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오늘도 늦었어요."
"헤, 그렇네요. 오늘도 택시타고 가야겠어요."
"내가 괜한 부탁을 해서 가연씨가 피해 보는 것 아니에요?"
"아니에요. 늦가을 아침의 유자차, 참 좋았어요. 택시비보다 훨씬 값비싼 차 한잔의 시간을
가졌는걸요."
"그래도 저 때문에 늦었는데, 제가 택시 잡아 드릴게요."
"약국 비워도 돼요?"
"이런 아침에 누가 약 사러 오겠어요."
"근데 왜 아침 일찍 약국 문을 여세요?"
"흠."
가연씨 때문이죠.
가연씨는 어제처럼 20분을 허락한 대화가 30분 이상으로 길어져 택시를 타야 했다. 오늘도
택시를 타고 가면 그녀는 연속 삼일을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 게 된다.
그녀와 낙엽이 부는 아파트 사잇길을 걸었다. 바쁘게 뛰어 가는 사람들, 저들보다 여유가
있는 그녀와 나의 아침이 좋다. 내 손엔 만원짜리 한 장이 쥐어져 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네. 참 이거 가져 가세요."
"이건?"
"저 때문에 늦었는데 택시비는 제가 책임져야죠."
"괜찮아요."
"잘가요."
택시는 바쁜 아침 속으로 떠났다. 그녀는 내가 던져 준 만원짜리와 함께 출근길을 떠났다.
기분 괜찮다. 내가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 것 같다. 잠시
간의 헤어짐이지만 뒤돌아 보는 모습엔 무언가 여운이 있다.
그녀의 립스틱이 묻은 잔이 그녀만큼 예쁘지 않다. 오늘은 예쁜 찻잔 세트를 하나 사야 겠다.
두 개가 한 쌍으로 된 찻잔 세트.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난 여성스러워 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것들이 싫을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 여성스러움으로 기분이 좋다. 오늘 그녀와
어울리는 찻잔을 사고 꽃 두 송이 와인잔에 꽂아 놓아야 겠다. 찻잔은 우아한 녹색 빛과
황금색이 어울어진 이태리식 도자기로 하고 꽃은 내 마음 같은 핑크 빛 장미로 하자.
점심 시간 기분 좋게 백화점으로 갔다가 궁시렁거리며 약국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다시
백화점으로 갔다. 뭔 찻잔이 그리 비싸냐. 그녀가 아니었으면 아예 외면했을 고급 찻잔.
하지만 난 그것을 꼭 사고 싶었다. 돈 무자게 싸들고 가 그 한 쌍의 찻잔을 기어이 사고 말았다.
내가 생각한 녹색과 황금빛이 어우러진 고풍스런 찻잔. 나중 블루 마운틴 원두가 도착하면
이 찻잔에 커피를 끓여 차를 마시는 시간 만큼은 그녀를 여왕으로 대우해 줄 수 있다.
핑크빛 장미 두 송이를 와인잔에 꽂아 진열장 카운터 위에 올려 놓았다.
"아이 러브 유."
"어서 오세요."
"저 뭐 물어 봐도 돼요?"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이 조금 머뭇거리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네 물어 보십시오."
"우리 비제가 깨진 유리를 잘못 밟아 유리 조각이 발에 박혔어요. 여기서 그걸 빼주고 치료
해 줄 수 있나요?"
"비제요?"
"이 근처에 있던 동물 병원이 없어졌네요. 비제는 우리집 강아지에요. 코커스 파티넬 종인데."
"에?"
"작은 상처는 사람이나 개나 치료하는 게 비슷하지 않나요?"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난 오늘 기분이 좋다.
"데리고 와 보세요."
"여기서 치료해 줄 수 있어요?"
"손님 말씀대로 작은 상처면 사람이나 개나 다를 게 없겠죠."
아주머니는 바로 나가 근처에 주차시켜 놓았던 승용차에서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털이
참 고급스럽다. 귀도 제법 크고, 실내에서 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하는 상팔자를 타고난
개 같다. 즐겁게 치료해 주었다. 나도 혼자 사는데 강아지를 한 마리를 길러 볼까?
그녀는 강아지를 좋아할까? 어쩌면 강아지 한 마리로 그녀와 좋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다.
강아지를 기르는 것, 한 번 생각해 봐야지.
사람이 바르는 약이 개에게 혹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임상
실험은 개를 비롯한 동물들에게 한다.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개는 짖지 않고 순하게
내 치료를 받았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괜찮습니다."
"이거 감사해서 어떡하죠?"
"하하. 개가 참 귀엽네요. 이 근처 아파트에 사세요?"
"네."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면 이웃에서 뭐라 그러지 않나요? 밤에 개가 짖으면 이웃에서 뭐라
할 것도 같은데..."
"그래서 안타갑게도 비제는 짖지를 못해요. 수술을 시켰거든요."
"네?"
"짖지 못하게 성대를 없앴어요."
이런, 비제란 개가 결코 상팔자는 못되는구만.
"이런 개 비싸죠?"
"조금."
