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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 수요반 원문보기 글쓴이: 올리브
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오래된 시계
“됐습니다.”
유선이 치켜들고 있는 옷자락 아래로 처음엔 배를, 그리고 등까지 유심히 살펴본 의사는 티셔츠 한 자락을 살짝 아래쪽으로 내려주며 의자에 등을 기댄다. 유선은 옷을 내리기 전 배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질감이 두드러진 단색 추상화처럼 부풀었던 피부는 어느새 가라앉아 유선의 손톱자국만 선명하게 어지럽힌다.
“어젯밤엔 붉게 부풀어서 제 살 같지 않았어요.”
유선은 제 목소리가 변명처럼 들린다고 생각한다. 어지러운 손톱자국만 아니라면 배는 말짱해 보인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이틀 전요.”
“그날 특별한 걸 드신 게 있나요? 붉은 살 생선이라든가 돼지고기, 치킨, 피자나 햄버거 같은.”
“아니요.”
“근래에 야외에 나가시진 않았어요? 풀밭에 앉았다든지.”
“아니요.”
“이전에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 적은요.”
“없어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처방전을 기록하고 나서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어보았다.
“최근에 갑작스런 정신적인 충격이나 지속되는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나요?”
“아니요.”
유선을 고개가지 저었다. 의사의 물음에 자신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문장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이틀 전이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수화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유선은 반사적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불과 열흘 사이에 세 번이나 전화를 해놓고는 혹시 저를 기억하실지, 라니.
제발 나 좀 가만히 놔둬요,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말을 삼키며 도서관 창 밖의 숲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서른하나에 혼자된 여자의 부끄러움에 대하여.
“도서관 앞에 와 있습니다. 오래된 시계, 여기서 잠시만 뵙고 가겠습니다.”
난감했다. 오늘 거절한다 해도 이 사람은 다시 전화를 할 것이다. 혹시 저를 기억하실지, 물어보며. 그렇다면·······
“십 분 후에 그리로 나가죠.”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앞에 놓인 책을 들었다. 책은 이제 더 이상의 손질이 필요 없을 만큼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 테이블 왼편의, 손질이 끝난 책들의 더미 위에 그걸 올려놓고 훼손된 책들을 쌓아놓은 곳에서 새로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겨우 두 달이 지난 여자에게 퇴근 무렵에 걸려오는 낯선 남자의 전화는 상중의 여자가 거리에 입고 나선 빨간 외투처럼 불순해 보인다. 유선은 그 남자의 전화에 매번, 다음에요 하면서 미루다가 오늘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그 빨간 외투를 얼른 벗어버리고 싶었다. 실제로도 유선은 빨간색의 겉옷을 입는 취미는 없었다.
유선의 옆에 나란히 앉아 도서 목록을 정리하고 있던 미스 오는 벨 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다는 듯 과장된 무심함 속에 궁금함을 감추고 있지만, 그녀의 호흡이 호기심으로 달콤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유선은 느낄 수 있었다. 대개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상을 즐기는 편이다. 남편이 죽은 것을 안 옛날 애인이 매일 전화하는 것이라고 짐작하거나 혹은 매번 다른 남자가 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열람실과의 사이에 세워진 칸막이 너머로 목소리가 넘어가지 않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사람이네. 무슨 일인지 자꾸만 만나서 얘기하겠다고 그러니. 그쪽에선 남편을 아는 모양인데.”
“혹시 김주현 선생임 책 낸 곳 아니에요? 어제 제가 받았을 땐 무슨 출판사라고 하는 것 같던데.”
미스 오는 단박 눈을 빛내며 그렇게 되물었다.
“아니에요. 그 쪽 사람들이야 목소리만 들어도 금방 알아. 미안하지만 미스 오, 정리 좀 해줄래요? 한 번은 나가봐야 할 거 같아.”
“그래요. 언니. 퇴근 시간도 다 됐는데 뭘.”
친절에 대한 대답으로 내일은 남자와 만나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다 들려주고서야 일과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밀 때마다 지나치게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큰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언덕 아래까지 길을 따라 펼쳐진 숲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가까이 출렁거린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이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가파르게 경사진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을 유선은 좋아했다. 구에서 세운 이 도서관은 야트막한 산기슭의 숲 언저리에 있는 데다 도로에서 걸어서 오 분쯤의 거리에 있어 교외에 세워진 요양소처럼 늘 한가하고 조용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분다. 어둑해진 숲 속에서. 갈퀴가 여럿 나 있는 크고 기다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유선의 숱 많은 머리를 미친 여자의 그것처럼 휘저어놓곤 사라진다. 유선은 걸음을 멈추고 숲 속의 어둠을 잠시 들여다본다.
그의 손길을 닮았어. 가끔 장난스럽게 긴 머리를 마구 휘저어놓곤 하던 그의 손. 아니다. 그의 손은 훨씬 따스했지. 그리고 늘 손가락으로 다시 빗질을 해주었는데·······. 성급한 아카시아 이파리 몇 개는 벌써 노랗게 변해 바람이 불 때면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달아나는 여름의 긴 꼬리가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환각처럼 보이는 듯도 해. 유선은 제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숲이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상점들이 늘어선 번화한 거리가 나타나고 그 거리의 입구에 오래된 시계라는 카페가 있다. 이름처럼 그 카페에 앉아 있으면 나무로 된 낡고 커다란 벽시계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되었다.
숲을 향해 나 있는 북쪽의 창가에 철 이른 바바리코트를 걸친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무거운 나무문이 닫히며 내는 삐걱 소리를 들으며 주춤하는 사이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먼저 저 테이블로 가야겠지.
유선은 걸음을 떼는 게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도 되는 듯 자신에게 일렀다. 그랬다. 그가 떠난 후 처음 외출했을 때, 익숙하던 도시는 다른 얼굴로 유선을 맞았다. 낮선 도시에 유효기간이 지난 낡은 지도를 들고 버스에서 내린 것처럼 막막했다.
텅 빈 극장에서 우울한 영화를 보고 나온 한낮의 거리와도 같은 비현실감이 아직까지는 유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김주현 선생님의?”
“그렇습니다.”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습니까?”
유선은 달리 할 말이 없었으므로 그걸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들어본 적이 있는 출판사 이름이 한글과 영문으로 적혀 있었다. 차현구, 가 남자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유선은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눈썹 사이로 피곤이 몰려 있는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유선은 눈을 깜박거렸다. 쳐다보는 사람의 눈까지 씀벅거리게 할 만큼 그의 눈은 지나치게 붉었다.
“김주현 선생님은 정말 좋은 작가였습니다.”
바보같이. 이런 말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유선은 고개를 숙여버린다.
끝이 노랗게 바랜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가 와서, 차 뭘로 하시겠어요? 묻는다. 뜨거운 우유라도 한 잔 마시고 싶지만 유선은 그냥 커피, 라고 말해버린다. 사소한 것에 기호와 취향을 주장하기엔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근거 없는 열등감은 아무래도 그가 떠난 후에 생긴 병이다. 여자는 너무 연해 보리차 같은 커피 두 잔을 금세 가져다주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지독하게 맛없는 커피를 꿀꺽 소리 나게 한 모금 마시며 그는 단숨에 말해 버린다.
“김주현 선생의 책을 한 권 내고 싶어서요.”
“그 얘기라면, 제 권한 밖이군요. 아시겠지만 그 사람 원고는 다원 출판에서 모두 가지고 있고, 이미······.”
“압니다. 이미 나온 일곱 권의 책 중에서 대표작들을 모아 유작집을 준비 중인 것도.”
유작집, 이란 얘기에 유선은 갑자기 눈알이 아파오고 숨이 헝클어져 버린다.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크게 떠본다. 눈 속으로 차오르던 물기가 가까스로 콧속으로 가라앉는다.
“컴퓨터로 작업하셨죠?”
“그랬어요.”
“그렇다면 그 안에 쓰고 있던 원고라든가, 마무리 중인 단편도 있을 것이고 혹시 그분이 남긴 일기나 메모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편지 같은 건 그것만으로도 분량이 꽤 될 텐데요,”
유선은 고개부터 저었다. 머릿속에 어릴 때 시골 외가에서 보았던, 갈라놓은 암탉의 뱃속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 점 그늘도 없던 우물가, 목이 잘린 채 깨끗하게 씻긴 배를 열고 있던 닭. 크고 작은 노른자들이 조랑조알 엉겨 있던 뱃속. 어린 나이에도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맵고 달콤하게 끓인 닭국 냄비 속에서 외할머니는 유선의 그릇에 특별히 크기도 다양하던 그 노른자 덩어리를 담아 주었는데 유선은 그걸 삼킬 수가 없었다. 기어이 안 먹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유선의 가는 손목을 쥐며, 쯔쯔······· 이렇게 입이 짧으니, 혀를 차곤 했었다.
그의 머릿속에 미성숙한 난황처럼 엉겨 있던 생각들을, 단단함도 껍데기도 만들어지지 않은 그것들을 꺼내 놓자고? 그의 배를 쪼개서?
“출판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독자로서도 김주현 선생은 이대로 묻혀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작가입니다. 그것들을 모아서 꼭 묶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자료들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압니다. 그 글들은 그의 내밀한 기록들이고 그걸 누군가에게 보일 수 있는 건 본인만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것.”
당신은 모르는 게 없군요. 그렇지만·······. 유선은 말을 목구멍으로 삼킨다.
“그리고 이제 그 권한은 부인께 상속된 것입니다.”
유선의 눈을 들여다보며 자신만이 알고 있던 걸 일러준다는 표정으로 또박또박 얘기하곤,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라는 듯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가 앉은 쪽의 뒤편 벽에 커다란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클림트의 프린트였다. 황금빛 광채 속에서 목이 부러지도록 격렬하게 포옹하고 있는 두 남녀. 한없이 뜨거운 사랑의 느낌을 어쩌면 저토록 황홀한 색채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일까. 황금조차 녹아 흐르게 만들어버리는 그 열정의 온도를. 아버지가 금 세공사였다는 클림트는 고온에 녹아 흐물거리는 액체 상태의 황금을 보며 자란 게 틀림없다.
“그가 쓴 편지라면, 대부분 우리가 연애할 때 주고받은 사적인 것들이고, 일기에 관해서라면 그이가 생전에 저에게 그걸 보여준 적도, 저도 그걸 보려 한 적도 없어요. 무슨 얘긴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그 사람이 남긴 글들, 몇몇은 연필로 노트에 구상만 해놓은 것도 있을 테고 몇 편은 컴퓨터에 이런저런 분량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일기와 마찬가지로 발표하기 전에는 제게조차 그걸 보여준 적이 없어요.”
유선은 유리컵에 담긴 미지근한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당연한 말을 하는 게 왜 이렇게 힘이 들까.
“그게 그 사람 성격이에요.”
“말씀하시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일기나 편지를 세상에 내놓자는 것이 천박한 호기심에 기대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겠지요.”
열어놓은 창에서 바람이 들어왔다. 이마에 찬 손이 닿은 듯 선득하다. 땀을 흘린 모양이다. 그의 등 뒤, 액자 속의 금빛이 공간 속으로 따스하게 풀려나온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도 이젠 가고 아무래도 가을이 오나 봐. 따스한 느낌이 정겹게 느껴지니.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유선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난다.
