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들과 유주막
충주시 칠금동 찜질방 충주스파렉스를 찾아가느라 꽤 애먹었다.
경제적으로 사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라던가.
그러나 날 샌 아침, 충주 일원의 상황은 간밤의 노고를 여지없이
비웃고 있었다.
어제 아침 신덕저수지 때문에 고생했다면 오늘의 주범은 충주호.
신덕지에 비할 바 아니게 거대한 호수가 뿜어내놓은 새벽 안개는
가히 카오스(chaos) 충주를 만들었다.
소리만 있을 뿐 실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유령의 도시같다 할까.
아무려면 시청각장애인에 비할 소냐.
방향은 컴퍼스(compass)로, 현재 위치는 버스정류장에서 각각
확인하며 대로를 따라 걷는 것 외엔 대안이 없었다.
인도와 좁으나마 갓길(路肩)이 있어서 어제에 비해 다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단월동 충민공 임경업장군의 충렬사다.
그리고는 大小人員下馬碑 앞에서 다소 분간될 때까지 대기했다.

충렬사 대소인원하마비(상)와 충렬서원(하)
여기까지 어렵잖게 올 수 있었던 것은 60년대 이래 무던히 자주
수안보온천과 조령 일대를 들락거리며 변화를 거듭해 온 길들에
익혀져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충렬사 입구 골목의 충렬서원 재실이 이른 아침부터 바쁜 것으로
보아 오늘 제사가 있나.
한가로운 여정이라면 어정버정 머물다 한 상 받 수도 있겠다.

주전들 ~ 유주막 일대의 도로(변하고 변해 3번국도가 되었으나 신
3번국도의 등장으로 옛길로 전락하고 말았다)
샛길 따라 단월 옛길로 들어 얼마쯤 갔다.
농로(農老)가 자기 새참으로 영남대로 길손들과 즐겼다는 막걸리
스탠드 바(stand bar) '주전들'(酒田) 자리가 어쩌면 여기 어디쯤
이리라 가늠해 보면서.
사실은,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충주땅에 이런 후덕한 노옹이
살았다는 게 신기한 일일 수 있다.
殺氣衝天白日無光<중약>亦少富厚者而人民주衆常多口說浮薄...
(살기가 하늘을 찌르고 해가 빛기가 없다<중약>부유 후덕한 자가
적은데다 사람은 많아 늘 구설이 많고 경박하다...)
(지금이 아니고 당시의 충주읍에 국한한 기술이다)
한데, 드넓은 달천벌이 주전들인 줄로 아는 영남대로 답사자도
있으나 상단월의 이 작은 들과 달천의 평야는 전혀 다르다.
마치 가랑비를 맞은 듯 옷이 후줄근해졌고 약먹고 안개 걷히기도
기다릴 겸해서 식당에 들어갔다.
충주 시내에서 빠져나온 길과 달천교에서 충렬사 앞을 거쳐 달려
온 3번국도가 수안보로 가기 위해 합류하는 유주막 지역이다.
내 몰골이 안쓰러웠던가.
여인이 난방 스위치를 올리고 더운 물을 내왔다.
따끈한 북어국과 반찬에 성의가 엿보였다.
대동지지에는 달천에서 10리 단월역(丹月驛)에 유주막(流注幕)
이라는 이름의 점(店)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유주막의 한자가 有酒幕, 柳酒幕 등 혼란스럽다.
역촌이니까 당연히 주막이 있었을 것(有酒幕)이다.
이 지역을 뻔질나게 드나든 유씨 일행으로 인해 주막이 생겼다
(柳酒幕)는 말도 일리가 있다.
이조 14대왕 선조(宣祖)와 사돈간이며 예조참판을 지낸 유영길
(柳永吉)이 이류면 팔봉으로 낙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영의정 유영경(柳永慶) 등이 자주 왕래했다니까.
그렇다면 이 때보다 2세기반(250년)여나 뒤인 고산자는 왜 엉뚱
하게도 流注幕이라 했을까.
그건, 그에게 가서 물어봐야 한다?
온데간데 없는 이심바위
유주막로를 걷다가 달려오는 차를 세웠다.
달천변(邊)이 하도 변해서 확인하려고 그랬는데 출근길인 듯한
스포티(sporty) 이미지의 젊은 여인은 친절하고 매우 자상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길 걷기를 좋아한단다.
그리고 되레 내게 묻기를 계속했다.
차를 세워 미안해 하는 늙은 이를 편하게 해주려 함이었을까.
주말이라면 하루 동행할 수도 있을 텐데 아쉽다고도 했다.
그녀를 보낸 후 '이심바위'(대망암:이무기바위)를 찾아보았다.
수안보에 가고 올 때마다 일행에게 설명해 주기를 빼먹지 않았던
거대한 판바위다.
그러나 그 바위가 안타깝게도 온데 간데 없지 않은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 장군은 젊은 시절, 매일 신새벽에 이 일대
절벽을 올랐다가 내려와 달천강 물을 표주박으로 떠마시곤 했다.
어느 날, 물을 떠마시려 하는데 갑자기 강 속의 커다란 이무기 한
마리가 방해하므로 장군이 대노하여 곧 그 이무기의 꼬리를 잡아
이 바위에 패대기쳤다.
부딪혀 죽은 이무기의 자국이라고 전해 오는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었는데 길 확장때에 헐렸단다.
요새 무리를 한 탓인지 다리가 말을 듣지 않으려 했다.
쉬는 빈도가 많아졌다.
따라서 수심(愁心)도 늘어나고 있다.
경쟁이 붙었거나 기록을 다투는 경주도 아닌데 조급해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겨우 3분의 1정도 진행했을 뿐인데 벌써 조절이 필요한가.
여의치 않으면 하루 정도 푹 쉬고 갈 요량으로 넉넉하게 잡아논
일정이 아니던가.
오늘은 여느 날보다 짧게 잡았으니 쉬엄쉬엄 가면 될 것이고.
신 3번국도 덕에 구도로가 한가로웠다.
비록 주저앉기를 반복하고 거북이 걸음일 망정 전진은 계속되어
살미면 소재지에 도착했다.
면 복지관 앞마당이 부산했다.
남자들은 차일치느라, 여인들은 음식 만드느라 모두 분주했다.
마지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너나 없이 신바람난 움직임이었다.
얼핏 보아도 큰 잔치를 준비하는 중인 듯 했다.
일심 동체로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들이 보기에도 좋았다.
나부끼는 현수막에 의하면 내일 면주최 경로잔치를 벌인다.
내 일정이 하루만 지연되었더라면 한 상 잘 받을 뻔 했다.

