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사찰 해우소
1. 해우소의 어원
2. 해우소의 역사
1) 불교의 해우소
2) 불국사 노둣돌
3) 옛 해우소
3. 해우소 문화
1) 해우소는 수행공간
2) 사미율의
3) 화두, 그리고 시
4. 해우소 건축
1) 위치
2) 형태
3) 구조
5. 해우소 관리
1) 해우소의 생태성
2) 해우소 관리
6. 전통해우소가 사라지는 이유
7. 그 밖의 해우소들
8. 나가는 말
제1부 똥오줌의 잡학
1. 똥의 사회학
똥은 인간의 배설물로, 만들어지는 생리학적 과정이나 색깔이나 분량이나 냄새나 촉감이나 느낌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또 사회에 따라 환영을 받기도 하고 푸대접을 받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농경시대에서 똥오줌은 질 좋은 거름으로 재화가치를 갖고 있었다. <농사직설>에는 '올해 못자리에 똥재를 주되, 다년간 못자리로 써온 논에는 다섯 마지기에 석섬을, 처음 만든 데에는 넉섬을 주는 것이 적당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재[灰]에 넣어 말린 똥재는 땅힘을 키워주는 고급 거름으로 돈과 거래되었다. 상등품은 한 섬에 30전, 중등품은 20전, 하등품을 10전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의 근교의 농민들은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시내에 들어와 돈을 내고 똥을 사갔다. 가정에서는 똥오줌을 모았다가 농사꾼들에게 돈을 받고 파는 예가 허다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함부로 똥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재를 버리면 곤장 30대요, 똥을 버리면 곤장 50대였다. '밥은 밖에서 먹어도 똥은 집에서 눈다'는 속담은 똥이 농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가를 보여주고, 옛 사람들이 똥거름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꿈에 똥오줌을 잃으면 재물에 손해를 본다 했고, 꿈에 똥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면 재물이 생기며, 꿈에 똥이 땅에 가득하면 부귀를 누리며, 꿈에 뒷간의 똥이 넘치면 운수가 좋다고도 했다.
그러다가 도시인구의 팽창으로 똥값이 떨어지면서 농민들은 공짜로 똥을 가져갔다. 나중에는 돈을 받고 똥을 쳐주게 되면서 아예 분뇨차를 끌고다니며 똥장사를 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시내로 나가 분뇨를 쳐주는 댓가로 도시인들에게 돈을 받고, 그것을 근교농촌으로 싣고 가서 농민들에게 돈을 받고 똥을 파는 일거양득의 똥거름 장사였다. 당시에는 장비가 없어서 수거차까지 골목골목 다니며 일일이 똥지게로 퍼다날렸다.
그러나, 농업이 점차 쇠퇴해지고 유기농에서 화학농으로 바뀌면서 똥은 똥값도 받지 못하는 오물이 되었다. 덩달아 농사 짓는 사람값도 헐값으로 매도되었다.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 봐라, / 공부 안하면 어떻게 되나 / 저렇게 된다 / 똥지게 진다' (심호택 작 '똥지게' 전문)
현대인들은 무엇이든 '만드는' 기술에는 뛰어나지만, 쓰레기를 줄이거나 '없애는' 기술에는 속수무책이다. 기껏해야 땅에 묻거나 태우는 정도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먹고 싸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먹는 일에는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지만, 자기들이 싼 배설물을 처리하는 데에는 '잼병'이다. 기껏해야 물에 섞어서 강이나 바다에 버리는 것이 고작이다.
오늘날의 수세식 화장실은 물자원 낭비와 경제적 낭비, 그리고 수질 오염이 가장 큰 문제이다. 수세식 화장실은 분뇨를 처리하는 데 분뇨량의 50배 이상의 물을 소비한다. 엄청한 물자원 낭비요 경제적 손실이다. 물로 씻어낸 분뇨는 발효과정도 거치지 않고 물에 희석된 채 강이나 바다로 들어가므로 수질을 크게 떨어뜨린다. 뿐만 아니라 음양오행으로 보면 똥은 토성이므로 수세식의 수성과는 상극이다. 우리의 전통뒷간이나 사찰의 해우소는 그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생태적 뒷간이다.
