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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상/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제9장 다섯 신선과 바둑 이야기
“내 도수는 바둑판과 같으니라. 해가 저물면 판과 바둑은 주인에게 돌아가느니라.”
1908년 12월, 날씨는 변덕스럽기만 하였다. 엄동설한풍에 갑자기 큰 눈이 펑펑 쏟아져 천지를 뒤덮을 듯하다가도 언제인가 싶게 따스한 햇살이 내려 봄날처럼 눈이 녹아 길은 질펀하게 진창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출타를 하였다. 증산 상제님과 함께 천지공사를 위한 출행이었다. 공사 무대가 정읍 대흥리에서부터 서울까지일 정도로 대공사였다. 고수부님이 직접 참여한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공사 내용이 당신과 관련이 있는, 증산 상제님 말씀을 빌리면 ‘수부 책임하의 공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김형렬, 김호연, 김갑칠, 안내성, 박공우, 문공신, 차경석 성도들과 문정삼, 차윤칠, 차윤덕, 차순옥, 차평국 등이 따랐다.
공사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대흥리를 떠나면서 증산 상제님은 성도 여덟 명으로 하여금 앞뒤로 네명씩 서서 걷게 하였다. 나머지 성도들은 몇 걸음 떨어져 뒤따랐다. 증산 상제님은“조선이 팔도(八道)니라”고 말했다. 이 공사가 조선의 국운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충청도 태전을 지나 계룡산을 거쳐 공주에 이르렀을 때부터 큰길을 두고 험한 솔밭길로 갔다. 눈 녹은 진창에 발이 빠져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이 도착한 곳은 서울이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한 치 앞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일행은 덕수궁 대한문(大漢門)과 원구단(圓丘壇)사이의 광장으로 갔다.
증산 상제님은 먼저 성도들 중 네 명을 뽑아 사방위로 둘러앉히고 당신은 중앙에 앉았다. 그리고“이곳이 중앙 오십토(中央五十土) 바둑판이니라”고 말했다. 짧은 말씀이지만 내용은 심오하다. ‘말씀’가운데‘바둑판’은 조선, 지구촌, 우주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공사를 행하는 장소는 지구촌과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조선으로 이해된다. 이 경우 바둑판이 온 인류의 운명과 관련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된다. 중앙‘오십토’는 무엇인가. 동양사상의 심오한 내용이라 좀 난해하지만 범박하게 얘기하면 주재·통치자의 자리라는 정도로 이해된다.
이 공사에서 먼저 두 가지를 주목한다. 하나는 공사시간대이다. 증산 상제님이 서울에서 이 공사를 행한 직후인 1909년 1월 7일부터 27일까지 황제 순종은 궁정열차를 타고 대구, 부산, 마산과 평양, 신의주, 의주, 개성을 각각 순시하게 된다(경무국, 〈순행경무휘찬〉, 내각 기록과,〈 남(南)순행일기〉등 당시 순행관련 기록).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순종실록》에 따르면 1909년 1월, 3월, 10월 세 차례에 걸쳐 순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공사무대이다. 다른 공사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 공사에서 공사무대를 주목한다. 왜 덕수궁 대한문과 원구단 사이의 광장인가.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 1608년에 광해군이, 1623년에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하다.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1902년 궁궐(덕수궁)을 크게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세워 정문으로 사용했다. 이 대안문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2년 뒤에 재건하면서 대한문으로 고쳐 불렀다. 이런 얘기가 전한다. 1903년 한 젊은 무녀가 대안문 용마루에 연결시킨 밧줄을 타고 내려와“…대안대왕(大安大王)강천(降天)이시다!”외치면서 임금을 대령하라고 호통을 쳤다(1903, 《코리아리뷰》지).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대한문’으로 바꾸었다고.
원구단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유교적인 의례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일컫는다. 고대국가 때부터 제천의식이 행해졌으나 유교적인 예(禮)의 관념에 따라 제도화된 원구제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 실시되었다. 고려의 원구제는 중국의 이른바 천자국의 원구계와 같았다. 제사대상은 5방의 천신뿐만 아니라 그 전체를 주재하는 호천상제(昊天上帝)도 포함했다. 그러나 고려 말 배원친명정책(排元親明政策) 이후 원구제는 폐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제후국가에서‘천자의 제천의례’인 원구제를 거행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가운데 1457년(세조 3)에원구제가 거행되기 시작했으나 1464년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거행되지 않았다. 1616년(광해군 8) 원구제를 또 한 차례 거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그 자세한 전말은 알 수 없다. 원구단이 다시 건립된 것은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원구단은 철거되고 이듬해 같은 자리에 조선 호텔을 건축했다. 현재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 8각정 황궁우(皇穹宇) 유적만 전해오고 있다.
정리하면,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은 지금 황제와 관련이 있는 장소에서 순종황제가 없는 시간대에 천지의 주재·통치자가 되는 상제의 이름으로 조선 국운과 관련이 있는 공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공사장에 고수부님이 있음을 우리는 주목한다.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증산 상제님은 박공우 성도를 향해“공우야. 쌀이 솥을 따르느냐, 솥이 쌀을 따르느냐?”하고 물었다. 박공우가“쌀이 솥을 따르지요”라고 대답했다.
“네 말이 옳도다. 쌀은 미국이고 솥은 조선이니 밥을 하려면 쌀이 솥으로 올 것 아니냐. 장차 일본이 나가고 서양이 들어온 연후에 지천태 운이 열리느니라.” 지천태가 후천의‘주역’괘라는 것은 이미 지적하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말씀’은 매우 현실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사 내용은 분명하다. 장차 일본 강점기가 끝나고 미국이 들어오도록 판을 짜는 것이다. 그 후에 후천의 운(지천태 운)이 열리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쯤에 이르면 이 공사에 고수부님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주역 괘‘지천태’로 상징되는“후천 음도(陰道) 운을 맞아 만유 생명의 아버지이신 증산 상제님과 합덕하시어 음양동덕(陰陽同德)으로 정음정양의 새 천지인 후천 오만년 조화 선경”(11:1)을 여는 주인공이 바로 고수부님이기 때문이다.
공사는 계속된다. “내 도수는 바둑판과 같으니라. 바둑판 흑백잔치니라. 두 신선은 바둑을 두고 두 신선은 훈수를 하나니 해가 저물면 판과 바둑은 주인에게 돌아가느니라.”
