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고대(古代)가요 1
II. 향가 6
III. 고려시대의 문학 22
IV. 고려 속요 23
V. 경기체가 34
VI. 악장 37
VII. 언해 40
VIII. 시조(時調) 42
IX. 가사 56
X. 설화(說話) 66
XI. 패관문학과 가전체 문학 71
XII. 고전 소설론 75
XIII. 고전소설(古典小說) 79
XIV. 판소리 91
XV. 판소리계 소설 93
XVI. 수필 98
XVII. 고대 수필 99
XVIII. 민요(民謠) 104
XIX. 민속극 106
고대(古代)가요
정의
원시 종합 예술에서 분화된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내용을 노래한 시가를 고대가요라 한다. 서정문학은 본질적으로는 음악과 의미의 융합이며, 주관적인 개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현실성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가요는 원시적 서사문학 가운데서 기원의 요소적인 부분이 분화, 독립되어 이루어졌다. 고대가요는 상당한 양이 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몇 수만이 한역되거나 후대에 와서 기록되었다. 고대가요는 서사문학과 시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성
고대가요는 집단적, 서사적인 종합 예술에서 출발하여 개인적, 서정적인 시가로 분리되면서 생성하게 되었다. 즉 집단적인 행사에서 불려지거나 의식요, 노동요의 형태로 불려지던 것이 성립하고 점차로 개인적인 서정문학이 발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가요 중에서 [구지가]는 집단 생활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공무도하가], [황조가], [정읍사]는 개인적인 서정을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징
고대가요는 배경 설화와 함께 전하는데 이는 서사문학과 시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대에 와서 기록문학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형태에서 변용 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 시가의 기본적인 형식을 보여 준다.(4구)
문학사적 의의
고대가요는 우리 국문학사상 최초의 서정시가 형태이다.
고대가요는 우리 시가의 기본적인 형식을 보여 준다.(4구)
고대가요는 개인의 감정 표현을 통해서 세계를 드러내는 장르의 창조로 볼 수 있다.
고대가요는 배경 설화를 모두 갖고 있는데 이러한 짜임은 향가와 고려 속요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고대가요와 배경 설화
고대가요는 모두 배경 설화를 갖고 있는데 이들 시가는 배경 설화를 떼어놓고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시가로서 완전한 자리에 서기가 어렵다. 이는 고대가요가 서사적인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며 서정가요가 원래부터 독립된 형태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서사적인 문학 형태 속에서 독립하면서 서정가요 형식이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원래의 형태는 배경 설화가 우위에 있었으나 점차 서정적인 부분이 중심이 되고 배경 설화가 서정적인 부분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름만 전하는 고대가요는 배경 설화는 전해지고 있지만 서정가요의 형태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배경 설화와 서정 가요 작품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작품
구지가(龜旨歌)-15
형식 : 4구체 한역시가, 서사시
표현 : 주술적 표현, 명령적 어법, 직설적 표현
주제 : 신군의 출현 기원
성격 : 주술적·노동적 집단 가요. 상징적 집단 무가
연대 : 신라 유리왕 19 (A.D. 42)
異名 : 영군가, 영신군가, 가락국가
의의
국문학상 유일한 서사시
현전하는 最古의 집단 무요
주술성을 지닌 현전 최고의 노동요
출전 : 삼국유사 - 가락국기조
감상
이 노래는 우리 시가 문학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는 원시민요라 할 수 있다. 향가의 4구체와 유사한 형식의 이 노래는 ①노동요 ②태초에 신을 최초로 맞는 장엄 경건한 영신의 제의에 신탁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노래 ③원시인의 성욕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 ④ 잡귀를 쫓는 주문으로 보기도 한다. 객관적, 목적의식이 강하고 무가적 주술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흙을 파면서 불렀다는 점을 본다면 그것은 노동의 괴로움을 털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일 것이므로 노동요의 성격도 지닌다. 이 가요는 형식상으로 사구체가로 뒤에 서기 7백년경에 이루어진 팔구체가 형식의 무가인 [해가사(海歌詞)]는 이 노래를 그대로 계승한 아작이다. 구지가는 해가사와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유사한데 이는 구전되는 원시요가 민요의 형식으로 정착되었음을 입증하며, 당시 가야와 신라가 동일문화권에 있었음을 입증한다. [구지가]는 기록의 연대로는 [황조가]나 [도솔가]보다는 후대의 소산으로 보이나 이 작품의 성격으로 볼 때 서정요보다 훨씬 이전인 원시 가요의 영역에 속한다. 원시 신앙에서 오는 주술적인 내용과 노래 자체의 명령적이고 위압적인 마력을 인식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앞의 [구지가]가 신군을 맞이하려는 일종의 희망적인 노동요라 한다면 뒤의 [해가사]는 악귀나 액에 걸려 거기서 탈출하려는 몸부림이라 하겠다.
해 가-1
연대 : 신라 성덕왕 (8세기경)
작자 : 강릉의 백성들
출전 :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
형식 : 8구체 한역시가
성격 : 주술적, 집단적
주제 : 수로부인의 귀환을 기원
의의
구지가의 아류
재액(災厄)극복의 주술요
직설적인 표현으로 그치고 있을 뿐 은유적 표현이 없다.
주술제의에 기반을 둔 수로전승은 <해가>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어법상 특징
주술적인 표현과 명령법
거북에의 요구와 위협적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갈구의 의미 강조
위하적인 주술요의 어떤 한 틀이 오랜 세월 민간에 구비 전승되어 왔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배경 설화에 등장하는 노인의 기능 : 주술사
마을 사람들이 막대기로 해안을 치면서 부른 것으로 보아 어떤 노동을 상징하는 몸 동작이 수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술로서의 기능 : 닥쳐올 재앙에 대처하는 힘 (수로부인 개인을 희생으로 하여 새로운 임 지에서 부군 순정공의 무사를 비는 주술제의의 형식이 투영되어 있음)
배경설화
강릉의 태수 순정공의 아내 수로 부인은 미인이었다. 태수가 아내와 함께 동해안을 지나는데, 홀연히 바다의 용이 나타나서 수로부인을 납치해 갔던 것이다. 아내를 잃은 순정공은 아연실색하여 발버둥질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이 때에 지나가던 늙은이가 "그렇게 뒹굴고만 있지 말고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아내를 찾을 수 있을 것이요." 라고 일러주었다. 이 때에 부른 노래가 <海歌詞>이다.
황조가(黃鳥歌)-5
형식 : 4언 4구의 한역 시가. 원시 가요의 원형 (시경시체)
성격 : 개인적 서정시
주제 : 짝을 잃은 외로움 (슬픔)
표현 : 자연물을 빌어 우의적으로 표현. 대조, 의태
지은이 :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연대 : 유리왕 3년 (B.C. 17)
의의
현전하는 우리 나라 最古의 개인 서정시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단계의 가요
배경설화
유리왕 3년 7월, 왕은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10월에 왕비 송씨가 돌아갔으므로, 왕은 다시 두 여자를 계비로 맞았는데, 하나는 골천 사람의 딸 화희였고, 하나는 한인의 딸 치희였다. 두 여자는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매, 왕은 양곡의 동서에 두 궁전을 짓고 그들을 각각 살게 하였다. 훗날 왕은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서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두 여자는 서로 싸움을 벌였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가의 비첩으로 무례함이 어찌 그렇게 심한가?" 하니, 치희는 노여워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일찍이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때마침 나뭇가지에는 꾀꼬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왕이 그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노래를 불렀다.
출전 : 삼국사기 - 고구려 유리왕 3년 조
'구지가'와 '황조가'의 비교
'구지가'는 주술적 성격을 띤 집단적 의식요인데 대해서 '황조가'는 개인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집단의 운명과 관계되는 노래들은 서사적인 성격이 강하고, 개인적인 감정을 노래한 작품들은 서정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공후인( 引)-3
작자 : 백수광부의 처, 혹은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연대 : 고조선 대
명칭 : 공후인이라고도 함
형태 : 4언 4구체의 한역가
주제 : 임과 사별한 슬픔
출전 : 해동역사
의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정 시가로 알려져 있다.
원시 집단가요에서 개인적인 서정시가 발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
출전 : 해동역사
배경설화
'공후인'이란 노래는 조선 땅의 뱃사공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란 여인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 일찍이 일어나 나루터에 가서 배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때 난데없이 머리가 새하얗게 센 미치광이 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병을 끼고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늙은 광부의 아내가 쫓아오면서 남편을 부르며 말렸으나 그 늙은이는 깊은 물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기어코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때 그 아내는 들고 오던 공후를 끌어 잡고 타면서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랫소리는 말할 수 없이 구슬펐다. 노래를 마치자 그 아내 또한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고 말았다. 자고는 집에 돌아와 아내인 여옥에게 자기가 본 사실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 노래의 사설과 소리를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여옥은 눈물을 흘리며 공후를 끌어안고 그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물을 금할 수 없고 울음을 터뜨리고는 했는데, 여옥은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 여용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었고 또한 노래 이름을 '공후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물'의 의미
이별의 의미로서 떠나려는 자(임·남편)와 붙잡는 자, 죽은 자와 산 자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 갈라짐의 의미에서 비극이 진행된다.
아내가 남편을 따라 죽음으로써 남편과 이루는 만남, 여기서 비극이 막을 내린다. 그런데 또 하 나의 근원적인 의미는 죽음이다. 갈라짐의 물에서는 남편이 죽고, 만남의 물에서는 아내가 죽는다.
감 상
비극적인 별리를 노래한 것으로 '정읍사', '진달래 꽃'으로 연결되는 정한의 세계를 표현했다.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일부종사의 정절의 여심을 노래했다.
물의 이미지로 사랑과 죽음을 맞바꿀 수 있다는 강렬한 애정 지상주의를 노래했다.
정읍사(井邑詞)-12
작품 연구
형식 : 3연 6구(후렴구 제외)
출전 : 악학궤범
작자 : 행상인의 처
연대 : 미상(백제시대로 추정)
주제 : 행상 나간 남편의 무사함을 기원
성격 : 서정시가
표현 : 의인법, 돈호법, 영탄법
의의
현전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
한글로 표기된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가요
시조 형식(3장 6구)의 원형을 간직한 노래
'달'의 이미지
첫째 연 : 남편의 안전을 지켜주는 달. 따라서 남편의 안전을 비는 아내의 애정이 어린 달
둘째 연 : '즌 '를 밝혀주는 달
셋째 연 : 남편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한 달, 즉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믿음의 이미지가 담긴 달
정읍사에 나타난 서정적 자아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틋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으며 우리의 전통적 여인상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속요 [가시리], 황진이의 시조,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이어진다.
정읍사에 대한 이설
행상 나간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순박한 정서를 달에 의탁하여 노래 (양주동, 이병기)
여성의 육체를 노래한 남녀상열의 음사 (지원영)
행상 나간 남편이 혹시 화류항에 빠지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아내의 심경을 표현 (박병채, 박성의)
남편의 야행침해를 걱정하는 불안의식을 상징적으로 토로하는 정절의 미덕을 노래한 것 (최정여)
[정읍사]가 백제, 고려를 거쳐 조선조까지 불려진 까닭
형식면 : 우리의 전통적인 가락과 유사한 시조의 원형적인 모습을 보임
내용면 : 전통 정서인 기다림과 남편의 무사를 비는 간곡한 여인의 심정을 순박하게 표현
향가
정의
향가란 본래 중국의 노래에 대한 우리의 노래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표기된 신라의 노래를 이르는 것이 보통이다.
현전 작품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14수와 균여 대사의 전기인 균여전에 실려 있는 <보현십원가> 11수를 합한 25수가 현재 전해진다.
명칭
향가는 사뇌가, 시내가, 사내악, 도솔가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 쓰였다. 향가의 완성 형식인 10구체의 향가를 특히 '사뇌가'라 일컬었다.
형성
<삼국사기>에 의하면 유리왕 5년(A.D.28)에 도솔가가 지어진 것이 가악의 시초라 하였으나, 오늘날 전해지는 신라 가요는 6세기 통일 신라 이후의 것들이다. 즉, 신라 26대 진평왕조 전후 (6∼7 세기)부터 시작되어 고려 광종까지 이어진다.
형식
대체적으로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된 정형시가이다. 현존 향가 작품 25수를 토대로 하여 볼 때, 4구체가 4수, 8구체가 2수, 10구체가 19수이다. 10구체 중 '원가'는 낙구가 없어져 8구체 형식으로 전해진다. 4구체는 향찰 창안 이전부터 민간에서 불리어 구전되던 노래를 향찰 창안 이후에 문자로 정착시킨 듯하며, 8구체는 4구체에서 발전하여 상당히 정제된 형태이나 전후절의 구별이 없다. 10구체에 와서 비로소 향가라는 문학 형식의 완성을 보게 되는데, 10구체는 3장으로 나뉘어, 앞의 4구가 1장, 다음 4구가 2장, 뒤의 2구가 3장으로 이를 낙구라고 한다. 그리고, 낙구 첫머리에는 반드시 '아으'라는 감탄사를 두었다.
내용
불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한 발원이 가장 많고 샤머니즘적인 것도 있으나 민요와 동요, 축사, 연군, 설도, 안민치국의 노래 등 다양하였다.
분류
내용 : 불교적(18수), 군신·붕유·남녀 관계(각각 2수), 기타(1수)
작가 : 승려 및 불도의 작(18수), 화랑(3수), 여류(1수), 실명(1수), 기타(2수)
향가집
진성 여왕 2년(888)에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에 의하여 편찬된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삼대(三代)란 상(上), 중(中), 하(下)의 삼대를 뜻한다.
표기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향찰 표기
변모
신라 때 형성되어 발전한 향가는 고려 때까지 계속되어 불려 왔다. 고려 광종 때 균여 대사가 지은 '보현십종원왕가'는 고려 시대까지 향가 문학이 계속되어 온 실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고려 초기의 일이고, 향가는 고려에 와서 이미 쇠잔해지기 시작했다. '도이장가'나 '정과정'은 향가의 잔영으로 '도이장가'는 8구체 향가에 가까우며, '정과정'은 보다 고려 속요에 가깝다. 이러한 향가의 변이를 거쳐 고려 시대에 와서는 새로운 문학 양식이 이루어졌으니 귀족 문학으로서는 경기체가가, 일반 서민 문학으로서는 고려 속요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붕괴 원인
향가가 붕괴된 결정적 원인은, 고려 시대에 들어와 실시된 과거 제도의 영향으로 지식인은 온통 한문학만을 숭상·전념하게 되었고 고유 문학을 천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향가의 표기법인 향찰의 표기 체계에 통일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용이 부진하게 되었다.
문학사적 의의
향가는 통일신라 이후에 한반도 전역에 걸쳐 확산되었고, 민족 문학으로서의 개성을 뚜렷이 형상화한 귀중한 문학적 유산이라 하겠다.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리만큼 그 성세도 대단하였지만 한자를 받아들여 그것을 우리 것으로 소화한 향찰 문자만 보아도 강한 주체성을 엿볼 수 있다. '도솔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이 문학 양식은 주제와 사상적 다양성을 보여주면서 그리고 형태적 분화를 거치면서 신라의 대표적 문학 양식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신라인들은 이 문학 양식에서 고유의 토속 신앙과 접합된 불교적 신앙을 상대의 세계관 속에 표백시켰던 것이다. 숭고한 이상 추구를 주된 내용으로 했던 이 문학 양식은 수사면에서는 소박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원만하고 차원 높은 신라인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꽃피운 민족 문학의 유산이다.
향가의 해독 원칙
1字 1音 : 한 글자는 한 자 한 자 음을 지녀야 한다. ex> 心音(음) -> 마 - 心만 가지고도 마음이 되는데 音에서 'ㅁ'도 음가로 사용
훈주음차 : 川理 : 나리 ⇒ '川' 만으로도 '나리'가 되지만 理를 사용하여 뜻을 정확하게 나타냄. [나리다 > 나리 > 내]
맥락의 일치 : 문장의 순서와 해석이 일치해야 한다.
향가의 표기 원칙
+- 음차 - '정독'
+- 훈차 - '15세기 중세국어' 표기로.
형태소, 어간, 어미 - 15세기語에 따라서, 연철 표기로.
漢字의 음, 훈 外 - 終聲 : 殷 - ㄴ, 音 - ㅁ, 支 - ㆆ,ㅿ
작품
서동요(薯童謠)-5
○ 백제 제 30 대 무왕의 이름은 장. 일찍이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 아명은 서동. 그 도량이 비상하고 항상 서여를 캐어 팔아서 생계를 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아명을 그리 부른 것이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더벅머리를 깎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친해 따르게 했다. 드디어 한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시켜 부르게 했다.
이 동요는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스며들어갔다. 이 때 백관들은 크게 간하여 공주를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다. 떠날 때 왕후는 그 딸에게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길에 오를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해 가겠노라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도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그후에야 서동이란 것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공주는 어머니가 준 금을 내 놓으며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이 때 서동은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했다. 공주는 이것이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은 넉넉히 살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서동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땅엔 이런 것이 흙과 같이 쌓였다 하니 공주는 크게 놀라며 그것은 천하의 지보이니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했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덩이를 모아 구릉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가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는 내 신력으로 옮기리라 하니 공주가 편지와 함께 금덩이를 절간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신라의 진평왕은 그 신이함에 더욱 존경하고 항상 편지를 보내어 문안을 물었다. 서동은 이런 일로써 민심을 얻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서동요'는 서동이라는 개인의 창작으로 당시 아동들에게 불린 동요이기는 하나 전대에 그러한 형식의 민요가 널리 불려 이것이 4구체의 향가로 정착화 된 것이라 추측된다.
작품 해설
형식 : 4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2 무왕조 편
작자 : 백제 무왕
연대 : 신라 진평왕 때 (599년 이전, 6세기 말)
주제 : 선화 공주의 부정한 사랑, 선화 공주를 꾀어내기 위한 참요
내용 : 서동이 선화 공주를 사모하여 아내로 맞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동요
성격 : 참요적(모함하는 노래)
의의
현전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향가
민요가 동요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
의미
고대인들의 자유 연애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신화적 가치도 있다.
그 당시 어린이들의 동요가 이런 내용과 배경의 바탕으로 하였다함은 신라문학이 이미 원숙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특징
神話的 성격과 '이류교혼담'에 의한 영웅설화의 한 형태. 서사문학과 서정문학의 양면성을 공유. 향가 중 최고의 작품.(민요의 정착단계, 4구체, 원시 향가의 형태) 7세기 경 신라문학의 융성을 입증하는 자료.
작품 감상
이 노래는 일종의 참요로 선화공주와 서동의 정사는 서사적인 표현 단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 하였다. 내용은 서동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공주란 상대편에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전도시킨 데 수사적인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는 국경을 뛰어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으며, 그 꿈이 극단적인 장애 없이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동요적인 단순성은 발견해도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은 의식하기 어렵다. 다만, 설화의 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서동은 용자(龍子)로 태어나서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설화의 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 영웅의 일생은 결혼에 의해서 성공의 실마리가 풀린다. 이 '서동요'는 이러한 성공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이다.
향가의 민요성
통일 신라 이전 향가로는 [서동요], [풍요] 등이 있는데 이들 노래는 대부분 4구체로 율격이나 내용이 단순한 것으로 대체로 전래 민요가 후대에 와서 정착된 것으로 보여진다. [서동요]도 전래 민요가 정착된 것으로 배경설화는 전래 민요로서의 [서동요]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거나 또 배경 설화와는 달리 실존 인물이 아닌 가공적 인물 또는 설화상의 주인공이 역사화된 인물로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혜성가(慧星歌)
○ 26대 진평왕때에 다섯째 자리에 있는 거열랑, 여섯째 자리에 있는 실처랑(돌처랑이라고도 함)과 일곱째 자리에 있는 보동랑 등 세 화랑의 무리가 금강산 구경을 떠나려 하다가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 심성이란 별에 접근하므로 그 화랑의 무리가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여행 떠나기를 중지하였다. 이 때에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 불러서 별의 흉조는 없어지고 일본 군사도 저희 나라에 돌아가게 되었다. 도리어 경사스러운 일로 되었다. 임금이 기쁘게 생각하여 화랑의 무리를 금강산으로 구경가게 하였다. 그 노래에 이르기를
작품 해설
형식 : 10구체 향가(사뇌가)
출전 : 삼국유사 권5 융천사 혜성가
작자 : 융천사
연대 : 진평왕 (599 - 632)
내용 : 이 노래를 지어 내침한 왜구와 큰 별을 범한 혜성을 물리쳤다는 축사의 노래
성격 : 주가, 주술가
중요점 : 4구체 향가인 서동요와 함께 제작 시기가 가장 오래된 향가이다. 유래 설화의 설명과 함께 사설이 전하는 노래이고 사뇌가의 특성과 구실을 알아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다.
풍요(風謠)
○ 중 양지는 그의 조상이나 향읍은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선덕왕조에 사적을 나타냈을 따름이다. 그가 석장에 포대 하나를 걸어 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 시주의 집에 가서 흔들리며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알고 제 올리는 데 필요한 비용을 넣어 주어 포대가 가득차면 다시 날아 돌아온다. 그러므로 그가 사는 절을 석장사라고 하였다. 그의 헤아릴 수 없음이 신기하고 이상하여 이와 같았다. 한편 그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신묘함이 비할 바 없었고 또한 글씨도 잘 썼다. 그리고 영묘사의 장륙 삼존·천왕상·전남의 기와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 삼존·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또 그는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한 작은 탑을 만들고,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안치하고 예를 올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든 것은 입정에서 정수의 태도로 하였으므로 성 안의 남녀들이 모두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풍요에 이르되... 지금도 시골에서 부녀들이 맞절구질을 할 때나 일을 할 때에 모두 그렇게 부른 것이니 이 노래가 그 때에 비롯된 것이다.
작품 연구
형식 : 4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4 양지사석조
작자 : 고려 일연 개작 (양지법사의 이적 설화를 부회·가탁)
연대 : 신라 선덕여왕 때 (632 - 647)
내용 : 양지가 영묘사 장육존상을 주조할 때 장안의 남녀들이 진흙을 나르며 불렀다는 노동요
성격 : 노동요
의의
우리 민요의 가장 오랜 모습
최초의 방앗 노래
변천
(신라) 풍요 : 최초의 방앗 노래
(고려) 상저가 : 방앗 노래
(조선) 변강쇠 타령의 방아찧는 노래에 '오다. 오다. 오다.'가 나옴
감상
집단적인 노동요이기 때문에 '如來如來如來如來'와 같이 반복의 형식을 취하였고 따라서 리듬감이 느껴진다. 리듬은 노동요에서 노동의 고통을 덜어주는 윤활유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풍요는 국풍요, 향요를 뜻하는 노래로서 요새 말로는 '속요'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후대 민요형식의 원형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방아 찧을 때 부른 방앗노래 일 수도 있다. 즉, '如來...'의 반복이 방아의 시늉소리 '쿵덕...'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이 노래에 나오는 '공덕'도 '쿵덕'과 그 발음이 매우 비슷한 것으로 보아 당초에는 "오다. 오다. 오다/오다. 설움많다/ 설움 많은 무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라고 하여 속세에서 죄를 많이 짓고 속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닦으러 왔다고 노래했다. 이것이 후대에 와서 방앗노래로 유행하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이 '풍요'는 신라 때 유행하여 고려 때까지 불리어진 노동요의 일종인 민요라 추측되며 그 형식도 동요인 '서동요'와 함께 그 당시의 일반 시가보다 옛 형태를 지녔을 것이다. 특히 이 노래는 어떤 말의 율동이 하야시가 되어서 전체를 지배한 것 같으며 고대 시가의 발생 상태를 추측케 한다.
원왕생가(願往生歌)
○ 문무왕 때 사문명으로 광덕과 엄장이란 두 사람이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되 먼저 죽게되면 모름지기 서로 고하자고 했다. 광덕은 분황사 서리에 은거하여 신 삼는 것을 업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크게 농사를 지었다. 하루는 석양 놀이 질 무렵 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무는데 창 밖에서 소리가 나며 고하기를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나를 따라 오라' 하는 것이었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 소리가 나고 광명이 땅에 깃들여 있었다. 이튿날 그 집을 찾아가니 과연 광덕이 죽었다. 이에 그 처와 함께 시체를 장사 지낸 후 그 처에게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하냐' 함에 그 처가 승낙하여 드디어 머무르게 되었다. 밤에 정을 통하려 하니 여인이 말리며 '스님은 정토를 바라보면서 마치 고기를 나무에서 구하려 한다'고 했다. 엄장이 놀라 또 괴이해 묻기를 '광덕이 이미 없는데 난들 또 상관 있겠는가'하니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나와 10년이나 함께 살았으나 아직 하루 저녁도 동침을 한 적이 없거늘 하물며 더러운 짓을 하리요. 오직 밤마다 몸을 깨끗하게 하고 정좌하여 한소리로 아미타불을 외우고 혹은 16관을 지어 관이 이미 무르익어 명월이 창에 비치면 그 빛에 정좌하였다. 그 정성이 이같으니 비록 서방 정토로 가지 않고자 한들 어디로 가리요. 대개 천리를 가는 자는 그 첫걸음으로써 알 수 있나니 지금 사의 행동은 동쪽으로 간다 할지언정 서쪽으로는 갈 수 없다'고 했다. 엄장은 이에 부끄러워 물러가 곧 원효법사에게로 가서 진요를 간곡히 말하니 원효가 삽관법을 지어 말하여 엄장이 그제야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자책하며 일심으로 관을 닦아 또한 서승하였다. 삽관법은 원효법사 본전과 해동승전 중에 있다. 그 부인은 분황사의 종이니 대개 19응신의 하나다. 일찍이 이런 노래가 있다.
작품 해설
형식 : 10구체 향가(사뇌가)
출전 : 삼국유사 권5 광덕엄장조
작자 : 광덕 (광덕처설도 있긴 하지만 광덕설이 유력)
연대 : 문무왕 (661 - 681)
주제 : 왕생극락
내용 : 죽음을 당해 미타 생활에 입각한 서방정토에의 왕생을 기원하는 불교신앙의 노래
특징
노래에 담겨진 가사의 의미가 솔직 담백하다
신라가요 중에서 서방과 관념적인 동위를 하고 있는 것이 처음이다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을 믿게 하여 청정한 불국사를 이룩하겠다는 정토사상이 깔려있다
중요점
하층민의 생활이 문헌에 전한다는 점
원왕생가는 삼국 통일 이후 신라 서민사회에 뿌리내린 정토신앙의 양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주는 종교시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유스러운 차원 높은 기법을 구사한 훌륭한 서정시로도 인정받고 있다.
유래 : 문무왕때 광덕이라는 사람이 신을 삼아서 생계를 도모했으며 아내는 분황사 종이었으나 광덕의 벗 엄장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처지였는데 광덕이 죽자 그의 아내를 차지하였다. 이 노래는 광덕이 일찍이 부르던 노래이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 제32대 효소왕 때에 죽만랑의 무리에 득오 급간이 있어 화랑도 명부에 올라 날마다 나아가 봉사하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낭이 그 어머니를 찾아 아들이 어디 있는가를 물으니 어머니가 말하되 '당전 모량의 익선아간께서 내 자식으로 부산성 창직으로 임명했으므로 급히 달려가노라고 남에게 고하지도 못 하였노라.' 하니 낭은 '자제가 만일 사사로서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만 공사로 갔다니 응당 가서 대접하리라.' 하고 설병 한 합과 술 한 병을 가지고 노복을 거느리고 가매 낭의 무리 137인도 위의를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가 어디있음을 물으니 가로되 지금 익선의 밭에서 예에 따라 부역하고 있다고 했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 가지고 온 술과 떡을 먹이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같이 돌아가도록 청했으나 익선이 굳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 능절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중에 수송하다가 낭의 중사의 풍을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어둡고 변통성이 없음을 더럽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요청했으나 그래도 허락치 않으므로 또 진절 사지의 기마안구를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가 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 그 더럽고 추한 것을 씻어주려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거늘 그의 큰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마침 그 때는 중동극한의 날이라 성안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붙어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명령하기를 모량리인으로 벼슬하는 자를 모두 몰아내고 다시는 관공서에 접하지 못하게 하고 흑의를 못 입게 하며 만일 중이 된대도 절에 들어가지 못 하게 했다. 사상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을 삼고 표창했다. 이 때 원측법사는 해동의 고승이로되 모량리인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처음에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가 되어 다스릴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삼한에 병란이 있어 기병 3천으로 호송했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길을 닦고 있었는데 공이 보고 탄미하니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매우 성함을 좋다고 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하였다. 공이 주리에 닿은 지 한 달이 지나서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아내 또한 똑같은 꿈을 꾸었다. 더욱 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보내어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 곳 사람의 말이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했다. 사자가 돌아와 거사의 죽음을 알리니 꿈과 더불어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하고 다시 군사를 보내어 영상북봉에 장사 지내고 돌로 미륵을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는 과연 꿈꾼 날부터 임신하여 아이를 낳으매 이름을 죽지라 지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벼슬에 나아가 유신공과 더불어 부사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무·신문의 4대에 걸쳐 대신이 되어 나라를 안정케 했다. 처음에 득오곡이 죽만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으니 이러하다.
작품 해설
형식 : 8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2 효소왕대 죽지랑조
작자 : 득오
연대 : 효소왕 (692 - 702)
내용 : 화랑인 죽지랑의 부하였던 득오가 죽지랑을 사모하여 그 지성을 노래한 서정적인 가요.
의의 : 8구체의 효시
헌화가(獻花歌)-1
○ 성덕왕대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하고 있었는데 곁에 석벽이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 있었다. 그 높이가 천장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만개 되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이를 보고 좌우에게 '누가 저 꽃을 꺾어 오겠느냐' 하니 종자들이 대답하되 인적이 이르지 못하는 곳이라 하여 모두 응치 않았다. 이 때 곁에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또한 노래를 지어 바쳤는데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작품 해설
형식 : 4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
작자 : 실명노인
연대 : 신라 성덕왕 때(702-737)
내용 :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수로 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며 불렀다는 노래
[헌화가]와 배경설화와의 관계
현재 전하는 14수의 신라 시대 향가 중의 몇 편은 작품 창작에 얽힌 산문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헌화가]도 그 중의 하나다. 수로부인조의 이야기로 나타나는 이 배경 설화는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의 해석 때문에 여러 학설들이 나오게 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헌화가]와 사실적 설화의 둘 중 어느 한 쪽을 중심으로 줄거리가 구성되어 있지 않고, 상호 보완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수로부인의 설화는 세 대목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헌화가]와 관련된 대목이며, 둘째는 [해가]와 관련된 대목이고, 셋째는 [해가]를 다룬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둘째 대목의 [해가]와 그 관련설화에는, 이 노래에 주가적인 속성이 내재해 있음을 보여준다. 문맥상으로는 검은 암소를 끌고 가는 노인은 신화적 존재 또는 신선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누구도 미칠 수 없다는 천길 벼랑위에 올라갈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설화의 중심공간이 바닷가에 괴석들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두르고 있고, 그 위에 철쭉꽃이 피어 있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바닷물은 신화적 상징으로는 여성력을 상징하므로, 그 앞에 치솟은 바위는 남성력의 표상이 될 수 있다. 수로부인과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의 또 다른 관계는 수로부인은 그 이름에서처럼 물과 관련된 여성력의 표상이고, 노인은 산과 관련된 남성력의 상징이다. 한편 인간인 수로부인과 신적 존재인 노인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가 꽃으로 나타난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재생력이자 영원한 것에 대한 표상이다. 또, 노인이 끌고 다니던 암소는 농경민족에 있어서 중요한 동물이자 풍요를 상징하는 동물이며, 그 중에서도 암소는 생산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헌화가]와 연관된 배경설화에 깔린 심상은 출산력, 생산력의 상징이며, 이를 꽃이란 매체를 통한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시켰다. 이처럼 [헌화가]는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친다는 설화가 이 노래의 의미를 확대시켜 주는 것이다. 노인이 상징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사랑은 에로스의 최고 가치인 아름다움 자체가 되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즉 이 향가와 설화는 단순한 꽃 바침의 사랑노래가 아니라, 생산과 풍요를 향한 인간의 의지와 지고한 순수 애정의 교묘한 결합으로써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시가와 산문으로 연결하여 시의 세계를 더욱 고양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상
매우 소박하면서도 단조로우면서도 오묘한 운치를 느끼는 가요이다. 간단한 대화체이면서도 즉홍 노인이 젊은 부인에게 드리는 서정시이다. 신물에게까지도 납치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비록 몸은 늙었지만 자기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모험을 감행해 보는 사랑의 황홀경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새삼스럽게 청춘을 회억하면서 불타 오르는 열정을 가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정신적인 황홀경의 세계에 도취하게 된다. 과묵하고도 어진 암소와 노인, 부인과 남편, 아름다운 부인과 꽃, 절벽과 바다, 부인과 노인, 성취와 꽃의 꺾음 등 사랑의 절정적 황홀과 그 잠재적 성욕, 이를 극복하려는 자세와 아름다움과의 조화 등 정신분석학자인 어프로치를 통해 재음미해 볼 만한 작품이다. 철쭉꽃을 매개로 하여 그들은 마음과 마음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토착화해 가면서 그 세력을 뻗쳐 가던 터이었으므로, 향가에 스민 불교적인 영향을 전혀 도외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년간 잃었던 자기의 심우를 붙들어 그 소의 고삐를 잡은 노인, 즉 해맑고 깨끗한 스스로의 심성을 대오하고, 그 얻은 바 '소'의 잔등에 몸을 싣고서 자기법열을 맛보며 돌아가는 운수행객은 석가의 계율을 지켜 수신에 전념하던 선승의 이제 꺠달음의 세계에 도달하여 성불의 경지에 이른 것 '小乘 - 大乘'이라고 볼 수도 있다.
