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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자살론』
* 머리말
뒤르켐은 “결혼, 이혼, 가족, 종교, 군대 등의 제도는 명확한 법칙에 따라 자살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법칙 중의 일부는 수치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제도는 실재하고 살아 있는 능동적인 세력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도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통해서 제도들이 개인으로부터 독립된 존재임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설사 개인이 그러한 세력의 형성에 한 요소로서 참여한다 하더라도, 일단 형성된 세력은 개인을 통제한다.”
* 서론
- 자살: 자살자 자신이 그 결과를 알고 행하는 적극적 또는 소극적 행위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결과로 인한 모든 죽음의 경우를 뜻함. (자살미수: 자살과 같이 정의할 수 있으나, 실제로 죽지는 않은 경우)
- 자살은 흔히 생각하듯이 다른 형태의 행위와 무관한 전적으로 유별난 집합, 기괴한 현상만 모아 놓은 고립된 범주를 형성하는 것이 아님. 오히려 수많은 중간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다른 형태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실은 그저 일상적 행동의 과장된 형태일 뿐이다”)
-> 뒤르켐은 자살을 서로 관계가 없으며 따로따로 연구해야 할 개별적 사건으로 보는 대신, 한 사회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일어난 자살을 전체로 보기로 함. 그는 전체가 하나의 통일성, 개별성 및 그에 따른 스스로의 본질을 가진 독자적인 새로운 현상이라고 봄.
- 자살 건수는 몇 년 동안 매우 한정된 범위 안에서 변화하다가 갑자기 급격한 상승이 일어나고 이어 반복된 진동 끝에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다가 결국 고정됨.
-> 왜냐하면 사회적 균형의 붕괴는 갑작스런 일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붕괴의 결과가 완전히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 그러므로 자살 수치의 변동은 독특하고 연속적인 파동운동을 하면서 돌발적으로 변화가 발생하여 한동안 발전하다가 또 다른 갑작스러운 변화가 올 때까지 정체됨.
- 모든 사회는 역사의 매 순간마다 자살에 대해 특정한 경향을 보임. 이러한 경향의 상대적인 강도는 전체 자살자의 수와 연령 및 성별, 전체 주민 수와의 비율로 측정 가능.
- 자살률은 사망률보다 훨씬 더 각 사회집단의 특성을 잘 나타내는 지표로 생각할 수 있음. 자살률은 각 사회의 국민성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각 사회의 자살률 서열은 시기가 달라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
-> 자살률은 그 안정성과 변화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통합적이고 확정적인 사회적 질서. 이러한 자살률의 안정성은 서로 고립된 한 무리의 독특한 특성들의 결과이며, 이 특성들은 서로 다른 부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효과를 미침. 그리고 자살률의 변화는 한 사회의 고유한 성격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그러한 특성들의 구체성과 개별성을 입증해 줌.
- 뒤르켐은 “사회마다 일정한 수효의 자발적인 죽음을 발생시키는 경향이 있고,” 이를 해명하는 것을 그의 연구주제로 삼는다
제 1부 1장 자살과 정신질환
*자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추측하는 비사회적 원인: 신체적-심리적 영향, 물리적 환경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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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에스퀴롤 “자살은 정신이상의 모든 특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간은 정신착란 속에서만 자살을 시도하고 자살한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말함
-그럼 모든 자살을 정신이상의 결과로 보아야 하는가? 정신질환을 깊이 연구하고 보다 많은 정신질환자들을 경험하고 관찰했던 사람일수록 위의 질문을 긍정하는 경향이 있음
-1845년 부르댕 박사의 발표 1)자살 그 자체가 질병(정신병의 특이한 형태) 2)자살 자체가 별도의 정신질환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한 가지 혹은 몇 가지 정신질환에 의해 나타난 사건에 불과하며, 건전한 사람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함 (에스퀴롤의 주장)
-만일 자살이 그 자체의 특성과 독특한 진행경과를 지닌 정신병인 것으로 밝혀진다면, 즉 모든 자살자는 미친 사람이라면,,,정말 자살이라는 정신병이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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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자살 성향은 특수하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만일 자살이 일종의 정신병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 가지 행동에 국한된 부분적 정신병일 것. 즉 자살이라는 한 가지 목적에만 국한된 정신착란증이라고 해야 함. 전통적인 정신병리학에서는 이런 제한적인 정신착란증을 편집광(모노마니아)이라 부름.
-편집증은 충동에 있어서 한 가지 극단적 감정, 상상에 있어서 한 가지 잘못된 환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정도가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노예화한 상태. 그런 열망이 지나치게 커져서 다른 모든 대뇌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가 되면 병적인 과대망상의 편집증이 됨
-자살은 어떤 비정상적인 열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음, 더욱이 자살자는 자기파괴라는 특별한 행위 이외에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으므로 일반적인 정신착란증 환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임
-정신질환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면, 편집광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편집광이란 병명으로 불려온 부분적 장애는 광범위한 혼란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 자체가 병이라기보다는 보다 일반적인 질환의 특수하고 이차적인 표현인 것임. 그러므로 편집광이 있을 수 없다면 자살편집광도 있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자살은 정신병의 한 형태가 아닌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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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자살이 정신이상자에게만 일어나는 행위인지 알려면 정신이상에서 발생되는 여러 가지 자살형태를 확정하여 과연 그러한 형태에서만 자살이 발생하는가를 알아내야 함
1. 조병자살: 환각이나 착란에 기인. 환자가 가상의 위험이나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는 신이 내린 신비한 소명에 복종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임. 대표적인 특징은 극단적인 변동성, 즉 매우 다양하고 상충되기까지 하는 관념과 감정이 조병환자의 의식 속에서 급속도로 잇달아 일어남. 한 가지의 정신적 상태가 즉각 다른 정신적 상태로 뒤바뀌는 것임
2. 우울증 자살: 극단적인 우울과 과도한 슬픔이라는 일반적 상태와 관련되어 환자가 주위 사람들 및 사물들과의 유대를 더 이상 건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에 일어나며 그러한 느낌이 만성이 될 때 자살에 대한 충동도 뿌리를 내림. 매우 집요하다는 특징을 지님.