“마르크스의 서간집이나 중세를 살았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편지를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것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들이 남긴 편지가 아직도 전율을 줄 수 있는 건 그것들이 오히려 대중에게 보일 것을 의식하지 않았기에, 뜨거운 마음으로 쏟아낸 것들을 냉철한 이성의 시선으로 다시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김주현 선생의 글을 아름답습니다. 그가 쪼개놓은 삶의 단면들은 생생한 슬픔을 전해 줄 것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대신 그의 체온과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일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걸려 하지 말고 길게 보십시오.”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라······. 그리고 아직은.”
“무서운 속도의 시대입니다. 비정한 얘기지만, 한 달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를 잊기 시작할 것입니다. 올해가 지나가면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 외엔 그를 기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의 격렬한 애도 기간은 대체로 삼 개월이라 하더군요.”
남자는 거기서 말을 끊는다. 유선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떠난 지 아직 삼 개월이 지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애도 기간이 끝나기 전에 책을 내자는 말일까. 책을 내기로 한다면, 아마 그의 말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망각에도 가속도는 붙으니까. 그 재빠르게 비워버린 기억의 공간 속에 사람들은 무엇을 담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는 동안, 아직은 따끈한 그 글들을 책으로 한번 만들어 봅시다. 그 책이 나온다면 그의 아홉 번째 책이 될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이라는 책을 혹시 읽어보셨나요?
유선을 고개를 저었다.
“알베르 카뮈의 사후 삼십 년 만에 미발표 원고를 모아서 낸 책이죠. 거친 대로 그의 생생한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육필로 된 교정 흔적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속에 싸한 슬픔이 밀려옵니다.”
시간은 조금 더 어둠 쪽으로 옮겨 앉는다. 숲은 어둠의 입 안으로 삼켜져버렸다. 바람의 자락에 눅눅한 비 냄새가 실려 온다. 남자의 프로필이 유리창에 떠올랐다. 정면에선 보이지 않는 강인함이 턱과 광대뼈의 선을 따라 드러나 있다.
“많이 여위셨네요.”
“네?”
“이 년 전, 프레스센터였죠. 시상식에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김주현 선생. 내 대학 이년 후뱁니다. 그보다는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였죠. 따님은 지금?”
“일곱 살이에요.”
“벌써.”
안 돼. 이 사람이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들이대더라도. 그 사람은 화를 내고 슬퍼할 것이다. 혹 그럴 수 있다면. 일기나 사적인 편지를 남에게 보인다는 건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을 만치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선은 오래 매를 맞고 난 것처럼 등이 아프고 피곤했다. 빨리 이 사람과 헤어지고 싶었다.
“생각해 보고, 제가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탁자 위의 명함을 집어 들며, 유선은 그러나 이 남자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 년 선배라면 서른일곱. 요즘 사람답지 않게 그는 겉늙어 보였다.
“좋은 방향으로 결정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건.”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유선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는 짧은 목례를 하곤 재빨리 일어나 카운터에서 찻값을 계산하고 나가버렸다. 봉투는 부피감이 없어 아주 얇았다. 유선을 그걸 손에 들고 거리로 나왔다. 남자는 흔적이 없었다. 멍청하게 이걸 받고 말다니.
유선은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뜬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버린 흐리멍덩한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삶은 이렇게 차갑고 날카롭게, 파도처럼 끊임없이 맨살에 부딪쳐 올 모양이다.
퇴근 시간의 거리는 놀랍도록 생기가 넘쳤다. 희미한 가을의 기색쯤은 무시해 버리겠다는 듯 커다란 꽃무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흘러내릴 듯 통이 넓은 청바지를 입은 소년들이 도서관의 경사진 언덕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려오면서 기름진 비명을 질러댔다. 그중의 하나와 거의 부딪힐 뻔했던 오토바이 탄 청년이 욕설을 노래처럼 뱉으며 달아나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건너편의 유리로 된 건물 벽에 밤의 풍경이 심해처럼 일렁이며 매달려 있다. 낯선 활기는 유선을 벨 것처럼 사방에서 도도하게 밀려온다. 유선은 왜 바깥으로 달려 나왔는지도 잊고 홀린 듯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유선은 건물 모퉁이에 가까스로 서 있는 자신이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온 것처럼 어색하고 부끄럽다. 걸어간다면 자신의 관절에서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투명하고 두꺼운 유리, 자신은 통로를 찾을 수 없는 유리 칸막이가 놓인 것 같다.
혹을 떼기는커녕, 이제는 그 사람의 전화를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 돼버렸어.
유선은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핸드백 속에 넣었다. 한숨이 나왔다. 힘든 것일까.
아직은. 지금은 아니야. 당신이 없어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 아직은 당신이 그립지 않아. 아직은 당신, 밉기만 해. 당신 알아? 그리움보다 강한 미움 말이야. 슬픔보다 더한 미움. 그런 게 있어. 사람들은 날 괴롭히는 게 그리움과 슬픔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지금은. 미움과 부끄러움이야. 왠지는 몰라. 그런데 당신은 밉고 난 부끄러워. 왜 밉고 부끄러운지는 내가 되어봐야 알 거야. 그렇게 갑자기 떠나면서.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그 소식을 들어야만 했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세 번의 벨이 울린 후에야 전화를 받는 건 유선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날 밤 두 시가 지난 시각에 벨이 울렸을 때, 그러나 유선은 설핏 든 잠에서 끌려 나와 처음 신호가 울리자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모임이 있어 좀 늦을 거라고 아침에 얘기하고 나갔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아이를 끌어안고 일찍 잠이 들었었다. 불길한 예감 같은 건 없었다. 수화기 속에선 자동 응답기의 기계음과 흡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였고 기계음은 아니었다.
“김주현 씨 댁입니까?”
“그런데요?”
“김주현 씨·········· 사망입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현실적인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없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병원 이름과 위치를 얘기하고는 전화는 끊어졌다. 어쩌면 한 사람의 죽음을 그런 식으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은 그런 식으로 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시각에 왜 그는 왜 문호리에 갔던 것일까.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벨 소리를 듣기 직전에 꾼 꿈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났다.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넓은 홀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음료수와 음식 접시를 담은 카트를 밀고 다니는 남자들은 무섭도록 무표정했다. 유선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유선은 들고 있던 작고 검은 핸드백을 잃어버렸다. 그걸 찾으려 건물의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파티에 온 것을 후회하며. 핸드백 하나를 잃은 것치고는 너무 절망적인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토록 방이 많은 줄 몰랐다. 여자들이 많이 모인 어떤 방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오래전에 암으로 죽은 여자였는데, 하는 생각을 꿈속에서도 했었다. 눈자위가 퀭하고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여자에게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묻진 못했다. 핸드백을 찾지 못한 채로 벨 소리에 잠을 깼었다.
혼자서, 그것도 술을 조금 마신 상태였다고 한다. 굴곡이 심한 국도 변의 가로수를 그가 탄 차가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했다. 여름 새벽이면 그곳은 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습 안개 지역이라고 경관이 일러주었다.
그가 누워 있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은 어둡고 추웠다. 아니. 추웠을까? 한여름이었는데. 아무래도 추웠던 것 같다. 안경이 달아나버린 그의 얼굴은 낯설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피투성이의 얼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얼굴을 보고나서 푸르스름한 복도로 나왔을 때부터 어쩐 일인지 제 모습이 유선에게 자꾸 보였다. 핸드백을 잃어버렸던 꿈속의 파티장에 여전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며 자꾸만 엉뚱한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눈에 보이게 떨리고 있었다. 집에서 걸치고 있던 그대로, 추리닝 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은 여자 하나가 어리둥절한, 눈을 깜박이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왔어야 되는데, 저 옷은 너무도 초라한데. 유선을 바라보는 유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과일이 맛이 없어, 누군가 지나가며 하는 말이 유선의 목소리와 뒤섞였다. 말할 수 없는 연민으로 유선은 전화를 하는 유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티셔츠는 흰빛을 잃었고 추리닝은 무릎이 튀어나와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왔어야 되는데. 누워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는데도 조금의 현실감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 같았는데 새벽의 병원은 적막했다. 통화를 하는 유선의 목소리도 손가락처럼 눈에 보이게 흔들렸다.
무언가 잘못됐어. 이건 아니야. 뭔가가. 전화를 하면서도 제 목소리의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유선을 유선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올 때까지 유선은 주차장에 나와 서 있었다. 그때 유선을 세상에 혼자 서 있었다. 여린 가로등 불빛 뒤로 겹겹의 어둠이 등등했다. 서늘한 바람을 쐬자 잠에서 깨듯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유선을 유선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상향등을 켠 앰뷸런스 한 대가 달려 들어왔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침대에 실려 나오는 사람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말없는 수선스러움 속에 그들이 유리문 안으로 사라지자 주차장은 다시 어둠과 고요함으로 채워졌다. 유선은 아주 잠깐 주현의 죽음을 잊고 있던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 놀라는 유선을 유선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동생 재현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설 땐 짧은 여름밤이 병원 뒤편의 엉성한 숲 언저리로 슬금 밀려가고 있을 때였다.
여전히, 그 새벽의 주차장에 서 있는 것 같아.
등 뒤의 건물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유선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터질 듯 습기르 가득 머금었던 그 여름 새벽은 확실히, 추웠었다.
차현구와 헤어져 바로 아르바이트하는 학생의 집으로 가서 수업을 마치고야 집으로 돌아왔을 때 미진은 텔레비전을 켜놓고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안아서 방에 눕히고 유선은 남자가 주었던 봉투를 열어 보았다. 수표를 싼 흰 종이에 한글로 계약금이라고 적혀 있었다. 종이 안에 백만 원권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주현의 서랍을 정리할 때 유선은 통장을 하나 찾아냈었다. 이십칠만 원의 잔액이 남아 있었다. 작은 원고료도 전부 유선에게 주었었는데, 서랍 구석에서 찾은 그의 증명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도로 싸서 봉투를 핸드백 속에 넣고 유선은 주현의 컴퓨터 전원을 넣었다. 초기 화면에 흑백의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유선과 미진의 얼굴 뒤에서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얼굴빛은 두 사람 사이에 낀 탓인지 조금 어두워보였다. 앞니 하나가 빠진 미진이 손가락으로 그리고 있는 브이자 때문에 그의 턱 선은 둘로 나누어져 있다. 그가 떠난 후 한번도 그의 컴퓨터를 열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글 프로그램을 꺼내자 최근에 작업했던 순서대로 몇 개의 문서가 떠올랐다. ‘밤의 플랫폼’이라면 계간지 가을호에 그의 유고작으로 발표되었던 글이다. 마감일보다 열흘이나 일찍 보냈었는데.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고. 장례식에 왔던 유주간이 그랬었다. ‘모래 아래서’라는 다음 파일을 클릭하자 단편의 초고인 듯 120매 분량의 원고가 나왔다. 그는 먼저 써놓고 하염없이 잘라내는 스타일이다. 그는 아마 여기서 20매 정도를 잘라내려 했을 것이다.
그의 수영복은 파란색이었어요. 사각형의.
시계를 차고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마우스로 죽 훑어가는 중간쯤에 그런 문장들이 보였다.
