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8일 경주 남산 (금오산, 고위산)
코스: 삼릉-상선암-바둑바위-금오산-용장사지-설잠교-이영재-봉화대능선-칠불암-백운재-고위산-이무기능선-용장골
30년 전에 가난한 어미가 군대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지켜내야 할 조국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다는 아들에게 두말 않고 돈을 마련해줬다. 회의와 격정과 방랑으로 가득 찬 대학 4년을 보낸 아들이 세상을 돌아보겠다고 했다.
제일 먼저 선조의 역사가 스며든 땅을 가고팠다. 의성역에서 경주행 기차를 탔다. 하필 탔던 칸이 경주로 답사를 간다는 안동대학교 역사학과 학생들의 칸이었다. 몇 명의 여학생들로부터 구슬림을 당했고 그들의 답사를 따라다녔다. 생각해보니 그게 남산이었다.
그 오랜 남산을 간다. 누가 그랬다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토함산이 귀족들의 터전이었다면 남산은 서민들의 삶의 마당이었다”고 그들의 머릿속을 채운 불교의 유적들이 발에 차이는 바로 그 노천 박물관이라고
매끈하게 요염한 곡선을 그리는 고목 소나무가 우거진 삼릉에서 시작한다. 아름다운 고목 소나무의 보호 아래 천년 전의 왕들이 있다. 박씨 성의 세 왕이 살아 치열하고 험난한 삶을 뒤로하고 죽어서야 평화를 누리고 있다.
벚꽃을 충분히 피우고도 남을 세월을 줬지만 느려터진 봄이 이제야 소나무 밑에 진달래를 피우는 길을 오른다. 냉골이라 불러지는 삼릉에서 금오산을 오르는 계곡엔 부처가 널렸다. 우아하게 차려 입은 석조여래좌상이 머리를 잃고도 있던 그 자리에서 여전하다. 어떤 얼굴이었을까? 옷차림으로 봐서 풍요와 자비, 근엄함이 서렸을 얼굴을 누가 감히 제거를 할 수 있었을까? 벽에 새겨진 부처라 해서 마애불이라 불리는 불상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을 그대로 갖고 있다. 저 모든 것들이 적어도 천년 전의 작품들이다. 아무리 풍요로운 시대였다 하더라도 배부름이 최고의 행복인 서민들에겐 약간 비만형의 저 부처상이 자신들이 이상적인 모습이었겠지.
양각으로 새겨진 시골 아주머니 같은 부처가 마애관음보살상이면 음각으로 노인네를 새긴 것이 선각육존불이다. 주름진 바위에 주름진 6명의 부처가 새겨진 선각육존불을 지난다.
굵은 모래가 미끄러운 이 산엔 바위가 많다. 저 부처들도 이 산에서 난 바위로 만든 게 아닐까? 근육질의 단단한 가슴의 삼릉계곡 석불좌상은 보물이라는데 영 아니다. 남성을 표현한 각이진 얼굴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것이라는데 세상에 저건 영혼이 있는 얼굴이 아니다. 석공이 산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정성들여 조각한 얼굴이 아니라 돈과 명예의 냄새를 맡은 반질거리는 조각가의 싸구려 냄새가 난다. 차라리 저기 아래쪽에서 머리를 잃어버린 석조여래좌상이 훨씬 우아하다.
바위가 부스러지고 소나무와 진달래만 있는 길을 따라 상선암에 닿는다. 거기서 쉬었다. 모처럼 이 먼데까지 와서 서두르고 싶지 않다. 여차하면 내일 경주 벚꽃이라도 핀다면 휴가를 내서라도 하루를 더 머물 생각이다. 상선암 뜰에서 형산강이 흐르는 서라벌에 봄이 꾸물거리는 것을 지켜본다. 절터에 고요히 앉아 물비늘이 반짝거리는 형산강을 본다. 30년 전에 이 자리를 지났을까? 여리고 앳된 여승이 고요하다. 왜 어린 승려들만 보면 신기해하는지? 세속의 맛을 아는 나에겐 참으로 그들은 닿을 수 없는 세상 사람처럼 보인다.
