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21장 1-11절)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 사역을 위한 공생애 3년 반을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신 후 죽음을 당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고난의 한 주간을 보내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남은 마지막 주간의 일들을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날인 안식일 저녁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주님을 위해 베푼 잔치에 참석하신 후, 알려지지 않은 모처에서 제자들과 함께 그날 저녁을 유숙하시고, 그 다음날 일요일에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신 것은 대속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신 때는 공생애 제3년 가을(A. D. 29년 10월 초)이며,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는 6개월의 기간이 걸렸습니다.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무리들이 따라가면서 환호함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감람산 위에 있는 벳바게라는 동네 이르렀을 때입니다. 감람산은 기드론 골짜기 동쪽으로 약 3천 피트 높이로 뻗어있고, 3개의 봉우리가 북쪽에서 뻗어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정면으로 대하고 있는 그 산의 서쪽 경사지가 바로 작은 동네 '벳바게'(무화과의 집)입니다. 여리고에서 나온 도로는 감람산을 돌아 서쪽으로 통합니다. 예수님은 벳바게로 들어서는 길목, 그러니까 벳바게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 두 사람을 동네에 들여보내시면서 그들이 동네로 막 들어서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같이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인데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하면 그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즉시 그 나귀를 이리로 보낼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한 것은 나귀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걸어 들어가시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하시는가를 마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 일은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이것은 라고 말한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였습니다. 마태가 인용한 선지자의 예언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일컫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였습니다(슥 9:9). 여기에서 보듯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에는 나귀 하나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 11장 2절, 누가복음 19장 30, 요한복음 12장 14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매여있는 나귀와 그 새끼를 풀어 데려오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여서 마가와 누가와는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나귀 새끼만이 아니라 그 어미까지도 함께 풀어 데려오라고 지시하신 것은 아직 어미와 같이 있는 나귀 새끼이기 때문에 그 어미와 함께 데려 와야만 데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귀 새끼에 올라타시고자 하였고, 제자들은 그 나귀 새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올라타시자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벤 종려나뭇가지를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는 군중이 예수님을 앞뒤에서 에워싸고 따라가면서 크게 환성을 올렸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였습니다. 이 환성이 무슨 뜻으로 하고 있는가를 현대적 감각으로 번역한 현대어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비오니, 우리를 구하소서. 한없이 높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여, 호산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는 온 예루살렘 성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 소동하여 저마다 묻기를 "이분이 누구신데 이렇게 환호합니까?." 하였습니다. 이에 무리는 "이분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과 무리들의 환호가 갖는 의미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전에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에 모여들었는데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예루살렘 입성은 다른 때와는 달리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입성하시는 것인데, 유대 나라의 옥좌에 앉아 자기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적인 입성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무리 짓는, 곧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어 속죄의 죽음을 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의 터널을 지나 부활의 새날을 맞이하고서 승천하여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으로써 영원히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이러한 인식에 온전히 이르지를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받자 동네 어귀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그 어미와 함께 풀어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등에 올려놓고서는 예수님을 그 위에 올라앉으시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 아직 사람이 한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위에 올라타셨습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끌고 온 나귀의 등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올려놓은 행동을 한 것은 분명 예수님을 왕으로 여긴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그 어미와 함께 나귀 새끼를 데려오면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생각해 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제자들이 취한 행동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등에 올려놓은 행동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하시기 때문에 단지 편안하게 모시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전부터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왔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비단 제자들만이 취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는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사람들이나 벳바게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며, 또 유월절기가 눈앞에 다가온 시기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타지역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어느덧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그 뒤를 따라가면서 종려나무가지를 베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그 길 위에다 깔고, 또 저희의 겉옷을 벗어서 길 위에 깔았습니다. 그들이 입은 겉옷은 통으로 짠것이기 때문에 펴면 마치 카페트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환호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1장 9-10절을 보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였으며, 요한복음 12장 13절에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였습니다. 이렇게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호하여 맞이하였는데, 이런 말들 속에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 곧 메시야로 맞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환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메시야(그리스도)요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합당한 환호를 보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당면한 해방을 위하여 일하는 구원자란 지극히 현세적 차원에서 보낸 환호였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는 무리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인자가 고난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야 영광에 들어갈 것이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증명이 됩니다. 우선 요한은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신 데도 겸비하여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인데도 제자들은 그 당시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영광을 입으신 후에야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곁에 있으면서 모셨던 제자들조차 이랬습니다. 하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아무리 환호하며 열렬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맞아들이는 행동을 취하였을지라도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기대한 메시야의 구원은 지극히 현세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야관, 그러니까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바랐던 기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일을 하시는 메시야로서의 권능을 발휘하여서 로마라는 큰 세력과 싸워 자신들을 해방시켜 다시는 이방이 이스라엘의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이루어질 시기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지금인가 보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에게 환호를 보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에게 환호를 보낸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 내시는 이적을 행한 것을 현장에서 목격한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이 본 것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 그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요 12:17-18).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가진 메시야관이 지극히 정치적인 색을 띠고 있는데다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하는 현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호산나 만세를 불렀던 무리들은 사람들이 "이분이 누구시냐?."고 물을 때 "갈릴리 나사렛 출신 선지자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며칠이 못되어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바랐던 기대가 이루어지는 기미로 나타나지 않고 법정에 섰을 때 사람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충동에 그대로 휘말려 들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악한 모습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환호는 사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기를 뒤따르는 많은 사람들의 환호할 때 그것을 물리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써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 곧 메시야이심을 인정하시며 그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나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통해서 섭리적으로 무리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환영하게 하심으로 자신이 참 메시야이신 사실을 그들 자신 스스로가 모든 사람 앞에 증거하게 하신 것이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를 실증적으로 보여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선지자의 예언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왜 굳이 그러셨어야 했는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에서 선지자에게 그와 같이 예언하게 하셨는지를 살펴봅니다.