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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제10강 公冶長 篇 2
제5장 공야장 편(公冶長 編)
제11절
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棖也慾, 焉得剛.
자왈, 오미견강자. 혹대왈, 신정. 자왈, 정야욕, 언득강.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ㅇ 吾未見剛者. 나는 강한 사람을 못 봤다 하니까,
ㅇ 或對曰, 申棖. 어떤 사람이 대답해서 말하기를 신정이라는 사람이 참 강합니다. 성질이 강간하다 이런 뜻이었겠죠. 깐깐하다 이런 뜻이었겠죠. 안 고치고. 깐깐이 다른 의미였겠지만.
ㅇ 子曰, 棖也慾, 정이는 욕심이 많다. 焉得剛. 어찌 강해질 수 있겠느냐. 욕심이라는 게 뭐겠습니까. 욕심에 관련된 굉장히 중요한 정의 하나가 나오고 있는 셈이죠. 욕심이라는 것이 서로 나누면 어차피 있는 것 아닙니까. 나눔이 아니라 뺏으면 욕심 아닙니까. 자기가 지키지 못할 것을 자기가 지키려 하고, 나중에 비슷한 인물이 뒤에 미생고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누가 식혜를 빌리려 오니까 아 자기가 그렇게 의협심이 강한척하고 자기 집에 식혜가 떨어져 없으니까 옆집에 가서 빌려다 주거든요. 식혜는 물론 요즘에는 젓갈이죠. 요즘 번역하면 식혜인데 식혜가 원래 뜻이 젓갈이니까. 젓갈 없다고 젓갈 빌리려 오니까 자기 집에 젓갈 떨어졌으니까 ‘옆집에 가서 빌리세요’ 그러면 될 텐데 자기가 빌려다가 갖다 주는 거예요. 의협심이 강한 척하려고. 그건 강한 척하는 거죠. 그게 욕심이죠. 정이라는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여기서 하나됨의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까. 바로 앞에 나왔던 말이 상호조화니까. 그만큼 저 사람 할 몫까지 내가 하려는 거예요. 저 사람이 할 몫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괜찮은데요. 저 사람 할 몫을 내가 대신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강할 수가 없어요.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해서 이것과 관련해서 진짜 강한 것이 뭔가 하는 것을 자공으로부터 구하고 있습니다.
제12절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자공왈, 아불욕인지가저아야, 오역욕무가저인. 자왈, 사야, 비이소급야.
ㅇ 자공왈, 자공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我不欲人之加諸我也, 나는 ~하고 싶지 않다. 之자는 명사절을 만들어준다 했으니까요. 남이 나에게 무엇을 덧붙이는 것. 남이 나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뭔가 영향을 줘서 바꿔놓는 것.
ㅇ 그리고 吾亦欲無加諸人. 나 또한 남들에게 고침이 없게 하기를 원한다.
ㅇ 그랬더니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賜也, 이놈 자공아 非爾所及也.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네가 우주냐 이놈아. 그런 거죠. 좌충우돌하면서 그렇게 해나가도록 노력해라. 그런 이야기죠.
ㅇ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면에서 이 사람이 목표로 삼아야 되는 거죠. 근데 이것은 공자께서 어떻게 보면 맞는 말씀이고 어떻게 보면 틀린 말씀이기도 한데 왜 맞는 말씀이냐 그러면 자공이라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이런 욕심을 세워야죠. 내가 남에게 어떤 영향도 안주면서 나는 나로써 있고, 그는 그로써 잇고 그 또한 그로써 자연스럽게 있으면서 나랑 어울리면서도 불구하고 또 그는 그로써 있고 나는 나로써 있는 하나로 어울려 있고 하나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요 너는 너, 그런 걸 원하는 건 당연하죠.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그런데 과정을 뛰어넘고 가려고 그러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그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 자공의 목표가 이것이 되어버리면 자공은 다른 도반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거죠. 나는 나, 너는 너. 이러면 결국 先近后遠 이요. 까까운 것이 먼저라 했는데 가까운 것부터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고 먼 것부터 이루려고 하는 거죠. 이루어질 수가 없는 거죠. 아들 안 낳고 손자 낳는 것과 똑 같은 거죠. 손자야 양손을 들여오면 되겠지만 양아들이 없는데 양손자가 되겠습니까. 법적으로 안 되잖습니까. 심지어 그러듯이 이렇게 단계가 있다는 거죠. 하나됨에는 먼저 나눔의 단계가 있다는 거죠. 하나됨이라는 것은 하나가 완전히 어울려서 너 나의 구분도 없고 그런 너 나가 뚜렷이 있는 것이 하나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건 맞죠. 그러기 때문에 공자께서 그건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라 했지 틀렸다고 하지 않았죠. 분명히 맞는 것이고 근본적인 목적이지만 너는 현재 미칠 바가 아니다. 너는 현재 그렇게 하려고 하지 말고 나눔을 가지도록 해라. 자공아 아직은 우리가 멀었단다. 이런 얘기입니다.
ㅇ 여기서부터 조금 하나됨의 좀 더 높은 소위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이상학적으로 들어갑니다. 형이상학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만.
제13절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자공왈, 부자지문장, 가득이문야, 부자지언성여천도, 불가득이문야
ㅇ 子貢曰, 자공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선생님의 문체와 외양, 겉으로 드러난 말씀, 문장 등은 얻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뜻이니까 而자를 빼버리고 보시면 쉽습니다. 可得聞也니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근데 이것이 可得聞하니까 현재형인지 과거형인지 미래형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과거형이라는 것을 확실히 정해주기 위해서 접속사 而를 붙였습니다. 여기서 접속사 而의 기능은 강조의 기능이 아니라 과거형을 만들어주는 기능입니다. 중국 고대 한어가 시간개념이 불투명해가지고 과거형인지 현재형인지 미래형인지 참 모호할 때가 많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시적인 표현에는 더 적절했죠. 시에 너무 과거형이 나오고 미래형이 나오면 시가 재미없죠. 그러다 보니까 공간위주의 영상을 만드는 데는 훨씬 유리했죠.