다시 오른다. 바둑바위에 서서 경주 벌판을 보고 금송정이라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울린 곳에 닿는다. 통일신라시대 한량인 옥보고가 낑낑거리며 거문고를 들고 와 여기서 탔겠지. 오늘처럼 햇살이 따뜻한 바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랬겠지. 운이 좋은 사람이었군!! 나처럼
그렇게 정상에 닿는다. 봄날이라 사람들이 정상석 주위에서 꿀벌들처럼 바글거린다. 넓은 길을 내려와 용장사지로 간다. 먼 길을 와서 갈 수 있는 곳은 가야지. 언제 또 이곳에 오겠는가?
천년 전에 천년동안 존재했던 왕국의 흔적은 산 어디에도 있다. 그들은 착하게 살려고 불교를 믿었다.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인 용장골에 비탈을 끙끙거리며 올라 삼층석탑을 짓고 바위에 마애불을 새기고 둥그런 바위기단 위에 돌부처를 모셨다. 그 모두가 보물이다.
석탑도 마애불도 좋아 보이지만 내겐 목을 잃어버린 석불좌상이 더 마음에 든다. 3층 탑 위에 정교하면서도 단아한 부처는 목을 잃고도 여전히 아름답다. 착한 사람들이 만든 부처의 목을 왜 잘랐을까? 나쁜 일본사람들이 그러지는 않았겠지? 그들도 부처를 존중하니까.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그랬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종교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도둑들이 뭐 쓸만한 보물이라도 들어있나 해서 열어보았을 수도 있지만 유난히 경주지방의 부처들만 목을 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라도 지나고 고려도 뛰어넘어 생육신인 김시습이 이곳에서 한문소설인 금호신화를 썼다고 한다. 서민의 산에 와서 자신을 총애해 준 세종을 생각해서 한글로 썼다면 더더욱 좋았을걸! 김시습도 한글은 혹시 배우지 못해서 못 썼을 수도 있겠구나.
비만형 부처가 바위 속에 들어 안고 바위 위에 올라앉은 용장사지를 떠난다. 이왕 내려오는거 대나무밭을 헤치며 설잠교까지 온다. 그리고 다시 이영재를 향해 올라선다. 좀 고되긴 하지만 견딜만하다.
전형적인 한국산이다. 화강암 바위와 그 바위에서 부스러지는 마사와 그리고 거기서 거침없이 자랄 수 있는 소나무와 진달래, 산은 그렇게 4가지로만 이루어져 있다. 바위엔 온통 그 시절 절대적으로 의지했던 부처님이 바위만 있으면 바위에 들어가 일어서거나 안자 있곤 한다.
왜 천년 전에는 바위를 다듬고, 바위에 글을 새기는 건 예술이 되고 지금은 바위에 뭘 새기는건 자연 훼손이 되는지?? 지금 바위 벽에 부처를 새긴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나도 그런 새김이 용납되지 않는 지금이 좋다.
바위투성이 소나무투성이 언덕을 올라 이영재에 오르고 또 비슷한 모습의 길을 가 신선암으로 간다. 산행이라기보다 역사탐방이다. 신선암 그 큰 바위가 자연 그대로 존재할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 바위에 부처가 들어가 있다. 지금까지 남산에서 본 그 모든 조각 속의 부처나 보살들은 모두가 통통한 몸매에 손도 살이 쪄서 통통하다. 입엔 자애로울거 같기도 하고 섹시해 보이는 아주 야리꾸리한 미소가 어리어있다. 신라인들이 원하던 평화와 풍요, 그리고 풍요함 뒤에 따라오는 성적 본능들이 저 부처상에 표현 된 것이 아닐까?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어떤 자애로움 보다가는 왠지 모를 색끼를 나는 부처에게서 느낀다. 야릇한 눈길로 말없이 유혹을 하는 천년의 여인같은 부처 그러고 보면 부처는 남자도 여자도 둘 다 유혹한다.
