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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집 그리고 추억 스크랩 [맛대맛 라이벌] 냉면 - 함흥식 vs 평양식
ginasa 추천 0 조회 231 14.07.10 09: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앙일보 2014.07.03 / 출처 : http://joongang.joins.com/article/685/15131685.html?ctg=

[맛대맛 라이벌]

냉면 - 함흥식 vs 평양식


함흥냉면집에 왜 삶은 돼지고기를 사 가냐면요

 

 


냉면은 여름 대표 음식입니다. 크게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으로 나뉘는데요. 평양냉면은 메밀로 만든 국수를 차가운 동치미 국물이나육수에 말아 먹고, 함흥냉면은 고구마 전분으로 가늘게 뺀 국수를 매운 양념장으로 무친 홍어회와 함께 비벼 먹습니다. 냉면이라는 이름만 같을 뿐 맛이나 만드는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집은 각각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대표하는 맛집입니다. 두 집 모두 이북 출신 창업주가 시작한 이래 대를 이어 냉면을 만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글=송정 기자 asitwere@joongang.co.kr  
●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

1위 오장동흥남집 ● 대표메뉴: 회냉면·비빔냉면·섞임냉면·물냉면·온면 각 9000원씩 ● 개점: 1953년 ● 특징: 오장동 냉면골목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함흥냉면집. 함경남도 흥남이 고향인 노용언(1991년 작고) 할머니가 문을 연 후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간재미를 식초에 절여 매콤하게 무친 회무침을 올리는 회냉면이 대표 메뉴다. 회냉면에 쇠고기를 함께 주는 섞음냉면은 이곳만의 독특한 메뉴다. 냉면 핵심인 면은 고구마전분을 반죽해 직접 뽑아내기 때문에 쫄깃하고 탄력있다. ● 주소: 중구 마른내로 114(오장동 101-7) ● 전화번호: 02-2260-0735 ● 좌석수: 220석 ●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9시30분(둘째·넷째 수요일 휴무) ● 주차: 주변 공영주차장(30분 무료 쿠폰 제공)

▲ 함흥냉면은 매콤하게 양념해 얹은 꾸미(고명의 북한말)가 특징이다. 오장동흥남집은 간재미(가오리)를 식초에 하루 동안 절여 꼬들꼬들한 식감을 살렸다

오장동 중부시장 앞은 여름이면 늘 사람이 몰린다. 냉면 먹으려고 기다리는 줄이 오전 11시 30분쯤부터 길게 늘어서기 때문이다. 이곳엔 오장동흥남집, 오장동 함흥냉면, 신창면옥 등 함흥냉면 전문점이 모여있다.

▲ 1962년 발행된 100환 화폐. 2대째 가게를 꾸린 권기순씨와 아들 원재순씨가 모델로 등장했다.
 6·25 전쟁 직후 오장동은 곳곳에 떨어진 폭탄 때문에 여기저기 웅덩이가 깊게 파여 있었다. 번듯한 집은 없고 온통 판잣집뿐인 피란민촌이었다. 이 판잣집에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실향민들이 모여 살았고, 자연스레 북한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생겨났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한 동안 중부시장엔 북한식 찹쌀순대를 파는 곳도 여럿 있었다. 처음엔 이렇게 실향민을 위해 냉면·순대 등 북한식 음식점이 생겨났지만 점차 ‘맛있다’는 입소문을 타고 서울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오장동흥남집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오장동 냉면거리의 원조집이다. 6·25 때 피난 온 고(故) 노용언(1991년 작고) 할머니가 1953년 쓰러져가는 판자집에 고향인 흥남을 내건 간판을 붙이고 장사한 게 출발점이다. 의자도 없이 바닥에 종이 깔고 앉아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메뉴는 지금과 달리 냉면이 아니라 면에 따뜻한 국물을 얹어내는 잔치국수였다. 단골 손님 대접하느라 어쩌다 내놓은 냉면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냉면을 팔기 시작했고, 그게 대표 메뉴로 굳어진 거다.

▲ 고구마전분을 반죽해 뽑아낸 면을 뽑고 있다.
 지금은 냉면 중에서도 간재미(가오리)를 무쳐 함께 비벼 먹는 회국수가 대표 메뉴지만 처음엔 돼지고기 삶은 것을 함께 냈다. 전쟁 직후 구할 수 있는 게 돼지고기뿐이었기 때문이다. 뭐든지 풍부한 요즘도 그때 그 맛을 잊지 못해 가게 앞 시장에서 돼지고기 삶은 걸 사와 비빔냉면과 함께 먹는 손님이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노 할머니의 며느리인 권기순(76)씨는 “시어머니는 뭐든지 주물럭주물럭 하면 금세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냈다”고 노씨의 음식 솜씨를 떠올렸다.

