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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눌(갑오연화)의 백두대간(소백산구간) 한동가리
일시 : 2007. 6. 9-10(1박2일)
날씨 : 흐리고. 구름. 맑음
일정 및 코스: 첫날, 희방사역- 비로봉 (주목관리소)
둘째날, 비로봉-구인사
거리.산행시간 : 총 30km . 12시간 20분
이번주 토요일은 휴무 토요일이다.
무언가 일을 꾸며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탓도 있지만, 아까운 연휴를 의미 없이 그냥 보내기는 더욱 싫다.
그런데 마누라가 이번주 많이 바쁘다.
시골(경남 의령)에 계시는 장모님께서 위암 수술 후의 경과를 진료하는 날이 7일 이어서, 7일 올라 오시는 장모님을 터미널에 가서 모시고 병원에 가야하고, 8일날은 또 터미널에 모시고 가서 보내 드려야 한다.
바쁜 마누라에겐 말도 못하고, 나 혼자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본다.
못갈지도 모르면서...
지도를 복사하고 등고선을 그리며, 백두대간 가던 그때처럼 만반의 준비를 한다.
8일 장모님을 터미널에 모셔다 주고 온, 마누라에게 연휴에 어떻게 할 것인가. 넌즈시 물어보며, 산행 계획을 슬며시 애기를 하니, 순순히 따를 기세이다.
때는 이때다 하고, 기차표를 예매를 하고, 구체적인 준비를 하게 된다.
작년 여름 지리산 남북종주 후, 모처럼만에 나서 본, 원행 산행이라 마음이 설레인다. 더군다나 백두대간 구간을 다시 한번 답습한다고 생각하니, 자못 기대가 되며,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굼하기도 하다.
7일 저녁 배낭을 챙기노라니, 나의 배낭이 17kg, 마눌 배낭이 5.4kg이다.
배낭 무게도 무게지만, 백두대간시절이 다시 떠 오르니, 감회가 새롭다. 그 때는 혼자 였지만, 이번엔 둘이서 가는길이 어떻게 다를까?
여러가지 상상이 된다.
청량리에서 07시 기차를 타야하니, 일찍 잠들어야 하나, 12시를 훌쩍 넘기고 잠자리에 든다.
05시32분 주엽역에서 출발하는 지하철을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을 하여 예약한 기차표를 자동 발매기로 발매 받으니, 시간이 빠듯하다.
안동까지 가는 중앙선 열차에 오른다.
모처럼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 드는지, 마누라의 기분이 한껏 들떠있다.
앞으로 걸어야 할 산행길 고생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창밖에 펼쳐지는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이곳 저곳 설명을 하며, 여유를 부려본다. 중앙선 열차는 간현을 지나고 부터는 나도 처음길이다.
단양을 지나 지도상으로 보았던 또아리 터널을 지날때는 신기하였다.
죽령역에서는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를 한다. 저 멀리 죽령고개가 보인다.
열차는 다시 긴 죽령터널로 들어간다. 다음이 희방사 역이니 내릴 준비를 한다.
열차가 4시간만인 10시 55분에 희방사역에 도착을 한다.
우리들을 포함하여 등산객이 스므나뭇 내린다.
희방사역이라니, 조그만 산골 동네 간이역 수준이다.
역사 밖으로 나온 많지도 않은 등산객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대부분 희방사로 가는 등산객들인 모양이다.
그중 두사람이 택시를 세워 놓고 실갱이를 한다.
한 사람은 여기까지 와서 택시를 타고 산을 오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다고 우기고, 옳은 말이다. 또 한 사람은 희방사까지만 택시를 타자고 우긴다. 결국 택시를 타고 가기로 한 모양이다. 희방사 절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데, 요금이 17,000 원 이란다.
나는 그들과 상관 없이 희방사역에서 죽령까지 옛길로 걸어가려는 계획이였기 때문에 역사 왼편 죽령 옛길 안내판을 살피고, 죽령옛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백두대간길이라면, 죽령에서부터 시작되니까 죽령까지 택시로 가도 되련만, 왠~ 옛길 답사를 한답시고, 마누라를 고생시킨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희방사역>
<역사 옆에 세워 논 죽령 옛길 안내판>
미안한 마음에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알게된, 죽령 옛길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을 하며, 죽령 옛길을 오른다.
길이 좁은 오솔길 정도인데, 승용차들이 계속 올라온다. 어디가는 차들인가 하였드니, 등산객들이다. 한걸음도 걷기 싫은 사람들이 등산은 왜? 오는지...
알고보니, 고속도로 교각밑에 차를 세우고, 빈몸으로 죽령 옛길 답사를 하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죽령옛길 답사가 지역 행사로 이벤트화 되어 있었기에, 나 역시 죽령 옛길의 유래를 알고, 그 길을 걷게된 것이다.