원가(怨歌)
○ 효성왕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궁정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어느날 신충에게 이르기를 '후일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게 되면 이 백수와 같으리라.' 함에 신충이 일어나 절하였다. 몇 달 후 왕위에 올라 공신에게 상을 주되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잣나무에 붙이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하매 노래를 얻어 바쳤다. 왕이 크게 놀라 '만사를 손아귀에 잡고 거의 그를 잊을 뻔했다.' 하고 곧 그를 불러 작록을 주니 백수가 소생했다. 그 노래에
이로써 총애가 양조에 두터웠다. 경덕왕 22년 계묘에 충이 두 벗과 서로 약속하여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다. 다시 불러도 나오지 않고 머리를 떨고 중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거기에 살며 일생을 마쳤는데 대왕의 복을 빌고자 원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작품 해설
형식 : 10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5 신충괘관조
작자 : 신충
연대 : 효성왕 원년 (737)
내용 : 효성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매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부쳤다는 주가. 일명 원수가
도솔가(兜率歌)
○ 경덕왕 19년 경자 4월1일에 해 둘이 나란히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연승을 청하여 산화공덕가를 짓게 하면 재앙을 물리치리라' 하였다. 이에 조원전에 깨끗한 단을 베풀고 청양루에 해행하여 연승을 기다렸다. 때에 월명사가 길두덩 남쪽 길을 가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 했다. 월명이 아뢰기를 '신승은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단지 향가를 알 뿐이요, 범성에는 익숙치 못하다'하니 왕은 '이미 연승으로 뽑혔으니 향가도 좋다'고 하였다. 이에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 그 가사에
작품 해설
형식 : 4구체 향가. 불찬가
출전 :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
작자 : 월명사
연대 : 신라 경덕왕 19년 (760)
내용 : 해가 둘이 나타나는 변괴를 미륵불을 맞아 물리치고자 부른 노래
성격 : 주술가, 민요
감상
이 노래는 신열악, 사지악으로 전하는 악과 같은 것으로 여겨 오고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이 해에 민속이 환강하여 비로소 도솔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가악의 시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가악의 시초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집단적인 서사시와 개인적인 서정시의 중간 형식이다, 순전히 개인 서정시다, 두레와 같은 집단적인 원시 예술로부터 서정 가요로 옮아가는 중간기의 형태였을 것이라는 등의 이설이 많으나 신라 정형시의 향가의 형태였을 것이라는 데는 일치한다.
제망매가(祭亡妹歌)-9
○ 월명이 또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하여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지냈는데 갑자기 광풍이 일어 지전을 날려 서쪽으로 향하여 없어졌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월명이 항상 사천왕사에 있어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 앞 큰 길을 지나니 달이 가기를 멈추었다 하여 그 길을 월명리라 하였고 법사도 또한 이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사는 곧 능준대사의 문인이다. 신라 사람이 향가를 숭상한 자 많았으니 대개 시송과 같은류다. 그러므로 왕왕 능히 천지귀신을 감동시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하노니 바람은 지전을 불어 저 세상에 가는 누이의 노자를 삼고 부는 피리는 명월을 움직여 항아를 살게 하도다. 도솔이 하늘에 연하여 멀다고 하지 마라. 만덕화 한 곡조 노래로 맞았으니.
작품 해설
형식 : 10구체 향가
출전 :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
작자 : 월명사
연대 : 신라 경덕왕 때
주제 : 죽은 누이의 명복을 바래는 맘.
내용 : 죽은 누이를 추모하여 재를 올리어 부른 노래. 일명 위망매영재가
중요점 : 고도의 비유를 통하여 인간고의 종교적 승화를 노래했다는 점에서 현존 향가 중 가장 백미로 뽑히고 있다. 또 찬기파랑가와 더불어 표현 기교 및 서정성이 뛰어나다.
서정적 자아의 삶의 태도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인가 도 닦으며 기다릴거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망매가에 나타난 서정적 자아는 불교적 인생관으로 도를 닦으면 극락 세계에 간다는 삶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자기의 누이가 죽어 극락 세계에 갔으리라 믿고, 자기도 도를 닦아 극락 세계에 가겠다는 구도자적 삶의 태도인 것이다.
작품 감상
이 노래는 첫 단락에서 누이의 죽음을 직면한 현재를, 둘째 단락에서는 누이와의 속세의 인연을 그린 과거를, 그리고 마지막 단락에서는 서방정토에서의 만남이라는 미래를 노래하고 있어 불교의 삼세 윤회의 진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월명사는 죽은 누이동생을 애도하는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빌어 불교 신앙, 특히 대승의 아미타 신앙에의 귀의를 노래하고 있다. 또한 적절한 비유의 참신성은 그의 높은 정신 세계를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죽음에 당면한 슬픔을 회자정리의 불교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도 발견되는 이미지로 인간적인 슬픔을 종교적 정신 세계로 정화하여 초극하려 하고 있다.
작품에 나타난 향가의 주술성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이 노래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광풍이 불어 지전을 불어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했다는 배경설화와 함께 전해지는데, 이는 향가가 하늘과 땅을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주술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표현상의 특징
[제망매가]가 현존 향가 중에서 가장 빼어난 서정성을 보이는 것은 이 작품에서 눈물보다 더 슬프고 절실한 사랑의 상처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무상한 인생, 그리고 핏줄로 얽혀진 동기간의 우애가 숭고한 종교의식에 덮인 채 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표현상의 묘미는 제5행과 8행 사이의 비유에 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매 사이에 있어서의 죽음을 한 가지에 났다가 떨어져 흩어지는 낙엽에,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덧없이 부는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으로 비유하여 요절의 슬픔과 허무를 절묘하게 감각적으로 구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인간의 죽음도 필연적이라는 불교적 생사관이 높은 서정적 경지에 이르는 것은 '이른'이라는 표현 때문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해진 죽음이되 '그 때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시적 화자의 슬픔은 극대화된다. 그러나 그 슬픔은 눈물도 드러나지 않고, 내세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극복된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7
○ 경덕왕 24년 3월 3일, 왕이 귀정문 문루 위에 납시어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누가 길에 나가서 훌륭하게 차려 입은 중 하나를 데려올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그 때 마침 예법에 맞는 몸가짐을 하고 깨끗하게 차려 입은 고승이 있어 슬렁슬렁 걸어오는 것을 좌우의 사람들이 데려 왔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훌륭하게 차려 입은 중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돌려보냈다. 다시 한 중이 옷을 기워 입고 벗나무로 만든 통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기쁘게 대하면서 문루 위에 맞아들였다. 그 통 속을 들여다보니 차 다리는 기구가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뇨'하시니 중이 말씀드리기를 '충담입니다'한데, 또 묻기를 '어디서 오는 길인가'하시니 중이 말씀드리기를 '소승은 매년 3우러 삼짇날과 9월 9일에는 차를 다려 남산 삼화령에 계신 미륵불께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씀하시기를 '나도 그 차 한 잔을 얻어 마실 연분이 있겠느뇨'하시니 중이 차를 다려 올렸는데, 차 맛이 희안할 뿐만 아니라 차 중에서 이상한 향기가 무럭무럭났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대사의 기파랑을 찬양한 사뇌가는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 바 과연 그러하뇨'라고 하시니 중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나를 위해서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라'라고 하시니, 중이 당장 임금의 분부를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잘 지었다 하시고 왕사로 봉하였다. 중은 두 번 절한 다음에 그 벼슬을 굳이 사양하였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에 이르기를 <임금은 아비고 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미고 백성은 어린 아기라고나 하실지 백성이 임금이나 신하가 알기를 바라며 오막살이의 대중을 살리시고 있는 토산물 이것을 먹어서 다스려지도다 이렇게 살기 좋다면 이 땅을 버리고 백성들이 어디 가고자 할 것인가? 나라 안의 유지를 깨닫게 하고 싶다. 後句,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나 백성은 신하나 백성답게 하였을진대 나라 안이 태평한 것입니다-안민가>라 하고,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에 이르기를
작품 해설
형식 : 10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작자 : 충담사
연대 : 경덕왕 (742 - 765)
내용 : 기파랑을 찬양하여 부른 노래. 추모시
성격 : 예찬가
의의
문답식으로 된 최초의 노래
신라시대의 현존하는 25수의 향가 중 가장 서정성이 뛰어나고, 고도의 상징적 기법으로 달빛(만인이 우러러보는 존재), 조약돌(기파랑의 강직하고 원만한 성품), 시냇물(기파랑의 고매한 인격), 잦가지(기파랑의 곧고 높은 지조) 등 사물의 상징성과 흰 빛과 푸른 빛의 대조로 선명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제망매가'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비유적 표현이 가장 돋보임
일반적 10구체 향가와는 구성 방식이 다르다
구성과 소재의 상징성
감상
이 작품은 기파랑이라는 인물의 인품을 정적 소재와 동적 소재의 조화에 의해 이루어지는 청신함, 안정미, 생동감을 통해 표상하고 있다. 우선 달과 구름이 떠 있는 밤 하늘, 물, 그리고 거기에 비치는 달, 눈이 내린 땅과 잣나무가 대조된다. 기본적으로 색감에 의해 청신한 느낌을 주지만 수평적인 것들인 구름, 시냇물, 지상과 수직적인 것들인 달, 물 속의 달, 마음의 끝, 잣나무가 공간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또 잣나무와 흰 구름, 달이 조화되어 정중동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는데, 특히 '달', '수풀', '잣나무' 등은 영원과 생명을 표상하는 사물이다. 이같이 시·공간적으로 완결된 구조 속에 색감을 내포한 자연물을 통해 기파랑의 뛰어난 인품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달'은 우리 고전 시가에서 광명과 염원을 상징하듯, 여기서도 서정적 자아가 바라보는 광명의 달이며, 그를 통하여 기파랑의 고매한 자태를 그려볼 수 있는 그리움이 어려 있는 달이다. 그리고 낙구의 잣나무는 고결한 인품을 상징하며, 곧게 뻗은 가지는 강직한 성품을 나타낸다. 눈이 잣나무에 닥치는 시련이나 역경, 혹은 유혹을 비유하는 것이라면, 이 잣가지는 기파랑의 인격을 역경에 굴하지 않고 곧은 것으로 표현해 주는 중심소재이다.
안민가(安民歌) <국어 上>
작품 해설
형식 : 10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사조
작자 : 충담사
연대 : 경덕왕 (742 - 765)
내용 : 군·신·민이 알 바를 노래한 치국의 노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창작)
안민가와 용비어천가의 비교
우적가(遇賊歌)
○ 승 영재는 천성이 골계하여 재물에 매이지 않고 향가를 잘하였다. 만년에 장차 남악에 은거하려고 하여 대현령에 이르렀을 때 도적 60여인과 마주쳤다. (도적이)해를 끼치려 할 때 재는 그 칼날 앞에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고 화기롭게 대하였다. 적이 이상히 여겨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 대답했다. 도적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은지라 (그에게) 명하여 노래를 짓게 하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도적이 그 뜻에 감동하여 비단 두 끝을 그에게 주니 영재는 웃고 사례하며 '재희가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아 장차 궁산에 숨어 일생을 보내려고 하거든 어찌 감히 이것을 받으리요' 하고 땅에 던졌다. 도적이 또 그 말에 감동되어 모두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그의 도제가 되어 같이 지리산에 숨어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90이니 원성대왕 때였다. 찬하노니 지팡이를 짚고 산에 돌아가니 그 뜻은 더욱 깊어 비단이나 구슬인들 어찌 그 마음을 다스리리. 도적의 군자가 소로 선물을 하였으나 지옥에 갈 촌금의 뿌리도 없느냐.
작품 해설
형식 : 10구체
출전 : 삼국유사 권5 영재 우적조
작자 : 영재
연대 : 원성왕 (789 - 798)
내용 : 영재가 대현령에서 도둑을 만나 도둑을 회개시킨 설도의 노래.
처용가(處容歌)-3
○ 제49대 헌강왕대에 서울로부터 해내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풍악과 노래가 거리에 끊이지 않고 풍우는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나가 놀다가 장차 돌아올 새 낮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였다. 괴상히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되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 것이라' 하였다. 이에 해당 관원에게 명하여 이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했다. 왕령이 이미 내림에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래서 개운포라 이름지었는데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며 주악을 바쳤다. 그 중 한 아들은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 정사를 돕게 되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했다. 왕이 미녀로서 아내를 삼게 하여 그를 머물게하고 또 급간의 직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왔으므로 역신이 흠모하고 사람으로 변해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자리에 두 사람이 누웠음을 보고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물러나게 했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그 때에 역신이 모양을 나타내 앞에 꿇어 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했는데 공이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아름다이 여기는 바다. 이제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했다. 이런 일로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왕이 서울에 돌아온 뒤 영취산 동쪽 기슭의 승지를 택해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 또는 신방사라고 했으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작품 해설
형식 : 8구체 향가, 민요나 무가의 정착으로 보기도 함
출전 :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조
작자 : 처용 (신라 제 49 대 헌강왕 때)
연대 : 헌강왕 (879)
주제 : 아내를 범한 역신을 감동, 굴복시킨 축사와 벽사진경
의의
문학적 관점 - 문학적 내포가 없이 외연에만 한정시켰고, 내용이 조잡하며, 긴장감이 결여 되어 있다
불교신앙적 관점 - 불교적 사심(捨心)을 성취한 고도의 문학이다
민속신앙적 관점 - 무가, 주가, 주술의 원리를 내포한 문학으로 굿이나 연극 속에서 불려 진 노래이다
역사사실적 관점 - 지방 호족의 중앙 귀족에 대한 갈등표현의 문학이다
심리학적 관점 - 만인의 원초적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표현이다
민요격의 향가, 자신의 비극을 골계적으로 표현한 문학이다
화해, 관용, 포용의 미학을 표츨한 문학이다
벽사진경의 민요적 무가이다
기타
신라사회가 풍요해지면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성적 타락과 신라인의 관능추구의 면을 보여준다
불의나 모순에 대해 정면적인 도전이 아니라 무한히 내적으로 투쟁한다는 점은 동양인의 의식구조의 한 단면을 드러내 보인다
작품 감상
이 노래는 역신을 물리치기 위한 축사의 노래이며, 신라 향가 중 가장 주술적인 내용을 가진 작품으로 악신을 쫓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의 가사는 매우 개인적이며, 보통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서가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 노래에 주로 쓰인 영탄의 표현 기법은 분노와 슬픔, 체념과 관용의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함축하면서 전체적 긴장과 갈등을 고조시킨다.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하여 이 노래는 종교적, 역사적, 축사 및 벽사진경의 시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전반 4구는 아름다운 아내를 탐한 역신의 침범을, 후반 4구는 역신에 대한 처용의 관용 또는 체념을 노래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설화에 의하면, 결국 역신은 처용의 관용에 감복하는데, 이리하여 처용의 형상이 벽사진경의 효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처용은 무당으로, 처용의 형상은 부적으로 이해되기도 함으로써 이를 무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운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밝히고 물러간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한 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 있는 생활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절정부분인 시의 마지막 두 구는 표면상은 체념의 태도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말 뒤에 해당하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일상인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은 처용의 초극적인 이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노래의 가사 일부가 고려 가요인 [처용가]에 인용, 한글로 표기되어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실려 있어 향찰 문자 해독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향가계 시가
정의 : 신라 때의 향가가 고려 가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과도기적인 시가 형태로 고려 때 지어졌으나 그 표기는 향찰로 되었거나 향가의 형식을 갖춘 시가를 이른다.
의의 : 향가와 고려 가요를 연결하는 교량적인 역할을 하는 문학 형태라 할 수 있다.
특징
도이장가
2장으로 분장은 되었으나 후렴구가 없음
향가와 같은 8구체
향찰로 표기
정과정
고려 가요처럼 분장되지 않음
후렴구가 없음
향가와 같은 10구체
낙구 첫머리에 '아소'등의 감탄사 배치
도이장가(悼二將歌)
○ 고려 태조가 견훤과 싸울 때 태조가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다. 그 때 대장 신숭겸의 얼굴이 태조와 비슷했으므로 신숭겸이 죽음을 각오하고 태조를 숲 속에 숨긴 다음 태조의 말을 타고 태조인 양 원보·김 낙과 더불어 나가 역전하다 전사하였고 태조는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태조가 김낙의 상을 만들어 반상에 앉히고 술과 음식을 올리도록 하였던 바 술이 갑자기 회를 베풀 때 두 상을 보시고, 그 유래를 묻는지라 신숭겸과 김낙의 상이라는 것과 그 사실을 이야기하니 왕이 감탄하셔 어제 사운을 내리시어 한시를 짓고, 또 단가 이장을 지으셨다.
작품 해설
출전 : 평산 신씨 장절공 유사
작자 : 예종
연대 : 고려 예종 15(1120)
구성 : 서사, 본사의 2단 구성
주제 :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 김 낙 두 장수를 추모한 노래
의의 : 향찰로 기록 된 마지막 작품으로 보현십종원왕가를 끝으로 사라진 향가의 뒤를 이어 그 형식, 표기 방법을 이어온 작품이다. 향가와 경기체가의 가교적 구실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정과정곡(鄭瓜亭曲)
작품 해설
출전 : 악학궤범
작자 : 정서
연대 : 의종20 (1166)
감상
이 작품은 충신연주지사로서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이를 전악으로 보존하여 公妓는 물론 사대부들도 모두 익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는 이 노래가 고려사의 기록처럼 사극처완(詞極悽婉)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배된 사정이 워낙 억울하여 세인의 동정을 사게 된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형식은 향찰로 표기되지는 않았지만 10구체 향가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3단 구성 방법이나 '아소 님하'에서 볼 수 있는 낙구 첫머리의 감탄사는 모두 향가의 영향을 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자연물(산 접동새)에 비유함으로써 우리의 전통적인 시가에서 볼 수 있는 한의 이미지를 잘 형상화하고 있으며,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후대에 나타나는 수 많은 연군가의 원류가 된 것이다.
고려 가요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가요처럼 분장이 되어 있지 않고, 후렴구도 없으며, 향가와 같이 10구체이며, 낙구 첫머리에 '아소'라는 감탄사가 있다. 고려 의종 때 정서가 지었다. 국어로 기사된 가사 가운데 작자가 알려진 유일한 작품으로 '악학궤범'에 실려 전한다. 정서는 인종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 풍류 재예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궁중을 중심으로 한 외척 권신들의 정쟁으로 조정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그의 고향인 동래에 귀양가게 되었다. 그때 의종의 말이 오래지 않아 곧 부르겠다고 했는데도 오랫동안 아무 기별이 없자 이를 슬퍼하여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이 노래의 내용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를 산접동새에 비기어 임금을 그리는 절절한 심정을 읊었으므로 충신이 임금을 그리는 노래라 하여 궁중음악으로 불리었다. 이 노래는 '동국통감'에는 [정과정]이라 하였고, '악학궤범'에는 [삼진작]이란 이름으로 실렸는데 [삼진작]이란 이름은 [정과정]에 붙인 악곡명이고 가사명은 아니다. 곧 [삼진작]은 [정과정]에 붙인 곡조 이름이다. [정과정곡]은 여대로부터 이조 대에 유전되고, 이조 대에 와서는 '忠臣戀主之詞'라 하여 중시되었기 때문에 궁정에서는 악공 취재의 과목이 되었으며, 사대부들도 이것을 학습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의 문학
고려 시대 문학사
고려 시대 문학의 주류는 한문학이다. 과거 제도 실시와 중국 문물의 수입으로 한문학이 융성했기 때문이다. 향가의 전통은 균여 대사의 [보현십원가]를 거쳐 예종의 [도이장가]에 이어졌으나 한문학의 발달로 인해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되자 향가계 문학은 사라지게 되었다. 반면, 한자에 의한 귀족들의 한시, 시화, 설화 등의 다양한 한문학이 문학계를 지배하였고, 설화가 정착하면서 패관 문학이 발달하고, 가전에 이어 조선시대에 발생할 소설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밖에 경기체가, 고려 속요, 시조 등의 문학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들이었다. 경기체가는 귀족문학으로, 정치적 혼란기에 있었던 문인들이 한자 어휘의 나열과 이두식 후렴구로 그들의 의식 세계를 노래한 것이며, 고려 속요는 고려 시대 문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평민들의 진솔한 감정이 투영된 노래로 구전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문자로 정착되었다. 시조는 고려말에 발생한 3장 6구의 단가(短歌)로서 우리 고유의 노래이며 국문학의 대표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문학의 특징
과거 제도의 시행과 교육 기관 설립으로 한문학은 크게 융성하였다.
대체적으로 한문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귀족문학(경기체가)과 그렇지 못한 평민문학(고려 속요)으로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국자(國字)가 없던 당시에 귀족 계급에서는 한자를 이용하여 문학적 내용보다는 리듬을 통해 흥취를 돋우는 경기체가가 유행하였다.
문자를 갖지 못했던 평민들의 문학인 고려 속요는 구전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다.
설화에서 발전한 패관문학과 가전체 작품이 조선시대에 발생한 소설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고려말에 발생한 시조는 귀족문학과 평민문학이 통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향가, 경기체가, 고려 속요는 그 수명이 길지 못하였고, 시조는 조선시대에 와서 활발했기 때문에 고려 시대의 문학은 과도기적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시대 작품이 적은 이유
상류층의 국어 가요에 대한 멸시관
표기수단이 없어 구전되었으므로 작품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조선 초기 기록되어질 때 판단 기준이 주자학적 윤리였으므로 사리부재의 원칙에 따랐다.
고려 속요
정의
고려 시대 평민들이 즐겨 부르던 민요적 시가
별칭
장가(長歌), 고속가(古俗歌), 여요(餘饒), 별곡
형성
속요는 원래 민간에서 유포, 전승되던 민요적 시가로서 구전되어 오다가 정음 창제 이후 조선 성종 대에 이르러 정착되기 시작했다. 고려 속요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하여 첨삭, 개작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다.
형식상 특징
대부분 분절식으로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3음보격에 의한 3·3·2조가 많다.
대체로 연장체(聯章 )이다.
후렴구 또는 조흥구가 발달되어 있다.
속요의 작자와 향유계층
구비전승 되다가 정음 창제 이후 정착된 속요 중에서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은 정과정(의종대 ; 정서)과 유구곡(예종작) 뿐이다. 두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민간에서 구전된 민요였던 것으로, 후에 궁중의 속악가사로 수용되어 개편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작자나 제작 연대를 대부분 알 수 없다.
속요가 민간에서 구전되던 민요임을 알게 하는 흔적
동일한 내용의 가사나 비슷한 내용의 가사가 두 작품에 나타난다. [서경별곡] 2연과 [정석가] 6연이 동일하며 [만전춘] 3연과 [정과정] 5·6행 가사 내용이 비슷한 것은 이들 가사가 독립된 민요로 전승되다가 궁중의 속악으로 수용되어 첨삭, 개작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내용에 '남여상열'이 많은 점은 민요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남녀의 상사(相思)나 상열이 많은데, 현전 속요에는 동동, 쌍화점, 만전춘, 서경별곡, 가시리, 정석가, 이상곡 등이 있다.
현전 속요 가운데 [정과정], [처용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속요들은 민요 특유의 병치와 반복의 구조, 관습적 표현, 민간에 친숙한 일상어와 비속어의 사용, 주로 3음보의 율격과 여음구 사용 등의 민요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내용상 특징
내용적 성격
서민들의 진솔한 생활 감정을 나타냈다. (허식과 과장이 없다.)
민요적 성격을 지닌다.
향락적이며 현실 도피적이다.
서정적이다.
형식상 특징
민요적 생성과 전승이지만 세련된 이미지의 형성 솜씨이다.
우리의 전통적 음수율과 가까운 형태이다.
분절성을 띤다.
우리 옛 시가 장르 중에서는 가장 함축적인 창작이다.
직유가 많이 사용되지 않고 대신 은유적이거나 풍유적인 기법이 많으며 상징적인 표현도 있다.
실린 문헌
악학궤범, 시용향악보, 악장가사
의의
적나라한 인간 본성을 경쾌한 리듬에 얹어 표현하여 평민들의 인간미 넘치는 순수하고 진솔한 감정과 정서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경기체가와는 달리 우리말을 아름답게 구사하여 국어·국문학적 가치가 높다.
고려 속요와 다른 시가와의 비교
향가와 고려 속요
고려 속요는 형식상의 특징으로 보아 향가와 민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향찰의 쇠퇴에 따라 [정과정]과 같은 과도기적 형태의 시가들이 나타난 이후에 향가는 점차 소멸되어 갔으며, 고려 속요의 형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고려 속요는 향가와는 달리 문자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전되어 오는 동안 일종의 민요처럼 발전하게 되었다.
경기체가와 고려 속요
3음보와 6구를 기준으로 대체로 분장된다는 것이 공통점이나 경기체가가 고려시대 사대부 문인들에 의해 지어진 귀족 문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반면에, 고려 속요는 민중 사회에서 널리 불려진 평민 문학으로서, 평민들의 진솔한 감정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
시조와 고려 속요
시조의 기원을 고려 속요에서 찾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고려 속요의 분장형식은 시조 형식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작품
동동(動動)-9
작품 연구
형식 : 전 13 연, 월령체
출전 : 악학궤범
주제 : 송축과 애련,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사모의 정한
의의 : 월령체 노래의 효시
감상
민속과 결부된 달거리 형식의 연정가요로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궁중과 민간에서 널리 불리워진 대표적인 고려 속요이다. 국문학사상 최초의 월령체인 이 노래는 분연체 형식과 후렴구 사용 등 형태적인 면에서 속요의 일반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특히 이 노래는 일 년 열 두 달에 맞추어 한 여인의 정감을 노래하고 있는 연가풍으로 되어 있는데 유독 서사만은 그렇지 않아, 이 노래가 궁중에서 불리어졌다는 사실과 연결시켜 볼 때 의식가의 절차를 갖추기 위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민요풍으로 시어의 구사가 뛰어나다.
사모곡(思母曲)-2
작품 연구
형식 : 비연시
출전 :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주제 : 어머니의 사랑 예찬
내용
1,2구에서는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을 호미와 낫으로 비유하고 있다. 3,4구에서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보다 깊음을 토로하고 있으며, 5,6구에서는 3,4구의 의미를 반복·강조하여 시를 끝맺고 있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부모,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노래하고 있다. '아소 님하'에서 '아소'는 감탄사로서 10구체 향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이는 시조 종장 첫 구에까지 그 형식적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상
6구체 단연의 짧은 형식에 어머니의 사랑을 예찬하는 마음과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나타나고,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그것보다 훨씬 섬세하고 깊다는 내용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어 노래의 동기를 '원부(怨父)'라고 보는 이도 있다. 단순하고 간결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 속에는 일정한 목소리를 지닌 화자가 있어 주제를 압축하여 전달하고 있다. 비유의 대상으로 낫과 호미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작자의 계층이 소박한 농민층임을 짐작케 한다. 주제면으로 보아 '오관산요', '상저가', '방아타령'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형식적 특징
고려 가요의 일반적 형식과는 달리 비연체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며, 무의미구를 제외하면 평시조의 3장 형식과 대응된다. 이 노래를 3장으로 나눌 때, 제3장에 해당하는 첫 부분이 '아소 님하'와 같은 감탄적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것에서 향가의 낙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서정적 자아
이 노래의 서정적 자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차이를 체험한 어떤 자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서정적 자아는 물론 어머니의 사랑을 예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상곡(履霜曲)
작품 연구
형식 : 고려 가요로 10구체 신라 가요에 근접한 시가
출전 : 악장가사
작자 : 미상
연대 : 미상
주제 : 남녀간의 애정
내용
님을 잃은 여인이 서리를 밟듯 방황하고 고뇌하는 생의 일면을 노래한 것으로 수절하는 여인의 체념적 세계관이 표출
성격 : 솔직 담대한 사랑의 표현
감상
거짓된 가치를 매개로 하여 더욱 견고한 천년불변의 사랑과 기다림의 약속을 하고 있는 작품으로 현실적, 일상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의 내적 시간성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초월적인 시간 속에서 사랑의 영원성을 향해 기다림을 지속하려는 약속의 재확인을 하고 있다. 결국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주관적 시간으로 화자의 시선이 내면화함으로 사랑과 기다림이 식어가는 시간성을 사랑과 기다림으로 천년 불변하겠다는 시간성을 승화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처용가(處容歌)
고려 가요로 신라 향가인 [처용가]가 발전되어 처용을 찬양한 노래로 고려 때 궁중가악으로 불리었다. 귀신을 쫓는 의식인 구라 의식 때 처용의 형용을 그린 탈을 쓰고 이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풍습이 그 뒤에 많이 행하니 이것이 곧 [처용가]가 가극으로 발전한 처용무 또는 처용희다.
작품 해설
형식 : 비연시
출전 : 악학궤범, 악장가사
성격 : 무가, 희곡적 구성
구성
대체로 4단으로 나뉘며, 제1단은 전편의 서사이며 제2단의 처용의 얼굴을 그린 대목이며 제3단은 처용의 제작에 대한 말이고 제4단은 처용이 역신을 쫓는 위력으로 노래의 끝을 맺는다.
가시리-10
작품 해설
형식 : 전편 4연으로 매 연 2구, 매 구마다 3·3·2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출전 : 악장가사
성격 : 무가, 희곡적 구성
내용 :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것인데 애절, 간결, 소박한 가락 속에 꾸밈없는 표현의 묘미가 역대 이별가 중의 으뜸이라 할 만하다.
[가시리]에서 들어나는 이별의 정조
[가시리]는 떠나는 님에 대한 절대적인 추종자세를 보여준다. 떠나는 님에게 떠나지 말라고 간청하지만 곧 감정을 절제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자세를 가진다. 님에 대한 절대적인 추종은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으로 대치되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님과 여인의 관계로 설정하여 표현한 [사미인곡]의 세계와 상통된다. 한편, 이 노래가 순수하게 님에 대한 이별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할 때 여기에서의 이별의 정서는 [진달래꽃]의 이별의 정서와 상통한다.
이별의 정한의 맥
한국 여인의 보편적 정서인 '이별의 정한'은 고구려의 [황조가]에서 고려 속요인 [서경별곡] 한시인 정지상의 [송인], 황진이의 시조, 민요의 [아리랑],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같은 작품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서정적 자아가 보여 주는 정서는 조금씩 다르다. [가시리]의 경우 자기희생과 감정의 절제를 통해 재회를 기약하고 있으며, 이런 감정은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황조가]에서는 이별의 정한이 '꾀꼬리'라는 대상을 매개로 하여 부각된 데 반해 [가시리]에서는 직선적이다.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가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는 [서경별곡]은 이별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함께 있는 행복과 애정을 강조한 것에 비해 [가시리]는 자기 희생과 감정의 절제를 통해서 재회를 기약하고 있다. [진달래꽃]의 경우에는 님에게 돌아와 달라고 하지 않는 점에서 [가시리]보다 더 감정의 절제와 희생의 자세를 보여 준다.
정석가(鄭石歌)-1
작품 연구
형식 : 분절체, 3음보 (3·3·4)
출전 : 악장가사 (시용향악보에는 제 1 연만 실려 있음)
표현 : 과장법, 역설법, 반어법
주제 : 님과의 변함없는 사랑 (태평성대의 기원)
성격 : 축도가
의의
영원 무궁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으로 가장 뛰어나다.
불가능한 사실을 전제로한 완곡한 표현법을 살린 작품
감상
정석가의 특징은 님과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염원을 역설적·반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밟으면 곧 마른 소리를 내는 모래밭에 심은 구운 밤에서 움이 튼다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과장과 그러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날 그 순간에나 님과 이별하여지이다라는 것은 절대로 임과 헤어질 수 없다는 간절한 기원의 목소리인 것이다. 즉 정석가를 노래 부르는 시적 자아는 님과 '이별하게 되지 말아지이다'를 빌기 위해 '이별하여지이다'라고 기원하고 있다. 어떠한 상황이나 이유로도 끊을 수 없는 간절한 사랑을 멋들어진 기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야 말로 이 작품의 멋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구조를 살펴보면, 1연에서 이미 제시해 놓은 주제를 다음 연들이 같은 형식에 담아 변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의 구조, 혹은 나열 형식은 민요가 지닌 형식적 특성과 일치하고 있다. 이 노래는 <고려사> 등 문헌에 그 명칭이나 내용에 대한 기록이나 인용이 없고 다만 <악장가사>에 실려 있을 뿐이다. 노래의 운율 및 정조로 보아 고려 가요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여 제 2 연에서 5연까지 등장한 소재 가운데 '구운밤'과 '쇼'는 농민 생활의 반영이요, '연꽃'은 불교 생활의 반영이며, '텰릭'은 이 노래의 지은이가 적어도 '텰릭'을 입을 수 있었던 신분임을 알려 준다고 하겠다. 정석가에서 특이한 것은 노래의 끝연이 [서경별곡]의 제 2 연과 같다는 것인데, 원작이 오랫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의식적으로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청산별곡(靑山別曲)-12
작품 해설
형식 : 전 8연, 기조는 3·3·2조
출전 :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악학편고
연대 : 미상
구성 : 기·승·전·결의 4단 구성(5연과 6연의 위치를 바꾸어 2단 구성으로 보기도 한다.)
배경 : 척신의 전횡, 무신의 횡포, 몽고군의 치입 등 내우외환이 계속되어 양심적인 지성인 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안심 입명 할 수가 없었다.
사상 : 극단적인 현실도피 내지는 현실 부정의 사상.
내용 : 고뇌와 비탄에 가득찬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술뿐이라는 생각을 나타낸 노래.
주제 : 삶의 고뇌와 비애, 실연의 애상.
서정적 자아와 주제에 대한 견해
이 노래는 서정적 자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따라서 이 노래의 서정적 자아가 누구냐에 따라 주제도 달라질 수 있다. 첫째, 유랑민이라는 견해는 청산에 들어가 머루나 다래를 따먹고 살아야 하는 민중의 괴로운 삶, 특히 유랑민의 처지를 나타낸 민요이다. 둘째, 실연한 사람이라는 견해는 실연의 슬픔을 잊기 위하여 청산으로 도피하고 싶어하는 노래이다. 셋째, 지식인이라는 견해는 속세의 번뇌를 해소하기 위해 청산을 찾고 기적과 위안을 구하면서도 삶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지식인의 노래이다. 이 경우라면 이 노래가 민요였으리라는 가정은 부정되고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표현으로 보아 창작 가요의 성격을 띤다.
