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항(大津港), 밤바다에서
확실히 그랬다. 속초를 떠나 간성(杆城)을 지나면서도, 내 마음속에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 같은 촉촉한 심사는 흐린 날씨와 어우러져 이상스러울 정도의 비장감마저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늦장마라고 하기엔 절기상으로 맞지 않는 게릴라성 폭우가 여전히 남부지방을 괴롭히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내일 화진포에서 과연 바닷물에 몸을 담글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어 어스름한 동해바다는 거진항의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는 포구의 불빛을 하얀 파도의 포말로 감싸고 있다. 한동안 떠들던 두 아이도 점점 조용해지고 차는 화진포가 보이는 해안도로를 웅웅거리며 헤쳐 나가고 있다.
저 먼 바다. 검은 분노를 머금고 있는 바다. 뭍에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다가 어느 한순간 회복할 수 없는 절망과 좌절을 안겨주는 외경스런 비통의 바다. 풍성한 어획물을 주면서도, 한 세대(世代)를 매정히 후려치고 삼켜버리는 무정한 바다. 그러나 이 구불거리는 해안선에 점점이 박힌 인간 군상들에게, 언제나 아버지 가슴 같은 포옹으로 두 팔을 벌리고 천만년을 그렇게 미소 짓고 있는 따뜻한 신성을 품은 인간의 바다….
내 가슴에 내리는 이슬비를 녹여내고 있는 바다의 광막함에 침묵하면서, 인근 숙소를 둘러보았다. 날씨관계로 방 얻기가 수월할 것 같았던 내 판단은 빗나가고 말았다. 깨끗하고 넓은 곳은 이미 동이나 있었고,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허술한 민박집이 한두 개 있을 뿐이다. 그래서 화진포에서 통일전망대 쪽으로 더 올라 가보기로 하였다. 어차피 내일 오전에는 아이들의 안보교육을 위하여 통일전망대를 들러볼 작정이었다.
대진항은 초행길인데도 꽤 낯익어 보이는 곳이었다. 마침 해변이 맞닿아 있는 곳에 수월하게 민박을 정하고 여장을 풀었다. 주인은 칠십이 다되어 보이는 할머니였고, 손자가 분명한 여섯 살 가량의 코흘리개 꼬마가 보였다. 민박집을 가만히 살펴보니 살림집이었다. 방을 여러 개 만들어 민박 전업에 종사하는 집이 아니라, 성수기에 간혹 손님을 맞는 가정집으로 보였다. 문간방에 짐을 풀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차츰 말문을 여는 할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집의 가장인 아들과 며느리는 거진항에서 장사를 하는데 새벽에야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그때 어느새 가까워 졌는지 코흘리개 꼬마가 내 아들 녀석의 듬직한 등에 올라타고서는, 업어달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다. 천진난만하면서도 왠지 사람을 그리워하는 듯한 꼬마의 행동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내도 꼬마의 낯가리지 않는 당돌한 모습에 귀여움을 느꼈는지 과자를 손에 쥐어 주면서 깔깔거린다. 할머니에게 저녁식사 겸 술 한잔할 곳을 문의해보니, 가까운 대진포구의 횟집을 소개해 주었다. 아내가 준비하는 동안 꼬마를 들쳐 업은 아들 녀석과 함께 집 앞에 있는 바다로 나갔다.
어두워진 바다에는 하얀 파도가 수염고래의 이빨 같은 형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검은 수평선에는 점점이 오징어배의 집어등(集漁燈)이 내 지나온 반생의 어느 순간을 들춰내려는 듯이, 반딧불 같은 정밀 속의 명멸을 보이면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포구의 '항구횟집'에서 푸짐한 회와 소주를 시켜놓고는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 마음껏 먹어보라고 권하면서, 뿌듯한 가장의 자부심을 느꼈다. 객지에서 가족끼리 오붓하게 주석을 가지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새삼스럽게 가족의 소중함과 뜨거운 혈연의 정이 가슴 가득히 젖어왔다. 소주 한 병을 비우니 얼큰한 심사에 주흥도 일어났다. 아내의 눈가도 편안히 풀어져 너그러운 마음으로 정감어린 농담을 주고받았다. 소주 두 병을 비우고는 매운탕을 시켰다. 아이들은 싱싱한 회 맛에 곧 길들여졌는지 부지런히 입을 우물거리고 있다.
