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例話들을 통한 맹자의 사상】
■오십보백보
五十步百步 / 오십보백보
양 (梁 )나라 혜왕 (惠王 )이 맹자에게 물었다 .
“나는 나랏일에 정성을 다하는데 왜 백성이 늘어나지 않는가 ?”황하 이쪽에 흉년이 들면 이쪽 백성을 황하 동쪽으로 백성들을 옮기고 그곳 곡식을 황하 이쪽으로 옮겼으며 황하 동쪽에 흉년이 들면 역시 그렇게 했소 . 그런데 이웃나라의 정치를 보면 과인이 마음 쓰는 것만도 못해요 . 그런데도 이웃나라의 백성은 더 줄지 않고 과인의 백성은 더 늘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요 .
맹자가 대답했다 .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으로써 비유하겠습니다 . 둥둥둥 진격을 알리는 북소리를 따라 무기를 들고 싸우다가 갑옷을 버리고 도망치는데 어떤 사람은 백 보를 가서 멈추고 , 또 어떤 사람은 오십 보를 가서 멈추었습니다 . 그러자 오십 보를 도망친 사람이 백 보를 도망친 사람을 비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왕께서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오십 보건 백 보건 도망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
“그와 같은 선정 (善政 )으로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 -
맹자가 양 (梁 )나라 [위 (魏 )나라 ], 제 (齊 )나라 , 추 (鄒 )나라를 유세할 때의 기록으로 , 각 제후에게 인정 (仁政 )을 설파한 내용이다 .
“왕께서 이를 아신다면 이웃나라보다 백성들이 더 많아 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 농사지을 때를 어기지 않으면 곡식은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수가 될 것이고 촘촘한 그물을 아무 때나 방죽과 못에 던지지 않으면 물고기와 자라는 이루다 먹을수 먹을 수 없을 정도가 될것이요.
때에 맞게 도끼를 들고 산과 숲에 들어간다면 재목은 이루 다 쓸 없을 만큼 많아지며, 백성들이 산 사람들은 먹여 살리고 죽은 사람응 장사지낼 때 섭섭함이 없게 될것입니다.
다섯 무의 집에 뽕나무를 심으면 나이 쉰이 된 자가 비단 옷을 입을 수 있고 닭과 돼지와 개를 기르면서 때를 놓치지 않으면 나이 일흔이 된 자가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백 무의 밭을 갈 때 빼앗지 않으면 식구가 여러 인 집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고 학교교육에 삼가 힘써서 효도와 깍듯함의 올바른 뜻을 거듭 가르치면 머리털이 반 쯤 힌 노인이 길에서 짐을 이거나 지지않게 됩니다 .
일흔이 된 자가 비단옷 입고 고기를 먹으며 뭇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데도 왕 노릇하지 못한 자는 여태껏 없습니다 .
개나 돼지가 사람이 먹을 것을 먹는데도 잡도리할 줄 모르고 길어 굶어 주검이 널리 있어도 곳간을 열줄 모르면서 사람이 죽으면 ‘내 탓이 아니다 .’‘칼 탓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
양나라 혜왕이 말했다 .
“ 과인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
맹자가 대답했다 .
“사람을 몽둥이로 죽이는 것과 칼로 죽이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
“차이가 없소 ”
“칼로 죽이는 것과 정치로 죽이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
푸줏간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진 말이 있는데도 백성들에게는 굶주린 기색이 있고 들판에는 주려 죽은 주검이 널려있다면 이는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게 한것입니다 .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조차 사람들은 싫어하는데 백성의 부모가 되어 정치를 한다면서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만드는 짓을 피하지 않는 다면 어찌 백성의 부모라 할수 있겠습니까 ?
중니 (공자 )는 ‘처음 인형을 만든 자 그에게는 후손이 없으리라 ! 고 하였으니 이는 산 사람의 모습을 본 따서 장례에 썼기 때문입니다 .