빈몸 차림의 답사객들을 추월하고 올라가다 보니, 키보다 높이 올라간 나의 배낭을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이때부터 나는 산행 내내 등산객들에게 외계인 취급을 당하게 된다.
<고속도로 교각 아래를 지나고 있는 갑오연화>
옛길다운 면모를 살리기 위해서인가 제법 세월의 때가 묻은 장승들이 세워 져 있다.
<장승>
우마차가 지날 정도의 길옆 군데군데 서있는 장승들만이 옛길임을 알려 줄 뿐, 여느 시골 산길과 다름 없다.
<각기 다른 글이 세겨져 있는 장승>
<장승>
나무가 별로 우거지지 않은 완만한 길을 걷자니, 힘들지는 않지만, 햇볕에 땀이 제법 몸을 적신다.
사과밭 과수원을 지나니 숲이 제법 우거져 시원함을 선사한다.
<과수원 끝나는 부분 장승>
느티정 주막거리 터 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그 옛날 주막이 있을 법한 넓은 공터가 있으나, 주막거리라는 별다른 흔적은 찾을 길 없다.
<주막거리 터>
또 다시 나타난 장승, 많기도 하다.
<마지막 장승>
길도 완만해서지만, 아직까지는 용감하게 걸어가고 있는 갑오연화의 뒷 모습이대견하다.
<한적한 오솔길을 앞서가는 갑오연화>
잔운대와 축령대라는 생소한 안내판이 서있다.
내용인 즉,
잔운대 와 촉령대는 충청감사 온계 (퇴계의 형님)가 고향인 안동 예안에 다니는 길에 당시 풍기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동생 퇴계 이황이 죽령고개 까지 마중하고 배웅하던 자리 였다고 한다
당시 둘 형제간의 애틋한 사연을 읊은 시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 어느듯 서산에 해는 지는데
술 끝나도 다릿가에 서성거리네
구름 산도 분명 내말 들었으려니
내년에 다시 오리 기다리게나. -온계-
* 자연을 다듬어서 대를 꾸미니
감사형님 마중 배웅 위함이로세
기쁘고 정겨워라 물소리 졸졸
이별이 아쉬운양 멧뿌린 우뚝. -퇴계 이황-
- 토계 이황의 시로 보아 (자연을 다듬어 대를 꾸미니 구절에서 ) 형님 온계를 마중하기 위해서 죽령고갯길에 잔운대와 촉령대를 다듬어 만든 것으로 보여 집니다(퍼옴)
<잔운대와 축령대의 유래 안내>
<한시>
<한글 번역 시>
40여분 올라가니 죽령 옛길 걷기 행사 프랑카드가 걸려 있다.
산상 음악회도 열렸던 모양이다.
요즈음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이벤트를 벌리고 있어, 과연 바람직 한가를 검토해야 할것 같다.
<행사 알림 프랑카드>
또 다른 주막거리 터가 나타난다.
옛 길손들이 막걸리에 목을 축이며, 고달픈 몸을 쉬어 가도록 고개마다 주막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로는 얼마나 고마운 주막이였을꼬...
<또 다른 주막 터>
여기는 그래도 주막의 담장이라도 남아 있다.
<주막 담장의 흔적>
차소리가 들리고 죽령고개가 가까워 지자 경사도가 가파르다.
갑오연화가 제법 힘겨워 한다.
이제 시작인데 큰 일이다. 다왔다고 격려를 하며 오른다.
한참의 오름만에 이윽고 백두대간 도솔봉에서의 날머리인 죽령고개와 만나다.
대간 종주때는 어두운 밤에 도솔봉에서 내려왔고, 또 다시 비로봉으로 향할 때는 세벽에 출발을 했던 관계로 다시 보는 죽령의 모습이 새롭고, 사뭇 다른 느낌이다.
<죽령 도솔봉 날머리>
<백두대간 표지석>
<거대한 영남의 관문 죽령 표석>
<3개 방송에 출연한, 유명한 죽령 주막>
이 장독대에서 숙성시킨 토종 된장이 1kg에 10,000원에 팔고 있다.
<죽령 주막의 장독대>
대간때 자세히 보지 못했던 죽령의 모습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디카에 담는다.
열차내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여 주막 안으로 들어간다.
된장찌게 백반을 시켜놓고, 연화봉에서 부터 흘러 온다는 물로 시원하게 목을 축인다.
주인장 왈, 얼마전 거금을 들여 수질검사도 마쳤다며, 좋은 물이라고 자랑을 한다.
된장찌게 백반이 갖가지 나물을 놋그릇에 내와 비벼 먹도록 나온다.
된장맛이 토종 진맛이다.
김치(묵은지)는 아마도 2-3년은 묵은것 같이 맛이 기가 막히다.
다른 메뉴는 먹어보지 못했지만, 단연 된장찌게 백반을 추천하고 싶다.
