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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머리
얹은머리와 구별되는 가체머리
가체머리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짚고 넘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머리모양에 대한 명칭이다. 옛 기록에는 가체(加髢), 피체(被髢), 가계(假髻), 운계(雲髻), 고계(高髻), 허튼머리 등으로 표현되어 있고, 현대에 와 이 머리를 설명하는 각종 사전류나 참고서에는 얹은머리, 다래머리, 또는 트레머리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명칭은 얹은머리이다.
얹은머리 또는 트레머리라고 할 때 우선 떠올리게 되는 것은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그림에 나와 있는 기생들의 머리모양이다. 마치 둘둘 말아서 올려 놓은 듯한 머리모양인데 그 풍성하고 큰 모양새 때문에 금방 눈에 띄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생들의 머리는 전형적인 트레머리로 가체머리와 별도로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얹은머리도 형식이 달라 구분되어야 한다.
여염의 부녀자들 사이에도 유행이 되었고, 필수로 갖추어야 할 사치품처럼 되어가자 국가에서 법으로 금지하기까지 한 머리모양인데 이에 대한 명칭이 보편화되지 않고, 위에 열거한 것처럼 분분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그 의미조차 혼란스럽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통 머리모양이 그동안 복식사의 한 부분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는 점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이며 특히 전체적인 맥락을 알지 못하고, 조선의 머리모양만을 가지고 거론한 참고서는 대부분 이 머리를 아무런 저항감 없이 얹은머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얹은머리라는 명칭은 이여성 선생이 ‘조선복식고’에서 사용한 이래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때의 얹은머리와 조선시대에서 말썽이 된 가체 사용 머리와는 엄연히 구분이 되는 것이다.
이여성 선생은 고구려 벽화에 많이 나오는 머리모양을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고, 그 머리모양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있었기 때문에 굳이 얹은머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려면 조선시대 말까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에서도 쉽고도 명확한 그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으며 그에 해당되는 머리모양에 대해서는 따로 단락을 만들어 다루려고 한다.
한 가지 혼동이 되는 것은 현재 출간되어 있는 각종 사전류에 가체머리와 얹은머리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가체머리는 조선조 중기에 나온 것으로 가리마를 타서 뒤로 넘긴 머리를 본머리로 하고, 그 위에 다래를 여러 개 엮은 가체를 얹어 놓기도 하고 또아리처럼 넓적하게 해서 본머리에 핀과 끈으로 고정시킨 머리모양이다. 이때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머리를 더욱 탐스럽게 하기 위해 많은 가체를 덧붙여 풍성하게 한 것인데 이것이 고가에다 호사스러워서 말썽이 된 것이다.
반면 얹은머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내려 두 가닥으로 땋아 그것을 머리 위에 두르는 것으로 두 머리모양은 빗는 방법에서부터 다른 것이다. 정신 문화 연구원에서 발간한 ‘전통적 생활 양식의 연구’에는 이경자(李京子) 선생이 얹은머리의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매우 명료하므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빗어 넘긴 머리를 뒤에서 두 가닥 내고(兩道分爲), 왼쪽 가닥은 오른쪽으로, 바른쪽 가닥은 왼쪽으로 교차시켜 그 끝을 앞머리로 둘러(繞頭) 또아리 모양으로 얽어 얹은 뒤, 남은 끝을 한쪽으로 몰아 붉은 장식 댕기로 고정한다.
가체머리를 얹은머리와 같은 것으로 설명해 놓아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는 이렇게 빗질해서 만드는 방법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 흔히 나오는 표현이 고계인데 이때에도 가체머리를 지칭하는 것이어서 본머리를 이용한 고계나 가체를 이용한 고계를 의식한다면 일대 혼란을 일으킬 것은 당연하다.
용어가 우선 확립되지 않으면 이후에 나오는 얹은머리, 둘레머리는 물론 궁중의 머리모양을 다루는 부분에 자주 나와야 하는 어여머리도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편을 다루면서 맨 먼저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현재의 용어가 주관이 없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용어 문제는 벌써 해결될 수 있었을 텐데 마치 복식사의 의붓자식처럼 취급되다 보니 혼란스러운 채 이어져 온 것이다.
머리를 사고 파는 사람들
가체머리는 가체(加髢)가 있어야 만들 수 있는 머리모양이다. 가체는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말하는 것인데 월자(月子)라고도 하고 다리라고도 한다. 이는 물론 자기 머리카락이 숱이 적어서, 또는 더욱 나은 모양새로 만들고 싶어 덧붙이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인조로 된 것을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모두 사람의 실제 머리카락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예전 여인들이 가체를 사용했다는 것은 중국의 기록인 ‘문헌통고’나 우리의 기록인 ‘삼국사기’ 성덕왕 때의 기록으로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것을 사용한 때는 매우 오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는 그 가격까지 기록되어 있어 매우 고가품으로 중국에 수출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당시 여인들의 머리카락이 탐스럽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때의 가체에 사용되었던 머리카락은 남녀 모두의 머리카락이 섞여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조 때와는 달리 대개 쪽을 크게 하거나 머리를 높게 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만들어진 가체는 본머리에 덧붙여진 가발과 같은 모양으로 보면 적당할 것이다.