ㅇ 夫子之言性與天道. 앞의 之자는 ~의 되겠지만 이때 之자는 뒤에 言이라는 동사가 나왔거든요. 따라서 이때 之자는 명사절을 만들어주는 거죠. 선생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냐 하면 性과 天道에 대해서 본성이 어떻다, 천성이 어떻다 하는 것에 대해서는,
ㅇ 不可得而聞也. 들을 수가 없었다. 자주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구절이 공자님께서 주로 어느 쪽으로 치중하셨는가, 생활면을 치중하셨는가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결국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생활의 문제를 그만큼 강조하셨다는 이야기죠. 실제로 나오는 구절들이 이미 여러 번 나왔지만 공자께서 性과 天道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던 건 아니거든요. 곧잘 말씀하시고 제사 관계 있을 때는 자주 또 말씀하셨고 또 뒤에 자주 말씀하시는데 굳이 자공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그리고 이 문장을 여기다 끼워놓은 것은 선생께서도 여하튼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실제 실천과 그런 앎에 기초하지 않는 그런 얘기는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하셨다. 제자들로 하여금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그 수준에 그 차원에 유도하는 것이 먼저였지 결코 그 차원 이상의 것을 가급적 끌어내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런 얘기죠.
ㅇ 또 요 문장 하나만 갖고 논리적으로 꿰 맞추기 시작하면 완전히 검찰 문장 돼버리죠. 문장 부분적인 것 하나 꺼내가지고 어거지로 뚜드려 맞춰가지고 사람 억울하게 만드는 것 있잖습니까. 아 공자는 성과 천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구나. 이렇게 되어버리죠. 말이라는 것이 그래서 쓰이기에 따라서 다른 건데.
제14절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자로유문, 미지능행, 유공유문
ㅇ 子路有聞, 자로께서 어떤 것을 들으시고, 뭔가 들으시고,
ㅇ 未之能行, 未能行之가 될 텐데, 之자가 목적어가 될 텐데 이것은 멋 좀 부리느라고 그랬습니다. 시적인 용어로 만들어가지고 왜 시적인 용어를 만드느냐 뒤에 있는 唯恐有聞하고 맞추려고 그랬습니다. 未能行之하면 어울리지 않아요. 우리는 그냥 느낌으로 알면 됩니다.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안 하셨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걸 맞추려고 한 것도 있지만 之자가 대목적어 이면서 대명사죠. 대명사일 경우에는 부정사와 동사의 중간에 끼일 수 있다. 그래서 시적인 역할을 맞췄죠. 결국 같은 얘기죠. 시적인 역할을 자꾸 강조하다 보니까 이렇게 끼우는 습관이 생겼고 끼우는 습관이 생기다 보니까 그것이 시적으로 보였던 거고, 미쳐 그것을 실천할 수 없을 적에.
ㅇ 唯恐有聞. 오로지 두려워하셨다. 뭐를 또 더 들을까 봐. 뭘 듣고 뭔지를 자기가 몸으로 알아보기 전에 또 뭔가 더 들을까 봐 겁내 했다. 자로란 사람의 성격을 알겠죠. 이런 사람은 주변에 상당한 부담을 많이 줘요. 여하튼 간에 여기서 자로가 하는 얘기가 나오지만 여기서부터는 자기 개인과 사회 사이의 또 다른 문제인데, 뭔가 행하기도 전에 새로운 것을 들을까 봐 겁냈다 했는데 앞에 하고 연결이 되는 거죠. 뭔가 그 수준에 있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 얘기를 들을까 봐 겁냈다는 얘기지. 예를 들어서 오늘 아침에 마당 쓸어라 했는데 마당도 쓸기 전에 벽 닦아라 는 얘기할까 봐 겁낸 것은 아니죠. 근데 자기가 동일한 수준에 있는 행동강목을 더 들을까 봐 겁낸 것은 아니죠. 뒤집어 말하면 실제로 자로가 좀 우둔한 사람이기도 했거든요. 아둔한 사람이고 용감한 사람이고 굉장히 정서적이고 그런 분이란 말이에요. 자로의 성격이 몇 번 드러났지만, 자로가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자공이나 그 다음 증자나 안회나 이런 사람에게 미치질 못했어요. 약간 뒤쳐져요. 재능에 있어서는. 근데 노력하는 데서는 더 열심히 하는데 하루 20시간씩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루 1시간씩 공부하는 사람보다 성적이 더 안 나오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렇다고 20시간씩 공부하는 사람이 잘못됐다고는 말할 수 없잖아요. 방법이 잘못됐든, 자세가 잘못됐든. 뒤집어보면 자로는 전체 속에서 따라가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뭔가 얘기를 들었는데 자기는 그것을 습득을 못했어요. 소화를 못했어요. 근데 다음 단계 진도 나가면 자기도 골치 아픈 거예요. 이 얘기는 그 얘기입니다. 전전긍긍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에도 어차피 공자님하고 그 제자들이 모여서 강을 했단 말이죠. 요즘 말로 하면 한 달 후에는 수준이 다른 얘기가 나온단 말이에요. 그때 자기는 앞서 얘기를 습득 못한 거예요. 그래서 뒤 얘기 못 따라가니까 겁이 나는 거죠. 그런 입장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전체성에 어울리려고 하는 것. 그렇게 애를 쓰는 것. 이건 어떤 면에서 보면 염유하고 너무나 다른 자세죠. 앞에서 평가했듯이 염유는 머리 잘 돌아가고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事爲之宰也라 했잖아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힘이 부족해서 못하겠다고 했잖아요. 이 자로는 머리도 나쁘면서 얼마나 열심히 합니까. 전체를 따라잡고 그 속에 자기 하나됨을 이루고 자기부정을 하려고 결국은 자기 부정의 과정이기도 하죠.
제15절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자공문왈, 공문자하이위지문야. 자왈,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문야.