혜왕은 나랏일을 오롯이 잘했다고 하지만 고작 한 두가지를 잘했을 뿐이다 . 그러고서도 자기나라 백성이 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했다 . 당시는 봉건제도가 무너진 시대이므로 백성이 어느 나라든 자기 삶을 보장해 주는 곳으로 옮겨 갈수 있었다 .
백성이 많아지는 것은 곧 국력이 강해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제후들 마다 이웃나라보다 더 백성이 많아지기를 갈구했다 .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룰 것이냐 였다 .
이제 왕께서는 특혜를 주는 정책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
제후국들의 선비들이 와서 귀순하면 3 대까지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고 전쟁에도 동원 되지 않게 합니다 .
진나라 땅 사방국경 안에 있는 구릉 , 비탈진 곳 , 언덕 , 습지 등에 대해 10 년동안 세금을 거두지 않습니다 . 이런 내용을 법률로서 명시해 두면 1 백만 명의 농민을 충분히 불러 올수도 있습니다 .
■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다.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을 만나자 선왕이 말했다.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사적에 관하여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공자의 문도들 중에는 제환공과 진문공의 사적에 관하여 말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에 관하여서는 아직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마다하지 않으신다면 왕도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대체 왕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병사와 장교를 위험한 데 빠지게 하고 이웃 나라의 제후들과는 원수가 된 후에야 마음이 상쾌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어찌 그런 일에 상쾌하겠습니까.
내가 크게 소망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왕께서 크게 소망하시는 바를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맹자가 말했다. “살찐 고기와 달콤한 요리가 왕의 입맛에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며, 가볍고 따듯한 비단 옷이 몸에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름다운 빛깔이 눈으로 보시기에 부족하고 풍악소리가 귀로 들으시기에 부족하며, 측근들이 앞에서 부리시기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그런 일들이라면 왕의 여러 신하들이 왕께서 만족하실 만큼 바쳐 드릴 터입니다. 왕께서 어찌 그런 일 때문에 그러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그런 일들을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왕께서 크게 소망하시는 바를 알 수 있겠습니다. 영토를 확장하고 진(秦)나라, 초(楚)나라와 같은 큰 나라들을 입조하게 하여 천하에 군림하고 사방의 야만국들을 장악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을 가지고 그와 같은 큰 소망을 이루시려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토록 터무니없는 일입니까?” “아니, 그보다 더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못 잡아도 후환이야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을 가지고 그와 같은 큰 소망을 이루시려고 하신다면 전심전력을 다하여 애쓰더라도 뒤에 반드시 재앙이 생기게 됩니다.”
연구 개발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없다
■ 농단 (壟斷)
높이 솟은 언덕.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이익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비유하여 하는 말이다.
「맹자(孟子)가 신하 자리를 내놓고 돌아가려고 하자(맹자는 기원전 4세기 말경, 수년 동안 제(齊)나라의 정치 고문으로 있었는데, 제나라의 선왕(宣王)은 도무지 그의 진언을 채택하여 주지 않았다.) 왕이 맹자를 찾아와 말했다. “전에는 뵙고 싶어도 뵙지 못하다가 모시게 되어서 온 조정이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 다시 과인을 버리고 가시니 이다음에도 계속해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그렇게 해 달라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다른 날 왕이 시자(時子)에게 말했다. “나는 맹자에게 도성에 집을 마련해 주고, 만종(萬鍾)의 녹봉을 주어 제자들을 양성하게 하여 대부들과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본받게 하고 싶은데, 그대가 이 뜻을 대신 전해 주지 않겠는가?” 시자는 (맹자의 제자)진자(陳子)를 통해 이를 맹자에게 전했다. 진자가 시자의 말을 맹자에게 보고하자 맹자가 말했다.