매운탕을 들고 온 횟집의 중년여인은 깔끔한 외모였지만, 눈가에는 어딘지 모르게 고단한 삶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아까부터 건너편 좌석에서 왁자지껄하며 술잔을 비우고 있는, 뱃사람으로 보이는 네 명의 남자들로부터의 끈질긴 술잔 권유를 은근한 핑계로 합석하지 않던 여인이었다. 버너에 매운탕을 올리면서 그 여인은 내 옆자리에 풀썩 앉고는 나직이 뇌까렸다.
"흥! 저 사람들 앞으로 이 집에 안 와도 무서울 게 없어요. 포구술집에 있다고 매너 없이 집적거리는 남자들…. 아주 신물이 나네요. 아! 이젠 속초 같은 도시로 나가고 싶어요…."
여인은 계속 얘기하려다가 내 아내의 시선을 의식한 듯 말을 멈추었다. 여인의 눈가에 깊게 드리워진 우수와 번민을 읽으면서, 창 밖의 검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오징어 배의 불빛은 한층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고, 바다는 웅웅거리는 신음을 계속 토하고 있었다. 여인이 일어선 후 술잔을 비우면서 얼마 전 친구에게서 전해들은 서해안 태안반도 어느 포구의 '작부 탈출기'가 떠올랐다.
항구의 한 대폿집에서 주인 몰래 도주한 스물다섯 살 여인의 이야기…. 그녀는 언제나 주점 앞 평상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는 사연 많은 작부였다지…. 연거푸 두 잔을 들이키고는 아내가 싸주는 상추를 씹으며 다시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온갖 희망과 슬픔을 삼켜버린 듯한 태초의 바다가 포효하며 그곳에 있었다.
횟집의 그 여인이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비닐봉지에 싸준 오징어회를 가지고 민박집에 돌아오니,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와 아들 녀석의 가슴에 안긴다. 집 마당에 있는 평상에 안주를 풀어놓고 소주를 따랐다. 꼬마와 할머니까지 합석한 뒷풀이 술잔의 정취에 어두운 밤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민박집 할머니는 의외로 잔을 연거푸 비웠다.
포구의 풍상에 이력이 난 듯한 주름진 얼굴에는 지친 삶의 자욱이 깊게 패여 있었지만, 얼핏 느껴지는 구성진 강원도 사투리에는 세상을 관조하는 초탈한 달관도 엿보여 푸근한 주석을 무르익게 하고 있었다. 꼬마는 연신 아들 녀석의 무릎을 오가며 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꼬마의 말이 내 가슴을 묵직하게 쳐왔다.
"아빠는 아주 전에… 바다에 나가서 아직도 안 오고 있어…. 엄마는 아빠 찾으러 나가서 안 오고 있고…. 이제는 기다리지도 않아…."
할머니가 취기에 붉으레한 얼굴로 떼쓰는 꼬마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혼자서 나온 것은 얼마 뒤였다. 할머니는 문간방에 있는 우리의 짐을 안방으로 옮겨 놓고 그 곳에서 자라는 말을 하고는 다시 들어갔다.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꼬마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걸려있는 안방에서 잠을 청하다가 모두들 잠든 방을 빠져 나왔다. 담배를 피워 물고 바람 부는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아! 저 바다에서 포효하는 파도는 내 가슴에 줄곧 내리고 있는 이슬비를 깡그리 걷어가고 있구나. 이제 위선과 오만, 허영으로 점철된 내 중년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검은 바다에 휘몰아치는 저 성난 파도야말로, 나를 일깨우기 위해 채찍질하는 끊임없는 갈(喝)이다. 깨어나자! 안락스런 꿀통으로부터…. 나를 회유하고 달콤하게 하는 인생의 꿀통은 우중충한 회색 옷을 입고서, 내 나약한 심신을 옥죄고 있는 현실 안주(安住)라는 몽혼약이다. 검은 바다, 우르릉거리는 포효의 바다여!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웅혼한 사자후를 일깨워다오.
푸른 담배연기가 바다 쪽으로 흩어지고, 오래된 포구의 절규가 파도소리에 묻어오는 듯 비릿한 바다냄새가 풍겨왔다.