ㅇ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孔文子는 위나라 대부인데 별로 인품이 안 좋은 사람이에요. 성질머리가 못됐고 썩 나쁜 사람도 아니고 평판이 엇갈리는 사람이에요. 객관적으로 엇갈리는 사람이에요. 성질머리는 못됐는데 열심히 사는 사람이에요. 근데 그 사람의 시호가(자공 때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文公 이거든요. 자공이 물어 말씀하시기를 공문자는 무슨 연고로 文이라 불리게 됐습니까. 문이라는 시호로 명칭을 정하게 됐습니까. 말도 안 되는 얘기 아닙니까 하는 얘기죠. 뭔가 괴팍하고 못된 사람인데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文公이라는 시호를 줄 수 있습니까 했더니,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공은 상대적으로 논리에 밝고 이런 분이기 때문에 文이란 것에 과대평가가 좀 있었던 거죠. 敏而好學, 부지런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不恥下問.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ㅇ 是以謂之文也. 그런 연고로 문이라고 부른 거다. 문이란 게 별거 아니다. 너는 문을 가지고 너무 전체로 넓히려고 하고 있다. 이런 거죠. 문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가죠. 사회에 있어서 개인과 문의 역할이죠. 문을 매개로 한 개인과 사회의 역할이죠. 이때 문이란 것은 學하고 좀 다르긴 하죠. 애써서 무엇이든지 열심히 배우고 아랫사람에 묻기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그렇지 않습니까. 문이란 것의 성격은 敏而好學하고 不恥下問하는 정도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오는 것은 문이란 것은 하나의 사람이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지 전체 뭔가를 이룬 완성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문이 완성된 모습이었다면 공문자는 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가 없었겠죠. 그런데 문이란 것은 민이호학하는 것도 하나의 모습이고 과정이고 불치하문하는 것도 모습, 과정이거든요. 자세거든요. 그런 자세, 모습, 과정을 일러서 문이다 하는 것이지 문이란 것 자체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그런 식으로 문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제16절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已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자위자산, 유군자지도사언, 기행이야공, 기사상야경, 기양민야혜, 기사민야의.
ㅇ 선생께서 자산을 평가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ㅇ 有君子之道四焉, 공도자의 길, 하늘사람의 길은 네 가지가 있느니라. 焉자가 있으니까 강하게 끊었죠. 단정적으로 끊었죠.
ㅇ 其行已也恭하고, 行己는 자기 자신을 닦는다는 뜻이겠죠. 자기자신의 처신을 닦는 거겠죠. 자기자신이 행동하는 것 이런 것이니까. 行己니까 목적으로 자기자신을 행동하는 것이니까 결국은 자기자신을 닦는 거죠. 자기자신을 대하고 자기자신을 닦는 것이 恭하고, 겸손하다 하는 것은 그만큼 되갚는 거죠. 열심히 공하고 효도의 개념하고 비슷한 것이니까요.
ㅇ 其事上也敬하고, 윗사람을 모시는데 있어서 敬하고 윗사람 얘기를 뭔가를 들으면 웃기지 마라 하고 흘려 보내거나 들은 척 만 척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서 싹을 틔우려고 애를 쓰고 윗사람은 따라서 시간적으로 윗사람일 가능성이 더 많죠. 물론 시공간 개념이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지만, 여기 내용상으로는 완전히 분리될 수 있겠지만 주로 아마 과거의 경우가 되겠죠. 과거의 이야기 즉, 옛사람의 이야기, 윗사람의 이야기를, 윗사람을 모심에 있어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뭘 하든 간에 늘 그 내용물을 싹 틔우려고 애를 쓰고,
ㅇ 其養民也惠, 백성들을 기르는데 있어서 자기 지역사회의 식구들이 民이라 그랬지 않습니까. 따라서 중요하게는 자기식구들이죠. 자기의 지역사회와 자기 가족과 거기에 소속된 소속인들을 구성원들을 키우는데 있어서 늘 은혜로우며, 나누어주며 은혜란 건 나누어주는 것이니까요. 나누어주되 마음으로 나누어주고.
ㅇ 其使民也義. 그 지역사회. 가족의 구성원들을 부림에 있어서는 항상 정의롭게 할 것이다. 올바른 판단기준에 따라서 할 것이다. 어떤 기준 없이 하지 않는다. 이것이 개인이 사회에 처하는 어떤 면에서 앞에 까지는 개인이 사회에 처할 때 개인과 사회의 개인과 집단 사이의 하나됨, 그리고 그 집단 사이의 하나됨을 넘어서서 마침내 하늘과 하나됨을 이야기하는 과정이었다면 말입니다. 제4장 里仁篇이 결국 사람과 하늘의 하나됨 아니었습니까. 제5장은 그런 과정상의 문제로써 하늘과 사람이 하나되는 과정상의 문제로써 사람이 먼저 가까운데 있는 지역사회, 가족 등과 국가 등과 하나되는 모습을 일렀고, 그 하나되는 것에 기본 틀 네 가지를 자산을 평가하면서 정의를 하신 거죠. 하나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적 덕목은 자기자신을 먼저 닦을 것, 그 다음 과거, 윗사람 이야기를 받아들이면서 늘 그것으로부터 싹을 틔우려고 애쓸 것, 아랫사람들에게는 늘 마음을 나눠주려고 할 것, 그리고 사람들을 부릴 때는 늘 정의로운 기준에 따라서 하려고 할 것. 그것만 딱 하면 君子之道四焉이 있다 그런 것 아닙니까. 자산이란 사람은 그 당시 벼슬하던 사람인데 평이 비교적 좋은 사람입니다. 벼슬길로 큰 성공은 못했는데요. 아주 높은 성공은 못했는데 그래도 조그마한 정나라를 이끌면서 아주 탄탄한 나라로 민심이 탄탄해서 ~를 불질러도 백성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던 사람이죠. 공자가 상당히 높이 평가한 사람입니다. 여하튼 이 정도의 길만 지킨다면 군자의 도는 된다. 그 다음 계속 개인과 사회의 하나됨의 도는 된다. 그 다음 계속 개인과 사회의 하나됨의 덕목들이 나옵니다.