 권씨는 스무살이던 1959년 결혼과 함께 지금까지 가게를 지키고 있다.

▲ 인기를 얻자 비슷한 상호로 장사하는 집이 늘었다. 원조 흥남집에 붙은 관련 글.
 사실 권씨는 독특한 이력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바로 지폐에 등장한 한국 최초의 여성이라는 이력이다. 그는 62년 5월 발행된 100환(현시세 10원)짜리 지폐에 아들과 함께 모델로 등장했다. 비록 3차 화폐개혁 조치로 25일 만에 유통이 끝났지만, 어쨌든 한국 화폐의 역사의 한자락에 족적을 남긴 거다. 그가 모델이 된 사연이 재밌다. 당시 정부는 저축운동을 전개했는데, 한국조폐공사가 저축 홍보를 극대화할 수 있는 모자(母子) 모델을 지폐 인물로 선정하기로 하고, 권씨를 썼다. 권씨는 결혼 전 한국조폐공사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도안 실장이 별다른 설명 없이 “아들과 같이 사진 찍어줄 테니 덕수궁으로 나오라”기에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화폐 모델이 됐다.

 “처음엔 화폐에 쓰이는 건지 몰랐지. 그땐 어려서 사진 찍히는 걸 좋아했거든. 그래서 나갔지. 그런데 나중에 화폐 도안에 쓴다고 해서 놀랐어.”

 권씨는 한 살배기 아들과 사진 수십 장을 찍었다. 그중 하나가 100환짜리 지폐에 실려 발행됐다.

▲ 창업주 고(故) 노용언 할머니가 그려진 간판.
 화폐에 함께 등장한 권씨 아들 윤재순(53)씨는 그의 아내 원귀연(51)씨와 함께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아들 부부가 가게를 지키지만 권씨도 매일 가게에 나온다. 권씨는 자신이 시어머니에게 배운 원칙을 늘 아들·며느리에게 강조한다. 바로 푸짐한 인심이다.

 

원씨는 “시할머니가 전쟁 때 배고픈 사람들을 많이 거둬 먹이셨다고 들었다”며 “시어머니 역시 실향민 어르신이 오면 사리를 더 얹어주거나 아예 사리값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걸 보며 자연스레 손님 대하는 태도 등을 배운다고 한다. 요즘 유명 냉면 전문점들이 냉면 한 그릇에 1만원 넘게 받지만 오장동흥남집은 9000원만 받는 것도 권씨 고집 때문이다. 그나마 2010년 이후 줄곧 8000원을 유지해오다 올해 며느리 원씨의 설득에 겨우 값을 올린 거다.

 오장동흥남집은 예전 맛을 내기 위해 요즘도 매일 면을 직접 뽑는다. 함흥냉면은 메밀을 쓰는 평양냉면과 달리 고구마·감자 전분으로 면을 뽑는데, 오장동흥남집은 고구마 전분만으로 면을 뽑아 면이 더 쫄깃하다. 또 면을 대량으로 만들어 놓지 않고 면이 떨어질 때마다 새로 반죽해 면을 뽑는다. 참기름도 직접 짜서 쓴다. 육수는 사골을 푹 우려내 사용한다. 이렇게 좋은 재료는 기본이고 철저하게 위생관리를 한다고 한다.

 이집이 이렇게 오래 사랑받는 또 한 가지 비결은 직원이다. 직원 20여명 가운데 40%인 8명이 30~40년씩 함께 일한 직원이다. 그렇다보니 손발이 척척 잘 맞는다. 가끔 웃지못할 일도 생긴다. 손님들이 직원을 사장으로 착각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어머니가 주로 2층 카운터에 있어요. 그리고 1층 계산대엔 40년 일한 직원이 있구요. 나이 60 넘기면서 올초 그만뒀는데 요즘 자꾸 손님들이 ‘주인 바뀌었느냐’고 물어요. 내가 주인이라고 하면 ‘내가 여기 몇십 년 고객인 줄 알고 거짓말 하느냐’고 화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웃을 수밖에 없죠.”

 역사가 오랜 만큼 이집엔 단골도 많다. 나이 지긋한 실향민뿐 아니라 이들의 자녀까지 대를 이어 찾아온다. 손님이 아니라 식구같은 마음으로 찾는 손님들이다보니 합석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요즘처럼 냉면 찾는 이들이 많아져 가게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면 먼저 나서서 모르는 사람에게 옆자리를 너그럽게 내주기도 한단다.

 그 시절 맛을 그대로 내려고 늘 노력하지만 6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바뀐 것도 있다. 원래 함흥냉면 위에 올리는 꾸미(고명을 뜻하는 북한말)로 홍어를 고집했는데 2000년대 후반 간재미로 바꾼 게 대표적이다. 홍어 어획량이 줄면서 수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간재미를 식초에 하루 동안 절여 놨다 양념에 버무려 사용한다. 건물도 바뀌었다. 판잣집은 80년대 중반 3층 건물로 새로 지었다. 지난해에는 27년 만에 처음으로 내부 리모델링을 했다.