"실내에서 기르려면 어떤 개가 좋을까요? 이 개는 좀 크네요?"
"작은 개로 원하시면 포메라이언이나 푸들, 마르치스가 좋아요. 푸들이 털이 가장 적게 떨어
진다고 하네요. 미니우쳐 슈나우더도 괜찮겠다. 왜 한 마리 길러 보시게요?"
이 아줌마는 개에 대해서 제법 많이 아나 보다. 나는 진돗개, 발발이, 삽살이, 똥개, 잡종
정도 밖에는 모르는데...
"개를 보니까 그런 생각이 좀 드네요."
"얘들은 참 순수하죠. 전 비제랑 같이 있으면 순수해져요."
"네에."
"오늘 참 고마웠어요. 이제 약은 항상 여기서 사야 겠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순수해진다? 난 어쩌면 순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전 진혜 때문에, 소개로 만난 한 여자
때문에 내 친구를 시기하며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미워하며 그를 욕했었다. 내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 마음을 숨기는 것, 순수하지 못하고 가식적인 것이다. 개를 기르면
진짜 순수해질 수 있을까?
저녁이 물드는 시간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설레어 진다. 가연씨가 퇴근할 시간 무렵에는
가슴 떨리는 짜릿함까지 있다.
"아이 러브 유."
"어서 오세요. 오늘도 즐거웠나 봐요? 표정이 밝아요."
"호호, 장미를 꽂아 놓으셨네요?"
"네."
"이 번엔 두 송이네요."
"한 송이 보다는 두 송이가 외롭지 않을 것 같아서요."
"나 저 장미송이 때문에 표정이 밝은 거에요. 애들하고 있는 게 즐거운 것도 있지만 힘든
게 많아요. 밖에서 봤는데도 장미 두 송이가 바로 눈에 들어 왔어요."
"하하. 차 한잔 하고 갈 거죠?"
"그러고 싶어 들어 왔어요."
"무슨 차로 타 드릴까요?"
"음, 오늘은 홍차가 마시고 싶네요."
텁텁할텐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와의 이런 시간들이 좋다.
현석이는 며칠 째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해가 짧아서 내가 잠에서 깨는 시간엔 창 밖이 어둡스럽다. 해가 막 깨어난 시간에
아침을 먹는다. 신선한 햇살을 맞는 것, 기분 좋은 것이다. 7시를 갓넘어 밖으로 나왔다.
제법 춥다. 안개가 쌓이면 마치 서리가 될 것 같다.
"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을 때 먼저 타고 있던 현석이를 보았다.
"너 이렇게 일찍 약국 문을 여냐?"
"응. 실내를 정리해 놓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넌 왜 이리 일찍 가냐? 요즘 바쁘냐?"
"조금."
"부서가 바뀔 거라며?"
"부서라기보다 팀이 바뀐다."
"열심히 해라."
"너도."
둘이서 아파트 현관을 나왔다. 녀석은 자기 승용차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버스 정류장 쪽 길을 걸어 갔다.
"야, 너 차 안 가지고 가?"
"요즘은 버스가 좋다."
"그려, 대중 교통을 이용해야지."
오늘도 그녀는 내 기대대로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약국을 찾았다.
"아이러브유."
"차 한잔 얻어 먹고 출근하려고 왔어요."
"잘 오셨습니다. 오늘 같이 안개가 끼고 다소 쌀쌀한 날은 맑은 블랙커피가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럼 커피 주세요."
"헤, 커피가 없어요."
"호호. 그럼 뭐가 좋을까요?"
"녹차로 하실래요?"
"좋아요."
"오늘은 매정하더라도 딱 20분 지나면 가연씨는 가셔야 합니다?"
"호호, 오늘도 30분 더 있다 갈거에요."
"예?"
"어제 종석씨가 택시비로 만원을 주었잖아요. 택시비가 3000원 조금 넘게 나왔어요. 어제
종석씨가 준 돈으로 두 번 더 택시를 탈 수 있어요. 오늘은 맘 편안히 30분 얘기하다 갈 거에요."
"하하, 그럼 30분 더 있다 가세요. 하하, 하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좋아서요."
그래, 아침이 좋으면, 이렇게 하하 웃으며 하루가 즐거울 것이다.
#14. 그녀는 아침에 보이지 않았고, 내 곁엔 친구가 있다.
회사 분위기가 어색했다. 과장님은 출근을 하셨지만 우리들을 피했다. 이별을 준비하는
어색한 모습. 누구 하나 과장님에게 말 붙이는 사람이 없다. 뭐라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어느 부서, 어느 팀으로 가게 될지 궁금해 하고 있다. 우리 팀은 산산 조각 난 것
이고 나는 좋던 싫던 이미 배타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꼽사리 끼어야 할 입장이다.