다음 파일을 열어보았다. 꽤 여럿 되는 주인공의 이름들, 캐릭터,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이 이어졌다. 언젠가 그가 쓰고 있다며 생각과 달리 진전이 잘 안 된다던 장편의 자료일 것이다. 사보에 연재하는 콩트의 파일도 있었다. 발표하지 않은 단편이 세 개, 책 한권을 만들기엔 부족한 분량이었다. 발표한 것들만 모아놓은 폴더도 있었고 반쯤, 혹은 몇 줄만 기록된 원고들을 모아놓은 폴더도 있었다.
원고를 하나씩 열어보는데 암호가 걸린 파일이 하나 있었다. 제목은 ‘오월생’이었다. 오월생이 뭘까. 오월이라면 그의 생일이 있는 달인데. 왜 암호를 걸어놓았을까. 자가가 잘못해서 파일을 한번 날린 후론 절대로 컴퓨터에 손대지 말라고 애꿎은 유선에게 짜증을 내는 바람에 그 뒤로 유선은 그의 컴퓨터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암호라면. 유선은 숫자를 입력해 본다. 2293 통장과 카드의 비밀번호로 쓰는 그의 핸드폰 번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쓰지 말라고 유선이 말했던 주민등록증의 앞 번호? 68051
파일이 열렸다. 화면에 떠오른 건 파일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날짜가 적혀 있었다.
7.21
7월 21일이라면. 그가 떠나기 하루 전의 날짜였다. 그날 그는 일찍 돌아왔었다. 저녁을 같이 먹었는데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책을 읽다 메모해 둔 구절일까. 몇 줄 되지 않았다.
······루즈몽은 그랬다. 우리의 생애는 두 개의 윤리가 있다. 하나는 결혼의 윤리며, 다른 하나는 열정의 윤리다. 인생에 밤과 낮이 있듯 태양아래의 윤리와 달빛 아래의 윤리가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무거운 것인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 삶은 어느 순간까지 선택을 강요할 것인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선택을 강요하는 삶이여, 나는,
메모는 그렇게 쉼표에서 뚝 끊어져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루즈몽이라는 사람의 얘기일까.
기록은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그 정도였다. 사적인 기록으로 보이는 문장과 다른 책이나 기사에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뒤섞여 있었고 그 구분이 모호한 것들도 있었다.
7.5
술과 담배가 사람에게 유익한 건 아니다. 다만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목발이 필요하듯, 영혼이 아픈 어느 순간에 술과 담배가 목발이 되어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의 어느 한때, 근원적인 허무주의자인 내게 술과 담배는 나의 목발이 되어주었다.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출전이 적혀 있지 않아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주현의 진술은 아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행을 바꾸어 쓰인 글이 유선의 시선을 붙들었다.
때로 M이 내 영혼의 목발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그를 알기 전엔 내 영혼이 목발이 필요한 상태라는 걸 스스로 알지 못했다. M은 술도 담배도 아니다. M이 내 생에서 술과 담배, 영혼의 목발, 그 지점에서 멈추어질 수 있을까.
이건, M에게도 Y에게도 공정치 못한 일이다.
그날의 기록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유선의 머릿속이 단숨에 뒤집어엎은 술잔처럼 텅 비워졌다. Y는, 유선의 이니셜일 것이다.
유선은 스스로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안테나가 무딘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M은 누구일까. 유선은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 보니 단순한 일기가 아니다. 발췌해서 적어놓은 글들까지 모두 하나의 뚜렷한 초점을 향하고 있다. 그건 M이라는 여자다. 성별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눈으로 본 것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글을 읽다가, 혹은 떠오르는 생각들 중 M과 연결되는 모든 것들을 여기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아니면 이것을 기록하던 날들 동안 주현은 M이라는 인물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물도 어떤 단어도 그와 연결되어 버리는 지독한 강박증. 그것도 기꺼이. 일생에 한 번 꿀까 말까 한 깨어나기 싫은 꿈과도 같이. 그는 그 강박을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레스토랑 이름과 약속 시간만 적힌 날도 있었다.
4.30
레드 클라우드. 7시 30분.
뜨거운 어니언 수프.
기억하고 싶은 수프의 뜨거움뿐이었을까.
그의 기록에는 극도의 절제와 결코 절제할 수 없는 과잉된 정서가 행복하게 불화하고 있었다.
몇 줄의 뜬금없는 대화체로만 된 기록도 있었다.
6.13
나의 어디가 좋아?
모르겠어.
말해 줘.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고개를 갸웃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의 어디가 좋아? 그 질문은 유선이 기억하는 질문이다. 아주 오래전, 둘이 처음 안았던 날, 유선이 했던 질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이? 는 유선의 질문이 아니었다.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묻는 것일까. 나의 어디가 좋아? 그때도 그는 너의 모든 것,이라고 말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다만 유선은 주현의 입술에 가만히 제 입술을 대었을 뿐이다. 그렇게 많이? 라고 묻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지도 않았다. 그의 사랑은 너무 견고해서 일생을 끌로 긁어도 닳지 않을 바위 같았으므로.
언제부턴가 유선은 제 몸을 긁고 있었다. 젖가슴 아래쪽부터 가려워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 가슴을 긁고 있는 줄을 몰랐다. 가려움은 가슴속의 분노처럼 처음엔 미약하게, 나중엔 스스로 걷잡을 수 없이 그렇게 폭발했다. 왼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배를 긁어대며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최초의 기록은 4월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백 일동안의 사랑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 속의 유선은 Y라는 이니셜로 딱 한 번 등장했다. M이라는 이니셜도 한 번 등장한다. 그러나 그 글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Y가 아니라 M이다. Y와 M은 아득히 먼 두 지점에 있는 존재였으며 온도계의 가장 먼 곳에 위치하는 두 지점이었다. 하나는 그에게 구심력으로, 하나는 우울한 원심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주현이라는 우주의 대척점에 둘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인생의 두 개의 윤리가 있음을 그에게 가르쳐준 상반된 존재였다. Y가 새벽 두 시에 처음 듣는 여자의 목소리로 남편의 죽음을 차갑게 선고받기 삼십 분쯤 전에 M은 그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Y는 그에게 차갑고 멀어지고 싶은 낡은 감정의 이니셜이었다.
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이처럼 세상이 아름다우니까.
한 줄만 적혀 있는 어느 날의 기록을 읽을 때 유선은 매달리는 심정이 되었다. 이 문장은 주현의 말이 아니다. 베토벤이 사랑하는 줄리에타에게 피아노 소나타 <월광>을 헌정하면서 했던 말이다. 어쩌면 이 파일의 모든 글들은 이것처럼 출전을 밝히지 않은 다른 사람의 글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닐 것이다.
날짜를 적지 않은 채 토막토막 적어놓은 문장들도 있었다.
고뇌의 근원은 연(緣). 연을 맺으면 보고 싶어 괴롭고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해 괴롭고 나는 보고 싶은데 너는 아니어서 괴롭고.
출전까지 자상하게 적어두었다. 법구경.
어떤 날은 뜬금없는 팝송 가사가 적혀 있기도 했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뜨겁게 이글거리는 낮, 거리에서 그와 이별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멜라니 사프카, the saddest thing.
커서를 움직이며 유선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M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건 5월의 어느 날, 조근조근 속삭이듯 비가 내렸다. 고 특이하게 날씨까지 적어놓은 날의 기록이었다.
···········목이 긴 물새들은 이렇게 잠든대요. 모래밭에서, 바람 부는 쪽을 향해 한쪽 발로 선 다음, 몸통을 웅크리고 머리를 뒤로 돌려 깃털 사이에 묻고 이렇게 자는 거야. 눈을 감고 그 풍경을 한번 상상해 봐. 너무 아름답지 않아? 그렇지?
이렇게, 라는 부사를 읽으며 그의 시선 속에서 사랑스러운 한 여자가 잠든 물새를 흉내 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바람 부는 모래벌판 위에서 하얀 깃털 속에 작은 부리를 묻고 잠든 물새처럼 희고 사랑스러운 여자.
새벽이 올 때까지 그 파일을 전부 읽고 또 읽었지만 그의 글속에는 죽음으로 달려가는 자의 어떠한 기미도 없었다. 죽음이라니, 그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이처럼 세상이 아름다우니까.
이 남자는 누구일까. 4월부터 7월까지의 날들을 적어놓은 이 파일의 기록자는 누구일까. 내가 알았던, 그 사람의 파일이 맞긴 한 것일까. 이 사람이 나와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웃고 때로 울며 함께 살아왔던 그 사람일까.
이건 아니야. 엉망으로 취해서 들어온 날이면 중얼거리던 그의 말처럼. 이건 아니야. 이제는 그의 침묵조차도 점자처럼 더듬어 읽을 수 있을 만큼 서로에게 투명하다고 믿었는데.
시동생의 차를 타고 사고 현장에 가보았을 때, 그의 차가 부딪혔던 수양버들 나무둥치 뒤로, 이른 저녁부터 불야성을 이루며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서 있던 강 건너의 러브호텔과 그 의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너의 모든 것, 하고 말했을 때 그렇게 많이? 하며 깜짝 놀랐을 여자와 헤어져 돌아오던 길이었음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유선은 잡고 있던 마우스를 들어 방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를 향해 전화기를 집어던질 수도, 얼굴에 손톱자국을 낼 수도 없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껴야 하는 자신. 분노를 폭발시킬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데 살갗이 벗겨지도록 제살을 긁어대야만 하는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었다.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끝내 찾을 수 없는 몇 장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인생은 생각이 있는 놈 이기라도 한 듯 종종 숨겨진 현실을 일깨워 주곤 한다. 문제는 그 방식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 차두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이 파일을 열어보지 않고 지냈을까. 유리창에 비치던 남자의 강인한 옆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건, 일기가 아닌 픽션이 아닐까. 이젠 스스로도 설득할 수 없는, 질문이 될 수 없는 바보 같은 질문만을 가까스로 떠올리며 유진은 일어섰다. 이건 제 팔에 스스로 칼을 꽂은 자의 비명이 가득한 기록, 스스로 그 비명을 즐기는 자의 기록일 뿐이었다. 온몸의 수분이 말라버린 듯, 무릎이 입 안이 어깨가 눈알이 파삭거리며 함부로 발굴된 미라처럼 한순간 삭아 내렸다.
그 밤부터 죽은 숙주 속에서 살아가는 에일리언처럼 가려움이 유선의 몸속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두 개의 문장처럼 가려움도 그 시간 이후 끊임없었다. 절망적인 가려움이, 손닿지 않는 시린 우물 속에서 꾸역꾸역 밀려 올라왔다. 유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선의 삶 속에 파고든 것처럼. M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는 유선의 피부 한 꺼풀 아래서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렇게 많이?
남아 있는 날들
미진은 소파에 드러누워 과자를 먹으며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머리가 긴 여주인공이 소주병을 깨서 흔들며 악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못 해. 누구 좋으라고.
요즘은 만화 영화도 애들 보여주기 무서운 판인데, 막가는 일일 연속극에 넋을 놓고 있는 애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라고 떠놓은 국도 싱크대에 그대로 놓여 있다. 마루는 만화책과 레고 조각이 흩어져 폭탄 맞은 자리처럼 엉망이다.
“너, 김미진.”