증산 상제님은 같은 내용의 공사를 1902년에도 이미 행한 바 있다(5:2). 바둑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내포된 의미는 어마어마한 내용이다. 바둑판이 상징하는 것이 한반도라고 할 때‘네 신선’은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이다. 주변 4대 강국이 바둑판 한반도를 놓고 서로 팽팽하게 세력다툼을 벌이다가‘해가 저물면’대세가 뒤집어진다. 바둑판 주인 조선이 외세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여 세계 운명을 바꾸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공사는 조선의 운명은 물론 향후 국제정세를 다섯 신선이 바둑 두는 형상으로 짜놓은 것이다. 2008년 현재, 북한 핵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6자회담을 연상하면 이해하기가 편리 할 것이다. 이 공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제3차세계대전) 전쟁 도수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후천 가을개벽의 실제상황 가운데 전쟁에 대한 공사다. 증산 상제님이“천지개벽 시대에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 앞으로 천지전쟁이 있느니라”(5:202)고 했던….
개벽전쟁 공사는 그렇게 판이 짜여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으로‘개벽’공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증산 상제님은 말한다. “난리가 나간다, 난리가 나간다. 난리가 나가고 병이 들어오리라.”
상제님 말씀이다. 마치 노래 부르듯 하는 몇 마디 짧은 말씀이지만 어찌 예사로울 수 있겠는가. 증산 상제님은 지금 후천 가을개벽으로서 1차 관문인 전쟁이 터지면 뒤이어 병이 들어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병은 곧 병겁(病劫) 심판을 가리킨다. 증산 상제님은 다른 자리에서 말했다.“ 장차 전쟁은 병으로써 판을 막으리라. 앞으로 싸움 날 만하면 병란이 날 것이니 병란(兵亂)이 곧 병란(病亂)이니라.”(7:35) 아. 조선은 물론 인류의 미래는 그렇게 짜여지고 있었다. 후천개벽에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일련의‘개벽’공사를 마친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은 이어서‘육임도꾼 지도자 출세 공사’(5:337)를 행한 뒤 자리를 창경궁으로 옮겨 이후 며칠 동안 머물렀다. 물론 공사의 일환이다. 그러나 공사 내용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서울에서 대공사를 마친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일행은 익산 금마면 미륵사지를 거쳐 정읍 대흥리로 돌아왔다.
그해 섣달 그믐날,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과 함께 수부소에서 대공사를 행하였다. 증산 상제님은 밤과낮을 쉬지 않고 벌써 며칠 동안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 종이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공사를 마친 증산 상제님은“이번 공사는 무신납월 공사(戊申臘月公事)니 무신납월 공사가 천지의 대공사니라”고 말하였으나 역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얘기해 주지는 않았다. 원래‘납(臘)’이란 중국 주나라 때 모든 신에게 지내던 12월 제사의 명칭. 뒤에 12월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그러니까 무신납월 공사는 문자 그대로‘무신년(1908) 12월에 행한 대공사’라는 얘긴데, 그해 12월에 서울로 가서 행한 이후 모든 공사를 하나로 묶어 무신납월 공사라고 한다. 과연‘천지의 대공사’가 되는 이 무신납월공사는 고수부님과 함께 행한 포정소 공사와 종통 및 인사대권 도수, 일등무당 도수 등과 함께 증산 상제님 9년 천지공사의 핵심을 이룬다.
무신납월 공사를 마친 다음날, 그러니까 1909년 설날이 밝았다. 새해를 맞이하는 고수부님으로서는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1년 전 이맘때 증산 상제님은 감옥에 있었다. 혼례식을 올린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고수부님은 적막한 수부소에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해 설날은 달랐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과 많은 성도들과 함께 새해 설날을 맞이한 것이다. 차경석 성도가 선령에게 차례를 지내려고 할 때였다. 증산 상제님이“장만한 찬수를 가져오라”고 하여 여러 성도들과 나누어 먹었다. 물론 고수부님도 함께 먹었을 것이다. 그때 증산 상제님은“이것이 곧 절사(節祀)니라”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원래 차례는 매월 음력 초하루·보름, 조상의 생일, 명절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다. 조상에게 드리는 연시제(年始祭)는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세배로 드린다. 차례를 드리는 방법은 봉사 대상이 되는 여러 분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올리지만 제수의 진설에서 조부모 내외분, 부모 내외분과 배우자로 제상을 각각 구분하여 마련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증산 상제님이 차례 지낼 음식을 성도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것은 (다른 해석도 있을 수 있겠으나) 상제님께 먼저 올리라는, 상제님을 근본으로 한 차례만이 진정한 의례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일 터이다.‘ 절사’란 절기나 명절을 따라 지내는 제사를 일컫는다. 증산 상제님이‘절사’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절사에 해당하는 제사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해석의 근거는 다른 공사에서 찾을 수 있다.
형렬이 어느 절일(節日)에 조상들에게 절사(節祀)를 지내고자 하니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준비한 제수(祭需)를 가져오게 하시어 여러 성도들과 더불어 잡수시며“이것이 곧 절사니라.”하시거늘 그 후로 형렬이 절사와 기제(忌祭)를 당하면 항상 상제님께 제를 올리니라. (3:20)
그날 11시께였다. 증산 상제님은 고수부님을 남겨둔 채 안내성 성도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현무경(玄武經)』을 썼다.『 현무경』은 인사대권자가 명을 내려 천지신명을 부리는 부(符)로서 증산 상제님이 남긴 유일한 저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병유대세 병유소세 대병 무약 소병 혹유약(病有大勢 病有小勢大病無藥小病或有藥, 병에는 큰 병세가 있고 작은 병세가 있나니 큰 병은 약이 없고 작은 병은 혹 약이 있으나) … 대인대의 무병(大仁大義無病, 대인대의하면 병이 없느니라) … 지천하지세자 유천하지생기 암천하지세자 유천하지사기(知天下之勢者 有天下之生氣暗天下之勢者有天下之死氣, 천하대세를 아는 자에게는 살 기운이 붙어 있고 천하대세에 어두운 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밖에는 없느니라)…. (5:347)
글을 다 쓴 뒤에 증산 상제님은,“ 『현무경』에 천지이치와 조화의 오묘함을 다 뽑아 놓았느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양지 두 장에 글을 써서 심지처럼 돌돌 말아 작은 흰 병 두 개에 한 장씩 나누어 넣고 병 입구를 종이마개로 막았다. 병을 방 한쪽에 세워 놓고 그 앞에 백지를 깔아『현무경』과 작은 칼을 놓아두고 대흥리로 돌아왔다(이『현무경』과 흰 병 두 개와 칼은 훗날 증산상제님이 어천한 후 안내성 성도가 태을주 수련을 하기 위해 셋집을 얻어 들어가면서 고수부님을 찾아뵙고 올려 드리게 된다).
정월 초이튿날이다. 고수부님과 함께 대흥리에 머물고 있는 증산 상제님은 차경석 성도의 집에 제물을 차리게 하고 반천무지(攀天撫地) 배례법과 제법(祭法)의 절차를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그날 일을 모두 마친 뒤 증산 상제님은 경석에게“초사흗날 천지신명에게 고사치성제(告祀致誠祭)를 거행하리라”고 말했다.
