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쉬는 날이다.(2010. 7.26)
월요일이라 별 할 일도 없던 차에 KNN 방송국에서
6.25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 관한 60분짜리 프로그램을 만든다기에 안내차 동참을 했다.
10시 남지 우리집앞에서 제작팀의 차에 동승하여 고곡에 있는 남곡문화의집(옛 남곡초등학교)에 도착하니
창녕에 거주 하시는 문화유적해설사 성창식 선생님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시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낙곡초등학교가 북한군이나 미군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에 관한 간단한 자료 수집과
인터뷰를 겸한 촬영은 시작되었다.
남곡초등학교에서 올려다 보이는 구진산을 올라 가야 하느냐? 아니냐?
올라갈 길은 어느곳으로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구진산이 험하고 수풀이 우거져서 목요일 마지막날 촬영으로 미루고
이목나루로 이동했다. 저 아래로 들부 나루도 눈에 들어 왔다.
1950년 8월 6일 이목나루로 북한인민군이 도하했다는 그 역사의 아픈 현장에는 4대강 사업의 중장비 소리가 끈이지 안았다.
60년전 8월에도 하염없이 내렸을 뜨거운 태양은 유난히도 달아 올라 있었다.
적군이 도하하여 영산, 밀양 방향으로 진격하기에는 안성마춤이란 생각도 해 보았다.
촬영을 하면서 시남고개를 넘으니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다시 남지로 나와서 점심을 먹고
오후 촬영은 장마 어봉(대야리) 능선, 크로바 고지,
그리고 장마 동정 앞 방앗간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쌓아 놓고 전투를 했다는 증언에서는
전쟁의 참혹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박진나루로 이동하여 박진교 도하시 수중교를 건설했으며
그 수중교를 살아남은 슈미트 부대의 목격에 의하여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도움으로
B29 폭격기로 수중교를 폭파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는 사실도 촬영에 담았다.
새로 건설된 박진다리를 건너 의령 신반을 경유하여 적포교에 도착하여
8월 16일에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적포교를 폭파했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아직 의령,합천쪽과 우리 창녕쪽 강안쪽에는 옛 적포교의 교각이 남아 있어서
이번 촬영에 역사적 자료로는 충분했다.
적포교가 끈어지자, 북한군은 부교를 가설하여 계속 진격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어면 파출소 앞 광활한 모래 벌판 위에 섯다.
손흥태 면장님께서 영화 "포화속으로"의 일부 전투신을 촬영했다고 전해준 그곳에서
전체적인 구도를 잡는 모양인데, 저는 이 분야에서는 문외한이라
그저 주위 사람들의 4대강에 대한 찬반 양론만 묵묵히 듣고 있으려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앗다.
다시,
남곡문화의집에 도착하니 40~50분 정도의 노인분들이 게이트볼을 치다가 그늘에 쉬고 계시기에
전쟁에 관한 즉석 인터뷰를 했는데,
정말 6.25 전쟁이 너무 잔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것은
아지리에 200~300명의 시체를 말과 함께 매장했다는 증언,
전쟁후 미군병사 시신만 3구 정도 수습해 가고 그대로 묻혀 있다는 현실,
핵을 사용했다는 사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북한군은 이동 수동으로 말을 사용했다는 사실,
이 부분에서 카메라 감독님은 북한군은 항일독립운동 당시 팔로군으로 있던 사람들이
해방후 북한 인민군으로 재편성되면서 말이 중요한 이동 수단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덧붙혔다.
그리고 박진, 고곡 주민들은 대부분
도천 송진(그 당시 도천 파출소가 송진에 있었다고 함)을 거쳐,
길곡, 부곡 임해진, 개비리, 밀량 초동을 경유하여 수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으며
일부는 수산에서 배를 타고 김해 생림으로 피난생활을 한 분들도 있었음.
이것이 어제 하루 대충의 일정입니다.