하지만 조선조의 가체머리는 작은 다리머리를 여러 개 잇대어 만들었다. 다리머리는 재료 자체가 탐스러운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 그것을 미리 여러 개 준비해 두었다가 본머리에 계속 잇대어 거대한 가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도에는 그렇게 가체머리를 만드는 장면이 있어 그것만으로도 당시 여인들이 어떻게 가체머리를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머리카락은 예전처럼 고가품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 때나 쉽게 구할 수 없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호 이익이나 이덕무, 이규경, 이형상, 채제공, 박제가 등 조선조 후기의 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 남긴 글에는 한결같이 가체가 고가품이었으며 여자들이 판 머리카락은 물론 남자들의 머리카락으로도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그렇게 머리카락이 한데 모아지면 일단 염색을 해서 일정하게 색깔을 맟춘 다음 사용했는데 그 머리카락 중에는 여성들로부터 산 것도 있지만 비구니가 되기 위해 잘랐을 때의 머리카락도 있었고, 천민 남자의 머리카락이나 죄수들의 머리카락도 있었다. 피발을 자르게 해서 가체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체의 기본이 되는 것은 길고 탐스러운 여인의 머리카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체머리가 점차 유행이 되자 머리카락을 전문적으로 사고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런 일은 원래 방물장수나 매분구(賣粉嫗)가 했었는데 그렇지 않은 새로운 계층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테면 신종 직업이 생긴 셈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가발 판매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자 생긴 것으로 나중에 이를 폐단으로 보고 금지하려 했을 때 우선 머리카락 판매상을 단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방물장수는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여인들이 필요로 하는 화장품이나 바느질 도구 등을 팔러 다니는 여인들을 말한다. 매분구는 글자 그대로 분을 팔러 다니는 노파를 말하는데 방물장수가 바깥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했던 여염의 여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매분구는 하층민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숙종 때 인물 동계(東溪) 박태순(朴泰淳)의 문집인 ‘동계집(東溪集)’에는 평생을 분을 팔러 다니던 매분구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 이때 이미 매분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체가 고가품임에도 잘 팔리면서 여인들의 머리카락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때 그들에게 가장 반가운 손님은 다름아닌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여인들이었다. 여인이 머리카락을 잘라 판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극한상황을 말하는 것임에도 그들에게는 반가운 손님일 수 밖에 없었다. 고가로 팔 수 있는 재료가 생기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것은 물론 가난 때문이었다. 여인의 입장으로 가정 살림을 꾸려나간거나 병구완을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될 때 최후 수단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주변에 알려질 경우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후대에까지 기록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조선조 말엽에 나온 야사류에는 이런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어 당시 서민층 여인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야담집으로 가장 방대한 ‘청구야담(靑邱野談)’에는 글읽기만을 즐겨하는 허생(許生)이 하루는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수건을 쓰고 있는 걸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길쌈으로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식량이 떨어지자 머리를 잘라 팔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수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허생은 그 길로 책을 덮고 집을 나가 장사를 해서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같은 책에는 또 남산 밑에 사는 이사인(李士人)이 십 년을 작정하고 ‘주역(周易)’을 읽는데 칠 년이 된 어느날 문틈으로 보니 웬 머리 민 중이 앉아 있어 놀라 나와 보니 중이 아니라 아내인 것을 알고 대경실색하여 묻는 장면이 있다. 아내는 굶주린 지 닷새째가 되자 할 수 없이 남은 머리카락을 잘라 판 것이다. 남은 머리카락을 팔았다는 말은 지난 칠 년 동안 수차례 머리카락을 조금씩 잘라 팔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할 수 없이 잘라 팔다 보니 마치 중처럼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사인은 이에 장탄식을 하고 책 읽는 일을 접어둔 다음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상업에 종사해서 성공한다는 이야기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또 한 종류 야담집에는 어느 한량의 아내가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가 전화위복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남편은 가정 살림을 돌보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활이나 쏘러 다니는 한량이었다. 그런 모임은 늘 돌아가면서 술자리를 마련하게 되는데 가난한 한량은 그렇게 할 수 없어 한탄스러워하자 그 아내가 하루는 내가 술자리를 마련해 드릴 터이니 오늘 친구들을 사정(射亭)에 초대하라고 말한다. 한량은 그렇게 하겠다 하고 친구들을 초대하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아내가 나타나지 않자 집으로 와보니 아내가 수건을 쓴 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연유를 물으니까 그 말이 기가막힌 것이었다. 술자리 마련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술을 사고 그릇을 세냈는데 그것을 이고 막 문을 나서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음식이며 술을 모두 땅바닥에 쏟아버렸다는 것이다. 한량이 그 말을 듣고 한탄하다가 갑자기 도끼를 가지고 돌부리를 내려치며 자학하는데 갑자기 그 돌부리가 깨지면서 쇳소리가 들려 캐보니 뜻밖에도 돌부리 아래에 백은이 가득히 든 항아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부부는 그후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가체머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카락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있던 조선시대 사회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머리 치장을 위해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필요로 했지만 한쪽에서는 남편의 글공부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급기야는 생명과도 같은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여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궁중에서부터 시작된 가체
원래 머리에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덧대 치장을 하는 일은 궁중에서 신분상 격식을 차려야 할 때 사용하는 대수(大首)나 거두미(巨頭美), 어유미(於由美)를 하게 되면서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때 사용하는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실록에서는 특별히 체발(髢髮)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체발, 즉 가체는 특히 궁중 결혼식인 가례(嘉禮) 때, 즉 왕이나 왕세자, 왕세손, 그리고 공주의 결혼식 때는 정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량으로 필요로 했다. 그래서 가례일이 정해지면 미리 체발을 수집해 놓아서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가례 때는 시종 진행 상황을 기록해 놓는데 이것이 이른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라는 것으로 이를 보면 누구의 결혼식에 체발이 어느 정도 사용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체발을 이용하여 머리를 치장하는 관습이 민간으로 옮겨지면서 가체머리가 생겨난 것이다. 민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은 고대로부터 흔히 있어 온 일이다. 즉 궁중에서의 관습은 일반 서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보여졌고, 신분상 그것과 똑같이 할 수는 없었지만 비슷하게 모방함으로써 욕구를 충족시킨 것이다.
가례 때에나 썼음 직한 가체가 민간에서 차츰 유행이 되다 시피한 것은 조선조 중기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까지는 고계라 표현된 것이 가체머리가 아닌 단지 머리 형태를 높이 올린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처음엔 흉내만으로 색다르게 치장을 하려고 했던 것이 차츰 유행이 되다 시피하고, 좀더 많은 다래를 사용하여 좀더 색다르게 하고자 하는 욕구쪽으로 진전된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궁중에서의 가체가 일반 서민들의 눈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을 만큼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선 ‘가례도감의궤’의 기록을 통해 어느 정도 체발이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다음의 자료는 두 편 논문, 즉 1989년 정미경(鄭美卿)의 ‘우리나라 여인의 머리 모양에 관한 연구’와 2000년 이영주(李映周)의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를 종합하여 작성한 것이다.