이 때 같은 마을에 사는 차문경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차경석의 집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평소에 차경석의 집에 증산 상제님과 그 일행이 자주 출입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던 차문경은,
“차경석의 집에서 강 모(姜某)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
큰 소리로 외치고 다녔다. 때는 전국 각지,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폭죽같이 터지는 의병의 함성으로 당국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는 시절이었다. 차문경이 질러대는 소리는 천원 병참(兵站)까지 전해졌고 뒤이어 천원헌병대에 비상이 걸렸다.
같은 시각 증산 상제님은 고수부님과 차경석에게 “집을 지키면서 나를 대신하여 치성을 드리라”고 말해놓고 곧 수부소를 떠나 입암면 마석리 비룡촌(飛龍村)차윤경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 날 새벽 고수부님과 차경석이 치성을 막 끝냈을 무렵이었다. 무장한 일본 헌병 수십 명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헌병들은 차경석을 위협하며 증산 상제님이 있는 곳을 캐물었다. 눈치 빠른 차경석이,
“그분은 의술로 행세하시는 분인데 수삼 일 전에 우리 집에 오셨다가 떠나시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소.”
둘러댔을 때 개머리판이 어깨위로 날아들었다. 경석이 상처를 약간 입었으나 일은 그렇게 매듭지어졌다.
공사의 일환이라고 하지만 작년 이맘때도 증산 상제님은 의병으로 몰려 모진 감옥살이를 했다. 일련의 일화를 보면 성도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증산 상제님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꼽혔고, 증산 상제님 또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읍 대흥리에서 고수부님과 경석이 일병의 추궁을 받고 있을 무렵 증산 상제님은 비룡촌을 떠나 백암리 김경학 성도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경학에게 이부(吏部)를 맡기는 공사(5:351)를 보고 정월 초닷샛날이 되어 구릿골 약방으로 돌아갔다.
제10장 아, 옥황상제님
“내가 죽었는데 네가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보지 않느냐?”
1909년 정월 초이튿날 의병혐의로 쫓기듯 대흥리를 떠난 이후 증산 상제님은 더 이상 고수부님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같은 해 6월 24일 증산 상제님이 구릿골 김형렬의 집 사랑방에서 어천했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이 어천했다는 사실 조차 까마득하게 몰랐다. 누구 하나 달려와서 전해주는 성도들도 없었다. 적막한 수부소 텅 빈 방을 홀로 지키고 있는 고수부님으로서는 증산 상제님이 단지 어디 외처에 출입한 것으로 알고 그때까지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증산 상제님이 어천한 구릿골과 고수부님이 머물고 있는 대흥리와는 80여 리밖에 되지 않은 거리다. 성도들은 왜 고수부님에게 증산 상제님의 어천 사실을 전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어천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 같이 증산 상제님은 당신이 어천한다는 것을 고수부님은 물론 성도들에게도 수차례에 걸쳐 암시했다. 각 처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어천 나흘 전인 6월 20일 구릿골 약방으로 모이라는 통지를 띄우게 하였고, 그날 모인 성도들에게 당신이 어천할 것임을 직접적으로 암시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증산 상제님은 콜레라를 비롯한 운기(運氣), 상한(傷寒), 내종, 황달 등‘천하의 모든 병’을 대속하였고, 6월 10일부터 일체 곡기를 끊고 소주만 마시다가 22일 김형렬 성도에게“내 녹줄이 떨어졌구나. 내가 이제 죽으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김형렬을 비롯한 다른 성도들도 증산 상제님이 곧 어천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의지만 있었다면 충분히 고수부님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다른 성도들도 그렇지만 문제의 인물 중 하나는 차경석이다. 6월 20일 성도들의 구릿골 모임 통지는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자옥 도수(自獄度數)를 받아 바깥출입을 금지당한 차경석에게도 전해졌다. 차경석은 같은 집에 거처하고 있는 고수부님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구릿골로 갔다. 증산 상제님 어천 후에도 차경석은 그 사실을 고수부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차경석이 그 정도라면 다른 성도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 결국 증산 상제님이 없는 이 땅에서 고수부님은 절해고도(絶海孤島)에 갇혀 있는 형국에 다름 아니었다.
증산 상제님이 어천한 지 10여 일이 지나갔다. 그날 증산 상제님의 장례식을 치른 차경석을 비롯한 성도들이 대흥리에 와서 고수부님에게 문안을 여쭈었다. 고수부님은“선생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고?”성도들을 향해 물었다. 차경석이“청국 공사를 보시려고 멀리 남경(南京)에 가계십니다”하고 꾸며댔다.
차경석은 왜 증산 상제님의 어천 사실을 숨겼을까. 누님한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한 탓일까. 그럴 수도있을 것이다. 남편과 사별한 지 다섯 달 만에 (그것도 차경석 자신의 소개로) 증산 상제님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터에 상제님이 덜컥 세상을 떠났으므로 누님의 기구한 운명에 연민을 느꼈을 수도 있다.
오. 이런 해석은 너무 사적인 접근이다.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일 뿐만 아니라 종통 후계자라고 할 때 차경석은 물론 성도들도 어떤 식으로든 증산 상제님 어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내면풍경에는 어떤 불손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차경석이 증산 상제님의 어천 사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대답하는 것은 다른 성도들과 사전에 합의를 했다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증산 상제님 어천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한 개인의 의지로 숨길 수 있는 사항이 아닌 까닭이다. 또한 차경석의 거짓말에 다른 성도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추측에 무리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에도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증산 상제님의 어천 사실을 영원히 숨길 수는 없을진대, 성도들은 왜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을까. 일의 순서로 본다면 증산 상제님이 어천했으므로 종통대권 후계사명을 맡은 고수부님이 하루빨리 나서서 도문을 수습하고 도운을 열어가야 옳았다. 결국 김형렬, 차경석을 비롯한 성도들이 고수부님에게 증산 상제님 어천 사실을 숨겼던 것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의식구조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가부장적 사고와 함께 종통 문제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이다. 증산 상제님이 한낱 이름 없는 여인을 들어 올려 수부책봉을 하고 후계사명을 맡기는 천지공사를 행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던 성도들도 상제님 살아생전에 겉으로는 승복하는 듯하였으나 마음으로부터 쉽사리 승복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그동안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남녀동권시대가 올 것이라는 혁명적인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받아 왔다고 해도, 아직도 봉건적 위계질서가 퍼렇게 살아있는 시절이라 증산 상제님이 떠난 자리에서 고수부님은 종통대권 전수자가 아닌 한낱 여자로 보였고, 그런 고수부님을 추종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고수부님은“언제쯤 돌아 오신다던가?”하고 물었다. 차경석이“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공사를 다 보시면 오시지 않겠는지요”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고수부님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두세 달이 지나도록 중국 난징에 가서 청국 공사를 보고 있다는 증산 상제님은 오지않았다. 그때까지도 성도들 그 누구도 증산 상제님 어천 사실을 전해오지 않았다. 고수부님의 의식에는 의혹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번 피어난 의혹은 점점 커져 먹장구름처럼 밀려왔다.