성격
청산별곡은 고려 시대 노래 중의 하나이다. <시용향악보>에 첫 연의 악보가 실려 있어 첫 연이 곡조에 맞추어 나머지 연도 노래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 노래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노래말은 민요가 지니는 특성을 보이고 있어 민간의 노래가 궁중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감상
이 노래가 고려 가요라는 근거는 없으나, 구성 방법이나 시상·정조가 그것과 비슷하므로 고려 가요로 간주한다. 이 노래는 고려 시대 사람들의 생활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는데 그것은 자연에 대한 사랑, 현실 도피, 은둔 의식, 낙천적 의식 등이다. 이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척신들의 횡포와 무신들의 무단 통치, 내우 외환의 정세 등이 있다. 작품의 특징은 'ㄹ'음이 연속되어 가락이 아름다운 점이며 주제는 생의 애달픔으로 인한 현실 세계의 도피와 현실의 부정이다. 그러나 애수와 실의에 차 있으면서도 그 밑에 흐르고 있는 낙천적인 생활과 유원한 정조를 볼 수 있는데 그 때 사람들의 생활 정서가 반영된 고려 가요 중 걸작의 하나다.
의의 : 고려 가요 중 서경별곡과 함께 비유성이 가장 뛰어나며, 문학성이 빼어난 작품이다.
서경별곡(西京別曲)-2
작품 정리
형식 : 고려속요
출전 :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구성 : 전 3연 14절 분연체
표현 : 반복법
내용 : 서경을 무대로 한 남녀간의 이별을 노래
주제 : 이별의 정한
성격 : 이별가 (남녀 상열지사)
의의 : 고려속요 중 '청산별곡'과 함께 창작성이 뛰어나며 문학성이 높다.
감상
골계미를 함축하고 있는 이 노래는 '가시리'와 함께 별리의 노래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서경과 대동강이라는 구체적 지명을 드러냄으로써 강한 향토애를 표현하고 있다. 대동강을 경계로하여 미지의 세계, 나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는 점에서 '대동강'은 '이별의 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서경'은 '이별이 없는 사랑의 세계'라는 의식을 담고 있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는 적극적이고 꾸밈이 없는 그리고 활발했던 당대의 여인들의 모습을 소박하게 담고 있다고 하겠다.
[서경별곡]에 나타나는 여인의 성격
[서경별곡]은 [가시리]와 함께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고려 속요이다. 그러면서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가 여성적이라는 데에도 공통적인 면을 지닌다. 그러나 [가시리]에 나타나는 서정적 자아가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인고와 순종을 미덕으로 간직하는 여인의 성격을 지녔다면, [서경별곡]의 서정적 자아는 적극적이고 활달했던 고려 시대 서경의 여인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자기 희생과 감정의 절제를 통해서 재회를 기약하고 있는 [가시리]와는 달리 [서경별곡]은 이별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함께 있는 행복과 애정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제3연에 나타나는 '사공'과 '그의 아내'는 사실은 남은 여인과 떠나는 임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공은 그으이 아내가 음란한 것을 몰라서 대동강을 건너 보내 주지만, 자신을 떠나는 임이 대동강을 건너기만 하면 곧 다른 연인에게 정을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에서 골계적인 미를 발견할 수 있다.
[서경별곡]을 가르치기 위한 발문
'질삼뵈 리시고'의 문맥적 뜻은
서정적 자아가 사공을 꾸짖는 이유는
이 노래의 내용을 공간적 배경과 주제를 연관지어 이야기로 해 보라
이 노래의 형태를 후렴의 구실과 같은 말이 반복되는 이유를 들어 설명해 보라
나의 임이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하겠는지 예상되는 행동을 발표해 보라
고려 속요의 전반적인 특징과 관련하여 같은 연이 다른 노래에 그대로 사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 속요가 기본적으로 민요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개인이 창작한 노래가 아니라 공동이 참여하여 만들고 부르는 구비문학적 요소가 있다. 따라서 민요의 사설은 작품이 다르더라도 서로 차용할 수 있다. 서경별곡 2연과 정석가 6연이 서로 똑같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이 노래가 민간에서 불린 민요임을 나타낸다.
쌍화점(雙花店)
작품 연구
형식 : 4연
출전 : 악장가사, 악학편고, 시용향악보
작자 : 미상
연대 : 고려 충렬왕대 (A.D. 275-308)
내용 : 남녀간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유녀의 남녀상열지사
주제 : 어디에서나 건전한 인간의 삶이 상실 됨
본문 해설
결과적으로 음란한 노래가 되고 말았지만, 그 배후에 깔린 정조는 약자의 설움이고, 또 쓰 디쓴 자학적인 시니시즘이기도 하다
고려 여인의 성적 대상을 '回回아비, 사주, 우뭇 龍, 그 짓 아비'로 나타냄으로써 고려시대의 성적 퇴폐를 반영한 것이다.
龍이란 곧 권력자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우뭇 龍'은 궁중의 염사를 메타포한 것이기도 하지만 龍이 지니는 이미지를 생각할 때 여 인의 컴플렉스가 반영되어 어떤 성적인 욕구의 잠재의식이 한 이미저리로 나타난 것이다.
의의
[쌍화점]은 고려시대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한편 여인의 성적 컴플렉스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여인의 성적 억압의 상황을 시가형태로 표현한 작품이다.
만전춘(滿殿春)
작품 연구
형식 : 전 5 연
출전 :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주제 : 님에 대한 절대적 사랑 염원
내용 : 유녀의 애정
성격 : 남녀 상열지사
의의 : 당시의 사회상과 정조관을 여실히 반영한 노래이다.
내용 연구
전 5 연으로 되어 있는 이 노래는 고려 가요가 가지고 있는 주제와 소재면의 공통적인 특징을 잘 구비하고 있다. 내용은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노래한 것으로 노골적이고 퇴영적인 표현 기교를 거침없이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노래 속에 담겨 있는 차원 높은 비유법과 이미지의 전개는 매우 신선한 감을 준다.
감상
만전춘별사는 궁궐의 뜰에 봄은 가득한데 임이 돌아보아 주지 않음을 탄식하며, 궁녀로서 왕과의 해후로 봄밤의 사랑이 가득한 나날을 영원으로 향유하고 싶은 강한 기원을 보여주고 있고 초월적 시간속에 상상하며 영원을 사모하며 현재화하려는 기원을 담고 있다. 봄밤에 임과의 해후를 상상적으로라도 현재화하여 황홀을 지속하려는 소망을 표현하고 있어서 자연적 시간을 주관적 시간으로 환원하여 수용하고, 내면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체가
정의
고려 고종 때 발생하여 조선 전기까지 약 350년간 고려 속요와 대립된 귀족의 노래로서 경기하여가, 별곡체 등으로 불린다.
형성 배경
고려 중기 이후 무신들이 정권을 잡게 되자, 문신들은 무신에게 아첨하여 출세하거나 아니면 무신을 피하여 자연 속으로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문신들에 의하여 풍류 생활을 노래하는 새로운 시형이 창안되었다. 중국식 사(詞)의 영향을 받은 위에 한국식 운율을 교묘히 융합시킨 이 형식은, 인명이나 물명을 한자로 나열하고 끝에는 이두식 표기로 '경기하여', 또는 '경긔 엇더?榻舅卵?'라는 후렴을 취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 후렴에 연유하여 노래의 형식명을 경기체가 또는 경기하여가라고 하며, 이 노래는 공통적으로 제목에 별곡이라는 말이 붙으므로 별곡체라고도 하게 된 것이다.
경기체가의 개관
고려 고종 3년(1216) 사대부들에 의해 [한림별곡]이 지어진 이후 110년이 지나 안축에 의해 [관동별곡], [죽계별곡]의 창작으로 하나의 시가 장르로 성립하게 되었으나 [한림별곡]의 형식에 다소 벗어났다. 조선조에 이르러 초기에는 관학파의 사대부들에 의해 창작된 경기체가는 사대부적 이상이 투사된 자연과의 조화를 노래하는 경향에서 사대부의 이상이 강조되는 경향이거나 이념 지향적인 교술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형식은 대부분 변격으로 기울어졌는데 그 이유는 궁중악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악곡에 맞춘 현상의 결과로 추측된다. 경기체가의 소멸시기인 조선조 중종, 명종, 선조 대에 이르러 재도지문(載道之文)의 문학관을 가진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개인 신분의 사대부적 이상을 노래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졌고, 형식도 각 장에 있어서 행의 수와 율격이 파격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경기체가의 소멸 원인은 결국 재도지문의 문학관을 지닌 사림파의 등장이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가사, 시조의 융성이 간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체가의 기원
경기체가는 우리 시가에서의 기원설이 보다 설득력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는데 경기체가의 연장 형식은 당시 속요 형식의 영향으로 보인다. 경기체가나 속요가 같이 궁중의 속악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속악의 가사로 경기체가가 지어짐으로 해서 연장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경기체가의 제 4행과 제 5행에서 두 개의 구조적 단위(전대절과 후소절)로 양분되는 것을 향가의 영향으로 보인다. 향가와 경기체가의 작자층 모두 당대 상층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추정 가능하다. 또한 경기체가의 3음보격과 4음보 격 및 3·3·4음절수와 4·4·4음절수는 당시의 속요와 민요에서 충분히 차용 가능하다. 단지 노래의 대부분이 한자어로 나열된 것을 경기체가를 처음 창작한 계층이 한시문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관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발생 동기
귀족들의 특권 의식과 유흥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에서 나왔다.
문신들의 풍류생활에서 나왔다.
지나치게 융성하게 된 한문학에 대한 염증을 느낀 데서 비롯되었다.
경기체가의 형식과 율격
몇 개의 장이 중첩되어 한 작품을 이루는 연장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 장은 6행으로 되어있되 제 4행(전대절)과 제 5행(후소절)에서 두 개의 구조적 단위로 양분되는 분절형식이다.
제 4행과 6행에는 '위 - 경(景)긔 엇더?榻舅卵?'가 오는 것이 원칙이다.
제 5행의 4음보 가운데 뒤 2음보는 앞 2음보의 가사를 반복한다. 제 1-3행은 매 행이 3음보이며 제 5행은 4음보가 원칙이다.
음수율은 1·2행이 3·3·4 제 3행이 4·4·4 제 5 행이 4·4·4·4 음절로 고정되어 있다.
내용
최초의 경기체가인 한림별곡의 내용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무신들의 지배 아래서의 문신들의 정신적 갈등에서 생긴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기풍을 노래한 것이라는 설, 무신 귀족층의 멋과 풍류를 칭송하기 위한 문신들의 의도적인 노래라는 설, 그리고 신흥 사대부인 문인들의 활기에 찬 감정과 의식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는 설 등이다. 어떻든 귀족 사회의 교양·기호·풍류는 물론 호사한 생활과 향락을 노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뒤로는 서경을 노래하는 것이 나타났고, 조선 초기에는 건국을 칭송하는 악장이 이 형식으로 지어졌다.
경기체가와 향가의 다른점
경기체가와 속요의 다른 점
특징
고려시대 경기체가의 특징
한학자들의 파한에서 발생한 과도기적인 시가이다.
한문구를 나열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이두를 사용했다.
내용은 퇴폐적, 고답적, 현실 도피적이다.
풍류적이고 향락적인 점에 치우친 면도 있으나, 신진 사류들의 의욕적인 기개와 의식세 계를 나타내고 있다.
조선시대 경기체가의 특징
조선 초기의 송축류는 악장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악장 문학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기체가의 마지막 작품은 선조 때의 '독락팔곡'으로 알려져 왔으나, 철종 때의 '충효가'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말기까지 계속 지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경기체가는 후세에 오면서 변격, 파격이 생겨서 그 형태가 다른 시가, 곧 악장이나 가사에 가까워지기는 하였으나 명맥은 연면히 이어져 양반, 한학자들의 풍류가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작품으로는, 조선 전기의 것이 25편(악장으로 쓰인 것 포함), 조선 후기의 것이 1편이다.
의의
경기체가는 운율적으로는 음악적이지만 내용에 문학성이 적으며, 한시도 우리나라 시도 아닌 중간적인 존재로서 일종의 기형적인 문학이다. 그러나, 한국적인 자연스러운 운율과 정제된 형식미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까지 한학자들이 애용한 시이다.
작품
한림별곡(翰林別曲)-13
현존해 오는 최초의 경기체가로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선비들의 합작으로 모두 8장으로 이루어졌다. 고종 때는 정중부가 집권, 무신의 전횡시대라 문신들은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 무신들의 문객으로서 무신들의 호화로운 연락에 참여, 현실에 영합 하는 등 퇴폐적인 향락에 취하거나 산수간에 시주를 벗삼아 현실 도피적인 풍류를 일삼았다. [한림별곡]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귀족 양반 계급의 현실 도피에서 오는 은둔적이고 향락적인 풍류 생활을 별곡체의 음율에 맞추어 노래한 기악의 가사이며 귀족·한림 사이를 풍미한 한문체의 문학이다. 각 장은 시부·음악·누각·서적·명필·명주·화훼·추천 등의 순으로 노래했다. 각기 명문·명집·명필·명주·명화·명악 등 당대의 명류를 늘어 놓아 노래함으로써 귀족들의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 감정과 풍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끝 연에 이르러 치정의 절정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가사의 형식은 구투를 벗어나 종래의 악부나 사곡 등 중국 시가의 형식인 별곡체의 독특한 운율과 구법을 사용했다. 곧 전편 8연의 각 연은 '(葉)(葉)'을 경계로 하여 전후 2강(腔)으로 나뉘며 4구 후강 2구 모두 6구체로 되어 있다. [한림별곡]은 1연이 334·334·444·334·4444·334로 그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 [한림별곡]이 귀족의 신체가요로 공사의 연석이 성행함에 따라 이 별곡체는 고려 이조를 통해 많은 모방을 보게 되었다. 즉 고려 충숙왕대 안축이 지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은 [한림별곡]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며 이조에 들어와서는 [한림별곡]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새로운 가사 형식을 취하여 이를 계승·모방했다. [한림별곡]의 가사는 '고려사'악지 , '악학궤범', '악장가사'에 전하는데 '고려사'악지에 수록된 가사는 한문과 이두로 되어 있다.
이 시에 사용된 시어는 함축적이기보다는 지시적이며 개인의 내면 정서보다는 객관적인 사물들을 그대로 운율에 맞게 나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림별곡]이 조선조에 와서 배척을 받았는데, 도를 숭상했던 조선조의 선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용이 인간의 심성을 숭양하고 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향락적인 것으로만 일관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조 선비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관동별곡(關東別曲)
고려 충숙왕 때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로 이 노래는 안축이 충숙왕 17년 강릉도 존무사로 갔을 때 관동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지은 것으로 이두문이 많이 쓰였다. 형식은 모두 8장이며 첫 장은 서사로 순찰경, 제 2 장 이하는 학성·총석정·삼일포·선유담·낙산사·강릉·정선 등의 풍경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안축의 문집인 '근재집'에 실려 전한다.
죽계별곡(竹溪別曲)
경기체가로 고려 충숙왕 때 근재 안축이 지었다. 모두 5장이며 문장은 이두로 되어 '근재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강릉도 순무사로 있던 안축이 그의 고향인 풍기 땅 죽계의 경치를 읊은 것이다. 내용은 대부분 퇴폐적이며 향락적이다. 이 경기체가는 이조 시대의 악장을 거쳐 가사로 발전되었다.
악장
정의
악장이란 송축가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선 초기에 주로 조선국의 건국 내지 문물제도를 찬양한 것으로, 공·사 잔치나 종묘 제향 때 노래로 부르기 위하여 지은 시가이다.
개념
일반적인 개념
궁중에서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쓰이는 노래 가사를 두고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음악적 성격에 따라 아악, 당악, 향악이 있었으며 행사의 성격에 따라 제향(祭享)과 연향(宴享)이 있었다.
국문학사상 개념
주로 조선왕조 초기(15세기)에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 널리 입증하고 통치 질서를 확립할 목적으로 창작된 시가이다.
성격
창업주와 왕업을 기리는 송도적 성격을 띤다.
발생
이 태조의 건국 창업을 처음에는 반대도 하고 방관도 하던 사람들이 국기가 공고히 다져지고 모든 제도가 새로이 정비·개혁되면서부터 차차 조선의 건국과 문물 제도를 찬양하고 임금의 만수 무강과 자손의 번창을 축원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되었다.
특히 세종 27년에는 정인지, 권제, 안지 등이 왕명을 받아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부처의 공덕을 찬양한 '월인천강지곡' 등이 지어졌다. 그러나 이는 특권층 귀족의 문학이었기 때문에 얼마간 성행하다가 성종 때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형식
일정한 틀은 없으나 초기에는 중국 고시체의 형태를 본받았고, 훈민정음의 제정을 보게 되자 약간의 국어가 섞인 현토체로 바뀌었다가 후에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과 같은 정형성을 띤 신체 형식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를 신체·속요체·경기체가체·한시체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기본형은 2구 2절씩, 변조형은 4구 이내나 이상, 또는 2절 이상으로 되었다.
내용
조선의 건국이 천명에 의한 것이었음과 문물제도를 찬양하고, 임금의 만수 무강과 자손의 번창을 축원하고, 후대 왕을 권계한 내용들이었다.
문학성과 문학사적 성격
조선조 초기에 만들어진 새로운 문학 양식이며, 몇 개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과장과 야유가 심하고 목적성을 띤 장르였기 때문에 문학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은 영웅 서사시로서 문학성이 인정되고 있다. 특히 특권층의 문학으로 향유 계층이 엷었고 목적성이 강했기 때문에 수명이 길지 못 했다.
작자의 계층
대부분 조선조의 권선들이었으며, 향유 계층도 주로 특권 귀족층에 한정되어 있어 진정한 국민 문학으로 성장하기에는 결정적인 취약점을 지녔다.
정리
세조 때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과 맹사성을 중심으로 악장과 악제를 정리하게 되었다.
연주 기관
악장을 연주하는 아악을 담당한 기관으로는 전악서, 아악서, 장악원 등이 있었다.
수록 문헌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에 실려 전한다.
악장 문학의 소멸 원인
문학 형태가 양반 귀족 계급에 국한
내용이 개국의 찬양과 왕업의 영원을 기원하는 것이었으나 왕권의 안정으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조와 가사가 유행했다.
주요 작품
龍 飛 御 天 歌-11
개관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이것에 의해 기록된 최초의 국문학 작품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 가장 부합된 표기법을 사용하였으며, 15세기 중엽 세종대의 우리말의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문헌이다. 내용면에서 의도적인 목적성을 띤 송축가이기는 하나, 악장체 서사시의 본보기로서 국문학의 발달과 국어사적 흐름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형식
악장의 기본형인 2절 4구로 되어 있다.
창작 동기
내적 동기
조선 건국의 합리화(정당성) 도모 ;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알려 민심의 귀의를 도모
후대 왕에 대한 권계 및 귀감으로 삼고자 지었다.
외적 동기
훈민정음의 실용성 여부를 시험
국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지었다.
표기상의 특징
8종성과 함께 'ㅈ, ㅊ, ㅍ'이 종성으로 쓰인 표의적 표기법이 쓰였다. (ex 곶, 좇거늘, 믈깊고)
모음 조화가 철저하게 지켜졌다.
사잇소리 표기가 훈민정음 언해본보다 더 원칙적으로 지켜졌다.
ㅸ, ㆆ, ㆁ, ㆍ 등이 모두 나타나며, 어두에 ㅳ, ㅽ, ㅴ, ㅷ 등이 보인다.
연철 표기 형식을 취했으며, 한자 표기 이외에는 방점이 사용되었다.
성격
영웅적인 인물들의 행위를 들어 서술하고 찬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영웅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국문학사상 의의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으로 훈민정음에 권위를 부여하였다.
훈민정음으로 된 최초의 장편 서사시이다.
악장 문학의 대표작이다.
어법 의식과 표기법이 엄정하여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주석은 역사와 지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학습 목표
각 장을 현대어로 풀이할 수 있다.
작품의 구조적 특징을 이해할 수 있다.
문학 언어의 주술성을 이해하고 작품의 창작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형상화의 방법을 알고 상징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2
작자 : 세종대왕
연대 : 세종 29년(1447) 창작, 세종 31년(1449) 간행
형식 : 2절 4구체
주제 :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노래
배경 사상 : 불교의 연을 중심으로 한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제작 동기 : 소헌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 대군을 시켜 석가의 일대기를 찬술한 책 인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이 감명을 받아 손수 지은 작품이다.
표기상 특징
당시 표기법은 연철이 원칙이나 분철도 많이 보인다.
당시 문헌들이 한자 밑에 국문으로 음을 달았으나 여기서는 국문 밑에 한자를 썼다.
종성부용초성의 제자원리를 따랐다.
관형격 사잇소리는 'ㅅ'만을 사용했다.
받침 없는 한자음 아래 사용하던 'ㅇ'을 사용하지 않았다.
국문학사적 의의
'용비어천가'와 함께 15세기 2대 장편 서사시이며, 대표적인 악장 문학이다.
15세기 국어의 모습과 당시의 표기법의 특이성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용비어천가 이후 정음 문학 최고(最古) 자료의 하나로서 한글 자형의 변천과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불교 문학의 정화(精華)이다.
'용비어천가'와 함께 악장체 서사시이며 송축가라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이 노래는 송축가 중 찬불가라는 점이 다르다. (악장이면서도 궁중 음악으로 불리어지지 않았다.)
기타
'월인천강'의 뜻은 '월인석보' 제 1 장 첫머리에 '부처가 수 많은 세상에 몸을 바꾸어 태어나 중생을 교화하심이 마치 달이 천 개가 넘는 수 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달'은 '석가불'을 비유하는 것이고, '강'은 '중생'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상·중·하의 상권 194장만 전하고 있다.
언해
정의
중국의 불경·경서 ·문학류 등을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언해 작품을 이른다.
형성
훈민정음의 창제는 모든 문화 사업에 급진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번역 사업이 크게 활기를 띠었다. 집현전과 그 보좌 역할을 하던 언문청을 중심으로 하여 운서 언해, 간경도감을 중심으로 하여 불경 언해, 홍문관을 중심으로 하여 문학서를 활발히 번역하였다. 또, 세종·세조 때에 시작되었던 경서의 언해는 중종 때에 이르러 크게 활기를 띠었다.
특색
번역 사업은 조정에서 직접 관장하였다.
운서·불경·문학서를 골고루 번역하였다.
번역 사업은 우리 문학을 발전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의의
세조 때 이루어진 '월인석보'와 성종 때 이루어진 '두시 언해' 초간본, 인조 때 이루어진 '두시 언해' 중간본은 근세 전기 국어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중국의 문학을 소개하고, 우리 문학과의 비교·연구 등에 크게 이바지한 데 있다.
불경 언해
조선은 척불 숭유의 정책을 써서 정치적으로는 유교 국가였으나, 제도 종교인 불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불경 언해가 이루어졌고 궁중 비빈들의 비호 아래 계속 신봉되었다.
불경 번역은 세조 초에 설치된 간경도감에서 주도하였다.
경서 언해
경서 언해는 최초로 세종 때 이루어졌으나 간행을 보지 못하고, 중종 때 교정청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경서 언해는 중종 연간에 가장 활발하였고, 유교 정치의 기틀도 이 때에 확실하게 잡혔다.
문학서 언해
문학서의 언해는 국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여기에 열거한 외에도 삼국지·수호전·서유기 등의 소설류도 있다.
번역 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분류 두공부시 언해다.
작품
석보상절(釋譜詳節)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지은 석가모니의 전기로 소현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당나라 도선이 엮은 석가보 및 그 밖의 법화경, 지장경, 등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내용은 책명과 같이 석가모니의 가보를 자세하고 절도있게 기록했다. 총 24권이 있었던 듯한데 현존하는 것으로는 제 6·9·13·19 권이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또 11권과 23·24권이 전하며 그 밖에 월인석보를 통해 원문의 일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월인석보(月印釋譜)
조선 세조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해 엮은 책으로 1459년에 간행되었다. 모두30권쯤 된 것으로 추측되나 현존하는 것은 몇 권 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1·2·7·8·9·10·13·14·17·18·21·23권이 전한다. 이 책의 권 1에 '훈민정음 언해'가 실려 있다.
두시언해
두시언해는 성당(盛唐)때의 시인 두 보의 시를 국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언해 문학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종류 : 번역시, 서정시, 정형시
간행 동기
교훈적이고 우국적인 정서를 노래하고 있어, 유교적 사상 확립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한시 학습의 본을 삼는 동시에 두시의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의의
문학적 의의
국문학사상 최초의 번역 시집
한시 및 한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
어학적 의의
초간본과 중간본과의 간행 연대 차이가 150년 간이나 되어, 그 동안 우리말의 음운 및 어휘 변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출전 : 분류두공부시 언해(分類杜工部詩 諺解) *약칭 : 두시언해(杜詩諺解)
언해자
초간 두시언해 : 유윤겸, 조위, 의침
중간 두시언해 : 오숙, 김상복
시조(時調)
정의
초장, 중장, 종장의 3장 45자 내외의 형식으로 된 우리 민족 고유의 정형시로 우리 민족의 성정을 담기에 알맞은 시가이다.
명칭
원래 장가(長歌)의 대립적 개념인 단가(短歌)라고 불렀는데, 조선 영조 때 가객(歌客) 이세춘이 '時節歌調'라는 곡조를 만든 후부터 시조(時調)라고 부르게 되었다. '시절가조'란 당대의 유행가조라는 뜻으로 음악적인 명칭이었으나 최남선, 이병기 등의 연구자들에 의해 문학의 형태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기원
시조 기원에 대한 학설은 크게 외래 기원설(外來起源說)과 재래 기원설(在來起源說)로 나눌 수 있다. 외래 기원설은 한시와 시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재래 기원설은 우리 전통 시가에서 기원을 찾으려는 견해로서 향가나 고려 속요 등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학설이다.
첫째, 한시 기원설은 한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시조가 발생하였다는 견해이다.
둘째, 민요·무가 기원설은 특정 지역에서 채록한 무가가 시조의 3장 형식과 닮은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민요의 노랫가락과 거의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 향가 기원설은 향가의 의미 단락이 내용상 3단으로 나누어지고 {균여전}에서 향가의 형식에 대해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이는 三句六名의 의미가 지조의 3장 구성과 흡사하다는 점과 향가의 차사가 있는 낙구와 시조 종장의 감탄구가 비슷하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시조의 기원을 향가에서 찾고 있다.
넷째, 고려 속요 기원설은 속요에서 여음과 후렴을 빼고 有意語만 독립시켜 놓으면 3장 6구체가 되는 [정읍사]와 하나의 장(章)이 시조의 형태(4음보)와 흡사한 [만전춘], [동동] 등을 보면 시조가 고려 속요에서 온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로 시조의 기원을 탐색해 시조는 시조 이전의 전통 시가와 견주어 볼 때 고려 속요의 分章은 그대로 시조 형식과 동일하며 10구체 향가 역시 그 짜임으로 볼 때 시조의 형식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조가 노래로 불려졌듯이 향가와 속요 모두 노래로 불려졌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시조의 발생 시기
고려 말엽 발생설(통설)
시조의 발생 시기는 시조의 기원설과 맞물려서 제기된다. 고려 말엽 발생설은 고려 속요와 시조의 형태적 유사성과 문헌에 나와 있는 작품들(회고가, 단심가, 하여가)의 작자를 그대로 믿는다는 가정하에서 주장된 것이다.
16세기 발생설
시조의 16세기 발생설은 고려 말엽 발생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시조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조들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고, 시조라는 명칭이 고려 시대에는 없었으며, 안정된 시형식인 시조가 정치적 변혁기인 고려 말기에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들을 들면서 16세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형성
시조가 그 형식이 완전히 틀이 잡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 속에서 여러 가지 문학 형태가 변천을 거듭하면서 우리말의 3·4음의 가락이 곁들여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고대의 신요, 민요에서 그 원형이 싹이 트고, 정형시의 대표적인 형식인 향가와 고려 가요 및 한시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 자생적으로 시조의 형식이 완성된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시조의 형성은 고려 중엽이고, 시형이 완성된 것은 고려 말엽으로 보고 있다. 시조는 발생 초기에는 단가의 가곡으로 영조 시대에는 시조의 창곡으로 흘러오다가 신문학기 이후에 시조시로서의 본격적인 시 형태로 발전하였다.
시조의 형식과 율격
시조의 일반적 형식은 3장 6구 45자 내외를 기본형으로 음수율은 3·4조 또는 4·4조가 기조가 되어 있으나 한두 자의 가감은 무방하나 4음보의 율격을 이루며 종장의 첫 음보는 3음절로 고정되어 있고, 둘째 음보는 5음절 이상이어야 한다.
시조의 분류
형태상
평시조 : 단형 시조로서, 시조의 대표적인 형태다. 초·중·종 3장으로 이루어진다. 각 장은 다시 2구씩으로 나뉘어져 6구가 되며 45자 내외의 자수율을 가진다.
시조의 기본형 또는 정격이다.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고려 중엽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말과 조선 초에 정제된 형식을 갖추었다.
작가 계층은 양반 사대부가 많았으므로, 그 바탕 사상은 유교의 충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절의, 충절, 한정, 호기 등을 노래했다.
숭고미, 우아미, 비장미를 추구했다.
엇시조 : 중형 시조로서, 초장이나 중장, 종장 중 어느 한 장이 평시조보다 구절 수가 길어지는 시조이다. 영·정 시대 이후에 발달한 변형이다.
사설 시조 : 장형 시조로서, 초장의 첫 구를 제외하고 전편이 평시조보다 매우 길어진다. 특히 중장의 신축성이 가장 많았다.
조선 후기의 실용적인 산문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작가 계층은 평민, 부녀자, 기녀 등으로 신분상의 제한이 없다.
일상 생활에서 소재를 가져와 진실하고 솔직한 생활 감정을 노래했다.
때로 현실을 풍자하고 고발하는 의식도 표현했다.
주로 희극미, 골계미를 추구하고 있다.
근대적 시정신의 싹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특징
형태상의 변화 (중장의 장형화)
소재의 다양화
작자층의 확대
사설시조의 산문화 된 경향과 정제되지 못한 시어의 선택 등은 시조 문학 쇠퇴에 영향
연시조 : 평시조 두 수 이상으로 읊은 시조의 형태이다.
제작 연대상
고시조 : 갑오경장 이전의 작품
현대 시조 : 갑오경장 이후의 작품
고시조와 현대 시조의 차이점
시행의 배열 방법상
장별 배행 시조 : 장별, 곧 3행으로 쓴 작품
구별 배행 시조 : 구별, 곧 6행으로 쓴 작품 (현대시조에만 있음)
악곡상
평시조, 중어리 시조, 지름 시조 등으로 구분한다.
시조의 전개 과정
고려 말의 시조
주요 내용은 국가에 대한 충성, 기울어져 가는 왕조에 대한 걱정과 한탄.
고려말의 시조는 주로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으로 조선 초기의 작품들처럼 한두 가지의 의식으로 정리되지 않고, 다양한 소재들을 취한 것이 특징이다. 늙음에 대한 탄식과 한탄, 무인이 가진 우국충절, 혼란한 정치에 대한 원망, 쇠락해 가는 고려 왕조에 대한 번민 등이 있다.
조선 초기의 시조
선초 사대부들이 지은 시조들은 왕조 교체라는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멸망한 고려 왕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회고(懷古)의 시조와 새롭게 건설된 왕조를 찬양하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노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시조(16세기 - 임·병 양란)
이 시기는 당쟁이 격화되던 때로 당쟁에서 이겨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관료에 있으면서 문학을 하게 되고, 당쟁에서 져 산림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시골에서 은거하여 후학을 길러서 다음을 노리는 생활을 하면서 문학을 하게 되는데 이른바 관객문학(館客文學)과 처사문학(處士文學)이라고 한다. 이러한 처사문학이 소위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추구하였는데 16세기의 시조들은 이러한 경향성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강호가도의 길을 연 사람은 이현보와 송순으로, 이현보로부터 시작하는 영남가단은 강호를 바탕으로 다양한 시세계를 펼친 작품들이 많은데, 주세붕, 이황 등이 이에 속하며, 송순으로부터 시작하는 호남가단은 자연과 벗하는 풍류 정신을 표현하였는데 정철, 임제 등이 이에 속한다.
벼슬에서 물러나 사림파를 형성했던 사람들이 시조를 많이 지은 이유는, 자연 속에서 자신의 심성을 찾고 스승과 제자들이 모여 교류하는데 있어서는 시조의 화답을 통한 사귐이 필요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읊조리는 한시보다는 우리말로 되어 있으면서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시조가 중요한 교류 수단이었다.
영남가단의 시조 작품들은 주로 도학을 표방하고 문학의 사상적 측면을 강조하였고, 호남가단의 작품들은 사상적 측면은 영남가단의 작품에 비해서 미약하지만 표현기법이나 작품의 소재 등에서 규범화된 것을 배격하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경지를 노래했기 때문에 영남가단에 비해서 호남가단 작가들 중에 훌륭한 작품을 남긴 사림이 많다.
조선 중기의 시조 작품에서 특기할 사항은 일반적인 사대부 시조와는 다른 풍류 정신을 강조한 작품들과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기녀시조가 다수 존재한다. 기녀들의 시조가 표현기법이나 내용상으로도 사대부의 시조에 빠지지 않을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대부들과 함께 자리를 할 수 있었던 특수한 신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녀 시조 작가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황진이를 꼽을 수 있다. 우리말 표현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수사법까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황진이의 시조는 기녀 시조의 최고봉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후기의 시조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반의 시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계된 전쟁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사대부 시조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윤선도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임·병 양란을 겪은 조선 사회는 경제적 파탄, 양반의 증가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 천주학을 통한 만민평등 사상의 유입, 관념론에 빠졌던 성리학을 배격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의 발달 등은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 왔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문학에도 영향을 미처 시조의 경우 전쟁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내용의 작품이 나타나고 사설시조가 등장하게 되었다.(사설시조의 등장 배경)
임·병 양란 이후 17·18세기에 나타난 시조의 새로운 양상은 사설시조의 등장과 전문가객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실학 사상의 등장과 함께 17·18세기를 지나면서 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산문화 경향을 띠면서 성리학을 배경으로 했던 평시조는 그 기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시조 역시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산문화 경향으로 인하여 3행시의 형태를 깨뜨린 사설시조가 등장하였다.
