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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효자봉과 효자수(孝子樹)
금오산(金烏山)은 구미시, 김천시, 칠곡군을 경계를 한 높이 976m 바위산인데,
본래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 이었다.
고구려의 승려로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지금의 구미시 상모동(上毛)로 추정되는
선산(善州) 모례(毛禮)로 숨어 있을 때,
태양 속에 산다는 삼족오(三足烏) 황금까마귀(金烏)가 저녁 놀 속에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이 산은 태양의 정기를 받는 명산(名山)이로 구나!!" 라고 감탄하며
‘금오산(金烏山)’ 이라고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제의 구미시 상모동(옛 선산군 구미 상모리)에서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峰)과 금오산성(金烏山城)으로 올라가려면
금오산줄기 숭양산(崇陽山)이 있는데,
숭앙산의 최고봉이 효자봉(孝子峰)이다.
이 효자봉에 얽힌 진실을 알아본다.
<효자봉(孝子峰)과 효자수(孝子樹)>
동방길지(東邦吉地) 금오산(金烏山) 주봉 현월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을 이곳 사람들은 숭양산(崇陽山) 또는 수양산(首陽山)이라 한다.
이 숭양산의 주봉이 효자봉(孝子峰)인데,
(사진1)은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528m)에서 내려다 본 전경이다.
(그림1)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528m) 정상.
(그림2) 저만치 보이는 산 봉오리가 숭양산 효자봉이다.
(그림2)에서 효자봉 좌측으로 뻗은 산줄기 아래가 선산구미 상모(上毛) 박정희 탄생지이고,
우측으로 양지바른 산비탈 아래(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곳)가 고려 대각국사 은거지 선봉사가 있었던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숭산(崇山)마을이 된다.
숭산마을은 효자봉 남서쪽 아래 양지바른 물 맑고 좁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숭산마을은 고려의 왕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선봉사(僊鳳寺)를 짖고
한국천태종의 중흥지로서 대각국사 의천이 입적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고려 때 세운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와 ‘고려귀족촌(高麗貴族村)’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 고려의 무장세력 삼별초(三別抄)에 대항한 ‘몽고의 병란’으로 1271년 경주 분황사9층탑과 더불어 불타고
폐허가 된 그 후 논밭으로 변하여 최근까지 이곳에 농가20여 호가 다소곳이 모여 살고 있던 마을이다.
이 마을 입구에 수령을 알 수 없는 동지나무(당산나무)가 있었다.
촌노(村老)들은 이 나무를 효자수(孝子樹)로 하고,
마을 뒷산을 효자봉(孝子峰)이라 불렀으니,
그 유래를 여기서 밝히려고 한다.
숭산마을에 하늘에서 내려준 효자(孝子)로 칭송받은
유우석(劉遇錫;정조 갑인10월1일~철종 신해5월1일)이란 분이 있었다.
그의 자는 상언(祥彦)이오 호는 계정(溪亭)이다.
‘어느 날 8순의 조모가 기력이 다하고 노쇠 위독한데 소원하기를
“잉어(鯉魚)탕이 먹고 싶다.” 라고 하였다.
허나 엄동설한(嚴冬雪寒)이라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우석께서는 20여리 눈밭(雪田)을 걸어서 낙동강 빙판에 나와서
잉어를 구할 수 없을까 서성가리다
할머니의 소원을 애석(哀惜)해 하며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몇 번이나 그랬을까?
어느 날 하늘이 감동하였는지 우석 앞 저만치 얼음 숨구멍에서
갑자기 큰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라 펄떡이고 있었다.
우석께서는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고 수없이 되 내이며,
그 잉어를 집으로 안고와 참기름에 맛있게 뽁아 탕을 만들어
지극정성 공양하니 조모의 환우(患憂)가 사라지게 되었다.
고을사람들은 “우석의 효심과 정성에 감응하며 잉어 스스로가 얼음구멍에서 뛰어 올라 나왔다.” 고
그 효행이 자자하였다.
그 뒤 어느 날 조모께서 갑자기 “비둘기 고기가 먹고 싶다.” 고 말하기에
몇날며칠을 비둘기 구할 길을 찾아 해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비둘기 한 쌍이 처마에 부딪치고 마당에 떨어지니
잡아다 8순의할머니에게 정성껏 공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을유림들은 나라님에게 상소하니
나라님께서 팥과 찹쌀을 내려 노조모를 잘 공양하도록 우석에게 포상을 했다.
