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사람도 100도씨가 되면 분명히 끓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네.”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100℃』. 1987년 6월민주항쟁을 생생하게
극화한 만화.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홈페이지에 게재됨과 동시에
네티즌으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 민주화운동의
정점이었던 87년 6월항쟁 시기의 엄혹함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최규석
작가 특유의 유머로 풀어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개인의
삶은 모두 버려졌고 어떤 이들은 목숨마저 내걸었다. 그만큼 민주화는
80년대의 절박한 요구이자 열망이었다. 이 책은 고지식한 대학생 영호가
대학에 입학해 처음으로 광주민주항쟁에 대해 알게 되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겪으면서 진지하게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시민의 힘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얻어낸 1987년 6월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확립돼왔는지, 대통령직선제가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러나 과잉되지 않으면서도 진정성이 강한
호소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더불어 민주주의의 의미와 현주소를 그린 부록
‘그래서 어쩌자고?’를 최규석 작가 특유의 촌철살인 유머로 풀어내기도 했다.
습지생태보고서
최규석의 '습지생태보고서'는 지나치게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만화다. 유머는 곳곳에 스며 있지만, 그것은 광소(狂笑)라거나 급박한 반전이 자아내는 웃음은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왜 작은 것에만 분개하는가"란 김수영의 시구가 딱 들어맞는 내용의 작품. 궁상맞은 자취생활에서 비롯되는 일말의 사회의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 중생의 현저한 욕망이 균형있게 '공존'하는, 혹은 불가항력으로 '혼재'하는 일상이 최규석 만화의 근간이란 얘기다. 그러므로 햇볕도 없는 '습지'에 사는 이들의 '생태'를 그리는 이 작품은 한편의 짧은 '보고서'가, 맞다. 그랬을 때 만화가 표상하는 어떤 판타지는 현실과 조우하되 과도한 사회의식에 질식사하지 않을 수 있다. 최규석이라는, 이 젊은 만화가는 그런 종류의 가능성을 이 책에 한껏 담아냈다. 이 만화가 '그저' 웃으려고만 그리는 만화가 아니란 건, 1화부터 알 수 있다. "하위 종(種)의 남루함을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로 시작해 "이종(異種)으로서의 의태(擬態)가 가능한 상황하에서는 순간적으로 행동 양식이 돌변하기도 한다" 로 끝나는, 얼마만큼의 씨니컬함이 스며든 성찰적 인식은 이 만화가 어떻게 변할지를 슬쩍 보여준다. 이런 다소의 사회의식은 주인공의 대사에도 섞여든다. 이를테면 "도대체 어느 지역의 커피 가격이 5만 원을 상회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략) 그럼에도 쪼잔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전국의 가난한 자취생들에 대한 모독이며... (중략) 게다가 사내라는 말로 내 정체성을 한정함으로써 남자는 대범해야 한다는 수구적 가치관" 운운하며 쏘아붙이는 얘기들이 바로 그 실체이다. 또, '현장체험학습(1)'에선 룸싸롱 알바를 전전하는 주인공이 "그곳에는.../닮고 싶지 않지만/언젠가 닮아 버릴지도 모를 모습들과/연민인지 경멸인지 모를 감정이 있다./그리고 그곳에는.../타인의 슬픔을 피해 달아나는 빠른 발걸음이 있다."