제17절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자왈, 안평중선여인교, 구이경지.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앞에 하나됨을 말하는 구절은 주로 대화가 많이 나왔죠. 여기서는 선생님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晏平仲은 제나라 대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안영이라는 사람입니다. 소위 오얏 밭에 지나가다가 갓끈 매지 말고 또 오이 밭 지나가다가 신발 고쳐 매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 게 이 사람이죠. 대부로 상당히 인정받았던 사람입니다. 임금이 바뀌어도 그 임금한테 신뢰받고 사람들이 혁명이 일어나도 누구한테도 신뢰받고 쫓겨난 사람에게도 원망 받지 않고 그렇게 인간관계를 다졌던 사람이에요.
ㅇ 안영을 일러서 말씀하시기를 善與人交, 잘했다. 훌륭했다는 얘기죠. 남과 더불어서 사귀는데 남과 사귀는데 참 훌륭했다. 왜 훌륭했느냐, 그 내용이 판본에 따라서는 人久而敬之로 나오는데 틀린 거구요. 久而敬之의 주어가 안평중입니다. 안평중은 선여인교했고, 구이경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안평중이 선여인교했는데 선여인교한 근본적인 것은 안평중이 구이경지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어떤 사람과 만나서 그 사람 말한 것을 잘 갈무리해 놓았다가 싹을 틔우려고 애를 썼다는 얘기죠. 그 사람 말을 들으면 하나도 허투로 듣는 게 없죠. 정치인들이 많이 닮은 듯도 하죠. 알게 모르게 그런데, 그 사람 행실이나 말을 듣고 계속 갈무리해 놓았다가 싹을 틔우려고 애를 쓰고, 어떤 사람이 이번에 우리 집에 오얏 나무를 심었다 하니까 1년 후에 만나서는 그 오얏 나무 꽃 잘 피었습니까 하고 나오는 거죠. 그래서 잘 사귀었다. 그만큼 남과 하나되려고 애쓰는 모습이죠. 남과 애쓰는 실체죠. 앞에는 주로 애쓰는 모습만 얘기했죠. 여기서는 남과 애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남을 존중하라는 얘기가 나오는 셈이죠. 그 사람의 얘기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얘기죠. 뒤집어 말하면 자기를 남화, 남으로 만들라는 얘기죠. 자신을 이타적으로 만들라는 얘기죠.
제18절
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자왈, 장문중거채, 산절조절, 하여기지야.
ㅇ 노나라 대부들이 욕먹는 사람들이 많은 게 아마 어쩌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욕을 덜 얻어먹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비해서 노나라 사람들이 욕을 얻어먹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공자께서 노나라에 계시시면서 그 실정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장문중은 노나라 대부인데요.
ㅇ 子曰, 臧文仲居蔡. 노나라 세 대부 중 한 명인데 마지막 대부입니다. 그 장문중은 채나라에 있을 적에, 채나라라는 데가 이 게 원래 성으로 되어있는 채자죠. 나물 채 자로 읽히기도 하고, 땅이라는 채 자로 읽히기도 하고, 지명으로 많이 쓰이는데 원래 이 채 자의 이름이 거북이라는 뜻입니다. 중국 전체 지역에서는 채라고 하면 지금도 거북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채 땅에 사는 사람들은 묘하게도 채를 다른 뜻으로 해석합니다. 생선 대구라 그럽니다. 여하튼 간에 지명이죠. 산동성 근처에 있는 지역으로 노나라 영역에 속해 있죠.
ㅇ 여기서 지명으로 볼 것이냐 원래의 뜻으로 볼 것이냐가 문제가 되요. 다시 말해서 거북이 껍데기 벗겨가지고 깔고 앉는다는 거예요. 거북이 껍데기 벗겨가지고 깔고 앉는다는 것은 원래 거북이 껍데기 가지고 점치는 데서 온 거란 말이에요. 점치는 것은 누가 합니까. 대부가 안 되는 거잖아요. 왕명을 받들어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얘기가 채에 있을 때 산절조절했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전부다 거, 채, 산, 절, 조, 절 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고요.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없는데 일단 후자 쪽으로 해석을 하겠습니다.
ㅇ 채 땅에 있다 하지 않고, 거북이를 썼다 이렇게 보겠습니다. 왕명을 받지 않고 개인의 사사로이 하는 일을 점을 친 거죠. 대부가 점을 칠 때는 우골(소 뼈)에다 해야 되고 일반 선비가 할 때는 조개에다 해야 되고 서민이 할 때는 나무에다 해야 된다 말이죠. 그리고 오로지 왕만 거북이 껍질을 가지고 할 수 있단 말이죠. 근데 이것은 대부가 소 뼈가지고 점을 쳐야 되는데 거북이 껍질을 가지고 했으니 벌써 튄 거죠. 튀면 질서가 무너지는 거죠.