가격도 저렴하게 1인분 5,000원이다.
<죽령주막의 된장찌게백반>
맛있게 속을 채우고 본격적인 산행을 준비한다.
백두대간 맛보기의 상징으로 갑오연화 증명사진을 백두대간 죽령표석을 배경으로 한껏 찍는다.
<백두대간 한동가리 증명사진>
경상도 땅에서 충청도쪽으로 넘어온다. 충청도쪽 휴게소에는 대형관광버스가 여러대 주차되어 있고, 특산물 판매장에는 관광객이 넘쳐난다.
<충청도 쪽 죽령휴게소 표석>
홀로 걸었던 백두대간길을 마누라와 같이 걷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들머리 시멘트 포장길을 시작으로 긴 포장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키를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매표소를 지나려니 매표소 안에 있던 여직원(유뷰녀)이 마중을 나오듯이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당일 산객이 아님을 알고 경고투의 말로) 산꾼이 산엘 가는데 웬~ 참견,
안부삼아 물어 본 말투가 아니니, 나 역시 좋은 기분으로 답하지 않는다,
백두대간 종주중이라고 쏴 부치듯이 말을 하니, 오늘은 어디까지 갈것이냐고 재차 물어 온다. 다시 고치령까지 갈 계획이다고 하니, 국립공원이나, 산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취사나 비박을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알고 있으니 염려 말라고 건성으로 답을하고, 가던 길을 간다.
처음부터 김이 샌다.
<첫번째 만난 이정목>
하늘엔 구름이 끼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만약 땡볕아래 시멘트 포장길을 걷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두번째 이정목>
사진을 찍느라고 늦장을 부렸드니, 갑오연화가 저만치 가고 있다.
무슨 맘을 먹었는지 잘가고 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화물차가 올라 간다.
<경사도가 덜한 쉬운 길>
전망대에서 풍기쪽을 내려다 본다. 그런대로 시야가 트인다. 대간중 이곳을 달밤에 지나면서 불빛으로만 보았던 시가지다.
<전망대에서...>
도솔봉쪽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구름에 가려 정상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전망대에서 도솔봉쪽으로>
약 한시간 남짓 걸어 왔는데, 아직 송신소 탑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제 겨우 3.3km 걸어 온 모양이다.
<죽령에서 3.3km 지점>
화장실 있는곳에 관리공단 차량이 주차되어 있고, 화장실 수리를 하는 모양이다. 지나 가려는데 검문을 하듯 또 물어 온다.
어디까지 가느냐고, 나의 배낭을 보고, 예의 취사.야영을 하려는 것을 아는듯 말이다.
나 역시 퉁명스럽게 일단 비로봉까지 가 볼꺼라고 막연하게 말을 해준다.
또다시 훈시조로 취사. 야영은 일체 않된다고 하면서 직원들이 순회하면서 단속을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좋은 기분으로 마누라와 산행을 하는데, 심사가 뒤틀리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그래도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갑오연화가 고맙다.
<앞서가는 마누라>
1시간 30여분 만에 운무에 가려진 기다리던 송신소가 눈앞에 나타난다.
<송신소를 앞두고>
지도상 표시된 송신소가 확실한 하나의 중간 목적물이 되어, 갈길을 가늠하게 되니, 새로운 힘이 솟는다.
열심히 걸어 송신소 아래 전망대에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
그리고 가야 할 길을 살핀다. 이제 좀 편한 길이 이어 질거라고 갑오연화에게 희망을 준다.
오는 동안 내내 교행하는 산객들이 많으니, 심심치는 않다.
시간상으로 아마도 연화봉에서 회귀하는 등산객들인 모양이다.
<운무에 가린 천문대 쪽>
<송신소의 뒷 모습>
바람에 운무가 겉히니 연화봉과 천문대가 멀리에서 보습을 나타 냈다가 이내 다시 운무에 묻히고 만다.
<천문대와 연화봉>
천문대를 향해 다시 걷는다.
흙길이 나오니 갑오연화가 좋아 한다. 시멘트 포장길이 몹시도 싫었던 모양이다.
샘터 20m 안내판이 있는곳을 지난다.
날씨 관계로 물이 많이 먹히지 않아 물을 보충 할 필요는 없다.
<샘터 안내판>
천문대 오름길에 잠시 쉬고 있자니, 관리공단 차가 다시 올라간다.
꼭 나를 따라 다니는 기분이다.
기분 영 더럽다.
마누라가 혹여 눈치를 챌까바, 표정관리를 한다.
천문대가 지척에 있으나, 운무에 제 모습을 쉬 들어 내 놓지 않는다.
잠깐의 타이밍을 이용하여 담아본다.
<천문대>
천문대 본관 앞을 지난다.
멀리 연화봉 정상에 등산객이 많이 올라가 있다.