살미면 경로잔치 준비중
그런데 길 건너 가게의 아낙은 왜 심통이 났을까.
우유 사마시려 들렸다가 잔치준비에 왜 거들지 않느냐고 한마디
했더니 삐딱한 대답이 나왔다.
시골 마을에서 면단위 잔치가 별거 아니라면 어떤 게 큰 잔치?
괜히 수선을 피우고 있는 거라고?
그 여인 곱상과 달리 심지는 떡판일세.
메로나 하나 더 먹을까 하던 생각이 싹 달아나버렸다.
낙엽,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는 것
한가한 시골길을 쓸고 가는 낙엽이 늙은 길손으로 하여금 가을을
타게 하는가.
시몽,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의(Remy de Gourmont) 시 <낙엽>을 중얼거려 보며 바람
타고 달아나는 그 놈들을 밟아갔다.
긍정적으로 보면 자연의 오묘한 섭리는 참으로 신비스럽다.
낙엽은 단지 그 신비스런 섭리에 의한 대사물(代謝物)일 뿐이다.
그러나 부정적 시각에서 보면 긴 여름 혹독하게 부려먹고는 월동
식량의 낭비를 막기 위해 비정하게 잘려진 몸의 일부다.
그래서 구르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이라 했다.
여기까지 오기 직전의 형태가 단풍이다.
동물의 마지막 음성이 처량한 것 처럼 입새들의 최후의 몸부림은
붉디 붉은 단풍으로 표현된다.