출세길을 열어 줄 팀장 밑으로 가게 되어 많은 일들을 맡아 바빠져도 괜찮고, 탱자 탱자
하면서 짤리지 않을 정도의 팀원으로 속하게 되어도 괜찮다. 난 잘 되어 봤자 과장 아니면
부장이다. 빨리 출세하던 뒤늦게 진급을 하던 내 끝은 거기다. 정든 팀장님, 정이 들었던 팀
동료들, 어차피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하다 또 팀이 바뀌면 가꾸어 온 인연을 끊고 새로운 인간과 인연을 만들어
가야겠지. 직장이란 그런 것인가.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 하는 것. 새로운 연인을 만드는
것처럼 즐거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가연씨, 그녀와 빨리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그녀와 친해지면 다른 사람들과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꼭 그녀를 만나 겠다고 다짐하고선 보통 출근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종석이를 만났다. 밝은 모습, 나와 끊어지지 않는
인연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묵은 인연이지만 어떠한 새로운 인연보다 좋은
내 곁의 사람. 오늘 아침도 그녀를 보지 못하면 저녁엔 저 녀석을 만나 내 허전함을 달래야 겠다.
30분 일찍 나와 회사 출근 20분 지각을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장장 한 시간을 가연씨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그냥 보내며 흘러 보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가
날 피해 버린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녀는 버스 타는 시간대를 바꾼 것이 아니라 아예
교통 수단을 바꿔 버린 것 같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미덕일 것 같다. 우리 아파트
근처에 살기 때문에 더 노력하면 그녀가 사는 곳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사는 곳을
알게 되면 그녀가 어떤 교통 수단을 이용해 출근하는지에 상관없이 아침에 그녀를 볼 수가
있다. 그녀의 집 앞으로 가 기다리면 되기에...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다. 날 피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행동은 싫은 모습일 것이다. 난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런 모습 보이는
것보다 우연을 바라며 잊어 버리는 게 낫다는 것을. 하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와
인연이 맺어지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 진혜, 과장님, 그리고 가연씨. 한 사람은 예외다.
이 종석. 그는 나와 인연이 맺어져 있다. 끊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종석이는 내가
끊지 않는 한 그는 나와의 인연을 끊지 못할 것이다.
퇴근 시간이 지났지만 곧 회사를 떠날 과장님이 보기 싫어 회사에 남았다. 할 일 없이 내
자리를 지킨 채 컴퓨터를 만지작 거리며 마냥 시간을 보냈다.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헤어짐을 강요하는 것은
아름다운 세상이 날 배려하는 마음 같다.
모니터만 쳐다 보았다. 오늘 이 시간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와 내 자리에 앉아 어둔 창 밖을 등 뒤에 놓아 둔 홀로 있는 시간이 좋다.
좋은 기분으로 좋은 시 하나 적어 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는다. 모니터만 쳐다 보고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다.
9시가 다 되었다. 퇴근 해야 겠다.
바로 집으로 들어 가지 않았다. 10시가 가까운 아홉시의 흔적이 있는 시간. 종석이가 살며
꿈꾸는 약국은 이미 문을 닫았을 것 같지만 그리로 가 보았다.
후후, 종석이는 집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약국 창에선 밝은 빛이 흘러 나오고 있다.
창 바로 앞에서 약국 안을 들여다 보았다. 조금 여윈 장미 두 송이가 와인 잔에 꽂혀져
카운터 위에 있고 종석이는 그 건너편에서 웃고 있다.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듯,
종석이는 약국을 정리하며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혼자 살아도 즐거운 꿈을 꾸면
저런 아름다운 모습을 가꿀수 있나 보다. 저런 표정의 내 친구가 부럽다. 헤어짐 보다는
새로운 인연만을 꿈꾸며 그는 밝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똑똑!"
들어 가지 않고 창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종석이가 날 쳐다 보았다. 기분 나쁜 척
하지마라 조금 섧다 야.
종석이가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라는 표시를 했다.
녀석이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약국 문을 닫고 셔터 문을 내리면서 그와 애기를 나누었다.
"여긴 왜 왔냐?"
"너와 같이 집에 들어 가려고."
"차라리 혼자 가는 게 낫지. 늦게 마쳤나 보네?"
"응, 저녁 먹었냐?"
"오늘은 약국에서 먹었다. 넌 먹었냐?"
"집에 가서 라면 하나 끓여 먹지 뭐."
"너 그러다 몸 버린다? 밥 좀 해 먹어 임마."
"투덜대면서도 내 걱정은 다 해 주네?"
"눈치 챘냐?"
"허허, 오늘은 제법 늦게 약국 문을 닫는다?"
"응, 약국에서 혼자 딴 생각하며 논 탓에 시간 가는 줄 몰랐어."
"혼자서 딴 생각하고 놀면 심심하지 않냐?"
"아니다 임마."
"나보다 낫네."
"넌 요즘 심심한가 보네?"
"심심한 것 보다 조금 허전하다."
"왜?"
"모르겠다."
"심심하면 만화책이나 빌려 봐."
"그럴까? 너도 볼래?"
"나는 잘 거다."
녀석과 조금 걸었다.
"그거 생각나냐?"
"뭘?"
"고 삼때 야간 자율학습 빼 먹고 만화방 갔던 일."
"그게 어디 한두 번이냐."