안질이 재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자주 안질을 앓아온 고수부님이었으나 이때의 안질은 더욱 심했다. 고통도 날이 갈수록 더했다. 놀란 것은 차경석 성도였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후계사명을 전해 받은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던 야심가 차경석으로서는 당장에는 어떤 식으로든 고수부님의 안위가 온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에 무슨 약을 처방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차경석은 동생 윤칠과 함께 주문만 외울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수부님의 안질은 씻은 듯 나았다.
한편, 증산 상제님이 어천한 뒤 성도들은 마치 거친 풍랑을 만난 난파 직전의 뱃사람들처럼 방황했다. 일부는 증산 상제님과 같은 다른 스승을 찾기 위해 두세명씩 짝을 지어 사방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날도 김형렬을 비롯한 몇 명의 성도들은 차경석의 집 사랑방에 모여 무엇인가 의논을 하고 있었다. 고수부님이 엿들어 보는데 얘긴즉 다른 스승을 구하러 부안 변산에 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왔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에는 차경석과 김형렬이 안내성 성도의 집에 공부방을 차리고 안내성의 동생 안중선과 더불어‘태을주’수련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수부님으로서는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증산 상제님은 천지공사를 보기 위해 중국 난징에 가 있는데 다른 스승을 찾으러 다녔다는 것도, 공부방을 차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을주(太乙呪)로 천하 사람을 살리느니라. 병은 태을주라야 막아내느니라. 태을주는 만병을 물리치는 구축병마(驅逐病魔)의 조화주라. 만병통치(萬病通治) 태을주요, 태을주는 여의주니라.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하니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태을주는 수기(水氣) 저장 주문이니라. 태을주는 천지 어머니 젖줄이니 태을주를 읽지 않으면 다 죽으리라. 태을주는 우주 율려(律呂)니라. (2:140)
그해 6월 그믐께부터 고수부님도 혼자‘태을주’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태을주’를 외우면 정기가 모아져 신안(神眼)이 활짝 열렸는데 난데없는 상여가 들어와 보이기도 하고 들것이 들어와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증산 상제님이 나타나이마를 어루만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면 증산 상제님이 평소와 같이 의관을 갖추고 들어오기도 하였고 때로는 평소에 집에 있을 때 입던 중의적삼에 풀대님 차림으로 들어와 마주 앉기도 하였다.
또 어느 날 밤에는 고수부님이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증산 상제님이 불쑥 들어와 말없이 맞은편에 앉았다. 고수부님이 일어나 손으로 어루만지며“누구시어요?”물었다.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틀림없는 증산 상제님의 목소리였다. 놀란 고수부님은 혹시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딸 태종을 불러 불을 켜라고 하였다. 태종이 들어와 성냥을 그었다. 태종이 성냥을 그으면 증산 상제님이 입으로 바람을 훅 불어 끄고 또 그으면 또 끄고 성냥 두 갑을 다 썼으나 불을 켤 수가 없었다. 이 때 증산 상제님이“태종아. 나는 너의 아버지니라. 아랫방에는 내가 왔다는 말을 하지마라. 알았느냐?”타이르듯 말했다.
태종이 아랫방으로 간 뒤 증산 상제님은 고수부님 곁에 누우며 입고 있던 마고자에서 호박단추 세 개 중 두 개를 떼어 건네주었다. 고수부님은 호박단추를 받아 손에 쥔 채 잠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에 고수부님이 잠을 깨어 일어났을 때 증산 상제님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손에 쥐고 있었던 호박단추도 보이지 않았다. 7월, 푹푹 찌는 날씨는 무덥기만 하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 몸에 땀이 죽죽 흐를 지경인데 고수부님은 오른발에 독종이 나서 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증산 상제님이 있었으면 벌써 나았을 독종 때문에 벌써 수십 일 동안 정신없이 크게 앓아누웠다. 그날도 독종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실신한 듯 의식이 몽롱해져 가고 있을 때 누구인가 문밖에 삿갓차림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그토록 오매불망하며 기다렸던 증산 상제님이다. 방안으로 들어온 증산 상제님은“종기로 얼마나 고통이 심한고”하면서 발에 싸맨 것을 풀어 종기가 난 부위를 직접 혀로 핥아 주었다. 고통은 순식간에 없어졌고 고수부님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종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깨끗하게 나았으되 옆에서 함께 자고 있어야 할 증산 상제님은 보이지 않았다.
늦가을 제법 스산한 바람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그해는 윤6월이 들어서 양력으로는 10월 말이 되는) 9월 초 어느 느 날,‘ 태을주’수행을 하던 고수부님은 문득 신안(神眼)이 환하게 열렸다. 동시에 문 앞으로부터 무지 개 줄기와 같은 푸르고 붉은 색의 서기가, 증산 상제님이 약방 개설 이후 주로 머물면서 천지공사를 보았던 구릿골로 가는 길을 따라 길게 뻗쳐 있고, 그 상서로운 기운의 맨 끝이 구릿골 대밭 끝에 있는 한 초빈(草殯:시신을 넣은 관을 한적한 곳에 놓고 이엉 등으로 그 위를 이어 눈, 비 등을 가리게 한 것)에 닿아 있었다. 고수부님의 눈길은 저절로 무지개 끝으로 달려갔다. 그냥 형체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초빈의 이엉을 얹은 모습에서 추깃물이 묻은 것까지 바로 눈앞에서 보이듯 환하게 보였다. 고수부님으로서는 이상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튿날 저녁 증산 상제님이 나타나 방안으로 쑥 들어왔다. 고수부님 앞에 앉은 증산 상제님은“내가 죽었는데 네가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보지 않느냐?”하고 물었다. 고수부님은“어찌 상서롭지 못한 말씀으로 희롱하십니까?”하고 반문했다. 증산 상제님은“내가 참으로 죽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수부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손을 잡고 [이별가] 한 곡조를 나직하면서도 처연하게 부른 뒤 밖으로 사라졌다.
고수부님의 의식에는 증산 상제님이 어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먹구름처럼 밀려왔다. 이미 수없이 되풀이해 왔던 의혹들이다. 증산 상제님이 나타나 그의혹에 불을 지름으로써 고수부님은 의혹의 응어리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고수부님은 차윤경을 불러당 장 (당시 안내성 집에서‘태을주’를 수련하고 있는) 차경석을 불러 오라고 했다. 잠시 후 차경석이 나타났다. 고수부님은 차경석에게 증산 상제님의 행방을 물으며 당장 찾아가자고 단호하게 말했다.