17세기를 지나면서 시조의 작자층이 서민층으로 확대되면서 여항인(閭巷人)들이 시조의 창작과 가창에 대거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은 전문가단을 형성하여 활동하는 현상을 보여 준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시조창에 전념하는 전문가객은 17세기 중엽에 출현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러 구체적인 집단을 이루게 되고 이들의 활동은 19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시조창법의 개발을 통한 시조음악의 발달에 공헌하였고, 전문 가단을 형성하여 지속적인 활동과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 주요 가단(歌壇)의 중심은 김천택에 의해서 주로 움직인 '경정산가단'과 김수장에 의해 운영된 '노가재가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문가객들은 가집 편찬을 통하여 시조를 보존했는데 김천택과 김수장에 의해서 편찬된 {청구영언}과 {해동가요}는 구전되어 오던 수많은 시조들을 집대성한 문헌으로 시조 문학사에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18세기 말에 쇠퇴하기 시작한 시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도로 빨라졌다. 시조의 창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잡가나 판소리에 밀리면서 시조가 설 자리를 잃게 되었으며 작자층이 엷어진 대신 한 사람이 여러 편을 짓는 다작현상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작자로는 박효관, 안민영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전대(前代)의 '경정산가단', '노가재가단'을 승계하여 '승평계'를 조직하고 {가곡원류}를 편찬하면서 시조의 명맥을 잇기 위해 노력하였다.
주요 작품
春山(춘산)에 눈 녹인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 봄바람(청춘) : 희망적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 젊어지고 싶은 의욕
귀 밋 묵은 서리 녹여 볼가 ?搭遺? - 늙음을 한탄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지 간 곳 없다
잠시동안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 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백발)를 녹여 볼까 하노라
□ 핵심정리
1. 연대 : 고려 충혜왕 때
2. 지은이 : 우 탁
3. 출전 : 청구영언, 병와가곡집
4.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탄로가
5. 표현 : 은유법
6. 제재 : 서리 (백발)
7. 주제 : 탄로 (歎老)
구룸이 無心(무심) 말이 아마도 虛浪(허랑)?榻? - 간신 신돈에 대한 한탄
中天(중천)에 이셔 任意(임의)로 니면서 - 간신 신돈의 횡포
구 야 光明(광명)?? 날빗 라가며 덥 니 - 임금의 총명을 어둡게 함
구름이 사심이 없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하늘 높이 떠 있어 마음대로 다니면서
구태여 밝은 햇빛을 따라가며 덮느냐?
□ 핵심정리
1. 연대 : 고려 공민왕 때
2. 지은이 : 이존오
3. 출전 : 청구영언, 병와가곡집
4.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풍자시
5. 표현 : 풍유법
6. 제재 : 구름 (간신 신돈)
7. 주제 : 간신 신돈의 횡포 풍자
8. 배경 : 중 신돈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진평후'라는 벼슬에 올라 국사를 마음대로 하여 세 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白雪(백설)이 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 이씨 신흥세력 대두
반가온 梅花(매화)는 어 곳에 픠엿 고 - 우국지사를 기다리는 마음
夕陽(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 우국충정
흰 눈이 잦아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구나
(나를) 반겨 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날이 저물어 가는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핵심정리
1. 연대 : 고려 말∼조선 초
2. 지은이 : 이색
3. 출전 : 청구영언
4.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우국시
5. 제재 : 매화 (우국지사 상징)
6. 표현 : 은유법, 풍유법
7. 주제 : 우국 충정, 또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
綠 霜蹄(녹이 상제)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타고 - 녹이 상제(준마)
龍泉 雪鍔(용천 설악)을 들게 갈아 두러메고 - 용천 설악(명검)
丈夫(장부)의 위국 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 위국 충절
녹이 상제와 같은 좋은 말을 살이 오르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서 타고
용천 설악과 같은 보배로운 칼을 잘 들게 갈아서 둘러메고
대장부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된 절개를 세워 볼까 하노라
□ 핵심정리
1. 연대 : 고려 말
2. 지은이 : 최 영
3. 출전 : 청구영언, 화원약보, 대동풍아
4.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호기가
5. 제재 : 위국 충절
6. 주제 : 무인의 충절
?? 손에 막 잡고 ?? 손에 가싀 쥐고
늙는 길 가싀로 막고 오 白髮 막 로 치려터니
白髮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노 오더라
□ 핵심정리
1. 연대 : 고려 말
2. 지은이 : 우탁 (1263∼1343)
3. 출전 : 청구영언
4.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탄로가
5. 제재 : 백발
6. 표현 : 의인법
7. 주제 : 탄로(늙음을 한탄함)
□ 핵심정리
1. 연대 : 고려 말
2. 지은이 : 원천석
3. 출전 : 청구영언, 동가선
4.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회고가
5. 제재 : 고려의 멸망
6. 주제 : 고려 왕조에의 회고의 정
7. 작품 해설 : 초장의 '만월대-영화로왔던 고려 왕조(과거), 초목-황폐한 왕궁터의 무상감(현 재)'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중장에서 애상적인 피리소리의 청각적인 이미지를 대조시킨 후, 종장에서의 객에게 의탁한 자신의 회고의 정을 대비시키고 있다. 따라서, 초· 중장은 서경적이고 종장은 서정적이다.
이런들 엇 하며 저런들 엇더?湯? - 의사 타진(전제)
萬壽山 드렁츩이 어럭진들 긔 엇더?糖? - 자연 현상에 의탁
우리도 이 치 얼거져 百年 지 누리리라 - 주제장(회유)
□ 핵심정리
1. 연대 : 고려 말
2. 지은이 : 이방원(1367∼1422)
3. 출전 : 청구영언
4.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회유가
5. 제재 : 드렁츩
6. 주제 : 회유
7. 기타: 한역시 명칭은 '하여가'로 이에 답한 정몽주의 시조를 '단심가'라 한다.
□ 핵심정리
1. 지은이 : 길 재
2. 출전 : 청구영언, 동가선
3.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회고가
4. 제재 : 고려의 멸망
5. 주제 : 망국(亡國)의 한과 회고의 정
6. 작품 배경 : 절의 있는 고려 우신으로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새 왕조의 유 혹을 물리치며 망국의 한을 달랜 회고가이다.
7. 작품 해설 : 초·중의 구상적 표현과 종장의 추상적인 표현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필마' 에는 벼슬하지 않는 외로운 신세, '태평연월'은 고려 초의 흥성했던 시절, '꿈이런가'에는 무 상감이 비유적으로 나타났으며, 중장은 대조적 표현으로 두보의 시 '춘망(春望)'의 '國破山 河在 城春草木深'과 비슷한 정경으로 무상감이 구상화 되었다.
8. 작품 감상 : 고려의 옛 도읍지에 들려 인간 세상의 무상을 탄식한 회고의 시조로 나라는 망하고 사람은 없지만 자연은 예대로 변함이 없다는 고려 유신으로써의 망국의 한을 노래 한 절창이다.
赤 馬 디게 먹여 豆滿江에 싯겨 세고
龍泉劍 드 칼을 선 쳐 두러메고
丈夫의 立身揚名을 헐가 ?搭遺?
□ 핵심정리
1. 지은이 : 남 이
2. 출전 : 화원악보
3. 종류 : 형태상-평시조, 내용상-호기가
4. 제재 : 장부의 기개
5. 주제 : 대장부의 호방한 기개
삭풍은 나모 긋 불고 明月은 눈 속에 듸
만리변성에 일장검 잡고 서서
긴 람 큰 ?遍念悶? 거칠 거시 업세라
江湖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픠 자히 남다
삿갓 빗기 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몸이 칩지 아니 옴도 亦君恩이샷다
□ 핵심정리
1. 지은이 : 맹사성
2. 출전 : 청구영언
3. 명칭 : 江湖歌, 四時 閑情歌
4. 제재 : 사시의 강호생활
5. 주제 : 강호에서 자연을 즐기며, 임금의 은혜를 생각함
6. 내용 : 대자연에 파묻혀 안빈낙도를 하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이 모두 임금의 은혜라는 것
7. 의의 :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로서 이황의 '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8. 기타
1) 계절에 한 수씩 노래했다.
2) 각 수는 '강호에'로 시작하며 '역군은 이샷다'로 끝을 맺으며, 충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3) '역군은 이샷다'는 상 진의 [감군은]에서도 나온다.
<훈민가(訓民歌)> - 총 16수의 연시조
송강이 선조 13년(1580)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경치와 연군의 정을 노래한 [관동별곡]을 짓고 백성들의 교화, 계몽하기 위해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훈민가는 송나라 때의 진고령이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를 조목별로 쓴 선거권유문 13조목에다 군신(君臣), 장유(長幼), 붕우(朋友) 3조목을 추가하여 각각 한 수씩 읊은 것으로 유교의 윤리를 주제로 한 교훈가이다. 계몽적, 교훈적 노래이지만 문학적 기교가 세련되어 있으며, 연시조의 형식을 취했으나 각 수는 완전히 독립된 주제를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는 독립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① 작자 : 정철
② 주제 : 유교의 윤리
③ 성격 : 교훈적
<조홍시가>
① 작자 : 박인로
작가가 41세 때 이덕형이 작자에게 조홍시를 보냈는데, 이때 어머니를 생각하고 지은 작품이다. 1연에 비해 2-4연은 고사가 너무 많이 사용되고 한자어가 많이 등장하는 등 표현이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이 흠이나 작자의 효성스런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 총 10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는 이이가 1578년 43세 되던 해, 해주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쓸 때 지은 것으로 '고산(高山)'의 구곡(九曲) 풍경과 감회를 서곡 1수와 본곡 9수 총 10수를 읊어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함께 성리학의 대가를 이룬 작품으로 쌍벽을 이룬다. 이 작품은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 지었다고 한다. 구곡의 각 지명은 중의법을 교묘히 구사했다.
① 작자 : 이이
② 성격 : 예찬적, 교훈적
③ 주제 : 강학(講學)의 즐거움과 고산의 아름다운 경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 총 12수
이 작품은 명종 20년(1565)년 퇴계가 도산서원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할 때 지은 것으로 인간 속세를 떠나 자연에 취해 사는 자연 귀의 생활과 후진 양성을 위해 강학에 힘쓰는 학문 생활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하였다. 이 작품을 짓게 된 동기는 [한림별곡] 등 기존 시가에 대한 불만과 국문시가는 한시와 달라 노래할 수 있어 흥이 난다는 새로운 인식이었다. 우리 가곡이 무릇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이야기 할 만한 것이 못되며 이별의 '六歌'를 본떠서 이 노래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를 아이들로 하여금 익혀 부르게 하여 나쁜 마음을 씻어 버리고 서로 마음을 통하게 하고자 한다는 퇴계의 문학관이 나타나 있다.
① 작자 : 이황
② 성격 : 교훈적, 예찬적
③ 주제 : 前六曲(言志) - 사물에 접하여 일어나는 감흥 노래(자연에 동화된 생활)
後六曲(言學) - 학문과 수양에 힘쓰는 마음을 노래(학문 수양에의 길)
<매화사(梅花詞)> - 총 8수
이 시조는 매화사(梅花詞) 또는 영매가( 梅歌)라고도 하는데 모두 8수로 된 연시조이다. 작자가 헌종 6년(1840) 겨울 스승인 박효관의 산방에서 벗과 더불어 거문고로 놀 때 스승이 가꾼 매화가 책상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지은 것으로 봄의 선구자인 매화에 대하여 날카로운 감각으로 그려내어 작자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① 작자 : 안민영
* 윤선도의 작품
<견회요(遣懷謠)> - 총 5수
- 작자가 30세 때 이이첨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강원도 경원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이다.
- 성격 : 우국가, 遣懷(마음을 달램)
- 특히 5수 중 첫째 수는 고산의 가치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으로 작자의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 주제 : 연군
<만흥(漫興)>
작자가 병자호란 때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에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으려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 56세 때인 인조 20년(1642) 고향 금쇄동에 있을 때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20수 가운데 하나로 혼란한 정계에서 물러나 자연을 즐기면서 마음 편히 살려는 심경을 표현했다. 이 시조의 이면에는 현실 사회에 타협할 수 없는 절박성과 도피 사상도 함께 들어 있다.
<오우가(五友歌)>
[오우가(五友歌)]는 그의 작품 [산중신곡(山中新曲)] 가운데 있는 것으로 그의 문학적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50대 후반 해남 금쇄동에 은거해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오우(五友)'는 작자가 사랑하는 자연의 벗으로 '水, 石, 松, 竹, 月' 다섯 가지로서 전 6수로 이루어졌으며 쉬운 우리말의 장점을 살려 우리의 자연미를 노래하고 또한 작자 자신의 자연애와 관조의 경지를 나타내었다.
- 성격 : 찬미가(讚美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어부사시사]는 작자의 나이 65세인 효종 2년(1651) 보길도의 부용동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春·夏·秋·冬 4계절을 각각 10수씩 읊은 40수로 된 연시조이다. 이 노래는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어부사]를 명종 때 이현보가 [어부가] 9장으로 개작한 것을 고산이 다시 후렴구를 넣어 고친 것이다. 그러나 이현보의 [어부가]에서 시상을 빌려 왔다고는 하나, 후렴구만 빼고 나면 완전한 시조 형식을 지니면서 전혀 새로운 자기의 언어로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 작품에는 계절마다 펼쳐지는 어촌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부생활의 흥취가 후렴구와 더불어 잘 드러나 있다.
* 사설시조(辭說時調)
< 가버슨 아해ㅣ들리 (이정신)>
① 성격 : 풍자적
② 표현 : 풍자적 은유, 대화체, 의인법
③ 주제 : 약육강식의 험난한 세태 풍자
④ ' 가버슨 아해ㅣ들'과 가숭이'는 모해하는 자를, ' 가숭아'는 모해 받는 사람을 비유하여 서로 믿을 수 없는, 약육강식의 각박한 세태를 풍자하여 그 속에 오묘한 진리나 생활 철학이 담겨 있다.
<귀 리 져 귀 리>
① 성격 : 연모가
② 표현 : 의인법, 반복법, 감정이입
③ 주제 : 가을 밤 님 그리는 외로운 여심(女心)
④ 사랑하는 님과 이별한 여인의 외로움을 노래한 것으로 사설시조에서는 드물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님을 향한 애절한 심경을 귀뚜라미에 의탁하여 읊은 이 작품은 감정이입 수 법을 사용하여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게 한다.
< 들에 동난지이 사오>
① 성격 : 해학적
② 표현 : 대화체, 돈호법
③ 주제 : 서민들의 상거래 장면
④ 서민들의 감정이 여과 없이 표출되어 있는 이 노래는 장수와 대화를 통한 상거래의 내용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중장에서 '게'를 묘사한 대목에서 해학미를 느끼게 하며, ' 스슥?鐸?'가 같은 감각적 표현은 현실감을 더해 준다.
<나모도 바히돌도>
① 성격 : 이별가
② 표현 : 상징적 은유, 열거, 비교, 과장, 점층
③ 주제 : 님을 여읜 절망적인 슬픔
④ 三恨 또는 삼안[三內]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님을 여읜 슬픔을 까투리와 도사공을 끌어다 표현 하였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 처한 까투리와 도사공의 마음이라 한들 님을 여읜 아득한 심정에는 비길 수 없다는 것으로, 중장에서 모든 극한적 상황을 나열하면서 내용면으로는 점층적 구성으로 절박감을 더해 주고 있다.
<한숨아 셰한숨아>
① 성격 : 수심가
② 표현 : 열거법
③ 주제 : 그칠 줄 모르는 근심
④ '그칠줄 모르는 근심'이라는 어두운 주제를 해학적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슬픔을 웃음으로 해 소하는 묘미를 보여 주고 있다. 근심을 막아 보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근심에 잠길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이란 결국 웃음을 통해서만이 극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싀어마님 며 라기>
① 성격 : 원부가
② 표현 : 열거법
③ 주제 : 시집살이에 대한 며느리의 원망, 한탄
④ 농촌의 대가족 제도에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한탄하는 며느리의 노래로, 며느리의 관점에서 보는 시집 식구들의 성풍이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풍자가 사실적이어서 공감을 느 끼게 한다.
<두터비 리를 물고>
① 성격 : 풍자적
② 표현 : 상징적 은유, 의인법
③ 주제 : 양반들의 허장성세(虛張聲勢) 풍자
④ 두꺼비, 백송골, 파리 등을 의인화하여 약육강식 하는 인간사회를 풍자한 노래로, 시적 자 아는 관찰자 시점을 취하고 있다. 당시 시대상과 견주어 본다면 두꺼비는 양반계층, 파리는 힘없고 나약한 평민계층, 백송골은 외세라는 도식을 이끌어 낼 수 있는데, 양반층(두꺼비) 이 힘없는 백성들(파리)을 괴롭히다가 강한 외세(백송골) 앞에서 비굴해 지는 세태를 풍자 하였다.
<논 밭 갈아 기음 매고>
① 성격 : 한정가
② 표현 : 열거법
③ 주제 : 농촌 생활에서 누리는 한가로운 삶
<창 내고쟈 창을 내고쟈>
① 성격 : 해학적
② 표현 : 열거법, 반복법
③ 주제 : 마음속에 쌓인 비애와 고통
④ 세상살이의 고달픔이나 근심에서 오는 답답한 심정을 꽉 막혀 있는 방으로 나타내고 가슴에 창문이라도 내서 답답한 심정을 풀고 싶다는 기발한 생각으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구 체적인 생활 언어를 장황하게 열거함으로써 답답한 심정을 절실하고도 다소 과장적으로 표 현하고 있으며 상황을 극복해 나가려는 적극적 의지도 함께 보여 주고 있다.
<서방님 병 들여 두고 (김수장)>
① 성격 : 사랑가, 애정가
② 표현 : 열거법
③ 주제 :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
<갓난희들이 여러 층이 오레 (김수장)>
① 성격 : 풍자적, 해학적
② 표현 : 직유법, 열거법
③ 주제 : 각기 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뭇 여인들
④ 우리 문학에서 등장하는 '님'은 대개 부재의 님이지만 여기에서 님은 함께 살면서 사랑하는 님으로 일찍이 우리 문학에서 등장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애정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초 장에서 '갓난희들이 여러 층이오레'라는 표현은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유교적 세계관을 어 느 정도 극복한 조선 후기의 세계관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사
가사의 명칭과 개념
가사는 조선시대에 시조와 더불어 대표적인 시가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가사는 초기에 주로 양반들에 의해 지어졌지만, 후기로 가면 서민 가사도 나오고 양반 사대부 층의 부녀자들이 지은 내방가사도 등장한다. 또한 개화기 무렵에는 동학 가사와 개화 가사 등이 평민 계층에 의해 창작되었던 것으로 가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했던 문학 장르임을 알 수 있다. 가사가 오랜 기간을 유지하며 향유 계층이나 문학적 범위를 넓혀 갔다는 것은 가사가 상당히 짜임새 있고 민족 정서를 담기에 좋은 역할을 했던 장르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특히 가사가 초기에는 양반 계층의 문학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서민 계층이 향유하는 문학으로 변모되어 갔다는 것은 가사가 국민 문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가사(歌辭)의 명칭은 문헌상에도 가사(歌詞)와 가사(歌辭)가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왔지만 대체로 음악상의 창사(唱詞)에는 가사를 쓰고, 문학으로 표기되어 음영(吟詠)될 때는 가사(歌辭)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가사란 대체로 3.4조 내지 4.4조의 기본 율조를 바탕으로 한 행을 이루어 4음보격을 취하며 시조나 고려속요와는 달리 음영(吟詠)을 위주로 호흡 조절을 위주로 하고 쓴 장형 시가를 말한다.
가사의 장르
가사의 장르 문제는 대체로 시가 장르에 속하는가, 산문 장르인가, 제3의 장르인가 하는 세 가지 의견이다. 시가 장르에 포함시키자는 의견은 가사가 시조와 마찬가지로 가창 되었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시가 문학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산문으로 보는 견해는 후기 가사 '일동장유가, 연행가, 북천가' 등의 성격이 장편 기행.유배 문학으로 여행에 대한 소감이나 귀양가서 겪은 심회 등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서사적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로 수필 문학으로 보는 것이다. 가사를 교술 장르에 포함시켜야 하다는 견해는 가사가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한 관찰이나 경험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어떤 사실을 남에게 보여 주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서정도 서사도 아닌 교술이라고 하였다. 이외에 가사를 시가나 수필 어느 한쪽에도 포함시키지 말고 독자적인 장르로 인정하자는 견해도 있다. 가사의 장르 문제는 복잡성으로 인해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가사는 시가문학에 포함 시켜야 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첫째 일정한 음보격을 가지는 율문형식이다. 둘째 가사를 수필 문학으로 보는 의견은 조선후기의 기행가사나 유배가 서경이나 풍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그러나 작품을 세밀히 보면 서사적인 요소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서정적인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셋째 가사가 시가 문학에 포함되는 이유는 수필은 가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가사는 수필문학보다는 시가문학에 포함시켜도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가사의 형식
가사의 형식은 3.4조 또는 4.4조를 기본으로 한 4음보의 연속체 운문이며 행의 수에는 제한이 없다. 조선 전기 가사는 그 길이가 비교적 짧으나 후기에는 수천 행에 이르는 장편 가사가 있으며 개화기 가사는 전기 가사보다 짧은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 가사는 낙구가 시조의 종장처럼 3.5.4.3의 음수율을 지닌 정적 가사가 많고, 후기 작품들에는 변격 가사가 많다.
가사의 내용
강호 가사
강호 가사는 주로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서 지어진 작품으로 시골에서 자연을 벗하여 한가롭게 살아가는 모습과 정서를 노래한 것으로 작품 주제에 따라 전원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정서를 노래한 것과 가난하게 살면서도 안빈낙도의 정신을 노래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와 같은 작품으로 <상춘곡>이 대표적이며 후자에는 <누항사>를 들 수 있다.
연군 가사
연군 가사는 군왕을 사모하는 마음과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가사는 주로 유배 가서 지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유배 가사라고도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사미인곡>을 들 수 있다.
기행 가사
사대부가 외국 여행을 하거나 임지에 부임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서술한 것으로 전기의 작품들은 관리가 임지에 부임하는 과정에서 경치를 보고 쓴 작품이 많고, 후기에는 외국 사신으로 갔다가 견문과 체험을 담은 작품이 많다. 전자의 예로는 <관동별곡>과 같은 작품이 있으며 후자에는 <일동장유가>, <연행가> 등이 속한다.
교훈 가사
교훈 가사는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 도덕을 서술한 것으로 주로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퇴계의 <도덕가>를 꼽을 수 있다.
풍속 가사
풍속 가사는 예로부터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고유 풍속에 대한 것으로 주고 농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농민 가사라고도 한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를 들 수 있다.
애정 가사
애정 가사는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은 주제로 하여 쓰여진 작품으로 전기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후기 가사에 와서 대거 등장한다.
종교 가사
가사의 효시 작품으로 <상춘곡>을 인정하고 있으나 <서왕가>를 효시로 인정한다면 가사는 종교적인 색채를 띤 것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가사 발생 초기에 보이던 종교 가사는 조선시대에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가사, 동학가사, 천주교 가사 등이 많이 나타난다.
전쟁 가사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소재로 하여 지은 가사로서 박인로의 <태평사>, <선상탄>이 있다.
가사의 기원
가사의 연원에 대해서는 한시, 경기체가, 고려속요, 시조 등 여러 가지로 논의되어 왔으나, 고대 민요가 지니는 4음보 단위의 진행과 음영하자면 각 음보간의 등장성(等長性)을 이루게 되고, 여기에 처용가, 만전춘 별사와 같은 4음보 진행 형식이 형성되고 사언시경시본(四言詩經詩本)와 五.七언시 및 사부(辭賦)의 유장성이 가세되면서 경기체가의 나열적이고도 서경적인 성격이 복합되어 가사와 같은 새로운 장르로의 이행을 가져왔다고 보아야 한다. 즉 가사의 기원은 어느 특정 시가의 영향이나 기원보다 이전 시가들의 전체적이고 복합적인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사의 변화
조선 시대의 가사는 임.병양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작자층, 향유층, 작품의 형태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기 가사
작자
이 시기의 작가 중심층은 전.현직 양반 관료층으로 이들은 자연과 함께 자신들의 이념이나 생활 체험들을 자유롭게 노래했다. 정극인, 송순, 정철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로 모두 호남 지역에 몰려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가사문학 전반을 통해서도 이 시기의 작가들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전기 사가의 유일한 여성으로 <규원가>를 지은 허난설헌이 있다.
형식·율격
전기 가사의 형식적 특징은 음수율에서 3.4조가 중심을 이루며 음보는 4음보가 원칙이나 초기 여러 개의 작품에서 4음보에서 벗어난 현상이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후기 가사에도 보이는 것으로 시상 전환이 필요할 때 많이 보인다 초기를 지나 중기에 지어진 작품들은 안정된 4음보를 유지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기 가사가 후기 가사에 비해 비교적 짧다는 것이다. 전기의 가사는 대부분 100행 내외로 이루어 졌으나 후기가사는 수 백행, 수 천행으로 이루어진 작품도 있다. 이는 아마도 전기 가사는 가창(歌唱)되었기에 100행 내외의 짧은 형태를 이루고 후기가사는 음영(吟詠)되었기 때문에 길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전기 가사의 결사는 마지막 행을 시조의 종장 형태로 끝맺는 방식으로 전기사사(정격가사)에 많이 나타난다.
주제
전기 가사의 주제 중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은 江湖閑情이라 할 수 있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자연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나 가난하게 살면서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노래한 작품들은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선비의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 조선 전기의 가사들의 일정한 틀
강호한정 작품의 서사(序詞)에는 강호에 머물게 된 동기와 속세의 부귀공명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사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본사(本詞)에서는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주위환경과 생활 양상을 통해서 묘사하며, 결사(結詞)에서는 안빈낙도하면서 강호에 살겠다는 의지와 임금의 은혜를 늘 감사한다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관동별곡>과 같은 기행 가사들은 주로 관료 생활의 보람과 긍지를 노래하고 있는데, 자신의 관할 지역을 돌아보며 느낀 감정을 읊으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과 선정을 다짐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기행 가사는 서두에 기행의 동기와 목적이 표현되고 본사에서는 자연경관을 살펴보는 과정이 그려지며 결사에서는 기행을 통해 느낀 감정과 임금에 대한 충성이 노래된다.
<사미인곡><속미인곡>과 같은 연군 가사 또는 유배 가사들은 유배지에서 겪은 온갖 어려움을 노래하면서 임금의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작품의 내용을 보면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겪은 어려움이나 주변 경관을 노래하고 좌절감 등을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극복하면서 다시 임금 곁에서 충성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 공통된 표현 방식이다.
<도덕가>와 같이 유학의 이념을 강조하는 작품들은 조선조 정치 이념인 인의예지를 최고의 이념으로 보이면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후기 가사
후기 가사의 시기는 임.병 양란이 끝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시기는 가사의 작자 층이 확대되면서 전기의 가사 형식이 많이 파괴되어 새로운 형식의 작품들이 보이며, 현실 생활을 소재로 한 서민 가사, 부녀자들이 지은 내방가사, 외국 여행을 하면서 지은 기행가사, 개화기에 지어진 개화가사들이 조선 후기에 나타난 가사의 다양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작가
후기 가사는 전기에 비해 작가층이 확대되었다. 사대부 작가를 비롯하여, 중인 이하 서민층으로 보이는 무명씨 작가와 여성 작가 등이 많이 보인다. 사대부 작가들은 한 사람이 여러 작품을 쓰는 다작작가(多作作家)가 많이 나타난다. 그 예로 박인로는 <태평사><선상탄><누항사><노계가> 등의 여러 작품을 남겼다.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대거 등장하는 것은 후기 가사의 특징 중의 하나로 작품의 내용이나 표현 방식, 어휘 등으로 서민층이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내방가사로 불려지는 여성이 지은 가사는 대부분 작가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형식과 율격
후기 가사의 율격적 특성은 3.4조가 중심이던 전기 가사에 비해 4.4조가 중심을 이루게 되고, 3.4조나 4.4조의 4음보가 중심이던 것이 노계 가사에서는 1행이 6음보로 이루어지거나 2음보 3음보가 1행을 이루는 파격이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후기 가사가 가사의 의미 전달을 우선으로 하는 가운데 생겨난 현상으로 보인다. 또한 형태상의 변화는 서두에 산문적인 사설을 넣는 것이 나타난다. 이는 조선 후기 문학의 산문화 경향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사의 산문화 경향과 아울러 장형의 가사가 등장한다. 100행 내외의 형태를 가지던 전기 가사에 비해 심지어 수천 행으로 늘어난 작품들이 보인다. 대표적으로 <한양가><일동장유가> 등이 있다.
주제와 소재
조선 후기 가사도 양반들이 지은 작품에는 전기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강호 시가, 기행 시가, 유배 시가, 교훈시가, 등이 있었다. 그러나 후기 가사는 이외에도 전쟁을 노래한 것, 현실을 비판한 것, 애정을 노래한 것, 종교적인 내용을 가진 것 등으로 주제와 소재가 확대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특징
조선 후기의 가사는 전대의 양반 가사에 이어 평민 가사, 내방 가사의 등장이 그 특징이다.
내방 가사는 부녀자들이 지은 규뱡 문학으로서, 섬세한 여자들의 희로애락과 접빈객 봉제사하는 예의 범절, 현모 양처의 도리 등, 부녀자들의 심정과 생활을 노래한 것으 로 대개 궁체의 국문으로 두루마리에 적혀 전한다.
기행 가사와 유배 가사, 그리고 주정적·서정적이 아닌 내방 가사와 평민 가사 등은 모두 형식은 운문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내용은 다분히 수필적인 데가 있다.
평민 가사는 과거의 귀족적인 가사 문학이 서민화하여 서민을 주제로 한 것이며, 이 중 노래로 불리어진 것은 특히 잡가라 한다.
조선 말기에는 신앙의 고백이나 포교의 성격을 띤 천주교 가사와 동학 가사들이 새롭게 지어져 종래의 유교 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다음에 오는 개화기 가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사는 갑오경장 이후 개화기 가사로 이어진다.
* 가사 작품의 효시.
가사의 효시 작품은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이 통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가사의 고려말 발생설이 제기 되었는데 고려말 나옹화상이 지은 '서왕가'와 충숙왕 때 신득청이 지었다는 '역대 전리가'등은 고려말 발생설을 뒷받침한다. 이들 작품은 이두 표기로 된 것으로 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고려말 이두 표기가 아닌 조선 후기 이두 표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상춘곡>을 가사 문학의 효시라고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작품
조선 전기 가사
상춘곡-2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성정 가사로 그의 문집인 <불우헌집>에 실려 전한다. 작자가 벼슬을 버리고 (1470) 전라도 태인에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할 때 지은 작품이다.
주제-봄의 완상(玩賞)과 안빈낙도
형태-총 39행의 79구 4음보 (단 12행은 6음보)
구성-序詞, 본사, 결사의 3단 구성.('기-승-전-결'의 4단 구성)
전개 과정-화자는 좁은 공간(수간모옥)에서 점점 넓은 공간(들판, 시냇가, 산)으로 나 아가는 공간 확장에 의한 전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표기-<불우헌곡>일 간행된 18세기 표기.
가사 작품의 효시
표현-설의법, 의인법, 대구법, 직유법 등의 여러 가지 표현 기교와 함께 고사를 많이 인용하면서 작품을 유려하게 이끌고 있다.
<상춘곡>을 바탕을 호남가단이 형성되었다. 정극인의 가풍(歌風)은 송순에게 계승되었다.
본사의 취락(醉樂)대목은 이태백의 장진주에 나오는 풍도를 본받은 대목이다.
본사의 취락대목의 '무릉(武陵)'은 '무릉도원'의 준말로 도연명이 지은'도화원기'에 나오는 별천지 또는 선경을 말한다. 청풍명월(淸風明月)은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말로 자연을 가리킨다.
*강호한정(江湖閑情) 가사의 일정한 형식
작품의 서사(序詞)에서는 강호에 머물게 된 동기와 속세의 부귀공명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사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본사에서는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주위환경과 생활 양상을 통해서 묘사하며, 결사에서는 안빈낙도하면서 강호에 살겠다는 의지와 임금의 은혜를 늘 감사한다는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상춘곡>에서는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작가 정극인이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창작했기 때문에 다시 관리로 등용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관직에 대한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隱逸性 江湖閑情 가사의 영향 관계. 상춘곡→면앙정가→성산별곡.)
<주요 한자>
逍遙吟詠(소요음영)-이리저리 거닐며 나직이 시를 읊조림.
微吟緩步(미음완보)-낮은 목소리로 시를 읊조리며 천천히 걸음.
煙霞日輝(연하일휘)-안개와 노을과 햇살. 즉 자연.
簞瓢陋巷(단표누항)-소박한 시골생활. 단표는 簞食瓢飮(단사표음)의 준말.
仰亭歌(면앙정가)-7
송순이 중종 19년(1524)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가 면앙정을 짓고 나서 그 주위 산수의 아름다움과 그에 몰입한 작자의 풍류 생활을 노래한 것이다. 이 작품은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영향을 받고,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 영향을 끼쳐 강호가도를 수립한 대표 작품의 하나이다.
구성- 기.승.전.결 79구의 4단 구성(서사.본사.결사의 3단 구성으로 보기도 함)
내용-면앙정이 있는 제월봉의 형세와 면앙정의 모습을 그린 다음 (起)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근경에서 원경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承,1) 춘.하.추.동 사시의 계절 변화에 따라 묘사하였다. (承.2)그리고 강호에서의 (轉)풍류 생활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노니는 호연지기(혹은 君恩)를 노래하고 있다.(結)
*호남가단을 처음 마련하였으며 도리보다 풍류를 더 사랑했던 송순은 <상춘곡>에서 자연 친화 사상을 이어 받고 정철의 ,성산별곡>에 영향을 주었으며 강호가도를 확립하였다. 풍류 생활을 노래하면서도 '亦君恩'이라고 함으로써 유학자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으며, 자연친화의 도가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도가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인간과 자연이 일체를 이룸으로써 최고선에 도달하는 데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다양한 수사 방법인 사용되었다. 이 중에서도 대구법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그 본질을 표현할 때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면앙정가>를 높이 평가한 문헌.