"만화 보다 야간자율학습 끝날 때쯤 담 넘어 다시 학교로 들어 왔었잖아."
"응. 가방은 가지고 집에 가야 했기에."
"고삼 6월달쯤이었을 거다. 만화방 갔다 담 넘어 들어 오다 선생님에게 들켰던 일 기억나냐?"
"당연히."
"후후, 그때 우리 바로 도망을 갔었잖아. 어두워서 우릴 못 알아 봤을테니 도망가면 살 것이라
생각하고 쌔가 빠지게 뛰었잖아."
"응, 하하 기억난다. 운동장을 가로 질러 나 살려라 하고 뛰었지. 그때 우릴 쫓아 온 선생님
이름이 뭐였지?"
"김 성종 선생님."
"그래 맞다. 지독하대. 끝까지 우릴 잡으러 쫓아 오시지 않았냐?"
"너 그래서 잡혔잖아. 어떻게 40대 선생님보다 달리기를 못했냐?"
"그때 컨디션이 나빴어. 뛰다 보니까 아랫배가 아프더라. 그래서 잡힌 거야. 달리기 못해서
잡힌 거 아니야."
"너 아주 나쁜 놈이었던 거 아냐? 잡혔으면 그냥 혼자 잡힐 것이지. 야, 3학년 8반 15번
김현석! 너만 도망가냐? 나는 잡혔어 임마! 잡히자 마자 그렇게 소리친 심보가 뭐냐?"
"친구가 잡혔는데 자기만 살자고 도망 가는 놈에게 의리 지키기 싫더라. 나만 순순히 잡힐 수 있나."
"나쁜 놈."
"그날 밤 나 졸라 맞았지. 넌 다음 날 더 졸라 맞았구."
"그때 참 힘들었던 시간였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나 돌아 가고픈 추억의 시간이다."
"그래."
"너 아직도 달리기 못하지?"
"잘하지 임마. 자신할 수 있다. 내가 너보단 빠를 거다."
"야, 나 특전사 출신이야."
"그래 나 땅개출신이다. 내가 그래도 행군하면 가장 힘이 남아 돌았던 사람이야."
"달리기 함 해 볼래?"
"그럴래?"
"그래, 여기서 아파트 현관까지 누가 빨리 가나 한 번 해 보자."
"너 후회할텐데."
그래 난 후회 할 짓을 했다. 정장에다가 구두까지 신고서 편안한 복장에 운동화 신고 있는
녀석을 이기려고 했던 거. 녀석은 쌕쌕거리면서 나와의 격차를 벌리며 뛰어 가 버렸다.
난 아까운 양복바지 하나 가랑이를 찢어 버렸다. 다 큰 녀석들이 아파트 단지를 뛰어 가니까
길 가던 아가씨가 엄마야, 하며 놀라 비켜 섰었고, 어떤 아저씨는 이상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녀석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횡하니 가 버렸다.
"헉헉, 쨉도 안되는 새끼가 까불고 있어."
"다음에 한 번 더해 학학."
"다음이라고 별 수 있겠냐?"
"오늘은 복장이 이렇잖아."
"오랜만에 힘껏 뛰어 본 거 같다."
"숨은 가쁘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한 번씩 뛰어봐야 겠어. 겨우 2-300미터 되는 거린데 너무 숨이 차다."
"체력이 약해졌다는 거지. 그래서 장가 가겠냐?"
"진 놈이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냐? 니 걱정이나 해."
"하하, 그래 너 잘 났다."
"나 따라 잡을려면 열심히 해 임마."
"그래, 하하."
"하하."
녀석은 내 곁에 있다. 둘이 공유한 많은 시간들을 추억으로 되짚을 수 있는 사이.
녀석과 한 바탕 달음질을 치고 나니까 허전함이 가셨다.
계속.
.. #15. 내 안의 공주님.
가을의 말미는 항상 비가 장식한다. 11월에는 드문 소낙비같은 굵은 비. 비켜가긴 했으나
때를 놓친 태풍 하나가 서울에 굵은 비를 내렸다. 힘없이 떨어져 나간 여린 은행잎들,
아름다운 노란색으로 물들지 못하고 공해에 찌들려 낡은 노란빛을 한 은행잎들이 여기 저기
비에 젖어 널려 있다. 올 가을은 늦은 태풍이 불었다. 세상엔 저렇게 은행잎들처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이별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을 떨림, 나도 한 번쯤 소낙비가 되어 보고
싶다.오늘은 유난히 가을을 타는 것 같다.
오늘 아침은 그녀가 없었다. 그래서 그리움이 일었다. 가을을 타기에 좋은 그리움이다.
낮에 비 개인 아파트 길을 잠시 혼자 걸어 보았다. 저기 고속도로 근처 공원까지 걸어 갔었다.
비 때문에 주위가 흩어진 분위기다. 그렇지만 아름다웠다. 깨진 빗방울, 이슬비처럼 촉촉하진
않았지만 흠뻑 젖은 분위기가 나름대로 낭만적이다. 물을 머금은 벤취에 앉아 담배 한 가피를
피웠다. 이런 날은 옛 여인이 떠 올려 진다.