ㅇ 山節藻梲, 요즘 궁궐 같은데 가면 용마루에 나무를 깎아 올리는 것이 산절입니다. 보통 집은 막새 하나로 멈추잖아요. 근데 궁궐 같은 데나 절에 가면 올리잖아요. 궁궐은 왕이 사는 데고 절은 법왕이 사는 데니까요. 그것도 왕만이 할 수 있는 거 거든요. 요즘 그런 것 없죠. 돈 많은 사람은 짓죠. 이것도 당시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거죠. 마치 조선으로 말하면 99칸 이상 지은 것과 비슷한 게 되겠죠. 집을 그렇게 덩그러니 산절을 시키고 조절을 했다. 집을 지을 때 들보를 올리고 나서 서까래를 올리잖습니까. 그래서 들보는 올린다 그러고 서까래는 끼운다 그러죠. 걸친다 그러죠. 보통은 들보가 하나인데 이것은 들보 위에 들보를 세우는 거예요. 쌍 들보를 세우고 거기에 단청을 칠하는 것을 조절이라 그럽니다. 단청도 개인 집에서 못 칠하게 되어있는 거예요. 궁실과 절에서만 칠하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서원 같은 데 가도 단청 못합니다. 단, 단청할 수 있는 서원은 공자님 모신 서원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후대에 와서는 주자를 모시는 데서도 단청을 합니다. 근데 나중에 웬만한 서원에서는 주자를 다 모셔버리죠. 아니면 공자를 모셔버리고 단청을 하는데, 사액서원 아닌 데는 거의 단청 못했어요. 옛날에는 기둥 높이가 얼마면 지붕 높이도 얼마라는 법적 비율이 있는데 그 비율을 어기고 더 올려버린 거예요. 실제로 궁궐 지붕이나 절 지붕 보면 많이 올라가 있죠. 그렇게 높이 올리는 것을 조절이라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건물의 칸수(기둥 사이)가 법적으로 정해져 있어요. 개인은 몇 자가 한 칸 왕실은 몇 자가 한 칸 다 정해져 있거든요. 그거 어기면 바로 사형이에요. 근데 이 사람이 이렇게 한 거예요.
ㅇ 그걸 놓고 이제 평가를 합니다. 이것들은 전부 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죠. 굳이 비유를 해서 얘기를 하는 거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형식을 무너뜨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자기가 먼저 이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그런 인간으로 인정을 받아 나가야 되죠. 공자의 논리에 따르면 혁명이 안 나와요. 먼저 점진적으로 뒤엎어가는 거예요. 밀물처럼 사회를 엎어가는 것이지 가르침에 의해 엎어가는 것이지 맹자 식의 논리가 안 나와요. 예를 들어서 자기 가르침이 있으면 그걸 소화해가지고 사람들과 하나되고 하나된 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인정받은 그 다음에 저절로 모셔진다 이거예요. 근데 이 사람은 어거지로 이렇게 힘으로 이것을 했다 이거죠. 何如其知也. 그러니 어찌 그를 지혜롭다 할 것인가.
제19절
子張問曰, 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자장문왈, 영윤자문삼사위영윤, 무희색, 삼이지, 무온색. 구영윤지정,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崔子弑齊君,
필이고신영윤. 하여. 자왈, 충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최자시제군,
陳文子有馬十乘, 葉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진문자유마십승, 엽이위지. 지어타방, 즉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지일방,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즉우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하여. 자왈, 청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ㅇ 子張問曰, 자장이 물으셨습니다. 令尹子文三仕爲令尹, 영윤이면 높은 벼슬이죠. 요즘 같으면 장관급 정도, 지방 주재 장관쯤 되는 게 영윤이죠. 子文(자문)의 이름은 鬪穀(투곡)인데 읽을 때 투무라고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이 사람이 철저하게 몽골계나 그랬던 모양이에요. 저는 한자 발음대로 투곡이라 그러죠. 한자로 곡이라는 글자를 노구방(?)이라고 쓰니까 투구라고 읽는 게 오히려 옳겠죠. 이리저리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영윤이었던 자문은 세 번이나 영윤 벼슬을 했다.
ㅇ 근데 無喜色, 즐거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기뻐하는 자태가 아니었다. 三已之, 세 번 그만두었다. 세 번 벼슬했으니까 세 번 그만두었죠. 세 번 그만두었는데 無慍色. 화내는 빛도 없었다. 담담했다는 거죠.
ㅇ 舊令尹之政. 앞에 있던 영윤의 정사를, 必以告新令尹. 자기가 했던 거죠. 자기 이전 영윤의 정치를 반드시 새로 온 영윤에게 일러줬다. 그러면 何如. 어떠냐. 이 정도면 어떠냐 하니까,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忠矣. 마음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ㅇ 曰, 仁矣乎. 그러면 하늘 사람 도리를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까. 曰, 未知. 잘 모르겠지만, 焉得仁, 어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나 쉽게.
ㅇ 그래서 충이란 것도 인에는 못 이르고 사회와 하나가 되는 하나의 방도로 잡았죠. 앞에 네 가지를 잡고 네 가지와 관련해가지고 세부항목을 잡아가는데 앞에서 경을 잡았고, 경 잡은 다음에 충도 하나 잡아냈습니다.
ㅇ 崔子弑齊君. 일부 책에는 崔子로 되어 있지 않고 최저로 되어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래 이름이 최저입니다. 제나라 대부였던 최저라는 사람이 제나라 임금을 죽였다. (윗사람을 죽이면 弑(시)입니다)
ㅇ 이에 제나라에 있던 한 사람인 대부였던 진문자가 有馬十乘. 십승의 재산과 기득권. 십승이면 상당히 큰 대부 아닙니까. 십승이면 말 열 필이 아니라 사십 필입니다. 그 십승을 포기하고 제나라를 떠났다. 之자는 제나라를 의미하니까 제나라를 벗어났다.
ㅇ 至於他邦, 則曰, 다른 지방에 이르러서 말하길, 猶吾大夫崔子也, 옛날 우리 대부였던 최자와 같다. 그리고 違之. 그 지방을 떠나버렸다.
ㅇ 之一邦, 則又曰, 또 다른 한 지방에 이르러서 또 말하기를,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우리 대부 최자와 똑 같다. 그리고 또 떠나버렸다. 그러면 何如.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자장이 질문을 참 재미있게 합니다.
ㅇ 子曰, 淸矣.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깨끗하다, 맑다. 曰, 仁矣乎. 이 정도면 하늘 사람답다 할 수 있습니까.
ㅇ 曰, 未知, 焉得仁. 잘 모르겠지만 어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느냐.