어디 기록으로 남길때도 없고 해서 우선 이곳에 기억속에 잊지 말자고 남겨 봅니다.
아무튼 6.25 전쟁은 우리가 전해들은것보다도 더 잔인했다는 사실입니다.
참, 미군들이 무조건 오늘안으로 구마선을 넘어 가라고 해서 그냥 피난길에 올랐다고 합니다.
여기서 증언하는 구마선은 옛 국도 5호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지금의 4차선 국도 말고요)
오늘은 이이두 문화원장님과 창녕의 문화유적지에 대한 촬영을 합니다.
아픈 역사의 현장 박진에서 광계로부터
목요일에 다시 촬여하면 다시 간단히 올리겠습니다.
추신 : 이번 촬영의 현장이 4대강 사업 장소와 대부분 겹치기에
뉴스 취재차 나온줄로 알고 4대강 사업 추진하는 사람들이 놀라서
박진에서, 적포교에서, 유어파출소 앞에서 따라 붙더군요.
그리고 장마 동정앞에서는 현직 경찰이 차를 가로막고 왜, 4대강 사업 현장을 찍느냐고 묻더군요.
아는 분이라 제 명함을 주고 뉴스와는 상관없다고 말햇지요.
어떤 일이 맞다, 안맞다를 떠나서 이처럼 국론을 분열시키는 자체가, 개인적으로 싫지요.
첫댓글 어제는 쉬는 날 인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수고가 많았습니다.
돌쇠가 성산면장으로 발령만 나지 않았었다면 낙동강돌출부전투의 첫 인민군 도하지점인 이이목나루와 클로바고지, 어봉리능선전투, 영화 '포화속으로'의 촬영현장 등을 안내 할려고 했습니다만 아쉽게 되었습니다.
아니 덥고 힘들더라,
그리고 그런 직업 못하겠더라, 완전 중노동이더라.
들고 다니는 카메라 별로 아닌것 같던데, 3억이나 한다고 하더라.
그 카메라는 식사중, 잠시 커피나 휴식중에도 차에 안놓고 옆에 가지다 놓더라.
무슨 카메라에 보험도 들어 있다고 하더라. ㅎㅎㅎ
늘 박진이라는 곳이 어딘지 궁금했었지만은 6 25전투가 치열했던 곳 이라는걸 몰랐으니 새삼 부끄럽네요
혹시 이이두 문화원장님은 영산 여고 이사장님 아니신가요
네, 마님이 알고 있는 그분(이이두님) 맞습니다.
6.25 전투 현장, 이런것 모른다고 부끄러운것 그런것 아닙니다.
저도, 야구는 알아도 다른 스포츠는 문외한걸요.
아마 친구들이 모르고 지내왔을 고향, 장마, 계성, 영산, 도천이 치열한 전쟁터였다고 합니다.
정말 새로운 사실은 말을 이용했다는 것,
핵무기를 실험햇다는 증언입니다.
이 핵무기 사용은 강원도 전선에서만 국한된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광계님의 위의 쓴글을 읽으면서 저의 집도 피난을 김해로가서 전쟁이 끝나고 돌아오니
새까맣게 불에타 집이 거의 흔적이 없었다고 하던데
그 만큼 낙동강 전투가 격전지였다는 것이 이제 깊이알아지네요
여고때 같은반 친구가 이이두 이사장님이 아버지 였거든요
지금쯤 연세가 많을건데 아직도 활동을 하시고..
지금은 이이두씨께서 창녕문화원장을 맡고 계시지요.
한가지 안타까운것은 카리스마가 강하고 좀 독단적인 성품으로 회원들과 다소의 마찰이 있는것이 아쉬운 점 이랍니다.
이젠 좀 여러사람을 위해서 많이 듣고 화합해 나갔으면 좋으련만...
돌쇠의 생각을 푸념 삼아 한번 해 봅니다 그려.
여고때 친구였다면 명희를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집에 하도 형제자매가 많아 나도 헷갈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