유진은 날 세워 불러놓곤 거기서 그만둔다. 저도 견뎌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아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늘 집에 있던 엄마마저 출근해 버리고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현실에 적응하기가 쉽진 않을 것이다. 혼자 저녁을 먹느니 차라리 과자를 씹으며 버티고 싶은 무언가가, 소주병을 깨서 흔들며 악을 쓰는 탤런트를 보며 대신 폭발시키고 싶은 무언가가. 오후 내내 친구네 놀러 가지도 않고 혼자 외롭게 지냈음을 기어이 엄마에게 시위하며 견뎌야 할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밥을 담고 콩나물국을 데워놓고 보니 국은 쉴 듯 말 듯한 경계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봉지 김을 하나 꺼내고 참치 캔을 꺼내 찌개를 할까 하다 뚜껑만 열어 그대로 식탁에 올려놓았다. 차려놓고 식탁 위를 보니 있던 밥맛도 달아나게 생겼다.
“밥 먹자,”
“나 배 하나도 안 고파.”
“그래 놓고 나중에 엄마 설거지하고 나면 그때 또 배고프다고 그럴 거지. 어서 와.”
미진은 식탁 위를 쓱 훑어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나, 갈치 먹고 싶은데.”
식성은 꼭 닮아가지고.
“내일 구워 줄께. 지금은 없어.”
“지금 먹고 싶어.”
“너 참치 좋아하잖아.”
“질렸어. 매일 참치 캔이야.”
한숨을 푹 내쉬더니 모진 말을 내뱉는다.
“내가 요즘 왜 안 크는지 알겠어.”
“엄마가 집에서 노니?”
“명희 엄만 선생님 하면서도 도넛까지 만들어 줘.”
“그럼 그 집에 가서 살아.”
이런 식의 대답은 유선 자신도 싫다. 미진은 아무 말 없이 유선을 노려본다.
“너 왜 그러니? 왜 너까지 이래? 너라도 좀 알아서 하면 안 돼?”
너 왜 그러니, 까진 괜찮았다. 알아서 하면 안 돼?에서 유선은 느닷없이 악을 쓰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아이의 표정이 단단해진다. 어린 것이 짓는 저런 표정은 무섭다. 윗도리를 들추고 붉은 손톱자국으로 금간 유리창처럼 보이는 등과 앞가슴을 보여준다면 쉬어가는 콩나물국과 참치 캔이 놓인 식탁 앞에 서서 악을 쓰는 엄마를 딸은 이해해 줄까.
피부과는 5층에 있다. 이 시간의 대기실은 퇴근을 한 직장인들로 늘 붐빈다. 여름이 한 풀 꺾이면서 병원에 들어설 때마다 살이 타는 노린내에 찌푸리게 된다. 레이저실 앞엔 여름내 생긴 반점이나 기미를 없애려는 사람들로 앉을 자리가 없다. 기미나 잡티를 제거하기 위해 잡지를 뒤적거리며 앉아 있는 여자들을 어느 순간 한없는 부러움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본다. 그들이 가진 고민의 현기증 나는 가벼움에 질투를 느끼며.
가려움의 증세는 매우 특이했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밤이 되면 스멀스멀 시작하는 것이다. 통증보다 견디기 괴로운 것이 지독한 가려움이란 것 알게 되었다. 가려운 곳은 피부가 아니다. 몸속 어딘가. 피부 한 꺼풀 아래의 어느 지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 혼자 일어나 앉아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긁어대면 가려운 곳은 점점 더 깊은 데로 내려간다. 미친 여자처럼 집중하여 제 살을 긁어대다 보면 각성제를 먹은 것처럼 정신까지 맑아졌다.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을 때면, 차라리 아픈 게 낫겠어 중얼거리며 창밖이 훤해질 때까지 청승스럽게 울 때도 있다. 붉게 부풀어오는 살갗을 쳐다보면 피부 아래 이상한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유선은 가려움을 증오했다.
주사를 맞고 약을 꼬박꼬박 먹는데도 자다 일어나 점점 가려워지는 피부를 피가 나도록 긁어대는 밤이 이어졌다. 배와 가슴에는 예리한 채찍으로 맞은 듯한 붉은 줄이 겹쳐졌다. 긁은 지 오래된 곳은 검게 변색이 되었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매번 새로운 약을 처방해 주었다.
이틀 전에 새로 받은 처방은 조금 더 강해진 듯했다. 약을 먹고 삼십 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몽롱해졌다. 칼끝처럼 뾰족하던 신경줄이 말랑말랑하게 풀려나가고 못 견디게 잠이 쏟아졌다. 때론 그 잠의 언저리로 야습하는 적처럼 불쑥 가려움이 덤빌 때도 있지만 몽롱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몇 번 뒤치다 보면 이윽고 끈끈한 잠의 바다 속으로 가려움마저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요번엔 어땠습니까?”
“좀 잤어요.”
“가려운 건요?”
“가려운 건, 뭐랄까요. 가려움이 없어진 건 아니에요. 그냥 약이 그걸 덮어 누르고 있는 것 같아요.”
차트를 기록하던 손을 멈추고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손가락 위로 푸른 정맥이 도드라진 손이다. 지나치게 청결해 보이는 손 때문에 흰 가운의 소매 깃에 살짝 얹힌 하루치 더러움이 선명해 보인다.
“체질에 따라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이상하군요. 알러지가 쉽게 완치되는 병은 아니지만 약을 쓰고 있는 동안은 보통 증상이 사라지거든요. 혹시·······.”
의사는 펜을 내려놓고 두 손을 깍지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조심스런 말투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최근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한 적이 있습니까? 정신적인 충격이 신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거든요. 그런 경우엔 몸이 약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임상 사례 보고가 있긴 하지요.”
“아니요, 그럴 일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유선은 그렇게 잘라 말한다. 지나치게 빨리, 정신과 의사가 물었다 해도 유선은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인생은 당신이 공부한 교과서와는 다른 부분이 많아요. 아무리 두껍다 한들 몇 권의 의학 서적으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전부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아요.
“그렇겠지요.”
잠시 옆길로 벗어났다는 듯, 빈주먹에서 꽃을 피워내는 마술사 같은 과장된 동작으로 깍지 낀 손을 풀고는 처방전을 기록했다.
“사실은 요즘이 알러지 환자들에겐 가장 괴로운 시기예요. 환절기가 지나면 꿈속에서 그랬던 듯 거짓말처럼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자상하게 이미 알려주었던 몇 가지 음식이나 환경의 금기들을 일러두었다.
“등 푸른 생선이나 달걀, 우유 혹은 유제품, 계절적으로 복숭아나 토마토도 알러지를 일으킬 수 있어요. 냉기 알러지일 땐, 좀 우습긴 하지만 양말을 두어 켤레 신고 주무시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네.”
지난번에도 그는 똑같은 말을 해두었지만 유선은 하나도 신경써서 지켜보질 못했다. 그래도 유선은 순간적으로 응석처럼 그와 몇 마디 더 나누어보려는 자신을 본다. 냉온욕을 해보면 도움이 될까요? 채식은 어떨까요? 절전 모드로 돌려놓은 가전제품처럼 근근히 움직이는 듯한 몸의 느낌은 약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것도 정신과적 질환일까요? 제게만 들리는 복화술처럼 그 말들은 유선의 목구멍 아래서 멈칫거린다.
의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선의 자신의 감정이 알러지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다. 기쁨과 즐거움을 빼버린, 너그러움과 행복감을 제외한 모든 감성이 유선의 마음속에서 미친 파도가 되어 출렁거린다. 단단하게 비끄러맨 의식의 틈으로 그것들은 어느 순간 해일처럼 터져 나와 유선을 죽도록 외롭게, 죽도록 슬프게, 죽도록 부끄럽게 몰아붙인다.
유선은 가슴속에 담긴 그 날카로운 감정의 파편들 때문에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다.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그것들은 함부로 쏟아져 살을 베고 발등을 깨고 핏줄을 잘라놓으 것 같다.
“알러지는 뭐랄까, 분만통과도 비슷합니다. 가라앉고 나면 흔적이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분만통보단 덜 아프지 않아요? 초조해하지 말고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려봅시다.”
가려움은 계절이 바뀌어도 쉬 낫지 않을 것이다. 의사의 말처럼 그것의 원인이 정신적인 것이라면 더욱, 그저 이 약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점액질의 잠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면 끔찍한 가려움조차 힘을 못 쓰듯 머릿속에서 회오리처럼 맴도는 상처의 조각들도 같이 잠들어 줄 것이다. 분만통처럼, 언젠가 내 속에 있는 아픈 덩어리가 날 찢고 나가는 순간 이 모든 가려움도 같이 데리고 가주겠지.
아직은 힘들지 않아
“선생님, 엄마한텐 오늘 수업 일찍 마쳤다고 얘기해 줘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인데.”
“전부 일주일에 한 번이에요. 바이올린도 한 번, 피아노도 한 번, 논리 사고 훈련 한 번. 작문 한 번, 영어 회화 한 번, 미술 실기 한 번, 일주일에 종합반 사흘 가면서 그 많은 걸 그럼 한 번 하지 두 번씩 어떻게 해요.”
“무슨 일인데.”
"영화 보려고요.”
“남자친구랑.”
“백 일째거든요.”
“왜 하필 이 수업이야.”
“내가 테스트를 해봤어요. 무슨 얘기든 했다 하면 하루가 가기 전에 엄마가 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만 빼고.”
“나도 안 돼.”
“선생님도 설마 이 수업이 제 작문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죠? 이건 할수록 글 읽기도 쓰기도 지겨워지는 수업이에요.”
제 할 말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뱉어내는 하영의 얼굴을 유선은 홀린 듯 쳐다본다. 못난 영혼일수록 사소한 말에 상처받는다. 누구에게도 귀하지 않은, 도움이 안 되는, 우습게 보이는, 지겹게 발목을 붙드는 인간 이유선.
하영은 벌써 튀어나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콧등엔 분 자국이 뽀얗고 상큼한 시프레 향이 방에 가득하다. 중3인데 네 번에 한 번꼴로 별 핑계를 다 대고 수업을 보이콧한다. 이번 달엔 벌써 두 번째다. 엄마 마음에도 들어야 되지만 애하고 사이가 나빠도 과외는 끊긴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하고 도서관에서 받는 월급의 절반쯤 되는 수업료를 받는다. 어린 소녀다운 가는 팔과 아기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입술을 가졌지만 이 순간 하영은 유선에게 절대자다. 다음 주까지 숙제로 해 놔. 아니면 엄마한테 말씀드린다. 하영은 입으로만 네, 네 하고선 선생님 저 먼저 가요. 하며 뛰쳐나가 버린다.
가방을 챙겨들고 내려와 어둑한 아파트 마당을 걸어 나오는데 내가 왜 요즘 안 크는지 알겠어. 잔망스럽게 내뱉던 딸의 목소리가 새삼스럽게 속을 후볐다. 늦을 줄 알고 저녁 때 먹으라고 김치찌개와 밥, 김만 차려놓고 나왔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택시를 탔다. 집 앞 마켓에서 갈치 한 마리와 토막 친 닭과 도넛 가루까지 사서 뛰어 놀라와 초인종을 눌렀는데 응답이 없다. 핸드백을 뒤져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오니 미진은 텔레비전을 켜놓은 채 소파에서 털 빠진 모포를 빨며 잠들어 있었다. 김치찌개 뚝배기와 김, 빈 공기가 식탁에 놀려져 있었다. 늦게 온 댔더니 아예 일찍 먹어버렸구나. 볼에 묻은 김 가루를 문질렀더니 눈을 반짝 떴다.
