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들숨과 날숨
도 월 화
입추가 지나자마자 새벽바람 끝에 잠깐 시원함을 느낀다. 아침에 맨손체조 대신, 발끝 치기를 한다. 자리에 누운 자세로 삼백 번쯤 두 발끝끼리 부딪치는 것이다. 멈춘 후 잠시 조용히 머물러 들숨과 날숨을 지켜본다. 단전 호홉에 들어갈 때는 운동과 병행하면 효과적이다. 절로 숨이 깊어져서 자연스럽다. 코로 천천히 심호톱을 하며 들숨과 날숨을 고르면 온몸의 세포들이 이완하는 듯하다. 속이 탁 트이면서 화평한 기운이 몽올몽올 피어오른다.
아직 늦더위야 계속되겠지만, 순간적이나마 아침결에 숨 쉬는 청량한 공기가 새롭다. 숨 막히는 열대야에 시달리다가 하루아침에 어김없는 자연의 변화를 실감한다. 절기를 나눈 옛사람들의 지혜에 다시금 놀란다. 입추와 말복은 겹칠 때가 많으나, 올해는 입추가 말복보다 이틀이나 먼저 들었다. 천문학에 무지한 나는 시인에게서 까닭을 찾아본다.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릴케(Rainer Maria Rilke; I875~I926)의 시, 「가을날」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시라고 기원하고 있다. 시인과 농부는 이처럼 자연이란 배에 방향 설정하는 키와 노를 드리우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나 보다. 인생의 키와 노는 감사와 긍정적 마음이 아닌가 한다. 억울한 수모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업장 소멸이 된다지 않는가. 배꼽 아래의 단전으로 깊고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쉬면 세상만사 고맙게 여겨지고 평온해진다.
감사와 긍정의 마음은 들숨과 날숨같이 중요하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 무척 예민한 아이가 있었다. 화가 나면 숨넘어갈 듯 울어댔다. 어른들은 연신 "숨 쉬어!"라고 외쳤다. 제풀에 파랗게 질린 애를 다독이며, 숨 멎을까 봐 걱정이라고 수군거렸다. 숨만 잘 쉬어도 건강하단다. 음식은 며칠 안 먹어도 살 수 있지만, 산소 공급 없이는 몇 분만 지나도 위험하다고 한다. 삶에서 산소처럼 중요한 것이 감사와 긍정적인 마음이 아니겠는가.
우리 애들이 초등학생일 때, 온 가족이 운동 삼아 단전 호홉 수련원에 다녔다. 가르치는 원장은 불로장생한다는 선인 같은 풍모에, 기골이 장대했다. 연세를 종잡을 수 없었다. 아마도 청년기에는 중년쯤으로. 중년기엔 청년같이 보일 분인듯했다. 노인이 돼도 늙지 않고 늘 장년으로 살아갈 분 같았다. 들숨과 날숨에 오랜 내공이 쌓여 몸에 배인 것인가.
배꼽 아래의 단전으로 숨을 깊이 쉬며, 산소와 기 에너지를 받아들이라고, 원장님은 수련시간마다 강조했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해야되는데 들숨, 날숨, 날숨…만 쉬게 되는 부작용이 나면 위급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부정적인 생각 속에 나도 모르게 들숨을 놓치고, 숨이 차면서 회의적이 되기도 한다. 삶도 자칫 감사하는 마음을 놓치면, 비관적으로 치달아 위험스러워질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남에게 좋은 에너지를 보내며 한세상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가 들숨과 날숨을 단전으로 심호흡하면 좀 더 따뜻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딸 바보라고 일컬어지는 한 배우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아빠로서 대학 졸업하는 딸 걱정이 된다고 한다. '이 험난한 세상 어찌 살아갈지…'라고. 살다 보면 서릿발 같은 세상 견뎌낼 때도 만나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군자란처럼 추운 겨울을 경험하지 않으면, 봄에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을 춘화 현상이라고 한다. 숨죽여 자중하는 세월,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단전으로 쉬면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삶에 도움이 된다.
들숨과 날숨은 생명 유지 그 자체로서 오묘하다. 들숨과 날숨은 마음의 평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명상과 호흡, 체조나 산책, 누워서는 발끝 치기라도 하면서 복식호흡을 하면 절로 깊은숨을 쉬게 된다. 복식호흡은 심호흡이다. 요가, 명상은 단전으로 심호흡을 하며 심신을 수련한다. 마음의 평안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에 좋다고 백과사전에도 나온다. 태초에 창조주가 진흙이요, 먼지인 인간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었다고 하지 않는가. 감사와 긍정적 마음이라는 인생의 키와 노를 놓치지 않으려면, 우주와 연결되는 들숨과 날숨을 단전으로 깊이 호흡해야 하는 것안가. 들숨과 날숨을 심호흡하며, 나와 우주 자연의 연결 고리를 단단하게 이어야 하는가.
이 가을 손 모아 기도드리고 싶다. 오곡백과가 익어 가는 계절, 신의 자비로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고', 모두가 들숨과 날숨을 심호흡하며 좀 더 나은 소망을 품게 해주시길 기원한다. 낙엽을 보면서도, 봄이면 다시 새잎이 난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다듬고자 한다. 가끔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즉시 인생이란 배의 키와 노를 다시 잡아 긍정 에너지로 바꿔야겠다. 들숨, 날숨을 호흡할 때마다, 감사와 긍정적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면 짙은 포도주 빛 인생의 향취를 느끼지 않겠는가.
*『월간문학』 2024년 6월호 통권 6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