2. 똥과 이름
똥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더럽고, 추하고, 천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자식이 귀한 집이나 명문대가의 집안에서 아들을 얻을을 때 일부러 천한 이름을 지어 불렀다. 그래야 하늘의 시샘을 받지 않는다는 뜻에서다. 그래서 '서당개' '똥강생이' '개똥'이니 하고 불렀다.
신라 화랑 사다함의 아버지 '구리지'는 부모가 측간에서 관계를 해서 낳았다고 하여 '구린내 나는 아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조선말 고종황제의 어릴 때 아명(兒名)이 '개똥'이었고, 임진왜란 때의 대첩을 거둔 김시민 장군의 아들 이름도 '김치였다.
조선시대 예종이 열셋의 어린 나이에 장가를 들어 왕자를 낳았다. 어머니인 윤대비가 그 소식을 듣고 하도 기가 차서 '그게 사람이겠냐. 똥이겠지'하였다. 그 말이 씨가 되어 왕자의 이름이 '똥'이 되었다.
조선시대 문서에 보면 평민이나 노비 중 여자 이름으로 '분실이(糞實伊)'가 자주 등장한다. '분례(糞禮)'도 똥에서 따온 이름이다.
3. 똥오줌의 민간요법
똥은 약이다. 똥 안에는 병을 다스리는 다양한 성분이 들어 있다. 특히 사람똥은 타박상이 오래 되어서 시퍼렇다 못해 누렇게 변할 때 바른다. 언젠가 한 사람이 약에 쓰려고 시골에 가서 똥물을 병에 담아오다가 버스가 흔들리자 병 안에서 가스가 생겨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떨어져서 다친 사람이 마시고자 했다고 한다.
어디 사람똥 뿐일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똥은 약이었다. 개똥은 굽거나 쪄서 허리를 다치거나 타박상을 입은 곳에 참기름을 개서 발랐다. 개똥을 굽는 것은 살균을 하기 위함이었고, 참기름을 개는 것은 상처에 붙이기 좋게 함이었다.
김동리의 단편 <화랑의 후예>에 보면, 천하의 명약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대갓집에서도 못 구해서 쩔쩔매는' 그 명약은 "거, 쇠똥 위에 개똥 눈 겐데, 아주, 며, 며,명약이유"라는 대목이 나온다.
오줌도 약이다. 오줌은 민간요법에서는 혈액을 보강해주고 맑게 해주는 약효가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소년소녀 오줌[童尿]을 받아서 폐병이나 성병 또는 피부병 치료약으로 썼다. 궁중의 내의원(內醫院)에서는 동편군(童便軍)이라하여 오줌을 공급해주는 아이들까지 두고 있었다. 소녀의 동뇨에는 회춘의 피톤치드가 들어있기에 조선조 사림의 대부였던 송시열은 동뇨를 상시로 복용했다고 한다.
또, 동뇨는 기우에도 영험이 있다고 해서 가뭄이 심할 때면 동편군들을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館)으로 모셔다가(?) 잠지를 내놓고 하늘을 향해 힘차게 오줌을 누게 하였다. 이렇게 하늘에다 욕을 하면 하늘이 화가 나서 비를 쏟아붓는다고 했다.
그리고, 잠잘 때 이를 심하게 가는 사람에게는 뒤를 닦은 밑씻개가 약이라고 했다. 그것을 몰래 입에 물려 주면 이를 갈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다시는 이를 갈지 못할 특효약이다.
4. 똥은 먹거리
음식물이 위장에서 완전 100% 분해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 소화된 똥은 가축들에게 좋은 먹거리가 된다. 돼지와 개는 사람똥을 먹는 대표적 가축이다. 그들은 불완전하게 소화된 사람의 똥을 완전 분해해준다.