3. 강박증 자살: 동기도 없이 일어나며, 뚜렷한 이유 없이 환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관념이 굳어지면서 일어남. 본능적인 욕구에 시달림(물건을 훔치고자 하는, 살인하고 싶은, 방화하려는 욕구 등등)
4.충동적 혹은 자동적 자살: 아무런 동기 없이 일어나나, 다만 짧거나 긴 시일에 걸쳐 마음을 사로잡고 점차 자살하고픈 의지를 일으키는 강박관념이 굳어지면서 급작스럽고 저항할 수 없는 충동에서 일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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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정신이상과 균형 잡힌 지성 사이에는 수많은 중간단계들이 있는데 대개 신경쇠약이라고 불리는 질병들임. 그러므로 정신이상에 의한 자살을 제외하고, 자살이라는 현상의 원인에 신경쇠약증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신경쇠약이 자살을 쉽게 일으키는 이유가 될 수도 있는데, 기질적으로 고통을 받기 때문(저항력이 약하고 모든 인상이 불쾌감의 원천이 되며 모든 행위에 지치게 됨)
-개인적인 조건이 자살의 발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러한 조건 자체만으로도 상황의 도움이 따른다면 자살을 일으킬 있을까? 아니면 그러한 조건은 단순히 개인을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자살 현상의 유일한 결정적 원인이 되는 힘에 보다 가까이 접근시키는데 불과한 것인가? 자살수의 변화를 신경쇠약자수의 변화와 비교해 봐야함 (신경쇠약자 수의 변화는 정신병 환자 수에 비례)
-자살의 사회적 원인이 도시 문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대도시에서 자살률이 높다는 점에서 병신병과의 관계는 우연의 일치라는 가설이 더욱 타당할 것
-정신질환에서의 자살의 원인으로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면, 정신질환이 자살에 미치는 특유한 영향이 나타나야 할 것, 그리고 역으로 개인적 조건과 상충할 경우에 사회적 조건이 나타날 수 없어야 함. 아래의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법칙이라는 것을 보여줌
1.정신병원에 수용된 환자의 경우에 모든 통계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약간 더 많다
2.종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정신질환의 정도를 보여줌 (p61 참조)
3.모든 나라의 자살 경향은 유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일정하게 증가하고 있다
4.자살과 정신병이란 두 가지 관점에서 여러 사회들을 비교해 보아도 두 가지 현상의 변동에는 아무런 관계가 발견되지 않음
5.지난 1세기 동안 정신병이 계속 증가했으며 자살 떠한 그러했으므로 양자가 상화관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음
-사회적인 자살률은 정신병의 경향과 분명한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귀납적으로 보아도 여러 형태의 신경쇠약증과도 분명한 관계가 없다
-신경쇠약자들은 환경에 살아남을 수 있게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제거하려 하는 비사회적 부류가 아니다. 그들의 특수한 심리적 상태에 다른 원인이 부가되지 않는 한 그들의 삶은 자살 경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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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악의 근원으로 여겨지던 특별한 정신질환 ‘알코올 중독’, 이것이 자살의 증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어떤 일치가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우연에 불과하며 아무런 규칙적 관계도 입증되지 않음. 즉 정신질환은 자살에 대해서 규칙적이고 명백한 관계를 지닌다고 볼 수 없으며 한 사회의 자살자 수는 신경쇠약자나 알코올 중독자의 많고 적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형태의 정신적인 결함이 개인이 자살하게 되는 심리상태를 만든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결함 자체는 자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비슷한 상황 아래서는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이 건전한 사람보다 자살하기가 더 쉬우나 반드시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이러한 잠재성은 앞으로 발견해야 할 다른 요인들의 작용을 통해 효력을 나타내는 것임
제2장 자살과 정상 심리-인종과 유전
자살에 대해 몇몇 저술가들은 그것이 인종별로 제각기 고유한 자살률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로 이해되어져 왔다. 뒤르켐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살이 어떤 체질적 특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입증되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 인종
뒤르켐은 사람들이 흔히 인종을 고유의 특성을 지닌 개별적 무리로 구별하고 있지만, 사실상 인종은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라틴 인종과 앵글로 색슨 인종의 정확한 차이를 거의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과학적 정확성 없이 자기 나름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뒤르켐은 “사람들이 뒤섞여 살며 역사의 용광로를 거치는 동안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인종들은 독자성을 거의 다 상실할 정도로 서로 혼합되고 말았다.”고 보고 있다. 혹여나 “독자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단지 애매하고 산발적인 특징만 불완전하게 섞여 있을 뿐, 신체적 특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키와 두개골의 구조에 관한 불확실한 자료를 근거로 구성한 인간의 유형은 사회 현상의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일관성과 확실성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원시 인종은 고생물학의 연구 대상일 뿐이라고 명명하면서, “오늘날 보다 작은 집단을 이루게 된 인종은 혈연보다는 문명에 의해서 맺어진 사람들 또는 그들의 사회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본다면, “인종은 오늘날 민족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 유럽 내 인종 유형별 자살률 비교
뒤르켐은 인종을 “오늘날 민족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명명하긴 했지만, 어쨌든 유럽 내에서 공유되고 있는 큰 인종 유형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비교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면서 만약 “하나의 인종으로 분류된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똑같은 자살 성향을 보인다면” 인종별로 고유한 자살률을 지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연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분석 결과 같은 인종에 속하는 국민들 사이에서 큰 차이가 나타난다.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슬라브족은 낮은 자살 경향을 보이지만, 보헤미안인과 모라비아인은 예외이다. 켈트만족 중에서도 프랑스가 자살률이 가장 두드러지고 같은 시기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그보다 더 낮은 자살률을 보인다. 게르만족을 분석해도 게르만족 가운데 일반적으로 독일인만이 자살 성향이 강하다. 뒤르켐은 유럽 내 인종 유형별 자살률을 비교해 본 결과 “사회와 소위 민족 집단을 차별화하는 요소는 오히려 문명수준의 차이”였다고 밝히고 “인종은 실제로 자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역으로 국가 내 인종별 자살률을 비교하면서 “사회와 소위 민족 집단을 차별화하는 요소는 오히려 문명수준의 차이”임을 논증한다. 뒤르켐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살고 있는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자살률을 분석 비교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둘의 자살률이 거의 같음을 알아냈다. 즉,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살게 되면 그들의 자살 경향은 거의 같은 것”이 되었다. 따라서 “상이한 환경 아래서 관찰된 자살률의 차이는 인종과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게르만족과 라틴족 상이에 나타나는 자살률의 차이도 마찬가지인데, 뒤르켐은 스위스에 살고 있는 이 두 인종을 비교 분석하여 입증해 낸다.
* 자살과 유전의 관계에 대한 해명: 자살과 유전은 관계없다.
뒤르켐은 공공연하게 믿어지고 있는 테제, 즉 “자살이 유전된다”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그는 자살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예가 없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집안의 대대적인 자살의 반복이 자살이 유전으로 명백히 이어지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대를 이어 결핵 환자가 되는 사례는 많지만, 학자들이 결핵이 유전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과 같은 이치로, 다만 그러한 것에 전염되기 쉬운 기질을 물려받은 것처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물려 받은 것은 병 자체가 아니라 발병하기 쉬운 기질적 조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유전적인 자살이 흔한 것과 자살이 유전적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다르다고 본다. 그저 같은 빈도가 많거나 적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전체 자살에 대한 비율이 제시되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전체 자살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유전에 의한 선례가 있음이 밝혀진다면 두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관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는 데 꼭 필요한 관찰이나 비교가 대규모로 실지되지 않았고 그저 약간의 재미있는 일화들이 인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매번 그 인용이 재생산되어 확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것은 그저 여러 가지 원인들이 우연히 합쳐져서 일어난 것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더욱이 그 정보들마저 어떤 면에서는 서로 모순된다. 예를 들어 뤼 박사는 자살 경향을 지닌 39명의 정신병 환자들 중에 가족 가운데 자살 경향의 선례가 있는 환자는 단 한 건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브리에르 드 부아몽의 경우도 265명 중 11명만이 그런 선례를 발견했다. 카조비는 60명 중 13명, 바이에른 비장의 통계에는 1백 건 중 13건이 유전적 선례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러한 통계는 자살의 유전적 세습이 적다는 것만을 밝혀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 유전적으로 자살이 전해졌다고 확정하려면 그 사건들의 외부요인이 없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뒤르켐은 유전도 중요하지만 자살이 유전되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유전되는 것은 일반적인 정신질환, 즉 우발적으로 자살을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되는 약한 신경이다.” 즉, 자살 그 자체가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뒤르켐은 “자실은 전염성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 전염성은 체질상 일반적으로 암시에 쉽게 빠져들고 특히 자살이라는 암시에 쉽게 끌리는 사람들에게 흔하다.” 따라서 이러한 설명은 “자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가족”을 해명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자살 방법의 유사성은 자살이 유전한다는 또 다른 증거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이것은 ‘전염성’과 관련해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72년 어느 병원의 어두운 복도에서 같은 갈고리에 15명의 환자가 연달아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그 갈고리를 제거하자 자살의 전염이 그쳤다. 이와 비슷하게 불로뉴에 있는 한 부대의 초소에서 어느 병사가 자기 머리를 쏘아 자살한 후 며칠 사이에 같은 장소에서 모방 자살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러나 그 초소를 불태우자 자살의 전염도 그쳤다. (96쪽)
뒤르켐은 위의 사례들은 “강박관념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는 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살하려는 생각을 일으킨 물질적 대상이 사라지자 자살의 전염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의 반복된 자살도 이러한 강박관념과 관련이 있다.