 가장 최근의 변화는 염분을 낮춘 거다. 냉면 육수 간을 약하게 했다.

 “요즘은 다들 건강 생각해 간을 약하게 해서 먹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육수 간을 약하게 내놓고 있어요. 예전 육수가 더 맛있다는 어르신들한테는 건강 생각해서 바꿨다고 일일이 설명해요.”

 오장동흥남집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비슷하게 흉내낸 냉면집도 많다. 그러나 원조 오장동흥남집은 오장동과 신림동 단 두 곳뿐이다. 신림동은 권씨 작은 아들이 운영하고 있다.

 “이름이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아 같은 집인가 싶은 곳이 꽤 많아요. 그럴 땐 간판에 있는 시할머니(노용언) 사진을 확인해 주세요.”


평양서 냉면집 하던 솜씨 어디 가나요

● 대표메뉴: 냉면·비빔면 각 1만1000원씩, 만두 1만원, 제육(돼지고기 삶은 것) 2만4000원 ● 개점: 1984년 ● 특징: 평양에서 대동면옥이라는 냉면집을 하던 김면섭(1대)씨를 이어 며느리(2대)가 피난 내려와 평양면옥이라는 이름으로 이어받은 후 손자(3대)와 그 손자의 사위로 4대째 이어지는 역사 깊은 냉면집. 장충동 본점은 김씨 손자인 김대성(66)씨가 운영하고 있다. 메밀을 직접 제분·반죽해 면을 뽑으며 육수는 사골·양지만 넣고 6시간 동안 끓인다. 논현동과 도곡동에 각각 며느리(2대)와 여손서(손자의 사위·4대)가 운영하는 직영점이 있다. ● 주소: 중구 장충단로 207(장충동1가 26-14) ● 전화번호: 02-2267-7784 ● 좌석수: 208석(룸 5개) ●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9시30분(명절 휴무) ● 주차: 발렛 주차(1000원)


▲ 평양냉면 특유의 밍밍한 맛은 육수가 좌우한다. 평양면옥은 사태·양지만 삶은 후 기름기를 제거해 국물이 맑고 담백하다.

함흥냉면집이 오장동에 몰려 있다면 평양냉면집은 중구 장충동 인근에 흩어져 있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은 1949년 주교동에 문을 연 우래옥이다. 이후 70년대 필동면옥(필동)·을지면옥(입정동)이 생겼다. 평양면옥은 이보다 늦은 80년대에 지금 자리(장충동)에서 한 블럭 떨어진 광희동에 문을 열었다.

▲ 제분 전 통메밀. 윤기가 흐를수록 질이 좋다.
 “동대문·남대문·평화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 중에 실향민이 많았대요. 이북5도위원회(황해·평남·평북·함남·함북 등 이북 5도 사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관)가 구기동으로 이전(2003년)하기 전 장충동에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래서 그 근처 광희동에 평양냉면집을 열었다더라고요.”

 평양면옥 서상원(44·4대)씨는 가게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서씨는 장충동 평양면옥(본점) 김대성(66·3대) 사장의 둘째 사위로 2008년부터 장충동 본점에서 일하다 올 4월 도곡동에 분점을 냈다. 평양면옥은 개점 시기(1984년)만 보면 다른 평양냉면집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1대 창업주가 김면섭(생몰연도 확인 불가)씨가 북한에서 장사를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평안남도 순천 출신인 김씨는 평양에서 대동면옥이라는 냉면집을 운영했다. 6·25전쟁 후 그의 아내와 아들 내외(며느리 변정숙·87) 등만 남한으로 피난왔다. 며느리 변씨는 을지로 등에서 장사하다 80년 평양면옥을 열었다. 평양에서 냉면집 했던 경험이 있어 냉면만큼은 자신이 있었단다.

▲ 삶은 면을 얼음물에 헹군 후 1인분만큼 말아쥔 모습. '한 사리'하고 한다.
 다른 곳에 비해 늦게 생겼지만 문을 열자마자 금세 인기를 누렸다. 평양면옥의 평양냉면을 맛 본 실향민들은 “고향에서 먹던 그 맛 그대로”라고 좋아했다. 평양면옥 냉면 맛에 빠진 사람이 늘었지만 3년 만에 가게를 옮겨야 했다. 장사가 잘 되자 집주인이 냉면집을 열기 위해 쫓아낸 것이다. 자리를 물색하다 발견한 곳이 한 블록 떨어진 지금의 자리(장충동)다. 처음엔 본관 하나뿐이었지만 곧 별관·신관을 차례로 지으며 확장했다. 아들과 함께 장사하던 변씨는 따로 나와 논현동에 같은 이름의 가게를 열었다. 그래서인지 논현동 평양면옥은 할머니집으로도 불린다.