신선암에서 바위벼랑을 건너고 대나무밭을 지나 칠불암에 닿는다. 여기가 남산의 그 많은 불교조각의 절정이다. 네모난 바위의 4면에 우아하게 새겨진 부처와 그 뒤에 반원형의 바위에 섹시하게 새겨진 세 개의 부처상 세월과 정성이 새겨진 조각들이 국보가 됨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까지 본 조각 중에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관능미가 넘치는 부처이다. 칠불암의 살이 통통한 부처는 통일이 되고 편안한 시절에 만들어졌나 보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던가? 아니면 시절에 상관없이 그 시절에 살던 행복한 사람들이 만들지 않았을까? 조각된 부처에게서 멋과 풍요가 넘치고 어떻게 보면 풍만한 관능이 넘친다. 훌륭하다. 칠불암과 석탑과 너른 마당과 고목 소나무가 어울리는 그곳은 서라벌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시 갈을 떠나자. 4월의 뜨거운 햇살에도 아직도 묵묵한 안타까운 마른 가지의 숲을 지난다. 숲을 지나고 마루에 오르면 거기가 고위산이다. “금거북이가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는 형상”이라는 북쪽의 금오산과 더불어 경주 남산을 이루고 금오산 보다 더 높아 사실상 남산의 최고봉이다. 고위산에서부터 다시 바위와 소나무가 마른 가지의 나무들을 밀어내고 능선을 차지한다.
고위봉에서 용장골로 내려오는 바위투성이 길을 이무기능선이라고 한다. 뽀얗지만 경사가 만만찮은 바위투성이가 짙디짙은 초록색 소나무를 품고 있는 길이다. 소나무를 키우는 와중에 간간히 바위틈에 진달래를 품고 쓰다듬어 꽃을 피우는 그 능선을 내려온다.
바람이 몹시 분다. 서라벌에서 산을 향해 달려오는 바람에 모자를 잃는다. 바위투성이 길을 내려온다. 산이 끝이 난다. 그 끝에 미나리밭에서 미나리를 산다. 경주 남산의 미나리가 유명하다니까 사야지.
모판을 만들려고 갈아엎은 무논에서 아이가 올챙이를 잡고 있다. 우유부단하던 봄이 이제사 결정을 내리고 바쁘게 오고 있다. 마을 어귀 양지쪽에서 한 그루의 벚나무의 꽃잎을 활짝 열며 달려오지만 봄은 아는지?? 이미 여름이 자기들 속에 숨어들었다는 것을……. 서두르고 빨리 꽃을 피우는게 좋을 거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게 봄이든 여름이든 주는대로 받는대로 누린다. 아주 많은 걸 누리며 살지, 아주 많은 걸 누리기도 했고……. 난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 흐느적거리며 킁킁거리며 공기 속에서 봄을 찾아내기도 하고 길가의 샛노란 개나리를 들여다보면서 용장골로 내려온다.
30년 전에 오늘 이 길을 똑같이 왔을 리는 없지만 산 어디에선간 그 긴 시간을 두고 걸음이 엇갈렸을 것이다. 젊은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고 지키고자 했던 그 땅의 확인을 시작했던 곳 경주 남산, 그 땅을 30년을 지나 추억하며 돌아보았다.
양각으로 새겨진 시골 아주머니 같은 마애관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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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fineplace, 산을 오르는 사람의 집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산
첫댓글 그 동안 바뻐서 먼 산행도, 후기를 쓸 여유두 없어서 어제 간신히 두달 전에 다녀왔던 경주 남산 후기를 썼습니다.
그날 안내해 주신 풀사랑대장님이랑 동행했던 친구님들께 고마웠다는 말씀도 이제 드리면서..
바쁘신와중에도 좋은 후기글 올려주십에 감사를 드립니다.
신라의 고도 경주~~온산이 보물들로 가득한 멋진곳이더만요. 잘읽고 갑니다..
예 기억과 메모를 더듬어서 ..잘 지내시죠??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스쳐지나간것도 있고‥
또 뵙길 바라면서‥
그 다음날 벚꽃만 피었더라면 분명 하루 더 있었을텐데,,,,나중에 모두 천천히 가는 덕분에 동행을 할 수 있었지요.
산 봉우리는 기억도 안나고 돌부처들만 생각납니다. 잘 지내시고 답해 주셔서 감사니다.
언제나 멋진 사진과 다녀온듯 착각하게 되는 후기글 잘봅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산행 많이 하세요.
ㅎㅎ 예 감사합니다. 건강합니다. 산은 전보다 좀 못가고요. 설악산 갔을 때가 언제였던가요? 참 행복했는데..설매님도 건강하시고 좋은 산행 많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