“엄마, 아침이야?”
이것하고 싸우다니.
“아니야. 저녁이야. 엄마가 도넛 해줄까?”
“아니. 엄마 피곤한데 됐어.”
또 판정패.
보온밥통에서 밥을 담아와 차갑게 식은 찌개와 남은 김 몇 장으로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는데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어두움, 차가움, 배반당한 정절, 만져지지 않는 존재감, 익숙했던 만큼 낯설어져 버린 남자. 지독하게 가려운 육체, 가슴에 가득 찬 그것들 위로 미지근한 밥을 밀어 넣었다. 밥을 씹을 때마다 몸 안에 고인 그것들이 제 존재를 주장하며 출렁거렸다. 싸늘한 찌게를 입 속에 떠 넣으며 유선은 자신이 스스로 알아왔던 것보다 강인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약 한 봉지를 먹었다.
딸아이를 안아서 침대에 눕히고 옆에 누웠다. 눕자마자 맨살에 털옷을 입은 듯 살갗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옷 위로 옆구리를 슬슬 문질렀다. 어서 잠들어야 되는데. 손을 대자마자 가려움이 휘발유를 끼얹은 불길처럼 확 번져나간다. 지점토 조각을 가져다 붙인 듯 살점이 툭툭 부풀어 올랐다. 모든 감각은 사라지고 가려움만 남는다. 전쟁이다. 유선은 벌떡 일어나 반짇고리를 꺼냈다. 바늘을 하나 뽑아 부풀어 오른 살에 콕콕 찔러본다. 아무런 감각이 없다. 꾹 눌러본다. 아프지 않다. 너무해. 미친 여자처럼 일어나 부엌으로 나왔다. 싱크대를 열고 식칼을 움켜쥐고 붉게 부풀어 오른 살을 도려낼 듯 노려보다 유선은 식칼을 던져놓고 약 한 봉지를 꺼냈다. 미량이긴 하지만 극약처방이니까 가렵다고 연달아 드시진 마세요. 의사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개자식, 가려움 하나를 못 고쳐.”
유선은 숨을 몰아쉬며 공연히 의사에게 욕을 퍼부었다. 물을 머금고 반만 먹을까 하다 한 봉지를 털어 넣었다. 잠을 자야만 했다.
“여보세요?”
그 남자였다. 이제는 혹시 저를 기억하실는지,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오래된 시계에 와 있으며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겠노라는 남자의 목소리는 약간 느긋한 것처럼 느껴졌다. 미스 오가 매점에서 사온 과자와 커피를 마시느라 정기 간행물코너의 미스 리까지 와 있을 때였다. 미스 리는 결혼한 지 오년인데 직원들은 그냥 미스 리로 불렀다. 유선과는 동갑이고 같은 층에서 근무하다 보니 간식을 먹을 땐 꼭 셋이 어울렸다. 난 여기 그만두면 안 돼. 누가 날 미스 리고 불러주겠어. 언니. 아이섀도를 새로 사야겠어. 갈색으로. 찬 바람이 불면 여름 색조는 초라해 보일까.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지난번 만났던 일을 대충 설명하자, 둘은 똑같이 펄쩍 뛰었다.
“어머, 언니.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러자는 사람 없으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언니가 해야 할 일 아냐?”
“그렇게 생각해?”
“유선 씨, 이럭저럭 세월 지나버리면 내 돈 들여서 출판하기도 힘들어. 공짜로 대출해 주는데도 판타지나 실용서 아니면 빌려보지도 않는 거 알잖아. 고마운 사람이지. 계약금까지 줬다고? 자리로라도 출판해야 하는 거 아냐?”
“편지하고 일기를? 본인의 허락도 없이? 그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을 남들 보는 데서
발가벗기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
“그게 그 글의 운명이야. 유선 씨.”
그 글의 운명. 남은 자의 운명을 전복시켜 버리는 것도 그 글의 운명?
“나로선.”
유선의 목소리가 이상했는지 둘이서 눈을 크게 뜨고 유선을 쳐다보았다.
“나로선, 내가 갑자기 죽어버렸을 때, 내 일기장을 어떤 이유로도 공개하는 걸 원치 않아.”
미스 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기를 쓸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볼 것을 무의식 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하자면 일기란 어떤 면에선 자기 검열을 이미 거친 글이야. 난 그런 거 같아.”
검열을 거친 글이라고? 유선의 머릿속으로 파일 속의 문장들이 날카롭게 박혀왔다.
그렇게 많이?
바닷가의 새들은 이렇게 잠이 든대/
뜨거운 어니언수프.
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그가 선택한 열정의 윤리. 버림받은 혼인의 윤리. 그걸 내가 읽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말인가.
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적어도 그토록 잔혹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머. 언니 아직도 일기 써?”
미스 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미스 리가 유선을 먼저 쳐다보곤 미스 오에게 하얗게 눈을 흘겼다. 미스 오가 입을 쑥 내밀고 중얼거렸다.
“책 찢어가도 좀 잘 찢어 가면 누가 뭐래? 제본까지 죄다 뜯어지게 이게 뭐야? 어떤 여자는 나하고 눈을 딱 맞추고는 손으로 찢는다니까.”
찻집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차두현은 통화 중이었고 눈인사를 하며 앞자리를 가리켰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대부분 연인들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는 키가 작고 지나치게 말라서 볼품이 없었고 여자애도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한순간도 놓치기 싫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연인의 얼굴에 천천히 담배 연기를 불어 보낸다. 담배 연기가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발암 물질로 가득한 연기 속에서 여자는 행복한 듯 웃고 있다. 연기 속에서 웃고 있는 여자는 볼이 붉고 맹해 보인다. 남자가 순간 뺨을 세게 때리더라도 여전히 여자는 웃고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확실히 그런 순간이 있어. 사랑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예민하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게 만들어버리는 감정의 알러지 상태 같은 것이니까.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자료를 좀 찾아보셨습니까?”
유선은 대답 대신 핸드백 속에서 봉투를 꺼내 남자 앞으로 밀어놓는다. 남자는 봉투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아직요.”
“집필실이 따로 있었나요?”
“그렇진 않아요.”
“여전히 그가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군요.”
“센세이셔널리즘은 그 사람이 가장 싫어했던 거예요. 그 사람의 죽음을 책 광고로 쓰고 싶진 않아요.”
유선의 목소리는 폐허의 건물 속, 낡은 배관에서 배어 나오는 녹물처럼 띄엄띄엄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는 컴퓨터 파일을 열어보기 이전의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유선은 한순간 그에게 모든 걸 말해 버리고 싶다. 그의 이면, 그의 열정의 윤리, 그의 M에 대해.
그는 내 남자가 아니었어요. 난 상속권이 없다고요.
유선의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밀려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그의 모든 걸 까발리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스캔들의 가운데 놓이게 하고 싶어.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하는 그의 무력을 한껏 비웃으며.
“이유선 씨, 그 사람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은 거요. 그 사실을 거부하고 있어요,”
유선을 침을 삼킨다. 목구멍을 막은 덩어리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걸려 있다. 유선의 목소리는 뻔한 거짓말을 하는 소녀처럼 억눌려 있다. 더듬지 않으려 애쓰는 말소리가 제 귀에도 겨우 들린다.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자기가 쓴 글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글쓰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손에 잡고 있는 끈을 놓아주십시오. 상처도 부끄러움도 결점조차도 역사가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이 남자는 새로 친 옹벽처럼 단단하다. 물 샐 틈 같은 건 없다.
남자는 제 앞에 놓여 있던 봉투를 유선 쪽으로 밀어낸다.
“주제넘은 얘긴지 모르겠지만, 구립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따님과 살아가기가 수월하진 않을 겁니다.”
남자는 늘 그랬듯 유선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 찻값을 내고는 나가버렸다.
아니야.
유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가 없어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유선의 마음속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지나치게 많이 섞여 있었다. 그에 대한 제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무엇인지, 정확히 이름 붙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외로움이든 슬픔이든 부끄러움이든, 미움이든, 박탈감이든, 배반이든, 모멸이든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많은 감정이, 쏟을 길 없는 상대를 향해 간헐천처럼 뜨겁게 예고 없이 솟아올랐다. 매번 소스라쳤고 매번 화상이었다.
그것은 지난여름의 사흘 동안 유선이 겪어내야 했던 혼란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대부분의 빈소가 그러하듯. 급하고 준비되지 않은 채 차려진 그의 장례식에서 유선이 느꼈던 그 감정들. 그때 제 속에서 들끓던 감정들을 그러나 유선은 이름 붙일 수 없어 더 혼란스러웠다. 왜, 이토록 갑자기, 떠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듣게 한 사람에 대한 복잡한 감정, 슬픔보다 더한 어떤 감정이 그때에도 있었다.
한숨도 못 잔 아침부터 조문객들이 밀려왔다. 잠이 오진 않았는데 몸은 꿈속인 듯 둔하게 움직였다. 구석에 잠시 앉아 있을 때 누군가 유선의 손에 피로 회복제 병을 하나 쥐었다.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놓치면 안 되는 어떤 것인 듯 유선은 그것을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다. 단단히 쥐고 있었는데도 그것은 자꾸만 손에게 미끄러져 내렸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그걸 주워서 뚜껑을 비틀어 열고 다시 손에 쥐어주었다. 이거라도 마셔야지.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꼭 쥐고 있으려 했는데 또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확실히 기억나는 건 없다. 유선은 검은 테두리 소게서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바깥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사이사이로 누군가가 와서 끊임없이 말을 시켰다.
관은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무엇으로 해야 되나요?
뭐 대략 세 가지쯤 됩니다. 오동나무가 가장 비싸지만 홍송도 괜찮습니다. 가격은 여기 적혀 있습니다. 오전 중으로 빨리 결정해 주셔야 합니다.
그 남자가 가고 나자 또 다른 누군가가 왔다. 아니 똑같은 남자였는지도 모르겠다. 목소리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었으니까.
음식을 주문해 주시겠어요? 준비할 수 있는 음식은 이렇습니다. 메뉴판을 두고 갈 테니까 체크해서 주세요.
책받침처럼 코팅된 그 판에는 음식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난감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유선의 옆으로 바짝 다가서서 책받침을 뺏었다.
세 가지나 다섯 가지 정도가 괜찮아요. 전은 삼색전으로 하시면 모양이 나지요. 마른안주는 따로 준비하셔야 되고요.
그렇게 해 주세요.
여름이니까 돼지 머릿고기는 조금만 주문하세요. 술이나 음료수는 박스 단위로만 공급됩니다. 아이스박스는 저희가 대여해 드리고 얼음 비용은 따로 계산해야 합니다.
유선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삼색전, 도라지무침, 육개장. 반듯하게 적혀 잇는 음식 이름들을 보자 처음엔 어지러웠고 곧 토할 것 같았다. 유선은 드링크 병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작고 단단한 그 병 외에는 아무것도 현실감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슬픔을 잊게 하는구나. 유선은 눈으로 시동생을 찾았다. 사람들이 꿈속에서처럼 둥둥 스쳐 지나갔다. 손을 내밀어도 만져질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와서 손을 붙들었을 때, 남편이 죽었는데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여자가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병을 나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비자 불안해졌다. 무엇이든 붙잡고 있고 싶었다.