잘 살고 있을까? 그렇겠지?
나는 가연씨를 만나며 진혜를 잊어 가고 있다. 가연씨 때문에 진혜에게 예전의 느낌을 묻고
싶어 진다. 나를 좋아했었냐고, 가연씨가 날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진혜에게서 나를 좋아했었다는 답을 듣고 싶다.
나는 아직 자신이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진정으로 날 좋아했던 여자는 없었던 거 같다.
여자를 깊이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초짜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담배 한가피가 연기가 되어 가치없는 쓰레기가 되었다.
자주 모였던 내 친구들을 떠 올려 보았다. 거기서 나와 친했던 여자들은 현석이 때문에
내게 자기 고민들을 털어 놓았던 적이 많았다. 내가 그와 가장 친했기 때문에 그 여자들은
현석이를 알기위해 나에게 친한 척 한 것 같다. 허허, 웃었지만 가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단 한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진혜는 오히려 현석이 보다 나를 더 좋아 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묻고 싶다. 내게서 받은 좋았던 것이
무엇이냐고, 내게 매력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었냐고, 진혜가 받은 그 좋았던 것을 가연씨에게
보여 주고 싶다. 나도 이제 나 만의 공주님을 만들고 싶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멋있는
놈으로 봐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나만을 좋아해 줄 수 있는,
소낙비가 내려도 꿋꿋하게 나와 맺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약국으로 돌아 오며 316동 아파트를 보며 웃었다. 저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하하.
서점에서 가연씨 언니의 만화가 연재되는 만화잡지를 샀다. 후후, 거기엔 또 다른 가연씨가
존재하고 있다.
아직 만화 속 가연씨는 그 오토바이 탄 넘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번 호에서 곧 둘이가
만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 오토바이 탄 넘이 가연씨를 보았다. 아주 우연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건널목을 건너는 가연씨를 그 넘이 보았다. 그리고 그 넘은 가연씨의 유치원 앞을
찾아가 그녀를 먼 발치서 바라 보다 그 자리를 떠났다. 의미가 담긴 그 넘의 미소가 왠지
싫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운전기사 총각은 가연씨에 대한 짝사랑을 더욱 키워가며
그녀에게 친한 척이다. 습관적으로 맺어 주는 가연씨의 미소에 운전기사 총각은 착각하고 있다.
오후가 금방 붉게 물들어 버리더니 기다리는 시간이 다가 왔다. 자꾸 미소가 맺힌다.
오늘은 무슨 차를 대접할까. 오늘은 무슨 말을 할까. 가연씨는 나를 습관적으로 찾아 오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미소를 보면 그걸 알 수가 있다. 그녀도 설레이며 내 약국을 찾고 있다.
오늘은 넌지시 내 마음의 일부를 말해 버리고 싶다.
"아이 러브 유."
"호호, 이 소리 너무 재밌어요."
그녀가 밝은 모습으로 약국을 찾았다. 흠.
"네? 오늘은 우산 가져 갔었나 보네요?"
그녀는 길다란 막대 우산을 지팡이처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네. 오늘 아침은 날씨 때문에 일찍 일어 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맛있는 차 한잔 못 얻어
먹고 출근했네요."
"버스 타고 갔어요?"
"아니요. 오늘 아침은 택시를 타고 갔는데도 지각했어요."
"후후, 깊은 잠 잤었나 보네요. 지각했지만 피곤하지는 않았죠?"
"네."
"이리 들어 와서 앉아요."
"그러지요. 오늘은 무슨 차가 어울릴까요?"
"때에 맞지 않는 굵은비가 내렸고, 저녁 노을이 꼭 묽은 커피 같지 않나요?"
"호호, 그래서요?"
"고급 원두 커피가 어울리겠네요."
"그럼 고급 원두 커피 한 잔 주세요."
"하하, 아직 커피가 없어요."
"네?"
"다음에 아주 맛있는 커피 대접해 드릴려고 미리 수 쓰는 거에요."
"호호, 그래요?"
"늦었지만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요?"
"네에."
"다음엔 꼭 커피를 대접해 드릴게요. 기대하셔도 됩니다."
"기대할게요."
"오늘은 음, 조금 추우니까 현미 녹차 어떨까요?"
"네. 종석씨가 주는 차는 다 맛있어요."
"하하, 감사."
그녀가 차를 마시는 모습이 곱다. 고운 모습 속에 내가 끼여 있다는 것이 맘에 든다.
그녀와 공유하는 시간만큼 그녀를 알아 가는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좋다.
"이번 달도 이 잡지를 사 보셨네요?"
그녀가 차를 마시다 만화책을 보았다.
"네. 가연씨를 좀 더 알고 싶어서요."
"호호, 여기 만화 속 가연이와 제가 동일인인 것처럼 느껴지세요?"
"동일인은 아니더라도 닮은 점은 있겠죠?"
"네."
"가연씨."
"네."
"사랑해 본 기억 있어요?"