이 일이 있는 후, 숭산 마을 입구에 자라고 있던
큰 동지나무(당산나무)를 효자수(孝子樹)로 부르게 되었고,
우석이 사는 뒷산봉우리를 효자봉(孝子峰)이라 이름 하게 되었다.’
또한 숭양산(崇陽山) 남쪽에 위치한 숭양제(崇陽祭)에
예부터 유창(劉敞)선생의 영정(影幀)과 태종대왕 어필 “공심일시(公心一視)”를 봉양해오다가
계정공(溪亭公) 유우석(劉遇錫)선생께서 직심으로 노력하여
어필각(御筆閣)과 영정각(影幀閣)을 건축 중수하니 이로서 자강사(紫剛祠)가 완성된 것이다.
(그림3) 숭양제(紫剛祠)의 어필각(御筆閣)과 영정각(影幀閣).
계정공 유우석선생께서 이 건물을 세우시다.
<어필각(御筆閣) 상량문(上樑文)>
[원문]
信爲胃義爲櫓 樹大勞於策盟 苞如竹茂如松 歌聖化於輪奐 得專如彼 足徵在玆 恭推仙庵先生
實是儒林宗匠 入而問學則心法於牧老 準則於圃翁 出而事業則 翼德於 經筵羽儀於文苑
定鼎偉烈佐萬世之丕基 礪泰深盟 致兩朝之休命 出一言救王氏 有足以興焉 棄萬事托神仙
何如其知也 己有召召前述 何庸區區鄙辭 硏魚水際遇之隆 得龍鳳蟠翥之寶 公心一視之褒
罔專美於商霖 臣骨同朽之思 敢有銘於趙石 擬萬年垂示 昔寶藏于書院之傍 奈一朝見禁
今姑安于影廟之內 重修寧敢時一稽緩 肯構自切夙夜經營 於是殫財力而鳩材 相地宜而龜笠
公私輔役 新甫之柏 徂徠之松 若鬼輸而神運 遠邇薺聲 公輸之巧 魚般之藝 若督墨而揮斤
推其不華而不奢 所以可長而可久 玆涓吉日 爰擧脩樑 抛樑東 雞唱扶桑曉日紅 如日之昇祈永命
子當爲孝臣當忠 抛樑西 流雲深鏁亂峯低 長安遙望是何處 戀闕丹忠耿不迷 抛樑南
金鳥高出帝鄕參 年年曝曬淸明日 瞻敬微忱不二三 抛樑北 屋頭隱映淸江色 奔流萬折解朝宗
若効當年事大愊 抛樑上 瑞鳳祥鸞世所仰 主聖臣良熙皥治 文猷燦燦明天壤 抛樑下
玉纓金帶開原野 冥冥脩夜孰從遊 草屋龜齋諸賢者 伏願上樑之後 鳥默遠害 山川增輝
繼今日思修葺 以光 先王之恩 俾後昆篤忠貞 克承名祖之武
通訓大夫慶尙道都事 玉山張福樞 謹撰.
[한역]
믿음은 투구 되고 정의는 방패 되어 큰 공로를 세워 공신들의 회맹록에 참여하고
대나무처럼 움돋고 솔처럼 무성하여 임금님의 덕화(德化)를 화려한 집에서 노래하니
은총을 오로지 함을 저와 같으니 넉넉히 이와 같음을 증명하리라.
삼가 생각하매 선암선생은 실로 유림의 두목(頭目)으로
학문은 목은의 마음씨와 포은의 법칙을 따르셨고
사업은 경연에 군덕(君德)을 보필하고 문장의 표준이 되어
건국한 큰 공로는 천만년을 이어나갈 기초를 닦아
태산이 닳아서 숫돌만치 되리라도 잊지 않겠다는 굳은 맹서는
양조(태조와 태종을 말함)의 아름다운 명령이시다.
말 한마디로 왕씨(王氏)를 구해냄이 실로 복을 받을 만하고
만사를 다 버리고 신선이 되려함이 어찌 그다지도 지혜로운가.
이미 자세한 기록이 있으니 어찌 구구한 사설이 필요하리오.