고수부님의 기세에 눌렸던 차경석은 짐짓 물러섰다.“ 선생님께서 며칠 전에 남경에서 구릿골로 돌아오시어 큰 공사를 보시는데 다만 한 사람만 출입하며 시중들게 하시고 다른 사람은 누구든지 출입을 금하시므로 가서 뵈올 수 없습니다.”
고수부님은 더 이상 믿지 않았다. 이제 차경석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터이다. 그 날 밤고수부님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새벽에 고수부님은 분(粉) 한 갑, 독약 한 봉, 그리고 증산 상제님이 주었던 붉은 주머니를 챙겨들고 아무도 모르게 문을 나섰다. 새벽 으스름 적막한 천지에 북쪽으로 터진 빈들에는 찬 기운만 감돌 뿐이었다. 목적지는 물론 구릿골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는 구릿골이 어디에 있는 지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전날 밤 광명 속에 나타났던 큰길을 따라 초빈한 곳을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한편,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는 고수부님이 없어진 것을 알고 발칵 뒤집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차경석이었다. 증산 상제님 어천 후 고수부님에게 거짓으로 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경석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막아야 했다. 집 안팎은 물론 이웃집까지 찾아다니며 고수부님을 찾았으나 누구 하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낭패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을 뒤편 들판에서 일을 하던 한 농부가“고부인을 찾는 모양인디, 아까 이른 새벽녘에 정읍 쪽으로 급히 가는 것을 나가 보았구만이라”하고 전해 주었다. 차경석은 동생 윤칠을 데리고 황급히 고수부님의 뒤를 쫓았다.
차경석 일행은 태인 도창현(道昌峴)에 이르러 고수부님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차경석은 고수부님이 무엇인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선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고수부님을 만난 차경석은 몸부터 뒤졌다. 과연 고수부님은 독약을 품고 있었다. 경석은 얼른 독약을 빼앗았다.“ 누님, 어찌 이런 일을 행하시오. 남경에서 돌아오신 선생님께서 지금 중대한 공사를 보시는 중이시오. 명이 없이는 절대로 오지 말라는 기별이 와서 이 아우도 지금까지 가뵙지 못하고 명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누님이 지금 갑자기 가 뵙는다면, 누님은 고사하고 아우에게도 큰 꾸지람이 있을 것이오. 대체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시오. 제발 이 길로 돌아가서 명이 오기를 기다립시다.”
차경석이 간청하였으나 고수부님은 들은 척도 하지않고 계속 걷기만 할 뿐이었다. 경석과 윤칠도 할 수 없이 뒤를 따랐다. 원평에 이르렀을 때 고수부님은 윤칠에게 주과포(酒果脯)를 준비하여 들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마음이 급한 고수부님은 꾸불꾸불 돌아가는 길을 버리고 논두렁과 밭두렁으로 곧장 가로질러 걸어갔다. 한 나절 만에 구릿골 김형렬의 집 뒤 대밭 끝에 있는 초빈 앞에 당도하였다. 신안을 통해 광명 속으로 보았던 바로 그 초빈이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의 초빈이라는 것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고수부님은“이엉을 헤치라”고 차윤칠에게 명하였다. 차경석이 고수부님 앞을 막았다.“ 누님, 와 이런다요? 남의 초빈을 헤치다가 임자가 보고 달려오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제발 그만 두고 내려갑시다.”고수부님은 차경석을 밀어내고 몸소 초빈을 헤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도 할 수 없다는 듯 윤칠에게 초빈을 헤치고 재궁(梓宮)의 천개(天蓋: 관의 뚜껑)를 떼어내라고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관속에 누워있는 얼굴은 고수부님이 믿었던 그대로 증산 상제님이었고, 생전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갖고 온 붉은 주머니를 열고 엽전 일곱푼을 꺼내 재궁 속에 넣은 뒤에 증산 상제님이 일찍이 “장차 내가 죽거든 꼭 입에 넣어 달라”고 했던 진주 한개를 꺼내 입안에 넣었다. 또 쌀 세 알과 흰 바둑알 세개를 넣었는데 바둑알은 도로 뱉어 냈다. 그리고 한삼을 가슴에 덮어 드린 다음 그 위에‘옥황상제’라고 쓴명정을 덮고 천개를 닫았다. 증산 상제님이 써서 붉은 주머니 속에 넣어 주었던‘옥황상제’명정이다. 천지만물을 다스리는 조화주 하느님의 공식 호칭은 옥황상제이다. 증산 상제님이‘옥황상제’라고 명정을 써서 고수부님에게 준 것은 그 자체로서 종통전수의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주과포로 전(奠: 장사지내기 전에 영좌 앞에 간단히 술과 과실을 차려 놓는 예식)을 올리고 재배를 하는 고수부님은 흐느끼는 소리가 절로 넘어 나왔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는 조심스럽게 당시 고수부님의 내면풍경을 읽어볼 수 있다. 인간으로서 증산 상제님을 만난 이후 남들처럼 금슬 좋은 부부로 오랫동안 재미를 느끼면서 살아보지도 못했고, 수부로서 증산 상제님이 어천한 사실조차 까마득히 몰랐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지금 이곳에 와서 초빈을 헤쳐 본 뒤에야 비로소 증산 상제님이 어천했으며, 증산 상제님이 다름 아닌 옥황 상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다니! 동시에 앞으로 고수부님 당신이 헤치고 나갈 일들이 눈앞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과연 누구를 믿고 증산 상제님이 내린 종통대권 후계사명을 맡아 도문을 개창할 것이며, 누구와 함께 도운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봇물같이 터져 나오는 흐느낌으로 재배를 마친 뒤 고수부님은 초빈을 다시 봉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구릿골 집에 있던 수석성도 김형렬이 고수부님 일행을 보고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김자현, 김갑칠성도 등 10여 명을 데리고 달려왔다. 예를 행한 뒤 김형렬은 고수부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이 어천하였던 김형렬의 집에서이틀 동안 머문 뒤 대흥리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고수부님은 온갖 상념 속에서 복잡하고도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딸 태종이 갑자기 몸이 펄펄 끓으면서 시두(時痘)를 앓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고열에 시달리던 태종이 자꾸만“객망리에 가자”고 헛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객망리’란 증산상제님의 본댁이요, 고수부님의 시가 동네가 된다. 고수부님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태종을 데리고 객망리로 향했다. 도중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태종이 옆길로 가자고 했다. 그 길을 따라 일행이 도착한 곳은 고부 운산리(雲山里)였다. 원래 이름은 구르멧산, 오늘날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回龍里)를 가리킨다. 운산리에 도착했을 때 태종은 한 대문을 가리키며“이 집으로 들어가자”고 보챘다. 들어가 보니까 뜻밖에도 신경수 성도의 집이었다.