"후후, 그럼요."
"좋죠?"
"네?"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의 기분 참 좋죠?"
"그렇죠. 그렇지만 전 과거의 사랑 얘기는 하기 싫어요."
"하하, 얘기하기는 싫어도 잊을려고는 하지 마세요."
"종석씨는 사랑한 사람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아직 그때의 내 마음이 사랑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애매한 대답이네요."
"이제 애매하지 않는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흐음."
그녀가 뽀얀 미소를 맺어 준다. 수줍기도 한 모습이다. 그래 오늘 내 마음 한 구석을 보여주자.
"가연씨?"
"네?"
가연씨가 조금 더 수줍은 모습이다. 그건 내가 그녀 안에 존재하기 때문일거다.
"저 요즘 기분이 좋아요. 가연씨가 이렇게 찾아 주니까 내 안의 공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좋네요."
"후후, 공주님..."
"가연씨 공주님 할래요?"
"네?"
"가연씨가 절 좋아해 주면 저도 왕자가 함 되어 볼려구요."
"말씀을 참 동화처럼 하시네요. 제가 이렇게 종석씨를 보러 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직 다른 이유가 많이 포함되어 있겠지요. 제가 좋아서 찾아 오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겁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니..."
"완전히 저 때문에 절 찾으러 오도록 노력하고 싶어요."
"네?"
"너무 내 맘대로죠?"
"조금."
"이런 말 벌써 해도 될까요?"
"벌써라니요? 무슨 말인데요?"
"음, 가연씨랑 제가 만나게 된 게 한 소년 때문이었죠."
"네."
"그때 처음 봤을 때 가연씨에게 많이 호감이 갔었어요. 그렇지만 가까워 질거라 생각은 못
했지요. 근데 가연씨가 자주 찾아 와 주더군요. 전 좀 소극적이에요. 가연씨가 절 찾아와
주지 않았더라면 전 이런 생각 못했을거에요."
"무슨..."
"가연씨를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요."
그녀가 내 이 말에 고개를 숙였다. 찻 잔을 놓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참 고맙네요."
"고맙다니?"
그녀는 나를 바로 보지 못했지만 아주 맑은 모습이다.
"저도 그 소년때문에 종석씨를 알게 되었죠. 그때 저도 종석씨에게 많은 호감을 가졌어요.
제가 용기를 좀 내었죠. 저 약국을 자주 찾은 거 상당히 의도적이었어요."
그 의도가 귀엽고 깜직하다. 내게 사랑하고픈 마음을 던져 주었으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노력해보고 싶어요."
"네? 노력이라는 건?"
"소극적이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고 싶은 거. 그 사람으로 인해 많은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오늘 차 맛은 더욱 좋은데요. 종석씨의 마음을 알려 주어서 고마워요. 이제 더 편히 약국을
찾을 수 있겠어요.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 주세요. 전 그 모습에 이끌렸는데요."
"하하, 그래도 더 이끌릴 수 있도록 노력하지요."
"그럼 제가 오히려 부담스러워 질수도 있어요.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음, 그럼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만 노력하는 것은..."
"호호, 그러세요. 그럼 저도 노력해야 되나요?"
"하하, 이번 일요일날 칼국수 끓여 주신다 했죠?"
"네, 꼭 오세요."
"하하, 꼭 갈거에요. 가연씨 제가 싫지는 않죠?"
"아니요. 오히려 저만 좋아하는 마음 가지고 있지 않았나 가슴 졸였는걸요."
"가연씨 사귀는 사람 없죠?"
"이제 사귀어 볼까 해요. 여기 자주 놀러 와도 되죠?"
"그럼요. 아, 아니다."
"네?"
"약국은 지금 오는 시간에만 찾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 제가 있으면 아무래도 영업에 방해가 되겠구나."
"그런게 아니에요. 그냥 좀 더 친해질 때까지 저녁 이후 시간은 피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가연씨만 노는 날, 낮에는 하루 종일 있다 가도 돼요."
"저만 노는 날이라니요?"
"일요일 같은 날은 저도 놀잖아요. 그렇지만 제가 당번인 날과 공휴일에는 가연씨가 절
찾아오면 아무래도 눈치를 볼것 같아요."
"왜..."
"흠, 모르겠어요. 가연씨를 보여 주기 싫은 사람이 하나 있어요. 그 사람이 제 약국을 불쑥
불쑥 찾는데 가연씨와 같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오면 어색해질 것 같아서요. 그 것때문이에요."
"누구 여자분?"
"남자에요."
"제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을만큼 부담스럽나요?"
"전혀요. 막 자랑하고 싶어요. 근데 그 사람에게만은 보여주고 싶지가 않네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가연씨를 좋아하고 가연씨가 날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아직은 옅다. 아직은 연약한 어린 나무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낙비가 될지도 모르는
현석이를 곁에 두고 싶지 않다. 가연씨는 내 이런 마음을 이해하기가 힘들겠지. 그녀는
조금 불쾌한 듯 표정이 굳었다.