연대 혼례자 수량
1627(인조5) 소현세자빈 40단(丹)
1638(인조16) 장렬왕후 68단
1651(효종2) 세자빈(명성왕후) 48단
1671(현종12) 세자빈(인경왕후) 48단
1681(숙종7) 인현왕후 20단
1696(숙종22) 세자빈(단의왕후) 48단
1702(숙종28) 인원왕후 48단 5개
1718(숙종44) 세자빈(선의왕후) 48단
1727(영조3) 세자빈(효순왕후) 20단
1744(영조20) 세자빈(헌경왕후) 10단
1749(영조25) 국혼정례 비, 빈 모두 10단
1759(영조35) 정순왕후 10단
1762(영조38) 세손빈(효의왕후) 5단
1802(순조2) 순원왕후 10단
1819(순조19) 세자빈(신정왕후) 5단
1837(헌종3) 효현왕후 10단
1844(헌종10) 효정왕후 10단
1851(철종2) 철인왕후 10단
1866(고종3) 명성왕후 10단
1882(고종19) 세자빈(순명왕후) 5단
1906(광무10) 세자빈(순종왕비) 10단
우선 위의 자료에서 살펴보건대 체발의 단위가 단(丹)과 개(介,箇)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속(束)으로 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 만큼의 양을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전체를 살펴볼 때 68단으로도 머리를 할 수 있고, 48단으로도 할 수 있으며 10단, 5단으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의례용 머리를 만드는데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영조 25년인 1749년까지는 대개 48단을 사용했다가 그 이후에는 대부분 10단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48단과 10단의 차이라면 대단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차이가 난다면 머리모양은 일단 외견상으로도 화려하고 사치스럽기가 훨씬 덜해 보일 것이다. 이를 다른 면으로 본다면 48단으로 할 때의 머리모양은 성대하게 꾸민 것으로 어느 누가 보아도 호화스럽게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사치를 멀리 하려 했던 영조가 궁중에서의 혼인이 사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에 대한 금지사항을 규정화하여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국혼정례(國婚定例)’는 바로 그렇게 궁중 혼례에 관한 규정을 적어 놓은 책을 말한다.
검소하기로 유명했던 임금이 바로 영조였다. 영조는 사치 풍조를 없애기 위해 신하들을 접견할 때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찢어진 검은 신발을 신었으며 잠옷도 무명으로 지어 입었고, 실내엔 볼만한 집기 하나 갖추어 놓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에게 아부하기를 좋아하는 신하들 중엔 속에 비단옷을 걸치고 그 위에 무명옷을 입는 자도 있었다.
임금의 이런 생활 태도는 당시 궁중의 사치 풍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빌미가 된다. 훈계로도 말을 듣지 않자 ‘국혼정례’를 지어 반강제로 사치를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시기적으로 보면 조선조 중기에 체발이 가장 사치스럽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민간에서 가체머리가 점차 유행하였다는 사실과 상통하는 것으로 궁중에서의 관습이 담장을 넘어 서민사회에 새로운 풍조를 만들어 놓은 배경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소 한 마리 값과 맞먹었던 가체의 값
이렇게 궁중의 머리모양을 흉내내기하다가 시작된 가체머리는 먼저 기녀 사회에서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풍속도는 그런 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사대부 남성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기녀들에게 있어서 머리 치장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장을 한다든가 몸치장을 하는데 누구보다 세련된 방법을 알고 있었던 기녀들은 머리모양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처음 가체머리로 시작했다가 차츰 그들 나름의 머리모양인 트레머리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기녀들은 여염의 여인들과는 달리 담장 안에서만 지낼 수 없는 계층이었다. 따라서 몸치장도, 분단장도, 머리 치장도 내놓고 했으므로 남성들에게는 물론 여염의 여성들로부터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남성들에게나 여염의 여인들에게나 모두 예쁘게 보이기 때문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유행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따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본보기가 있어야 한다. 가체머리도 마찬가지여서 기생들이 하기 시작하자 담장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겼던 여염의 여인들까지 다투어 가체를 사들여 가체머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가체를 크게 사용할수록 가체머리는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탐스럽고, 윤기나는 가체를 구하기 위해 아끼지 않고 값을 치렀다.
풍속도에 보면 가체머리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가체를 양 갈래로 땋아 내려 머리 위에 또아리 모양으로 틀어서 얹어 놓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가체를 볏단처럼 만들어서 두 개를 나란히 머리 위에 얹어 놓은 것이 있다.
어떤 형식이던지 이런 머리모양은 자기 머리카락보다 몇 배 더 많은 가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무게만 해도 만만치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값도 결코 평범치가 않았다.
이규경의 할아버지가 되는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의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사소절(士小節)’ 부의조(婦儀條)에 이에 관련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가체머리는 몽고에서 전래된 것인데 지금 부인들이 그 습속을 따르고 있으니 크고 높은 것만을 좋아해서는 아니 된다. 부유한 집에서는 칠팔만 금전으로 소위 몽고의 광번측요작타마세(廣幡仄繞作墮馬勢:군마가 많은 기치와 치장에 눌리어 쓰러지는 형세)의 머리모양에 웅황판(雄黃板:동황색 천연 비소 화합물로 만든 수식 용구), 법랑잠(法琅簪:구리에 초자를 입혀 만든 비녀), 진주수(眞珠繻:비단에 진주를 단 수식 용구) 등으로 장식하니 가산을 지탱할 수 없으되 가장으로서도 능히 금할 수 없는 바 부녀들은 더욱 크게 하기를 좋아한다. 근년에 13세 되는 부귀가의 어린 신부는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자 급히 일어나려다가 가체의 무게에 눌리어 목을 부러뜨린 일이 있다. 이와같이 사치가 사람을 죽일 정도가 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가체머리로 인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수광, 이익, 이규경, 송문흠, 윤봉구 등 학자, 문장가들이 관심있는 글을 남겨 놓았는데 위에 든 이덕무의 글만큼 실감있는 내용을 전해주지는 못한다. 이덕무는 먼저 가체머리가 몽골의 습속이라 했는데 이는 고려 때 일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의 습속이 우리나라에 남아 조선에까지 전해졌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가체를 사용했던 기록이 ‘삼국사기’에도 나오지만 실제로 몽골의 습속이 전해지기도 했던 것이므로 그리 무리는 없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조선조 학자들의 주장에는 중원의 문화를 흠모하는 사대의 의미가 덧붙여져 있어 그 의미 전달을 감안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기록을 통해 일반 여염의 여인들도 가체머리를 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으며 그것이 가장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점이다. 돈의 액수는 칠판만 금전이라 했는데 그것이 얼마 만큼의 값어치를 하는 것인지는 잘 헤아릴 수 없다. 가체 하나를 제대로 하기 위해 들어가는 금액에 대해서 어떤 기록에는 중인 열 집의 재산을 넘는다 했고, 정조 때의 우의정이었던 채제공이 임금에게 아뢴 말에는 가난한 집일지라도 6,70냥이 들어가고, 제대로 모양을 갖추려면 수백 냥을 소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1964년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에서 펴낸 ‘사학회지(史學會誌)’ 4호에 발표된 김혜선(金惠宣)의 ‘영조, 정조시대 이후의 여자 발풍(髮風)에 대하여’에 실려 있는 다음의 내용을 참고로 덧붙이고자 한다.