마침 집 안에 있던 신경수가 고수부님을 보고 반갑게 맞이하여 안방으로 모시는데 태종이 윗방으로 들어가자고 졸랐다. 신경수가 윗방으로 안내했다. 뜻밖에도 증산 상제님이 생전에 천지공사를 집행했던 방이었다. 방안에는 증산 상제님이 공사를 행할 때‘도술(道術)’이라는 글을 써서 사면의 벽에 붙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고수부님과 태종은 그 방에서 며칠 동안지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특별히 의원을 부르거나 약을 쓴 것도 아닌 데 태종의 시두가 깨끗이 나은 것이었다. 원래 신경수의 집은 증산 상제님이‘수명소(壽命所)’도수를 붙여놓은 곳이다.
(…) “경수의 집에 수명소를 정하나니, 너희들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장처만 취하여 호의를 가질 것이요 혹 단처(短處)가 보일지라도 잘 용서하여 미워하는 마음을 두지 말라.”하시니라. (5:274)
수명소가 무엇인가.‘ 수명소’란 천지와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여 장수문명의 후천 선경세계를 여는 본부가 되는 장소. 이 수명소는 세운의 문명개벽(생명과학과의학의 발달, 의식주의 경제적 풍요)과 더불어 후천 가을개벽이 성사된 후 마지막으로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 … 신경수의 집에 오게 된 경위, 태종의 시두 치유 등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고수부님은 그 집 그방이 과연 예사로운 장소가 아니라고 느꼈을 것이다.
고수부님이 신경수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강흥주 성부(聖父)님이 찾아왔다. 현재까지 발견된 기록상으로는 처음 만나게 된 시아버지와 며느리였다. 고수부님은 며느리로서 정식으로 인사를 여쭈었다. 성부님은 고수부님을 며느리로서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성부님이 돌아간 뒤 며칠 동안 더 머물던 고수부님은 다시 대흥리로 돌아왔다.
제11장 대도통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을 것이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대원사(大院寺).
증산 상제님·고수부님 유적지 가운데 대원사는 같은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와 함께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답사를 목적으로 천 년 고찰 대원사를 찾았던 것은 지금까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가장 최근에 찾았던 것은 2006년 9월 6일증산 상제님·고수부님 유적지 답사 때였다. 같은 목적으로 처음 답사했을 때가 1999년이었으니까 매년 한 번씩은 찾았던 셈이다. 06년 답사 때 대원사로 통하는 길은 99년 처음 찾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99년 답사 때는 사람 하나가 겨우 오를 수 있는 좁은 등산로였으나 06년 답사 때는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진입로를 닦는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대원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 일승(一乘)이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창건하였으니 말 그대로 천 년 고찰이다. 일승 등은 고구려 보장왕(642∼668)때 백제에 귀화한 보덕(普德)의 제자들이다. 열반종의 교리를 익힌 일승 등은 보덕이 머물고 있는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가 보이는 곳에 절을 짓고 대원사(大原寺)라 하였다. 한때는 대원사(大圓寺),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활동 당시에는 대원사(大願寺)로 한자를 표기하였으나 현재는 대원사(大院寺)라고 한다. 1066년(고려 문종 20)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嚴:1090∼1141)이 중창하였는데, 이때를 창건 연대로 보기도 한다.
대원사는 증산 상제님이 성도한 가람으로 유명하다. 불교 선지식 가운데 대승보살의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유마힐(維摩詰) 거사 같은 재가 불자가 없지 않지만, 재가 불자도 아닌 인물이 절에 들어와 도통을 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가 정통 불교전각이 아니라 우리의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대원사 칠성각에서 도통을 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있겠으나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대원사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왼쪽 개울을 끼고 들어서는 초입에 서 있는 안내 게시판에서 증산 상제님·고수부님과 인연이 있는 두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대원사 중창자 진묵과 증산 상제님·고수부님 활동 당시 주지였던 금곡(錦谷)이 그들이다. 대원사는 1597년 (조선 선조 30) 정유재란으로 불에 타 없어졌는데1606년(선조 39) 진묵이 중창하였고 1886년(고종 23)에는 건봉사(乾鳳寺) 승려 금곡이 다시 중창하였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하였으며 칠성각을 짓고 산내 암자인 내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옮겨왔다. 그때 칠성각은 머지 않아 증산 상제님 도문에서 성도가 될 전주사람 한약상서원규(徐元奎, 1855~1935)가 금곡과 상의하여 쌀 백석거리로 중수했다. 금곡과 서원규는 알았을까. 그들이 중수한 칠성각에서 증산 상제님이 성도하고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활짝 열게 될 줄을!
금곡은 상제님께서 성도하시기 전 임에도 불구하고 증산 상제님을 알아보았던 몇 명 되지 않은 인물 중의 한 명이다. 1901년 6월 고향마을 객망리 뒷산인 시루봉에서 공부하던 증산 상제님이 이곳으로 수행 장소를 옮겼을 때 나이 마흔 여덟이던 주지 금곡은“…천신이 강림하셨다”고 하면서 함거사, 조카 박영춘과 함께 시중을 들었다. 당시 아무리 퇴락한 불교집안이라고 하지만, 한 사찰의 주지가 그가 신봉하는 부처가 아닌 ‘천신’을 알아보고 시중을 들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닐 터이다.
증산 상제님이 이곳에서 공부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근접을 일절 금하고 공부하시던 어느 날 밤, 비바람이 대작하고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크게 호령하시는 소리가 들리거늘 금곡이 이튿날 아침에 나가 보고 증산께 아뢰기를“칠성각에 봉안(奉安)된 진묵대사(震默大師) 영정(影幀)이 마당에 떨어져 있고 칠성각의 방향이 옆으로 틀어져 있습니다.”하니 증산께서 “그러냐.”하고 답하시는 순간 당우(堂宇)의 방향이 원래대로 돌아오니라. (2:5)
금곡은 또한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열고 대도통을 한 증산 상제님을 가장 먼저 뵈었고, 미음을 끓여 바쳤고, ‘말씀’을 들었던 인물이다. 그 어마어마한 말씀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금곡이 올리는 미음을 다 비운 뒤 증산 상제님은“금곡아! 이 천지가 뉘 천지인고?”하고 물었다. 금곡이 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릴 때 증산 상제님은,
“내 천지로다! 나는 옥황상제니라.”천둥 같은 음성으로 말하고 크게 웃었다.
오늘날의 대원사는 그렇게 크지도 그렇다고 그렇게 작지도 않은 가람이다. 증산 상제님의 흔적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증산 상제님·고수부님 유적지를 답사중인 나로서는 못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증산 상제님이 성도했던 성지 중의 성지가 될‘칠성각’이 없어졌다는 점이 그랬다. 1901년 증산상제님이 도통을 한 칠성각은 대웅전 오른편 건물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칠성각 건물은 없어졌고 지금은 새로운 3칸 건물에 스님네들의 공부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이 이쯤 되었으면 궁금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칠성각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경내를 두어 바퀴 돌아본 뒤에야 나는 칠성각을 찾을 수 있었다. 칠성각이 아닌 칠성을. 정확하게는 칠성탱화를. 그러니까 칠성단이 되겠는데, 그것은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었다.