이틀간 눈을 붙이지 못하다가 발인하기 전, 새벽녘에 상 모서리에 기대어 잠시 졸았다. 유선은 그 짧은 사이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주현은 완벽하게 건강했고 그의 죽음은 꿈속의 꿈이 되어 있었다.
아, 당신이 죽은 꿈을 꾸었어.
그 말을 할 때,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토록 다행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처음인 듯했다. 가슴이 터질 듯한 행복감에 전율하는 순간 눈을 떴다. 왼쪽 이마에 얹고 있던, 형광등 불빛에 파리한 제 손을 내려다보며 그것이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절대로 변경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미칠 듯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었지?
그 여름날의 절망과는 또 다른 빛깔의, 제 삶이 어느 순간 전복되어 버린 듯한 혼란스러움이, 남자를 따라 나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흰 봉투를 무연히 바라보며 앉아 있도록 어깨를 내리눌렀다.
스피커에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나의 잔혹한 연인. 주현과 전등사에 갔던 날 들은 노래였다.
어느 핸가의 초파일이었다. 절에 가서 밥 먹고 오자. 오늘은 아무 절에나 가도 밥을 주니까. 점심을 세 번이라도 먹을 수 있어. 어디로 가? 강화도로 가자. 바다도 보고 절밥도 먹고 소금창고가 있는 염전도 보러 가자. 주현이 씩씩하게 외쳤다. 강화도. 좋아. 전등사 가서 밥 먹고 카페리 타고 석모도 들어가서 염전도 구경하자고. 즉흥적으로 출발한 게 열 시가 넘어서였다. 전등사 아래의 주차장은 만원이었고 차선 하나를 빼곡히 차지한 차량들 사이에 가까스로 차를 세우고 나니 한 시가 가까웠다.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은 세일할 때의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처럼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주현이 고개를 저었다. 절에 와서까지 줄 서고 싶지 않아. 왼쪽으로 접어드는 산길로 방향을 돌렸다.
새로 난 이파리들은 아직 연두였고 지난해의 마른풀 사이로 솟아난 풀잎들은 여렸다. 길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자리를 잣고 세 번의 점심 대신 보온병에 담아간 커피를 세 잔씩 마셨다. 가까운 곳에서 목청이 작은 새가 울고 있었다.
어디서 점심을 세 번 먹지? 대답 대신 유선의 머리카락에, 볼에, 목에 주현의 입술이 닿았다. 젖은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엉켰다. 재킷을 벗어 마른풀 위에 깔고 주현이 유선을 눕혔다. 전등사에 가야지. 꼭 전등사에 가야만 할까. 오른손으로 그는 유선의 바지를 내렸다. 그래도 전등사에 가려고 왔잖아 . 언젠가 한번 다시 전등사에 오자. 그의 몸이 유선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등이 아파. 나도 무릎이 아파. 유선은 웃었다. 엉덩이에 모래가 박혔어. 내 팔꿈치에도 모래가 박혔어. 유선이 다시 웃었다. 그의 몸이 흔들렸다. 누가 보겠어. 상관없어. 그가 몸을 움직이자 경사진 비탈 아래쪽으로 몸이 쏠렸다. 고요했고 작은 이파리들 사이로 봄빛이 눈을 찔렀다. 어느 순간 등에 박히는 모래도. 자꾸만 비탈 아래로 미끄러지던 엉덩이도, 눈을 찌르던 햇살도 아득히 멀어져갔다. 몸을 빠르게 움직이며 그는 속삭였다. 넌 모르지? 뭘? 내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그때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자의 눈빛이었다. 햇살이 꺾일 때까지, 뼛속으로 스미는 봄바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숲 속에 누워 있었다.
초파일이 돌아오면 가지 못했던 전등사와 등에 박히던 돌, 경사진 비탈에 자꾸만 미끄러지던 엉덩이, 잔가지 사이로 눈을 찌르던 봄 햇살과, 넌 모르지? 간절히 묻던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 후로 전등사는 한번도 가보질 못했다. 그날을 기억할 땐, 우리가 전등사에 갔던 날, 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전등사에 갔던 날. 전등사를 보지 못했던, 전등사에 갔던 날.
돌아오는 도로는 주차장이었다. 길이 그렇게 막힐 줄 알았으면 강화도에서 자고 돌아왔을 것이다. 봉천동까지 네 시간 반이 걸렸다. 주현의 차 속엔 두 장의 시디뿐이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카스타 디바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을 번갈아 네 시간 반 동안 들었었다. 노래를 다 외었어. 차량이 꼬리를 문 도로에서 하염없이 서 있을 때 주현은 유선의 볼을 두 손으로 꼬집으며 말했었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사랑을 주지 않는 나의 냉혹한 연인, 유선이여.
그때의 블러디는 서로의 손목을 날카로운 면도칼로 긋고 너의 동맥 속에 내 피를 흘려 넣고 싶었던, 혀를 깨물어 흘러나오는 너의 피를 삼키고 싶던 블러디였어. 델 만큼 뜨거웠던 39도의 블러디였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심장 자체를 원했던 블러디였지.
병원에서 마지막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로 얼룩졌던 그 얼굴. 차갑게 식어버리긴 했지만, 손목을 그어도 더 이상 피를 흘려 넣을 수 없었지만, 그의 멈추어버린 심장 속에 내 뜨거운 피를 전부라도 흘려 넣어주고 싶은 블러디 밸런타인이었다. 지금은·····.
유선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 위로 떠오르는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유리창 위의 입술이 움직이며 그렇게 중얼거려 본다. 집의 오래된 시디를 모아둔 곳에 그 앨범도 있을 것이다. 재킷 그림은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는 모서리가 부드럽게 닳아가는 흰 봉투를 호주머니에 넣고 그것이 구겨질 만큼 꼭 쥔 채, 언젠가 드링크 병을 쥐고 있었던 그날처럼, 유선은 삶이 여전히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늦었는데 다행히 병원은 진료 시간을 넘기고도 문을 열어놓았다. 접수를 마치고 기다리는 환자가 많았다.
“좀 어떻습니까?”
“그냥 여전히.”
“그래요?”
의사는 피로한 얼굴로 유선을 쳐다본다. 그가 실망스러워하는 것 같아 유선은 얼른 덧붙였다.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요.”
가려움증이 사라진 건 아니다. 잠이 질겨질 뿐이다. 그저 끈적거리고 질긴 잠이 백혈구처럼 가려움을 감싸고 녹이고 삼켜버린다. 약이 주는 잠은 폭염 속 한낮의 아스팔트처럼 뜨겁고 끈적거린다. 가려움뿐만이 아니라 유선의 모든 감각을 망가뜨려주었다. 미쳐버릴 것 같은 불면도, 불면이 새끼 치는 깨진 유리조각 같은 감정의 파편들도 고요히 덮어주었다.
“가려움에 너무 관심을 주지 마세요. 병은 대로 응석받이 같거든요. 골똘히 생각해 주면 없던 가려움도 스멀스멀 생겨납니다. 특별한 원인 없이 생겨난 알러지는 어느 날 씻은 듯이 사라지기도 하죠. 이유선 씨도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스트레스가 심한 정신적 억압을 가져왔는지도 몰라요. 과도한 스트레스는 면역기능을 떨어뜨리고 내분비 기관을 교란시켜 호르몬 분비 장애를 초래하기도 하거든요. 그게 몸의 약한 쪽으로 표현되는 겁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원인도, 증상도 너무나 다양하죠. 눈의 실핏줄이 터져 실명하는 사람도 있고 몸의 한쪽에 일시적인 마비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 데 비하면, 가려움은 좀 낫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려움은 낫다고? 유선은 표정 없는 얼굴로 의사의 입을 바라보았다.
전, 얼마 전에 남편을 사고로 잃었어요. 그와 이년을 연애했고 칠 년을 같이 살았어요. 그런데도 처음엔 그가 죽음 쪽으로 핸들을 꺾어버렸는지 아니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무에 부딪혔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었어요. 지금은 심한 안개가 낀 여름밤에 그 사람을 그곳까지 불러낸 사람이 누군지를 알 수 없게 되었고요. 그 사람의 일기가 정말 자신의 검열은 거친 것인지. 제 자신의 열정의 윤리만을 고집하며 그 일기를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어둔 창밖에선 안 돼, 고개를 젓고 있는지 그것도 알 수 없어요.
유선은 누군가에게 이 속을 꼭 한 번은 열어 보이고 싶다. 사람 없는 갈대숲을 맨발로 달려가 갈라진 벌판의 갈대 뿌리 틈으로, 나는요,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그러나 지워버린다.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라는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가려움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죠?”
“그렇지요?”
유선은 조금 웃었다. 그 말은 위로가 되었다. 그럴 것이다. 가려움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선의 몸은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가려움으로 바꾸어버렸을 것이다.
유선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사는 이제 더 이상 가려움을 하소연하는 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고, 유선도 그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열 시간 이 상 누군가가 찌푸린 얼굴로 호소하는 고통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면. 히포크라테스선서 따위를 하지 않은 보통 인간은 미쳐버릴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왼쪽에 있는 발레 학원의 출입문이 활짝 열리고 분홍색 튀튀를 입은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나왔다. 아직 소녀가 되지 못한 계집아이들은 아랫배가 볼록하게 나와 있었고 가슴은 젖살이 포동포동했다. 미진 또래였다.
봄꽃 잎을 한 움큼 따다가 흩뿌린 듯 눈이 부시다. 유선은 달려 나오는 아이들과 부딪히지 않게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기라도 한 듯 기다리던 엄마들이 팔을 벌려 아이들을 안았다. 어둑하던 로비가 무대 위처럼 눈부시게 어지럽다. 미진은 차가운 김치찌개와 미지근한 밥을 먹었을까. 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문밖의 어둠 속으로 달려 나갔다. 마지막 꽃잎마저 팔랑 사라져버리자 유선은 비로소 낮게 한숨을 쉬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을 내는구나. 들리지 않는 탄성이 숨어 있었구나.
난 몰랐어.
줄지어 서 있는 서가 사이로 가을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지난여름 들어왔을 때 햇살은 짧게 자른 소년의 머리처럼 창 아래서 깡동했는데. 그의 책들이 꽂혀 있는 칸 앞에 가서 그의 첫 번째 창작집을 뽑아 들었다. 처음 만들어진 그 책을 들고 집에 들어왔던 날의 그를 기억한다. 문을 열어주었을 대 새 신발을 잃은 소년처럼 울 듯한 표정으로 현관에 서 있던 그. 자신의 서평이 실린 신문을 읽고 또 읽었던 그. 나란히 꽂혀 잇는 그의 책들을 하나씩 꺼내 살펴본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잊어갈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잊기 전에.” 창에 비친 턱 선이 완강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유선은 복도로 나와 자판기 앞으로 갔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나왔는데, 그런데 뜨거운 게 마시고 싶은지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하찮은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아이스커피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다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망설이는 건 커피의 온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자잘한 얼음알갱이가 든 차가운 컵을 빼드는 순간, 유선은 뜨거운 커피와 코끝에 번지는 온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드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고 싶어.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혀에 감기는 그런 커리.