정조 말년 탁지준절(度支準折)에 월내(月乃:다래) 일부(一部)에 2냥(兩)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것이 엄청난 고가물이었음은 타물가의 시세와 견주어 알 수 있다. 즉 계란 7개에 1전, 황육(黃肉) 1근(一斤)에 2전 5푼, 웅계(雄鷄) 일수(一首)에 5전, 갈비(乫非) 1대(一代)(1쌍6대)에 3전5푼, 황우 1두에 20냥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얹인머리를 하는데 다래가 10부(部) 이상이 필요하다고 보면 한 부인의 머리에 20냥 이상이 소요되는 셈이다. 즉 20냥이라고 하면 황우 1두의 가격과 맞먹는 것이니 결혼대례에 있어서 반드시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 발풍(髮風)으로 해서 빈한한 집안일 경우 능히 결혼기 지연의 요인이 되었을 것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가체머리 하나 올리는데 황소 한 마리 값과 맞먹는 값이 들어가는데 이는 기본적인 모양새로 하는 경우라는 견해이다. 이는 체제공이 빈한한 집이라도 6,70냥이 들어가고, 제대로 하려면 수백 냥을 소비해야 한다는 말을 당시의 실제 물가와 비교해가면서 설명해준 것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가체머리를 올려야 했는데 부유한 집안에서는 보라는 듯이 화려하게 했지만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가체를 사야 하는 거금 때문에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또 혼인을 하고 난 후에도 기혼녀들은 계속 가체머리를 하고 다니면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그때에도 빈부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서 그 자체로 빈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가체머리는 영조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점차 그 폐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해 사회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조정에까지 비화되었다.
가체머리, 조정회의에 등장하다
가체머리가 처음으로 조정회의의 안건으로 다루어진 건 1749년인 영조25년 9월 23일이다. ‘국혼정례(國婚定例)’가 아직 반포되지 않은 때인데 이는 영조가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여 나라 안으로 만연되어 가고 있는 사치풍조를 막아보려고 단호한 결의를 굳힌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일찍이 유례가 없는 여인의 머리모양을 가지고 임금과 신하가 논의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부인의 가체머리(실록에는 단순히 髻라고 표기되어 있다.)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이조참판 이천보(李天輔)는 ‘가체머리는 옛 예법이 아니다.’고 말하였고, 예조참판 홍봉한(洪鳳漢)은 ‘가체머리를 만드는 비용이 많으면 백금이나 되어 많은 사람들이 파산을 하게 되니 만약 금한다면 또한 사치를 못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고 말하였다.
임금은 ‘가체머리를 못하게 하면 달리 대신할 것이 없어 금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일을 사관 이의철(李宜哲)에게 물었다. 의철은 ‘지금의 계(髻)가 주례(周禮) 부(副), 편(編), 차(次)에 근거한 제도인 즉 예(禮)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고, 타인의 머리카락을 쓰는 것으로 말하면 의례정주(儀禮鄭註)에 이른바 죄수나 천인의 머리카락을 취한다는 것이니 대개 옛 사람들은 신체발부를 훼상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죄수의 머리카락을 쓰는 것이며 왕후부터도 이것을 쓰는 것이니 이제 싫어하고 피할 것이 무엇이리까. 무릇 전하께서 사치를 금하기 위하여 이것을 없앤다면 사치의 근본이 가체머리에 연유한 바는 아닌 즉 비록 다른 것으로 대치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사치를 하게 될 터이니 무슨 이익이 있으리까.’ 하고 금지를 반대하였다.
임금은 그렇다고 말씀하시고 ‘여러 신하들이 자기 집 사람의 머리 사치를 금하지 못하는데 내가 이것을 금하고자 하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영조실록’의 이 기사는 여성의 머리모양을 가지고 조정에서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배경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당시의 가체머리로 인한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짐작케 해주기도 한다. 즉 임금은 자신의 힘으로도 역부족일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신하들의 집안에서 가체머리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가체 비용 때문에 파산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체머리가 과연 예법에 맞는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본 것은 단속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에 대한 대치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납득할 수 있는 한계를 찾아 제재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다가 당시 가체가 단순히 자기 머리카락이 아니라는 점으로만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죄수나 천인의 머리카락일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매우 혐오스럽고 상스럽게 대하는 견해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여성의 머리모양에 대한 제재조치 때문에 처음으로 실록에 등장한 이 기록은 당시의 문제점뿐이 아니라 앞으로 조정에서 하려고 하는 여러 방침까지도 짐작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방침은 이때로부터 7년 후인 영조32년에 나왔는데 다름아닌 가체머리를 금하고 대신 족두리로 대신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여전히 가체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백금을 소비해야 했다. 이에 영조는 가체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이 금지령은 어떤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록에 가체머리에 대신할 것으로 무엇이 적당한지 논의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2년쯤 경과한 후에 영조는 드디어 어명으로 가체머리 금지령을 내렸다.