ㅇ 그래서 맑은 것만으로도 못 미치고, 하나의 방도고 그러니까 방편을 가지고 자꾸 본질과 대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늘 사람다워진다는 것은 근본의 문제이고 목표인 건데 궁극 목적인데 거기에 도달하는 忠이라던가 淸이라던가 敬이라던가 이런 것을 가지고 그것과 일치시키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중에 가면 이 결론이 나옵니다. 仁이란 데는 맑음도 없고, 충성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고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잘 모르겠지만 어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니 하는 얘기는 정말 하늘 사람다웠다면 그 속에서 하나됨을 만들었겠죠. 未知, 焉得仁이 두 번 나오는데 그 의미를 더 정확하게 살펴보면 영윤자문이든 진문자든 그 속에서 하나됨을 이루었더라면 이렇게 되었겠니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겠니 충한 상황이 벌여졌겠니 충이 아예 없지. 그리고 깨끗한 상황이 벌어졌겠니. 아예 깨끗한 것도 없지. 仁이란 것이 상당히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이죠. 소극적인 개인적인 개념이 아닌 거죠. 사회적인 개념이죠. 방편적으로 사회적인 개념이고 더 크게는 하늘과의 관계와 연결되지만.
제20절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曰, 再斯可矣.
계문자삼사이후행, 자문지왈, 재사가의.
ㅇ 季文子三思而後行, 계문자는 노나라 대부였던 행보(行父, 사람이름일 때는 보로 읽는다)는 이 사람도 열심히 공부해서 붙었던지 엉터리로 붙었던지 文이 붙었습니다. 계문자가 세 번 생각한 이후에 실천한다. 행동한다.
ㅇ 子聞之曰, 그러자 선생께서 이 소리를 듣고 나서는 再斯可矣. 두 번이면 된다.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두 번이면 된다 이렇게 했고, 또 한 가지는 계문자 그 사람이 두 번이나 하면 다행이게 이런 뜻으로 해석합니다. 무슨 세 번이요 두 번이나 하면 다행이게. 행동하는 것이 영 아니라는 것으로. 계문자의 행실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공자가 비꼰 것밖에 안 되는데 공자는 사람 비꼬지는 않아요. 차라리 안 좋게 얘기해버리지 비꼬지는 않아요. 그래서 계문자가 세 번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니까 공자께서 들으시고 두 번만 하면 된다 했습니다. 이 때 삼사와 재사 차이는 그거죠. 四思, 五思 할 수도 있는데 여섯 번, 일곱 번 하는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재사에서 끝내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라는 겁니다. 뒤집어서 생각만하면 된다는 거죠. 하나되기 위해서는 어떡합니까. 뒤집어서 생각하라는 거죠. 재사라는 것이 한 번, 두 번 숫자 개념이 아니고 易地思之 개념인 거죠. 세 번 생각해봤자, 네 번 생각해봤자 역지사지 안 해보면 백 번 생각하든 천 번 생각하든 오히려 사심만 뚜렷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생각 여러 번 하지 말고 뒤집어 하라. 그러면 된다. 실제로 치밀한 사람들은 여러 번 생각하죠. 여러 번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뒤집어 생각하라. 재사도 안되고 처음부터 뒤집어 생각하면 공도자가 된 거죠.
제21절
子曰, 寗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자왈, 녕무자, 방유도즉지, 방무도즉우, 기지가급야, 기우불가급야.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寗武子, 편안할 녕자입니다. 편안할 영자인데 사람 성으로 쓰이다보니까 이렇게 특이한 글자가 되었습니다. 안녕할 때 녕자인데요. 밑에다 쓸 용자를 쓴 것은, 글자 의미는 같습니다. 위나라 대부 녕무자는,
ㅇ 邦有道則知, 자기 지방에 도리가 행해지고 있으면 참 앎을 뽐내고, 앎이 작동을 하고, 邦無道則愚, 자기 지방에 도리가 행해지고 있지 않으면 어리석더라. 그런데 其知可及也, 앎은 따라갈 수가, 미칠 수가 있지만, 其愚不可及也. 그 어리석음은 참 미치기가 어렵다.
ㅇ 이 논리는 참 조심해서 생각해야 됩니다. 앞에 邦有道不廢, 邦無道免於刑戮 에서도 나왔지만 요즘 사람들의 논리로 보면 참 비겁한 사람이거든요. 비겁할 수도 있고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공동책임의식이거든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같이 힘을 발휘해서 했으니 지혜를 뽐낼 수 있죠. 나라에 도가 없는 건 남의 책임만이 아니라 나도 책임이 있다는 거죠. 그러면 내가 물러나서 깨끗하게 진실스럽게 버리고 도망갈 수 있느냐 나도 거기에 살아가면서 또 그렇게 해나가겠다는 거죠. 이때 愚는 어리석다는 개념보다는 우직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왁하게 버티는 겁니다. 도리를 행하려고. 지자요수라 했듯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했듯이 바로 물의 성격이 타는 것 아닙니까. 오르내리는 흐름 아닙니까. 여기도 마찬가지로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흐름을 따라서 지혜를 발휘하고 흐름을 타고, 나라에 도리가 없으면 흐름에 역해서 우직하게 버티란 거죠. 단순히 어리석은척하면서, 중간이듯 하면서 살아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죠. 사람들이 까딱하면 중간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고, 세상을 약간 속임수 비슷하게 사는 그런 것을 떠올리기 쉽죠. 그리고 실제로 옛어른들 가운데 그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죠. 나라에 도가 없다면서 미친척하고 살고, 우직하게 버티고 가는 이토정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인행각을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이토정이나 서화담 같은 사람은 우직하게 버틴 사람이거든요. 어디 기인행색 특별히 하지도 않고, 별난 사람 행색하면서 숨어살려고 하지도 않고.
제22절
子在陳曰, 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자재진왈, 귀여귀여. 오당지소자광간, 비연성장, 부지소이재지.
ㅇ 子在陳曰, 歸與歸與. 공자께서 진에 계실 때에 말씀하셨다. 與자는 감탄사를 나타내는 겁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이때 與자를 넣은 것은 앞에서 접속사 而를 넣어서 과거형으로 만들었다 했듯이 강한 의지의 미래형을 나타내가 위해서 與자를 쓴 겁니다. 단순히 운을 맞추기 위해서 넣었다고 하면 틀립니다.