심수경의 <견한잡록>, 어숙권의 <패관잡기>, 이수광의 <지봉유설>, 홍만종의 <순오지>
※<면앙정가>가 <성산별곡>에 끼친 영향
<성산별곡>은 내용, 형식, 풍류, 어구, 시풍 등 여러 방면에서 <면앙정가>를 모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자연을 인간의 궁극적인 귀의처로 본 것, 사계절을 통한 자연미 발견, 자연 친화의 도가 사상 등은 그대로 <면앙정가>에서 <성산별곡>으로 이어졌으며 표현 면에서도 '∼ ,∼거든,∼마나'등의 표현법은 두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思美人曲(사미인곡)-7
이 작품은 송강이 50세 되던 해(1585)에 반대 정파의 탄핵을 받고 조정에 서 물러나 4년 동안 고향 창평으로 내려가서 한가한 가운데 불우한 세월을 보낸 시기에 지어진 작품으로 내용은 선조를 사모하는 간절한 연군의 정을 한 여인이 이별한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에 비겨서 노래한 것이다.
구성+- 서사 - 님과의 인연과 이별 후의 그리움
+- 본사 +- 春怨 -哀情을 님에게 알리고 싶음
| +- 夏怨 - 님에 대한 알뜰한 정성
| +- 秋怨- 선정을 갈망
| +- 冬怨- 님에 대한 염려
+- 결사 - 님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
의의 - '속미인곡'과 더불어 가사 문학의 극치를 이루는 작품이며 고려속요 '정과정'의 맥을 잇는 충신연군지사 이다.
'사미인곡'의 문학적 우수성
이 작품은 선조를 사모하는 연군의 정을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연모하고 연모하는 마음에 비겨서 노래하였다. 다양한 기법과 절묘한 언어가 구사되어 가사 작품으로서 그 문학성이 뛰어나다. 표현 기법으로는 비유법, 미화법을 비롯하여 연정을 심화시키는 점층적 표현이 쓰였다. 시상을 급격하게 발전시키고 있으며, 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정서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송강가사에 대한 평 (속미인곡도 역시 송강이 지은 것으로. 사미인곡이 다하지 못한 말을 다시 펴서 그 뜻이 더욱 공교하고 더욱 간절하여 가히 제갈공명의 '출사표'와 맞먹는다).
'사미인곡'의 특성
국문으로 쓰여진 문학작품을 경시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관동별곡, 속미인곡'과 더불어 사대부들에게 큰 감명을 준 작품으로서 홍만종. 김만중 등 여러 사람에게서 격찬을 받았다. 제목'사미인'은 중국 초나라 굴원의 '이소'제 9자의 '사미인'과 같으며 이소의 충군적 내용이 이와 유사하나 이 작품의 언어, 형식, 표현 기법, 구조 등 모든 면에서 송강의 문학적 개성과 독창성이 뛰어나다.
속미인곡-8
이 노래는 '사미인곡'의 속편으로 48행 96구로 된 문답체의 가사이다. 따라서 작품의 화자는 제 1화자와 제 2화자의 두 여인으로 제1화자는 작품 내용 이끌고 가는 설명 역할을 하고, 제 2화자는 길가는 각시님으로 설정된 주인공이다. 우리말을 비단결처럼 곱게 짜 나간 이 작품은 작자의 언어 구사력의 뛰어남은 물론 우리말을 우수한 시어로 끌어올려 한글 시가의 많은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정철의 미인곡은 김춘택의 '별사민인곡'과 이진유의 '속사미인곡'등에 영향을 주어 국문학사에서 미인계 가사를 형성하게 되었다)
구성+- 序詞 - 님과 이별하게 된 사연
+- 본사 - 이별 후의 사랑과 그리움
+- 결사 - 님에 대한 사모의 정
의의- '사미인곡'과 더불어 가사 문학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다. 우리말의 구사가 절묘하여 문학성이 높다. 대화 형식으로 된 작품이다.
규원가(閨怨歌)-4
규원가는 일명 怨夫詞 . 怨婦辭 라고도 하며 허난설헌이 선조 때에 지은 것으로 시조집 고금 가곡에 실려 전한다. 홍만종의 <순오지>에는 이 작품의 작자를 허균의 첩 무옥이라 하였으나 고금 가곡에 허난설헌이라 한 접이나 이 작품이 허난설헌의 시집에 있는 오언고시 '소년행'의 내용과 유사한 점 등으로 보아 허난설헌이 지은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내용은 조선 시대의 봉건 사회 제도 아래서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며 오직 忍從(인종)으로 살아가야 했던 조선 시대 여성들의 설움을 절실하게 노래한 것으로, 작자의 체험을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 기 - 과거의 회상과 늙음을 한탄
+- 승 - 님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애달픈 심정
+- 전 - 거문고로 달래는 외로움과 한
+- 결 - 님을 기다리며 기구한 운명 한탄
의의- 규방가사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현전하는 최초의 여류가사.
이 노래에서 서정적 자아의 님에 대한 태도 변화(자탄, 자조 → 비난 → 극복 의지)
이 노래의 주인공의 정서는 자탄, 자조에서 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며 마지막에 거서는 님에 대한 극복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자탄과 자조에서 님에 대한 원망뿐 아니라 임의 신의 없음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며, 마지막에서는 님에 대한 정면 비난을 항 뿐 아니라, 님의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자신의 젊음을 다시 찾으려는 의지와 신의 없는 님에 대한 극복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노래의 두 가지 한탄은 흐르는 세월에 대한 한탄과 세월 보내기 어려움에 대한 한탄이다.
조선 후기 가사
선상탄-4
박인로가 45세가 되던 선조 38년 (1605)에 통주사로 뽑히어 경상도 진동영으로 내려와 부산을 방비할 때 지은 전쟁 가사이다. 내용은 전선 위에서 전쟁의 비애와 우국의 정을 읊은 것으로 배의 유래와 아울러 일어나는 즐거움을 말했으며, 왜적들이 항복하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싶다는 뜻을 적은 것이다.
연대 - 선조 38년(1605)
표현 - 인용법. 대구법. 은유법.
주제 - 전쟁의 비애를 딛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싶은 마음. 憂國丹心(우국단심)
<선상탄>을 비롯한 전쟁가사의 창작 배경은 역사 군담소설과 마찬가지로 입.병 양란의 참상과 굴욕적 침략을 겪은 후에 이를 이상적으로 초극하려는 의지와 민족의 염원을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이 민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 역사적인 패배를 보상받으려는 정신적인 승리 의식 반영)
이 작품은 침략적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평화를 희구하는 노래인데, 구체적인 시상 전개는 배를 소재로 이루어져 있다. 배로 인해 전쟁이 나고 왜적이 생겼지만 이러한 전선(戰船)이 태평성대에 풍류를 즐기는 고깃배가 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표현상 중국의 고사를 많이 인용하고, 한문 투의 수식을 많이 하고 있으며 한시 구조차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 결점이 될 수도 있지만 전쟁 가사가 범하기 쉬운 속된 감상에 흐르지 않고 적을 위압할 만한 무인의 기개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구성+- 명을 받아 부산 진에 내려옴
+- 배를 만든 이 (헌원씨)와 배를 잘 못 이용한 이들을(진시황, 서시) 탓함.
+- 배의 유용성과 배로 인한 고급의 憂樂이 서로 다름
+- 憂國丹心으로 왜구를 무찌르고자 하는 노계의 기개와 기백
+- 왜구의 항복을 바라고 태평성대를 기원함
태평사
박인로가 선조 31년 (1598)작자 나이 38세 되던 가을에 지은 것이다. 당시 좌병사 성윤문의 막중(幕中)에서 부산의 왜적을 방어할 때 적인 밤을 타서 도망하였으므로 10여일 후 본영으로 돌아와 수군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성윤문의 명으로 지은 것이다. 이 작품은 노계가 처음 지은 것으로 땅에 왜군이 침입하여 국운이 위태로웠으나 명군의 원조와 민병의 용전으로 개선하는 기쁨을 노래하고 다시금 태평 시절을 맞아 동락할 것을 축원(祝願)하는 작품이다.
구성 +- 문물이 흥하던 시절에 성오랑캐(왜구)가 침입하여 위기에 직면한 정경
+- 명군의 원조와 전쟁에 승리한 사실
+- 승전을 기뻐하는 광경
+- 집에 돌아가 충효에 전심하라는 교훈
+- 천지 신명에게 태평성대를 축원
<태평사>는 노계가 지은 최초의 가사로 '선상탄'과 함께 임진란의 사실을 문학에 반영한 전쟁 문학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누항사-2
이 작품은 작자가 51세 때 (1611) 노계가 은거하던 곳을 찾아온 이덕형이 노계에게 두메 살림의 어려움을 묻자 이에 대한 답으로 지은 작품이다. 내용은 두메 살림에 굶주리고 헐벗는 등의 어려움은 많지만 가난하여도 원망하지 않고 (貧而無怨)자연을 벗삼아 충효와 형제간의 우애와 벗들과의 신의를 바라면서 안빈낙도할 뿐이라는 탈속한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연대 - 광해군 3년(1611)
성격 - 한정가
구성 - 서사, 본사, 결사의 3단 구성
주제 - 누항에 묻혀 貧而無怨, 안빈낙도 추구
의의 - 전기 가사와 후기 가사의 과도기적 단계의 가사로서 비정격의 형식을 통해 임란 후의 어려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 이 작품은 전기 가사와 후기 가사의 과도기적 단계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건지 양반 가사는 자연에 묻혀 은일 생활을 하더라도 여유있는 생활 태도, 자연 경관에 대한 찬미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으나 이 작품은 자연에 은일하면서도 현실 생활의 어려움을 직시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형식면에서도 비정격이 많은 점 등으로 보아 전.후기 가사의 과도기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성+- 길흉화복을 하늘에 맡기고 누항에서 안빈 일념으로 살려는 심정
+-지난날 백전고투하던 일을 회상함
+-농사를 짓고자 하나 농우마저 없어 낙심함
+-농우(農牛)를 빌리러 갔다가 모욕을 당하고 돌아오는 심정
+-야박한 世情을 한탄하고 春耕생각을 그만둠
+-청풍명월을 벗삼고 자연에 묻혀서 절로 늙기를 바람
+-가난한 생활을 만족하게 여기면서 충효와 우애에 힘쓸 뿐임을 노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3
김인겸이 영조 39년(1763)에 지은 총 4책 8,000여 구에 달하는 장편의 기행 가사이다. 홍순학의 <연행가>와 더불어 기행 가사의 백미이다. 작가가 일본 통신사 조업의 수행원으로 일본의 에도(지금의 동경)을 왕래하면서 예리한 관찰력으로 보고 느낀 문물 제도와 인물 풍속을 노래했다. 현전 가사 작품 중 최장편에 속하며 순 국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대 - 영조 40년(1764)
구성 - 추보식 구성
주제 - 일본 여행에서 얻은 일본의 풍속.제도.인정.인습 등의 견문
작자의 공정한 비판, 기발한 위트, 해학 등을 볼 수 있으며, 정확과 노정과 일시의 기록, 상세한 기상 보고와 자연 환경이 묘사 등은 물론 여행 중의 생활, 일본과의 외교 편모, 문물제도, 민물풍속 등을 개인적인 판단을 삽입하면서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연행가(燕行歌)
홍순학이 25세 때 고종 3년 (1866) 가례 책봉 주청사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북경에 가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총 3924구로 된 장편의 기행 가사이다. 예리한 관찰로서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며, <일동장유가>와 더불어 기행가사의 백미로서 필사본으로 전한다. 총 3924구에이르는 가사로 4월 9일 서울을 떠나 8월 23일 돌아올 때 까지의 총 133일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이국의 문물과 풍속, 인물 등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객관성 있게 비판적으로 소개하였다. 일동장유가는 연로한 김인겸이 고국을 떠날 때 간절히 생각하며 그리워하던 경우와는 달리 이 작품의 작자는 소년공명의 자부심과 기개를 노래하고 있다.
북천가
김진형이 철종 때 지은 유배 가사로, 작자가 홍뮨관 교리로 있을 때 이조판서 서시순의 비행을 논척하다가 철종 4년 명천으로 정배되어 그곳에서 칠보산을 탐승하고 기생 군산월과 정이 들어 객수를 잊고 지내다가 방면되어 돌아올 때까지의 경위를 노래한 것이다. 배소(配所)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슬픔, 고통, 인정 등을 비교적 세밀하게 묘사한 총 1040구의 장편가사이다. 그가 적객(謫客)이면서도 토호의 집을 얻어 수령의 후대를 받았고, 請學(청학)해 온 60여 사람과 더불어 음풍영월로 소일하면서 군산월과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은 만언사의 작자가 적소에서 겪은 고초와는 아주 대조된다.
만언사
안조환이 정조 때 지은 유배 가사로, 작자가 34세 때 추자도로 귀양가사 풀려나올 때까지의 천신만고의 생활상을 적은 것으로 전편이 2,916구로 되어 있고 후편이 594구로 되어 있는 장편의 유배가사이다. 전편에는 <만언사>란 제목이 붙어 있고 속편에는 <만언답사>란 제목이 붙어 있으며 이웃사람들과의 화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철저한 귀양지의 고생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위의 <만분가>와 김진형의 <북천가> 등과 함께 유배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정학유가 헌종 때 지은 작품으로 시경의 반풍과 예기의 月令 그리고 여러 농서와 농가 풍속을 참고로 하여 쓴 것이다. 내용은 일정한 역법을 근거로 하여 1월부터 12월까지의 행할 정령, 의식, 농가 행사, 농가 풍속, 농사법 및 상농 사상을 담고 있는 권농의 노래이다.
구성+- 序令 -천체의 운행과 계절 역법
+-本令 -1월부터 12월까지의 농사 순서, 농법, 농가 행사, 농가풍속 등을 적어 | 우매한 농민들을 교화하고 계몽하는 내용
+-結令 -본령의 내용대로 힘써 행해야 된다는 경계.
주제- 월령과 절후에 따라 농가에서 해양 할 일과 세시 풍속의 소개.
의의- 농가의 일년 행사와 세시 풍속을 달에 따라 읊으면서, 철마다 다가오는 풍속과 지켜야 할 예의 범절을 가르치는 교훈적인 글이다. 농촌 생활과 관련된 구체적인 어휘의 구사와 농촌 생활의 활기를 느끼게 하는 생동감 있는 표현 등으로 그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이 노래는 고려속요 <동동>과 같은 遊樂的인 달거리가 아니며 실용적인 권농가로서 月令本歌이다. 달거리와 월령체가는 그 연원, 형식, 내용, 기능이 서로 다르다. <농가월령가>는 달거리의 효시가 아니라 월령체가의 효시이다. 이 노래의 세시 풍속은 생산 활동에 리듬을 주는 참여적이며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점은 달거리의 세시 풍속이 회피적이며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서로 다른 점이다.
庸婦歌(용부가)-1 - 사리에 어두운 여자
작자와 연대가 미상인 조선 후기의 가사이다. 내용은 우둔하고 못난 여인이 시집살이를 하는 동안 온갖 못난 행동을 다 저지르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다소 과장된 흠이 있고 표현이 속된 것도 있지만 사실적인 묘사로 토속미가 풍기며, 풍자와 유머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시집간 지 석 달만에 시집의 흉을 잡아낸다는 서두와 정치기와 치장으로 소일하고 불공과 무당 소경 푸닥거리로 위업을 한다는 것은 실감 있는 표현이며, 끝에 가서 저 거동이 그른 것을 알면 고치려고 힘쓰라는 것은 경세(警世)와 訓民(훈민)을 염두에 둔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가사가 산문적인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작자 층이 서민으로 확대되면서 풍자성을 띠게 되었고,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 당시 여성들의 비행이 열거되어 있어 서민층의 비판의식을 엿볼 수 있다.
성격- 풍자적, 비판적, 경세적.
표현 - 열거법, 과정법.
주제 - 여성들의 비행 비판.
愚夫歌(우부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인물은 모두 양반들이다. 개똥이의 경우 부모 덕에 호의호식하는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꼼생원 역시 상당히 넉넉한 축에 속한다. 꾕생원은 경제적으로 철저히 몰락하여 기생 정신 삶을 살아가는 양반이다. 이로 볼 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그 사회적 위상과 경제력에 있어서 양반 계층의 상층과 중층, 하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아가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양반의 경제적 몰락과 타락, 봉건적 가치관의 붕괴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구성 - 세 명의 愚夫(개똥, 꼼생원, 꾕생원)를 등장시켜 서사.본사.결사의 3단으로 구성하였다.
+-서사 - 인물에 대한 화자의 평이 제시
+-본사 - 도덕적 타락과 비행 열거
+-결사 - 패가 망신한 이후의 행색 묘사
주제 - 도덕적 타락에 대한 비난과 경계
설화(說話)
정의
설화는 일정한 구조를 가진 꾸며낸 이야기로서 서사문학의 근원이다.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특성
설화는 인간의 삶의 체험을 구체화, 유형화한 산문형식이다.
설화는 구비전승된다.
설화는 한 민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에게 있다.
설화는 민중계층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전승되었기 때문에 민중적이다.
설화는 구전되면서 변이가 되기도 한다.
설화는 허구이다. 신화나 전설은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증거물의 제시하고 있으며 민담은 더구나 그런 것도 없다.
설화는 서사성을 지니고 있다.
종류
설화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나 인식 정도에 따라 신화, 전설, 민담으로 구분된다.
신화
신화를 전승하는 사람은 신화를 진실되고 신성하다고 믿는다. 신화의 생명은 진실성과 신성성을 의미하지 않을 때 유지되는 것이다. 신화는 신빙성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물을 제시하며 그 증거물은 우주나 국가와 같이 포괄적이다. 신화의 주인공은 신이며, 그는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신화의 시간과 공간은 아득한 옛날 즉 태초(太初)의 시간이 나오며 공간도 신성의 장소가 나온다. 종류 - 우주 신화, 건국 신화, 시조 신화, 무속 신화 등
전설
전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 대개 한 민족이나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계승된 것을 말한다. 전설은 대개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제시하여 진실성을 뒷받침하려고 하며, 자연 현상이나 사건을 민중의 경험에 의해 믿는 것에 대한 설명만 해 주면 내용이 단순하고 모티프 또한 간단하다. 전설은 진실되다고 믿어진다. 신화에서는 신성하다고까지 믿어지거나 전설의 경우는 세속성이 강하다. 전설은 역사적 인물 또는 반역사적 인물임에 반해 신화는 신이 등장한다. 전설의 이야기 전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예기치 않던 관계를 중심으로 펼쳐짐에 따라 결국 운명 앞에서 좌절당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오고 비극적 결말이 많다.
민담(民譚)
민담은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신성하거나 진실된다고 믿지 않으며 단지 흥미위주로 꾸며진 이야기다. 민담은 전설과 같이 구체적인 증거물도 존재하지 않으며 지역적 제한성도 없기 때문에 내용에서 민족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범세계적 보편성을 띤다. 민담의 주인공은 미천한 처지에서 무력하게 살다가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 공상에서나 가능한 소망을 두루 성취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종류 - 동물담, 본격담, 소화(笑話)
기능
신화의 기능
집단 구성원간의 결속을 다지게 한다. (건국신화. 시조신화)
자연의 질서나 우주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우주신화……)
종교적 기능으로서 천재지변이나 질병 등의 위협, 공포로부터 집단 구성원들의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유지시켜 준다.
전설의 기능
전설은 지역을 발판으로 하여 애향심을 고취시킨다.
전설은 이승과 저승에 대한 관심이나 궁금증을 해소한다.
전설은 교훈적인 기능도 일부 있다.
민담의 기능.
집단 구성원의 결속과 유대감을 강화시켜 준다.
흥미와 재미를 유발시켜 정서 환기를 시켜준다.
교훈적인 기능을 한다.
자연의 질서나 우주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한다.(바닷물이 짠 이유. 해님달님)
이승과 저승에 대한 관심이나 궁금증을 해소한다.
탐관오리에 대한 풍자나 비판 기능도 한다.
※민담은 전설의 기능과 중복되는 기능이 많다.
신화, 전설, 민담의 구별되는 특징
의의
설화는 소설문학의 기원이 된다는 점에서 문학상의 큰 의의가 있다. 우리 나라 문학의 경우, 고대의 설화가 고려 시대에 들어와 정착되면서부터 패관 문학이 발달하고, 이것이 가전체를 거쳐 고대 소설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 나라의 구전 설화는 고대 소설로 개조, 정착하기도 하였는데, '흥부전', '심청전', '춘향전'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 설화와 소설화 과정
작품
단군신화(檀君神話)-15
출전-삼국유사
의의
홍익인간이라는 건국이념을 밝히고 있으며 천손혈통이라는 민족적 긍지와 우리 민족의 단일성과 역사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군이라는 한 영웅의 탄생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 문학으로 우리 민족 최초의 건국 신화로서 천손하강형의 모티프를 핵심으로 하여 민족적 기원의 신성함과 정통성을 말해 주고 있다.
동명왕 신화-4
출전 : 삼국유사
의의 : 우리 나라 문헌 설화 중에서 어느 신화도 따를 수 없는 높은 문학성을 띠고 있다. 여러 가지 신화들이 결합되어 있으며, 난생 설화 중 유일한 人生卵 신화이다. 영 웅의 일대기는 후대 서사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동명왕 신화는 천손강림, 난생, 동물양육, 기아, 주력 등 고대 서사 문학에 나타나는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이 신화가 단일한 모티프였다기 보다 여러 모티프가 모여 완성된 신화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구토지설(민담)-3
출전 - 삼국사기
성격 - 풍자적. 우화적. 교훈적
의의 - 풍자와 교훈성을 내포한 동물 우화 설화
고구려 장수 선모해가 김춘추의 탈출을 암시로 들려준 설화
온달-1
출전 - 삼국사기
성격 - 傳형식의 설화
의의 - 역사적 사실의 문학적 형상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작품
列傳 -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는 전의 한 형식이므로 특히 역사적으로 후세에 거울이 될 만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였다.
'온달'은 역사적인 {삼국사기} 열전의 하나이므로 그 내용은 객관적 사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온달 설화의 유형적 성격
바보 온달로 구전되는 인물 전설은 강화도 일대와 주로 중부 지방에서 전승되며, 갈등 구조상 동일 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은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다. 이 민담의 유형구조와 주제는 온달 전설과 다름없다. 또한 모티프(話素)들이 '무왕설화'와 유사하여 동일유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온달 설화의 주제 의식
이 설화의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 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자체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또한 온달과 공주에 대한 표면적 인식의 한계가 온달과 주체적 삶을 실현한 공주에 의해 극복됨으로써 기존 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의식을 지니고 있어, 당대의 설화 문학이 가지는 민중적 미의식과 역사를 개척하려는 민중적 역사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조신의 꿈
출전 - 삼국유사
성격 - 사원연기설화(寺院緣起說話), 환몽설화
구성 - 액자식 환몽구조
내용 - 인간의 세속적 욕망은 한 순간의 꿈이요 고통의 근원이니 집착을 버려야 한다.
작품 구조
대개의 몽자류 작품과 같이 이 작품은 '현실(절실한 소망)-꿈(꿈속에서의 체험)-현실(깨어난 후 각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신의 꿈]은 꿈을 매개로 하여 사랑하는 여인과 현실적 욕망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현실을 초월하는 계기가 마련된다. 결국 꿈 속에서의 경험이 비참함으로 끝나고 현실로 돌아와서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각성으로 승화된다.
의의 - '현실-꿈-현실'의 전형적 환몽구조의 연원이 되는 설화로, 후에 '구운몽'을 비롯한 몽자류 소설과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에 영향을 주었다.('꿈'을 소재로 한 국문학사상 원조)
환몽설화 - 평소의 어떤 생각 때문에 꿈속에서 사건을 체험하고 꿈에서 깨어나 참다운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구조를 가진 설화를 가리킨다. 평소의 욕망이 빌미가 되어 꿈을 꾸게 되고 그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 허망함을 말하며 세속적 욕망의 무가치함을 말하는 형식이다.
도미설화-1
출전 - 삼국사기
성격 - 열녀설화, 관탈민녀형 설화(官奪民女型說話)
도미 설화의 전승 및 유사 설화
도미설화는 {삼국사기}와 {오륜 행실도}에 실려 있는데, 유교적인 윤리관의 하나인 열(烈)에 바탕을 둔 귀강으로서 널리 전승된 듯하다. 이 설화는 박종화의 현대소설 [아랑의 정조]의 모태가 되며, 고대 소설 [춘향전]의 근원설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도미설화와 유사한 설화로 [우렁이 각시]와 [산방덕 전설]이 대표적이다.
도미 설화의 유형성
도미설화의 지배자인 왕이 피지배자인 백성의 아내를 빼앗으려는 것에 저항하는 내용으로 이와 같은 유형을 관탈민녀형(官奪民女型)설화라고 한다. 관탈민녀형 설화는 대개 피지배자의 승리로 끝나는 데 이는 지배자에 대한 저항의 의미와 당대의 시대 상황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당대 사회가 지닌 핵심적 모순을 보여주고 있는데 통치자가 백성의 처를 빼앗으려 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이러한 행위의 고발과 함께 그것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평민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어, 당대의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설화는 열녀의 절개를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건강한 삶의 윤리와 이를 침하려는 권력의 횡포가 대비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귀설화-3
구성 -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4단구성
발단 - 지귀의 선덕여왕에 대한 사모
전개 - 선덕 여왕과의 만남과 헤어짐
절정 - 화신으로서의 변모
결말 - 주문에 의한 화재 예방
화신(火神)의 내력과 그에 연유하는 풍속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지귀의 열정적 순애와 그 고뇌를 받아들이는 여왕의 넉넉한 품성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설씨녀와 가실-1
주제 - 평범한 서민 남녀의 사랑, 인정, 의리
이 설화는 신라 때부터 구전되다가 고려에 와서 {삼국사기}에 채록된 설화로, 일반 백성의 삶이 고귀한 신분의 삶 못지 않게 훌륭한 측면이 있음을 담고 있다. 후에 춘원에 의해 '가실'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한다.
연오랑 세오녀-1
우리 나라 유일의 일월신화(日月神話)에 속하는 것으로,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이들 부부가 일월의 정기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일본측 자료와 비교해 보면 일본 건국 시조 신화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왕계-5
성격 - 의인체 설화
주제 - 임금에 대한 경계
작자 - 설총(설총이 신문왕에게 충간하기 위해 지은 설화)
의의 - 우리 나라 최초의 창작 설화로서 꽃을 의인화해서 사람처럼 말함으로써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의인문학(擬人文學)으로서의 문학적 가치를 지니다. 또한 꽃을 의인화하여 계세징인(戒世懲人)을 목적했던 것은 후에 고려조에 성행한 가전본(假傳本)의 모태가 된다. 꽃의 임금 모란이 충신인 할미꽃 보다 겉모양이 아름다운 장미를 좋아하는 잘못된 행실을 풍간하기 위해 설총이 지은 창작 설화로 이러한 작품의 전통은 고려시대 융성했던 가전 문학으로 이어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식물을 의인화한 소설, 동물을 의인화한 소설 등으로 발전적인 변모를 하게 된다는 점이 문학사적 가치가 있다. [화왕계]와 유사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꽃을 의인화한 소설 [화사(花史)]가 있다.
화왕계, 화사, 화왕전
화왕계를 [화사]와 [화왕전]과 비교해 보면, 꽃에 인성을 부여하여 의인화한 수법과 군주를 주인공으로 풍간한 우사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판이하다. [화사]는 꽃을 국가 군신에 비유하고, 중국 역사를 본떠 한나라의 흥망성쇠를 논했다. 당시 정치, 사회상을 비판하고 제왕의 치국사상을 보인 정치 소설로서 제왕의 흥성에 보좌하는 신하의 충절이 있으면 왕업이 창성하게 된다는 교훈을 나타내고 있다. [화왕전]은 [화사]에 비해 직·간접 표현법과 성격 묘사,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흥미 유발 등으로 보아 소설로서 한발 나아간 구조이다. 제왕이 호사호색에 빠져 충간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으로 군주의 치국 사상에 경계가 되는 교훈적인 작품이다.
패관문학과 가전체 문학
패관문학
명칭·개념
패관이란 중국 한나라에 있던 관직 이름으로서, 정치에 참고하기 위하여 항담을 수집하던 사람을 말한다. 처음에는 사실을 바탕으로 모았으나 점점 개인의 창작이 가미되어 재미있게 꾸미면서 이루어진 것이 패관문학이다. 우리 나라에는 야담이 합쳐져 후에 소설의 원천이 되었다.
형성
고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신호, 전설, 민담 등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 {삼국사기}, [삼국유사}, {수이전} 등에 정착되었다. 고려 시대에 설화 문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민간 전승의 설화가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문학 작품으로서 많이 읽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설화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채록한 것이기 때문에 패관문학이라고도 하여 채록되는 과정에서 창작이 가미되어 윤색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사물을 의인화하여 계세징인(戒世懲人)을 목적으로 한 가전체 문학이 나타났는데 이는 소설의 기틀이 되었다.
의의
집단 창작적인 의미가 가미된 민간 이야기로서, 후대의 소설의 전신(前身)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작품집
{수이전}, {파한집}, {보한집}, {백운소설}, {역옹패설}
가전체 문학
정의
가전체 문학이란 교훈을 목적으로 사람의 일생을 압축 서술한 교술 문학이며, 물건을 의인화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일깨워 줄 계세징인 목적으로 지은 이야기를 말한다. 어떤 인물의 가치 있는 행적을 기록한 이승인의 배열부전, 이곡의 절부 조씨전도 이에 속한다.
형성
패관 문학에서 발생한 시화·야담류의 작품이 성행하고, 묘사의 능력과 창의력이 발달하면서 장차 소설을 이루려는 움직임이 싹텄다. 그리하여, 고려 중엽 이후에 소설의 성격을 띤 많은 설화 작품이 나왔으니, 이들 작품의 특징은 술·종이 따위의 물건을 소재로 하되, 이것을 의인적 수법으로 표현한 가전체 설화 작품이 출현하였다.
임춘, 이규보 등에 의해 고려 중기에 처음 나타난 '가전'은 원래 사마천의 {사기}에서 시작된 '전(傳)'의 일종으로 '가전'이 나타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사기} 열전 등과 같이 사람의 일생을 서술하는 문학 갈래와 [화왕계]와 같은 의인 문학의 형태가 축적되고 있었고, 당시 문인들에게 당송의 가전이 읽혀진 데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전은 삽화적 구조로 되어 있지만 이들 사이의 인과관계는 없으며 삽화는 모두 중국 역사에 나타난 인물들의 고사로 소재와 관련되었을 뿐 상호 간에는 전혀 무관한 역대 인물들의 고사를 엮어 주인공의 행적을 형성함으로써, 소재로 등장하는 사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공과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진실성, 규범적 인간상의 확립을 시도한다. 작품의 끝 부분에서는 서술자의 개입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서술자는 사관의 신분으로 입전 인물의 가치 평가를 내린다.
특징
가전은 삽화적 구조로 되어 있지만 삽화 사이에 인과 관계는 없다. 삽화는 모두 중국 역사와 관련되었을 뿐, 상호 간에는 전혀 무관한 역대 인물들의 고사를 한데 엮어 주인공의 행적을 형성함으로써 소재로 등장하는 사물이 인간에게 미치는 공과(功過)를 한 인물의 입전 형태로 설명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적 진실성, 규범적 인간상의 확립을 시도한다. 작품의 말미에는 서술자의 개입이 분명하게 드러나 여기서 서술자는 사관(史官)신분으로 입전 인물의 가치 평가를 내린다. 가전체는 단형 서사문학으로서 이야기의 서두는 주인공의 가계에 대한 개괄적 설명으로 서장을 삼는다. 7편의 고려 가전체를 제작 연대순으로 나열하였을 때 초기에는 대체로 먼 상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되던 가계에 대한 장광설이 후대에 내려올수록 차츰 짧아지다가 종래에는 단 한 줄로 축약되거나 아주 생략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전기체는 현대문학에서조차 즐겨 다뤄지는 서사 양식이긴 하나 그것은 다분히 경험적이라는 면에서 허구적인 것과 성격을 달리하나 가전체는 이들 상이한 두 요소들을 공유 내지 함께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을 갖고 있다. 가전체의 주인공은 개체이긴 하나 그것은 특수한 하나의 유일이 아니라 여럿이 추상화된 상징적 개체요, 공개념화된 개체다.
매 작품 말미에 사기 열전에서 태사공왈이나 사신왈로 언급된 평결 부분의 채택이다. 작품의 본문은 사관과 같은 엄정성을 갖고 허구의 세계를 객관적 서술로 피력하고 있으나 평어는 작자의 주관적 논평이 첨가된 이중적 구성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결 부분은 작품의 주지나 작가적 태도가 직설된 교시 부분으로 서사 문학의 또 다른 매우 특이한 양식을 형성한다. 이는 서술자의 직접 노출을 통한 강력한 자기 표출이요 암시의 확인이다. 사기에 있어서 간간이 태사공왈로 피력되는 직언 부분은 역사적 사건 또는 인물을 보는 하나의 시각이지 그것을 불변의 진리나 절대적 가치로 간주하지 않듯 사신왈 이하의 평어 부분은 가장된 작가의 분신의 노출로서 예의 서사적 사건에 구조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하고 있다.
작자
임 춘의 국순전·공방전, 이규보의 국선생전·청강사자현부전, 이 곡의 죽부인전, 이 첨의 저생전, 석 식영암의 정시자전 등이 그것이다.
의의
패관 문학이 개인의 창작이 아님에 대하여, 가전체 작품은 개인의 창작물이어서, 소설에 한발짝 접근한 것이 되어 설화와 소설의 교량적 구실을 한 데 있다.
고려 가전체의 장르적 특징과 문학사적 위치
가전체는 이 땅 서사 문학 양식에 있어 서사시와는 별도로 서사적 완결을 이룬다. 즉, 본문의 전단에는 그 가업의 내력이, 말미는 주인공의 죽음 뒤에 후손에 대한 간략한 언급과 더불어 평어로서 마무리지어 생의 총체적 부감을 꾀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서사적 완결을 이루었다.