천문대 정문을 지나, 잠시 쉬면서 참외를 하나씩 먹는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차가 차도 마지막, 연화봉 밑에 주차되어 있다가 내려 온다.
시위를 하고 다닌것 같다.
상관 않기로 하고, 연화봉을 향하여 다시 힘을 낸다.
<천문대 본관 앞을 지나며>
1,383m 연화봉 정상이다.
사람들이 많아 장터를 연상케 한다.
그동안 오면서 수많은 등산객들의 눈초리로 부터 수난을 당했던 배낭 모습을 담아본다.
<고생 보따리>
<연화봉 정상석>
<정상 이정목>
<천문대를 돌아보며...>
연화봉 정상에서 다시 내려오다, 우측으로 꺽어 제1연화봉을 향해 나무 계단을 걸어간다.
여기서 부터는 비로봉에서 오는 등산객들이 많이 눈에 뛴다.
등산객들이 더러는 비옷을 입고 온다.
비로봉 상황을 물어 보니, 비는 오지 않지만, 비로봉 정상에선 운무가 비가 되어 내린 탓이란다.
교행중인 등산객중에서 우연히 지인을 만난다. 사무실 옆 새마을금고 전무님이시다. 동네 산악회(후곡마을 산악회)를 따라 왔다고 한다.
이런곳에서 우연한 만남은 더욱 반갑다.
아쉬움으로 배웅을 하고 뒤 돌아 보니, 천문대가 아스름 보이는것이 그새 많이 걸어 온듯 싶다.
<뒤 돌아본 천문대>
한참을 내려 다시 오름길이다. 아마도 제 1연화봉을 올라야 하는 모양이다.
제 1연화봉 오름 계단이 버티고 서 있다.
잠시 힘을 충전하려고 배낭을 내리고 쉰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계단을 내려 온다.
<제1연화봉 오름 계단>
1,394.3m 제 1연화봉 정상 표지목이다.
정상이 지나가는 길목에 불과하다.
<제 1연화봉>
갑오연화가 그렇게 기다리는 주목관리소(대피소)가 얼른 나타나지 않는다.
이 고개만 넘으면, 또 여길 지나면, 또 다시 거짓말쟁이가 된다.
나 역시 이곳 쯤에선 보이리라 생각하고 와보면 아니올씨다다.
오늘 하룻밤 묵어가야 할 주목 관리소가 쉽게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또 한 봉우리가 앞을 막고>
등로에는 햇빛이 없어 음산하지만, 산아래 저 아랫역에는 햇빛이 비추고 있다.
하루 종일 운무가 바람에 날려 시야를 가리고, 체온을 떨어뜨리니,이젠 따뜻한 햇볕이 그립기 조차 한다.
막상 햇볕이 내리 쬐이면, 더욱 힘들겠지만, 이 순간만은 햇볕이...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햇볕이 비추는 산 아래 마을>
비로봉 1km을 알리는 이정목이다.
이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하는 주목관리소가 지척이다.
한계에 다달은 갑오연화에게 마지막 희망을 심어준다.
마지막 교행 등산객 다섯명을 만나고, 이후 등산객은 우리를 제외하고는 없다.
<비로봉이 1km 남았다>
소백산의 주목이다.
생천사천 주목 군락지가 시작된다.
이 주목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비로봉 바로 아래 주목 관리소가 언제부터인가 지어져 임시 대피소 역할도 하고 있다.
주목관리소가 없으면, 갑오연화와 오늘의 이런 산행도 계획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운 시설물이다.
<소백산 주목>
작은 봉우리를 돌아 올라 서니,
갑오연화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목 관리소가 운무에 쌓인체 우리의 앞에 나타난다.
앞서가는 갑오연화에게 저기가 주목관리소다. 하니 또 거짓말인가. 하면서도 어디~ 어디하고 반갑게 반문을 한다.
어렴풋이 앞에 나타난 주목관리소를 보고, 갑오연화가 이제 살았다. 하는 환호가 들리는듯 하다.
<주목관리소를 앞에 보고>
비로봉은 아직도 운무가 끼여, 희미하게 보인다.
가까이 갈수록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비로봉이다.
<희미하게 모습을 보여주는 비로봉>
화무십일홍이라 하였던가.
핏빛으로 물들었던 소백산 철쭉이 어느새 빛바랜 철쭉이 되어, 힘없이 떨어지고 푸르름으로 변하고 있다.
<빛바랜 철쭉의 잔상>
주목관리소 가는 아랫길을 놔 두고 비로봉으로 향하는 능선 계단을 따른다.
마누라는 굳이 왜 또 올라가야 하느냐고 푸념이다.
지난 대간때 이 능선길을 걷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길을 걸어가려는 나의 속 마음을 모르는 마누라로서는 당연한 소리다.