영조34년 1월 13일의 일이었다. 실록에는 그날의 일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시고 나라 안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부녀자로 하여금 가체머리하는 것을 금지하고, 후계(後髻) 즉 쪽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부녀자의 가체로 인한 사치가 날로 심하여 한번 가체머리를 하는데 간혹 수백금을 소비하는 자도 있으므로 임금이 오래 전부터 이것을 바로 잡으려고 조정대신들에게 묻기도 하고 과거시험을 치를 때 그 해결 묘책에 대해서 쓰게까지 하였지만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다시 여러 신하에게 물어보자 사치를 억제하고 옛 제도를 닦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임금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는 부인이 가체머리를 궁궐의 양식인 쪽으로 하도록 하되 상민이나 천인은 머리 얹는 것을 그대로 두게 하라. 명부(命婦)와 사족(士族)의 예복에도 역시 금주(金珠)와 용봉채(龍鳳釵)를 금해서 사치를 억제하고 명분을 바르게 하는 뜻을 보이라. 나라 안에 널리 알려서 사족 부녀로 하여금 다시는 머리를 얹지 못하게 하라.’
이렇게 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왕명에 의해 여인의 머리모양이 제재를 받게 되었다. 그 대상은 실록에 나와 있는 대로 사대부가의 여인들이었다. 가체머리 대신 쪽머리에 족두리로 대치해서 사용하라는 것이 그 골자였다.
그러나 실록에는 그러한 조치가 잘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다. 단지 그로부터 오 년후인 영조 39년의 기록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가체 금지령을 철폐하라는 어명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실록에서 우선 그 기록을 인용해본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을 불러 보시고 가체를 사용하던 그전 제도를 다시 쓰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임금은 부인의 가체가 너무 사치하고 비용이 많기 때문에 일절 이것을 금하고 족두리를 사용하라고 했다. 족두(簇頭)라는 것은 머리에 쓰는 수건이다. 이때 신하들 중에서는 그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다. 임금은 또 족두라는 것이 궁중의 양식과 별 다름이 없고, 또 진주로 장식한다면 그 비용이 다래와 같을 것이므로 다시 얹은 머리형으로 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나 다래 사용만은 금했다. 이때 임금은 사치를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어 이미 북경에서 무늬있는 비단이 수입되는 것을 금했고, 일본으로부터 진주를 사오는 것도 금했다. 당하관이 붉은색으로 된 포를 입는 것도 비용이 많다고 해서 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습속이 깊이 뿌리 박혀 그 효과가 하나가 없고, 법령은 여론만 어지럽게 할 뿐이었다.
가체 금지령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금지령을 내린지 8년만의 일이었다.
그 원인은 사람들이 족두리를 일상적으로 쓰고 다녀야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쓴다 해도 가체처럼은 되지 않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며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다 족두리가 궁중의 양식과 같아서 왕궁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8년 동안의 과정을 실록에 있는 내용만으로 살펴보아도 가체머리가 얼마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그것의 문제점을 해소해보려고 조정에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여성의 머리모양에 대한 풍속이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조선조 이전부터 내려온 여성의 머리모양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있어야 하며 영향을 받은 중국의 머리모양에 대한 인식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울러 일깨워준다. 그런 토대가 이루어질 때 조선 여성의 머리 유행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임금의 특별한 관심과 법령으로도 조선 여성의 머리모양은 변화시킬 수 없었다. 영조는 처음에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결국 실패를 자인하고 만 것이다.
대를 이어 다시 어전회의에 올라온 가체머리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어 정조가 등극한지 12년이 되던 해, 서기로는 1788년 10월 3일, 이날은 가체 금지령을 놓고 또다시 군신이 논란을 벌임으로서 가체머리가 다시 어전회의의 안건으로 올라온 날이었다. 가체 금지령이 실패로 돌아간지 25년 후의 일이었다.
정조는 등극하면서부터 선왕의 정책을 이어받으려고 애쓴 임금이었다. 탕평책도 그렇고, 사치 금지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가체를 금지시키려는 정책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접근은 상당히 신중했다. 그러나 이 날의 어전회의는 가체를 다시 금지시켜려는 정책을 확고히 한 회의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정조실록’에서 그 중요 내용을 대화체로 엮어 살펴보기로 한다. 이 자료는 1958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향토 서울’ 제3호에 실려 있는 유봉영(劉鳳榮) 선생의 ‘부녀발제(婦女髮制)의 변천’에 실려 있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이 글에는 ‘특히 영정조의 발제 개혁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정조:우정규(禹禎圭) 상소문 중 가체에 대한 일을 어떻게 해 야 하나.
김치인(金致仁:영의정): 체계의 폐해는 누구나 말하는 것입니다. 전일에 금지령을 내렸다가 중지하게 된 것은 체계에 대신 할 좋은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약 전하께서 엄금 하시는 동시에 대신할 모양까지 명쾌하게 가르쳐 주신다면 당연히 따를 것이오며 한번 제도가 정해지면 오랜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성원(李性源:좌의정):체계는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오니 불가불 지금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채제공(蔡濟恭:우의정):지금 막대한 폐는 체계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비록 유생같이 가난한 집에서도 6,70냥 돈이 아 니면 다래를 살 수가 없고, 그럴 듯한 것을 사려고 하면 수 백금을 써야 합니다. 그리해서 토지를 팔고 집을 팔게 됩니 다. 그러므로 아들을 둔 자 며느리를 보더라도 체계를 할 수가 없어 혼인후 6,7년이 되도록 시부모 보는 예를 행하지 못해서 인륜을 폐하게 되는 일이 하도 많습니다. 지금이 바 로 이것을 고쳐야 할 때입니다. 이와같은 막대한 폐가 있는 것이지만은 분명한 명령이 없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두게 된 것인데 웬일인가 하오면 여러 사람의 의견이 가히 대신할 만한 물건을 의논한 연후에야 실행할 수 있다고 하 기 때문이옵니다. 그렇지만은 사람의 의견은 각기 다른 것 이므로 아무리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합치될 가망은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단연 결정을 내리시어 국 내에 체계를 쓰지 못하게 하시오면 대신할 물건은 절목(節 目) 하나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지 않으면 이 일이 끝날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서유린(徐有隣:호조판서):먼저 대신할 제도를 강구한 후에 체계 금지령을 내리시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이재간(李在簡:예조판서):체계는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물며 선왕의 금령까지 있었으니 오직 단연 실행할 뿐입 니다.