“시자는 어찌 그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내가 부(富)를 원한다면 십만 종의 녹봉을 마다하고, 만 종의 녹을 받으려고 하겠는가? 이것이 부자가 되려는 자가 하는 짓이겠는가? 일찍이 계손(季孫)이 이렇게 말했다. ‘이상도 하구나, 자숙의(子叔疑)는. 자기가 정치를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둘 뿐이지, 어찌하여 제자에게 경(卿)을 시키는 것인가. 누군들 부귀를 원하지 않으랴마는 그는 홀로 부귀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부귀를 독차지한 것이다.
’ 또, 옛날에 시장에서 하는 일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바꾸는 것이었고, 관리하는 사람은 다만 그것을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천한 사람이 나타나 우뚝 높은 언덕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보고는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천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때부터 세금을 거두게 된 것이다. 장사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이 천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출전이 이야기는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나오는데, 맹자의 말에서 ‘농단’이 유래하여 이익이나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원문에는 용단(龍斷)으로 되어 있는데, ‘용(龍)’과 ‘농(壟)’은 서로 통하는 글자이다. 일종(一鍾)은 여섯 섬 너 말을 말한다
■ 왕도정치
유교에서 어진 덕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유교교리. 정치사상
내용
인간의 집단인 국가 사회나 더 나아가 인류 사회에서 민생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면서,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에서는 힘과 무력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력에 의한 평화적이고 순리적인 해결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사상이다.
전통적으로 유학은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 강한 관심을 가져 왔으며, 이런 관심은 자연히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안과 노력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게 하였다.
이로 인해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비판 및 이상 정치의 방안 등이 유학 사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공자가 제시한 덕치나 맹자가 제시한 왕도정치 사상은 이런 관심의 발현이다.
유학 사상에서 정치 사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본래 유학 사상이 ‘이상적인 정치(至治)’를 실현한 옛 성왕(聖王)의 도(道)를 계승하는 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도사상은 비록 맹자에 의해 유교 정치 철학으로 정립되었지만, 한편에서는 요·순(堯舜) 이래 하(夏)·은(殷)·주(周) 3대의 지치(至治)를 계승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천명정치(天命政治)를 제시한 ≪서경≫의 사상과 덕치주의를 제시한 공자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형성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왕도’라는 말은 ≪서경≫ 홍범편(洪範篇)의 “치우침이 없고 공정하면 왕도가 광대하고,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이하며, 뒤집힘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왕도란 곧, 공평무사한 중용의 정치를 의미한다.
이 ≪서경≫의 사상은 지공무사의 천명을 인간이 대신해 구현한다는 천명정치 사상으로 이어져 맹자의 왕도사상으로 계승된다.
한편, 공자의 정치 사상은 덕치주의와 정명론(正名論)으로 집약될 수 있다. 덕치주의가 통치 방법에 있어 힘이나 강제에 의한 통치보다는 덕에 의한 자발적 감화를 중시한 것이라면, 정명론은 그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맹자에 의해 인정(仁政)으로 이어져 왕도정치 사상의 핵심적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유학을 수기(修己)·치인(治人)의 사상이라고 볼 때, 왕도 사상은 치인에 속하는 것이지만, 수기와 치인은 상호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치인보다는 오히려 수기가 더 근본적인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왕도정치 실현의 근거를 인간의 내면적 성선(性善)에서 찾는다.
이것은 공자의 덕치주의의 계승이며 심화라 할 수 있다. 죽으러 끌려가는 소를 보고 그것을 측은히 여기는 제선왕(齊宣王)의 마음에서 왕도정치 실현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맹자의 말이 바로 그 단적인 예다.
맹자는 군주의 이런 어진 마음이 구체적인 정치 현실로 표현될 때 바람직한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주장과 함께, 그 실천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을 통한 민생의 확립이 가장 기초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항산(恒産)을 갖지 못하고서는 항심(恒心)을 갖기 어렵다는 맹자의 말은, 민의 안정된 생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고 거꾸로 생활의 안정을 방해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무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통치자에 대한 경고이다.