ㅇ 吾黨之小子狂簡, 우리 동네에, 이때 당이란 것은 우리 동네, 우리 당파의 이런 뜻이니까. 지역사회를 말하는 거죠. 내 지역사회의 젊은이들이 뜻은 광대하게 크고, 하늘을 뒤덮을 만큼 크고 그리고 사는 것도 간결하고, 사소한 데에 구애 받지 않는 게 簡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사소한 데 구애 받지 않고 뜻이 참 광대한데.
ㅇ 그리고 斐然. 비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까 참 화려하게 成章, 章이란 것은 마찬가지로 문장 할 때 나오듯이 꾸밈새 아닙니까. 참 화려하게 꾸밈새를 이루었다. 우리 동네 젊은 사람들이 참 이렇게 대범하고 뜻이 크면서 화려하게 이렇게 모습을 이뤘다.
ㅇ 그러나 不知所以裁之. 어떻게 재단할 것인지를 모르더라. 조절할 것인가. 통제력이 없다는 거죠. 자기자신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ㅇ 이 사회를 바로잡아야지, 뜻도 크고 사소한 자기 집안 일에도 안 매이고 세상일을 크게 하려고 나서고 있고, 마치 어떻게 보면 신라 화랑을 생각하게 되죠. 자세히 보니까 애들이 튀기만 튀지. 그 사회와 하나되어서 그 사회를 못 바꾸겠더란 말이죠. 재단할 재주가 없더란 얘기죠. 그걸 내가 가르치러 가야지 하는 뜻이겠지요. 여기서는. 내 임무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됨을 이루게 하리라. 녕무자에 바로 이어지는 거죠. 녕무자의 우직함을 말씀하시고 바로 그 뒤에 이어지죠. 녕무자의 우직함을 따르기가 힘들다 하시고서, 진나라에 계시면서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내가 지금까지 우직하게 버텼지만 이제 안 되는구나. 이제 다시 우직하게 젊은 사람들을 다듬겠다. 우직하게 버티는 또 하나의 방식이죠. 이 세상에 도가 없으니까.
제23절
子曰, 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자왈, 백이숙제, 불념구악, 원시용희.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백이숙제는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사람이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 아닙니까. 은나라 망명인들이고, 따지고 보면 공자의 계보상 옛 선배들이 되는 셈이죠.
ㅇ 不念舊惡, 지나간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다.
ㅇ 怨是用希. 원망이 이로 말미암아. 用자가 以자와 같습니다. 쓰다, 써다 원래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是用이나 是以나 같은 겁니다. 원망이 이로 말미암아 드물었다. 希는 드물 희 아닙니까. 바랄 희자도 되지만. 원망을 바랄 정도가 되었다는 거죠. 원망을 바랄 정도면 희귀한 거죠. 드문 거죠. 드무니까 바라는 것 아닙니까. 원망이 이로써 드물었다. 옛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를 생각하는 백이숙제의 원칙이죠. 은나라가 말기에 얼마나 개판, 새판으로 갔습니까. 무너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죠. 그것 다 털어버리고 오히려 그걸 지키면서, 그걸 기약하려고 했지 엉뚱한데 넘겨주려고 하지는 않았죠. 그래서 백이숙제에게는 오히려 원망이 없었다. 이것도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한 모습입니다.
제24절
子曰, 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鄰而與之.
자왈, 숙위미생고직. 혹걸혜언, 걸저기혜이여지.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孰謂微生高直. 누가 이르던가. 미생고라는 인물을 정직하다고.
ㅇ 或乞醯焉, 혹자가 식혜를 빌려오면, 즉 젓갈이죠. 젓갈을 빌려오면
ㅇ 乞諸其鄰而與之. 그것을 동네에서 빌어다가 갖다 주더라. 그게 어떻게 정직한 거냐. 어떤 면에서 자기 분수에 맞는 것만 하라는 얘기죠. 전번에 말씀 드린 적 있으니까 생각 한번 해보십시오.
제25절
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자왈, 교언영색주공,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익원이우기인, 좌구명치지, 구역치지.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巧言令色足恭, 교언영색은 앞에서 한번 나왔고요. 주공은 지나치게 공손한 거죠. 지나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자기 귀신도 아닌데 제사 지내는 건 아첨이라 그랬지 않았습니까. 아첨도 주공이죠. 마찬가지로 자기가 받들 것도 아닌데 억지로 받드는 것, 정직하지 못한 것이죠. 교언하고 영색하고 주공하는 것은 左丘明이 恥之했다. 좌구명은 공자 제자입니다. 좌구명이 나중에 좌씨춘추를 쓰죠. 丘亦恥之. 나 공구도 역시 수치로 여겼다.
ㅇ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원망을 숨기고 그리고 나서 어떤 사람과 벗 되는 것 이것은 좌구명이 치지했다. 丘亦恥之. 나 공구도 역시 수치로 여겼다.
ㅇ 좌구명이란 사람은 공자의 먼 제자인데 어떻게 보면 공자학파에서 약간 삐딱한 좌파 비슷한 그러면서 굉장히 청렴 결백한 비밀병기죠. 굳이 공자사상에서 보면 비밀병기죠. 굉장히 묵묵하게 한마디도. 이 사람이 글에 능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좌씨춘추를 남겼죠. 자기 선생이 쓴 춘추를 싹 고쳐가지고 새로 썼죠.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 사랑에 있을 때 단 한마디도 질문 안 한 사람이에요. 후에 안회 대타로 된 사람입니다.
제26절
顔淵季路侍, 子曰, 盍各焉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輕裘, 與朋友共,
안연계로시, 자왈, 합각언이지. 자로왈, 원거마의경구, 여붕우공,
敝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폐지이무감. 안연왈, 원무벌선, 무시로. 자로왈, 원문자지지.
子曰, 老子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자왈, 노자안지, 붕우신지, 소자회지.
