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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학>, 2013년 봄호.
【집중 조명】
시를 쓰는 일은 ‘자기 추구’를 하는 것
박희진․맹문재
맹문재 선생님, 안녕하세요. 60년 가까이 시를 써오신 선생님께 여러 가지를 배우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한직, 조지훈 선생님의 추천으로 1955년『문학예술』을 통해 시단에 나오셨는데, 지훈 선생님과의 인연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박희진 지훈 선생님은 국문과 교수이고 저는 영문과에 입학했기 때문에 직접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한국전쟁 때 고려대는 다른 대학과 다르게 대구에 임시 교사를 마련해서 수업을 했지요. 저는 생활 거처가 부산이었기 때문에 대구까지 가서 수업을 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서는 부산에서 서울대 동국대 등 여러 대학이 전시연합대학으로 통합 운영된 데서 청강해서 성적표를 고려대에 제출했지요. 그런데 고려대에서 잘 반영해주지 않아 결국 1년 늦게 졸업했어요.
어느 날 지훈 선생님을 뵙고 싶어 대구로 찾아갔어요. 지훈 선생님께서 임시 교사에서 강의를 하시는데 공초 오상순의 시를 평설을 하는 시간이었어요. 처음으로 본 인상은 체구가 육척 거구이시고, 얼굴이 하얗고, 장발이셨고, 또 지독한 근시였어요. 강의하시는 모습을 보니 순하디 순한 양처럼 느껴졌어요. 지훈 선생님의 강의가 끝나자 좇아가서 저는 부산에 있는 영문과 학생이라고 소개하고 나서, 시를 쓰고 있습니다, 혹시 제 시를 드리면 봐줄 수 있는지요, 제 작품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등을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지훈 선생님께서 작품을 놓고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작품을 드리고 나서 일주일 즈음 뒤에 다시 찾아갔어요. 그 분 댁으로 찾아뵈었는데, 편찮으신지 기침을 자주 하셨어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작품 수준이 꽤 높다, 이 정도면 신문이나 잡지 어디를 막론하고 추천을 해줄 수 있다, 라고 말씀해주셨지요. 저는 추천을 바라고 작품을 드린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실제로 문단에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이 끝난 뒤 서울 원남동에서 우연히 지훈 선생님을 뵈었어요. 선생님께서 성북동에 사니까 집으로 놀러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새로 쓴 시들을 들고 선생님 댁으로 찾아뵈었어요. 그 무렵 『문학예술』이 창간되어 발행되고 있었는데, 지훈 선생님께서 추천위원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눈치 보지 않고 선생님의 추천을 받았어요. 『문학예술』 7월호에 「무제」로 첫 번째 추천을 받았고, 11월호에 「허(虛)」로 두 번째 추천을, 그리고 다음해 1월호에 「관세음상(觀世音像)에게」로 최종 추천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문학예술』 1호 시인이 된 것이지요. 지훈 선생님께는 제가 패기만만한 청년으로 비쳤을 거예요.
맹문재 1979년 구상․성찬경 선생님과 함께 ‘공간 시낭독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상임 시인으로 참여하고 계시는데, 어떤 목적으로 창립하셨는지요?
박희진 시의 활성화를 위해서 시작했지요. 시가 점점 쇠약해지고 있어 아무도 돌보지 않고 있는데, 시를 활성화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어요. 그래서 시를 활자화해서 발표하고 시집 내고 하는 것을 보수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좀 더 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 것이지요. 그래서 시의 소리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본래 시는 활자화해서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활자화되면서 시의 생명력이 거세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시 낭송을 생각했어요. 시의 본래적인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시인이 대중 앞에서 직접 육성으로 낭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때까지 시 낭송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자각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하는 시 낭독회는 없었어요. ‘공간 시낭독회가’가 처음이었지요. 현재 회원이 30명 정도 되어요.
맹문재 성찬경․구상 선생님과의 인연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박희진 성찬경 시인과는 6년제 보성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 사이에요. 성 시인은 이과에 있었는데, 순전히 박희진이라는 문학 독충에 쏘여 문과로 옮겨왔다고 말하곤 하지요. 그리고 서기원 씨가 있었어요. 성찬경 시인과 외사촌 간이었어요. 그래서 셋이 아주 절친한 친구로 지냈어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함께 동인지를 내자는 논의까지 했었어요. 제가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창작계획’ 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던 것도 먼저 다녀온 성찬경 시인이 강력하게 권유했기 때문이었어요. 아이오와 대학에 가보니 시 낭송이 아주 일상화되어 있더라구요. 대학에서 시 낭송이 자주 열리는데, 아주 자유로웠어요. 시 낭송을 듣는 청중도 자유로웠고, 시를 낭송하는 시인들도 코믹하고 유머러스할 정도로 자유로웠어요. 그리고 시 낭송을 대학뿐만 아니라 서점에서도 하고 바에서도 하는 등 아주 생활화되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배운 점이 많았어요. 한국에도 미국과 같이 시 낭송이 일상화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돌아왔어요. 그래서 성찬경 시인과 함께 ‘공간 시낭독회’가 생기기 이전에 명동에 있는 카페 데아뜨르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 달 동안 시 낭송을 한 적도 있어요. 김정옥 씨가 연출을 하고, 아이리스 박이 무용을 하고, 그리고 음악 효과와 조명 등을 갖추고 아주 이색적으로 시 낭송을 했지요.