유선은 제 속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뜨거움과 차가움이 제각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엉겨 있음을 바라본다. 옆구리가 가려워오기 시작한다. 요즈음은 낮에도 불쑥 가려움이 시작될 때가 있다. 귀 뒤, 젖가슴, 허리, 피부 한 꺼풀 아래의 손닿을 수 없는 곳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외상이라. 바깥에서 온 상처. 너에게서 온 상처. 피 흘리는 상처라면 차라리 빨리 아물 텐데.
M이니까
자리를 비운 미스 오의 모니터 초기 화면은 브레드 피트였다. 앞에 앉은 사람이 누구든 흐트러진 금발 아래로 오만한 나르시시즘으로 가득 한 눈빛을 가차 없이 보내주는 남자의 얼굴. 이틀쯤 깎지 않았을까? 선명한 턱수염을 보자 손바닥에 까슬한 촉감이 만져지는 듯하다. 유선에게 준다고 도넛 두 개를 들고 온 미스 오에게 물어보았다.
“왜 브래드 피트야? 쟤 어디가 좋아?”
그녀는 뭘 당연한 걸 물어?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브래드 피트니까.”
듣고 보니 그건 너무도 당연한 대답 같았다. 유선이 질문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에게 일 것이다. 그 여자의 어디가 좋은데? 물어보면 그도 그렇게 대답할까?
M이니까.
유선은 빈속에 약 한 봉지를 털어 넣는다. 물을 마셔도 시큼한 뒷맛은 가시지 않는다. 도넛 한 귀퉁이를 꼬집어 입에 넣어 본다. 빵 조각은 볼이 아프도록 달다.
M이니까.
M을 향한 자신의 감정은 무엇일까?
질투? 누구를 향한 질투? 한 번도 보지 못한, 앞으로도 보지 못할 사람에 대한 질투? 그래서 영원할 것 같은 질투?
유선은 눈을 감는다. 질투란 팽팽한 세 개의 힘에서 나온다. 하나가 없어진 지금 질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서는 다만 외상일 뿐이다.
검은 사진 속의 풍경들
빌려온 만화책을 손에 들고 눈으로는 디즈니 비디오를 보고 있던 아이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엄마는 오른쪽 눈으로 운전하면서 왼쪽 눈으로 텔레비전 볼 수 있어?”
“니 엄마가 그런 사이보그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해.”
“사이보그가 뭐야?”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인조인간. 사람처럼 움직이며 생각도 하지만 사람은 아냐. 체온도 감정도 없어.”
“터미네이터 아저씨? 눈물이 뭔지 모르는?”
“그래.”
“엄마는 사이보그야.”
가벼운 목소린데 심상치가 않다. 아이는 시침을 떼고 화면을 보고 있다.
“왜?”
“엄만 왜 한번도 울지 않아?”
까만 눈동자가 준엄하게 묻는다. 아빠의 부재를 슬퍼하지 않는 엄마. 냉혹한 사이보그.
딸에겐 완벽했던 아빠. 칠 년 동안 연인이 되어주었던 아빠. 한 점의 실체도 없는 환영이란 결점이 없어서 위험한 것이다. 누추하고 비굴라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할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아이에게 아빠는 언제까지나 완벽한 남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 공간에서 숨 쉬고 밥을 먹고 타인에게 야비해 질 수 있으며 사소한 일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치사한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제 속에 있는 것들과 같은 문제와 결함을 가진 인간임을 알아가게 될 기회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대답이 되지 못할 것들이 유선의 가슴속에 깨진 유리 조각이 든 자루처럼 담겨 있다. 딸에게 영원히 완벽한 아빠로 존재하려면 그의 파일들은 유선의 가슴속에만 묻혀진 채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퇴근길에 도서관 앞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찾았다. 그의 서랍 속에 있던 필름이었다. 잘못 나온 것도 전부 뽑아주세요. 부탁하고 맡긴 거였는데 몇 장 나오지 않은 사진은 그나마 온통 깜깜했다.
“뭐가 잘못 된 거 아니에요?”
“찍긴 찍었어요. 필름의 끝부분을 보면 아니까요. 그러잖아도 인화를 할까 말까 하다 전부 해달라고 부탁을 하신 게 생각나서.”
아무것도 판독할 수 없는 필름과 온통 시커먼 몇 장의 사진을 받아들였다. 무엇을 찍었던 것일까. 어둠 속에서 제 얼굴을 찍었을까. 그러고 보니 주현이 유선에게 주었던 것들은 이에 그다지 남아 있질 않다. 많은 것들이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사진 속에서라도. 자신의 내면을 지나치게 들여다보던 그의 모습 하나쯤을 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말라버린 채 뒹굴던 플러스펜과 날이 특이하게 길었던 일제 톰보우 가위 하나. 날카롭게 깎인 2B연필 두 다루, 이십칠만 원이 들어 있던 저금통장과 함께 서랍 속에 들어 있던 필름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밤을 새운 다음날 오후면 호소하던 어깨 통증이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조울증처럼 자신의 글에 대해 가졌던 지나친 오만과 유선의 위로를 필요로 했던 침울한 콤플렉스. 술에 취한 날이면 늘 한 구절만 계속 반복해서 불러대던 노래의 한 소절. 책상의 오른편 벽에 써 붙여놓았던 소설의 제복들, 엎드려서 발톱을 깎느라 열중해 있던 수그린 이마, 슈퍼에서 돌아오다 보았던 퇴근하던 그의 뒷모습, 덥지도 않은데 늦은 저녁을 먹으며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오던 얼굴, 모니터를 노려보다 어느 순간 짧은 한숨을 쉬던 굳은 옆얼굴, 마지막으로 보았던 피투성이의 낯선 얼굴,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가슴에 안겨주었던 백합꽃 한 다발까지. 너무도 익숙한 그의 얼굴 대신, 그 모든 것들이 검은 인화지 위에 판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엉기어 있었다.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보그처럼 유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 속의 어둠을 오래 응시했다.
누가 알 수 있을까요.
투명 테이프로 마지막 손질을 끝난 책을 테이블 가운데 놓인 책 더미 위에 올려놓는다. 눈에 뜨이게 손상된 부분을 손질하긴 했지만 책들은 전체적으로 제 나이들만큼 늙어 있다. 반듯하게 손질된 부분은 그래서 금방 주름살 제거 수술을 받은 초로의 여인처럼 어색해 보인다. 훼손된 책을 쌓아놓은 더미에서 한 권을 집어와 살펴보고 있을 대 무음으로 해놓은 핸드폰의 형광빛이 깜박였다.
하영이 엄마였다. 수업을 시작한 첫날 외에는 제대로 얘기를 한 적이 없었지만 수업료는 하루도 늦지 않고 유선의 통장으로 입금시켜 주었다.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하느라 집에 없었지만 하나 있는 딸 아니 공부는 전화로라도 늘 신경을 썼다.
“선생님, 저 하영이 엄마예요.”
지난 시간 수업을 안 한 게 생각나 유선은 약간 더듬었다.
“아, 안녕하세요.”
“하영이 수업을 좀 쉬었으면 하고요. 제가 워낙 바빠서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고 있는데 어제 얘 노트를 한번 들춰 봤더니.”
하영이 엄마는 한숨을 내쉰다. 유선은 작문 노트와 스케줄 노트 두 권을 사용한다. 아마 스케줄에 적힌 날짜보다 네 번쯤은 뒤늦은 작문 노트를 들춰 보았을 것이다.
“선생님, 잘 가르쳐주시지만, 저로선 아이를 컨트롤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필요해요. 선생님 잘못하신 건 없어요. 얘를 내가 알아요. 조금만 틈을 보이면 선생님 머리 위에 올라앉아 있을 애죠.”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아직 수업이 두 번 남았는데.”
“괜찮아요. 그냥 지금 그만두죠.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어머니.”
중학생 아이 하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잘리다니. 그나저나 어디서 과외 자리 하나를 다시 구하나. 유선은 막막하다. 아파트 부금은 넣은 것보다 앞으로 부어나가야 할 게 더 많이 남았다. 퇴직금도 없는 도서관 임시직으론 두 모녀가 가련한 모습으로도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살고 있는 소형 아파트 단지엔 전단을 붙여봐야 작문 과외까지 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고, 전직 학원 강사도 대학생도 아닌 자신에게 영어나 수학을 맡길 사람도 없을 것이다.
통화를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 차두현의 전화가 왔다. 오래된 시계에서 보자는 그의 말을 유선을 거절하지 못한다.
“언니.”
미스 오가 작게 불렀다. 쳐다보았더니 유선의 손에 들린 책에 눈짓을 한다. 유선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수선용의 테이프를 책의 펼치는 부분에 붙이고 있었다. 그것도 세 겹, 네 겹.
“그날 밤 일은 사고였을까요?”
무슨 말인지. 하는 표정을 읽은 그는 유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무렵, 김 선생에게 무슨 특별한 고민 같은 건 없었나요?”
“고민이라뇨?”
유선은 거짓말을 들킨 것처럼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이를테면 글이 안 써진다든가 혹 몸이 불편한 곳이라도. 프랑스의 어느 작가는 그렇게 말했더군요. 밤이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살의 충동을 이기기 위해 글을 쓴다고요. 존재와 창작의 고뇌 때문에 그는 안개 낀 새벽의 강가로 달려간 게 아닐까요. 길모퉁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무에 부딪힌 게 아니라 그가 그 나무쪽으로 달려간 건 아닐까요?”
남자는 유선 쪽으로 더 몸을 기울인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라면 그가 그 시각에 혼자 그 길을 달려갈 아무런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유선은 간단히 대답한다.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남자의 눈빛을 간절하다. 그는 자신이 기획한 주현의 책에 새로운 드라마를 하나 더 첨가하고 싶어진 모양이다. 유선은 그의 시선을 피한다. 그의 눈빛과 마주친다면 어느 순간 제 속에 있는 모든 걸 쏟아내 버릴 것만 같다. 그가 선택한 열정의 윤리에 대해. 일천 번이라도 살고 싶었던 그의 생의 마지막 날들의 행복에 대해.
자살이라니. 천만에. 할 수만 있다면 일천 번을 살아보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차라리 자살이었다면 내 머릿속이 이토록 복잡하진 않겠어.
“차 선생님은, 인생을 일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던 순간이 없었나요?”
“네?”
머릿속이 가려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천 개의 깃털을 가지고 두피를 간질여대기 시작했다. 유선은 프로그래밍된 로봇처럼 거의 자동적으로 머리로 올라가려는 손을 무릎에 붙이고 주먹을 아프도록 꼭 쥐었다.
“토요일 오후에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세 시쯤?”
여자는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 유선이 들어오면서 도배도 새로 했고 베란다에는 앵글로 짜 맞춘 수납장에 문까지 해 달았었다. 표시도 안 나게 비용이 꽤 들었다. 일 년도 못 살고 집을 내놓으리라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미안해하며 고개만 요리조리 돌려서 구경만 하던 여자는 결국 방문이랑 붙박이장까지 죄다 열어 보고야 토요일 오후에 남편과 같이 둘러봐야 하겠지만 계약을 하겠노라고. 다른 사람한텐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철 지난 샌들을 발에 꿰며 여자는 정색을 하고 유선을 쳐다보며 물었다.
“근데, 이렇게 손봐놓고 왜 아파트 내놓으신 거예요?”
뭐라 대답하기가 어려워 사정이 있어서요, 얼버무리는데 미진이 불렀다.