대원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협시하는 삼존불이 있다. 바로 그 옆에 내가 찾는 칠성(탱화)이 봉안되어 있었다. 칠성단 옆에는 진묵대사의 진영이 걸려 있고. 비로소 증산 상제님의 유적을 만난 셈이었다. 나는 칠성단 앞에 큰 절을 올린다. 그리고 칠성단에 모셔진‘칠성’님과, 증산 상제님이 공부할 때 칠성각 바닥에 떨어졌었다는 진묵대사 진영과, 1606년 이 절을 중창한 진묵대사가 만들었다는 목각사자상(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9호로 지정)을 한참동안 살펴본 뒤 조심스럽게 법당을 나온 나는 옆 건물인 옛날 칠성각을 다시 돌아보면서대원사 문을 나섰다.
조선민족에게 한도 많고 원도 많았던 망국의 해1910년이 가고 1911년 4월, 고수부님이 동생 차경석 성도와 류응화(柳應化), 류응화의 둘째 아들 석남(錫南)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전주 대원사였다.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고 대도통을 하였던 이곳을 찾아온 고수부님은 뜻 깊은 의식을 거행한다. 대례복을 갖추어 입고 증산 상제님의 성령과 혼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 혼례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속에서 사망한 사람끼리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경우는 더러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그것도 자청하여) 죽은 사람의 혼령과 혼례식을 올리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수부님의 혼례식은 증산 상제님이 살아있을 때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시아버지로부터 며느리로 인정받은 직후였다는 점도 주목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수부님이 대례복을 입고 혼례식을 거행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례복을 입고 증산 상제님의 성령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고수부님에게 있어서 일종의 통과 제의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홀로 남은 증산 상제님의 반려자요 후계사명자로서 수부의 위격을 삼계 천상과 인간계, 그리고 신명계에 공표하는 어떤 선언적 의식 같은….
천상천하에서 그 어느 벼슬보다 높은 옥황상제의 반려자. 그가 바로 수부이다. 고수부님은 바로 그 위격에서 대례복을 입고 증산 상제님 성령과 혼례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물음. 왜 이 시점에서 혼례식인가? 그것도 증산 상제님이 이미 어천한 뒤 성령과의 혼례식을? 그것은 자기의 재발견에 따른 행위가 아닐까. 증산 상제님 재세시의 혼례식 때 고수부님은 당신이‘옥황상제’라는 사실을 몰랐다. 증산 상제님의 초빈을 찾아 (증산 상제님이 남겨준) ‘옥황상제’라는 명정을 덮어주면서 당신이 상제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본래 두 분(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인용자)의 만남은 상제님이 새 세상을 여는데 반려자가 필요하여 일방적으로 차경석 성도를 만나 맺어진 인연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수부님도 상제님이신 줄을 깊이 있게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대가 선천적으로 밝으신 것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고수부님은 상제님의 처소에서 밝은 대광명이 출몰하는 기현상을 자주 보셨습니다. 그리고 살면서 기운을 받아 신명이 열리고 대공사에 친히 수부(퍼스트레이디)로서 참여하여 근본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나, 상제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발생한 옥황상제 명정사건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남편의 정체를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에 자신이 남편으로 모신 분이 천상의 상제님으로서 인간으로 와 새로운 천지운로와 기장을 세운 천지공사를 마치고 천상에 올라가셨음을 이때 뼛속 깊이 각성하셨을 것입니다.”(안경전,『 대도문답 2』)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평생 반려자인 남편이 옥황상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수부님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 달라져야 했을 것이다. 당장에는 두 가지 과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나는‘옥황상제’의 반려자인 수부로서 천지공사를 직접 행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증산 상제님이 재세 시에 당신에게 붙였던 여러 가지 도수를 이루는 일이었다 결국 그렇게 현실화되겠지만.
후자와 관련해서 증산 상제님 어천 전까지 천지공사를 수행해 왔던 고수부님에게 주어진 사명은 막중하였다. 당장 눈앞에 놓인 과제는 종통대권 후계사명으로서 도문을 개창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문을 개창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할 것인데,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꼽힐 수 있는 인물들은 증산 상제님 재세시에 추종했던 성도들이었다.
현실은 어떠한가. 과연 고수부님이 그들을 규합하여 도문을 개창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직접 후계사명을 받은 고수부님을 불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수부님이 당장에 도문을 개창한다면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는 수부로서 천지공사를 집행할 수 있는 권능(삼계대권)을 얻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증산 상제님 대행자로서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다. 전자는 도통을 하는길이요, 후자는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었던 바로 그곳에서 증산 상제님의 성령과 혼례식을 거행함으로써 정식으로 증산 상제님과 하나 되었음을 재확인 시켜 주는 일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고수부님과 증산상제님의 성령과의 혼례식을 통과 제의적 의미로 분석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는 혼례식 직후의 고수부님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혼례식을 올릴 때 고수부님은 만고장상(萬古將相)의 이름을 적어 차례차례 크게 불러 자기가 옥황상제의 반려자가 되었음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혼례식이 끝난 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이 천지대신문을 열었던 바로 그 자리 대원사 칠성각으로 들어가 49일 동안 진법주 수련을 시작했다. 도통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대원사 칠성각 49일 진법주 수련에 대한 일화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다만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이 도통의 길을 갔던 바로 그 길을 따라 가고 있다는 행적에 주목하자. 대원사 칠성각에서 49일 동안 진법주 수련을 마친 고수부님은 딸 태종과 함께 고부 운산리 신경수 성도의 집으로 갔다. 증산 상제님이 천지공사를 보았던 신경수의 집 윗방으로 들어간 고수부님은 그날부터 다시 1백일 동안 수도에 들어갔다.
작정한 1백일을 채우던 날, 고수부님은 별안간 눈앞이 환하게 열리면서 천지우주의 뭇 이치를 밝게 깨달음으로써 활연대각(豁然大覺)하였다. 불교에서 활연대각은 완전히 변하여 깨닫는 것, 청정무구(淸淨無垢)해 짐으로써 깨닫는 것, 혹은 활짝 깨닫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러나 고수부님의 도통은 한순간에, 불교 선가의 용어로 돈오(頓悟)적인 그것이 아니고 몇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증산 상제님 재세 시에 자옥 도수를 받았던 차경석은 문밖출입을 할 수 없었다. 가장이 경제활동을 할 수 없었으므로 집안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졌다. 차경석과 그의 가족들이 궁핍하다는 것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고수부님이 그만큼 궁핍했다는 얘기가 된다. 고수부님이 운산리 신경수의 집에서 활연대각하고 대흥리로 돌아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해 9월 19일은 증산 상제님 성탄 40돌이다. 고부운산리 신경수 성도의 집에서 대각을 한 고수부님의 위상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차경석을 불러 증산 상제님의 성탄치성을 올리라고 명하였다. 경석은 배포 있는 사내였다. 주위의 권유로 장사나 할까 하고 빌린 돈 6백 원 가운데 치성비를 뚝 떼어내어 고수부님이 명하는 대로 제수를 준비하였다.
