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하게 대했지만 맏이에 대한 관심 누구보다 더 많았다는 것 이제야 깨닫습니다"
안희두 씨의 아버지 고 안병수 애국지사가 경북 영주의 봉현지서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촬영한 사진. 뒷줄 오른쪽 네번째가 고 안병수 애국지사. 가족 제공.
안희두 씨의 결혼식 당시 찍은 고 안병수 애국지사의 얼굴. 가족 제공.
아버지를 추억할 기회가 되어 아버지의 삶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대구사범학교 시절 백마를 타고 순시를 도는 일왕의 사진이 실린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을 찢어 난로에 던졌다는 이유로 인천소년형무소에서 3년간 고초를 겪으신 이야기 말입니다. 당시 열심히 공부하셨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성적에도 불이익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에 대한 울분이 아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드셨을거라 미루어 짐작합니다.
이런 아버지의 행적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나 알게 돼 아들로써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일하던 때 아버지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인 분을 알게 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 우연히 본 아버지의 등에 있던 흉터가 왜 생겼는지 궁금해 물어봤지만 아버지는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었죠. 그 때는 몰랐지만 그 상처의 이유가 아버지가 일제시절 겪은 고초 때문이었음을 늦게나마 알게 되었던 겁니다. "왜 이제서야 알게 됐느냐" 하던 당시 아버지 주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가슴을 찔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20년이 다 돼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아버지의 영전에 훈장을 드리게 됐지만 너무 늦은 건 아닌가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항상 곧은 성품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어찌보면 일왕의 사진을 찢어 난로에 던져버린 그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지 능히 짐작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경찰과 교사로 일하시면서 늘 청렴하게 사셨던 모습이 지금의 자식들에게도 큰 가르침으로 남아있습니다.
맏이인 저에게는 항상 엄격한 아버지셨지요. 아마도 맏이가 집안의 기둥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에 더 강하게 크라는 뜻이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나이를 너머 더 살아오다 보니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엄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저에 대한 관심은 다른 자식들보다 더 많았다는 것을 이제서야 어렴풋하게나마 깨닫습니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공무원 봉급이 너무나도 박봉이라 우리 일곱 식구가 제대로 먹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식사를 하시면 밥을 어느정도 드시고는 "다 먹었다"며 어느정도 남겨놓으셨던 모습입니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이제서야 아버지가 남긴 밥이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됐습니다.
아버지를 국립묘지에 모시고 찾아갈 때, 그리고 명절과 아버지 기일 때 온 가족이 모입니다.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동생들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인정받고 살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 조차도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나이를 넘었습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가끔 멀어지는 기억에 아버지를 잊을까 걱정도 되지만 결국 다섯 형제 모이면 아버지 이야기에 하하호호 웃습니다.
요즘도 아버지를 문득문득 떠올리면서 강직함과 청렴한 성품을 되새기곤 합니다. 이제 그 정신을 아버지의 손자 손녀를 넘어 제 손자 손녀들에게도 이야기해주곤 합니다. 자식들 걱정 마시고 근심 없는 그 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시기를 자식들이 기원합니다.
[그립습니다] 안희두(대구강북 성균관유도회장) 씨의 아버지 고 안병수 애국지사 - 매일신문 (imaeil.com)
첫댓글 대구사범학교 !! 일제 강점기 최고의 학교 이었지요..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