정창순(鄭昌順:이조판서):대신과 재상들이 다 금해야 한다고 하 오니 세상 여론은 가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인의 복 장도 또한 의장(儀章)에 관계되는 것이오니 각기 좋은 대로 하거나 사람마다 달리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널리 여 러 의견을 물어보아 대신할 좋은 물건을 절충해 보고 영구 한 제도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병모(李秉模:형조판서):먼저 대신할 물건을 정한 후에 결행하 게 되오면 누가 이어받으시려는 덕을 높이 따르지 않겠습 니까?
정조:우상의 말이 적확할 뿐 아니라 내가 가체를 금지하는 제도 를 다시 실행코자 하는 뜻은 성지(聖志)를 밝히고 열의를 이으려고 하는 데 있다. 대저 체계 금지를 중간에서 그치게 된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다. 우상 이하 그때 일을 들은 자 는 누구나 그 곡절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 홍인한(洪 麟漢)이 감히 궁양으로 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틈을 타서 만들어내 위로는 임금의 뜻을 침범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의 입을 막았다. 그리하여 임금 곁에 있는 신하들은 딴 말을 하지 못하여 금령이 해이하게 되어 마침내 폐지하게 된 것 이다. 이것으로 말하면 인한의 탐욕이 비할 데 없고, 사치 하기가 이를 데 없어 다래 얹는 것을 크고 높게 하고 그 모양을 사치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성벽이라고 하면서 부 녀가 쓰는 다래에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 치를 금하고 체계를 금하는 명령에 항상 불평을 품고 있다 가 필경 이것을 막으려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 하나로 보 더라도 신하된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다.
이로써 보면 가체 금지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은 우정규의 상소가 발단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영조 때의 금지령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 중 하나가 한 신하의 강경한 반대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정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임금은 이미 가체 금지에 대한 결심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다.
실록에 의하면 정조는 이 회의가 있던 날 가체 금지령을 내리고, 같은 날 담당 부서인 비변사(備邊司)에서 그에 따른 구체적인 항목을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가체 금지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기록자가 그 전말을 한꺼번에 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또다시 여성의 머리모양인 가체머리를 규제하기 위하여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한글로도 배부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
비변사에서는 즉각 왕명을 받아 가체를 금지한다는 취지와 금지 조항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례가 없던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이었다. 이를 보면 앞 부분에는 가체를 금지하게 된 임금의 뜻을 밝히면서 금지 이유를 자상하게 기록했고, 다음으로 금지 사항에 해당되는 8개 부분의 절목이 나열되어 있다.
조정에서는 우선 이를 모든 사람이 두루 알아볼 수 있도록 한문으로 된 앞 부분을 한글로 번역해서 뒷 부분에 첨부하여 전국의 각 관아에 배포했다. 한글로도 배부했다는 것은 임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계층을 막론하고 사치를 없애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가체신금사목에는 가체 금지령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조정의 규제 대상으로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점을 규제했는지, 어느 자료보다도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가체신금사목에 나와 있는 내용을 번역하여 소개해 보기로 한다. 뒷부분에 첨부된 한글 부분은 한글이라 해도 현대문에 맞게 풀이를 할 필요가 있다. 정조시대의 한글은 지금의 한글세대가 단번에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구가 많다. 그러므로 다음의 번역문은 한문과 한글을 대조해가면서 작성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가체의 금지는 다시 해야 되겠다. 천하에 완전한 법은 없는 것이고, 양편이 모두 편안한 일도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체의 금지는 그렇지 않다. 사치를 버리고 검소로 들어가는 것이니 모두 온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오랑캐의 습속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쓰는 것이니 양쪽이 모두 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물며 선왕께서 법을 만들었으나 영구히 준수하고 전하지 못한데 대하여 내가 두고두고 골돌이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실천하고야 말려는 일임에랴.
선대왕 50년의 빛나는 업적은 내가 감히 따를 수 없는 일이지만은 그중 큰 것만을 짚어서 생각해보면 다섯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백성들이 베로 바칠 세금을 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천을 준설한 것이며 또다른 하나는 술을 금하는 것이다. 또 사색간(四色間) 피차에 혼인하게 한 것이고, 다섯 번째가 가체를 없애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는 다 실행되어 여러 십 년 동안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고 사람들이 도탄에 빠지는 염려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는 잠깐 동안 실시되었다가는 곧 중지되었다.
이것이 선왕의 본의가 아니란 것은 기록에서 찾아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술로 말하면 제사에 필요한 것이고, 백성의 살림살이에도 긴요한 것이다. 금하는 것도 성덕(聖德)이고, 쓰게 하는 것도 성덕이니 감히 다시 논의할 바 못되는 것이고, 상호간 혼인하는 일은 아직 이해를 따져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혁파해 버려야 할 일이 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체를 금하는 것이다.
이것은 즉 선왕의 높은 뜻을 밝히고 그 지극한 정성을 밝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럭저럭 오늘에 이른 것이다.
최근 다행히 예관(禮官)이 의견을 내고, 상신이 이어서 말하여 내 한 번 듣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두 번 듣고는 의심이 완전히 풀렸다. 오늘 회의석상에서 대신들에게 골고루 물어보니 모두 옳다고 단언해 말했다. 대저 가체하는 양식은 예경(禮經)에 있는 것인가, 법규책에 있는 것인가. 그 근본을 찾아보면 좋은 제도가 아니다. 처음에는 머리모양을 잘하려고 하던 것이 나중에는 머리에 무거운 장식을 하게 되어 서로 다투어 큰 것을 자랑하고 따라서 값이 치솟게 된 것이다. 씀씀이가 많은 자는 살림을 돌아보지 못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인륜을 저버리기에 이르렀다. 그 폐해는 이에 극에 달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야 하겠다. 나라 안 부녀자의 가체를 일체 혁신하라. 가체를 없애는 것은 전혀 사치를 없애기 위한 것이니 제도가 비록 달라졌다 하더라도 전과 같이 장식을 한다면 어떻게 법령의 본의를 지킨다고 할 것인가.
가체를 금지할 법제와 이에 대신할 모양은 해당 부서에서 사목(事目)을 결정하여 올리라. 금지령을 시행할 날짜는 서울에서는 동짓날을 기한으로 하고, 각도에서는 공문이 도착된 날부터 20일로 정하라.