증산 상제님의 성탄일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 성탄치성 이후로부터 증산 상제님에 대한 성탄치성이 시작되었다. 치성을 지내는 고수부님은 감개가 무량했을 것이다. 다음 날(9월 20일) 아침, 고수부님은 방을 나왔다. 동쪽 산 너머로 해가 떠오를 무렵 청량한 아침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마당을 거닐던 고수부님은 별안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깜짝 놀란 가족들이 우르르 달려와 고수부님을 떠메어 방안에 눕히고 팔다리를 주물러 보았으나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런 일을 당하여 딸 태종은 물론이요, 차경석 형제 가족까지 온 집안이 혼비백산하면서 뒤이어 통곡이 터져나왔다.
9월 20일 아침에 수부님께서 이렇게 네댓 시간을 혼절해 계시는 중에 문득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한 가운데 큰 저울 같은 것이 공중으로부터 내려오는지라 자세히 보시니 오색찬란한 과실이 높이 괴어 있는데 가까이 내려와서는 갑자기 헐어져 쏟아지거늘 순간 놀라 깨어나시니 애통해하던 집 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니라. (11:19)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고수부님이 깨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던 고수부님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방안에 가득 둘러앉아 있는 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눈빛이 차경석에게 머물렀다.
“네가 누구냐?”고수부님이 물었다. 고수부님이 아니라 증산 상제님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의 목소리로 말하였다는 것은 고수부님의 도통이 증산 상제님 상제의 성령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의미일 터였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차경석이 자신의 성명을 말했다. 고수부님은 또 무슨 생이냐고 물었다. 경석이“경진생(庚辰生: 1880)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도 경진생이라. 속담에 동갑장사 이(利) 남는다하니, 우리 두 사람이 동갑장사하자.”고수부님이 말했다.
경석이 우물쭈물하는데 고수부님이 다시 생일을 물었다. 경석이 6월 초하루라고 대답하였다. 경석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고수부님은,
“내 생일은 3월 스무엿샛날이라. 나는 낙종(落種) 물을 맡을 것이니 그대는 이종(移種) 물을 맡으라. 추수 할 사람은 다시 있느니라.”
하고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과연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날 아침부터 정오까지 전개된 일련의 일들은 전체적으로 세 가지 의미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고수부님이 천지대신문을 여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둘째,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에게 붙여준 도통 도수가 최종적으로 현실화되는 장면이다. 다시 말하면 고수부님에 의해‘대도(大道)’개척사의 첫발을 내딛는 축복의 시간대를 여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먼저 고수부님이 차경석에게 얘기한‘동갑장사’라는 말씀에 주목하자. 이야기 중간에 언급되었듯이 고수부님과 차경석은 같은 1880년생으로 동갑이다. 따라서 고수부님이 경석에게‘동갑 ’이라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표현일 수 있다. 문제는‘장사’라는 비유의 내용이다.‘ 장사’내용은 말할 나위 없이 (증산 상제님)도운사의 개척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뒤의 말씀에 있다. 고수부님은 낙종물을 맡고 차경석은 이종 물을 맡으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모내기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어인‘낙종’은 곡식의 씨앗을 뿌려 심는 것이고‘이종’은 그 씨앗이 발아하여 조금 자란 모종을 옮겨 심는것을 일컫는다. 보통 3월에 낙종하고 5~6월에 이종을한다.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전자의 의미는 고수부님이 주인공이 되는 개창(파종) 도수이고, 후자는 차경석에게 붙인 이종 도수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수부님 천지공사의 특성에 대해 지적할 필요가 있다. 고수부님의 천지공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음에 주목하자. 하나는 증산 상제님과 같이 직접 천지공사를 행하는 모사재천(謀事在天)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증산 상제님이 공사(모사재천)로서 붙여놓은 도수를 이루는‘성사재인(成事在人)’의 의미가 그것이다. 이 날 진행된 공사도 마찬가지다. 고수부님은 천지공사 주재자로서 차경석에게 이종 도수를 붙였을 뿐만 아니라 파종 도수를 맡음으로써 모사재천과 성사재인을 동시에 맡는 주인공이 됐다.
이 공사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말씀’은‘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다’는 내용이다. 고수부님이 (파종도수로서) 씨앗을 뿌리고 차경석 성도가 (이종 도수로서) 모를 옮겨 심으면 그것을 이어받아 추수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추수할 사람은 다시 있다’의‘다시’에 주목한다면, ‘이종 도수’를 이어 받되, 그냥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정리 내지는 갈무리하여 질적인 대전환을 통해 결실 도운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 추수할 사람이 누구인가? 대두목이요, 대사부이다.
대두목은 상제님의 대행자요, 대개벽기 광구창생의 추수자이시니 상제님의 계승자인 고수부님께서 개척하신 무극대도 창업의 추수운을 열어 선천 인류문화를 결실하고 후천 선경세계를 건설하시는 대사부이시니라. (6:2)
이 날 공사 내용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후천 가을 개벽시대에 새 생명을 추수하는 증산 상제님 대도의 첫 씨앗을 고수부님이 뿌리고(파종 도수), 그의 동생 차경석이 옮겨 심고(이종 도수) 이를 매듭짓는 대도의 추수사업(추수 도수)이 대사부의 출세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수부님의 첫 번째 선언, 즉‘파종 이종 추수’도수는 도운공사에 다름 아니다. 대도통을 하는 이 날, 고수부님의 첫 말씀이 도운을 짜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대인(증산 상제님- 인용자주)의 말은 천지에 쩡쩡 울려 나간다”(6:37)라고 하였다. 대도통을 하고 천지대신문을 여는 날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과 일체가 되어 도운공사의 말씀을 천지에 선포한 것이었다.
아아. 고수부님 .
이로부터 수부님께서 성령에 감응(感應)되시어 수부로서의 신권(神權)을 얻으시고 대권능을 자유로 쓰시며 신이(神異)한 기적과 명철(明哲)한 지혜를 나타내시니 천하 창생의 태모(太母)로서 상제님 대도의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니라. 이로써 일찍이 상제님께서“장차 천하 사람의 두목이 되리니 속히 도통하리라.”하신말씀이 응험되니라. (11:19)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