제주도에는 현무암 돌덩이를 쌓아 만든 돗통시가 있다. 통시 아래 공간에 우리를 만들고 돼지를 키운다. 높은 뒷간에 올라 대변을 보면 그 아래로 돼지가 와서 똥을 먹는다. 물론, 똥은 그들의 주식이 아니라 간식이다.(사진 : 제주도 돗통시)
이런 돗통시는 지리산 주변의 산청과 함양 등 여러 마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바다 건너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똥으로 돼지를 키우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남방문화 같다.
이렇게 기른 토종돼지를 소위 '똥돼지'라고 한다. 차마 '똥'자를 붙이기 뭣해서 대개는 '흙돼지'라고 우회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방질이 비교적 적고 육질이 부드럽다고 한다.
요즘은 이농현상으로 식구가 줄어들어서 똥의 생산량이 집집마다 급감해서 똥돼지 키우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똥을 구해서 퍼다먹일 수도 없고.... 그래서 예전과 같은 진짜 똥돼지가 귀해졌다. 그런데도, 흙돼지 식당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으니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뒷간과 돼지우리는 궁합이 잘 맞는다. 사람똥은 쉬(구더기)가 생기지만, 돼지똥은 쉬가 생기지 않는다. 돼지똥은 냄새도 훨씬 덜 난다. 그리고, 가축을 통해 완전분해된 똥은 좋은 거름이 된다. 사람똥을 그냥 밭에다 뿌리면 땅의 산성화를 막지 못하지만, 돼지똥을 이용하면 땅의 산성화를 막을 수 있다.
사람똥을 먹이지는 않지만, 울릉도 나리분지의 원주민 뒷간에도 옆에 돼지우리를 두고 있고, 멀리 백두산이나 연변지역에서도 뒷간이 돼지우리와 함께 붙어있다.
우리 속담에 '개가 똥을 마다 한다' '뒷간에 앉아 개 부른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으로도 똥이 개의 먹거리였음은 분명해진다. 지금도 시골에 서는 아이들이 마당에 똥을 싸놓으면 개를 끌고와서 똥을 먹인다. 그래서 황구를 '똥개'라고 불렀다.
'개돼지보다 못한 놈'이라는 속담은 개와 돼지가 똥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그를 비하한 데서 나온 속담이지만, 어디 개·돼지 뿐이겠는가. 마당에 똥을 싸놓으면 닭도 쪼아먹고 오리도 집어먹는다.
5. 똥은 거름
똥을 먹은 가축은 그것을 다시 2차 분해하여 양질의 거름으로 만들어 준다. 사람똥, 돼지똥, 개똥, 쇠똥, 말똥... 이것들을 발효시켜 논밭에 뿌리면 농작물들이 그것을 먹고 자란다. 사람들은 그 농작물을 거두어 먹고는 다시 똥을 내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가축→농작물→사람...'라는 자연생태계의 대순환을 본다. 속담에 '뒷간에서 밥 찾는다'는 말은 사실이 그렇다. 그러니 밥과 똥은 불이(不二)가 아니겠는가. '자기 똥 3년만 못 먹으면 죽는다'는 옛 말도 자연에게서 얻은 것을 자연에게 되돌려주라는 생태적인 가르침이요 약속이다.
전남 곡성의 어느 시골집에서는 왕겨를 수북히 놓아두고 삽으로 퍼서 똥을 덮도록 하고 있다. 똥이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거의 나질 않는다. 나중에는 그것을 퍼다가 거름으로 쓴다.
산청 남사마을의 어느 집 화장실은 화장실에서 나오는 물을 한데 고이게하여 그 물로 채마를 가꾸고 있다. 똥이 오줌을 만나서 만들어낸 영양가 높은 엑기스라고나 할까.
6. 똥꿈과 똥속담
똥은 더러운 것이지만, 재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똥의 누런 색깔은 황금의 색깔과 같기 때문이다.