라고 나직하게 독백하는 모습은 그의 떠들어댐이 단순한 겉치레나 거대서사가 아님을 입증한다. 사실 극중 최군이 담당하는 장광설은 일종의 '멍석'이다. 왜냐하면 만화의 결정적 임팩트는 촌철살인의 한마디에서 비롯되는 거니까. 비유하자면, 강속구 투수의 슬로우 볼이란 더 극적이고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얘기다. 예컨대 "시련은, 부자에겐 가지 않아", "진실은 통한다고 믿는 거야?"라는 녹용의 멘트, "웃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는 거야!!"나 "가질 수 없다고 해서 자신을 속이진 마!" 같은 씁쓸한 웃음, '아버지 용돈이 4만 원'이란 자각에 "그냥 연애야. 죄 짓는 게 아니고... 남들 다 하는... 그냥 연애." 라고 힘들고 어렵게 내뱉는, 하지만 어쩌면 솔직한 발언들. 한편으로는 또한, 이런 반전의 웃음이 구성지다. 친구들에 대한 감회에 잦아들어 '안분지족'을 느끼다가도 "잘 데가 없다"는 깨달음에 "c8... 성공하자!"로 급변하는 한마디, 실연했던 찌질이 친구의 재회에 "차라리 부자에게 가줘! 욕이라도 할 수 있게..." 등등의 대사들은 웃음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책장을 넘길 수 있는 미덕을 지니기도 했다. 그렇게, 소위 '찌질이'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한 인식과 거부감 사이의 불균형하고 미성숙하게 드러난 작가의식은 동질적 군상(群像)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올바름'과 '웃음'에 대한 강박 사이에서 작가가 선택한 건 '공감'인 셈이다. 비록 조금 불완전하고 설익었을지라도, 한껏 교집합을 넓혀갈 수 있는 그 각자의 내용이란 얘기. 그것은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 날에 한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에의 두려움을 한가득 품고도"란 작가의 언설들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교감'의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울기엔 좀 애매한
이 책에서 작가는 미술학원에서 대학입시 만화 강사로 일했을 때 경험한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우울한 현실을 특유의 자학 개그와 위악 독설로 보여준다. 안타깝게 생긴 외모에 중년 아저씨 포스를 내뿜는 자타 공인 불가촉 루저 강원빈, 좋은 대학에 붙고도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재수생이 된 류은수, 학생들한테 서슴없이 독설을 퍼붓지만 실은 찌질한 인생들에 더 애정을 갖는 '악마 티처' 정태섭을 중심으로 입시미술학원 만화반에서 벌어지는 1년 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은 없는 이야기
1318 만화가 열전 시리즈 2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롭고 다양한 틀을 만화가 최규석이 자신만의 우화로 들려준다. 작가는 한진중공업사태, 비정규직 문제 등 우리가 직면한 사회문제들을 상기시켜 주고, 그런 사회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 것인지에 관한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또 약자들간에도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우위에 서려는 개인의 불편한 욕망을 꼬집기도 한다. 가위바위보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마을에서 손을 다쳐 매번 질 수밖에 없는 사람의 부당한 현실(「가위바위보」)은 우리 사회에서 과연 ‘법’이라는 것이 약자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며, 저절로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숲의 질서가 파괴되어 가는 과정(「숲」)은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경쟁에 끼어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을 풍자한다.
이밖에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 현실을 다양한 알레고리로 풀어냈다. 만화가 최규석의 문학적 성취가 빛나는 작품이자 완성도 있는 다채로운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책은 천천히 여러번 읽으며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우화다.
책에 실린 우화 일부는 어린이인문교양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코딱지만 한 이야기」로 연재하던 것을 내용을 손봐 그림을 다시 그린 것으로, 여기에 만화 형식의 우화들과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단편들을 새롭게 덧붙였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치킨집 간판에는 어느 곳 할 것 없이 닭다리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닭 그림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단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스쳐지나가는 아이러니들. 사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어떤 생명의 죽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콕 집어내 씁쓸한 현실과 유쾌한 웃음으로 버무린 블랙 코메디 「사랑은 단백질」등, 심상치 않은 단편만화들이 가득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책으로 출간되기도 전 2003년 독자만화대상 단편상을 수상하여 화제에 오른 「공룡 둘리」를 비롯, 신인답지 않은 신인 최규석의 첫번째 단행본이다. 귀여운 공룡 둘리가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잘려 더이상 마법을 쓸 수 없는 노동자 둘리와, 몸을 파는 또치, 외계연구소의 생체실험에 쓰이게 된 도우너와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하는 희동이. 그들의 모습은 명랑만화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며, 일상에 배어있는 그 슬픈 패배감은 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큰 메아리로 다가온다.
김현주.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