부녀의 복식이 정치에 관계 없다고 하지 말라. 내가 두고두고 고심하는 것은 선대왕의 뜻을 밝히고 그 공적을 계승하는 데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사치에서 검소에 들어가고 오랑캐의 습속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쓰게 되는 것이니 어찌 벼슬아치들만이 감동을 느끼게 되겠느냐. 부녀자들도 초목이 바람에 움직이듯이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잘 지켜나갈 것이니 어찌 진실로 아름답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습속이 법령이 한 번 내렸다가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하지만 금지령이 내렸으니 오직 행할 뿐이고, 돌이킬 수는 없다. 금석은 부서질지라도 이 금지령은 늦출 수가 없다. 나의 조정에 있는 모든 신료들은 누구든지 다시 가체 사건으로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
법은 이미 완성되었고, 기일도 정해졌으니 이제부터 금지령을 좇지 않는 자는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가장을 벌할 것이다. 서울과 지방, 신하와 서민들 모두는 모름지기 이를 잘 알아듣고 국법을 범하지 말라.
가체신금사목은 한글 부분에도 보충 설명을 해놓은 부분이 있다. 중화를 ‘중원이라’하고, 경울을 ‘경경하고 억울타 말이라’하는가 하면, 전말을 ‘머리와 끝이라’, 등용을 ‘달리 값 비싸다 말이다’, 여쾌를 ‘방물장사’라 해 놓은 것 등이 그것이다. 한글 부분에서는 가체와 딴머리가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그 가체신금사목에서 골자를 이루고 있는 금지조항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순서는 모두 일(一)로 표기되어 있는데 편의상 일련번호를 붙여 열거해 본다.
1. 사족(士族:문벌이 좋은 집안의 자손)의 처와 첩, 그리고 여항 (閭巷: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의 부녀로 무릇 다 래를 땋아 머리에 얹거나(딴머리) 밑머리로 머리 얹는 제도는 일체 금지한다.
2. 딴머리로 대신할 것으로 두 가닥을 각각 동글게 서린 낭자머 리와 사양머리는 혼인 전에 하는 것이니 쓰지 못한다. 본머리 에 작은 첩지와 달래를 조금 넣어 두 가닥으로 땋고, 끝을 댕 기로 감아 올려 꺾어 쪽지게 하되 머리 위에 쓰는 것은 전대 로 족두리로 하고, 무명솜과 얇게 깎은 대나무를 물론하고 다 검은색으로 겉을 싸도록 하라.
3. 이제 이 금지령은 진실로 사치를 없이 하려는 성덕에서 나온 것이니 족두리를 대신으로 쓴다 하고 칠보같은 종류로 전같이 꾸면 쓰면 법제를 고치는 이름만 있을 뿐 검소함을 밝히려는 그 실질적인 면은 없어지는 것이니 무릇 수식의 금옥주패와 및 진주댕기 진주투심 부치를 일체 금지한다.
4. 어유미와 거두미는 명부가 항상 착용하는 것이고, 민간에서도 결혼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므로 금지시키지 안는다.
5. 족두리에 장식한 것은 금지 조항에 있는 것인즉 혼례 때 소용 되는 칠보 족두리를 세를 내 주고 받는 것을 금지한다. 이 금 지령이 내린 후에 범하는 자는 수모(首母)와 여쾌도 관원에게 보내 법에 의하여 정배시키고 여쾌가 잡패물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물건을 매매하는 악습은 어떤 것이나 없애고 전과 같이 포도청에서 보이는 대로 다스리라. 법이 이와 같으니 차후에 이런 부류가 있으면 옛 법을 밝혀 포청에서 엄격하게 다스리 라.
6. 상천여인(常賤女人)으로 거리에서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자와 공사천(公私賤)은 밑머리를 허락하되 첩지와 딴머리를 하는 것 은 각별히 금한다. 각 궁방(宮房)에 소속되어 있는 무수리와 의녀, 침선비 그리고 각 영읍(營邑)의 기녀들은 밑머리 위에 가리마를 써서 등급을 구별하되 내의녀는 모단(冒緞)으로 하 고, 기녀는 흑삼승(黑三升)으로 하라.
7. 서울에서는 동짓날로 기한을 정하고, 지방은 동짓날에 공문을 보낸 것으로 보고 공문이 도착한지 이십 일을 한해서 일제히 실시하도록 하라.
8. 기한을 정한 후에 영을 따르지 아니 하는 자는 각각 그 가장 을 발견하는 대로 따로 각별히 엄하게 다스리라.
위의 내용은 정조시대 지난 수십 년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가체머리의 문제점을 말해주는 것으로 정조 때에 와서는 궁중은 물론 여항의 부녀자들까지도 가체머리를 하고 다녔으며 금지할 때 관기들도 금지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당시는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그렇게 금지를 시키면 머리모양만으로는 구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사대부가의 여인들은 족두리를 쓰게 하고, 하층민들은 밑머리를 하도록 했으며 관기나 무수리, 의녀 등은 재질과 색깔이 다른 가리마를 사용하도록 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가리마는 외출할 때 머리 위에 쓰는 것으로 여염의 부녀자는 너울을 사용했고, 기생들은 가리마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쓰개편’으로 따로 항목을 두어 다룰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또 거두미, 어유미가 있는데 이는 머리모양 그 자체가 아니라 족두리나 가리마처럼 머리에 착용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명부(命婦)가 항상 착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영조 때에도 논란이 되었던 대체용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족두리로 분명히 해두었다. 당시에도 혼례식 때 사용하는 칠보 족두리를 준비해 놓고 임대료를 받고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하면 이런 집에서 장식되어 있는 족두리를 빌려서 사용할까봐 이런 행위도 금지시켰다. 이 사실 한 가지만 보더라도 정조의 의지가 얼마나 치밀하고 단호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낭자쌍계(娘子雙髻)와 사양계(絲陽髻)에 대한 설명이다. 가체신금사목에 의하면 이 두 가지 머리모양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낭자쌍계는 낭자머리로, 사양계는 사양머리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 두 머리모양이 같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자료가 대부분이다. 즉 낭자머리는 생을 만들어 쪽처럼 얹은 것으로 이 생을 일명 사양이라고 하기 때문에 일명 사양머리라고 한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살펴봄으로써 머리모양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모습이나 명칭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과 견주어볼 때 정조 때의 경우와 그 전후의 경우 역시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단지 가체신금사목을 통해서 두 머리모양이 다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후에 따로 항목을 정해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가체머리 사기 사건 발생
여하튼 정조의 가체 금지령으로 인해 조선의 여인들은 쪽진머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 인해 가체머리는 해서는 안 되는 머리모양이 되었고, 이러한 금지 조치는 나라 안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포도청에서는 따로 가체머리를 한 여인을 잡아들이는 일을 맡게 되었고, 그에 따라 길거리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한성부에서는 행정구역을 다시 정비하기도 했는데 이는 다름아닌 가체 금지령을 세부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다. 즉 당시 서울은 크게 오부(五部)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 부가 다시 방(坊)과 계(契)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각 구역별로 실시되는 것을 관리하려다 보니 방(坊)은 있는데 계(契)가 없는 지역이 있고, 계(契)는 있는데 방(坊)이 없는 곳도 있어 그런 곳은 새로 명칭을 정해두기도 한 것이다.