그는 민생 안정을 위한 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는데, 첫째는 정전법(井田法)을 통한 토지 제도의 정비였다. “인정은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말로써 그는 정전법으로 자립적인 민생 안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지적했다.
둘째는 무의미한 침략 전쟁과 부역으로 백성이 농사를 지을 시간을 빼앗지 말 것과, 10분의 1의 가벼운 세금으로 생활의 터전을 확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는 고의성이 없거나 무지에 의해 저질러진 죄는 가볍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조건이 이루어지면 백성은 부모 처자를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송하는 데 유감이 없어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생의 안정은 왕도정치 실현의 터전일 뿐 완성은 아니다. 이 터전 위에 인간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중요한 여건이 된다. 인간다운 삶을 배제한 단순한 경제적 안정과 풍요는 때로 비인간적인 삶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효제(孝悌)로 대표되는 인간다운 삶의 이상이 제시되고, 그의 실현을 위한 교육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동양의 정치를 교화라고 하는 소이다. 우리 나라에서 중앙에 성균관과 지방에 향교·서원을 설치하고 ≪가례≫·≪소학≫·≪삼강행실도≫·≪오륜행실도≫ 등을 간행, 반포한 것도 모두 이런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실로 민생의 안정을 통해 삶의 터전을 정초시키고 인간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왕도정치의 구체적 실천 방법이라 하겠다.
한국 유학사의 흐름 속에서 왕도사상은 초기에는 공자의 덕치주의로 받아들여지는데, 대표적인 예가 고려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가 올린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다. 이것은 많은 부분 실제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기본적인 정신은 덕치주의와 왕도사상에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제14조의 “순수하고 전일한 군주의 덕과 사심이 없는 마음이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고 지치를 실현하는 근거가 된다.”는 말은 그대로 유학 정치 사상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흐름은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조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백성의 아픔을 잘 살펴 갖가지 시책으로 그것을 치유한 세종의 업적이나, 군주의 정심(正心)을 터전으로 삼대(三代)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 한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치는 모두 이 왕도사상의 한국적 구현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군주의 수덕(修德)을 통해 치인의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은 조선조 유학자의 이상이었다. 이황(李滉)의 ≪성학십도 聖學十圖≫나 이이(李珥)의 ≪성학집요 聖學輯要≫가 군주의 수덕의 터전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황의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나 이이의 <만언봉사 萬言封事>와 <동호문답 東湖問答> 등은 왕도정치 실현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황은 <무진육조소>에서 “위로는 하늘을 공경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펴, 덕을 닦고 정치를 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이는 ≪성학집요≫ 안민장(安民章)에서 애민(愛民)·외민(畏民)의 방도와 절용생재(節用生財)와 제민항산(制民恒産) 등을 통한 왕도정치의 구체적 실현을 역설하였다.
군주의 수덕, 더 나아가 인간의 순수한 심성 자체에서 왕도정치 실현의 가능 근거를 찾는 유학의 정치 사상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주의 절대적 전제권과 술수를 위주로 하는 법가적 통치술을 견제하고 바른 정치를 지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孟子)가 말했다.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사람과는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다.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사람과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말로 예의를 비난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것(自暴)이라고 하며, 내 몸이 인(仁)에 거하고 의(義)에 따르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를 버리는 것(自棄)이라고 한다.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올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 두고 살지 않고 바른 길을 버리고 행하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공연한 노력 (조장 : 助長 )
중국 송 (宋 )나라에 한 농부가 이었는데 자기논의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아 고민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말하였다 .
“ 오늘은 일을 너무 많이 했다 . 몸살날 것 같다 .”
가족들은 이상하여 무슨 일을 그렇게 많이 하셨는지 물었다 . 그는 말하기를 “ 들에 나아가 보니 우리 곡식들이 남의 것보다 훨씬 키가 작았다 . 그래서 하나하나 뽑아 당겨서 키가 커지도록 도와주었다 .” 라고 했다 . 이야기를 들은 아들이 들로 뛰어 갔지만 벌써 곡식은 말라죽었다 .