그러나 군신이 서로 만나 융숭한 대우를 받아 용처럼 서리고
봉처럼 나는 어필을 얻어 공심일시(公心一視)라는 칭찬을 받았으니
어찌 상림(商霖)만이 홀로 아름답다 하리오.
신(臣)의 해골과 함께 썩겠다는 생각을 감히 조석(趙石)에 새겨 만년토록 드리워 보이기 위해
옛날엔 서원의 곁에 소중히 간직했으나 갑자기 서원이 훼철되어
지금은 묘내(廟內)에 임시로 봉안 하였으니 중수함을 어찌 시일을 늦출 것이며
밤낮으로 경영하여 재력을 다하여 재목을 구하고 마땅한 땅을 점쳐 얻어서
공사(公私)가 함께 공사(工事)를 도와 신보(新甫)의 잣나무와 조래(徂來)의 솔이 귀신이 운반한 것처럼
모두 힘을 합하여 공수와 노반의 기술이 먹줄을 따라 다듬어서 화려하고 사치롭기 보다는
튼튼하고 장구하기에 힘써서 길일을 선택하여 상량식을 올리노라!
들보를 동(東)으로 올리니 닭소리가 새벽을 알린다. 동해에 새벽 햇살이 붉게 돋아온다 .
해 떠오르듯 긴 운명을 비노니 아들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 마땅히 충성하리라.
들보를 서(西)로 올리니 구름 자욱하게 높고 낮은 봉우리 가려졌네.
멀리 바라보매 서울이 어디메뇨! 임 향한 붉은 충성 행여나 변할소냐
들보를 남(南)으로 올리니 금오산 높이 솟아 임 계신 곳 보이노라 .
해마다 청명한 날 햇빛 쪼여 삼가 보묵(임금의 글씨)을 받들어 변함없으리,
들보를 북(北)으로 올리니 처마 끝에 맑은 시냇 빛 어른거린다.
천만 굽이 흘러흘러 바다에 모이듯이 그 옛날 임금님 섬기듯이 들보를 위로 올리니
상서로운 봉(鳳)과 난(鸞)은 세상사람 흠앙 하나니
임금은 착하시고 신하는 어질어서 좋은 정치 하옵시와 문화 빛나는 밝은 천지 되옵소서 .
들보를 아래로 향하니 옥 갓끈 금띠(金帶) 원야(原野)에 펼쳐 있다 .
초가집에 숨어 계신 여러 어진 분들이 어두운 저승길에 누가 따라 노시던고
원하옵건대 상향한 후로 새와 쥐의 피해 없이 산천이 더욱 빛을 내어
오늘의 이 마음을 이어 중수하기 힘써서 선생의 은혜를 더욱 빛내고
후손으로 하여금 충성을 돈독히 하여 이름난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기 힘쓸지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옥산 장복추(玉山張福樞) 삼가지음(謹撰).
<어필각(御筆閣) 중수기(重修記)>
[원문]
閣之設何也 庋御書也 御書何 太祖康獻王時 有若臣文僖劉先生諱敞 早遊李牧隱鄭圃隱之門
通格致誠正之學 知麗社運訖 天命有歸 膺 太祖勤聘 陳大範贊大猷 用鞏基業
而雅志薄鍾鼎慕山澤 援張子房故事 乞身於享榮貴之日 俗學餐霞仙子 王曰爾無我棄
遂賜號仙庵 逮 太宗卽祚 恩遇益隆 旣載名于常旂 圖形于麟閣 便蕃之賜
厥有銀帶 ・ 文綺 ・ 土田 ・ 臧獲 聖眷猶未己也 手寫公心一視四宇以寵之 旨哉王言
其至矣盡矣 夫心是正百體出萬化之本也 公則協于一 私則反害其公 心果私而不公
君不能保厥邦 臣不能保厥家 所以堯舜禹三聖人 以危微精一之訓 丁寧告戒
常使一之於義理之公 勿間之以人欲之私 則物我雖分 視之如一 斯乃千古聖學之源頭 而
王旣兢兢於斯 服膺於斯 端本出治 咸以正罔缺 又推其躬行心得之餘 勵厥臣工
當時之佐命勳貴 盈庭而立 非不衆且多矣 獨以學眷眷於先生 以其學術訏謨 足以當是語
而特書以獎諭也 先生所以益勉厥志 秉公正一乃德 視國如家 視險如夷 恪遵聖旨
爲世名臣者也 矧玆煌煌寶墨 出自大聖人心畫 龍章鳳翥 飛動紙上 歷累世不渝
此非一家之私榮 實可爲一國之共尊也 彼鳥號一弓也 爲軒轅之手澤在也 軒轅之臣
攀弓而追思 琬琰一器也 爲周先王之所嘗御也 周人陣器不忍撤 今劉氏之所藏
御書 乃 太宗之所親寫也 乃 太宗之所嘗致太平之方也 因是而先王之心學見矣
因是而先王之勉宰臣 見矣 其傳信寓慕之資 豈直如鳥號琬琰之 比也 哉
始 劉氏同文僖影幀 藏于一室 後孫翼源・斗源・世源別構一閣而奉置 敬君賜也
能知其所守矣 壽同縣四二十里崇山之洞 有氣熊熊作虹霓狀上觸天 見者必知爲 御筆閣也
參奉 金州 許薰 識
[한역]
어찌하여 지은 집인고 어필(御筆)을 봉안(奉安)하기 위함이다.
