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주년에 재조명해보는 양정의 설립자 순헌황귀비 " 엄비
엊그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혹자는 황세제로 칭함이 옳다고 하기도 함)인 "이구"씨가 토쿄 아까사까 프린스 호텔에서 홀로 숨진채 종업원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로 모셔 와 정중히 장레를 치러 준 기사를 보게 되었을 때, 40년 전인가 우리 모두가 당시에 황실학교 다니는 영광으로 고2 때 인가 윤비가 돌아 가시는 바람에 그 장례식에 운구차 동원되어 삼베두건쓰고 엄숙한 표정을 짓느라 애써 가며 종로거리를 걷던 추억이 아련히 생각났다.(누구는 그 때도 이 기회를 놓칠 세라 농땡이치고 종로3가 골목 길로 자취를 감추었지,ㅎㅎㅎ)
"이구"씨는 일제시대 청나라의 역사 마지막 황제인 "푸의"처럼 외세와 사상대립의 소용돌이로 점철된 19세기 말,격동과 혼란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이 그래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 더욱이 황실학교 출신으로는 더욱 더 울적하고 측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음이 비록 나만의 심경은 아닌 상 싶다.
이러한 애틋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다 간 "이구"씨의 친조모가 바로 우리 양정의숙을 세우신 "엄비"이시다 "엄비"는 아버지 영월 엄씨 "엄진삼"이 한미한 선비로 지낼 때인 1854년 6월6일 2남2녀 중 장녀로 태어 나셔 8세때 경복궁에 입궁, 항아님으로 지내다가 명성황후(민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호위하는 상궁인 시위상궁이 되었다. 민비는 고종에게 엄상궁이 성은을 입은 사실을 알고 투기하여 죽이려 까지 하였고 수 차례나 고종이 극구 만류하여 간신히 화를 면했다고도 한다.
1895년 8월 20일 민비가 미우라 공사의 지휘로 궁궐에 난입한 낭인과 왜병의 칼에 참혹히 시해 당 한 후 불태워 졌는데 바로 이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민심이 극도로 동요되고 있을 때 춘천 등지에서 의병봉기가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병신년 2월에는친로파 이범진 등이 로국공사 웨베르와 결탁하여 고종과 왕세자를 노국공관으로 모셔 갔는데 이가 소위 "아관파천"이다
이때, 평소 중후한 외모와 더불어 여장부답게 체격이 우람하신 엄비가 급한 김에 홀로 고종을 들쳐 업고 십리 궁궐 담길을 따라 노국공관으로 나는듯, 한 걸음에 내달았다고 하니 과연 근력이 대단하신 분임을 알 수 있고 그 분이 세우신 우리 양정이 마라톤을 비롯, 육상부문에 세계적 학교가 되었음은 그 타당성이 다분히 있다 보겠다. 엄상궁은 이 때부터 고종의 총애는 물론, 가장 측근에서 모시게 되었고 고종은 아라사 공관에 기거한 후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정치적 위해와 인간적 고독을 달래고자 엄상궁을 가까이 했음은 물론이다.
엄상궁은 1897년 9월 44세 나이에 드디어 떡두꺼비 같은 왕자를 낳으니 이가 바로 후의 영친왕 "이은"씨며 이로 인해 경선당 당호를 받고 이어 선영 귀인에 책봉되었으며 대한제국 출범과 더불어 드디어"순비 순헌황귀비"라는 황비에 봉해 지고 왕자"은"에 교육을 엄격히 하는 한편 "부자유친"보다 "군신유의"를 우선케 하여 "은"은 4살 때인 1900년에 영친왕으로 책봉되기에 이르른다.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에게 왕자가 없었으므로 순종의 등극과 함께 영친왕은 바로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고종황제가 가장 아끼는 왕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헤이그 밀사 사건을 생트집 잡아 고종을 강제로 양위케 한 이또 히로부미는 11세의 어린 영친왕을 도쿄로 유학보낸다는 구실아래 볼모로 데려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는 어머니의 비탄스러움은꼭꼭 숨기고 의연하게 아들에게 " 대한 제국의 황태자라는 긍지를 결코 잊지 말라 "는 당부와 다짐을 잊지 않았고 고종도 참을 "인"자를 써 주며 "기쁠 대나 슬플 때나 감정을 나타 내지 말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는 마음 아픈 주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엄비는 망국의 왕비로써 철천지 한을 품은채 58세 되던 1911년 6월25일 덕수궁에서 눈을 감으셨다. 엄비가 이역만리에 영친왕을 두고 눈을 감는 순간, "은을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이 된다, 히로부미는 지난 여름방학에도 내 보내 준다 하고서는-----" 라는 원망섞인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어머니로서의 애 끊는 원통함을 가슴에 않은 채 돌아 가셨다. 엄비의 망국한은 곧 우리 민족 모두의 그 것이었고 아들을 못 보고 눈을 감아야 하는 한국여성의 숙명적 비련임에는 난국을 살아 가는 일개 범부의 아내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계몽과 교육을 통하여 폭풍우 앞에 촛불같은 이 나라,이 겨레를 살리려 하신 엄비는 암울한 현실속에서도 미래를 통찰하는 혜안을 지니시고 이를 과감히 실천해 보이신 최초의 신 여성이요, 그 시대의 선구자이셨다. 엄비는 1905년 5월12일 최초로 양정의숙을, 그 이듬 해에는 진명여학교를, 그 해 5월에는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를 설립하여 양정은 당시 군부 협판인 친정조카 "엄주익"으로 하여금 운영케 하고 함평에 있는 국유지 답 40만평과 엄비의 내탕금으로 사 둔 개성의 답 33만평, 이천의58만평, 광양의35만평의옥답으로 재단을 만들고 진명은 군부총장이던 친정 사춘동생 "엄준원"으로 하여금 경선궁 재단 소속이던 강화의 토지 12만평과 부천의 땅78만평과 자하골의 1천평 대지와 기와집 1채를 주어 운영케 했다. 엄비는 양정을 한국식으로, 진명은 서양식으로, 숙명은 일본식으로 각기 광범위한 교육방법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 오며 100년이 지난 오늘에야 엄비께서 구상하신 문자 그대로 백년대계의 그랜드 마스타 플랜은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산 역사이자 표본이 되어 1세기 간에 걸처 숱한 인재동량을 배출하여 나라의 독립과 발전에 다대한 성과를 가져 왔다.
양정100주년을 맞이 한 우리 모든 양정인은 이러한 파란만장한 질곡의 생애를 지내 오면서도 원대한 포부를 성취하신 엄비의 참된 뜻을 되 새겨 한껏 긍지와 자신을 가지고 100주년에 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35억을 목표로 매진해 온 100주년 기념관 건립 모금이 올해를 반 이상 넘긴 이 즈음에도 22억에 불과하고 그 가운데 우리 50회는 그 나마 1억이라는 최소한의 목표에 이제 겨우 64 %뿐이 되지 않으니 년내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모두가 분발하여 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매듭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