이런 조치들은 영조 때와 달리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조정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바깥 출입을 하는데 하등 제약을 받지 않았던 하층민들은 길거리에서도 범법 여부를 금방 알 수 있으니까 단속에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담장 안에 있는 사대부가의 여인네들에게는 가체를 쓰고 있는지 족두리를 쓰고 있는지 직접 대문 안으로 들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가체머리 단속 나왔다고 문 열어주시오, 하고는 방문을 열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고, 여인들을 마당에 집합시켜 검사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점을 가장 궁금하게 생각한 사람은 다름아닌 임금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체 금지령을 내린지 6년 후인 정조 18년 10월 5일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임금이 이르기를 --- 가체를 금한 것은 또한 요즘에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김이소가 아뢰었다.
“머리를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비록 예전의 것을 답습하지 않으나 뒷머리의 경우에는 점점 높고 커지고 있으니 엄하게 법조문을 세워 정해진 규칙을 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에 임금이 이르기를
“조정의 명령은 반드시 행해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다. 규중에 있는 부녀자의 뒷머리가 큰지 작은지 어떻게 알아내서 금하게 할 수 있겠는가. 굳이 계속해서 거듭 금할 것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오른 신하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정해진 제도를 어기지 않게 다스리고 잘 관리한다면 사삿집에서도 반드시 서로 본받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 기록은 가체 금지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즉 가체 금지는 실시 6년 정도 되었을 때 대체적으로 잘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는 가체머리를 했느냐 한 했느냐가 논란의 대상이 된 게 아니라 쪽의 상태를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 도달하기까지 여인들은 불만과 긴장감 속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의 단속이 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안에 있는 여인의 단속은 가장 이외에 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임금이 우려하고 당부한 위의 기록만으로도 그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신하들에게 각자 집안 단속을 잘하라고 이르는 임금의 말은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가체 금지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우려했던 대로 족두리에 치장을 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가 하면 단체(單髢) 즉 밑머리를 더욱 부풀려서 크게 하는 여인들도 나타났다. 그래서 이들도 단속해야 한다는 말이 실록에 나타나기도 한다.
여인들은 수십 년 해온 풍성한 머리모양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지 단속에 걸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예전대로 멋을 부리려고 애를 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여인의 심정은 고금을 막론하고, 아니 동서를 막론하고 다를 것이 없다. 머리모양을 갖추려고 하는 건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첫 단계였다. 그것을 법령으로 못하게 하자 그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불만은 담장 안에서 생활하던 사대부가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담이 큰 여인들은 집안에서 하는데 누가 보리라고 하는 심정으로 태연히 가체머리로 단장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들도 있었다는 것은 다름아닌 실록이 말해주고 있다. 그런 여인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한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정조 16년 3월 14일자 실록에는 그 사실이 다음과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의 어떤 여인이 다리를 금하기 위하여 관에서 파견된 사람이라고 사칭하고 여염집을 출입하며 재물을 징수하다가 포도청에 붙잡혔다. 형조에 내려 엄한 형벌을 주고, 먼 섬으로 귀양보내 종으로 삼으라고 명했다.
이 여인이 어떻게해서 잡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가체머리를 단속하기 위하여 담장 안의 상황까지 관심을 두고 보았다는 것을 그 행간에서 엿볼 수 있다. 가체 금지로 인한 사기 사건인 셈인데 예나 지금이나 예뻐지려는 여인의 욕구에는 항상 무리수가 따른다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다.
가체머리는 이로써 점차 사라지고, 정조(正祖) 다음 임금인 순조(純祖) 때에 오면 거의 모든 여인의 머리모양이 쪽진머리로 변하였다. 가체 금지령을 내린지 대략 30년 전후의 일로 보인다. 조선의 여인은 이로써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가에서 지정해준 머리로 통일한 것이다.
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 둔 이규경(李圭景)은 그의 명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조선 여인의 머리모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조선조 중엽 정조 신해(辛亥) 이전까지는 큰 다래머리가 있었는데 이것을 가발(加髮)이라고 하였고, 제머리와 합쳐 땋지 않았으며 긴 다래를 땋아 머리를 한 번 두를 만큼 만들어서 비녀를 꽂았다. 정조 신해 이후 가발을 금하고 북계 속명 낭자라고 하는 것을 쓰게 하였는데 그것은 머리를 땋아 머리 뒤에 둥글게 서린 후에 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쓰게 한 것이다. --- 순조 중엽 후로 전국의 부녀가 다래로 머리 얹는 법을 없애고 다만 자기 두발로 머리 뒤에 쪽을 지은 후 작은 비녀를 꽂았는데 이것이 그대로 풍속이 되었다. 경인(庚寅) 연간에 이것을 금하고 다시 머리를 얹게 한 일이 있으나 행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이 우리나라 부녀의 머리모양 연혁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해는 정조 15년을 말하고, 경인 연간은 영조 46년을 가리킨다. 이는 모두 각기 가체 금지를 실시한 때를 이르는 것인데 실록의 실제 연도와 차이가 나지만 문제시된 시기는 같으므로 그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정조의 금지령 이전 가체머리가 본머리와 합쳐 땋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 그 머리를 어떻게 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로써 가체머리는 조선 중기 거의 이백년간 조선의 여인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다 강직한 임금에 의해 강제로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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