어느 19세 소녀는 숙부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정신병이 유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그녀 자신도 머지않아 그런 슬픈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박관념이 되었다. 그녀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그녀의 부친이 자살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살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절대적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 일어날 자살밖에는 생각지를 않았고, ‘나는 아버지나 숙부처럼 죽을 것이다! 나의 피는 그렇게 되도록 감염되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했으며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녀가 자기 아버지라고 믿고 있던 사람은 그녀의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녀를 공포에서 구해내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는 사실을 고백했고, 친아버지와 만나게 해주었다. 친아버지와 그녀는 매우 닮았기 때문에 그녀의 의심은 사라졌다. 그녀는 바로 자살을 포기했고, 차츰 명량함을 되찾고 건강도 회복했다. (98쪽)
그러므로 “자살이 유전한다는 주장에 유리한 사례들은 자살의 유전을 증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오히려 그런 사례들은 다른 원인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심리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간과한 통계적 사실은 자살이 유전한다는 가설에 일치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만일 사람을 자살하도록 하는 유전에 의한 기질적 심리적 결정요인이 있다면, 그 요인은 남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거의 비슷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살에는 성별이 없으므로, 유전이 여자보다 남자를 더 자살하게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자의 자살은 아주 적으며, 남자에 비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동들의 자살률에도 사회적 환경의 차이가 발견”된다. “아이들의 자살은 대도시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 뒤르켐은 대도시의 아이들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며, 그러한 문명의 영향에 일찍 노출되는 점 때문에 대도시 아이들의 자살률이 높다고 본다.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노년층의 통계 결과도 유전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년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극히 드물다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계속 증가하고, 노년층 사이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선천적인 질병”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살의 특징은 생애의 일정한 시기에만 일어나지 않고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이 지속된 증가는 자살의 원인도 나이를 먹음에 따라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유전은 정의 그대로 즉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3쪽)
뒤르켐은 인종과 유전이 자살률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의 논증을 마치며 이렇게 말한다. “자살은 사람이 사회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따라 더 일찍 또는 더 늦게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사회활동에 깊이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증가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짓는다.
의심할 여지없이 자살은 개인의 체질과 다르면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자살을 일으키기 가장 쉬운 개인적 상태는 정신병의 경우를 제외하면 결정적이고 자동적인 경향이 아니라, 다만 일반적이고 막연한 경향에 불과하다. 이 경향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다. 이 경향은 자살을 허용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자살을 일이키는 것은 아니므로, 자살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104쪽)
제 1부 제 3장 자살과 우주적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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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자살률의 변화 가운데 일부는 사회적 원인을 들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진 비사회적 요인은 기후와 계절별 온도뿐임
-모르셀리의 이론은 자살은 유럽의 남부와 북부에서 가정 적고 중부에서 가장 많은데, 이러한 가설을 내세우려면 사실관계가 철저히 일치해야하나 그렇지 못하고 자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함
-지역의 모양을 보면 기후가 높은 자살률의 원인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중심을 벗어난 여러 나라에서는 북쪽이든 남쪽이든 중심에 가까울수록 자살률이 높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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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몽테스키외는 춥고 안개가 많은 나라에서 자살이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고 사람들도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지만, 오늘날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이 이론은 전적으로 부정됨, 즉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은 겨울 가을도 아닌, 자연이 가장 아름답고 기온이 온화한 멋진 계절임. 인간은 삶이 가장 쉬울 때 삶을 포기하며 자살은 언제나 따뜻한 여섯 달에 더 많이 일어나며 이 법칙에 예외가 되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음
-페리와 모르셀리는 기후가 자살 경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 즉 열이 두뇌 가능에 기계적으로 작용하여 자살을 자극한다는 것임. 열은 신경체계의 흥분을 증가시키는데, 따뜻한 계절에는 신체가 적당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열량을 소비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결과 축적된 에너지가 분출구를 찾게 된다는 것임
-이런 이유로 여름에는 활동이 넘치게 되고 소모되어야 할 넘치는 생명력이 난폭한 행동으로 표출되며 자살은 그러한 표출의 일종이라는 것임. 뿐만 아니라 정신병도 여름에 많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나 실제로는 사실과 거리가 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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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열이 어떤 사람들에게 자살 충동을 강화시키는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자살 충동을 누그러뜨리는 영향을 미쳐 그 영향이 상쇄되고 감소되어야 함. 따라서 열은 통계 자료를 통해 파악 가능한 유형으로 나타날 수 없고, 통계에 나타나는 계절적 변화는 다른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함
-기온에 대한 자살의 독립성은 자살률을 계절별이 아닌 원별로 살펴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남 (1월~6월까지 매월 규칙적으로 증가, 그 후부터 연말까지 규칙적으로 감소)
-기온이 영향을 미친다면, 자살의 지리적 분표에 동일한 영향을 미쳐야 함, 즉 가장 더운 지방에서 자살이 가장 많아야 한다는 것임. 열이 자살과 같은 난폭한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추론은 명백한 것이어서 이탈리아 학자들은 기온이 높을수록 살인의 경향이 증가한다는 것을 입증할 때도 이에 의존하고 있음
-롬브로소의 주장은 자살을 일으키는 것은 열의 강도가 아니라, 추운 계절이 끝나고 더운 계절이 시작될 때 발생하는 첫 번째 더위라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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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연간 자살자들의 월별 비율을, 같은 시기에 낮의 평균길이와 비교해 본다면 두 수치가 정확하게 같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같은 순간에 최고치 최저치가 발생하는데 그 중간에 두 수치는 서로 보조를 맞추어 변화함. 낮의 길이가 빨리 길어지는 기간에는 자살률도 증가(1월~4월)하고 낮의 길이가 서서히 감소하는 기간 동안에는 자살률도 서서히 증가(4월~6월)함. 감소하는 기간 동안에도 두 수치의 변화는 여전히 일치함
-즉 낮의 길이와 자살자 수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낮이 이러한 영향을 일이키는 원인은 태양이나 기온의 작용이 아닌 그때가 가장 활동적인 시간이기 때문에 즉 인간관계가 가장 빈번하고 사회생활이 가장 집중되는 시간이기 때문임. 낮이 길어질수록 사회생활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며 자살은 사회적 조건에 의존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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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모방
1. 모방의 정의
에밀 뒤르켐은 모방에 대해 세 가지의 예를 들고 있다. ①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비슷한 원인의 영향으로 동일하게 생각하도록 느끼는 평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동시에 느끼는 의식 상태의 특성이 모방이다. 또한 ②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주변의 생각이나 행동방식을 따르도록 만드는 충동이 있다. 끝으로 ③단순히 모방을 위한 모방이 존재한다.
①의 경우에 같은 의식과 감정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행동은 다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모방이라고 할 수 없으며 ②의 경우에는 주체의 선택에 의한 행동이므로 모방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모방은 ③의 경우이다. 다시 정의하자면
모방은 (…)실행을 주관하는 재현 행위의 본질에 어떤 명시적, 암시적 정신작용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p140)
이 부분은 즉각적으로 프로이트를 생각나게 한다. 프로이트를 떠나서도 과연 어떠한 정신작용도 하지 않는 모방은 어떻게 가능한지 되묻고 싶게 만든다.
모방이 자살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순전히 모방 그 자체로 자살이 일어나는 경우와 다른 요인들이 섞여있는 경우다. 뒤르켐은 만일 자동적 재현에 의해 사람들이 자살한다면 모방이라는 이 용어로 모든 것이 설명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방과 다른 작용(관습을 지키고 도덕에 순응하는 행위)들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경우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방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위에서 추측으로 개략적으로만 묘사한 집단 감정이 일어나는 복잡한 과정의 분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p140)고 말하고 있다.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한 연구는 아니다. 다만 모방이라는 단어로 은폐해왔던 그간의 통념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뒤르켐은 상호적 모방을 중심으로 과연 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호적 모방은 매우 사회적인 현상이다. 상호모방은 공통된 감정을 협력하여 가다듬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습과 전통의 반복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원인에서 나온 결과이다. 집단적 믿음이자 관행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무적 성격과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기 때문이다.(p141)그리고 자살이 ‘상호적 모방’으로 퍼진다면 자살은 개인적인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살이 ‘상호적 모방’으로 퍼진다면 자살은 개인적인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개념 정리를 하자면 ①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의 평준화 ②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주변을 따르는 충동 ③단순히 모방을 위한 모방에서 뒤르켐은 ③을 모방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③은 이 장에서 사용한 전염이라는 개념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용하는 모방이라는 용어에 가장 가까운 것은 ②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본격적으로 논의를 진행하면서 사용하는 모방이라는 단어는 실질적으로 상호적 모방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2. 모방과 자살
뒤르켐은 모방으로 인한 자살의 영향이 실재한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가정을 세운다. ①모방을 한다는 것은 방사의 중심이 존재한다. ②따라서 중심부는 주변부보다 높은 자살 경향을 보여야한다. ③중심부는 외곽 지역으로부터 주목을 받아야 한다.(대도시에서는 다른 곳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④다른 조건이 같다면 모방의 힘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약화된다.