<비로봉으로 가는 능선길 계단>
계단 갈림길에서 다시 주목관리소로 돌아온다. 갑오연화가 관리소 문이 잠겼으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이 태산이다.
문은 잠겨져 있지 않다.
혹시나 누가 있나?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아무도 없다.
17시 37분, 약 15km를 걸어와,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하는 종착점에 도착을 한다. 희방사역에서 부터 여기까지 나름대로 천신만고 끝에 걸어왔을 마누라에게 무한한 격려와 고마움을 보낸다.
편안하게 쉬고, 따뜻하게 잠을 잘수 있는 안식처에 무거운 배낭과 마음에 짐을 내리고 여장을 푼다.
* 10일 새벽녘
오랫만에 야영을 한, 갑오연화가 숙면을 취 했을리는 만무하다. 마누라를 침낭속에 누워 있게하고, 03시40분쯤 일어나 누룽지를 끓인다. 여러가지를 감안하여 어제 저녁도 간단한 간식으로 해결하였으나, 아침에는 몸속을 뜨거운 물이라도 채워야 하겠기에, 할 수 없이 버너에 불을 피웠다. 어제 비로사에서 올라와 우리보다 늦게 들어 온, 등산객(젊은 남녀)에게 물을 얻어 커피까지 끓여 따끈하게 한잔하고 나니, 몸이 풀린다.
장비를 챙겨 풀어 헤쳐논 배낭을 천천히 파킹한다.
05시경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출발 준비를 한다.
소백산 정상 , 이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준, 고마운 주목관리소에 잘있어라 인사와 함께 작별하고, 길고 긴 또 하루의 산행을 시작한다.
<주목관리소를 떠나며...>
10여분이 못되어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에 선다.
동쪽 하늘에 일출의 징후가 보인다.
<비로봉 정상석>
<운무속에서 어느새 나타난 태양>
풍기에서 올라 왔다는 중년부부가 있어, 비로봉에서 같이 일출을 맞이한다.
그들에게 부탁하여, 이번 산행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누라와 같이 사진 한장을 남긴다.
여름철에 웬~ 겨울 복장을...
<비로봉에서..,>
정상에 올라오면 내려가야 하는 것은 만고에 진리인듯...
갈길도 멀지만, 춥기도 하거니와 오래 머물수 없는게 정상 아니던가.
갑오연화는 이제 가까운 코스로 내려가서 끝내는가 하였으나,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니, 적이 실망스런 눈치다.
그러나 어찌 할 것인가. 우리네 인생살이 처럼 또 가야하는 것을...
국망봉을 향하여 계단길을 내려 간다.
<비로봉을 뒤로하고 국망봉으로>
어느덧 도착한 국망봉이다.
비로봉에서 3.1km이다.
배낭을 내리고 간식을 하며 쉰다. 갑오연화에게 국망봉 안내문을 읽어준다.
나라 잃은 설음도 있고, 일편단심 절개와 충성도 있다.
<국망봉>
태양은 아직 운무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다.
이때쯤 따스하게 햇볕을 비쳐주어도 좋으련만,
풀섶에 맺힌 이슬이 바지 가랭이를 적신다. 그래도 우리 갑오연화는 용감하게상월봉을 향해 박차를 가한다.
드디어 또 한 대간 상징물인 상월불이 운무속에 나타난다.
등로에는 맷돼지의 소행이 분명한 땅갈이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시간상으로도 우리가 가기 촌각전에 있었던 흔적이다.
갑오연화가 섬찟한 모양이다.
나 역시 홀로 대간 당시를 상기해 보니, 이렇게 둘이 걷는 다는게 얼마나 든든하고 위안이 되는지 천양지차다.
<눈 앞에 상월봉과 상월불이...>
상월봉에서의 내림길이 미끄러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갑오연화는 오래전에 다친 다리 때문에 오름길 보다 내림길을 더 힘들어 한다.
조심 또 조심이다. 신경이 많이 쓰인다.
급경사 내리막을 지나고, 완만한 내리막에서 한 시름 놓는다.
대간 당시 잠시 햇갈려 했던 늦은맥이 고개에 도착을 한다.
어의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기도 하다.
이정목에 구인사로의 길은 통제구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갑오연화를 생각해 어의곡으로 하산을 해 볼까. 잠시 갈등을 한다.
그러나 처음 계획한 대로 구인사로 향하기로 한다.
<늦은맥이고개 이정목>
뜬금 없는 신선봉과 연화봉을 가르키는 이정목이 뻘쭘하니 서 있다.
이곳이 백두대간 고치령으로 가는길과 신선봉으로 가는 삼거리인 듯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터 구인사까지는 초행길이라, 단순 지도에 의해 독도를 하고 가야 할것 같다.
마음을 다잡고 신선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신선봉 갈림길>
신선봉이 나타 날것을 믿고, 열심히 걸어 보아도, 신선봉다운 봉우리가 없다.