구상 선생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기억은 없는데,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했어요. 그분의 시도 좋아했구요. 나중에 보니 구상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분이 공초 오상순 선생님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공초와 구상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어요. 하루는 구상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더라구요.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건축가 김수근 씨가 자신의 사무실인 ‘공간사랑’을 활용해보라고 여러 차례 제안을 하는데, 거기서 시 낭독회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으로 하는 시낭독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성찬경 시인과 함께 셋이 출발한 것이었지요. 1년을 그렇게 했고, 조정권 시인을 영입해 몇 해 했지요. 조 시인이 그만둔 뒤에 차츰 차츰 회원이 늘었어요. 구상 선생님께서 이상의 「오감도」를 낭송하시는 모습을 뵌 적이 있어요. 시 낭송을 아주 잘 하시는 분이셨어요. ‘공간 시낭독회’가 생긴 뒤 전국적으로 시 낭독회가 우후죽순 격으로 많이 생겼어요. 그렇지만 지속된다는 것이 쉽지 않잖아요. ‘공간 시낭독회’는 35년째 이어지고 있고, 금년 11월에 400회 낭독회를 가져요.
맹문재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공간 시낭독회’가 더욱 활성화되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네요. 다음으로는 선생님의 시세계에 대해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쓰신 4행시가 546수에 이릅니다. 4행시를 쓰시게 동기를 듣고 싶네요.
박희진 뚜렷한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1968년 신문회관 화랑에서 제가 시미전(詩美展)을 열었어요. 일반적으로 시와 그림을 그려서 하는 시화전이 아니라 음악가, 화가, 세계적인 걸작 등과 조합을 이루는, 다시 말해 그들의 사진과 시가 조합을 이루는 색다른 전시였지요. 처음 기획을 해서인지 신문이나 주간지 등에 기사가 많이 나갔고, 시미전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던 선우휘 씨도 와서 보고는 관심을 가져 기사를 내줄 정도였지요. 기사는 제가 추천한 성찬경 시인이 썼지요. 그래서인지 작품이 다 팔려 한 번 더 작품을 걸었는데, 생긴 이익금은 시미전 포스터를 그린 윤명로 판화가에게 다 주었어요. 이익금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때 제가 윤명로 판화가에게 시인 열 명과 판화가 열 명이 함께 작업을 해서 전시회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좋아했어요. 시는 4행에 국한 시키는 것으로 했지요. 그래서 1년 동안 준비 기간을 가졌는데, 시인들이 시 쓰기를 힘들어 해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만 계속해서 4행시를 쓰게 되었지요.
4행시를 써보니까 재미있고 잘 써지는 거예요. 그래서 시가 기승전결의 드라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시의 근본적인 요소가 형태와 운율임을 절감했어요. 제 시의 존재성을 확신하게 된 것이지요.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인데, 자연의 대상이 형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요. 그리고 리듬이 필요하지요. 형태와 리듬이 생명의 현상이에요.
저는 4행시를 절구(絶句)의 현대적 변신이라고 생각해요. 절구가 기승전결로 되어 있잖아요. 4행시가 중국의 절구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지요. 어느 나라이든 정형시가 있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시조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시조는 써보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한 편도 쓰지 않았어요. 4행시를 계속 써서 『4행시 134편』(삼일당, 1982)으로 한 권의 시집을 내었어요. 그 뒤에도 계속 써 어느덧 546수에 달하는데, 제가 국내외에서 가장 많이 쓴 셈이지요.
맹문재 17자 시는 일본의 하이쿠(俳句)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시기는 했지만, 왜 17자 시를 쓰시는지 말씀을 듣고 싶네요?
박희진 17자 시는 저하고 일본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에요. 저는 초등학교 과정을 일본어를 통해 공부했어요.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책을 보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마스터하게 되었어요. 세계문학전집도 일본어로 읽었고, 심지어 잠꼬대로 일본어로 할 정도였어요. 특히 일본의 고전문학에서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를 소개하고 있었는데 잘 외워졌어요. 해방이 되어 상황이 달라져 일본어를 잊고 살았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우연한 기회에 바쇼의 하이쿠 선집을 읽게 되었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이쿠가 잘 읽히고 생동감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이쿠를 110수나 번역을 했는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우리말로 직접 써보고 싶다는 의욕이 들었어요.