그는 프랑스의 군을 단위로 해서 5년간(1887~1891)의 자살 분포를 표시한 지도를 작성했다. 도 단위로는 어느 정도 모방이라는 이론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군을 단위로 들어가면 그런 주장은 부정된다. 왜냐하면 상당히 많은 도시에서 주요 도시가 아닌 위성도시나 군이 자살률 선두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뒤르켐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런 분포도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자살이 특정한 중심에서 바깥으로 점차 약하게 방사하는 형태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분포한다기보다는, 중심을 갖지 않고 대체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면서 분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집단화는 모방의 영향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자살이 도시마다 서로 다른 지역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기보다는, 자살을 결정하는 조건이 언제나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p151)
그리고 이러한 분포는 사회적 환경의 특정한 상태에 의존한다면 이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환경 상태는 넓은 지역에서 동일성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적 환경이 갑자기 달라지는 곳에서는 자살률도 갑작스럽게 변동한다는 점을 들어 설명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아울러 인접한 지역이라도 오히려 종교의(독일과 스위스) 영향력에 따라 자살률이 변동하고 있다는 점도 말하고 있다. 끝으로 신문의 영향력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보다 신문이 활성화 되어 있는 나라(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자살률이 낮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모방의 영향력은 약하다고 결론내고 있다.
3. 결론
개인과 개인 사이에 자살의 전염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모방이 사회적 자살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확신 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p155)
뒤르켐은 근본적으로 모방이 자살에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특별한 성향의 사람이 아니라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그 행동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별한 성향의 사람이 아니라면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그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논의를 마치면서 자살에 대한 모방의 영향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말한다. 다만 그 사건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용어사전
1. 모방
① 모방은 순수하게 심리적 현상이라는 것은 사회적 유대가 없는 개인들 사이에서도 모방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관련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모방 할 수 있다. 또는 같은 집단의 일원인 주변 동료를 모방한다. 모방 기능은 그 자체로 사람들 사이에 유대를 만드는 능력은 없다. 기침, 춤 동작, 살인 충동 등은 우연한 일시적 접촉만으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질 수 있다. 지적, 도덕적 공통성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고, 서로 도움을 줄 필요도 없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모방이 일어난 후에 이전보다 밀접하게 관계가 될 필요도 없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방식은 자연의 소리나 사물의 모양, 동물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것과 같다. 자연을 모방하는데 사회적 요소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모방하는 데도 사회적 요소가 없다. 모방은 집단적 영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표현능력에서 나온다.(p131)
② 도덕과 예절에 순응하는 것은 우리가 본 동작을 기계적으로 원숭이처럼 재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두 가지 행위의 차이는 이성적, 의도적인 행위와 자동적 반사 행위의 차이다. 앞의 행위는 명확한 판단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동기가 있는 행동이다. 뒤의 행동은 동기가 없다. 즉 지적 중간 단계 없이 어떤 행동을 보자마자 바로 일어나는 결과이다.
(…)재현은 단순한 반복일 뿐 아니라 아무런 다른 원인이 없으며 일정한 상황에서 우리를 모방의 동물로 만드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모방이라는 용어가 명확한 의미를 가지려면 위의 세 번째 경우만 지칭해야 한다.(p139)
③ 모방은 다른 사람이 이전에 행한 행동이 같은 행동의 표상이 되어 자기 행동의 직접적 전제가 될 때 성립한다. 이때 표상과 실행을 주관하는 재현 행위의 본질에 어떤 명시적, 암시적 정신작용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p140)
④ 자살보다 더 쉽게 전염되는 사례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전염성은 사회적 현상이 없다는 것을 보았다. 모방이 자살에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이 없다면 다른 현상에는 더 영향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방이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는 생각은 상상이다.
- 상호모방
상호적 모방은 매우 사회적인 현상이다. 상호모방은 공통된 감정을 협력하여 가다듬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습과 전통의 반복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원인에서 나온 결과이다. 집단적 믿음이자 관행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무적 성격과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기 때문이다.(p141)
2. 전염
병리학에서 외부에서 생명체 안으로 들어온 세균으로 질병이 생길 때, 그 병이 전염성이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 병균이 숙주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서만 번식할 수 있다면, 이 경우에 ‘전염’이라는 낱말은 부정확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행동이 정신적인 전염 때문이라고 하려면, 그 생각이 비슷한 행동에 자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단 마음속에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그 자체로 작동해야 한다. 그래야 실제로 전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표상으로 우리 안에 들어 온 외부 행동이 자체적으로 재생되었기 때문이다.(p138)
-유행
① 유행은 사회적 사실이며 사회적 원인으로 일어난다. 반면 전염은 개인적인 현상의 반복일 뿐이다.(p143)
② 어느 사회든지 자살이 발생하는 공통적인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만성적이고 그 사회의 정신적 기질의 정상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유행과는 구별된다. 유행도 역시 집단적 경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므로 나타나는 일이 드물다.(p531)
제2부 사회적 원인과 사회적 유형
제1장 사회적 원인과 사회적 유형의 구분
이 장에서는 자살에 대한 사회적 원인과 유형의 구분을 위한 자신의 연구 방법론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자살의 경향은 단일한 것이든 아니든 개별 사례 속에서만 나타나고 관찰 할 수 있으므로 최초로 해야 할 일은 개별 사례를 관찰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살을 형태론적 유형이나 특성에 따라 분류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다. 우선 ①개별 사례들은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②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간략하며 ③환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밝힌 것은 객관성이 떨어진다. 더욱이 ④결론을 내리기에는 관찰 내용이 적고 ⑤애매하게 구분해서 정확한 분류를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뒤르켐은 다른 연구 방식을 제안한다. 그는 자살 원인이 다를 경우에만 자살 유형이 달라진다는 것을 밝히고 ①자살의 원인에 따라 분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②사회적 조건을 유사성과 차이에 따라 분류해서 특정한 자살 유형을 찾는다. ③그 후에 개인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편적인 원인들이 어떻게 개인화되고 어떻게 자살을 일으키는지 연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에 대해서 뒤르켐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론을 강조하면서 유용성을 밝히고 원인론적 분류는 형태학적 분류를 통해 상호 검증을 할 수 있으므로 완벽하게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는 주제는 ‘사회적 자살률’이라는 것을 밝히고 이에 대응하는 좋은 방법은 통계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제2장 이기적 자살(종교와 자살)
이 장에서 실질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자살의 관계이다.
그가 논증을 하는 방식은 과학 실험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①가설을 설정한 다음(종교는 자살률에 영향을 미친다)에 ②최대한 변수가 제거 되는 상황(종교 조건을 제외한 나머지 조건들이 비슷한 집단)들을 비교한다.
종교가 자살률에 영향을 미친다는 뒤르켐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동질성이 있는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카톨릭보다 개신교를 믿는 국가에서 자살이 많이 늘어났다. ②독일의 바이에른 주에서 자살자의 수는 개신교인의 수와 정비례하고 카톨릭 교인의 수와 반비례한다.(프로이센도 동일한 결과) ③스위스에서 카톨릭 주는 개신교 주에 비해 자살자의 수가 4.5배나 적다.(그 외에도 많은 예를 들어 주장을 보충)
그리고 통계적으로 유대인의 자살률은 언제나 개신교보다도 낮다고 말한다. 하지만 뒤르켐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은 유대인의 자살률 증가는 단순한 종교의 영향이 아닌 복잡한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 가지 종교와 자살률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뒤르켐은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살률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내고 있다. 우선 유대인이 자살률이 적다는 점을 들어 소수이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신중하게 한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적으로 볼 때에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뒤르켐은 세 종교의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를 탐구 정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신앙은 논리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며 자유로운 탐구는 기존의 신념 체계가 흔들릴 때에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즉 종교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열망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과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지식에 대한 탐구는 종교가 통합력을 잃어가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종교가 흔들리기 때문이 아니라 소수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통계로도 입증된다.