지도상 신선봉의 높이가 1,389m이니, 신선봉이란 표식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선봉이 0.9km 남았다는 이정목 표시를 지난것이 오래 되었는데 구인사. 남천리방향과 비로봉 방향을 가르키는 표시판만 있을 뿐이다.
희미하게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혼자 올라가 본다. 이 길은 아니다 싶어 내려와 지도를 펴놓고 독도를 해 본다.
아마도 신선봉 정상을 약간 우회해서 내려 온것 같다. 희미하게 올라가는 길은 신선봉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인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구인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신선봉 정상가는 길과 우회길 갈림길 이정목>
구인사 방향으로 접어들어 조금 걷자니, 전망이 트이는 곳이 나타난다.
다시 독도를 하기 위하여 배낭을 내리고 쉰다.
멀리 구름아래 비로봉이 보이고, 가운데 국망봉 가기전의 암봉, 그리고 국망봉이 백두대간 마루금을 잇고 있다.
<우측부터 비로봉. 뾰쪽한 암봉. 그리고좌측 국망봉>
우측 국망봉과 가운데 상월봉으로 마루금이 이어지고...
<국망봉과 상월봉>
약간 우회해서 지나온 신선봉이 지척에 보인다.
여기서 보니 신선봉에서 또 다른 능선이 갈라져 있다.
<정상을 밟지 못한 신선봉>
이제 독도를 정리하고 구인사로의 길을 잡아 다시 걸어간다.
민민한 대머리를 연상하는 봉이 나타난다. 이름하여 민봉이다.
그래도 고도는 1,381,4m이다.
햇볕을 가릴 나무가 없어서인지, 모처럼 거칠것 없이 내리 쬐이는 햇볕을 온 몸으로 맞는다.
모처럼 옷을 벋고 거풍을 한다. 상쾌하다.
<단양 306 삼각점>
편안하게 민봉을 내려선다.
원츄리가 우거진 완만한 민등을 내려가는 길이 갑오연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9부 능선을 우회하여 내려서니 1,244봉이 나오고 구인사가 5.4km 남았음을 알린다.
여기서 부터 능선을 버리고 작은 계곡을 끼고 너덜길을 걷게 된다.
이런길은 갑오연화에겐 쥐약이나 다름 없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앞에도 세워 보고, 뒤 따라오게 하기도 하고, 별 짓을 다해 보지만, 속도가 나지 않는다.
별 도리가 없다. 지루한 너덜길을 세월아 가거라 하고, 하염없이 내려 갈 수 밖에...
<구인사 5.4km 전방>
계곡물에 얼굴을 씻기도하고, 간식을 먹어가며, 쉬엄쉬엄 내려 오다 보니, 반가운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라는 것은 항상 인적과 가까운 것이니까.
내가 아니라 갑오연화 때문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제 고생끝 행복 시작이라고 안심을 시키고 계곡물에 땀을 씻는다.
그런데 임도 어느 쪽으로 가야 구인사 쪽으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잠시 햇갈려 다시 지도를 꺼내 독도를 해본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계곡에서 독도를 하니, 좌우 능선이 똑 같은 방위각이 나온다.
좌측으로의 판단을 수정하여, 우측으로 가기로 한다.
넉넉하고 평탄한 임도를 걸어가며, 능선과 임도가 만나는 지점에 가면, 구인사가 보일 듯도 싶다.
마지막 핏치를 독려한다. 방향은 잘 잡았는데, 그런데 이게 우찌된 일인가?
임도와 능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표시기들이 임도를 버리고 다시 산으로 올라 붙는게 아닌가. 산으로의 출입은 통제되어 있다는 경고문의 서슬이 퍼렇다.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700m 등고선 봉우리가 하나 있다.
그렇다면, 600m 지점에서 100m 이상의 봉우리를 직상으로 쳐야 한다.
임도가 오늘 산행의 끝인 줄, 알았던 갑오연화가 혼비백산 한다.
나 역시도 황당하였으니, 당연히 그럴만 하다.
올라가는 경사각도가 거의 45도 이상 나온다. 과연 이 봉을 무난히 오를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럽다.
한발, 또 한발 세면서 올라간다. 이미 시간대는 잊어 버린지 오래다. 군데 군데 칼날 같은 능선도 있다. 위험 구간엔 바짝 신경을 쓴다. 힘에 부쳐 잠깐 실족을 한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허기가 진다는 갑오연화에게 간식을 먹도록 하고, 쉬고 또 쉬면서 오르다 보니
역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 이로다" 다.
725m 정상에 올라오니, 별천지가 전개된다. 잡초를 제거하고 밧줄로 출입통제선을 만들어 놓고, 안내판도 여러개 설치가 되어 있다.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가보니 봉우리 정상 한가운데 잔듸로 조성된 묘지가 성역으로 보존되어 있었고, 사람들이 북적 거린다.
