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으로 쥐고 흔들 듯 세찬 바람에 유리창이 심하게 요동을 친다. 덜컹거리는 완행 열차에 몸을 실은 듯이 그렇게 세차게 쉴새 없이 불고, 비록 스쳐 지날지라도 세상을 맞부딪히며 달리는 바람 소리에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행여라도 바람은 스스로에 지우진 운명을 멈추고 싶은 생각은 없을까 아니, 다른 무언가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충동은 들지 않을까?
태초에 태어나기 전부터 바람을 꿈꾸었다. 어디론가 덧없이 떠나고 싶었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나를 상상한다는 건 내게 또 다른 현실의 세계 같았다. 상상일지라도 좋았다. 그냥 그대로 바람에 휩쓸려 어느 비탈진 창고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있다가 홀연히 다시 돌아올지라도 떠나고 싶었던 건 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였다는 걸 이제서야 인정할 용기가 생긴다.
너무 힘들었다.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족쇄처럼, 강제 노역에 동원된 노예에게 채워진 계구(戒具)처럼 굴레라는 강제 짐을 지고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내 책임 같고, 주어진 명운 같아서 벅찬 현실을 뿌리치고 나올 용기조차 없었던 비굴한 나는 몸이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연기처럼 사라져버릴지라도 나 하나 버려서 된다면야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감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헤쳐 나가면 그 끝에 희망으로 인도 할거라고, 감싸고 품으면 눈 앞의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착각은 절대 나만은 가슴으로 가벼울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그런 어느 날, 잠결 새벽의 바람 소리에 현실의 벽이 몽환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난 알았다. 태초에 나 자신이 바람이었다는 것을.
바람결에 실린 깃털처럼 자유롭고 싶었고, 바람에 휘날리는 스카프처럼 묶여진 따스한 목덜미에서 풀어 헤쳐지고 싶은 것도, 바람처럼 마음의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 싶은 사실과 바람처럼 꼭꼭 숨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가만히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기울이면 바람 소리에 바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왜 이제서야 바보처럼 알게 되었을까.
문득 심연 속의 바람이 나를 부른다. 스스로 자유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꿀물보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인내로 무장하고도 정신 없이 달리다 나무 가지에 몸이 찔리고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몸을 가르는 아픔을 잊기 위해 질러대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바로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고 얻은 댓가가 자유로운 바람소리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이상 세계를 꿈꾸듯이 바람이고 싶었다. 내 몸이 갈갈이 찢어지고 다시는 본연의 자세로 처음처럼 되지 못할지라도 자유롭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연기처럼 지금 내 자리에서 사라져버릴 수 있다면,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을 팔아서라도 미련 없이 바람과 자리를 맞바꾸고 난 사라져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죽을 만큼 힘들다고 수없이 중얼거렸을 때는 차라리 눈물조차 메말라 버렸다. 아니, 저절로 멈추었다는 표현이 옳은 지도 모르겠다. 중압감은 압박 붕대처럼 나를 거세게 밀어붙이고 벗어나고 싶은 숨통처럼 바르르 거릴 때서야 초연히 바람 속에 기망(冀望)이 실려왔다. 그리고 나와 같은 황무지로 피폐한 영혼으로 휩쓸리는 바람은 바람으로만 멈출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이아몬드를 세공 할 수 있는 건 다이아몬드뿐이다. 그것은 같은 재질로 동화되어 반 이상을 깎이는 고통 끝에 갈고 닦여서 온전한 아름다움의 깊이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이라는 보석 의미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택을 지닌 블루 다이아몬드가 탄생한단다. 그 말에 내 속에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맑고 투영한 눈물 광산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알았다.
이제는 고인 댐이 터져버린 강물처럼 수없이 흘린 눈물 주머니로 더 이상 나는 바람처럼 가벼울 수가 없다. 내 속에 마농의 샘처럼 마르지 않는 눈물 광산이 존재하는 한, 대지를 적시며 그대로 뿌리를 내리고 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때서야 바람은 잦아들고 자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 저곳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내 영혼의 상처를 둘러볼 용기 또한 생겼다.
돌아보면 바람만은 이런 나를 이해할 거라 믿었다. 내 통한에 맺힌 실타래처럼 엉킨 한을 곱게 풀어서 이불을 만들고 내 상처를 덧나지 않게 가만히 덮어 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산보다 더 큰 무게로 내 등에 짊어 지운 무거운 짐을 내려줄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두 손을 잡아줄 거라 믿었다. 무엇보다 지친 나를 편안하게 잠재워줄 안식은 바람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이제는 지치고 힘든 나를 내려두고 싶다. 아니, 바람의 동굴에 눈물로 자란 대지를 덮고 둥지를 틀어서 숨쉬면 내 눈가의 고인 두 눈에 가벼운 입맞춤으로 닦아주리라.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다시 쓸어 올리며 가만히 나를 안아주는 것만으로 조용히 바람처럼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야 긴 여행을 마치고 비로소 내 집으로 돌아온 평안이 든다. 새로운 삶의 영원한 안식처인 바람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