살미의 구3번국도(상)와 범죄없는 마을의 410년생 느티나무(하)
그런데도 인간은 왜 저 놈에 의해 일희 일비할까.
자기 잔명을 걸고 씨름한다(O. Henry의 마지막 잎새)
단풍이 몰고 다니는 돈 끌어모으느라 정신 없게 바쁘다.
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애타게 불러대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닌 한 늙은 이는 충북 충주시 살미면 설운2리 점말,
'범죄없는마을'의 4백여살 늙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런 쓰잘 데
없는 상념으로 무료를 달래고 있다.
죄도, 죄인도 없는 마을이라 그런가 마음도 천하태평으로.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신 벗고, 양말도 벗고, 배낭 깔고 벌렁 누웠다.
두 발, 두 다리 좀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였다.
이 놈들이야 말로 주인 잘못 만나 불쌍토록 고생 많이 하고 있다.
양 어깨도 비슷한 운명이라 하겠으나 종종 편할 때도 있건만, 온
종일 양말과 신발에 옥죄인 채 중노동을 해야 한다.
척추 문제가 심각함에도 이처럼 나그네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다소곳이 협조적인 덕이다.
그래서 산야와 길 불문하고 그들에게만은 기회가 날 때마다 아주
특별한 배려를 한다.
온갖 신소재 제품을 다 거부해도 신발만은 예외로 하는 것.
발이 편하도록 넉넉해야 하는 것.
걸으면서도 간단 없이 발가락 운동을 해주는 것.
걷는 시간 외에는 양말, 신발 등 온갖 속박으로부터 즉각 해방을
주는 것 등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서 속죄(?)한다 할까.
다다익선의 돌고개
동북간으로 흐르는 중산천이 마을 뒤를 돌고, 석문천이 서쪽으로
싸고 돌아 신원과의 사이에서 합수해 마을 주위에 물이 모인다고
'물돌이', '무두리'라 부르게 되었단다.
월악, 수산, 구단양으로 이어지는 36번국도를 떼어낸 3번국도를
따라 갈마고개 넘어 도착한 수회리(水回)를 말한다.
지금은 적보산 자락에 중앙경찰학교가 있지만 예전엔 장이 섰고
원과 창고가 있던 큰 마을이었다고.
행정구역 개편이 여기라고 제외되었겠는가.
바뀌고 바뀌어 상모면(上芼)이더니 지금은 수안보면이다.


수회마을 자랑비(상)와 상모양조장(하)
구 도로변 상모양조장의 술익는 내음이 길손의 걸음을 멎게 했다.
이번엔 해남 옥천양조장에서의 미련짓을 반복하지 않았다. (옛길
삼남대로 단상 3,4번 참조)
내 기척의 뜻을 단정한 중년녀가 금방 알아차렸나.
나같은 걸객(?)을 위해 준비해 놓은 후한 인심의 술독인가.
독 안의 막걸리를 큰 사발로 거푸 퍼마시도록 했으니까.
술의 효험은 역시 공복상태라야 제대로 발휘되는가.
짜릿한 기분에 수안보(水安堡)가 단숨 거리였다.
온천지구에 도착했으나 여기에는 찜질방이 없다.
그럼에도,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통비닐과 취사도구 등을 우체국
택배로 본가입납(本家入納)처리해 버렸다.
부산까지 가는 동안 야영과 취사를 일체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배낭은 가벼워졌으나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오후 3시 남짓한 시각.
조령삼관문지기 황병주가 그 곳에 살아있다면(백두대간 16번 글
참조) 아마 불문곡직 단숨에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비명에 이승을 하직한 후의 새재는 잠시 머물기마저
싫은 곳이 되고 말았다.


수안보온천碑(상)와 돌고개(하)
노상벤지에 앉아 어제 구입한 인절미 남은 것으로 끼니를 때우며
골똘하는데 광고판에 걸린 현수막<문강유황원탕24시찜질>이 확
어필(appeal)했다.
전화로 위치를 확인한 후 수회리까지는 버스편으로 되돌아갔다.
수회리 표석 앞에서 방향을 서북으로 튼 후 묻기를 거듭하며 다시
살미땅 문강으로 가는 고개를 넘었다.
유주막과 관련이 있는 돌고개다.
이류면 팔봉으로 낙향한 월봉 유길영의 궁핍한 처지가 영의정인
아우 유경영은 늘 맘에 걸렸다.
그래서 약간의 식량과 필목 등을 실어 보냈다.
그러나 월봉은 그 짐들을 그대로 되가져가도록 명했다.
월봉의 청렴, 강직한 성품을 아는 관리들은 딴 방도가 없으므로
애써 넘었던 문강리 산의 이 고개를 도로 넘어야 했다.
"이 무거운 짐을 싣고 이 고개를 도로 넘어야 하다니" 하면서.
이 푸념을 들은 나무꾼들에 의해 '도로고개'가 되었고 언제부턴가
'돌고개'로 줄여졌다는 것.
아우가 주는 것들이니까 받아쓸 법 한데도 무위 칩거하는 몸으로
국록을 축낼 수 없다는 형이다.
비록 만인지상의 영상일지라도 녹봉을 사사로이 써서는 안된다며
거절한 유길영이다.
구실이야 어떠하던 주는 족족 덥석덥석 받아먹거나(受賂) 자리를
기화로 닥치는 대로 먹다(致富) 체하는(綻露)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고생은(獄苦) 물론 패가망신 당하기 일쑤인 세상에 이같은
'돌고개'야 말로 다다익선 아니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