이 이야기는 『맹자 』에 나오는 내용이다 . 여기서 조장 (助長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야기 내용을 보면 억지로 키운다는 뜻이다
맹자는 인격을 닦는 방법으로 ‘ 억지로 바르게 하지 말 것 , 그러나 마음 속에서 목표를 잊지는 말 것 그리고 조장하지 말 것를 가르치고 있다 .
■ 일폭십한 (一曝十寒 )
현대의 언론은 우리의 눈과 귀 역할을 한다 . 지도자가 주변에 바른 정보를 주는 측근을 갖지 못하면 그릇된 판단을 하기 십상이다 .
이러한 상황을 맹자는 일폭십한 (一曝十寒 )이라고 비유했다 . 하루 동안 햇볕이 따스하게 비추는 것 ‘이 일폭 (一 曝 ) ’이고 열흘 동안 차갑게 얼려버리면 ‘십한 (十寒 )’이다 .
햇볕이 따뜻하게 하루를 비추어도 열흘 동안 차갑게 얼려버리면 잘 자라는 식물이라 해도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바른 말을 해도 열 사람이 이것을 덮어 버리면 왕은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왕국은 무너지게 던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만든 우화다 . 현대의 조직에서도 최고 관리자는 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잘 갖추어지지 않으면 결국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추기급인 (推己及人 )
춘추시대 어느 해에 제 (齊 )나라에 엄청난 눈이 내렸다 . 3 일간 밤낮으로 계속 내리고도 그칠 기미 (幾微 )가 없는 대설이었다 . 제나라 경공 (景公 )은 따뜻한 여우 가죽옷을 입고 창가에 기대여 창밖의 설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 경공은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져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 “ 계속하여 눈이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 이 아름다운 경치는 더욱 사람을 즐겁게 하겠지 ....
경공이 기분이 한참 좋을 때 재상 안영 (晏嬰 )이 와서 경공 옆에 서 있었다 . 창밖의 경치는 눈꽃이 편편이 바람에 날리고 대지는 온통 백설로 덮여 졌다. 경공이 말했다. “ 올해의 날씨는 정말 기이하군요 연일 3 일간 밤낮을 큰 눈이 내려 대지를 덮고 눈이 한자가 넘게 쌓였는데 아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군요 , 그런데 조금도 춥지를 않고 봄날처럼 따뜻하니 ........”
안영은 경공이 큰 여우가죽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 그 방안에 이글거리타고 있는 화로가 놓여 있었다 .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
“ 이 날씨가 정말 조금도 춥지 않으십니까 ?”
경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내가 살아온 해가 적지 않은데 날씨가 차고 더운지를 모른다고 보는가요 이 날씨는 정말 따뜻하지요 .” 안영은 아직 자기의 말 뜻을 못 알아 든는 것을 알고 직접적으로 설명하였다 .
“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옛날의 현명한 군주는 밥을 먹을 때는 , 굶주리는 사람을 생각하고 따뜻한 옷을 입을 때는 , 누군가 얼고 있지 않나 생각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때에는 누군가 수고하는 생활을 없나를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을 ‘추기급인 (推己及人)’ 이라 합니다. 즉 자신의 처지와 남의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임금께서는 어째서 조금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경공은 안영의 말을 듣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귀까지 붉어져서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하였다 .
‘추기급인 (推己及人)은 자기를 미루어서 남에게 이른다’ 공자나 맹자가 사랑의 실천 방법으로 제시한 유명한 말이다 .
『대학 』에서는 ‘혈구지도 (絜矩之道)’라고 표현하는데 그 설명을 보면 “윗사람에게 내가 당했을 때 싫었던 방법으로 아랫사람을 부리지 않고 , 아랫사람에게서 당했을 때 싫었던 방식으로 윗사람을 섬기지 않는다 . 앞 사람에게 당했을 때 싫었던 것으로 남의 앞에 서지 않으며 뒷사람에게 당했을 때 싫었던 것으로 남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 .