그리고 뒤르켐은 다음의 두 가지 결론을 내린다. ①인간은 종교 집단의 응집력 상실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게 되고 또 자살을 하기도 한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p197) ②종교가 자살을 예방하는 것은 하나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용어 사전
종교
1. 종교적 신조는 사람들이 동일한 교리 체계에 밀착되게 하여 집단화시키며, 사람들은 이 교리 체계의 폭과 확고성에 따라 집단화된다. 종교적 성격의 행동방식과 사고방식의 수가 많을수록, 즉 자유로운 탐구에서 멀어질수록 신의 개념이 존재의 모든 측면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며 개인의 의지를 하나의 동일한 목표로 합일시킨다. 이와 반대로 종교가 개인의 판단을 허용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결속력과 지속력이 약화된다.(p184)
2. 종교를 해체하는 것도 인간이 익힌 지식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지식에의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기성관념을 깨기 위한 도구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관념을 깨기 위한 도구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성관념이 파괴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게 된다. 물론 일단 지식이 자리 잡으면 지식 자체로 지식을 위한 목표를 추구하게 될 것이고, 전통 정서의 비판자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 정서가 활력을 유지하는 한 지식의 비판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비파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신앙은 논리적인 증명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신앙이 다른 원인에 의해서 이미 깊이 흔들리는 상태일 때에만 논증의 충격에 버틸 수 없게 되는 것이다.(p198)
3. 종교도 하나의 사회. (…)종교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신실하고 전통적이며 의무적인 여러 신념과 의식이다. 이러한 집단적 정신 상태가 강할수록 종교 공동체의 통합이 더욱 강해지며, 종교의 예방적 가치도 더 커진다. 교리와 의식의 세부사항은 부차적인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교리와 의식이 강렬한 집단적 삶을 지탱 할 수 있다는 것이다.(p199)
- 카톨릭
1. 카톨릭과 개신교 유일한 근본적 차이는 개신교가 카톨릭보다 자유로운 탐구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카톨릭은 그리스-로마의 다신교나 히브리의 일신교보다 사상과 성찰에 큰 비중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인 종교다. 카톨릭은 형식적인 의식뿐 아니라 양심의 통제를 추구한다. 따라서 카톨릭은 양심에 호소하며, 맹목적인 굴종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이성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인은 기성 교리를 성찰 없이 받아들인다. 카톨릭 교인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까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신앙의 근본인 원전에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체 계급 체계는 놀랍도록 정교하게 구성되어 전통을 불변의 가치로 만든다. 카톨릭 사상에 있어 모든 변화는 금기이다.(p181)
- 개신교
1. 카톨릭과 개신교의 유일한 근본적 차이는 개신교가 카톨릭보다 자유로운 탐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훨씬 더 신앙의 주체가 된다. 성경이 그의 손에 쥐어질 뿐 어떤 해석도 강요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구조 자체가 종교적 개인주의를 강조한다. 영국을 제외하고 개신교 성직자는 계급이 없다. 성직자는 일반 신자들과 같이 자신의 양심 이외에 다른 신앙적 근원을 갖지 않는다. 그는 일반 신도들보다 더 가르침을 받은 안내자이지만, 교리를 정할 권한은 없다. 종교개혁의 창시자들이 주장한 탐구의 자유가 관념적인 주장에 그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개신교에서는 카톨릭 교회의 통일성과는 대조적으로 수 많은 분파가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p181)
2. 개신교가 카톨릭보다 더 많은 사상의 자유를 준다면, 그것은 개신교가 공통된 신앙과 의식을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183)
3. 개신교 국가에서는 개개인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초등교육을 매우 강조했다.(p190)
- 소수 종교
1. 주변 사람들의 적대감에 둘러싸인 소수 종교 집단일수록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엄격한 자기통제와 가혹한 규율을 적용하게 된다. 소수 종교 집단에게 주어진 불확실한 관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남보다 더 올바른 품행을 보여야 했다.(p187)
2. 소수 종교에 대한 억압이 심하면 종종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종교적 편협함은 소수 종교인들이 여론을 존중하는 대신 오히려 외면하게 만든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피할 길 없는 적개심의 대상이란 것을 느낀다면, 그는 적대시하는 사람들과의 타협을 포기하고, 오히려 가장 고약하게 보이는 종교의식에 더욱 열을 올릴 것이다.(p188)
반성
1. 반성은 반성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때만 나타난다. 즉 하나의 이념과 본능적 감성이 어느 시점까지 행위를 잘 인도해 오다가, 그 효능을 잃게 되었을 때 반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반성은 균열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반성은 균열을 메우기 위해 나타난다. 반성은 생각과 행동이 자동적인 관습이 되면서 사라지고, 관습이 혼란해지면 다시 나타난다.(p183)
2. 반성은 여론이 영향력을 상실할 때, 즉 여론이 전과 같은 호소력을 갖지 못하게 될 때에만 여론을 장악한다. 이러한 반성의 요구가 때때로 일어나거나 일시적인 위기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 된다면, 개인의 양심이 자율성을 다시 확인하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반성과 양심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충동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며 이미 폐기된 낡은 주장을 대체할 새로운 자장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p183)
제2장 이기적 자살
뒤르켐은 사회적 활동과 자살과의 관계를 이렇게 본다. 사회적 활동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자살률이 더 높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의 응집력이 약한 곳의 구성원들은 자살률이 높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활동은 자살률을 높이는 것인가 줄이는 것인가. 사회적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과 약한 통합력을 가진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높은 통합력을 가진 곳에서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람을 일직선으로 그어 놓고 본다면 자살률은 점차 높아지다가 다시 감소한다. 결국 양 극단으로 갈수록 자살률은 감소한다. 또한 뒤르켐은 두 가지의 자살을 구분하는데 이타적인 자살과 이기적인 자살이다. 여기서는 양 극단으로 갈수록 자살률은 증가한다.
여기서 지젝의 독법을 읽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지젝은 물리적인 자살과 상징적 자살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물리적 자살은 신체적인 기능을 멈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떠나고 싶은 심리의 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소통의 방식이다.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대타자에게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누구와도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우울한 신경증 환자나 정신질환자를 포함 할 수 있다. 하지만 뒤르켐의 정신병의 직․간접적인 이유를 자살의 원인에서 제거한다. 어쨌든 상징적인 죽음은 이러한 메시지의 소통 자체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모든 인간은 상징계에 진입한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활동 할 때보다 사회적 구성원으로 참여해서 상징계의 그물망에 본격적으로 사로잡히게 되면 그 상징적 소통의 중요함은 커지게 된다. 뒤르켐과 달리 지젝식의 독법에서 이타적인 자살과 이기적인 자살의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그것은 신체적 죽음을 통해 타인에게 메시지를 수신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물론 그것이 자발적인 선택인가 혹은 외부의 강요인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세상을 설명하고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인문학만이 가능하다. 과학은 왜 물질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인가에 대해서 중력의 법칙이라고 말하지만 왜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해 줄 수 없다. 뒤르켐이 다양한 가설들을 제시하고 그 결과들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소견을 제시하는 것 또한 인문학적 지식과 개념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제2부 1장 사회적 원인과 사회적 유형의 구분에서 세 종교와 자살률에 말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통계가 아니라 세 종교 개념의 근본적인 차이를 통해서 자살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통계라는 것은 인과관계가 확실히 명확한 것 같지만 다양한 오류와 차이를 걸러내고 하나의 보편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이러한 인문학적 해석을 통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또한 지젝을 읽어야하고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을 한다. 사실 국문학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학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을 볼 때에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을 종합해서 보는 견해가 일반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은 외적 조건과 통계에만 주목한다고 알고 있다.