가전체는 생활 주변의 어떤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법을 써서 그 주인공의 일대기를 허구화한 단형 서사물이라 정의 지을 수 있으며 수사법으로서의 의인화는 가전체가 필요로 하는 불가결의 요소이긴 하나 의인화된 서사물 모두가 곧 가전체는 아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왕계와 구토 설화에서 시작된 설화에 있어서의 의인화는 고려 가전체를 거쳐 이후 조선의 동물 우화소설과 이른바 심성가전과 같은 단형 서사물에서 사적 맥을 잇고, 개화기의 [금수회의록]까지 뻗쳤다고 할 수 있다. 서사문학을 경험적 유형과 허구적 요소로 양대별할 때 가전체는 사기 열전에서 비롯되는 경험적 형식에다 허구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도 그 특이성이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가전체는 사사로운 개인의 가업과 그 일대기를 표출함으로써 영웅이나 역사적 인물, 효녀나 열부와 같은 특수한 서민들을 다룬 열전 다음에 이어지는 서사 문학의 인물 변천사적 위치도 함께 지닌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는 사뭇 크다. 가전의 전기 형식과 허구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후대의 소설 발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고전 소설이 대부분 '~전' 이라는 제목 아래 개인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허구적 서사물이라는 점에서 가전은 고전 소설과 통한다. 그러나 가전은 소설 그 자체는 아니다. 아직 역사적 전거를 관념적으로 나열하고 있어 작품 내적 세계의 독자성이 확보되지 않고 있으며, 서술적 형상화에 크게 미흡하기 때문이다.
작품
국순전-5
줄거리
순의 90대 할아버지 모가 후작을 도와 공로가 많고 청렴하므로 중산후에 봉해졌고 국씨 성까지 받았다. 그의 5세손은 성왕 이후 강왕 때 금고되었고, 위나라 때 순의 아버지 주가 출세하였다가 진이 어지러워지매 벼슬을 버리고 죽림에서 놀았다. 순은 도량이 넓고 풍류가 있어 국처사라는 칭호와 신임을 얻어 국가의 중대사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왕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예법지사의 지탄을 받았다. 또 왕의 보호 아래 돈을 거둬 함부로 써서 비난을 받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죽었다. 그 자손은 중국에서 대대로 융성하였다.
작자 : 임춘(돈을 의인화한 공방전도 지음)
성격 : 풍자적, 의인법
구성 : 일대기 중심으로 한 순차적 구성
주제 : 간사한 벼슬아치 풍자
출전 : 서하선생집(임춘이 죽자 그의 친구 이인로가 유고를 모아 엮은 사문집), 동문선
의의 : 현전하는 가전체 문학의 효시가 된다. 같은 술을 의인화한 이규보의 [국선생전]에 영향을 주었다.
감상
[국순전]은 고려 무신 정권 때 문인 임춘이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가전 작품으로,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해 본 것이다. 당시의 국정 문한과 특히 벼슬아치들의 타락상을 고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모리배들의 득세와 뛰어난 인물들이 오히려 소외당하는 현실을 풍자,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임춘이 [국순전]을 쓰게 된 동기는 자신의 처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가문이 몰락하여 오갈 데 없는 자신의 처지로 인해 세상에 대한 비판이 싹트고 무신란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물러나 정치권을 풍자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며 가전체 형식을 빌어 우의적으로 풍자함으로써 내용의 깊이를 더하고 자신의 안전을 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선생전-5 - 술의 효능과 가치를 '국순전'보다 긍정적으로 표현
줄거리
주인공 국선생은 총명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아 벼슬도 높았으나, 세 아들이 방자한 때문에 탈직되어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 뒤 기용되어 도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 폭병으로 죽었다는 내용이다.
작자 : 이규보
구성 : 전기적(傳記的)
성격 : 교훈적
주제 : 위국충절(爲國忠節)의 교훈 강조, 군자의 처신을 경계
출전 : 동문선
의의 : 임춘의 [국순전]의 영향을 받았다. [국순전]이 풍자적임에 비해 이 작품은 권선적이며 교화적이다.
이 작품은 임춘의 [국순전]과 함께 술을 의인화한 것으로 위국충절을 교화한 가전 문학이다. [국선생전]은 [국순전]의 영향을 받아 창작되었으나, [국순전]이 향락만을 일삼는 벼슬아치를 풍자한 반면 [국선생전]은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물을 등장시켜 사회적 교화를 강조하였다.
※ [국순전]과 [국선생전]과의 관계
⑴ 영향관계 : 이규보의 [국선생전]은 임춘의 [국순전]에서 제목, 관련인물, 지명, 서술 방식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⑵ 주제상의 차이점 : [국순전]이 향락만을 일삼는 벼슬아치와 방탕한 군주를 꾸짖으며 세상을 풍자한 반면에 [국선생전]은 위국충절의 대표적 인물로 등장시켜 사회적 교화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서술 방법에서 [국순전]에 비해 고사의 열거는 줄이는 대신에 주제를 더욱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⑶ 본을 삼은 작품 : 송나라 때의 {태평광기}의 '서막'설화에서 많은 본을 받았으며, '청화 선생전'을 본떴다고 볼 수 있다.
공방전-2
내용
'孔'은 돈의 둥근 모습, '方'은 구멍의 모난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주인공 공방이라는 존재가 두통거리니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다.
작자 : 임춘
성격 : 풍자적, 교훈적
주제 : 경세(經世)에 대한 비판
의의 : [국순전]과 함께 우리 나라 문헌상의 최초의 가전
출전 : 동문선
감상
이 작품은 서사 양식으로의 '전(傳)'의 특성과 우화적인 요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돈을 의인화시켜 인간의 품격을 부여하는 방식은 일종의 우의적인 표현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돈의 속성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각성을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傳)'의 사실성과 우화의 윤리성을 결합시킨 것이 이 작품의 특성이다.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해 돈의 내력과 성쇠를 보여 줌으로써 사회상을 풍자하는 경세의 효과를 나타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의 가전체 작품
고전 소설론
고소설의 특성
형태상의 특성
개인의 전기(傳記)의 형태를 취함에 따라 구성이 단순 구성에 해당되고, 플롯의 진행이 평면적으로 진행된다. 대개 '-傳, -記, -錄'등은 사람의 이름 다음에 붙여 개인의 전기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작품의 구성이 '출생담-결연담-고행담-시련극복담-행복담' 등의 다섯 단계의 천편일률적 성격을 띠고 있다.(특히 애정 소설이나 영웅소설의 경우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태몽
대부분의 고소설의 서두에 주인공의 출생담임 태몽 장면이 나온다. 태몽 장면은 주인공이 천상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임을 암시해 줌으로써 평범한 인물에서 머무르지 않고 출중한 어떤 일을 할 것이라는 예고를 해 준다.
결연
대부분의 영웅 소설과 애정 소설에는 반드시 남자 주인공이 아름다운 여인과 인연을 맺는 장면이 나온다.
고행과 시련
주인공이 고난을 겪는 장면은 행복한 결말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로 하나의 장애 요소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고행담에 구조자가 나타나 주인공을 구해준다. 영웅 소설에서는 주인공은 도사나 도승을 만나 도술을 익혀 적을 물리쳐 시련을 극복하게 된다. 애정 소설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과거에 급제하여 죽어 가는 애인을 구출하거나 이미 죽은 애인을 선약(仙藥) 등으로 간신히 구출해 시련을 극복한다. 가정 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이 계모의 학대로 인해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이 원을 풀어지는 군수의 도움으로 소생함으로써 시련을 극복한다.
행복한 결말
고소설의 형식상의 공통점 가운데서도 가장 포괄적인 것이 행복한 결말이다. 행복한 결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유교 이념에 입각한 교훈성과 샤머니즘에 기반을 둔 조선 시대 사람들의 낙천성에 기인한 것이다.
고소설의 표현법
율문체에 가까운 산문체를 취하고 있다.(낭독 용이)
고사나 격언을 많이 이용하고, 판소리계 소설의 민간에 흘러 다니던 민요, 잡가, 시조, 한시 등도 많이 삽입되어 있다.
국문소설의 경우도 한자어나 한자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문체상 과장법을 많이 쓰고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나열하는 화려체, 우아체, 부연체 문 장을 주로 쓴다.
현대 소설이 진행중인 사건을 묘사하는 형식을 지니는데 비해 고소설은 과거의 일을 서 술하는 형식을 주로 취하고 있다.
문장의 공식성을 들 수 있다. 대부분 소설이 '화설 - '로 시작되고 이야기의 장면이 바뀔 때는 '각설, 차설' 등을 삽입한다.
내용상의 특징
고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평면적 인물이고 사건이 비현실적이며, 배경은 주로 중국이며, 권선징악적인 주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 등이 내용상의 특성과 공통점이다.
인물 - 고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개 전형적인 인물이다.
사건
비현실적 성격을 지닌 사건 중심의 이야기로 일관(우연성 남발과 환상적 세계 묘사)
배경
지리적 배경으로 중국을 취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첫째, 중국 문화에 도취된 결과이며, 둘째 독자들이 중국의 인물과 지리에 익숙하지 못함을 이용한 결과이며, 셋째 이국 정취를 이용하여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함이고, 넸째 중국 생활과 귀족 횡포의 진상 및 그에 대한 풍자를 하기 위해 정면으로 그대로 쓸 수 없어 중국의 궁정과 귀족을 차용한 결과이다.
주제의 공통성
권선징악적 주제이다. 이러한 이유는 조선시대가 유교적인 이념과 윤리의식을 강조하였고, 양반사대부들이 유교적 이념을 정치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고소설의 주제의식
고소설 대부분의 주제는 권선징악적인 도덕성을 내세운다. 이는 조선시대 및 사대부의 유교적 이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한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에 소설이 유행했는데, 그 바탕은 신분제 동요와 상관되며 서민들의 자아의식 고양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 무렵에 쓰여진 대부분의 소설이 유교적 이념을 실현하려는 양반 사대부의 문학관에 일치라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렇지만 소설의 주제가 양반 사대부계층의 윤리의식과 관련된 내용을 담게 된 배경은 출판 풍토와 독자층과의 관계가 무관하지 않다. 중국 소설의 독자층은 주로 양반 사대부계층이었고 중국 소설을 모방한 고소설이나 독창적인 내용을 담은 고소설의 독자층 역시 양반 사대부 계층과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고소설의 주제가 이들의 사상과 부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의 작가와 독자
고소설의 작자 미상이 많은 이유는 첫째, 작가가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내용을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둘째, 봉건 왕조의 정치적 형태 및 범주에 저촉되는 내용이나 양반 사대부층의 윤리의식이나 가치관에 반하는 내용을 일부 담았을 경우에도 면책이 가능했기 때문이며, 셋째, 독자층이 주로 양반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로 작가가 양반일 경우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였으며, 넷째, 중인이나 평민 계층의 작자일 경우 이름을 밝히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소설의 분류
전기 소설
초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이며 비논리적인 환몽, 천상, 용궁의 세계 등 시공(時空)의 제한을 두지 않고 주인공이 활약하는 기이한 사건을 다룬 소설
작품 - 금오신화, 삼설기, 삼한습유, 왕란반혼전
사회 소설
작가가 사회의 모순과 비리·부패상 등을 직시하고 모순된 사회상의 개선을 위해 도술을 사용하면서까지 노력하는 내용
작품 - 홍길동전, 전우치전
의인 소설
고려의 가전의 전통을 이어 받은 소설로 대개 양반 사대부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이나 어떤 일 또는 인간의 마음 등을 의인화하여 인간정신을 바르게 인도하려고 시도하는 작품들
작품 - 수성지, 천군연의, 천군실록
몽유록계 소설
꿈을 소재로 한 소설
특징
분량이 몽유록보다 많다.
두 세계에서 전세(前世)에 맺어진 인연이 계승됨
구성이 몽유록과 반대로 복잡하다.
각몽(覺夢)에서 심한 자극을 받고 허무를 느껴 다시 전세로 돌아간다.
역사 소설
실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문학적 소재를 취하여 영웅이나 유명한 장군의 생애와 전쟁담을 허구적으로 꾸며 놓은 작품(군담 소설과 더불어 임·병 양란 후에 많은 쏟아져 나왔는데 현실에서 패배한 굴욕감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정신적 승리로 바꾸어 보려는 의도에서 많은 창작)
작품 - 임진록, 임경업전. 박씨전(역사군담)
군담 소설(=영웅 소설)
가공 영웅을 등장시켜 호쾌한 장면과 승리감과 고난 극복의 의지를 독자에게 보여주는 작품.
작품 - 유충렬전, 조웅전, 소대성전
가정 소설
가정의 구성원간의 갈등을 다룬 소설(계모와 전처 자식간, 처첩간의 갈등을 다룸)
작품 -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사씨남정기
우화 소설
동물을 의인화하여 인간의 허위를 풍자하고 진실을 깨우치게 하려는 교훈성 짙은 소설
작품 - 토끼전, 두껍전
애정 소설
고소설의 어느 소설이나 남녀간의 애정에 얽힌 이야기가 조금씩은 나오지만 남녀간의 자유로운 로맨스를 다루고 이것이 주제로까지 부각되는 작품
작품 - 춘향전, 운영전, 숙영낭자전, 채봉감별곡
이상 소설
귀족 계층의 가정 내에서의 이상적 생활을 다룬 작품(일부다처주의적인 가정 생활과 조정에서의 입신양명과 부귀영화, 국가나 군왕에 대한 충성 등을 이상으로 하여 살아가는 양반 사대부층의 꿈과 사랑 출세욕 등이 잘 나타남)
작품 - 구운몽, 옥루몽
도덕 소설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측면의 문제는 주제로 다룬 소설(주로 유교적 이념과 윤리의식을 토대로 한 유교적인 삼강오륜 사상을 바탕으로 효행, 우애, 충절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작품 - 심청전, 흥부전
풍자 소설
인물과 사회현실의 모순, 불합리한, 결점 등을 재치 있게 파헤친 소설
작품 - 호질, 배비장전, 허생전
가문 소설
한 가문을 중심으로 수많은 자녀가 남혼여취(男婚女娶)하여 가문이 얽히고 섥히어 일어나는 사건을 1세에 걸쳐서만이 아니라 2세, 3세까지 포괄적으로 다루어 나가는 작품
고전소설(古典小說)
허균과 [홍길동전]
허균(許筠) : 1569 - 1618. 광해군 때의 문인
그는 서얼 차별의 벽에 부딪혀 불우한 일생을 보낸 스승 이달을 통해 사회 모순을 발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대부 계통의 문인보다는 서얼 출신 문인들과 어울렸으며 그 수 사회 제도의 모순을 과감히 비판하였고 불교의 중생제도 사상, 사학과 양명 좌파 사상 등을 받아들여 급진적 개혁 사상을 갖게 되었다. 허균의 사상은 피지배자의 입장에 선 것이었으며 민중의 혁명을 정당화한 '호민론(豪民論)'이나 서성들이나 일반 평민들의 능력도 사대부에 못지 않고, 인간의 능력은 하늘이 준 것인 만큼 평등하다는 '유재론(遺才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의 문학론은 '호민론, 유재론'과 대응되는 것으로 인간의 솔직한 감점의 표현과 독창적인 개성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문학론은 후대의 실학자들의 문학론에 연결된다.
홍길동전-10
[홍길동전]의 문학사적 의의와 영향을 준 작품
현전하는 최초의 국문소설이며, '주몽신화'이래 전승되어 온 '영웅의 일생'이라는 서사적 전통이 최초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또한 그 소재를 당시 실재했던 의적 홍길동에서 취하고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 뚜렷한 사회소설의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사회서설의 선구적 작품이다. [홍길동전]의 사회소설로서의 성격은 [전우치전]으로 계승되었고, 영웅의 일대기를 근간으로 한 영웅소설은 [박씨전]과 같은 역사군담 소설과 [유충렬전]과 같은 창작 군담 소설로 이어진다.
이본(異本)
경판본, 안성판본, 완판본, 필사본, 활판본 등이 있으나 모두 허균 당대의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300여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기 때문에 얼마나 원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이다.
[홍길동전]의 형성 배경
배경 사상
한국적 휴머니즘 : 봉건제도의 모순과 적서차별에 대한 비판 의식
서민적 고발정신 : 백정에 대한 반발과 자기 수호 의식
신분 부상에의 욕구 : 사회적 상층 신분으로 떠오르는 인간 본연의 욕망 (비판의식의 한계)
역사적 배경
조선 중기 이후 팽배한 서민 정신
임란 이후 문란해진 정치와 사회상
모순에 찬 사회 제도와 적서 차별
중국 소설의 영향 (수호지, 삼국지연의)
[홍길동전]의 영웅소설적 성격
[홍길동전]은 우리 나라의 고대 건국신화(주몽 신화)로부터 시작된 '영웅의 일생'이라는 서사적 유형 구조를 처음으로 소설화한 작품으로, 영웅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서사적 유형구조는 [홍길동전]과 대체로 일치한다.
고귀한 혈통과 인물 - 홍판서의 아들
비정상적인 잉태와 태생 - 시비에게서 태어난 서자
비범한 능력 - 특별히 총명하고 도술에 능함
어려서 위기를 겪고 죽을 고비에 이름 - 음모에 의해 생명의 위기를 겪음
구출·양육자를 만나 위기를 벗어남 - 스스로 자객을 죽이고 위기를 벗어남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침 - 활빈당을 조직하자 나라에서 길동을 잡아들이려 함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자가 됨 - 국가 권력을 물리치고 율도국의 왕이 됨
그러나 허균은 홍길동의 이야기를 단지 영웅의 일생에 적합하게 배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념을 반영하고 홍길동의 영웅적 행위를 형상화하기 위해 영웅의 일생을 차용한 것이다.
[홍길동전]의 사회소설적 성격
[홍길동전]에 나타난 영웅적 행위는 [유충렬전]과 같은 창작군담 소설에서와 같이 가문의 회복이나 국가에서의 충성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당대 사회의 제 모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다.(영웅소설로서의 [홍길동전]과 다른 영웅 소설과 다른 점) 홍길동은 가정 내에서의 적서 차별과 자기에 대한 암살음모로 자객을 주기이고 집을 떠나 사회에서는 활빈당의 두목이 되어 의적 행세를 하다가 해외에 나가 율도국의 왕이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길동이 부딪힌 사회적 모순은 적서 차별과 사회 통치 체계의 모순이다. 이런 모순에 대해 길동은 민중의 입장에서 저항하고 극복한 것이다 적서 차별, 즉 신분제도에 대한 모순은 허균이 주장한 인간의 능력은 하늘이 준 것인 만큼 평등하다는 '遺才論'과 상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길동은 적서 차별의 문제를 사회의 통치체제의 모순과 결부시키게 된다.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 행위는 자신의 불만을 사회 전체의 불만과 연계시키는 것으로 이는 허균이 주장한 '豪民論'과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율도국의 의미
길동은 자신의 이상을 조선사회에서는 더 이상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새로운 이상사회 율도국을 건설한다. 그곳은 도적도 없고 거리에 떨어진 물건도 자신의 것이 아니면 줍지 않는 이상국가이다. 동시에 중국을 섬기지 않으며 조선 사람들도 출입하지 않는 단절된 세계이다. 이러한 율도국의 모습은 실재하는 국가의 모습과는 다른 것으로 현실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곳도 봉건적 모습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홍길동의 한계이자 동시에 작품의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서포 김만중과 그의 소설
서포의 문학론
서포의 주요 저술로 [구운몽], [사씨남정기]와 같은 소설 외에 시문집으로 {서포집}이 있고 비평이나 수필을 모은 {서포만필}이 있다. 이 중에서 그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는 글은 대부분 {서포만필}에 실려 있다. 서포의 문학론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국문시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 그른 일반 백성들의 노래를 참된 것이라고 하고 자기 민족어로 장단과 가락에 맞춰서 노래하는 것이 참된 노래이며 중국의 한시를 모방하려는 것은 아무리 잘 되어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일반적인 사대부의 문학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는 응당 당시를 본받아야 하고 문(文)은 마땅히 고문(古文)을 본받아야 한다는 풍조 속에서 자국의 민족어로 표현되었느냐 아니냐의 여부로써 사문의 평가 기준을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포가 한문으로 표기된 시를 비판하고 국문시가를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일정한 조건이 있었다. 송강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평가하면서 한문어구의 표현이 적고 고유어를 잘 사용한 [속미인곡]을 제일 높게 평가하되, 이 세 작품이 모두 우리 나라의 眞文章인 까닭은 천기(天機 ; 꾸밈이 없는 마음의 자연 그대로의 것)가 자연히 발현되어져 있음과 아울러 오랑캐 풍속의 비속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포의 문학론 중 또 주목할 것은 소설의 효용성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이다. 진수의 [삼국지]보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사람을 더 감동시킨다는 점을 통해 소설이 허탄하다는 부정적 평가를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 쓰여진 것이 [사씨남정기]이다. 이상의 서포의 문학론은 당시 일반적인 사대부 문학론과는 특이한 것으로 한시보다 국문시를 옹호한다든가 공식적으로 배격되는 소설의 긍정적 측면을 인식하고 직접 창작까지 했다는 것은 그의 사상적 입장이 남달랐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씨남정기-1
이 작품은 숙종 15 - 18년(1689 - 1692) 사이에 김만중이 유배지 남해에서 지은 작품이다. [사씨남정기]는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작품인데, 첫째는 서포 자신의 전기적 사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며, 둘째는 조선 후기에 소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의에서 이 작품이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는 점, 셋째는 소설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정비로 세운 것을 풍자하여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지었다는 주장이 있다.
서포 가문으로서는 애초 숙종의 初妃가 서포의 형 김만기의 딸이었고, 서포는 처음 장희빈이 작당하여 세력을 얻을 때 숙종에게 직간하다 선천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세자 책봉 문제에 관ㄹ현되어 남해로 유배되어 결국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 사실을 볼 때 장희빈 사건이 서포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사씨남정기]와 서포의 전기적 사실이 어느 정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서포는 처첩간의 갈등을 기본 구조로 한 이 작품으로써 숙종의 행위를 비판, 풍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숙종 개인의 행위를 비판한 것에 멈추지 않고 선량하고 도덕적인 정실부인과 부도덕하고 간교한 첩의 갈등을 설정하여 규범적인 가치가 훼손되고 부도덕한 욕망이 득세하는, 이로 인한 전자의 고난을 제시함으로써 일종의 윤리비판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윤리비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소설 논의에서 소설을 도덕적 효용론의 관점에서 긍정할 때 항상 [사씨남정기]가 대표적 작품으로 거론된다.
한편 소설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처첩 갈등을 중심으로 교씨, 동청 등의 음모자들의 활약과 적나라한 욕망 표출, 일방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정실부인, 그 가운데 놓인 시비들의 역할 등은 가정 소설의 전형으로서 후대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의 모델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후대의 여성 독자층의 요구와 기호에 맞춰 처첩간의 갈등, 축첩으로 인한 가정 내의 비극이 소설의 중요한 소재로 채택되고 그것들의 복잡한 얽힘은 장편 소설의 기틀을 보여 준다고 하 때 작품의 의미는 한층 커지게 되며 여기에 영웅 소설적 요소를 가미하면 대하 장편 소설로 발전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사씨남정기의 창작 동기의 다른 하나는 국문 소설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당대 사회 현실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알리려는 것이다.
구운몽(九雲夢)-10 <국어 상>
[구운몽]은 김만중이 숙종 15 - 18년(1689 - 1692) 때 남해에 유배되었을 때 어머니를 위해 쓴 몽자류 소설(夢字類小說)의 효시로서 남영로의 [옥루몽] 등의 몽자류 소설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교적 현실주의를 택하지 않고 불교 사상에 입각해서 세상의 모든 영화가 덧없다는 공(空)사상을 통해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구운몽]은 남악형산의 수도승 성진이 팔선녀를 만난 뒤 세속적 욕망에 사로 잡혀 번뇌하다가 꿈속에서 양소유가 되어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고, 꿈을 깬 후에는 세속적 욕망의 추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이다. [구운몽]의 주제를 양소유의 일생에서 찾는다면 유교 사상에 입각한 공리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현실 긍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꿈을 체험한 후의 성진에서 찾는다면 불교 사상을 통한 허무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구운몽]은 기본 구조면에서 몽자류의 작품들과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구운몽]의 주제는 꿈을 깬 후의 성진의 태도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서포가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유교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허무사상을 반영한 이유는 서포가 구운몽을 저작할 당시의 상황은 한때 누렸던 영화만큼 불행도 참혹한 시기였고, 수많은 희비와 애환을 경험한 어머니를 위해서도 불교의 허무사상이 가장 설득력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서포 자신이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속에서 자랐고, 형과 아울러 높은 벼슬에도 올랐으나 구운몽을 저작할 당시에는 지난날의 영화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자신은 유배지에서 처참한 신세가 되어 지난날을 회상해 볼 때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것이다. [구운몽]은 어머니를 위함과 아울러 서포 자신의 인생관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표현상의 특징
구성은 복잡하나, 평면적인 구성법으로 되어 있다.
전기성과 우연성
인물이나 장면 묘사 부분은 비유 사용
한문을 번역한 듯한 문투가 가끔 엿보인다.
현실인 선계와 꿈인 인간게라는 이중 공간에다 다시 꿈 속에서 현실 세계와 선계 또는 용왕게라는 복합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국문학사적 의의
조신 설화의 영향
체제와 내용에 있어서 본격적인 고전 소설 완성
귀족 문학에서 평민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구실
양반 소설의 대표작
몽자류 소설의 효시
후대의 옥루몽, 옥련몽에 영향
김만중의 국문 의식 반영
삼국유사의 [조신설화]와 [구운몽]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는 몽자류 소설의 연원이 되는 설화로서, 두 작품은 현실에 회의를 품고 세속적 욕망을 꿈을 통해 이루는 공통점을 갖는다. 성진이 꿈에서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고 세속적 욕망이 덧없음을 깨닫고 불법에 귀의한다면, 조신은 꿈에서 온갖 고생을 경험한 후 속세에 미련을 버리고 불법에 귀의하는 차이점이 있다.
구운몽이 지닌 영웅소설적인 면
구운몽에서는 양소유의 탄생과 출세 과정에서 부마로 간택되는 등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웅적 인물로 그려지나 영웅소설이 지닌 시련과 극복 과정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형적인 영웅소설은 아니다.
구운몽과 몽자류 소설과의 차이점
(이 작품의 '천상→지상→천상'이라는 공간적 배경과 '현실-꿈-현실'이라는 구성과의 관계)
보통 몽자류 소설의 경우 '현실=지상', '꿈=천상'의 관계를 보이면서 꿈은 이상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데 비해 [구운몽]에서는 반대로 나타난다. 이는 이 작품이 유불선 세 영향을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불교 사상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실 지상에서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부귀공명을 누리는 풍족한 것이라고 해도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꿈', '천상=현실'이라는 관계 설정을 통해 지상에서의 삶은 한낱 꿈 같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몽자류 소설과 몽유록계 소설
공통점 : 현실-꿈-현실로 전환하는 환몽구조는 일치
차이점 : 작품의 구성 방법, 등장 인물의 성격 및 주제 설정은 다름
연암 박지원과 그의 소설
연암의 사상
연암은 조선 후기 실학 사상 중에서도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 ;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 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유파)이다. 이용(利用)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며, 후생(厚生)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라는 즉, 경제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윤리, 도덕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사상을 강조하였다.(利用→厚生→正德)
연암의 과학적 인식 태도는 한편으로는 실학사상으로, 한편으로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인 화이사상의 탈피로 이어진다.
문학론
연암이 자신의 문학론에서 우선적으로 내세운 것은 작가란 자기가 속한 시대와 풍속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대 현실과는 동떨어진 한당(漢唐) 때의 문장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즉 지금 보자면 한당은 고대이고 그 문장은 고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당 그때에는 당대였으며 그 때의 문장은 그 때의 풍속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훌륭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작가가 살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당대의 언어로 진실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암의 주장은 고문(古文)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당대 현실 자체에서 참된 것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으로 오늘날의 리얼리즘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암이 고문을 비판한 것은 고문이라는 전통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비판한 것이지 고문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며, 고문을 계승하되 현실에 맞게 적절히 변용해야 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중요시하였다.
박지원의 근대성
세계관 :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동양과 서양, 지구, 우주를 개방적으로 발 전시켰다.
경제관 : 기술적인 중농사상을 중심으로 함
인간성 존중 : 당시의 가치 기준인 차별 질서관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진 실된 눈으로 그들의 내면적인 인간성을 비추어 부각시킴
민족주의 : 모방이 아닌 자주성 강조 (이용후생)
박지원의 문학원리 (사대부들의 모방주의와 상고주의를 규탄)
글은 진실을 쓰는 것이라고 주장
창작의 원리는 '법고'와 '창신'
문장은 짜임새 있게 구성하여야 하며, 그 표현법은 실증적이어야 한다.
문자는 정음을 활용하지 않는다.
양반전-11(출전 - 방경각외전)
연암의 작품 중에서 그의 작가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조선 후기 양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공허한 명분에 사로 잡혀 평민에 대한 침탈을 일삼는 양반층에 대한 풍자와 함께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린 당시의 사회상을 드러낸 것이며, 연암의 실학 정신이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양반 사회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관점은 보이지 않으나 양반의 진정한 참모습을 되찾아야겠다는 연암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연암은 신문질서가 문란해진 조선 후기를 바탕으로 해서, 양반이라는 특권 계층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양반이 양반답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문권1은 형식과 가식에 얽매여 무위도식적 생활을 희화화하였고, 문권2는 양반들의 특권 남용을 보여 줌으로써 이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양반 사회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관점을 보이지 않으나 양반 계층에 대한 비판과 함께 궁극적으로 진정한 양반의 모습을 되찾자는 양반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양반전의 풍자 대상
연암이 이 작품에서 풍자하고자 한 주된 대상은 양반 계층이 분명하다. 연암의 自序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반 신분을 팔아버린 정선 양반은 장사치와 다른 것이 없다고 간주한다. 그가 비판하고자 한 양반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문권1에서 풍자된 양반은 무위도식(無爲徒食)하며 겉치레에 얽매인 비생산적 계층으로 다르나 있으며 문권2에서 풍자된 양반은 개인의 이익만을 취하며 부당한 특권을 남용하는 집단으로 드러나 있다. 앙면 모두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나 좀더 강한 비판이 가해진 것은 문권2의 특권 남용에 관한 행동이다. 이는 부자의 마지막 말 '나더러 도둑놈이 되란 말이오'를 남긴 채 달아나 버린 데서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양반전의 시대적 배경
[양반전]의 배경이 되는 임란과 병란 후의 조선 사회는 신분 질서가 동요되기 시작했으며 상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발달 등으로 평민 부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국가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돈 많은 평민들에게 돈을 받고 양반으로 상승시켜 주기도 하였다. 한편 당대 지배 관료층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공허한 명분에 얽매여 있었으며 관료 사회의 부패 또한 심하였다. [양반전]은 이와 같은 조선 후기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연암 소설의 특징
연암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비판·풍자적 성격과 사실주의적 특성이다. 풍자는 근본적으로 현상과 본질의 괴리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연암이 살았던 당대는 풍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으며, 지배 이념인 유교는 더 이상 사회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고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으며, 객관적 현실은 이미 그 틀을 벗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연암에게는 풍자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암 문학의 사실주의적 특성은 자신의 문학론에서 내세운 것처럼 훌륭한 문학이란 작가가 살고 있는 현실을 당대의 언어로 진실되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늘날 리얼리즘과 상통한 것이다.
연암의 한문 단편 소설 - 열하일기 : 허생전, 호질
방격각외전 :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호질-1(출전 - 열하일기)
이 작품의 주제는 양반의 도덕적 허위 의식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위선적 인물을 대표하는 북곽 선생과 동리자를 내세워 당대 양반 계급들의 도덕적 허위 의식을 풍자하여 비판한 작품이다. 연암은 이 작품에서 도덕과 인격이 높다고 소문난 북곽 선생은 결국 여우같은 인간이며 온 몸에 똥을 칠한 더러운 인간이며 끝까지 위선과 허세를 부리는 이중적인 인간임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정절로써 천자와 제후들에게까지 우러름을 받는 과부 동리자의 다섯 아들이 모두 성(姓)이 다르다고 비꼬는 것은 겉모습 혹은 세상의 평판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음을 통렬히 풍자한 것이다.
허생전-2
이 작품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연암의 초기 九傳과는 달리 그의 실학 사상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 쓰여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허생전]은 이전에 설화 형태로 구비전승 하던 '허생고사'를 수용하여 작가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용후생이라는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비판, 풍자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즉, 작가는 당시대의 문제적 인물인 허생을 통하여 작품 전반부에서는 오직 독서에만 전념하다 보니 가정의 경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선비 계층의 구조적 모순을 허생과 그의 아내의 갈등을 통해 드러내어 아내가 허생의 모순을 풍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작품의 중반부는 사회 경영의 실패에서 발생된 군도(群盜)들을 허생이 이용후생의 실천적 행위로서 그들을 구휼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면서, 한편으로 그들을 구휼하는 자금 마련의 과정(매점매석)을 통해 당대 경제가 보이고 있는 비생산적 경제 구조의 취약성(국내의 물자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외국과의 무역이 없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으며, 작품의 종반부에서는 국가의 경영에서도 대의명분(大義名分)을 좇느라 실리적 대안이 외면되는 국정의 현실을 허생과 이완의 대립을 통해 보여주면서 작가의 풍자, 비판의식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허생전]은 당대의 양반 및 위정자들이 명분을 고수함으로써 역사 발전을 저해하는 현실 모순을 이용후생의 실학적 관점에서 비판, 풍자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운영전(雲英傳)-1
조선 중기의 한문 소설로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일명 '수성궁몽유록'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은 궁녀들의 구속적인 궁중 생활의 번민과 궁녀의 신분적 해방을 주제로 한 조선 시대 유일의 비극 소설이다. 몽유록 형식으 소설로서 다른 몽유록 작품들처럼 액자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유영에 관한 이야기가 외화, 즉 액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라면 김진사와 운영에 관한 이야기가 내화 즉 그림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주제 : 남녀간의 지고한 사랑(궁녀의 비극적인 삶)
궁중에 갇혀 살아야 했던 궁녀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장끼전-1
조류(鳥類)를 의인화한 국문 소설로 일명 '웅치천(雄雉傳)' 또는 '화충전(華蟲傳)'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은 원래 판소리로 불려지다가 어느 때부턴가 창(唱)을 잃어버리고 사설만 남아 소설로 정착한 판소리계 소설이다. 인격화된 동물에 의해 사건이 진행되는 의인 소설이고 우의성을 띤다는 점에서 우화소설이다.