ㅇ 顔淵季路侍, 안연과 계로(계로면 자로죠. 자기 집안에서 둘째니까 계로라고 불렀습니다)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옆에 모시고 있었다는 거죠. 그러니까 셋이 같이 놀고 있었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표시하다 보니까 侍라고 표시한 거구요. 셋이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안연이 아직 안 죽었을 때죠.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盍各焉爾志. 어찌 합 이런 것이고, 권장할 때 해보는 게 어떨까 물어보는 합자입니다. 마땅할 합이니까, 마땅하지 않을까, 마땅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의문사입니다. 각각 자신의 뜻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안연계로시 했으니까 안연이 먼저 대답해야 되는데 용감한 자로가 먼저 대답을 하죠.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아주 사실적이에요. 그 당시가 훤해요.
ㅇ 子路曰, 願車馬衣輕裘. 자로 답습니다. 願은 뒤에 전부다 걸리는 거죠. 수레랑, 말이랑, 옷이랑, 가벼운 겉옷, 외투죠. 경구는 외투죠. 귀한 거죠.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게 없죠. 거마의경구를 與朋友共, 벗들이랑 나누어서 함께 살면서 敝之而無憾. 그것이 다 달아도 아무 유감이 없고자 합니다. 자로 다운 대답을 했어요.
ㅇ 顔淵曰, 그랬더니 옆에 있던 안연이 말하기를,
ㅇ 願無伐善, 無施勞. 벌은 자랑하다 이런 뜻이니까요. 저는 착한 것을 자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 것 내세우지 않고 또한 저로 말미암아 남들 애쓰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용감한 자로가 심심하거든요. 심심할 뿐만 아니라 궁금하죠.
ㅇ 子路曰, 願聞子之志. 선생님의 뜻을 듣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물었을 때는 공자도 뭔가 말하고 싶은 뜻이 있어서 물었을 테니까. 자로가 안 해도 다 대답할 건데, 자로가 또 물었습니다. 안연과 자공 같으면 가만히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또 재미가 없죠. 이렇게 있으면 박자가 다 맞을 거예요. 서로 통해가지고. 자로가 낀 자리이니까 틀림없이 묻겠지.
ㅇ 子曰, 선생께서 대답하시기를,
ㅇ 老子安之, 연세 드신 분들은 나를 편안하게 여기고, 朋友信之, 나와 비슷한 또래의 벗들은 동지들은 나를 믿고, 少者懷之. 젊은 사람들은 나처럼 되게끔 하고자 나를 사모하게끔 그렇게 하고 싶다. 연세 드신 사람들에게는 믿음직한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으로써, 젊은 공도자들에게는 나와 같이 갈 수 있는 동료로서 믿을 수 있게 해주고, 젊은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향해가는 하나의 일꾼으로서 표상이 되고 싶다. 이런 얘기죠. 어떻게 보면 안연보다 공자가 더 젊어요. 이 이야기는. 안연은 약간 풀어진 쇠약한 어투가 있고요. 어쩌면 이 무렵 안연이 갈 무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27절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 而內自訟者也.
자왈, 이의호. 오미견능견기과, 이내자송자야.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已矣乎. 다 그만두자.
ㅇ 吾未見, 나는 못 봤다. 무엇을 能見其過, 吾未見에 다 걸립니다. 자기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어서 그래서 而內自訟者也. 스스로 내적으로 재판을 거는 그런 사람을 나는 못 봤다. 요즘 들어와서 못 봤다. 다 그만두자. 얘기하면 뭐하겠느냐는 거죠. 실천의 의지를 그만두자는 것이 아니라 뭔 얘기를 하다가 튀어나왔겠죠. 얘기 그만하자. 지금 얘기하는 가운데서 나는 못 봤다. 자기가 얘기하는 잘못을 스스로 들여다보면서 속으로 그것을 송사를 걸고 있는 사람은 못 봤다. 먼저 속으로 송사를 해라 하는 얘기죠. 잘못을 밖으로만 찾지 말고 안에서 찾아라. 나에게서 찾아라.
제28절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 焉不如丘之好學也.
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 언부여구지호학야.
ㅇ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ㅇ 十室之邑, 열 집밖에 안 되는 조그만 동네에,
ㅇ 必有忠信如丘者,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 공구만한 충신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ㅇ 焉不如丘之好學也. 어찌 ~같지 못 하겠느냐. 나 공구의 배움을 좋아하는 것만 못하겠느냐. 나처럼 배움을 즐기는 사람이 어찌 없겠느냐. 이런 뜻입니다.
ㅇ 十室之邑에 반드시 나 공구만한 충신한 사람이 있다. 어찌 배우기를 나만큼 한 사람이 없겠느냐. 이것이 어떻게 뒤집어 해석되느냐 하면 말입니다. 공자의 우상학파에 의해가지고.
ㅇ 十室之邑에 必有忠信如丘者焉, 나 공자만한 충신한 사람이 반드시 있더라. 그러나 不如丘之好學也. 나 공구의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더라. 나만큼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더라. 이렇게 되거든요. 이렇게 오역이 되어 있습니다. 문장상으로 如丘者焉, ~ 者焉 이렇게 안 붙습니다. 如丘焉 이렇게 되어버리죠. 아니면 如丘者에서 끝나버리거나. 者자와 焉자가 붙어서 문장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ㅇ 여기서도 현재 주자가 그렇게 해석을 했어요. 너무 높이고 싶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지나쳤던 거죠. 마치 청산이라는 소설에서 송기원씨가 너무 지나쳤던 거와 비슷하게 이렇게 지나쳤는데 흉할 바는 아니지만 바로잡을 때가 오면 바로잡아야죠. 조그마한 마을에도 다 그런 사람이 있고 배우기를 즐겨 하는 사람이 있다. 好學이라 하는 것은 敏而好學, 不恥下問하면 바로 文이라 그랬습니다. 흔하다 그랬잖아요. 그것하고 비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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