즉 자신은 털옷을 입고 난로를 피우고 있으니 당연히 춥지 않게않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생각이 미치지 않으면 현명한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
맹자는 이 난제에 대하여 백이 (伯夷 )와 유하혜 (柳下惠 )라는 두 인물을 본보기로 토론하였다 . 백이는 지나친 원칙주의자여서 결과로 마음이 좁다 (애: 隘)는 문제점을 가졌고 유하혜는 지나치게 관용한 결과로 일관 (一貫 )되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고 하면서 군자는 ‘애 (隘 ). 와 불공 (不恭 )’이 두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 즉 ‘애여불공 , 군자불유 (隘與不恭 , 君子不由) ’라는 이 행동지침은 현실에서는 제대로 실천하기 쉽지 않은 난제다 .
◎ 원칙과 관용사이
원칙과 관용사이의 이러한 딜레마는 인류역사의 여러 가지 난제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 그러므로 이 문제를 잘 처리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 조직과 사회기강에 중심이 되는 지도자들은 이 난제를 잘 처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무조건 일방적인 내로남불식의 처방은 국정운영 등 큰 문제에 대해서는 곤란하고 개인 간에 사소한 처신도 곤란하다
현대의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김영란 법에서 요구하는 이상으로 국민들은 더 엄격한 처신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마음속에 진정한 마음들
맹자는 군주가 신하를 예로서 대할 때 신하도 군주를 충성으로 대한다고 하였습니다 . 시대가 변하여 옛날의 군 .신 (君 .臣 )없어 졌거나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인정해 줄 때 그 사람의 능력을 자신이 알고 최대한 발휘하여 협력하는 심리로 바꾸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대가 변하여 예전의 군신 (君臣 )또는 반상심리도 사라줬지만 아직도 양반에 대한 사상 등이 남아 있다 . 현대 사회에서도 조직 내 구성원들을 상하관계를 초월하여 상하관계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능력을 인정해 줄 때 극대의 효율을 이끌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특정한 사람이나 특수한 단체에 이득이 되고 많은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실이 있어 이를 방치하거나 내 버려둘시 사회 정의차원의 기본 원칙을 저버린 다면 그 국가나 단체도 차츰 망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옛사람들이 인물로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았다.
큰일을 담당할 사람은 다 어려움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을 구하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데서 나왔다 . 맹자는 나라를 다슬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민생안정이라고 하고 백성들은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린다 하였다 . 그래서 실업자가 되면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하기 쉬운 것이 보통사람의 마음이라고 보았다 . 즉 항산 (恒産 )이 없으면 항심 (恒心 )이 없다고 하였다.
아울러 맹자는 인과 의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고 뜻이 굳어야 지도자의 자격을 갖는 다는 생각이다 . 그래서 『논어 』에서도 군자는 배불리 먹기를 구하지 않고 편안히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즉 선비들은 물질적인 어려움을 정신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옛사람들이 인물로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관찰토록 하며 보았다.
아울러 선비는 의리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고 뜻이 굳어야 지도자의 자격을 갖는 다는 생각이다 .
않고 넌지시 감추고는 밝히지 않으며 막히고 간략해서 알맞은 해법은 없는데 그럼에도 언사를 꾸미고는 그런 주장을 아주 공경하여 말하길
“이야 말로 참으로 앞선 군자의 말이로다”한다 . 자사가 앞서 주장하고 맹자가 그에 화답하였다.
오늘날 어리석고 헤매며 어두은 유자들은 그것이 그릇된 줄 알지 못하고 마침내 받아드려 전하면서 ‘중니 ’와 ‘자사 ’이로 말미암아 후세에 널리 일컬어진다 .