좋은 대화가 오고 갔지만 그녀와 다소 어색한 미소로 하루의 작별 인사를 했다.
"내일 아침에도 오실거죠?"
"흠, 그럴게요."
그녀는 아주 활기찬 목소리가 아닌 평범한 어조로 내일을 약속하고 보금자리로 떠났다.
가연씨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말했는데 난 용기없는 말로 그녀를 돌려 보냈다.
하늘이 다시 흐려졌다. 약국 문을 닫을 무렵 빗방울 하나 둘 떨어지더니 하늘은 다시 비를 내릴 채비를 했다.
#16. 그녀는 내게 가을 소낙비가 될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어제 내린 비보다 더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낙비 같은 굵은 비다. 11월의 태풍이라는 어색한 단어가 저런 가을 소낙비를 몰고
왔다. 어제 내린 비로 늦게 태어난 자기의 신세 한탄이 풀리지 않았는지 오늘도 많은 비를
내리고 있다.
요즘 아침에 가연씨를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 계속해서 버스를 타고 다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고개를 돌리는 내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꼈다. 괜한
마음으로 그녀를 볼까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나 싫다고 교통 수단을 바꾸어 버렸는지,
아니면 버스 타는 정류장을 바꾸었는지는 모른다. 아침 동안 잠시 스치는 그 짧은 만남이
그렇게 부담스러웠나? 그것 때문에 날 피해버린 그녀는 분명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이다.
나는 스토커가 아니다. 하긴 나도 그 짧은 만남으로 그녀에게 과민반응 보이고 있는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 버리면 되는데 나는 계속 그녀를 보려고 버스를 타러 나간다.
아침에 내리는 이 굵은 비가 참 좋다. 오늘은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러 갈 수
있겠다. 비 때문에 교통 체증이 심할 것이다. 이런 변명으로 오늘은 조금 편안 마음으로 버스를 타러 갈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이 비 때문에 한 사람과의 이별이 조금 덜 슬플 것 같다. 나 대신 그 사람을
배웅해 주는 눈물을 하늘이 내려주고 있다.
내 구두발 아래서 깨지는 빗방울. 고인 물에 잠시 새겨지는 내 발자국. 흔적이 없는 것
보단 이런 흔적이라도 남는게 좋다. 우산을 받쳐 쓰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보통
때보다 한 십분 일찍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저기 큰 우산을 쓰고 있는 여인. 가만히
쳐다 보다 아주 큰 미소를 맺었다.
"어! 오랜만이네요."
나도 모르게 인사를 해 버렸다. 어색함 보다 반가움이 먼저였기에 난 아주 밝은 어조로
가연씨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가 날 말똥히 쳐다 본다. 답을 하지 않겠지.
"그렇네요."
그녀가 내게 바로 답을 해 주었다. 기분이 이렇게 좋아지는 건 인연이 계속 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일거다.
"요즘은 버스 정류장에서 통 뵐수가 없었는데."
"흠, 그 쪽은 계속 버스 타고 다녔나 봐요?"
"네. 왜 안보였어요?"
"알 것 없잖아요."
"다시 보게 되서 참 반갑네요."
"허허, 내가 왜 반가운데요?"
"오늘은 내 말을 잘 받아 주시네요?"
"훗, 이런 게 잘 받아 주는거에요?"
"침묵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데요."
하하, 말을 잘못 한 것 같다. 그녀는 바로 내게 침묵해 버렸다.
"늦가을에 태풍이라니 우습죠?"
대답이 없다. 그래도 오늘은 반가움에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싶다.
"계절에 안 맞는 것들이 있어요. 오늘 같은 늦가을 소낙비라던지, 겨울비, 봄 눈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근데 그런 게 상당히 매력적이지 않아요?"
당신이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내가 말을 하지 않을쏘냐? 이야기가 하고 싶다. 오늘 우리
과장님 회사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다.
"가연씨는 오늘 슬프지 않죠? 저도 태연한 척 하렵니다."
가연씨는 버스가 도착하자 내 곁을 피해 떠났다. 하지만 오늘은 먼 창 쪽에 서지 않고 내가
보이는 곳에 섰다.
"저도 나이에 맞지 않게 서툰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네요."
후후, 내 이 말이 그녀에게 들렸을 리 없지만 왠지 내 마음을 고백한 것 같아 기분이 괜찮았다.
그녀는 내게 뜻하지 않은 소낙비가 될 것 같다.
새로운 만남을 꿈꾸는 탓에 과장님이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태연하게 지켜 보았다. 짐을
정리해 회사를 떠나는 초라한 그의 어깨가 가엾다. 조촐한 이별 파티라도 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과장님은 어색한 미소 하나만을 우리에게 던져 주고는 자기 짐을 챙겨 회사를 떠났다.
그리고 우리 팀은 서로 어색한 표정으로 찢어져 버렸다.
오늘 하루 회사생활은 상당히 어수선했지만 즐겁게 받아 들였다. 다소 배타적인 다른
팀원들과 섞였지만 나는 동료애를 느끼고 싶었다.