어필(御筆)이란 무엇인고!
태조(太祖)의 신하 문희공 유창(劉敞)선생께서 일찍이
목은(牧隱) 이색과 포은(圃隱) 정몽주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여,
연구하여 이르는 성실한 올바름의 격치성정(格致誠正) 학문을 통달하고
고려의 운명이 다하여 천명이 돌아감을 알고 태조의 간곡한 초빙에 응하여
큰 계책을 베풀어 대업에 힘을 합하여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했으나
아담한 뜻이 부귀를 마다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살기를 원하여
한고조 유방의 공신 장자방의 옛일을 본떠 부귀영화 하는 때에 물러나
이슬(露)을 먹는 신선이 되려하니 왕께서「너 날 버리지 말라」하시고
선암(仙庵)이란 호(號)를 하사(下賜) 하셨는데
태종께서 즉위하사 은혜로 대우함이 더욱 융숭하여 이름이 공의 명부에 오르고
기린각(공신의 초상을 봉안하는 집)에 초상을 그려 은대(銀帶)와 비단과 논밭과 노비 등을 빈번하게 하사 했으나
임금님의 사랑하심은 아직도 다하지 않으시와 어필(御筆)로「公心一視」네 글자를 써서 주시니
지당하신 임금님 말씀이 지극하기 더할 바 없다.
대저 마음이란,
몸 전체를 바로잡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근본이다.
공정하면 하나로 화합하고 사사로우면 도리어 공정함을 해치나니
마음이 사사로움에 흘러 공정하지 못하면 임금이 나라를 보전하지 못하며
신하가 집을 보전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요,순,우(堯,舜,禹) 세 성인(聖人)께서 위미정일(危微精一)의 훈계로
정녕히 경계하사 항상 의리의 공정한 마음을 한결같이 가져서
마음을 가라앉혀 온갖 욕됨과 번뇌를 참고 사사로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물건과 내가 하나같게 되는 것이 이것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성학 곧 유학(儒學)의 근본으로서
왕께서 이점에 조심하고 삼가며 마음에 깊이 새겨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政治)에 나타냄이
모두 결함 없이 바르게 되고 또 몸소 실천해서 체득(體得)한 것으로 신하들을 장려하시니
그 때의 좌명공신(佐命功臣)들이 조정(朝廷)에 가득하여 적지 않다할 수 없으나
홀로 선생에게 이것(御筆)으로 사랑함을 표하시니
그 학문과 규모가 넉넉히 이 말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특히 이것을 써서 장려하신 바이다.
선생께서 더욱 뜻을 가다듬어 공정하고 한결 같은 덕으로 나라를 자기 집과 같이 생각하고
험악함을 편안한 것처럼 생각하여 임금을 받들어 세상의 이름난 신하가 된 것이다.
실로 이 빛나는 어필(御筆)이 임금의 마음에서 우러난 글씨로
용(龍)처럼 아름다운 광채 나고
봉(鳳)처럼 솟아올라 지면에 살아 꿈틀거려
여러 세대를 지나도 변하지 않으니 다만 한 집안의 사사로운 영광일 뿐 아니라
실로 온 나라가 함께 높여야할 것이다.