(2002 . 8 . 17)
*연작 기행수필 2
1 [흰꽃] 대진항의 밤바다에 추억! 아름답고 정감어린 생활 수필입니다. 한비님의 수필을 읽고 있으면, 제가 그 속에 함께 있었던 추억을 갖고 나오게 됩니다.. 수필의 대가! 한비님! 화이팅!!!**이 방에 있는 수필 등단작가 수필에도 올려주세요. 이 방은 저도 처음이에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잘 안오게 되요..이 귀한 수필을 나눠 읽어야지요!! <2002.08.22>
2 [김경자] 아! 시인님께서 간성땅을 스치셨다니...저에겐 바다위의 집어등이 별빛보다 더 친숙하지요.~~~미지의 땅에서의 끈끈한 가족의 결속력, 찰나의 만남에서도 절절히 안겨오는 인간애, 시인님껜 그리도 애절한 사연이 있는 민박집이 기다리고 있었군요.~~~안락스런 꿀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쪽, 수필 말미가 후려치네요 감사드립니다. <2002.08.22>
3 [한기홍] 두분 시인님의 과분하신 평에 부끄럽기만 합니다. 우울한 심사가 덧칠된 졸편이 누가 되지나 않았으면 합니다. 두분의 건필을 기원드리며.... <2002.09.18>
<정파>밤바다 구경 실컨 했겠네.
그래도 냄새라도 맡았음. 그것만이라도 띵호와지. 더 이상 뭘 바래!!!
속초를 떠나 간성(杆城).화진포에서 통일전망대. 대진포구에 이르는 동해안 일주기라~~~~
바닷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바다 내음 다 마시구.....
밤바다는 술 속에서 다 처먹구......
술안주 횟감은 어디 넣을 데나 있남?
비가 와서 무척 걱정을 했는데~ 그렇다고 비장한 느낌까지 갖고 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수다!!!
술 먹으면서 내 생각은 안 나데? 쩝쩝---
요즘 같아선 괜히 싱겅질만 곤두선단 말이야----
걸죽한 횟집 얘기
휴가 중이신가요 다녀 오셨나요
며칠째 얼굴 안보이길래 그럴줄 알랐지만 걸죽한 횟집 얘기에서
알았지요
역시 한시인님의 비릿한 바다얘기는 구수하고 멋있네요
인천 바다나 대포항이나 같을텐데 동해안 짓푸른 가슴으로 엮어
가는 얘기 나두 한참 대포항에 다녀 왔네요
모처럼 가족들일랑 가셨으니 잘 쉬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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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웅 님께서 2002년 08월 18일 4시 21분 55초일 남기신 글입니다.
Em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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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숙 선생님! 고향이셨군요
함선생님!
여러모로 송구스럽습니다.
소생의 졸편을 읽어 주신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몇일전 제가 휴가여행으로 간 고성의 대진항이
함선배님의 고향이셨군요.
얼마나 그리워 하실까...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큰 꿈을 품으시고 떠나신 태평양의 고도에서
그래도 인터넷을 통하여 '문즐'에 보내시는 선생님의
체취가 너무도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내내 건강하옵시고... 옥고생산의
건필을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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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홍 님께서 2002년 08월 17일 23시 14분 24초일 남기신 글입니다.
Ema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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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생각에 눈물이
제 어린 시절 놀던 고향바다!
거진항과 대진항 사이의 화진포!
어촌에서 사는 사람들의 회한!
가슴 뭉클해 오는 사연 듣고
가고픈 맘 간절합니다.
<사랑아, 내 사랑아!> 단편소설속의 그 풍광!
내용 삼분의 일이 다 날아갔습니다.
옮기다 실수 했습니다.
다시 써야 하는데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올린 글 읽으면서 아려오는 가슴 내려 놓습니다.
그립고 그리운 고향!
민통선 통일 전망대에 올라가 먼발치에서나마 금강산과 해금강
끝자락이라도 보고 왔음 합니다만....
언젠가 갈 날 있을 것입니다.
한기홍 님이 지나간 그 자리를 꼭 지나 갈 것입니다, 나도.
올려 주신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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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숙 님께서 2002년 08월 17일 18시 13분 3초일 남기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