원칙과 관용사이의 이러한 딜레마는 인류역사의 여러 가지 난제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 그러므로 이 문제를 잘 처리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
조직과 사회기강에 중심이 되는 지도자들은 이 난제를 잘 처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 무조건 일방적인 내로남불식의 처방은 국정운영 등 큰 문제에 대해서는 곤란하고 개인 간에 사소한 처신도 곤란하다
현대의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김영란 법에서 요구하는 이상으로 국민들은 더 엄격한 처신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단칠정 (四端七情)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은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칠정은 〈예기〉 예운 편에 나오는 희·노·애·구·애·오·욕 등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 도입된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사단과 칠정을 이기론으로 설명할 때 각각을 이와 기에 분속시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그 관계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의 사단칠정논쟁이 벌어졌다. 이황과 기대성의 논쟁과 이이와 윤흠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황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리론이라 하고, 이이를 지지하는 견해를 주기론이라 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흐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맹자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는데, 각각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된다.
칠정은 〈예기 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등 사람이 가진 7가지 감정을 말한다.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유교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고 또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세계관을 수립하려 했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 문제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성리학에서는 마음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은 상태,
즉 심의 미발(未發)을 성이라 하고, 마음이 사물에 이미 감촉된 상태 즉 심의 이발(已發)을 정이라 한다. 결국 미발의 성이 발한 것이 정이며, 사단과 칠정 모두 정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주희는 사단을 '이지발'(理之發)로, 칠정은 '기지발'(氣之發)로 설명하여 양자를 구분하기도 했으나, 사단과 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 도입된 초기부터 16세기까지 사단과 칠정을 이기론으로 설명할 때 각각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단칠정논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정지운(鄭之雲 : 1509~61)의 〈천명도 天命圖〉에서도 사단의 발은 순리이며 칠정의 발은 기가 겸한 것이라고 했다. 이황(李滉 : 1501~70)도 역시 이 〈천명도〉를 수정하면서, 사단은 이에서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 혹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 하여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1559년(명종 14)에 기대승(奇大升 : 1527~72)이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이황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8년에 걸친 사단칠정논쟁이 이루어졌다.
사단칠정의 이기 분속 문제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커다란 철학적 문제로 대두하게 된 배경에는 이 시기 조선 성리학에 이제까지의 이기이원론과는 다른 이기일원의 이기론이 성립하기 시작했다는 사정이 있었다.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이기이원론은 이를 기의 존재 근거로까지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키며 이기일원론은 이를 기의 조리(條理)로만 인정하는 견해를 가리킨다.
이러한 차이가 사단칠정론에서는 기발과 함께 이발을 인정하는 견해와 기발만을 인정하는 견해로 나타난다. 이황은 이기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 분속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기일원론적인 견해에 바탕을 두고 사단과 칠정을 설명함으로써 사단과 칠정을 명확하게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이황은 이기의 관계가 비록 밀접해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이가 발함에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之)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之)이라 해도, 사단은 그것이 유래하는 바가 마음 속에 있는 본연지성이요, 칠정은 그 유래하는 바가 기질지성이며, 또 사단은 기가 따르는 것이지만 주로 하여 말하는 것(所主而言)이 이에 있고 칠정은 그것이 기에 있기 때문에 각각을 '이지발'과 '기지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사단칠정 문제에 대한 이황의 이러한 견해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이라 불린다.
이기호발설에 대해 기대승과 그후의 이이(李珥 : 1536~84)는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질지성 속에 갖추어 있는 이가 기를 타고 발한다는 점에서 그 유래하는 바가 같으며, 다만 발해서 순선한 것만을 가리켜 사단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황의 견해 가운데에서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만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사단과 칠정이 유래하는 바를 모두 설명했으며, 칠정 이외에 따로 사단의 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사단이 포함되는 것이라고 했다.
기대승과 이이의 이러한 견해는 이기겸발설(理氣兼發設)로 불려진다. 1572년(선조 5)에 성혼(成渾 : 1535~98)은 사람의 마음을 형기(刑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는 인심(人心)과 성명(性命)의 정리에 근원하는 도심(道心)으로 구분할 수 있듯이 성이 발한 정도 사단과 칠정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사단은 이에서 발한 것으로 칠정은 기에서 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성혼과 이이 사이에 다시 사단칠정논쟁이 벌어졌다.