"잘 부탁합니다. 신입사원이라 생각해 주세요."
하루 날을 잡아 옛 팀장이었던 과장님을 찾아가 봐야 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잘 버텨 낼 것
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다.
명목상 새로운 팀원 합류로 모임을 가졌다. 비가 그쳐 가는 저녁 빗물의 모습이 새로운
희망을 주기도 한다. 고인 물에 비추어지는 저녁 풍경이 너무도 멋있었다.
술좌석에서 과거의 일은 잊고 새로운 동료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들 앞에서 많은
재롱을 부리고 새로운 팀장님에게 아부성 발언도 심심찮게 했다. 거하게 술을 마시고 취했다.
술 자리가 파하고 조금 허무했다. 그냥 내 자신에게 허무하다는 생각을 던졌다.
이런 날에는 떠오르는 녀석이 있다.
양복 바지가 젖던 말던 늦은 밤거리를 빗물을 차면서 걸었다. 약국 문은 이미 닫혔을 것이다.
11시가 다 되었다. 그렇지만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종석이가 살며 꿈꾸는 약국이 있는
상가 쪽까지 걸었다. 약국문은 닫혀 있었다.
커피 한 잔을 자판기에서 뽑아 종석이 약국 셔터에 기대어 마셨다. 그래, 과자라도 사서
종석이와 이야기나 하다 가자. 담배 한대만 피고...
슈퍼에 가 과자를 이따만큼 사서 나왔다. 그리고 발걸음을 때려다 기분 삼아 주위를 살폈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저기 고여 있는 물 웅덩이를 세차게 걷어차고 갈 생각으로 말이다.
내 갈 길 반대편 저 쪽에서 어떤 여인이 아주 귀여운 모습으로 상가 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래 위 진한 회색으로 된 잠옷 같은 추리닝. 상당히 예쁜 추리닝이다. 그 여인은 빗물이
고인 곳에 비추어 진 가로등을 보더니 그 속에 맺힌 자기 모습을 보는 듯 서 있다 귀엽게
그 물을 건너 뛰었다. 머리는 소녀같이 큰 머리삔을 하고 있다. 그 소녀가 나와
점점 가까와 지자 얼굴 윤곽이 확연하게 드러 났다.
허허, 가연씨는 집에 있을 때 저런 모습이구나. 그 소녀는 다름아닌 가연씨였다. 밤 늦은
시간에 무섭지도 않나? 하기야 이런 조용한 아파트 단지 내에 경비원만 몇명이더냐. 그녀는
종석이 약국 앞에 서서 갸웃거리는 모습을 하더니 슈퍼로 들어 갔다. 나 그냥 갈 수 없었다.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슈퍼에서 나오자 바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가연씨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 보았다. 내 얼굴이 좀 이상하나? 술을 마셨기에 조금 뽁닥할거다.
"누구? 아니, 여긴 왠일이에요? 이젠 여기서까지?"
"허허, 저도 이 동네 삽니다. 지금은 우연히 본 거에요."
"그렇나 보네요. 그럼 전 이만."
"이 시간에 먹을 거 사러 나온거에요?"
그녀는 내게 대답을 하지 않고 가 버린다.
"가연씨."
그녀가 날 돌아다 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침처럼 혼잣말 하시게요?"
"몇 동 사세요?"
또 잘못 물었나 보다.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는 뛰어 가 버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뒤 돌아 보았다.
"왜 안가고 서 있어요?"
그녀와 나의 거리가 10여미터 남짓 떨어져 있다. 조금 큰 소리를 내어야 한다. 이런 거리의
대화도 참 매력이 있다.
"제 마음이죠."
제법 큰 소리로 대답했다.
"빨리 가요."
"왜요?"
"제가 몇 동으로 들어 가는 지 보려고 서 있는거 아니에요?"
"허허, 착각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빨리 돌아서 가요."
"제가 돌아 서 갈지 어떻게 알아요?"
"아닌가요?"
"돌아서 가는 거 맞아요."
"그럼 먼저 가세요."
이별이 아쉬워 먼저 가라는 인삿말이면 얼마나 좋을까.
"가연씨 사시는 데가 여기서 보이는 동인가 봐요?"
그녀는 내게 아직 보금자리를 들키고 싶지 않은가 보다. 그녀는 자기 말이 먹히지 않자
등을 보이며 제 갈길을 가고 있지만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그래 이쯤에서 돌아 서 주자.
"저 돌아서 갈테니 맘 편안히 집으로 가요."
그 말만을 남기고 뒤 돌아 섰다. 좀 서운하지만 괜찮다. 오늘은 그녀가 살고 있는 공간의
범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우연한 만남을 가진 것에 만족한다. 그녀에게는
조심스럽고 싶다. 318동, 320동, 316동, 317동, 근처에 보이는 네 개의 동 중에 그녀가 살고
있는 보금자리가 있는 것 같다. 흠, 아직 가족 품에 있다면 316동은 제외 시키자.
과자를 들고 물길을 차며 기분 좋게 종석이를 찾아 간다. 내일은 새롭게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