저 중국 오제(五帝) 중 황제가 갖고 있었다는 명궁(名弓)은 하나의 활이지만
헌원씨(軒轅氏)의 손때가 묻은 자취가 있으므로 해서
헌원씨(軒轅氏)의 신하가 활을 붙잡고 사모했으며
옥(玉)으로 만든 그릇은 하나의 그릇이나
주(周)나라의 선생이 가지시던 물건이라 하여 사람들이 진열한 것을 철수하지 않으니
이제 유씨(劉氏)의 소장품인 어서(御書)는 태종께서 친히 쓰신 것이고
또 태종께서 태평성대를 이룩한 방법이다.
이로 인하여 선왕(先王)의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이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어진 신하가 나라에 충성을 다했음을 볼 수 있으니
그 오래도록 믿고 전하여 추모의 자료가 되는 것이 어찌 오호(烏號)와 완염(琬琰)에 비하겠는가?
유씨(劉氏)들이 처음에는 문희공의 영정(影幀)과 함께 한방에 모셨던 것을
후손인 익원(翼源), 두원(斗源), 세원(世源)이 따로 집을 지어 봉안(奉安)하니
임금이 주신 것을 공경하는 뜻으로 수호하는 도리를 능히 다했다할 것이다.
수동현(壽同縣) 서쪽 20리의 숭산동(崇山洞)에 서기(瑞氣)어려 무지개처럼 떠올라
하늘에까지 뻗친 것을 본 사람은 반드시 어필각(御筆閣)인 것을 알 것이다.
참봉(參奉) 금주(金州) 허훈(許薰) 지음.
(그림4) 숭양제(紫岡祠) 어필각(御筆閣)에 모신 조선 태종어필 "公心一視"
이 태종어필은 원래 경북 칠곡군 숭산 숭양제 어필각에 모셔져 있던 것을
1990년대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해천제 문희공기념관으로 이전 봉안되었다.
(그림5) 숭양제(紫剛祠)에 모신 문희공선생 영정(影幀).
이 영정은 원래 경북 칠곡군 숭산 숭양제 자강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1990년대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 해천제 문희공기념관으로 이전 봉안되었다.
태종대왕 어필 “공심일시(公心一視)”가 문희공 선생께 하사하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선암선생문집>에 기록되어 있기를,
[원문] 太宗恭定大王 召諸臣宴于景福宮 謂近臣曰 特心畏寵 當如劉某然後
受天翁之降福 恩遇益隆 聖眷猶未己也 當時佐命勳貴許多 而獨於先生 親寫公心一視四字 以賜之
[한역] 태종 공정왕께서 여러 신하를 경복궁에 불러 잔치를 할 때,
모여든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가짐과 사람을 두려워함이 마땅히 유(劉)모처럼 하여야만
하늘이 내리는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은혜와 대우가 두터워 임금의 사랑이 끝없음을 알만하다.
그 때에, 주변에 좌명공신들이 많이 있었는데
“오직 유선생(劉先生)에게만 친히 쓰신 공심일시(公心一視) 네 글자를 주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실록 8권 기록에 보면,
‘서기1404년 11월16일 태종께서 3공신(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 66명을 경복궁 대청관에 모이게 하시고,
공신사이 협화(協和)를 위해 회맹(會盟)을 가진 후,
무일전(無逸殿)에 나아가 큰 연회를 베풀었다.
이 연회에서 삼공신이 능히 협화(協和)하지 못할까 걱정하신 태종께서는 함께 맹세하여
그 마음을 하나로 됨을 확인하시며,
친히 ‘공심일시(公心一視)’를 써서 문희공에게 만 하사하시었다.
그 의미는 공은 개국에 참여하여 태조대왕을 도왔고,
하나같이 늘 나(태종)를 도와 충성을 다 하고 있음에
군신(君臣)간의 마음이 하나 됨을 기뻐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으신
임금님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로 전해오고 있다.
그 후 고을(인동)유림들은 계정공(溪亭公) 유우석(劉遇錫) 선생의
효행(孝行)과 위선(爲先)의 행(行)함에 그 뜻을 높여 넓게 알리고저 기념하여
남산고개 마루에 자강서원(紫岡書院)을 건축하고 향배(向拜)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애석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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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오산이 명산은 명산이구만~~
산아래에서는 대통령도 2사람이나 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