대부분의 판소리계 소설이 표면적인 주제와 이면적인 주제를 지니는데 [장끼전]은 예외이다. 이는 판소리 창으로 불려지자마자 곧바로 소설로 넘어온 까닭과 우화라는 형식적 제약 탓에 우의적(寓意的)인 주제만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용한 사건은 두 가지인데, 첫째 장끼가 여자의 말이라고 까투리의 말을 듣지 않고 콩을 먹으려다 죽은 것이고, 둘째 남편인 장끼가 죽자 까투리가 곧 개가(改家)한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남존여비와 개가금지(改家禁止)라는 당시 유교 도덕에 대한 비판과 풍자로 볼 수 있다. 또한 장끼가 아들딸을 데리고 먹이를 구하러 눈 덮인 벌판을 헤매다가 결국 죽는 장면에서는 유랑민의 고달픈 삶의 애환을 찾아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사회의 일면을 풍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이본에 따라 주제가 개가금지형과 개가허용형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역사군담 소설
개념 및 범위
역사소설 : 작품 속에 한 사람 이상의 역사적 인물이 등장해야 하고, 한 세대 이전의 역사적 사실을 무대로 해야 하며, 과거와 현재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특성 속에서 과거를 재현하는 소설
군담소설 :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고소설로 주인공이 전쟁을 통해서 영웅적인 활약을 전 개하는 작품
역사 군담 소설 :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역사상 실재했던 전쟁을 통해서 영웅적인 활동을 전개해나가는 내용의 작품. 주로 조선시대의 임·병 양란을 배경으로 함
창작 군담 소설 : 가공의 인물들이 가공의 전쟁을 통해서 영웅적인 능력을 보이는 내용 으로 되어 있는 작품(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일생이 신화 전승의 '영웅의 일생'이라는 전기적인 유형에 부합되고 있기 때문에 '영웅 소 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주로 중국을 배경으로 신존 여부가 불명확한 인물 등장
역사 군담 소설의 범위 : 임진왜란을 배경과 소재로 하고 있는 [임진록], 병자호란을 배 경과 소재로 하고 있는 [임경업전], [박씨전] 등이 있다.
형성 배경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소설 문학이 국문학 전반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차례의 전쟁은 역사 군담의 소재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사회구조를 전기에 비하여 크게 변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역사 군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역사 군담은 어느 작품이나 이민족에 대한 강한 적개심, 역사적인 패배를 보상받으려는 정신적인 승리의식, 지배층의 무능에 대한 실랄한 비판,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영웅들에 대한 기대, 영웅들의 활약을 통해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민족애 등을 나타내 보인다. 즉 전쟁의 패 배를 허구적 승리로 바꾸어 정신적인 승리의식으로 패배감을 극복하려 하였다.
박씨전-1
박씨전과 다른 역사 군담과의 차이점
[박씨전]은 역사상 실존 인물이었던 이시백의 부인으로 설정되어 있는 박씨라는 가공인물의 이인적(異人的)인 행위를 통해 병자호란의 참상과 패배를 설욕하고 있는 작품으로, 특이한 것은 박씨라는 여자가 남성 우위에서 국가적인 차원의 전란에 과감하게 맞서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박씨전]은 역사 군담이면서도 여호걸계 소설과 같은 계열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소설의 주된 독자층으로 등장한 여성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이며, 조선 후기 일부 여성 사회에서 일기 시작했던 남성사회에 대한 도전의식과 함께 이민족으로부터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적인 승리의식을 배경으로 했다.
이본(異本)
[박씨전]의 이본은 약 30여종이 있지만 이 이본들이 모두 필사본과 구활자본으로 목판본(木版本)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목판본이 없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른 고소설에 비해 비교적 늦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판각 시기를 놓치고 필사본에서 바로 구활자본으로 간행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씨전]에 영향을 준 설화
천상계 여자와 지상계 암자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온달, 서동 설화,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천상 선녀로서 우렁이로 변한 여자와 논에서 일하던 총각을 주인공으로 한 나중미부 설화(螺中美婦說話), 잉어로 변신한 여자와 어부가 등장하는 욕신금기 설화(浴身禁忌說話) 등이 있다. 특히 비루먹은 말을 구입하여 得金하는 모티브가 나오는 온달설화와 허물을 벗고 변신하는 모티브를 간직하고 있는 제갈량부인의 전기인 [황부인전] 등은 [박씨전]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창작 연대([박씨전]과 [임경업전]의 관계)
[박씨전]의 후반부 이야기는 [임경업전]의 전반부와 상당한 부분에서 같은 내용을 보이고 있는데, [박씨전]의 후반부는 [임경업전]으 전반부를 차용한 것이라 추측되며 이런 관점에서 [박씨전]은 [임경업전]보다 훨씬 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목판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남성우위에 서는 여성의 사회적인 활약상이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19세기 또는 20세기 초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박씨전]의 구조
이 작품은 이야기의 성격에 따라 전반부와 후반부로 확연하게 구분되는데, 전반부는 이시백의 집안을 배경으로 하는 한 가정 이야기로, 이승상과 박처사가 만나 이시백과 박씨부인의 혼약을 정하는 이야기로 시작되어 박씨부인이 추녀인 관계로 천대를 받으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상공의 신임을 얻고, 결국 3년 시한이 지나 변신함으로써 집안의 총애를 받게 된다. 후반부는 국가적 이야기인 전쟁담으로 호적의 침입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이야기와 박씨부인이 용홀대를 죽이고 용골대를 비롯한 호적을 혼내주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전반적인 구조 : 혼인-박해·시련-시련극복-도술·무용담-행복한 결말
[박씨전]의 통과제의(Initiation)
이 작품은 박씨부인의 행위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박씨부인은 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평범한 여성'의 역할 수행과 전쟁담에서 '뛰어난 여성'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 이 작품의 구조는 通過儀禮 入社式에서 볼 수 있는 내용과 구조를 갖추고 있다. 통과의례 모티프는 미숙한 자아가 성숙한 자아로 발전하는 형태로, 통과의례에서는 반드시 혼사장애가 나타난다. 대개는 여성이 고난을 받아 죽거나 집에서 쫓겨나는 형태를 지닌다. 즉 '죽음→환생·재생'이 보편화된 양상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변신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이채롭다. 추(醜)에서 미(美)로의 변모를 통해 완전한 여성, 완전한 인격체, 완전한 부부를 지향하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소설 독자층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여성 계층의 기호에 영합하여, 조선 시대의 불합리한 가족 제도하에서 여성의 원초적 본능인 미(美)를 지향하는 한편 원만한 가정 생활을 염원하는 여성의 꿈을 현실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소설의 후반부를 위해 박씨부인의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변신 모티프의 의미
변신 모티프는 영웅의 일대기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통과의례의 성격을 가진다. 그래서 비범한 영웅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으로 변신이 개입한 것이다. 그 결과 불균형을 이루었던 혼사관계를 균형 잡힌 혼사 관계로 되돌려 놓는다. 특히 박씨부인의 신통력을 가정에서 국가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됨으로써 영웅으로서 박씨부인의 능력을 예감하게 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주제 의식(창작동기)
호적과의 싸움에서 현실적으로 패배한 것에 대한 정신적인 승리와 호적에 대한 분노, 적개심, 복수 정신의 표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남존여비라는 관념에 눌려 억압되어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불만이 탁월한 능력을 지닌 여성을 통해 무능한 남성에 대한 비판도 간접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임진록-3
이본(異本)
이 작품은 지금까지 발견된 이본의 수만으로도 60여종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판본과 완판본 및 필사본, 그리고 한글본과 한문본 등의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어, 당시 매우 폭넓은 독자층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임진록]의 경우에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내용이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윽룡록, 흑룡일기, 임진록전, 선임록' 등으로 제목까지 다른 것도 있어 이본에 대한 기존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이본이라고 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다. 체제와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자면 다른 작품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동일한 사건을 배경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들을 '임진록군'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역사 계열, 최일영 계열, 관운장 계열의 공통적인 주제)
왜에 대한 적개심과 승리 및 보복의지, 위정자들의 무능과 지배 집단의 모순에 대한 비판, 이민족에 대한 민족적 서민의식 등은 전 계열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큰 시련을 안겨준 전란으로 우리 민족에게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므로 임진록은 우리 민족이 왜적에게 비참하게 패배한 나머지 그들에 해한 울분과 복수의식을 표현해 보고자 지은 것으로, 현실적으로 처절하게 당한 패전을 현실과 달리 승리를 통해 민족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정신적 보상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구성(다른 영웅 소설과 구성상의 차이점)
[임진록]은 영웅적 인물이 대거 등장하여 왜적과 대결하는 활약상을 담고 있으며, 다른 영웅 소설처럼 일대기 구성이 아니라, 여러 영웅들의 활약상을 병렬식으로 구성하여 전쟁의 다양한 장면을 폭넓게 보여 주고 있다.
군담 소설의 출현 배경
임·병 양란기의 시대 의식
군담 소설은 전쟁을 소재로 주인공의 영웅적 활약상을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양란을 겪으면서 외적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었고 난중에 활약한 명장들의 일화가 소재가 되기도 했으며 국난을 타개한 영웅출현을 갈망했던 민족 의식이 형사화 되었다.
[삼국지연의]의 영향
선조 때 전래되어 많이 읽혀진 [삼국지]의 영향으로 출현하였다.
군담 소설은 삼국고사를 인용하거나,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이 출현하는 경우도 있으며 용병법 등을 차용하였다. 그러나 군담 소설은 근본적으로 [삼국지]와는 틀린 것으로 [삼국지]는 국가 중심의 소설이며, 등장 인물 개인의 일생이 중시되지 않기 때문에 출생 과정이나 결혼 과정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군담 소설은 이와는 달리 개인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출생·결연 과정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작품의 주제도 개인의 출세담으로서 유능한 인물이 역경을 극복하고 공명을 성취하는 내용으로서 [삼국지]에서와 같이 집단적 가치를 표방하는 大仁大義가 강조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군담 소설 양식 자체가 [삼국지]의 부분적인 영향은 인정된다.
[설인귀전]의 영향
[설인귀전]은 [삼국지]보다는 군담 소설과 한층 더 근접되어 있는 것으로 도시를 통한 무예 습득 및 도술전, 여성들의 영웅적 활약, 결연 과정 및 천자 구출 등에서 군담 소설과 상통한다.
창작 군담 소설
유충렬전-1
특징
임·병 양란 이후에 군담을 소재로 한 소설이 많이 창작되었다. 이들은 당대의 정치와 사회 현실을 반영한 영웅일대기를 기본 축으로 삼고 있다.
[유충렬전]은 이원론적 세계에 의하여 즉, 천상계와 지상계 두 세계가 전개되고 있다.
[유충렬전]은 안으로는 당쟁으로 인한 실세층의 권력 회복을 추구하고 밖으로는 외적에 대한 민족적 복수 의식이 결합되어 있다.
이본(異本) : [유충렬전]은 지금까지 전하는 이본만도 필사본, 판각본 등이 20여종이 있어, 그만큼 많은 독자에게 공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본들 간의 내용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유충렬전]에서 실현된 영웅의 일생
[유충렬전]은 영웅의 일대기라는 유형적 구조를 가장 충실히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영웅소설로서, 주인공 유충렬은 이러한 영웅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실현된 영웅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유충렬은 부귀를 누리는 명나라 一位名官 유심의 외아들로, 유심 부부가 늦도록 자식이 없어 근심하다가 남악 형산 산신에게 빌어서 잉태한다.
유충렬은 천상선관의 적강(謫降)이며, 비범한 기상을 가지고 태어난다.
충렬의 아버지는 간신 정한담을 규탄하다가 귀양 갔고, 간신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다가 도적을 만나 충렬은 물에 던져지고 어머니는 도적에 잡혀가게 된다.
물에 빠진 충렬은 남경 장수들에 의해 구출되고, 강승상(강희주)의 집에서 화를 피하고 강승상의 딸 강소저와 혼인한다. 강승상 역시 정한담을 규탄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고, 충렬은 강소저와 이별하고 강승상의 집을 떠나 백룡사에서 화를 피하고 도승을 만나 무술을 익히고 무기를 얻는다.
정한담이 외적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켜 나라가 위기에 처한다.
유충렬이 천자를 구출하고 난을 평정한다. 가족과 재회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작품의 주제와 사상
[유충렬전]을 비롯한 대부분 영웅소설이 주인공의 영웅적인 활동과 국가 군왕에 대한 신하로서의 충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주인공의 영웅적인 활동을 오로지 국가와 군왕을 위한 것이었다. 주인공이나 가족들이 부처의 가호를 받아 위기를 모면하게 되며, 부처의 영험에 의하여 탄생하게 되며, 도승의 지도에 의해 주인공이 움직이는 것 등은 불교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이 국가와 군왕을 위하여 전쟁에 나가 영웅적인 활동을 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고 이로 인해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은 유교사상에 의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유충렬전]을 비롯한 수많은 영웅소설은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 배경에 의해서 쓰여진 작품이라 할 수 있으나, 결말 부분에서 국가와 군왕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부귀공명을 누리게 한 것은 유교 근본 사상의 하나인 충(忠)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유충렬전]의 현실 반영
유충렬의 부친 유심은 토번과 가달 정벌 문제로 정한담과 싸우다 패배하여 귀양하게 된다. 이를 피해 도망치다가 가족이 헤어지게 된다. 유심과 정한담의 대결은 전형적인 충신과 간신의 대결 양상으로 이는 당쟁의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당쟁에서 패배한 집단은 정치적·경제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 즉 정한담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유심이 유배되고 가족이 헤어지게 되는 것은 가족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심을 충신으로 정한담을 역적으로 설정한 작자의식은 당쟁에서 패배한 실세층의 의식을 대변한 것이며 유충렬의 활동은 몰락한 가문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외적의 침입에 의해 도성이 함락되고 천자가 항복 직전에 이르게 되고, 태자 등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병자호란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유충렬에 의해 호국 정벌과 포로 구출은 병자호란 때 당한 고통과 패배의식을 이 작품을 통해 복수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충렬전]의 전형성
작품 구조가 영웅 이야기의 원형에 충실
주인공의 활동이 전쟁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판소리
판소리의 본질
판소리란 판의 예술 즉 일정한 장소에서 공연되는 예술이다. '판'이란 씨름판, 노름판의 판과 같이 어떤 일을 하는 자리 '무대'를 뜻하며, '소리'는 노래를 뜻한다.
판소리는 창자와 고수가 판소리의 문학적 내용인 사설을 창과 아니리와 발림을 곁들여서 보여주고 들려주는 동시에 청중이 그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하면서 성립된 예술이다.
판소리의 적층문학적 성격(공동작)
구비문학의 하나인 판소리가 전승과정에서 같은 제목을 가진 서로 다른 작품군을 만들어 냈다. 이는 판소리 창작이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 의해 이룩된 것임을 보여준다. 판소리의 부분의 변이 또는 확장(판소리의 부분의 독자성)은 일차적으로 창자간의 전승과정에서 나타난다. 동시에 청자들은 구연과정에서 청중의 요구에 부응하여 판소리의 내용을 변화시켜 전승시켜 왔으니 판소리는 청자뿐만 아니라 청중까지 참여한 공동제작의 산물이다.
판소리에는 이야기가 있고 민요, 속담, 시조, 잡가, 한시 등 서로 다른 장르의 문체가 결집된 판소리의 문체적 특징은 판소리가 창의 문학이라는 속성 때문에 산문적 요소를 운문화 시키는 데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양반문학의 어투와 서민문학의 어투가 동시에 공존하고, 창 부분의 구어체, 아니리 부분의 문어체가 섞여 있다.
판소리의 성격
판소리가 서민의 생활이 많이 투영된 서민문학이지만 이는 서민문학적 성격이 강하다는 뜻이지 서민만의 문학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굿에서 출발했다는 판소리의 성격은 초기에는 서민문학적인 모습을 많이 가졌을 것이지만 조선 후기에 오면서 대중 예술로 성장한 판소리가 양반의 경제적 뒷받침에 의해 구연될 때는 서민문학적 요소 위에 양반 문학적 요소를 수용했다고 볼 때 판소리가 어느 계층의 문학이라기보다 국문학이라 할 수 있다. → (이 때문에 주제의 양면성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판소리는 창·아니리·발림의 3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창은 음악적 요소를 말하고 아니리는 문학적 요소, 발림은 연극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판소리는 종합예술인 것이다.
판소리의 기원
판소리의 발생에 대한 학설은 다양하나 전라도 世襲巫 집안의 巫歌에서 기원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판소리 광대가 巫家 출신이 많다는 점, 서사 무가의 장단, 창과 아니리의 교체 등이 판소리와 유사하다는 점이 그 근거가 된다.
판소리 사설의 성격
판소리 사설은 서민들의 현실적인 생활을 주로 그리고 있으며, 극적 내용이 많고 풍자와 해학 등 滑稽的인 내용이 풍부하다.
판소리의 주제
판소리의 주제에 대한 해석은 전체 줄거리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데 70년대 이전의 연구는 가령 [춘향전]은 烈을 칭송하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조동일은 이와 같은 연구를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만을 분석한 것으로 보아 이를 表面的 주제라 하고, 실질적인 주제로서 그 속에 숨어 있는 裏面的 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결과 [춘향전]은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고 인간적 해방을 누리고자 하는 욕구 표현이라 하였다.
신재효와 판소리 정리
신재효가 판소리에 기여한 측면은 판소리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 정립에 노력하였고, 창자를 지원, 양성했고, 당시 연행하던 판소리 6마당(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타령)의 사설을 정리하였다.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2
異本(京板本과 完板本의 내용상의 차이점)
[심청전]의 이본들은 표기 방식에 있어서 國文本과 漢文本, 飜譯本으로 구분되지만 이 가운데 대부분이 국문본이고 한문본과 일역본 및 영역본은 각각 한 편 뿐이다. 국문본도 목판본, 필사본, 활자본 등이 있다. 목판본은 모두 세 종류가 있는데 경판본에는 국립도서관 소장 24張本, 대영박물관 소장 24張本·26張本, 안동신간 20張本 등 4種이 있고, 安城板本은 21張本 1種이 있으며, 完板本은 국립도서관과 개인 소장으로 6種이 흩어져 있다. 필사본에는 서울대 도서관 소장 46張本을 비롯해 모두 14여종이 있다. 활자본은 이해조의 [강상련]을 비롯해 10여종이 있다. 이러한 수많은 이본 중에서 내용상 차이를 보이는 것은 크게 판소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京板系와 판소리와 깊은 연관을 갖는 完板系이다. [심청전]의 대표적 이본으로 볼 수 있는 京板系와 完板系는 기본 줄거리를 공통적 요소로 깔고 있지만 세부적 장면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여 준다. 경판본은 분량이 짧아 내용이 자세히 전개되지 않은 것에 비하여, 완판본에는 장승상댁 부인이 자주 등장하며, 심봉사가 심청이 인당수로 떠나는 날 꿈을 꾼 내용, 심봉사와 뺑덕 어미와의 관계 등이 첨가되거나 자세하게 부연되어 있다. 그래서 경판본보다 완판본이 전체적인 내용이 길며, 통속적이고 삽입가요가 들어 있으며 구성이 복잡하다.
根源說話
[심청전]은 설화를 기본 줄거리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장면을 구성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설화 요소들이 다양하게 삽입되고 있다. [심청전]과 내용상으로 유사한 설화 중 국외의 설화로는 인도의 佛典說話 중의 하나인 '전동자 설화' 일본의 '소야희 설화' 등이 있고 국내 설화로는 '거타지 설화', '효녀 지은 설화', '관음사 연기 설화' 등이 있다.
[심청전]의 내용을 분석하면 이 작품에 들어 있는 설화요소들은 크게 작품의 기본 줄거리와 핵심적 요소는 모든 이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면서 고정적 성격을 띠는 반면에, 부수적 요소는 이본에 따라 그 내용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면서 가변적 성격을 띤다. [심청전]의 근원설화 가운데 '핵심적 요소'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심봉사의 개안(開眼)과 관련된 '개인설화', 선인들의 희생제의와 관련된 '인신공양 설화', '처녀생지 설화' 및 심청의 혼인과 관련된 '여성영웅 설화' 등이 있다. [심청전]에서는 이들 세 가지 설화가 하나로 결합되면서 여주인공의 성격도 하나로 합쳐져서 나타난다. 심청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였고, 선인들의 안전한 항해를 보장해 주었고,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 세 가지 설화를 근간으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태몽설화', '용궁설화', '불전설화' 등의 부수적 설화 등이 다양한 설화들을 수용하고 있다.
사상적 배경
[심청전]이 '효(孝)'를 최대 덕목으로 강조한 면에서는 유교적이며, 화주승을 통해 부처의 신통력을 내세운 점은 불교적이며, 옥황상제 등이 등장한다는 점은 도교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장님인 심봉사가 제의적 행위를 통하여 눈을 뜰 수 있다고 믿는다든지, 뱃사람들이 인간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는 행위 등은 고유의 민간신앙이다. [심청전]에는 유교,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런 혼합적 사고는 우리 문학의 사상적 특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주제
[심청전]은 크게 심청이 효행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야기, 심봉사가 딸의 도움으로 눈을 뜨게 된 이야기, 선인들이 제물을 희생하여 순조로운 항해를 한 이야기 등의 세 가지 요소가 어울려서 이루어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심청전]은 심청을 중심 인물로 삼고 심청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 데서 작품의 주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심청전]에서는 심청의 죽음에 비중을 두고 있다. 심청의 죽음의 의미는 효행의 실현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시주와 희생은 그 방법으로서 부수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심청의 효행은 부모에 대한 의무로서의 효행만이 아니라, 불편한 몸으로 어미 없는 자식을 길러준 은혜의 보답이라는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청의 죽음이 공감을 얻고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심청의 죽음은 제의적 의미를 가진다. 선인들을 대신해서 제물이 되고 아버지를 위해 시주함으로써 선인들의 안전과 아버지의 개안(開眼)을 성취시켜 주었던 것이다. [심청전]의 주제는 효를 토대로 자기희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이 여성 독자가 많았다는 점은 흥미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천인(賤人)이 귀인(貴人)이 되고, 평민이 왕후가 된다는 사건 전개가 서민들의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신분 상승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때 '현실적 고난의 극복을 통한 이상적 삶의 추구'를 주제로 볼 수 있다.
심청의 죽음의 의미
심청이 물에 빠져 죽었다가 거듭난 것은 성인식의 통과제의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심청의 죽음은 보다 성숙한 인격체로 발전하기 위한 고난의 단계에 해당한다. 심청의 죽음을 기준으로 전반부는 심청이 부모 밑에서의 미숙한 자아로서 효행에 충실한 소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며, 후반부는 부모의 보호를 떠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부부관계를 맺는 것이다. 결말 부분을 보면 전반부의 효행이 결실을 맺어 개안(開眼)을 하게 되고 동시에 한 남편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여 자손이 번창하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되는 행복담으로 발전함으로써 효와 애정을 동시에 성취하게 된다.
흥보전-1
근원설화
일반적으로 [흥부전]의 근원 설화는 몽고의 '박타는 처녀 설화'와 '방이 설화'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흥부전]의 기본 골격은 두 설화와 같은 모방담으로 선악형제담, 동물보은담, 무한재보담(無限財寶譚) 등과 같은 민간에 전승되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광대들에 의해 창작된 것인 만큼 다양한 설화가 관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타 판소리계 소설과의 차이점
[흥부전]도 판소리계 소설 가운데 대표적 작품이지만 다른 판소리계 소설과 다른 점은 [흥부전]은 판소리로서는 널리 전파되었지만 소설로는 그다지 많은 전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흥부전]은 [춘향전]이나 [심청전]에 비해 훨씬 적은 수의 이본(異本)을 가지고 있으며, 이본들 사이의 차이점도 별로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소설로서의 전파는 활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본(異本)
[흥부전]의 이본은 크게 세 종류가 있는데 방각본으로 간행된 경판본과 필사본 몇 종류, 개화기에 나온 구활자본 몇 종류가 있다. 이 밖에 판소리 사설로 전해지는 몇 가지 창본이 있는데 이들 내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흥부전]은 여타의 고전 소설과는 달리 전기의 구조를 취하지 않고 흥부의 가난과 행운에 얽힌 몇 가지 삽화들이 모여서 [흥부전]을 이룬다. [흥부전]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전개해 나가지만, 흥부와 놀부를 대비시킴으로써 흥미를 고조시키며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흥부전]의 기본 골격은 '흥부의 가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제비 다리를 고쳐 준 대가로 박씨를 얻어 부자가 됨, 놀부가 심술을 부리다 패가망신함'과 같은 네 가지 요소이다. 이는 [흥부전]의 성립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이며, 전승에 있어서도 불변하는 부분이다. 이와는 달리 이본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는데 놀부의 심술사설, 돈타령, 박 사설 등과 같은 구체적 사실을 서술하거나 인물의 행위를 묘사하는 부분으로 창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인물
지금까지는 흥부를 도덕적 이물로, 놀부는 반도덕적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나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즉 흥부를 소극적 인물로 놀부를 적극적 인물로 보는 견해이다. 흥부는 가난을 타개할 의지와 능력도 없이 오직 주어진 운명에만 자신을 맡기는 인물이며 놀부는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적극적 인물이다. 따라서 놀부에게서 긍정적 측면을, 흥부에게서 부정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흥부는 임금 노동자를 대변하고 놀부는 경영형 부농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고 조선 후기의 사회 현실 속에서 흥부는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도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선량한 노동자이며, 놀부는 공동 사회에서 이익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도덕적 지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주제
[흥부전]의 주제는 권선징악 또는 형제간의 우애 강조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에 관한 획일적인 견해보다는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는 것이 작품 이해의 바람직한 방법일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은 하나의 작품 안에 너무 많은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주제만 설정하기가 힘들고, 작품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시대적 상황과 독자의 취향에 따라 주제가 변모되어 왔기 때문에 한 작품에 여러 가지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른바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를 설정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형제간의 우애 강조, 권선징악 등의 주제가 들어 있지만 그 내면에는 조선 후기 사회의 빈농과 지주층의 갈등이 들어 있다. 따라서 표면적 주제는 형제애지만 이면적 주제는 빈부의 갈등이라 볼 수 있다. 놀부의 악행을 통해 가진 자의 횡포를 풍자하고 흥부를 통해 못 가진 자의 설움을 표현함으로써 놀부로 대표되는 상위 계층과 흥부로 대표되는 하위 계층의 갈등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흥부의 모습은 몰락한 양반의 허위와 가식을 풍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흥부전]은 판소리계 소설로서 세속의 현실적 가치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지닌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서로 대조적인 인물, 즉 형 놀부와 동생 흥부의 심성과 행위를 극명하게 대조·과장하는 수법을 통해 희극적 골계미를 풍부하게 해 주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인물을 설정하여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한 유교적인 주제와 권선징악의 주제를 제시하면서 중세적 질서가 흔들리던 조선 후기 몰락한 양반의 현실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토끼전
異本
[토끼전]은 조선 후기 동물 우화 소설인 판소리계 소설로, 이본 역시 판소리계와 소설계로 나눠지며 명칭도 다양하다. 대체로 [토별가]나 [수궁가] 등으로 불려지는 이본들은 판소리本系에 속하고 [별주부전]이나[토끼전] 등으로 불려지는 이본들은 소설본 등에 속한다. [토끼전]의 이본은 60여 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판본별로 寫本類(한문본, 국한혼용본,한글본), 坊刻本類(경판본,완판본), 唱本類, 活字本類가 있고 이본에 따라 내용과 분량, 주제, 작가의식이 같지 않다.
根源說話와 形成過程
[토끼전]은 단일 설화형 작품으로 그 근원설화는 불경을 통해 전래된 인도의 자타카 본생 설화이다. 이것은 중국의 한역불경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고, 그 후 문헌 설화인 구토설화 또는 구전설화를 거쳐 조선후기 판소리 '수궁가'가 형성되었으며, 판소리 사설의 기록 정착과정을 통하여 [토끼전]이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설화에서 소설로의 확장은 대체로 설화가 부연·변용, 삽입 되는데 설화의 화자, 판소리의 창자, 판소리 대본의 정리 개작자, 소설의 필사자, 활자본의 출판 담당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설화의 소설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어떻게 확장.변이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첫째, 용궁과 육지가 단순한 공간적 배경에 지나지 않았으나 용궁은 국사를 다스리는 조정과 그들의 사회를 이루며, 육지는 서민들의 현실 공간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둘째, 등장인물이 다양화되었고 수적으로 증가되었다. 원래 본생 설화와 불전 설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세 가지에 지나지 않으나 이들이 점점 증가되어 다양한 인간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섯째, 작품의 흥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법이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넷째, 근원설화의 기분 구조의 바탕 위에 다양한 사건들이 첨가되었다.
작품의 구조적 특징
작품의 구조는 반복구조와 매립 구조가 두드러지는데, 먼저 반복 구조는 작품의 공간과 전개에 나타난다. 작품의 전체 공간 구조는 '용궁→육지→용궁→육지'로 공간 배경이 반복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와 같은 반복 구조는 공간 변화와 사건의 전개가 맞물리면서 작품의 극적 효과를 높여 준다. 또한 작품의 사건전개는 '위기→극복'의 반복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반복 구조는 긴장의 고조, 흥미 유발을 함으로써 작품의 극적 효과를 높여 준다. 다음 작품의 대립 구조는 등장하는 세계와 인물에 있어 강자와 약자의 대립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첫째 용궁 세계와 육지 세계의 대립이다. 이때 용궁 세계는 강자 즉, 통치자, 지배자의 세계를 대표하며, 육지 세계는 약자 즉 서민층, 피지배층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등장하는 동물들의 대립으로 강자인 용궁과 약자인 토끼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강자인 용왕은 현실세계의 왕이나 수령 등을 대변하고, 약자인 토기는 일반 피지배 서민층을 대변한다. 결국 작품 전체의 긴장은 이들간의 대립 갈등으로 빚어지는 대립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처음에는 강자가 이기는 듯하다가 결국 약자가 최후의 승리를 함으로써 이는 당시의 역사적 현실에 있어 서민들이 가지고 있던 현실적 불만과 욕구, 비판과 해학과 풍자가 작품으로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제의 양면성
[토끼전]을 비롯한 판소리계 소설은 판소리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수많은 이본을 파생시키면서 전승과정을 거치면서 변용 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판소리계 소설(판소리 포함)은 유동문학이요 적층문학이다. 판소리계 소설의 내용과 주제의 다양성은 판소리가 공연예술이라는 본질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소리가 처음에는 서민층의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오면서 대중 예술로 성장한 판소리가 양반층의 경제적 뒷받침에 의해 공연될 때는 서민 문학적 요소 위에 양반 문학적 요소를 수용했다고 볼 때 내용과 주제가 다양하게 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판소리 대본의 소설본화, 사본(寫本)의 판본화 등의 과정에서 필사자, 출판업자 등의 개입에 의한 의도적인 변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분의 독자성, 주제의 양면성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토끼전]의 이본에 나타나는 주제는 충을 강조한 경우, 충에 대한 야유와 서민적 풍자, 해학이 주제인 경우와 이 두 가지가 혼합된 경우 등 3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 충을 강조하는 주제의 경우이다. 이 주제에 해당되는 이본들은 대체로 소설본이거나 한문본 등 개작본들이다. 작품의 향유층이 양반 지식층이 주가 되었을 시기 즉 19세기 중엽 이후에 형성된 이본들이 해당된다. 따라서 이들 작품에는 대체적으로 지배자의 권위의식이 강조되고 중세적 유교의 윤리도덕이 강조되는 등 양반적 취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용왕은 위엄 있는 존재로 자라는 충신으로 토끼는 부정적 존재로 그려지며 작품은 용궁 중심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둘째, 충에 대한 야유와 서민적 풍자와 해학이 주제인 경우이다. 이 주제에 해당하는 이본들은 대체로 판소리 창본류이다. 작품의 향유층이 서민층이 주가 되었을 시기 즉 19세기 초엽 이전에 형성된 이본들이 해당된다. 이들 작품에는 지배층의 무능과 비리가 폭로되며 윤리도덕이 무너지고 음담, 속어 등 서민적 취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하여 용왕을 우롱의 대상으로 격하되며, 자라는 토끼에 의해 농락 당하는 바보적 존재로 그려지고, 토끼는 용왕과 자라 위에 군림하는 승리자로 격상된다. 작품은 토끼가 그 중심을 이루며 전개된다.(풍자와 해학은 주로 아니리 부분에서 표출)
셋째, 양반충과 서민적 풍자와 해학의 주제가 공존하거나 혼재 하는 경우이다. 대체로 이들은 판소리의 전개 과정에 있어 서민적 기반과 양반적 기반이 교체되는 시기이거나, 필사자나 개작자의 개입에 의해 작품이 이루지는 과정에 성립된 것으로 보여지며, 이 계열의 이본으로 세창본 [별주부전]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토끼전]의 주제는 양면성을 띠고 나타나기 때문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 사건의 전개, 작가의식 등이 이본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대체로 한문본을 포함한 소설들과 신재효의 개작본의 주제가 일관된 통일성을 보여 줌에 비하여 창본류의 이본의 경우 양면적 주제를 공유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토끼전]에서 용왕은 당대 현실의 정치 지배층을 토끼는 서민 민중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용궁세계는 정치 지배층, 양반 귀족 사회를 육지세계는 일반 서민들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몰락해 가는 지배층의 치부와 하층민의 탁월한 삶의 지혜를 대조해 놓고 있으며, 주목할 것은 민중의식에 입각한 풍자문학이라는 것이다. 용궁과 육지, 용왕과 토끼의 관계로 설정되어 전자의 횡포와 수탈을 비판한다. 즉 평민들에 대한 중앙 지방 수령의 수탈에 대한 풍자이자 용왕의 불치의 병과 같은 중세적 지배체제에 대한 종말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필
형성
우리 나라에서 수필과 같은 기록문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임·병 양란 이후 산문화 경향으로 흐르면서 17세기경부터 한글의 광범위한 보급과 아울러 일상적 경험을 기술하는 데 있어 국어 문장이 발휘하는 섬세하고 구체적인 표현력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많은 작품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징
수필류는 임·병 양란 이후 크게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한문, 나중에는 순 한글로 쓰기 시작했다.
민간과 궁중에서 함께 창작되었다.