“엄마, 가려워. 여기.”
가렵다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하여 팔을 살펴보니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안쪽의 여린 살에 좁쌀만 한 붉은 것들이 온통 오돌토돌하니 솟아 있었다. 추석 전에 산소를 둘러보러 가면서 데리고 갔을 때, 아빠 준다며 노랗고 흰 들꽃들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더니 풀독이 오는 모양이었다.
“아무 풀이나 만지면 안 된다고 그랬지?”
“아무 풀이나 만지면 엄마처럼 이렇게 돼. 배에 이렇게 손톱자국이 생기도록 가려우면 좋겠어?”
연고를 팔에 바르는 걸 쳐다보며 미진이 물었다.
“엄마는 무슨 풀을 만졌는데?”
배란통
비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바람이 불었다. 검은 구름이 겹겹이 모여들더니 저녁이 온 듯 갑자기 어두워졌다. 요즘이 겨울보다 썰렁해. 난방도 안 해주고. 얇은 내의라도 입고 나와야겠어. 언니 나 추워. 미스 오가 옆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커피를 마시다가 먼저 들어가 버렸다. 종이컵의 따끈함과 입술에 닿는 커피의 온기가 좋아 유선을 햝듯이 조금씩 커피를 마시며 통 유리창 바깥의 숲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는 사이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유선은 처음엔 하얗게, 곧 주황색으로 변하는 가로등을 보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섯 시 사십구 분. 가로등은 다섯 시 사십구 분에 켜지는구나.
바람 끝에 마른번개가 쳤다. 쏴아. 소리부터 먼저 대기를 채우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장대비였다.
아직은 잎이 무성한 숲은 거대한 여자의 음부 같다. 순식간에 숲의 한가운데로 내리꽂히는 번개는 여자의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기운 센 사내를 떠오르게 한다. 절박하고 집요하다. 천둥소리는 하늘이 아니라 숲이 내지르는 신음 소리 같다. 내리꽂히는 번개와 젖은 숲이 오래 그리워했던 연인처럼 서로의 품속으로 겹겹이 허물어진다. 유선은 홀린 듯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은 눈보다 먼저 마음의 눈으로 들어오는 걸까. 그가 가고 두 달이 지났다. 유선의 몸은 남자를 안다. 남자의 몸만이 줄 수 있는 아득한 쾌락을 알고 있다. 비 오는 저녁의 풍경 속에서 유선은 그에게 안기고 싶은, 제 마음의 풍경을 읽는다.
잠든 물새처럼 그가 M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를 안고 싶다. 배와 배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말없이 그의 움직임을 느끼고 싶다. 미친 파도처럼 밀려오는 쾌락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자신을 쩌개버릴 쾌감에 몸을 맡기고 저 숲처럼 온통 젖은 채 비명을 지르고 싶다. 손가락과 손가락을 하나씩 엇갈리며 이마에 떨어지는 그의 땀방울을 핥으며 누군가 목을 조르듯 숨을 쉴 수 없는 그 순간을 느끼고 싶다. 사랑이 의도적인 열정이 아니듯. 환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구나.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을 그가 내 젖가슴에 겨눈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를 안고 싶다.
안아줘.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듯 유선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왼쪽 아랫배가 저릿하게 땅기면서 허벅지 안쪽까지 뻐근하게 아파왔다. 습기가 최음제처럼 피부로 스며들었다. 배꼽 아래로 짚불이 타듯 열기가 번졌다. 배란통이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피부과에서 받은 처방전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내렸을 때, 다른 날보다 조금 일렀는지 발레 수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선은 훤하게 불이 켜진 발레 스튜디오의 창가로 다가갔다. 방음이 잘 된 유리 너머로 음악 소리는 아주 가냘프게 흘러나왔다. 집단으로 마임을 하듯 나비처럼 고요히 흔들리는 소녀들. 밤마다 식어 있는 찌개와 미지근한 밥만을 근근이 먹으려 살아가야 할 미진. 부실한 보살핌 속에서 움파처럼 연둣빛으로 자라갈 미진. 딸아이는 결코 저런 옷을 입어보지 못한 채 음지식물처럼 웃자라 버릴 것이다. 도무지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어서 더욱 매혹적으로 나풀거리는 저 반투명의 날개옷. 분홍빛 튀튀는 생명을 가진 존재인 양 잔잔히 떨리며 흔들리고 있다.
유선은 오래도록 스튜디오의 유리창 가에 서 있다.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입고 다닌 얇은 면 코트 주머니 속에는 이제 보풀이 많이 인 봉투가 젖은 손안에 구겨진 채 쥐어져 있다.
대답해 봐. 당신.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며 묻고 대답해야 할 게 아직 남아 있잖아.
당신이 내 인생 속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 들어오며 보내기 시작했던 편지들. 발가벗은 영혼의 사진이 찍혀 있는 당신 마지막 날들의 기록. 그리고 당신의 또 다른 현실이었던 소설의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 당신이 한마디 얘기도 없이 떠나버린 것처럼 나도 그것들을 당신의 동의 없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 보일 수 있어. 그래도 되는 거야? 어느 쪽이 더 가혹한 거라고 생각해? 당신? 나? 밤마다 약을 삼키면 뜨거운 용암처럼 몰려오는 잠 속으로라도 와줘. 대답해 줘. 암호를 가르쳐줘. 검열 받지 않은 진짜 일기를 보여줘.
그런다고 낡고 손때 묻은, 나만큼이나 누추한 책들을 수선하며 하루하루를 견뎌갈 수 있을 거 같아. 오후 두 시의 열람실처럼 깨뜨리고 싶은 고요함 속에 잠겨서. 이틀 치씩 돈으로 살 수 있는 달콤한 잠 속에서.
활짝 팔을 치켜들자 타이츠에 감싸인 통통한 허벅지들이 드러난다. 한숨쉬듯 팔을 늘어뜨리며 무릎을 굽히는 마지막 인사. 발레 레슨은 끝났다.
당신, 저 정도의 작별 의식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가을에 핀 봄꽃. 유선의 옆을 지나던 계집아이가 팔을 들어올려 원을 만들고는 발끝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달려 나오던 아이가 갑자기 멈추려다 유선의 옆구리에 부딪힌다. 말랑말랑하고 따스한 맨살. 어마, 아이는 놀란 백조처럼 발뒤꿈치를 반짝 든다. 유선의 핸드백이 바닥에 떨어지며 쏟아졌다. 아이는 놀란 표정 그대로 퇴장해야 하는 발레리나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발끝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린다. 무릎을 굽히지 않는 그 재빠른 걸음을 유선의 눈이 잠시 좇는다.
빠른 물살에 꽃잎이 쓸려가듯, 분홍색 튀튀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후에야 유선은 몸을 굽혀 백을 집었다. 립스틱과 볼펜, 굴러간 동전 두어 개를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집어주었다. 동그란 거울엔 길게, 단 하나의 금이 가 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때때로 자신의 전화번호가 낯설 듯, 깨어진 거울속의 얼굴이 유선에게 낯설다.
약국에 들러 약을 받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땐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도서관 입구에 공중전화 부스 옆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은 사내아이 몇이 둘러서 있다. 경사진 언덕에서 늘 보드를 타는 애들이었다.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기운이 손바닥으로 힘껏 떠밀기라도 한 듯 가슴팍에 느껴져 유선은 코트 깃을 여몄다.
“저기 저, 추하게 생긴 애 있지, 아주 추하게 생긴 애.”
“쟤? 절름발이.”
정말 기분 나쁘다는 듯 그 애는 침을 찍 뱉었다.
“한번 패주자.”
도서관의 경사진 길을 한 사내아이가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보드를 타야 하는데 그 애가 걸어 내려오는 시간을 기다리기가 짜증이 난 것이다.
“볼 때마다 짜증나. 저렇게 생겼으면 나다니질 말아야지.”
사내애들에게서 나오는 불길한 힘의 파장이 유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연약한 것은 추한 것. 이 아이들은 유선이 구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망가진 책을 수선하거나 분실된 도서 카드를 새로 적어서 끼워 넣는 따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추한 여자 있지. 아주 추하게 생긴 여자.
유선은 어느 순간 청결하게 빛나는 스테인리스 쓰레기통에 약봉지를 집어넣어 버렸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의사의 말이 맞는다면 유선의 가려움은 이 약으로 낫지 않을 것이다. 핸드백을 뒤져 차두현의 명함을 꺼내 버튼을 꾹꾹 눌렀다.
“저, 이유선입니다.”
“아.”
그녀의 전화가 뜻밖이라는 듯 그는 짧게 내뱉었다.
“전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얘기하세요. 올림픽대로에 있어요. 도로가 막혀서 거의 서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어두워지는 거리에 네온이 풀어진 조화 다발처럼 어지럽다.
어느새 절름발이를 패준 사내애들은 경사진 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며 보드 위에서 물구나무를 선다. 젊은 혈기가 그들의 목구멍에서 비명이 되어 터져 나온다. 아직 뜨거운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은 맹인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갔다. 삶의 어떤 단계에서는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연약해서 추한 것들을 압축이게 담긴 쓰레기처럼 제거해 줄 것이다.
유리문 옆에서 반짝이고 있는, 자신의 일용할 잠을 삼킨 쓰레기통을 노려보며 유선은 말했다.
“차 선생님, 그 사람이 남긴 것들 말이에요.”
그는 유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파일을 열어봤어요.
차 선생님 말처럼 일기가 있더군요. 아주 재미있는, 읽는 사람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일기. 아니 그건 새로운 형식의 사소설일 수도 있어요. 그가 없으니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이건 어떨까요.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픽션이 섞였다고 해버릴까요. 그는 아무것도 항변할 수 없는 곳에 있으니까.
전화기 저편에서 차두현은 유선의 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뭘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게 뭐지? 진실? 모독? 복수? 모독이라면 그것은 그의? 아니야. 모독은 나의 것. 그의 격정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복수? 상처를 받을 수도 모독을 당할 수도 치욕을 갚아줄 수도 없는 곳으로 그는 가벼렸는데. 뭘 위해서? 다섯 장의 수표?
“차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지난번에 그런 말씀을 하셨죠. 그의 죽음은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제가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 확실한 건 이제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어떤 예감을 가졌던 건 아닌가 싶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그의 파일을 열어봤어요.”
널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은 내 속에서, 언제까지나, 마지막 보여주었던 그 모습처럼,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지나고 보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고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 뭘 못 견디겠어. 오늘 밤 돌아가 당신 파일을 열어 하나하나 딜리트 키를 누르고 가려움도 딜리트 키를 눌러버리고. 그렇게 견뎌볼까 봐. 차갑긴 하겠지만 마지막 보았던 당신의 얼굴을 껴안고 말이야. 당신은 언제까지 나를 물어뜯으며, 나의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피투성이의 연인, 잔혹한 연인. 당신이 특별히 가혹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 해.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 잔혹한 존재이니까.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당신, 전등사 갔던 날 기억나? 사랑도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전등사를 보지 못한 그날을 전등사 갔던 날, 로 이름 지었듯 뭔가가 빠져 있는 그대로 그냥 사랑이라고 불러주는 거지.
차두현은 대답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어요. 누군가가 열어보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요. 이미 발표된 글들 외엔, 일기도, 쓰고 있던 작품도 없었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에게 유선은 물어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