4
뒤르켐은 결혼 자체가 자살 방지 효과가 있어 보이지만, 그 효과는 매우 제한되어 있고, 한 성(남)에만 혜택을 준다는 것을 밝힌다. 따라서 뒤르켐은 중요한 것은 결혼이 아니라, 가족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혼자의 면역성의 핵심 요소는 가족, 즉 양친과 자녀들로 이루어진 전체 그룹으로서의 가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남편과 아내도 가족의 구성원이므로 면역성을 일이키는 데 참여했겠지만,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즉 가족 집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이다. (235쪽)
따라서 “만약에 한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자살 가능성을 증가시킨다면, 그것은 그들을 개인적으로 결합시켰던 유대가 파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에 재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즉 생존자들이 겪어야 하는 충격 때문이다.” 뒤르켐은 프랑스 각 도의 자살과 평균 가족 수의 관계를 분석하여 “자살자가 줄어들수록 가족의 밀도는 규칙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확인한다. “가장 자살이 많은 집단에는 가족의 수가 평균 이하인 도만 포함”되며, “자살이 아주 적은(···) 집단에서는 모든 도의 가족 수가 평균 이상이다.”
또한 뒤르켐은 자살과 평균 가족 수에 대한 지역별 분석과 자살과 가족 수의 시간적인 변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살은 삶의 어려움 때문에 일어난다는 통속적인 관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한다. 그리고 오히려 “자살은 사람의 부담이 늘어날수록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뒤르켐은 “식구가 적은 가족은 공통의 감정과 추억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소규모 가족에서는 서로를 표현하고 강화시킬 공동의식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성원들 간의 교류가 보다 활발하고 지속적일수록 집단의 통합은 강”하게 된다. 따라서 “가족은 자살에 강력한 예방력이 있으며, 가족이 강력히 통합되어 있을수록 자살의 예방력도 커진다.”
5
이어서 뒤르켐은 정치적 봉기와 자살과의 관계, 선거 위기와 자살과의 관계, 국가 간의 전쟁과 자살과의 관계에 대해 분석을 진행한다. 그런데 분석 결과, 정치적 소요(봉기)나 국가 간 전쟁이 직접적으로 자살과 관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대규모 정치적 봉기가 자살을 증가시킨다고들 하지만 분석 결과 오히려 자살률이 낮아졌다. 그리고 전쟁의 경우에는 농촌과 도시의 자살률 변화에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따라서 뒤르켐은 “대중의 열정을 자극하는 위기만이 그런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들에서 단 하나의 설명만이 가능하다. 사회적 사건이나 국민적인 전쟁은 집단 감정을 일으키며, 당파심과 애국심, 사회 및 국가적 신념을 자극하고, 단일한 목적을 향해 모든 활동을 집중시킴으로 적어도 일시적으로 사회의 통합을 더욱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자살 감소의 영향은 위기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위기가 일으킨 투쟁 때문이다. 위기를 맞아 사람들이 서로 밀접해지고 공통된 위험에 당면하게 되므로, 개인들은 자신보다는 공동의 목적을 더 생각하게 된다. (248-249쪽)
6
뒤르켐이 설정한 세 가지 명제는 이렇다.
자살은 종교 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
자살은 가족 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
자살은 정치 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
뒤르켐은 위의 세 명제를 묶어서 파악해보면 자살의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각 사회의 특수한 성격이 아니라, “세 사회에 공통된 특성임”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가 종교적 감정의 특수성으로 그러한 효과를 일이키는 것이 아님은 가족 사회와 정치 사회도 강력하게 통합되었을 때에는 같은 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즉, 위의 세 명제, 곧 세 집단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특성은 “세 집단이 모두 강력하게 통합된 사회적 집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 집단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이기적인 자살”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개인의 자아가 사회적 자아보다 강력하고, 사회적 자아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의 자아를 주장하는 상태를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지나친 개인주의로 인한 자살을 이기적인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50쪽)
“사회가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을 때 사회는 개인을 통제하며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자살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러나 “개인들이 사회에의 종속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한다면,” “스스로의 삶을 끝낼 권리를 갖는다.” 뒤르켐은 “지나친 개인주의는 자살을 유발하는 원인을 촉발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살을 유도하는 원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나친 개인주의는 자살 의도를 막는 장애물을 제거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자살 경향을 만들어내어 특별한 종류의 자살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뒤르켐은 “개인은 다른 욕구를 갖지 않는 한 충분히 자족할 수 있으며 산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문명사회의 성인은 그렇게만 해서는 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적 삶을 넘어선 이런 삶은(···) 사회적 환경의 요구 때문에 생겨나고 확장된다.” 뒤르켐은 “사회적 인간이야말로 문명화된 인간의 본질이며, 가장 훌륭한 존재 형태”라고 본다. 심지어 그는 “사회만이 삶의 가치에 대한 집단적 견해를 전승할 수”있기 때문에 “개인은 무력”하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개인들은 사회생활을 깊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병이 든다면 개인도 감염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가 앓는 병은 불가피하게 개인들도 겪는다.” “따라서 사회가 해체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생활을 위한 정상적 조건이 손상된다는 것이다.” “좌절과 실망의 물결은 특정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의 해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뒤르켐은 “개인이 극단적 열정으로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순간에도 여전히 사회의 영향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이 아무리 개체화된다 해도 언제나 집단적인 무언가가 남는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기주의가 “자살에 기여하는 요인일 뿐만 아니라 자살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라고 한다. 이기주의로 인해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유대가 느슨해”지고 “삶과의 연결고리 역시 약해진다.”
뒤르켐은 “사생활 문제가 자살의 직접적 계기이자 결정적 원인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우발적인 원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상은 “개인이 사소한 충격 상황에도 자살하는 것은 사회가 그를 자살의 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자가 남자보다 고립된 삶을 잘 견디는 것이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그의 논리는 이렇다. “여성은 남성보다 공동체 생활에 덜 참여하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이 덜 미쳤다. 즉 사회성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사회가 덜 필요하다.” 반대로 남자는 “보다 복잡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외부의 더 많은 요소들에 의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남성이 여성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이유는 남성의 정신적 균형은 보다 많은 사회적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제4장 이타적 자살
* 미개사회에서 나타나는 자살과 이타성
뒤르켐은 미개사회에서 일어난 자살에 대한 고찰로 이타적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덴마크 전사들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불명예로 알았으며, 그러한 치욕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고트족은 자연사하는 사람은 독을 뿜는 괴물로 가득 찬 동굴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고 믿었다.
-서고트족의 변경에는 ‘선조들의 바위’라고 불리는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삶에 지친 노인들은 그 꼭대기에 올라가 몸을 던져 자살했다.
-스페인 켈트족은 자살한 사람은 낙원에 가고, 노쇠나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음산한 지하에 떨어진다고 여겼다.
-고대 인도의 경전인 베다에는 “그는 이 나라의 현인들이 흔히 하는 관습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그들에게는 수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불명예이다. 따라서 노쇠해서 죽은 시신에는 아무런 존경도 표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들은 노인들뿐 아니라 여인들도 남편이 죽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강요했다.
-뿐만 아니라 왕자나 부족장이 죽게 되면, 그의 신하들은 그보다 더 오래 살아서는 안 되었다.
뒤르켐은 이 외에도 여러 사례를 제시하면서 “자살은 원시 부족에서 매우 흔했음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들의 자살에는 무언가 특수성이 있다. 뒤르켐은 이를 3가지로 정리한다.
1. 늙거나 병든 남자의 자살.
2. 남편이 사망한 여자의 자살.
3. 족장의 죽음을 따른 부하나 시종의 자살.
-> 뒤르켐은 이런 경우는 “자살을 권리로 여겨서가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명예를 잃게 될 뿐 아니라 종교적인 제재를 통해 징벌”을 받기 때문에 “자살하도록 사회적 압력이 가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 이타적 자살의 종류
뒤르켐은 이타적 자살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1. 의무적인 이타적 자살
: “이타주의는 자아가 자신의 것이 아닌 상태, 자아가 다른 것과 뒤섞여 있는 상태, 행위의 목표가 자아의 외부에 있는 상태, 즉 자신이 참여하는 집단에 있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극단적 이타주의로 인한 자살을 이타적인 자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살은 또한 의무이기 때문에 행해진다는 특징을 가지므로, 그 점이 명칭에 포함되어야 한다.”