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는 나귀 새끼만이 아니라 그 어미인 나귀도 있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그 어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모양새도 좋고 사람들 보기에도 좋았을 텐데….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가장 큰 이유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이유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왕보다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나귀가 아니라 가장 튼튼하고 뛰어난 말을 타고서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왕의 행차는 군대를 통솔하고서 큰 말을 탄 위엄 있는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로마제국을 무너뜨릴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들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이적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 권능 있는 분이 천군의 호위를 받으며 호화스럽게 치장한 큰 백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못하시겠습니까?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어 성경에서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를 '잡종도 아니고 전투용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라고 하였듯이 천군을 거느리고 큰 말을 탄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탄 아주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춘 의식을 행하는 것이지만 한 국가의 큰 세력을 내세운 어떤 형식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정작 가장 크고도 중요한 이유는 다음의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메시야이자 왕이신 자가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예언한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려는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태가 그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강조한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모든 일을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게 하신 데 따라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 예언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분명하게 의식한 가운데서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 예수님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의 모습을 나귀 새끼를 타는 것으로 예언하게 하신 것은, 그러한 모습으로 왕의 예루살렘 입성을 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그분이 시온 딸(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해 온 그 메시야 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메시야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써 실증적으로 보여 나가셨습니다.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을 그렇게 믿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이심을 인정하고 환영하는 것이요, 또한 그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중에서 어미가 아닌 한 번도 타 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탈것을 예언하셨고, 또한 예수님은 그 예언에 순종 하셨는가는 나귀 새끼가 예수님이 이루실 구속 사역에 쓰여지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민수기 19장 2절에 보면,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말씀하였으며, 신명기 21장 3절에는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이나 혹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쓰여지는 제물은 오래 된 것이 아닌 처음 것, 헌 것이 아닌 새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신 메시야는 그 누구도 타 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셨는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신성한 몸이 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그 크신 목적으로 위해서 드려 가시는 것으로써 멍에를 메지 않은 나귀를 처음으로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둘째, 스가랴 9장 9절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나귀 새끼를 타실 분을 언급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을 의미하며, 예루살렘의 딸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은 같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고 환호하는 것은 그들의 왕이 그들에게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 왕의 모습을 묘사하기를 그분은 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신데도 겸손(겸비)하여 잡종도 아니고 전투용도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전투가 아닌 평화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도 말씀한 사실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환호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평화의 왕이 지금 자기들 앞에 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오셨을 때입니다. 안식일이 되자 전에 안식일 규례에 의해서 전에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사야의 책을 받아든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1-2절에 있는 말씀을 찾아 펴시고는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현대어 성경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의 기운이 나를 휘감아 돌았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어 예언자로 세우시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이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일으켜 주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너희가 이제 풀려 나간다!
모든 옥문들이 열리게 된다고 알려 주라고 나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셨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다 풀어 주시
며 슬피 우는 모든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시대가 되었다고 널리 알리도
록 주께서 나를 보내셨다."
예수님의 주변으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펼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다 쭉 깔아 그 위로 가시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맞아들이며 환호하였습니다. 비록 그들이 기뻐하고 환호한 것이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현세적인 관점에서 행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물리치거나 부인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알고 있는 대로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이루어 나가시는 일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보며 기대했던 방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전투를 통해서 힘으로 해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평화를 실현시켜 나가신 방식은 대속주로 삼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서 십자가에 희생재물로 헌신케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세상에 나타낼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사람이 한 번도 타 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평화의 세계를 실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크신 목적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가실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위해서 쓰여질 나귀는 처음 것, 새것이어야 했습니다.
오직 한길만을 걸어가신 예수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때는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정오에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오후 3시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날을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기다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사생활 30년이 하나님의 일을 맡아 수행하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다고 하면 공생애 3년 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온전히 순종하여 수행하신 기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생을 오직 한가지 일만을 위해서 한길을 걸어가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임박한 고난과 죽음을 예고해 주셨었습니다(마16:21,17:22-23,20:17-19,26:1-2)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떠한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을 아시고 계셨으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죄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오직 그 한길만을 걸어가신 것을 말해 줍니다. 다른 사람이 잘 하지 않는 일을, 한가지 일, 한가지 직업만을 가지고 평생을 일한 사람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여느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은 평가가 내려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한가지 일을 위해 한길을 걸어간 것은 자기를 위해서도 아니고 문화 보존이라는 명목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주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한가지 일을 온전히 수행해 가기 위하여 일생을 한길만을 걸어갑시다. 주의 고난의 흔적을 우리 육체에 지니고서 주께 대한 변치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일로 우리를 멸시하고 고난과 죽음이란 십자가에 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죽음을 당한 상처의 흔적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가장 확실한 표적이 될 것이며(갈6:17),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가 자랑할 자랑이 될 것입니다(갈6: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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