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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직할 자치주로 편입된 코소보는 총인구 2백만 명 가운데 90%가 알바니아 인이었다. 물론 이웃 알바니아에 3백만 명의 알바니아 인이 살고 있어 특히 코소보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인과 알바니아 인의 마찰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세르비아 인이 코소보를 보는 시각은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근본적으로 귀착하는 역사적 공간이 스테판 두샨 치하의 중세 세르비아 왕국이기 때문이다. 두샨 왕국 시절의 수많은 세르비아 유적들이 코소보 주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침공할 때 세르비아 인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도 바로 코소보였다.
세르비아, 중세 코소보 전쟁 기념 행진
이 때문에 코소보는 적어도 세르비아 인에게는 신성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독립시키거나 자치권을 부여할 수 없는 성지(聖地)라는 것이 세르비아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생각이기도 하다. 유고 연방 내에서 알바니아 인은 코소보 자치주를 제외하고는 마케도니아에 35만 명, 몬테네그로에 5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코소보의 알바니아 민족주의는 세르비아의 철권 통치 때문에 오히려 더 전투적인 성격을 띠어 갔다. 코소보에 철퇴를 내린 대표적 인물이 지난 1963년 실각한 란코비치였음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란코비치가 숙청된 뒤에도 알바니아에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1971년 말 공식 통계에 따르면 문맹률은 전국민의 36%로 집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더욱 심각했다.
전후 코소보 자치주에서 가장 심각한 저항 운동이 일어난 때는 1968년이었다. 이해 11월 29일부터 시작해 코소보 전역에서 반세르비아 시위가 일어나 폭력 사태가 계속되었다. 시위대가 내건 구호 중에는 이웃 알바니아 공산 지도자를 칭송하는 ‘엔베르 호자 만세!’라는 구호까지 등장했으며 이웃 알바니아와의 합병을 요구하기도 했다. 12월 초에는 시위 사태가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 인 거주 지역인 고스티바르와 테토보에까지 번졌다. 이때 수천 명의 세르비아 인과 마케도니아 인이 고향을 떠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엔베르 호자
시위가 이처럼 단시간에 민족적으로 확산된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큰 작용을 했다. 유고 내에서 극빈 지역이라는 오명이 말해 주듯이 실업자 수가 급증했다. 유고 연방 편입 후 코소보에 가장 일자리를 제공한 기관은 바로 코소보 자치 정부였다. 때문에 고등 인력의 대부분은 그나마 정부 기관에 취직해 상대적으로 높은 보수를 받았으나 나머지 인력의 대부분은 농촌에 머물거나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68년의 시위는 바로 이러한 실업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자연히 화살은 자치 정부에게로 돌아갔다.
물론 이 시위 진압에는 연방이 개입하기 전 코소보 공산당 지도부가 선수를 치고 나섰다. 시위 주동자에게 2년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37명의 당원을 출당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면서 더 이상의 소요를 예방하기 위해 유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때 베오그라드 대학 소속 부설 기관으로 격하되어 있던 프리스티나 대학이 독자적인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경제에 관한 개선책도 마련되기 시작했다.
1971년에는 엔베르 호자 알바니아 공산당 제1서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코소보 당 지도자 벨리 데바(Veli Deva)가 물러나고 비교적 젊은 지도자인 마흐무트 바칼리(Mahmut Bakali)로 교체되었다.
벨리 데바 마흐무트 바칼리
그러나 이 같은 유화 정책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한 깜짝 쇼에 지나지 않았고, 실질적인 성과는 미미했다. 이처럼 세르비아가 코소보에 대한 철권 통치를 늦추지 않은 이유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중세 세르비아 시대의 상당수 유적이 바로 이 코소보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르비아 인의 입장에서는 이 장소가 바로 알바니아 인 때문에 더러워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양 민족은 기회만 있으면 서로 싸웠고 적대감은 눈덩이 굴러가듯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언제든지 폭발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0년 코소보의 장래에 대한 ‘선언적’ 발표를 했다. 코소보 자치주는 세르비아에 편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치주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전대통령이 1974년 제정한 개정 연방 헌법에 따라 사실상 공화국과 비슷한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었는데 밀로셰비치의 선언적 명제는 이 사실을 완전히 부정한 셈이다.
이때부터 주요 정부 조직에서 알바니아 인이 해고되기 시작했다. 프리스티나 대학 교수와 강사, 그리고 직원이 알바니아 인인 경우에는 모두 해고되었다. 수천 명에 달하는 교사와 공장 근로자들도 일자리를 잃었다. 이러한 철권 통치는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에 대한 연방군 공격과 함께 강화되다가 1992년 초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마케도니아의 소수 민족 중 가장 많은 수(35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알바니아 인이었고, 이들이 코소보의 알바니아 인을 부추겨 독립을 추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마케도니아와 코소보 사이에는 전에 없던 철책이 국경선을 따라 설치되었고, 코소보를 마케도니아로부터 철저히 격리시키는 정책이 수립되었다.
1992년 5월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측이 인정하지 않는 총선이 실시되어 다시 한 번 긴장시켰다. 알바니아 인의 대의 기구인 코소보 민주 연맹(DLK)이 총 유효 투표의 76%를 얻은 것으로 비공식 집계되었지만 국회는 열리지 못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등원을 시도했지만 세르비아 비밀 경찰이 이들 모두를 격리 차원에서 연행했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 코소보 자치 정부와 국회 등은 모두 폐지된 상태이다.
코소보 민주 연맹의 부총재를 맡고 있는 페미 아가니(Fehmi Agani) 전 프리스티나 대학 교수는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페미 아가니
알바니아 인은 매일매일 세르비아 경찰의 폭력 세례를 감수해야 하고 영장 없이 구속되고 있다. 또한 알바니아 인의 주택을 사전 영장 없이 수색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극적으로 이에 대해 항의를 할 수 없다. 우리 알바니아 인은 무기가 없다. 이보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과거 세르비아 인이 저지른 잔혹한 알바니아 인 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상태가 어느 때보다 어렵지만 그렇다고 학살당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