성혼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이이는 인심·도심의 구분과 사단칠정의 구분은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단칠정을 각각 이기에 분속하는 이황과 성혼의 견해를 비판했다. 16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호발설과 겸발설로 정리된 사단칠정의 이기론적 해석은 그후에도 우리나라 성리학의 중요한 이론적 탐구 대상으로 남아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고, 성리학 이해에 깊이를 더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 이황의 호발설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리론(主理論)이라 하고, 이이의 겸발설을 지지하는 견해를 주기론 (主氣論)이라 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의 양대 흐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 저서『맹자』를 사서(四書)에 편입시키고 맹자를 아성(亞聖)으로 올려놓은 주자는 누구인가?
송나라의 유학자로 아버지 주송(朱松)의 부임지였던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그와 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희(熹)이며,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이다. 다섯 살에 《효경》을 배웠으며, 사색을 즐겨 하늘 저 끝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주자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존칭으로, 그는 송 대의 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시켰다. 그의 학설은 “공경을 기본으로 삼아 그 근본을 확립하고,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경지에 이른 후,우주의 구성 원리를 형이상학의 ‘이’와 형이하학의 ‘기’로 보았으며, 훈고학의 사상적 한계를 벗어나 우주론적인 체계를 정립했다.
그의 유학은 주자학이라고 불리며, 후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정착되었다.
자신의 입장에 대입하여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라는 개념이 중심으로, 명·청 시대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의 사상과 저술, 교육론은 조정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공자와 맹자 다음으로 숭배되었고, 풍부한 독서와 세밀한 분석을 중시하는 그의 학풍은 후세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의 주변 국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주자는 아버지 주송(朱松)의 부임지였던 당시 대과 급제자들의 연령은 평균 서른다섯 살이었으나, 그는 열여덟 살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1151년에는 이부(吏部)의 임관시험에도 합격하여 천주(泉州) 동안(同安) 지방의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임지로 향하기 전 유학자 이동(李侗)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1153년에야 비로소 부임했다. 성리학의 정통 후계자였던 이동에게서의 수학으로 그는 마침내 주돈이(周敦頣), 정호(程顥), 정이(程頣) 등의 사상을 이어받게 되었다.
1162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치국에 대한 방책을 논의할 것을 명했다.
주자는 상서를 올려 문학을 배척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기 위해 지식을 닦는 일)와 성의정심(誠意正心,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을 주장하며 이학(理學)으로서 황제를 보필하고자 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1163년 그는 다시 격물치지를 진언했으며, 금나라가 침입하여 조정이 주전과 주화의 두 파로 나뉘자 주화의 폐단을 들면서 주전의 입장을 강력히 밝혔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가열되는 파당 정치에 염증을 느껴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주자는 정이의 “천지간에 존재하는 이(理)는 유일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만물에 존재한다.”라는 사상을 공부했으며, 장식(張栻)과 교제하면서 심성론(心性論)을 확립했고, 여조겸(呂祖謙)과 교류하면서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주장을 담은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했다.
그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육상산(陸象山)을 만나 학문을 통해 만물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주자는 민생을 걱정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1181년 상평차온공사가 되었을 때는 마을에 곡식창고인 사창을 설치하여 춘궁기에 구제미를 대여해 줌으로써 쌀값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무사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건의했다. 또한 장주(漳州)와 담주(潭州)의 지주를 지낼 때는 조세를 감면하고, 풍속을 개선하고, 학교를 세웠다.
주자는 공자 이후 경전에 주석만을 다는 훈고학적 유학의 한계를 탈피하고 개인의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통치의 기반이 되는 학문으로 재탄생시켰다. 한편 그는 북송 시대 주돈이, 정호 정이의 사상을 정리하였다.
다음검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