제가 하이쿠의 우리말 창작을 17자 시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일본의 하이쿠는 17음절을 지키고 있지만 17자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일본어는 한자를 읽을 때 1자 1음절 원칙을 지키지 않고 다양해요. 따라서 하이쿠는 17음절 시이지 17자 시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한글이나 한자를 1자 1음절 원칙을 지키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하이쿠라고 하지 않고 17자 시라고 명명한 것이에요.
저의 17자 시가 하이쿠의 묘미에 얼마나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독자적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는지도 알기 어려워요. 좋은 하이쿠는 우주적 감각이 번뜩입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뛰어넘으려는 욕구에서 나온 만큼 하이쿠의 오묘함은 대단하지요. 그에 비하면 저의 17자 시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 하이쿠는 본래 제목이 없어요. 저의 17자 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서 번호를 붙이는데, 편의상 붙인 것이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느덧 730수에 이르렀어요.
맹문재 선생님의 4행시와 17자 시를 한층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시들에서는 마침표를 온점이 아니라 동그라미로 쓰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박희진 문장을 쓸 때 구두점을 쓰는 이유는 독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자는 것이잖아요. 오늘의 시인들은 왜 구두점을 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저는 구두점이 있는 것이 더 좋아요. 마침표를 동그라미로 찍으면 점으로 찍는 것보다 선명하게 보이잖아요. 일본 문장들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마침표를 동그라미로 써요. 중국 문장들도 그래요. 우리나라는 해방 후 영어식 구두점을 써 마침표를 점으로 쓰게 된 것이에요. 우리 한글은 발생학적으로 보았을 때 한자의 모양을 많이 닮았어요. 따라서 영어식 피어리드보다 일본식 구두점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맹문재 지난해에 간행하신 시집 『4행시와 17자시』(서정시학)에 들어 있는 시 작품 「시인은……」에 보면 “시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좀 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박희진 저는 시인이란 한마디로 ‘자기 추구’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세계가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지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지요. 그렇지만 절실한 욕구가 있는 거예요. 다른 작가의 작품에 감동을 받으면서 자신도 남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문학하는 행위는 자기 추구예요. 가령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온 어느 독자가 선생님의 개성적인 문체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을 추구해왔을 뿐이야, 문학이라는 길에 나를 추구해왔을 뿐이야, 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자기 자신을 추구하면 자신을 모방하지 않는 작품을 쓰게 되지요. 우리 주변에 자기 자신을 모방하는 데 급급한 시인들이 얼마나 많나아요. 시인은 여러 세대를 살아야 해요. 자시 얼굴이 달라지듯이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해요. 그런 점에서 박목월 시인은 초기 시에서 후기 시까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소나무를 특히 좋아하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박희진 저는 소나무를 매우 좋아해요. 소나무 때문에 살아가요. 나무가 소나무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유독 소나무에 마음이 기울어요.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는 없는 특성이 있어요. 격이 높아요. 그래서 저는 송격(松格)이라고 말해요. 소나무는 나무 중에서 귀공자예요. 귀티가 나는 나무지요. 소나무 송(松) 자의 한자가 잘 보여주잖아요. 소나무는 격이 높아 운치가 있어요. 좋은 소나무 밑에 가 있으면 기분이 좋고 가슴이 뛰어요. 지난해에는 『소나무 수필집』(황금마루)을 내기도 했지요.
맹문재 오랫동안 시를 쓰신 선생님으로서 후배 시인들에게 한 말씀 들려주시지요.
박희진 자기 추구를 진지하게 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릴케가 말한 변신처럼 시인은 자기 혁신을 통해 달라져야 해요. 나방의 모습에서 볼 수 있지요. 대부분의 시인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몰라요. 자기도취 속에서 시를 쓰고 있어요. 그것에서 벗어나야 해요. 자기애의 에너지를 표현애의 에너지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술은 표현이 중요해요. 시론도 읽고 객관성을 확보하는 노력을 해야 되지요. 시인은 죽을 때까지 쉴 수가 없어요. 한 번 시인이 되면 쉴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 영성을 갈고 닦지 않으면 말라버리고 말아요. 시를 평생 써야 할 의무는 없지만, 자기 자신을 모방해서는 안되요. 치사한 미련이지요. 한 가지 일에 몰입하면 깊이 있는 세계에 이르지요. 자기 한계를 초극하는 것이지요. 자기 추구를 철저히 해야 새로운 시가 나와요.
맹문재 앞으로 선생님의 귀중한 말씀들이 새기고 시를 쓰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박희진 : 1931년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 1955년 『문학예술』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 구상․성찬경과 함께 ‘공간 시낭독회’를 창립해 현재까지 상임시인으로 참여해오고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시집으로 1960년 『실내악』(사상계사)을 간행한 후 『4행시와 17자시』(서정시학, 2012)에 이르기까지 34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다.
맹문재 : 시인, 안양대 교수
첫댓글 좋은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교수님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항상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