2. 선택적인 이타적 자살
: 의무적인 이타적 자살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유도하는 사회가 있다. 즉 “이런 사회에서는 삶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까지도 미덕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사소한 도발이나 허세로 삶을 버리는 사람이 찬양을 받는다.” 뒤르켐은 “의무적인 자살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행은 미개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이 관행은 개인이 자신에 대해 관심이 없고, 무조건적인 자기부정과 극기 훈련이 되어 있을 때만 지속될 수 있다.”
3. 극명한 이타적 자살(신비주의적 자살)
: 이 경우는 “아무런 특별한 이유 없이 자기부정 자체가 찬양되기 때문에 순수하게 희생 그 자체의 기쁨을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이다. 즉 “개인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자신의 허물을 버리는 것”이다. “비인격성은 극치에 다다르고, 이타주의가 가장 극명한 상태”에 이른다.
=> 뒤르켐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성격은 집단의 성격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졌으므로 그와 같은 자살은 널리 퍼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이타적 자살이 만성적으로 일어나는 특수한 환경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은 바로 “군대”이다.
* 군대 (“군인의 자살은 이타적 자살의 한 형태다.”)
뒤르켐은 “유럽의 모든 국가에서 군인의 자살 경향은 같은 연령대 민간인의 자살 경향이 보편적 사실”임을 우선 밝히면서 통계표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군대에서의 자살의 원인에 대한 고찰에 들어간다. 우선 흔히들 이야기하는 ①군인 중 ‘알코올 중독자’의 수가 많다. ②군대생활에 대한 혐오가 이유라는 주장에 대해 그것이 맞지 않음을 논증해 낸다. 우선 자살을 유도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전체 자살자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점에서 군대의 높은 자살률을 해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군인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군대생활에 가장 익숙하고, 군의 필요에 가장 적합하며, 군생활의 불편과 부족함을 가정 덜 느끼는 군인들”이다.
-> 따라서 뒤르켐은 “군인이란 직업의 특이한 자살촉진계수는 군대생활에의 혐오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군인정신을 이루는 습관과 천성을 포함하는 어떤 전체적인 상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군인의 첫 번째 자질은 일종의 비인격성이다.” “군인은 명령에 따라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훈련받아야만 한다.” 뒤르켐은 이러한 군인의 행동원리를 “이타주의의 특질”이라고 주장한다. “이 정신적 특질[군인정신]이 이타적 자살의 천혜의 토양이기 때문에 군대의 자살은 이타주의와 같은 성격이며, 같은 원인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병사나 장교보다 부사관이 더 많이 자살하는 것도 해명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부사관이라는 계급은 그 특성상 “역할이 수동적인 복종을 가장 많이 요구”받기 때문이다.
=> 따라서 군인의 자살 원인은 민간인의 자살 원인과 다를 뿐 만 아니라 반비례한다. “유럽에서 민간인 자살 원인은 문명사회의 특징인 지나친 개인화에서 유래한다.” 반면 “군인의 자살은(···) 너무 약한 개인화 또는 우리가 이타주의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군인의 자살은 이타적 자살의 한 형태다.
* 이타적 자살에 대한 몰이해
뒤르켐은 “이타적 자살은 분명히 자살의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우리가 존경심을 느끼고 감탄하며 명예를 부여하는 행동의 범주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자살로 간주하려 들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의 자살도 명백한 자살이다. 뒤르켐은 자신이 “자살을 객관적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철저하게 주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비교
-이기적 자살: 이 경우에는 사회가 죽음의 선택을 금지하고, 기껏해야 제의 혹은 상의 할 뿐이다. 사회가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충분히 통합되지 못해서 개인이 사회를 벗어날 수 있다. 즉 이 경우 자살은 지나친 개인화 때문이다.(이기주의자는 세상에서 자신 말고는 의미 있는 것을 찾지 못해서 불행하다. 따라서 자신이 집착할 아무런 목적을 찾을 수 없어 자신이 무가치하고 목적이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자살을 한다. 이들의 우울은 헤어날 수 없는 권태와 슬픈 의기소침이며, 모든 활동이 완전히 무력해지고 할 일을 찾지 못해서 무너져 내린다)
-이타적 자살: 이 경우에는 사회가 자살을 강요하며, 자살 의무가 강제성을 띠는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 낸다(사회가 개인을 너무 엄격하게 감독한다). 그리고 이 경우 자살은 지나치게 부족한 개인화 때문이다.(지나친 이타주의자의 슬픔은 자신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들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가 삶의 외부에 존재하므로 삶이 장애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자살을 한다. 따라서 이들의 우울은 희망에서 나온다. 즉 내세의 아름다운 모습을 믿기 때문에 현세가 우울해진다. 이들은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만족을 추구하며, 극단적 행동/자살로 이를 확인한다.)
=> 따라서 뒤르켐은 “모든 종류의 자살은 단순히 과장되고 편향된 미덕의 형태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그는 “그런 과장되고 편향된 미덕이 도덕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을 서로 다른 형태로 구분해야 할 만큼 충분히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제3부 사회 현상으로서 자살의 일반적 성격
제1장 자살의 사회적 요소
1. 자살과 사회
뒤르켐은 자살이 선험적으로 좌우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살자의 외적 상황이나 내적 상황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물리적 특성과 자살과의 관계는 불명확하고 애매한 반면, 사회적 환경과 자살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일정하다. 그러므로 사회적 자살률이란 사회적학적으로만 설명 될 수 있다. 또한 집단 경향은 개인적 경향의 결과라기보다는 모든 개인적 경향의 원천이라고 말하고 있다.
2. 평균인 이론
케틀러의 평균인 이론은 같은 기간에 반복된 일정한 사회 현상의 뚜렷한 규칙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일반적 유형은 개인적 유형보다 안정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르켐은 평균적 유형이 어떻게 대다수의 사람에서 실현되는지를 밝히지 못하며 자살의 경우는 오히려 소수자의 행동이지만 안정성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케틀러의 방식대로 생각한다면, 만일 10만 명 중에 1년에 15명이 자살을 한다면 그것은 어떤 개인이 같은 기간에 자살을 하게 될 확률이 10만분의 15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평균적인 자살의 경향을 측정한 것도 아니며, 그와 같은 경향의 존재 여부도 증명해 줄 수도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특정한 자살 경향을 가진다는 의미도 아니며, 자살의 성격이나 그 원인의 강도 등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자살에 관한 또 다른 가설은 자살의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지는 사생활의 사건들이 매년 같은 비율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라고 뒤르켐은 말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각 나라마다 독특한 규칙성을 띠고 왜 해마다 동일하게 반복되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한가?
3. 집단 경향
그것을 결국 사회라는 하나의 독특한 힘이다. 뒤르켐이 말하는 사회라는 개념은 개인생활과의 관계에 있어 일종의 초월성을 가진다. 개인의 집합이 사회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며 나아가 사회성은 분명히 ‘개인의 밖’에 위치해있다.
집단 경향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자연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종류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실재하는 힘이다. 그것이 실재한다는 증거는 실체가 모두 결과의 통일성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력은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 힘이 개인적 경향이나 사고와 다른 성격인 까닭은 개인들이 결함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정신적 존재를 형성하며 이 새로운 정신적 존재는 그 자체의 사고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 즉 양의 합은 질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집단 경향이 개인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들도 있다. 건축양식이나 문화적 유산 그리고 신앙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과 사회라는 측면을 분노로 설명하기도 한다. 특정한 개인이 불의의 경우를 목격했을 때와 대다수의 군중이 목격했을 때의 반응은 분명히 다르다. 또한 특정한 사람이 한 범법자에게 느끼는 분노와 사회가 내리는 처벌은 확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사회적 집단적 유형과 개인의 평균적 유형을 혼동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과오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적 힘은 개인을 지배하려고 하고 개인적 힘은 집단적 힘의 지배를 배척하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개인의 결합으로 형성되는 집단은 각 개인과는 다른 실체를 가지며, 그 집단 안에서 그 속성으로부터 집합적 상태가 발생하며, 그것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개인 안에 새로운 형태로 순수한 내면적 존재를 만든다.