형태
궁중비화(=궁정수상)
궁중 비화로서 광해군 때의 [계축일기]를 비롯하여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은 당시 궁정비화를 소재로 하여 지은 것으로 여성 툭유의 우아한 표현과 섬세한 정서를 나타내어 내간체 문장의 전형을 이루었다.
일기
주로 일기의 형식으로 서술된 작품을 말하는데 [산성일기], [의유당 관북유람일기] 등이 포함된다.
기행문
기행문으로 된 것에는 [무오연행록], [을병연행록]이 있는 데 가사의 [연행가]와는 달리 완전한 산문으로 되어 있다.
내간
내간은 규중(閨中) 여인들 사이의 교신뿐 아니라, 왕이 공주에게 내인 언서(諺書)나, 남녀간의 연서(戀書) 등을 말하는데 이들 중에는 편지로서의 실용적인 면을 넘어 애틋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 많다.
추도문
김만중의 [윤씨행장]과 같은 행장기(行狀記)나 숙종의 제문과 [조침문]과 같은 제문(祭文) 형식으로 된 작품들이다.
고대 수필
한중록-8
[한중록]은 궁중의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극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회고, 자전적인 글로서 여성 특유의 우아한 표현과 섬세한 정서를 나타내어, 내간체의 전형적인 문장을 보여 준다.
회갑을 넘긴 작자 혜경궁 홍씨가 담담한 심경으로 시아버지 영조와 남편에게 누(累)가 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내용은 궁중 내에서 벌어진 갖가지 음모와 처참했던 임오화변의 역사적 사실 등을 기록한 것이다. 문장과 표현에 있어서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 절실하고도 간곡한 묘사, 품위 있는 궁중 용어의 사용 등으로 궁중 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진다.
작자 : 혜경궁 홍씨
형식 : 수기 형식의 자전적 회고록
구성
작품 1(1795, 61세) : 회갑 때 친정 조카 홍수영의 요청으로 친정을 중심으로 기록
작품 2(1801, 67세) : 친정의 몰락에 대한 자탄(自歎)의 독백체로 기록
작품 3(1802, 68세) : 순조에게 바치려고 쓴 것
작품 4(1805, 71세) : 며느리 가순궁의 요청으로 순조에게 보이려고 쓴 것
주제 : 사도세자 참변(임오화변)을 중심으로 한 혜경궁 홍씨의 한 많은 사연 회고
의의 : 계축일기, 인현왕후전과 함께 3대 궁정수상의 하나이다. 궁정귀인의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 절실하고 간곡한 묘사, 품위 있는 궁중 용어 사용으로 궁중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한글로 된 산문문학으로서 국문학사상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계축일기(癸丑日記)-3
'서궁록' 또는 '서궁일기'라고도 하는 이 작품은 광해군의 폭정 속에서 영창대군이 죽고,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에 유배당하는 비통한 사건을 어느 궁녀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필이다.
작자 : 어느 궁녀(글의 초점이 인목대비의 고초와 나인들의 억울함에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인목대비를 모시고 있던 궁녀가 지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갈래 : 일기체 수필, 궁중 수필
연대 : 광해군 5년(1612) 이후
의의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궁중 비사를 그린 3대 궁중 문학의 하나이다.
순수 고유어를 사용하여 문학성이 높으며, 전아하고 중후한 궁중어가 풍부하다.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저술 의도 : 광해군을 패륜아로 몰아서 자신들의 억울했던 지난날을 보다 강하게 후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으로 역사적인 사건을 줄기로 하되 인물과 사건을 과장하고 편파적으로 표현하였다.
인물설정 : 고전 소설처럼 극단적인 선과 악으로 대비된다. 인목대비는 승자 입장이고, 광해군은 패자 입장에서 광해군 쪽은 가해자로 설정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과장하여 인물을 묘사하였다.
궁녀의 입장에서 사실대로 서술이 가능했겠지만 창작 의식이 가미되어 권선징악을 허구화했으므로 허구성이 강하다.
인현왕후전
정확한 작자나 연대는 미상. 궁중 비화를 소재로 한 수필로 '인현왕후 덕행록'이라고도 한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폐출 사건과 장희빈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다룬 작품으로 당시 궁중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조선 시대의 우아한 궁중어를 사용하여 과장이나 생략 없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며, [서궁록], [한중록] 등과 함께 우수한 궁중 문학으로 평가한다.
산성일기-4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어느 궁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한글로 된 일기체 수필이다. 이 작품에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 산성으로 피신하여 산성을 지키며 항전하던 비참한 모습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으며 남한 산성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실들이 사실적으로 서술되어 역사적 사건과 그 이면이 자세히 나타나 있어, 병자호란 당시의 산성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보다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다.
주제 : 남한산성에서의 항쟁과 병자호란의 치욕
의의
계축일기와 함께 일기체 기록문의 쌍벽을 이룸
병자호란 당시의 사실을 한글로 쓴 유일한 작품
일기체이면서도 객관적·서사적인 간결한 문체의 필치를 지님
특징 : 전쟁소설들이 복수심 때문에 현실적인 면을 무시하고,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사건을 해결하려는 데 비해,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산성일기 전편의 짜임
인조가 남한 산성으로 피난 가는 과정
산성에서의 처절한 항쟁
삼전도에서의 항복
산성일기에 나오는 인명 : 원두표, 니셔, 구굉, 김청음, 뎡명슈, 니긔튝, 신경진, 니경직, 김신국, 툐뎡호
병자일기-2
작자 : 남평조씨(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남이웅의 아내)
주제 : 전쟁을 맞은 여인의 무인도에서의 피난 생활과 나라와 남편에 대한 걱정(17일 일기)
의의 : 작자와 연대가 분명한 한글 필사본 일기로 여류 보기(寶記)문학이다.(보기 : 실재 사실을 적은 기록)
표현 : 자시의 감회와 생활 주변의 잡다한 일들을 솔직하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 글은 1989년에 처음 발견된 한글 필사본 일기로 병자년(1636) 12월부터 경진년(1640) 8월까지 병자호란의 혼란 속에서 4년여에 걸쳐 기록한 것으로, 전쟁을 치르는 동안 겪어야 했던 고달픈 생활상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날짜와 가선을 기록하고 그 날의 감회를 적고 있다는 것에서 당시 사건에 대해 지은이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동명일기-2
이 작품은 조선 영조 때 의유당 김씨가 함흥 판관으로 부임해 가는 남편을 따라 그 곳의 명승 고적을 살피고 느낀 바를 적은 순한글 기행 수필로, 귀경대에서 일출을 구경하기까지의 여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일출의 장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일출을 기다리는 과정이, 후반부에는 해돋이 광경을 여성 특유의 섬세한 관찰로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격 : 묘사적, 사실적, 주관적
문체 : 묘사, 서사, 대화를 이용한 구체적, 묘사적, 사실적 문체
출전 : {의유당 관북 유람일기}(작자와 의유당 연암 김씨라는 것이 정설이나 의령 남씨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주제 : 귀경대에서 본 일출의 장관
표현상 특징 : 이 작품은 여성 특유의 세밀한 관찰로 사실적으로 표현한 치밀한 필치가 돋보이며, 순수한 우리말을 많이 써서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여기에 적절한 비유를 섞음으로써 우리 나라 기행 수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히 해돋이 장면에서 묘사와 비유의 섬세함과 생동감이 작 드러난다.
북산루-1
이 작품은 {의유당 관북 유람 일기}의 두번째에 실려 있는 글로써 묘사의 적확(的確 ; 어떤 사물에 틀림 없이 들어 맞음), 신선하고 생생한 어휘의 구사, 순수한 우리말의 표현으로 여류 수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 경관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자기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기행문으로서의 여정, 견문, 감상도 잘 나타나 있다.
작자 : {의유당 관북 유람 일기}의 작자가 의유당 김씨라고 알려져 왔으나, 의유장의 연안 김씨가 아니라 의령 남씨라는 설도 있다.
연대 : 순조 29년(1829)
갈래 : 기행 수필
주제 : 북산루에서의 경관과 조망
내간(內簡)
내간은 조선 시대에 부녀자들 사이에서 주고받던 국문 편지를 뜻한다. 한쪽이 여성이고 다른 한쪽이 남성인 경우도 내간이라는 말을 쓴다. 일상 생활을 바탕으로, 간결하고 함축성 있는 어투를 잘 살린 구어체로 되어 있어 다른 산문체와도 구별된다.
선조의 내간(삼옹주-)-3
작자 : 선조
수신자 : 정숙 옹주
주제 : 전쟁 후의 안부를 물음
선조가 정유재란 후에 피난처에서 셋째 딸인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글의 일상적인 형식을 생략하고 딸에 대한 궁금증을 직접 토로함으로써 왕이라는 신분적 특수성을 초월한 어버이의 사랑이 물씬 풍기는 편지이다.
명성 왕후의 내간(요 이-)-1
작자 : 명성 왕후
수신자 : 숙휘 공주
주제 : 자상한 여인의 인정미
현종의 비(妃)인 명성 왕후가 남편의 상을 당한 시누이 숙희 공주를 위로하는 편지로서, 시누이를 위하는 알뜰한 마음씨가 잘 나타나 있다.
혜경궁 홍씨의 내간(쥬샹이-)-1
작자 : 혜경궁 홍씨
수신자 : 영의정 체제공
연대 : 정조 13년(1789)
주제 : 사도세자 능(陵)을 옮기는 일에 대한 지시
정조 13년 10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길 때, 혜경궁 홍씨가 당시의 영의정 체제공에게 내린 편지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혜경궁 홍씨가 아들 정조에게 쏟는 모성애와 자상함이 엿보이는 글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2
야담은 조선 후기 단편 서사 양식의 하나로서 이야기의 사실성보다는 흥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교훈이나 사회 윤리적인 가치가 중시되기도 한다. 이 작품도 박계쇠라는 인물을 빌어 부당한 자를 비판하면서 독자들에게 바르게 살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야담은 교훈성과 흥미성을 동시에 보여 준다.
작자 : 유몽인
연대 : 선조, 광해군 때
구성 : '인물의 설정→사건의 제시→평결'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주제 : 부정한 이익을 취하거나 허위를 일삼는 자에 대한 비판
유몽인이 살았던 시기인 선조, 광해군에 걸친 시대의 유명무명 인사들이 일화(逸話)와 민간의 야담 등 야사(野史)와 가담항설(街談巷說)을 모은 야담집으로 국문본과 한문본의 2종이 있는데, 국문본의 역자와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人倫, 宗敎, 學藝, 社會, 萬物편 등을 수록)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규중 부인들이 바느질에 필요한 기구 일곱 가지를 의인화하여 인간 세상의 능란한 처세술에 견주어 이를 풍자한 작품으로 [조침문]과 함께 의인화된 내간체 수필의 백미로 손꼽힌다.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교만하거나 불평, 원망하지 말고 사리에 따라 순응, 성실해야 한다. 즉 직분에 따라 성실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자(척부인), 가위(교두각시), 바늘(세요각시), 실(청홍흑백 각시), 인두(인화부인), 다리미(울낭자), 골무(감토 할미)로 의임화된 바느질 도구들은 그 성격이 뚜렷이 살아 있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어 생동감을 준다.
작자 : 미상(어느 규중 부인)
문체 : 내간체
시점 : 3인칭 관찰자 시점
표현 : 의인법, 풍유법
주제 :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교만하거나 불평, 원망하지 말며, 사리에 순응하고 성실해야 한다.(작분에 따른 성실한 삶 추구)
작품에 나타난 여성의 지위
이 작품에서 규중칠우가 공을 다투거나 원망을 토론하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펴고 있다. 만약 의인화된 칠우를 실제 규방 여성들이라 한다면 가부장적 질서 속에 갇혀 있던 여성들의 세계에서도 자신의 주어진 역할 만큼 그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새로운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구성상의 모순
이 작품의 구성은 주 부인을 잠재움으로써 칠우들이 자유롭게 공을 다투게 하고, 주 부인의 잠을 깨워 꾸중함으로써 칠우들의 불평을 촉발하고, 다시 잠재움으로써 불평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주 부인은 잠을 자면서도 모든 이야기를 다 듣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독자의 묵계(墨契)에 의한 양해로 극복된다.
조침문
작자 : 유씨부인
부러진 바늘을 두고 제문(祭文) 형식으로 지은 수필로, 일찍이 남편을 잃고 바느질로 소일하며 지내던 조선 후기 양반 가문의 부인이 오랫동안 아끼고 애용하던 바늘이 부러지자 이에 대한 심회를 바늘을 의인화하여 진실하게 표현하였다. 제문 형식을 활용하고 운문을 배합하였으며 주제는 남편을 일찍 여읜 여인의 한이다.
의의
의유당 관북 유람 일기, 규중 칠우 쟁론기와 함께 우리 나라 근세 여류 수필의 대표작이다.
남성들이 한문 수필에 묶여 있을 때, 국문 수필의 맥락을 지켜 줌
물건을 의인화하여 고려 시대의 가전체 문학의 잔영을 보여 준다.
표현상의 특징
바늘을 의인화하여 여성다운 섬세한 정감을 유려한 필치로 잘 나타냄
감정이입을 통해 조선 시대 한국 여인의 한 어린 삶과 인생관을 보여 줌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박지원의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 중 '산장잡기'에 들어 있는 글로 자신의 도강(渡江)체험과 평소 관찰을 바탕으로 깊은 인생의 진리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고 있다. 묘사와 서술을 이용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그것을 인간 내적 세계와 연결시켜 주제를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갈래 : 중수필, 기행문
성격 : 비유적, 교훈적, 사실적
주제 : 외물(外物)에 현혹되지 않는 삶의 자세
표현
치밀한 관찰력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본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글이다.
체험의 적절한 예시 및 반론으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결론을 이끌어 낸 설득력 있는 글이다.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1
조선 숙종 때 박두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수필 형식의 단편 산문이다. 시골 양반과 서울 양반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하여 양반층의 횡포와 사회의 부패를 보여 주고 있다.
성격 : 풍자적, 비판적, 해학적
주제 : 양반들의 허세와 교만성 폭로
민요(民謠)
민요의 기원
민요가 언제부터 있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시대를 잡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 동안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제의 기원설, 유희 기원설, 노동 기원설 등이 있다.
제의 기원설은 인간의 제의(祭儀)가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있어 왔으며,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민요의 시발점이라는 견해이다. 유희 기원설은 인간이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노래를 부른 것이 민요의 시작이었다는 견해이다. 노동 기원설은 노동 과정에서 고통을 잊고 노동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른 것이 민요의 시작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세 가지 견해가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제의와 유희와 노동 중 어느 것이 인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가장 먼저 행해졌을 것인가를 따진다면 노동 기원설이 가장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민요의 개념
민요는 민중의 노래를 말한다.(지배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만들고 불렀던 시조, 가사, 악장 등은 민요에 넣지 않는다.)
민요는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만 하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비전문적인 노래이다.(전문성을 요하는 무가 같은 것과 구별된다.)
민요는 구비 전승된다.(아주 옛날의 민요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민요는 민중의 삶 속에서 불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다.
민요는 내용상에 있어 노동의 즐거움, 삶의 즐거움, 남녀의 사랑 등이 증심을 이룬다.
민요의 분류
민요는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능, 창자, 가창 방식에 따른 분류가 있다.
기능에 따른 분류 : 노동요, 유희요, 의식요, 정치요, 종교요
가창 방식에 따른 분류 : 선후창, 교환창, 독창, 제창
창자에 따른 분류 : 남요, 부요, 동요
민요의 형식(율격면)
민요는 율격면에서 2음보, 3음보, 4음보로 되어 있으며 이중 4음보 민요가 가장 많다. 또한 음보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달라지는데 대개 2음보는 급박한 느낌을 주며, 3음보는 경쾌한 느낌, 4음보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민요의 기능
민요의 기능은 일반적으로 노동적 기능, 유희적 기능, 종교적 기능, 정치적 기능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노동적 기능 : 농민이 일터에서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민요 가운데 그 수가 많다. 생산에 대한 기대와 기쁨, 노동에 대한 고통을 잊기 위해 민요가 불려지는 경우이다.
유희적 기능 : 유희적 기능은 민요를 부르는 것이 유희로서 즐거움을 갖자는 데 목적이 있지만 노동과 분리된 형태로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유희적 기능은 노동에 참여하기 직전에 공동체적 연대감을 조성하고, 노동이 끝난 후에 노동에서 오는 피곤함을 해소하려는 생산적 의미의 유희였다.
종교적 기능 : 민요는 인간의 집단 생활의 습속에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 집단 생활 속에서의 규범이나 관습, 신앙의 노래를 통해 토로되고 표현된다.
정치적 기능 : 민요는 민중의 생활을 표현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이 속에 민중의 사상, 의견, 가치관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제왕들은 민요를 수집하여 현실 정치의 득실을 살폈고, 또한 민요는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예언 기능을 하고 있다.
민요에 나타난 한국인의 정서적 특질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 : 논매기 노래
생활상의 고통 : 시집살이 노래
남녀의 이별 : 아리랑
XIX. 민속극
1. 개념
가장(假裝)한 배우가 대화와 몸짓으로 사건을 표현하는 전승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전통극이라고도 한다. 민속극에는 무극, 가면극, 인형극, 창극 등이 있는데, 무극은 굿놀이를 말하며, 가면극은 각 지역에서 행해지던 탈놀이를 인형극은 남사당 놀이패에 행해지던 꼭두각시놀음을 창극은 판소리를 말한다.
⑴ 민속극의 범위
가장한 배우가 대화나 몸짓으로 행동을 표현해야 하고, 이는 무대 공간에서 공연할 수 있어야 한다.
⑵ 민속극의 특징(성격)
민속극은 농민이나 사당 등의 서민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관중 역시 서민들이었기 때문에 서 민들의 언어와 삶의 모습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또한 관중들을 오락적으로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거기에 알맞은 넉살, 신명이 있었고 상류계층에 대한 심리 보 상적인 비판이 담겨 있다.
2. 민속극의 기원
일반적으로 가면극의 연원을 삼국시대의 기락(伎樂)이나 오기(五伎)에 두고 있다. 이것이 고 려의 산대희를 거쳐 조선의 산대도감극으로 이어지고 노을날 양주 별산대, 봉산탈춤, 통영 오 광대, 수영 들놀음 등으로 이어진다. 인형극은 꼭두각시 놀음, 망석중 놀이 등이 있다.
3. 민속극의 형식
⑴ 가면극에서 사용되는 가면의 명칭은 양반, 노장, 말뚝이, 미얄 등으로 다양하다.
⑵ 연희자들은 가면을 쓰는 것으로 분장이 이루어지며 고개를 숙이고 드는 각도에 따라 가면 의 인상이 달라진다는 점에 착안해 등장 인물의 표정 변화를 연기한다.
⑶ 하나의 극은 대체로 여러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과장은 거의 독립적이다.
⑷ 배우의 대사는 고정되어 있으나 즉흥적인 부연 창작도 가능하다.
4. 민속극의 유형
우리나라의 전통극은 크게 가면극과 인형극의 두 갈래로 나뉜다. 가면극은 그 성장 단계로 보아 부락제(部落祭)에서 행해졌던 농촌가면과 여기서 성장하여 도시의 상업적 성격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 도시형 가면극으로 구분된다. 농촌 가면극은 강릉 관노놀이, 북청 사지놀음, 하회 탈놀이 등이 알려져 있으며 도시형 가면극은 봉산 탈춤을 포함한 해서(海西) 탈춤(강령 등), 서울과 그 주변 자역의 산대 놀이(송파, 양주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의 들놀음(수영, 동래 등), 그 서쪽 지역의 오광대 놀이(통영, 고성, 진주 등) 네 갈래가 있다. 인형극으로는 사당패에 의하여 전승된 꼭두각시 놀음이 있다. 이것은 등장 인물의 이름에 따라 박첨지 놀음 또는 홍동지 놀음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5. 민속극의 형식과 내용
민속극의 대본은 장, 무대, 등장 인물, 대사 등을 갖추고 있어 오늘날 유사한 형식적 구조를 가지며 내용은 풍자적이며 해학적인 특성을 보이며 그 대상은 특권적 신분층이었다.
※ 가면극의 표현상의 특징
대사는 일상성을 떠나서 대담하게 재구성되어 있다. 대사가 있는 인물과 없는 인물의 대립,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대사까지 하는 특이한 방식이 사용되기도 하고, 고상한 대사를 비속한 대사로 급격히 뒤집음으로써 희극적 비판이 효과적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한편 가면극은여러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과장들에서 사건은 연속되지 않지만 주제를 이루는 갈등에서는 서로 부딪친다. 한 과장 안의 부분들도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면서 대립적 통일에 의해 한 과장 전체를 이룬다.
※ 탈춤(가면극)과 판소리의 차이점
6. 작품
⑴ 봉산 탈춤
1) 봉산 탈춤의 구성
① 제 1 과장 : 사상좌(四上佐)춤
② 제 2 과장 : 팔목승(八目僧) 춤
③ 제 3 과장 : 사당(寺堂) 춤
④ 제 4 과장 : 노장(老丈)
⑤ 제 5 과장 : 사자(獅子) 춤 - 목중들이 사자를 희롱하다가 하나가 잡아 먹힌다. 목중 들은 사자에게 사과하고 난 다음 사자와 어울려 춤을 추다가 퇴장한다.
⑥ 제 6 과장 : 양반(兩班) 춤 - 양반집 하인인 말뚝이가 양반들을 희롱하는 내용, 양반의 허세를 희화화하고 공격함
⑦ 제 7 과장 : 미얄 춤 - 영감과 미얄, 첩의 삼각관계와 할미의 죽음을 표현, 서민들의 생활상과 남성의 횡포로 표현
2) 봉산 탈춤
서해 탈춤의 하나로 황해도 봉산을 중심으로 공연된 봉산 탈춤은 민족 예술의 대표적 존재로 농촌에서 발생하여 도시 상업적 탈춤으로 변해 갔다. 민중 예술적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어느 탈춤보다 짜임새가 뛰어나고 익살과 풍자가 가득하며 근대로 향한 전환기에 서민들의 진취적인 의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 봉산 탈춤의 연극적 특징
① 공연 장소와 극중 장소가 엄격하게 나뉘지 않고 융통성 있게 활용된다.
② 악공, 관중의 극중 현실 개입
③ 희극적 과장과 서민적 표현의 활용
4) 제 6 과장 양반춤
① 내용 :양반집 하인인 말뚝이는 관객과 악공과 한 패가 되어 문자를 써 가며 양반들을 희롱하고 양반도 돼먹지 않은 글을 지어 보이는데 이는 역시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으 로서 말뚝이와 관객으로부터 조롱당한다. 양반은 취발이를 잡아 들이라 명령하고 말뚝 이는 이에 양반들을 풍자, 조롱한다.(등장인물 - 말뚝이, 양반들, 취발이)
② 표현 : 서민적인 냄새가 풍기는 언어를 대담하게 구사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다. 근대적인 서민의식을 바탕으로 반어, 익살, 과장 등을 사용하여 고도의 풍자성을 이루어 내고 있다. 재담마다의 핵심적인 소재와 모두 어울려 추는 춤, 그리고 음악의 배합으로 긴장과 갈등의 해소를 나타낸다.
③ 봉산탈춤은 황해도 봉산지방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으로 해학성이 강하고 봉건적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이 잘 반영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탈춤의 하나이다. 제 6 과장 양반춤은 양반집 머슴인 말뚝이가 양반 형제를 희롱하는 내용인데, 양반의 허세를 희화화하여 공 격하고 있다. 양반춤 과장은 재담(才談)들이 일정한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고도의 풍자성을 얻고 있다. 그 구조를 살펴보면 '양반과 하인의 정상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양반의 위엄→양반의 위엄을 파괴하는 말뚝이의 항거→말뚝이를 꾸짖는 양반의 호령→양반을 안심시키는 말뚝이의 변명→양반의 안심'이라는 과정을 통해 말뚝이는 서 민의 전형(典型)으로서 양반을 실컷 희롱하며, 특권층에 대한 항거를 구상화하고 있다.
④ 주제 : 신분 특권 계급인 양반에 대한 풍자
⑤ 등장인물의 성격
말뚝이 : 극중에서는 하인 신분이지만 서민의 전형으로 재치와 기지가 넘치고 매우 활달하며 도전적인 자세를 취한다.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당시 경제력을 비롯한 실제적 능력을 갖춘 신흥 중산층 계급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양반들 : 말뚝이에게 희롱과 야유를 받으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는 희화적인 인물이다. 이는 조선 후기 봉건제도가 몰락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무능력한 양반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취발이 : 제 6 과장에서는 단지 등장에만 그쳐 그가 힘이 세다는 것 외에는 그의 성격을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제 4 과장을 통해 볼 때 그는 방탕하면서도 투쟁적이며 무엇이든지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즉 소유욕의 화신이요 투쟁적이기 때문에 취발이는 상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⑥ 봉산탈춤에서 악공들이 하는 역할
말뚝이는 양반을 희롱하기 위해 관객들과 악공을 불러낸다. 말뚝이와 관객, 악공의 관계는 우호적이어서 공모의 관계자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리하여 말뚝이의 입장이 바로 관 객과 악공의 입장이고, 관객과 악공의 입장이 바로 말뚝이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즉 관 객과 악공은 말뚝이의 양반에 대한 희롱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측면에서 지원하여 극중 현실에 참여하는 그룹이다.
⑦ 관객과 악공의 역할을 통하여 얻게 되는 효과
관객과 악공이 극중 현실에 소극적으로나마 개입함으로써 극적 환상이 차단되고 현실적 비판이 선명해질 뿐만 아니라 좀더 신명나고 친근한 놀이판을 만들 수 있다.
5) 미얄춤
① 내용 : 미얄과 덜머리집이 영감을 쟁취하기 위해 삼각관계를 벌이며 싸움을 벌이던 중 미얄은 패배하고 결국 죽고 만다.
② 미얄 과장의 인물
미얄 : 난리로 유랑민이 된 할멈, 직업은 무당, 천신만고 끝에 영감을 만나나 덜머리집이라는 첩 때문에 싸우다 죽는다.
영감 : 난리로 유랑민이 된 평민 영감, 직업은 맷돌 수선장이이기도 하고 땜장이기도 하다. 첩으로 덜머리집을 맞아들여 가정 불화를 일으켜 미얄을 죽게 만든다.
덜머리집 : 영가의 젊은 첩
③ 표현 : 미얄춤은 봉산탈춤의 마지막 과장이며 앞의 6 과장과는 별개의 것을 일종의 여 흥놀이이다. 난리통에 헤어진 미얄과 영감이 놀이판에서 서로 만나는 데서 시작되는데, 미 얄은 영감이고 망조든 사람으로 삶의 터전을 상실하고 유랑하는 서민 모습을 대변한다. 다른 과장과는 달리 풍자나 징계의 인물은 등장하지 않고 허름한 영감과 할미가 등장하여 서민의 생활과 의식을 보여 준다. 이 과장에서는 미얄에게 가해지는 영감의 횡포를 관객 에게 보여줌으로써 미얄 할미의 가련한 운명을 애처롭게 만든다. 따라서 이 과장은 다른 과장의 풍자와 해학적인 희극성보다는 남성의 횡포에 대한 여성의 비극성을 보여 주어 예 외적인 극의 구성을 이룬다.
⑵ 양주 별산대 놀이
1) 구성 : 전체 8과장으로 구성
2) 주제 : 무능한 양반, 파계승에 대한 풍자
3) 양주 별산대 놀이는 양주 지방에서 행해지는 가면극으로 널찍한 마당에서 아무런 무대 장치 없이 벌어진다. 제 7 과장(샌님 과장)은 말뚝이가 샌님을 데리고 나와 의막을 정하는 부분이다. 샌님의 명에 따라 말뚝이가 친구 쇠뚝이와 함께 의막을 정하는데 그 곳이 돼지 우리 임이 밝혀진다. 이로써 양반은 돼지로 야유 받게 되며, '한량의 자식, 바닥의 아들놈'으로 비유된다. 양반에 대한 이러한 비유와 풍자는 지배 계급에 대한 일반 서민들의 기대와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무능한 양반에 대한 야유와 비판은 조선 후기 가면극의 중요한 주제였다. 양주 별산대 놀이 8 과장 중 양반에 대한 비하(卑下)의 모습을 가장 장 보여 주고 있는 과장이 제 7 과장 샌님춤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⑶ 통영 오광대
1) 구성 : 전 5 과장으로 구성
2) 주제 : 양반 사회의 비리와 모순의 충자와 폭로
3) 전체 구성
제 1 과장 문둥탈 마당 - 문둥이 탈을 쓰고 절룩거리며 작은북을 들고 춤을 추는 장면
제 2 과장 풍자탈 마당 - 상놈인 말뚝이가 양반을 희롱하며 세태를 풍자하는 장면
제 3 과장 영노탈 마당 - 하늘에 사는 상상의 동물 영노가 양반의 횡포를 응징하는 장면
제 4 과장 농창탈 마당 - 양반과 창녀인 제자 각시가 방종하게 놀아나나 결국 양반은 할미 에게 돌아오는 장면
제 5 과장 포수탈 마당 - 단보는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사자는 포수이게 죽은 장면
4) 충무시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탈놀음인 통영 오광대 놀이는 가면극의 남한형의 한 갈래이다. 서민 생활을 해학적으로 다루거나 양반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⑷ 고성 오광대
1) 구성 : 전체 5 마당
2) 주제 : 무능한 양반에 대한 풍자
3) 전체 구성
제 1 마당 승무 마당 - 중이 고깔을 쓰고 장삼을 입고 소무에게 접근하여 호려 내는 시늉을 하면서 굿거리 장단에 춤을 추는 마당
제 2 마당 북춤 마당 - 문둥 광대가 벙거지를 쓰고 검은 더거리를 입고 북춤을 추는 마당
제 3 마당 오광대 마당 - 말뚝이가 양반들에게 모욕을 주며 같이 어울려 춤을 추고 재담을 주고받는 마당
제 4 마당 비비 마당 - 비비가 등장하여 양반을 놀려대면서 함께 어울려 춤을 주는 마당
제 5 마당 제밀지 마당 - 처첩의 갈등으로 본처가 죽어 상여가 나가는 마당
4) 이 놀이는 양반에 대한 풍자와 처첩의 갈등으로 인한 봉건 가족 제도의 모순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광대는 다섯 광대가 나오기 때문에 또는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오광대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⑸ 수영 야유
1) 구성 : 전체 4 과장
2) 주제 : 양반 계급의 무능과 허세를 조롱, 봉건 사회의 일부다처제에 따른 가정 불화
3) 특징 : 탈놀음 중 가장 짧은 4 과장이다.
4) 전체 구성
제 1 과장 양반 : 무식한 하인 말뚝이가 독설과 신랄한 풍자로 양반 계급의 무능과 허세를 조롱하고 계급타파와 인권해방을 절규한다.
제 2 과장 영노 : 양반 과장에서의 통쾌한 조롱과 야유에도 만족하지 않은 울분의 표시로 괴물 영노가 수양반을 잡아먹는다.
제 3 과장 할미·영감 : 봉건 사회의 일부다처제에 따르는 가정 불화를 주제로 하여 처첩의 삼각관계로 인한 가정 곤궁상을 드러내었다.
제 4 과장 사자무 : 사자가 등장하여 춤을 추고 있을 때 범이 개입함으로써 싸움이 일고 사자가 범을 잡아먹는다. 사자무를 마치면 연희는 모두 끝나게 되어 배역들은 고사를 지내고 가면을 소각하면서 제액과 만사형통의 행운을 축원한다.
⑹ 꼭두각시 놀음
1) 갈래 : 전통 인형극
2) 구성 : 2마당 8막
3) 주제 : 일부다처제로 인한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모순 풍자
4) 전통극 중 유일한 인형극으로 '꼭두각시 놀음'은 서구의 연극과 달리 막과 막 사이에 줄거리상 연관 없이 독자적인 내용을 가지는 것이 특색이다. 또한 공연 형식면으로 보아 무대 밖의 악사나 관중이 무대 안의 인물들과 수시로 대화의 방식들 취하여 거리감을 없앤다는 점은 전통극으로서의 중요한 특징이다. 꼭두각시 놀음은 서민들 사이에서 연희되었던 관계로 비속하고 해학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어 있어, 우리 나라 전통 인형극의 골계미를 느낄 수 있다. 인형극의 대사도 가면극의 대사와 마찬가지로 사투리, 속어, 외설어, 말조롱, 은어 등이 많이 쓰이는 데 이러한 대사 표현 방법은 민중성과 해학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것이다.
5) 꼭두각시 놀음의 풍자 내용
이 놀이는 전문적인 떠돌이 연애딘들(예 : 사당패)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관중 역시 평민대 중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놀이에는 그런 백성들의 삶이 끝까지 옹호되어 있고 그들처럼 땀흘 려 일하여서 먹고살지 않은 계층의 사람들이 비판과 조롱을 당한다.
불도를 닦아 중생을 제도한답시는 중은 소무당에 빠져 어울려 놀다가 박첨지와 홍동지에게 들켜 창피를 당하고, 삼신산 불사약을 먹고 팔만대장경을 외고 세상에 나온 동방삭은 풍악소 리와 꾐에 빠져 대번에 그 고상한 공부를 다 잊어버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춤추고 노래부 르며 노닥거린다. 뿐만 아니라 고을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것이 본분인 평양감사는 부임하자 마자 꿩사냥에 열을 올리고, 죽은 자기 어머니의 백일 불공을 위하여 절이나 짓고 하기 때문 에 그 어머니의 장례 때에 박첨지와 홍동지로부터 조롱을 당한다. 그리고 해남의 양반인 표생 원은 본마누라와 작은집에 끼어 낭패 당하고 박첨지의 놀림을 받다가 패가망신하고 만다. 이 러한 인물들을 통해 현실적인 생활에서는 온갖 억눌림과 빼앗김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백성 들이 이 놀이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것이 답답한 현실로부터의 해방과 승리를 안겨다 주는 것이다.
6) 꼭두각시 놀음의 마당 구성 - 전체 2마당 8막
박첨지 마당 : 박첨지 유람거리, 피조리 거리, 꼭두각시 거리, 이심이 거리, 표생원 거리
평양감사 마당 : 매사냔 거리, 상여 거리, 절 짓고 허는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