<725봉 정상에 도착하여>
<우리가 왔던 임도 아래 초지 조성지를 돌아보며>
정상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가보니 봉우리 정상 한가운데 잔듸로 조성된 묘지가 성역으로 보존되어 있었고, 예불 드리는곳엔 사람들이 북적 거린다.
알고 보니 이곳이 상월원각대조사를 모셔둔 천태종의 성지이다.
관리사가 있고, 불단이 있고 묘지 근처는 철저히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다.
대조사님의 속성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고 본명은 준동(準東)이며 법휘(法諱)는 상월(上月), 의호(懿號)는 원각(圓覺)이다. 신해년(1911) 음 11월 28일에 강원도 삼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총명하고 자질이 뛰어나서 15세 전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하셨다.
15세 때에 불문(佛門)에 득도하여 경ㆍ율ㆍ논 삼장(三藏)을 참구하신지 수년에 대조사님께서 불법의 근본 가르침이 경문을 알고 이해하는데 있지 않고 자성(自性)을 밝히는데 있음을 깨닫고 명산과 승지(勝地)를 찾아가 폐침망식(廢寢忘食)하면서 지관(止觀)을 닦아 오셨다. 그리고 견문을 넓히고자 운수납자(雲水衲者)로 중국에 들어가 천태산 국청사(天台山國淸寺)와 오대산 문수도량(五臺山文殊道場)과 보타낙가산(普陀洛伽山) 관음영장(觀音靈場)등을 순례하고 서장(西藏)까지 편력하며 만행(萬行)을 닦으시었다.
대조사님께서 8ㆍ15광복을 전후하여 깊이 뜻하신 바가 있어 국내 여러 명산승지를 두루 답사하시다가 소백산 구봉팔문 하의 연화지(蓮華地)에 이르러 초암(草庵)을 얽고 불석신명(不惜身命)으로 각고정진을 하여 오셨다. 동족상잔의 6ㆍ25 동란 중에는 대조사님께서 주로 마곡사(痲谷寺)와 공주지방에서 난민(難民)들과 더불어 지내오시면서, 전진(戰塵)중에도 무외(無畏), 무애(無碍)의 법력과 자비행으로 많은 사람을 구제하셨다.
공산군이 격퇴된 후 대조사님께서 전화(戰禍)로 소실된 초암을 다시 얽고 천태지관법(天台止觀法)을 수증하면서 만경구적(萬境俱寂)의 공삼매(空三昧)를 체인(體印)하고 신묘년(1951) 음 12월 28일 활연대오하여 삼관묘제(三觀妙諦)의 무상대도를 성취하셨다. 그리하여
산색고금외(山色古今外)
수성유무중(水聲有無中)
일견파만겁(一見破萬劫)
성공시불모(性空是佛母)
라는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시었다.
상월대조사님께서 소백산에 입산하시어 새도량을 개설하시고 각고정진하실 때에 몇가지의 큰 서원이 있었다. 그 서원이란 「기필코 큰 법을 성취하고 이곳에서 새 불교운동과 큰 불사를 일으키겠다. 기필코 반야지혜와 무애해탈을 증득하지 않고서는 사회와 대중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기필코 스스로 성취한 공덕은 만중생에게 회향하여 다함께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조사님의 불퇴전의 구도정신과 새 불교, 새 신앙운동의 염원과 광도중생의 대원을 알수 있는 것이다. 대조사님께서는 근세 이래 국민정신의 바탕이 무너진 사상계의 혼미와 정법의 퇴상을 개탄하시고, 특히 이기적 편집(偏執)과 대립, 갈등, 분열을 일삼아 오는 불교계 상황에 큰 회의(懷疑)를 품어 오셨다. 이에 묘법의 위신력과 불교의 참면목(眞面目)을 세우고자 염원을 굳게 하셨다.
소백산 유곡에서 대도성취를 위한 수도에만 전념해 오신 대조사님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1963년경부터 였다. 대조사님의 법력과 자비구제력의 향기가 사방에 퍼지자 전국 각지에서 그 문하에 귀의하는 제자와 신자가 날로 격증하였다. 그 도풍덕화(道風德化)와 자재(自在)한 구제력은 참으로 부사의(不思議)하였다.
중생의 고뇌는 가지가지인 것이다. 이러한 중생들을 응병여약(應炳與藥)격으로 제도함으로써 삶의 의욕을 잃고 있던 사람들의 가슴에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절망과 어둠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과 광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만은 우리를 지키고 선도하며 구제한다. 불법은 누구이든 차별하지 않으며 바로 믿으면 삶의 기쁨을 얻는다.」라는 확신을 누구나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인연으로 구인사를 다녀간 이는 청정한 신심을 일으키었고, 공경하는 마음 진실한 마음으로 불법과 대조사님의 가르침에 따르게 되었으며, 지난 날의 잘못되었던 생활을 참회하며 지극지성으로 기도생활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구인사는 일체중생이 자비로 구제되는 영험의 도량이 되고, 인간개조, 진리의 감로도량으로 승화되어 왔으며, 대조사님의 자재한 법력과 자비 구제력에 누구나 감모열복(感慕悅服)하였다.