 찾아오는 손님은 점점 늘었지만 주차공간이 협소해 장충동 평양냉면집은 매장 바로 옆에 2008년 주차타워를 지었다. 가게에 들어가려는 차량이 가게로부터 약 200m 떨어진 광희사거리까지 이어지면서 인근 주민들 민원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을 줄이려고 주차타워를 지었지만 아직도 여름이면 이 집 냉면 맛보려 오는 사람들 탓에 광희사거리까지 차가 막힌다.

▲ 평양면옥 본관 입구
 교통난까지 일으키는 평양면옥의 인기 비결은 뭘까. 서씨는 이북 사람 특유의 강직함을 꼽았다.

 “원래 이북 분들이 강직해요. 실제로 저희 할머님과 아버님만 봐도 그렇고요. 속이는 것은 물론 웬만한 변화도 싫어하죠. 그래서 평양에서 하던 맛 그대로를 내는 거에요. 아흔 넘은 어르신들이 지금도 우리 집에 와서 고향 평양에서 먹던 맛과 가장 흡사하다고 말하는 게 그런 이유겠죠.”

 제대로 된 평양냉면 맛을 내기 위해 면은 통메밀을 직접 제분한다. 제분 과정에서 껍질이나 찌꺼기가 걸러져 처음 양에서 4분의 3으로 준다. 제분 시간은 2시간을 넘기지 않는다. 이보다 더 하면 처음 깎인 찌꺼기 등이 섞여 버리는 양을 오히려 줄일 수 있지만 품질 유지를 위해 딱 2시간을 지키는 거다. 서씨는 “아버님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고 말했다.

 평양냉면은 메밀에 전분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함흥냉면보다 면이 부드럽고 쉽게 끊긴다. 전분을 많이 넣을수록 면발 탄력은 높아지고 재료 값은 줄지만 메밀 특유의 향과 식감은 살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메밀과 전분 비율을 8대2로 정확히 지킨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면을 뽑는데 면은 한 번에 8그릇씩만 뽑는다.

 “메밀은 반죽한 상태에서 30분만 지나도 면을 뽑았을 때 빨리 불기 때문에 다 버려야 하거든요. 종종 포장해 달라는 손님이 있는데 그때마다 가는 데 얼마나 걸리는 지 묻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30분 이내에 먹을 수 있다고 하면 포장해 주지만 아니면 말려요. 면이 불어서 제맛이 안 나거든요. 그래도 괜찮다면서 포장해 달라는 손님이 있는데 아무래도 제맛을 즐길 순 없어서 말리고 싶죠.”

 육수는 사태와 양지를 6시간 정도 끓여 사용한다. 뼈를 넣고 우린 것에 비해 국물이 맑고 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나지 않는다. 전통 평양냉면 조리법은 동치미 국물을 섞지만 평양면옥은 동치미 국물을 아예 넣지 않는다. 동치미 국물 맛이 조금만 달라져도 육수 맛이 달라져 일정한 국물 맛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평양면옥 냉면을 처음 맛보는 사람은 대체로 ‘밍밍하다’고 평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먹으면 먹을수록 더 생각나는 중독성이 있다. 서씨는 “손님들이 자꾸 생각난다며 ‘냉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며 “여러 번 먹다 보면 평양냉면 특유의 제맛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서씨도 바로 이 매력에 빠져 아내 집안의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서씨는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미국·중국 등지에서 일했다. 그러다 2008년 장인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장인인 김 사장은 이런 사위의 결심을 반기기는커녕 되레 말렸다.

 “아내가 딸 셋 중 둘째에요. 가업을 잇겠다고 했더니 장인 어른이 왜 힘든 일을 굳이 나서서 하려고 하냐며 말렸죠. 정 하고 싶으면 더 나이 들어 하라고요. 하지만 이왕 할 거면 하루라도 더 젊었을 때 제대로 배우고 싶었어요. 바닥부터 말이죠. 실제로 설거지부터 메밀 제분, 면뽑기 등부터 배웠어요. 물론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더 많겠지만요.”

[보태기 - 블로그 지기] 사리

면을 더 주문할 때, “사리 좀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말이 아니다. ‘사리’는 국수를 동그랗게 감아놓은 뭉치를 세는 단위이지, 국수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밥 한 그릇, 두 그릇 하고 세듯이, 국수 한 사리, 두 사리 하고 세는 것이다. “사리 주세요!”는 “한 사리 주세요!”로 말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한글문화연대 학술위원 성기지 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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