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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초등(제주) 제39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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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스크랩 카르타고 고고유적 (Site of Carthage Archaeological)
39지기(재혀니) 추천 0 조회 167 08.08.18 23: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로마와 지중해 패권을 겨루던 명장 한니발의 무역대국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이 접하는 '문명의 호수'라는 이름을 얻고 있다. 그 바다를 끼고 있는 튀니지의 튀니지만에 세워졌던 고대도시 카르타고는 고대페니키아문화와 로마제국의 지배가 남긴 유적, 그 이후에는 아랍문화가 남아 있는 곳으로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의 패자'라고도 불렸던 고대도시 카르타고가 수도 튀니스의 교외 지역으로 변해 중요한 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 세계유산 등록 이전의 현실이었다. 이후 튀니지 정부도 고고학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이 일대에 대해 건물 신축을 금지하고 있다.

 

 

카르타고라는 도시국가의 이름은 페니키아어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도시의 시작은 BC 814년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서다. 전설에 의하면 티레의 공주 디도가 오빠인 티레의 왕 피그말리온에게서 도망쳐 와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한다.

 

 

이 도시는 낮은 언덕들로 이루어진 3각형의 반도 위에 터를 잡고 배후에는 안전한 정박지가 있어 외적으로 부터 방어하기가 좋았으며 좁은 지협을 통해 본토와 연결되는 이상적인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또한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운영하는 은광 채굴로 얻어지는 막대한 부는 무역도시인 카르타고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BC 3세기 중반부터 BC 2세기 중반까지 카르타고는 로마와 일련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포에니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은 그 유명한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에게 완전하게 패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무역대국으로서 지중해를 안마당처럼 헤젓고 다니며 호령하던 카르타고도 BC 146년 드디어 종말을 맞게 되자 약탈과 방화로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점령군 로마는 소금을 뿌리며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고시하며 지중해의 라이벌 카르타고의 부활을 경계하였다.

 

 

로마와 벌인 포에니전쟁에 패하기 전까지 약 1천년 세월 동안 카르타고는 유럽과 아라비아 그리고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카르타고 유적지는 상당부분 소실되었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둥과 성벽에 남아 있는 조각과 상징물들은 하나같이 세련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페니키아인들의 높은 문화적 수준을 짐작케 한다. 

 

 

 

카르타고가 폐허에서 재차 도시로로 태어난 것은 로마에게 패퇴한 이후 100년이 지난 BC 44년 로마의 시저가 이 곳을 다시 도시로 개발하도록 명령하면서 부터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옛 도시 위에 흙을 쌓고 언덕을 만들어 그 위에 로마인이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로마치하의 카르타고도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된다.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린다는 뜻인 반달리즘(vandalism)의 어원이 된 반달(Vandal)족이 이 곳을 점령하면서 로마가 세운 장대한 건축물들을 가차없이 파괴한다. 수세기전 카르타고가 겪었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된 것이다. 그리고 8세기 이후에는 이 지역의 새로운 주인인 이슬람세력에게 함락되면서 도시에 남아있던 각종 석자재들은 이슬람 도시 건설에 사용케 된다.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고 시칠리아 등 수 많은 속주를 거느리며 명장 한니발 장군의 지략과 무용으로 로마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카르타고는 신흥도시로 부상한 튀니스에게 바톤을 넘겨주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된다.  

 

/먼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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