우리가 처음 올랐던 정상 뒷쪽이 구봉팔문 전망대인 모양이다.
"이 세상에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잠시 사용하다 버리고 갈뿐이다" 라는 대조사의 생전 설법문이 마음에 와 닿는다.
<가까스로 안내판을 보고 사진 한장>
갑오연화가 불전에 나아가 참배를 하고 온다.
무엇을 소원하였는지 말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올라 온다. 옷 입음새로 보아 일반 관광객들은 아니고 불자들이 전부다.
허긴 보통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른다는 것은 쉽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구인사로 내려오면서 보니, 올라 오는 길이 길지도 하지만, 올라오는 길이 가팔라 지그 재그로 계단과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정상에서부터 내려오는 길 내내 수백년은 넘었을 법한, 낙낙장송이 하늘을 쑤시듯이 울창하게 서있다. 소나무의 종류도 아름다운 홍송들이다.
<낙낙장송>
갑오연화가 계단길을 내려 오면서 발을 끌고 있다.
이제 한계점에 달했을 법도 하다.
한참을 내려와도 지그재그 계단길은 끝이 없다.
고도 500m까지 떨어져야 하니, 만만치 않다.
<구인사 지붕이 내려다 보인다>
절이 크다는 말은 들은바 있었지만, 처음 대하는 절간 부터 혀를 내두르게 하드니, 절을 다 빠져 나왔을때까지 나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였다.
<대조사전의 옆 모습>
5,000명이 앉아 법문을 들을수 있는 대조사전 앞마당에 의자가 도열 되어 있다.
그져 감탄스러울 뿐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대 조사전 전경>
<상월원각대조사가 모셔진 725봉 아래 맨 위에 있는 대조사전>
<대조사전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본 사창 전경>
사찰 경내엔 인산인해다. 신도들과 관광객들로 구석구석 빈틈이 없다.
사진촬영을 목적으로 온, 사진 애호가들이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 대느라 정신이 없다.
나 역시 내려 오면서 이곳 저곳 디카에 담아본다.
<구인사 전경>
<구인사 전경>
<구인사 전경>
<구인사 전경>
사찰 건물이 하두 많아 건물과 건물사이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 꼭 미로 같다.
마침 시간이 점심 공양시간이 되어, 우리도 공양간을 찿아 간다.
공양간을 보고 또한번 놀랜다.
좌석이 약 500석을 됐음직 하다.
주방, 배식구,설거지방 등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종사하는 보살님들의 숫자도 셀수가 없다.
반찬 하나라도 남김 없이 먹어야 한다기에 곤욕을 치르기는 하였지만,
절 밥치고는 상급 차림이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구경을 하면서 내려간다.
군데 군데 볼거리가 천지다. 마음 먹고 구경을 하려면 하루는 꼬박 걸려야 할것 같다.
<장독대>
<장독대>
<건물과 건물을 잇는 다리 기둥 부위에 장작을 쌓아 넣어 놓았다>
<하늘을 찌를듯한 사찰 지붕 날개>
<또 한구석의 사찰 건물들>
<자연석 거북 바위>
<호화 찬란한 단청>
<구인사를 나가는 중문쯤 될듯>
<구인사 일주문>
비로서 일주문을 벗어나니, 거대한 왕국에서 벗어난 기분이다.
일주문을 지나니 팔봉의 아래 구인사 지형도와 건물 배치도가 안내되어 있다.지형도는 그대로 이겠지만, 건물은 지금도 불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이 수정해야 할것 같다.
<구인사의 지형도와 건물 배치도>
대중교통이 구인사까지 들어 온다는 정보에 설마하고 내려간다.
그런데 일주문 바로 아래 사찰건물과 넓은 공터기 있어 여기도 사찰 일부분이겠지 하였드니, 놀랍게도 버스 터미널이 아닌가.
노선을 보니 서울.동서울. 부산. 제천 기타 등등 전국적인 노선 버스 터미널이다. 일단은 매표를 하니, 동서울 1시50분 출발 버스다.
갈아타지 않고 동서울까지 편안하게 간다고 생각하니, 그동안의 피로가 확 풀린것 같다.
그동안 불교신도는 아니지만, 산을 다니다 보니, 전국의 유명한 사찰은 가보지 않은곳이 별로 없는데, 이처럼 방대한 사찰은 처음이로세.
거듭 거듭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고, 마누라와 함께한 백두대간 맛보기를 무사히 마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