雅 固不堪敍述其事 竊譬韓昌黎記滕王閣 載名其上 有榮耀焉 是爲記
嘉靖丙申仲秋上浣 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沈彥光 記
▶ 심언광(沈彦光)에 대하여
1487년(성종 18)∼1540년(중종 3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사형(士烱), 호는 어촌(漁村). 예조좌랑 준(濬)의 아들이며, 찬성 언경(彦慶)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51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그 뒤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면서 문명을 날려, 지평·정언·장령·홍문관교리·집의 등의 청요직을 두루 지냈다. 언관을 역임하면서 국방문제의 중요성을 제기하였고,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하여 심정(沈貞)을 비롯한 권간들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1530년 대사간이 되어서는 형 언경과 함께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적극 주장, 실현시켰다. 그러나 김안로가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붕당을 조직하고 대옥(大獄)을 일으켜 사림들을 모해하자, 비로소 지난날 자신의 추천행위를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안로가 그의 외손녀를 동궁비로 삼으려 하자 이를 질책하니,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
1536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김안로의 비행을 비판하자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김안로와 그 일당이 축출되자, 우참찬에 올랐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大尹) 일파가 집권하면서 향배가 바르지 않다고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 하였다. 그 뒤 복관되었으며, 시(詩)·서(書)·화(畵)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 정만종(鄭萬鍾)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인보(仁甫), 호는 조계(棗溪). 윤적(允績)의 아들이다.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20년 경연기사관(經筵記事官)으로 사관의 올바른 임무수행을 건의하였다. 이어 사서·정언을 거쳐 경상도도사가 되었는데, 이때 6품에서 5품으로의 승진이 너무 빨랐다 하여 사헌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1527년 지평·문학을 역임한 뒤 헌납이 되어 정병(正兵)의 입역(立役) 과다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2년 후 능성현령으로 나가 직무를 태만히 한다 하여 치죄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집의 등 언관을 거치면서 행신(幸臣)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공격하기도 하고, 향촌교육의 내실화를 건의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폈다.
1536년부터 사간·응교·집의·전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뒤, 승정원우부승지·형조참판을 거쳤다.1539년 예조참판으로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좌윤·호조참판을 지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선치하였고, 곧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평안도의 양전(量田)을 순찰하기도 하였다. 이어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보임되었다가 1550년에 부총관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 등 7도 관찰사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그가 함경도 관찰사 재임 시 중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추천한 일로 유명하며 ,
그 일로 당시 동인 당로자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하였다.
해광 송제민 선생은 그의 사위가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