4. 보편과 외부
아노미와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의 세 가지 경향은 공존한다. 그리고 그 강도는 세 가지 원인에 의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성격. 개인들이 결합하는 방식. 사회의 해부학적 구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집단생활의 기능에 혼란을 일으키는 일시적 사건들. 그러나 개인적 특질은 서로 집단적 과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상쇄된다. 결국 자살률이 좌우하는 사회적 조건만이 변화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임상학자들은 전적으로 개별 사례들을 취급하며 사례들을 연관해서 다루지 않는다. 의사들은 자살자가 신경증 환자이거나 알코올 중독자임을 밝히고 자살이 이러한 정신질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러한 동기는 자살을 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동기가 한 사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의 자살자 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현상의 생성 원인은 개별적인 사례만 관찰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원인은 개인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제2장 자살과 다른 사회 현상과의 관계
뒤르켐은 “자살은 그 기본적 요소 때문에 사회적 현상”이라고 전제를 하고 “자살을 도덕적으로 허용하는 행동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금지된 행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본 장에서 하고자 한다. 그는 “역사적으로 자살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평가해 왔는지를 살펴보고 그런 다음에 그러한 이유들이 현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는”지를 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1. 자살을 둘러싼 도덕적, 규제적 변화
* 프랑스의 경우
452년에 열린 아를 공의회: 자살을 범죄로 선언(하지만 형벌이 가해지진 않았음)
563년에 열린 프라하 공의회: 형벌적 규제(교회법)의 시작(추도 미사로 추모할 수 없음, 매장이 진행될 때 성가를 부를 수 없음)
프라하 공의회 제정 후 세속 법률이 제정: 종교적인 처벌에 실질적인 형벌이 추가(재산은 상속자가 아닌 영주에게로 몰수, 여러 가지 고문을 가하는 관습이 생김)
1789년 대혁명: 자살을 형법상 범죄에서 제외, 하지만 일반 도덕은 여전히 자살을 비난하는 경향.
* 영국, 스페인도 프랑스와 비슷한 전철을 밟음. 비교적 근래의 것(1881)인 뉴욕 주의 형법에도 자살을 범죄로 규정. 이슬람 사회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자살을 금지.
*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도시 국가에서는 자살을 국가의 허락을 받지 못한 경우에만 불법으로 간주.
“누구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 이유를 원로원에 진술할 것이며, 허가를 받은 후에 생명을 버려라.(···)”
-> 자살하고자 하는 시민은 원로원에 그 이유를 제출하고, 원로원은 그 타당성을 결정한 다음에 죽음의 방법까지도 결정해 주었다.
=> 원시 사회보다 높은 수준에서 개인이 무제한적으로 자살할 권리를 가졌다고 알려진 사회는 분명히 없다. 뒤르켐은 “자살에 대한 보편적 배척은 그 자체가 도덕주의자들이 지나치게 관대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교훈적 사실”로 보고 있다.
* 자살에 관한 법률의 주요 두 시기
① 개인이 자기재량으로 자살하는 것이 금지. 그러나 국가는 개인에게 자살하도록 허가할 수 있다.
② 자살에 대한 규탄이 절대적이고 보편적. 그러므로 개인뿐 아니라 집단도 사람을 죽일 권리를 가질 수 없다.
-> 뒤르켐은 “처음에는 사회가 전부였고 개인은 무”였지만, “사회의 크기가 커지고 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했고, 이제는 “노동은 분화되고, 개인의 차이는 증대되며, 결국 한 인간 집단의 성원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유대는 그들이 모두 인간이라는 점뿐인 시대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갖는 유일한 대상이 되었고 인격 증진이 집단적으로 추구할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높은 가치가 되었다” 그렇기에 “자살은 근본적으로 인간숭배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비도덕적인 행동일 수밖에 없다.”
2. 자살과 살인
뒤르켐은 자살을 못하게 막으면 살인이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자살과 살인이 단일한 심리적 근거에서 일어난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성별, 연령, 기온의 유사성이 설득력이 없음을 논증한다(438-442). 그는 “만일 자살 경향이 단순히 억눌린 살인 경향에 불과하다면, 살인자나 암살자가 체포되어 폭력적 충동을 외부로 표출할 수 없게 되면 당연히 자신을 희생자로 삼아 자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거물급 범죄자들은 자살하는 일이 드물다”고 말한다.
자살과 살인은 특정한 경우에는 부분적으로 일치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명백하게 반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①한 세기 동안 특정 시점에서는 자살과 살인이 같은 방향으로 변화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두 현상은 분명히 대조적인 곡선을 긋는다.
②자살과 살인이 같이 증가한 나라가 있더라도, 결코 같은 비율로는 증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현상의 최대발생 시점도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사회에는 자살에 대한 일종의 면역성이 생기는 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다.
③전쟁은 자살을 억제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살인은 그렇지 않다.
④자살은 농촌보다 도시에서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살인은 그 반대이다.
⑤가톨릭은 자살의 경향을 감소시키고 개신교는 증가시킨다. 그런데 살인은 가톨릭 국가에서 더 빈번하다.
⑥가족생활은 자살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살인은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 자살과 살인은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서로 배타적이다. 그리고 이들은 같은 조건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기도 하며, 때로는 반대의 방식으로 반응하기도 하는데, 반대의 경우가 가장 많다.
3. 자살과 살인의 유사성과 차이
* 이기적 자살과 살인
- 이기적 자살은 지나친 개인주의로 생긴 우울과 무관심 상태가 특징. 개인은 자신을 현실에 연결시키는 유일한 매체인 사회에 무관심. 반면 살인은 열정과 분리할 수 없는 난폭한 행동. 사회구성원들의 개인화가 미약한 채로 사회가 통합되면, 집단의식의 강도가 높기 때문에 삶의 열정이 고양되고 그런 사회는 살인의 격정을 일으키는 데 가장 적합한 토양이 된다. 일반적으로 공공의식의 규제가 약할수록, 즉 생명을 노린 공격을 가볍게 여길수록 살인은 더 난폭해진다.
-> 따라서 이기적 자살과 살인은 서로 상반되는 원인에서 발생하며, 하나가 빈번한 곳에서 다른 하나가 발달하기는 불가능하다.
* 이타적 자살과 살인
- 이들은 정도만 다를 뿐 같은 조건에 근거하기 때문에 서로 조화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면 다른 사람의 생명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살인과 자살이 일부 원시인들 사이에서 동시에 만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 사회의 살인과 자살의 병행을 같은 원인으로 설명하기 곤란하다. 과장된 이타주의 상태는 고도로 문명화된 환경에서 때때로 발견되는 살인과 공존하는 자살을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살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이타주의가 매우 강력해야 하며, 살인의 충동을 일으키는 이타주의보다 더 강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비인격성과 자기부정의 취향은 매우 적으며, 그 반대의 감정은 매우 강하고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희생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 아노미와 살인
- 아노미는 상황에 따라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공격할 수 있는 흥분과 좌절을 일으킨다. 이 경우 자신을 향한 공격은 자살, 타인을 향한 공격은 살인이 된다. 그와 같이 흥분된 감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원인들은 행위자의 도덕수준에 달려있다. 도덕성이 낮은 사람은 자신보다는 타인을 살해할 것이다. 이것이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중심지에서 살인과 자살이 동시에 공존하는 이유이다. 그러한 곳일수록 아노미가 심하다. 그리고 자살이 증가할 때에 살인이 그만큼 감소하지 않는 것도 같은 원인이다.
4. 결론
만일 자살과 살인이 서로 반비례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동일한 현상의 서로 다른 측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어떤 면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사회적 경향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반성이 부분적 조화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는 까닭은 특정한 형태의 자살이 발생하는 원인이 살인을 발생시키는 원인과 상반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같은 사회적 조건의 상반된 표현이며 동일한 도덕적 환경 속에서 발전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노미성 자살과 공존하는 살인과, 이타적 자살과 조화될 수 있는 살인은 서로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자살과 마찬가지로 살인도 단일한 불가분의 범죄학적 실체가 아니라 큰 차이를 띠는 여러 가지 종류의 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살이 비도덕성을 감소시키는 바람직한 효과가 있고, 그 확산을 막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못한 주장이다. 자살은 살인의 파생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