노름판에서 돈을 따는 사람을 두고 '똥 주물렀다가 왔나?'라고 시샘하기도 했다. 꿈에 똥을 보면 돈이 생긴다고 해서 똥 벼락은 돈벼락으로 해몽했다. 옷에 똥이 묻으면 재물이 생기며, 손으로 똥을 만지면 노름을 해서 돈을 딸 꿈이요, 뒷간에 똥이 넘치면 운수가 대통할 꿈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나쁜 꿈으로 해몽되기도 한다. 똥장군을 지고 들어오면 좋지만, 그것을 지고 집을 나가면 손재수가 생긴다고 했다. 자신의 똥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면 손재수(損財數)가 생기고, 솥에 똥이 묻으면 망신이나 구설수에 휘말린다.
우리 속담에는 똥과 관련된 속담이 유난히도 많다. '똥 누고 밑 안 씻은 것 같다'는 뒷마무리가 시원치 않을 때 쓰는 말이다. '똥 마려운 계집 국거리 썰듯'이라는 말은 일을 함부로 아무렇게나 건성으로 한다는 뜻이고, '고양이 똥이 제일 구리다'는 말은 간사한 인간이 가장 더럽다는 뜻이다.
그밖에- '똥누러 갈 때 마음 다르고, 똥누고 나올 적 마음 다르다' '똥 먹은 개는 안 들키고 재 먹은 개는 들킨다' '똥은 칠수록 튄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먹은 놈이 똥 눈다' '무섭지는 않아도 똥 쌌다는 격' '밥 팔아 똥 사 먹겠다' '뒷간 들어갈 때 바쁘지, 나올 때 바쁠까' '방귀 자라 똥 된다' '방귀 잦으면 똥 싼다' '방(房) 보고 똥 싼다' '새 바지에 똥 싼다' '빨리 먹은 콩밥 똥 눌 때 보자 한다'
제2부 뒷간에 대한 이해
1. 재미있는 뒷간이름
1) 뒷간
이 말은 똥을 '뒤'라고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즉, 뒷간은 뒤를 보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뒤깐'은 '뒤+ㅅ+간'이 음운변화한 말이다.
2) 통시
이 명칭도 뒷간에서 돼지를 키우던 옛 풍속에서 비롯된 말이다. '통새'는 경상도 동부지역의 사투리이다. '시(豕)'는 곧 돼지를 기리키는 말이다.
3) 돗통시
뒷간을 중층으로 짓고 그 아래 돼지를 키우던 풍습에서 생겨난 말이다. 또는 '돝통시'라고도 부른다. '돝'은 돼지를 가리키는 옛 말이다. 지금도 제주도와 남원지방에 남아있다.
4) 헛간
헛간은 본래 물건을 넣어두는, 문짝 없는 광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거기에 재[灰]를 넣어두고 용변을 보면서 뒷간 기능을 하게 되었다. '잿간' '잿막'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다.
5) 측간(厠間)
'厠'은 '칙' 또는 '치'로도 읽는다. 8세기 초에 신라인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에도 나오는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 사용된 말이 분명하다. 측(厠)' '은 '바위 아래의 사람이 기거하는 굴'을 가리키는 말로서, 건축에서는 지붕을 의미한다. 그리고, '厠'은 '평상(平床)의 가장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뒷간은 '지붕이 있는 평상 위에 올라앉아 뒤를 보는 곳'으로 해석된다.
6) 혼( )
입 구(口)자 안에 돼지 '시(豕)'자가 들어가 있는 꼴이다. 가축 '환'자로도 읽는 것을 보아 그 먼 옛날에는 돼지 외에도 다른 가축들도 함께 길렀던 모양이다. 아니, 가축우리를 사람들이 뒷간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7) 청(청
원래는 울타리 안[口] 안에 '청(淸)'자가 들어간 말이었으니, '물로 씻는 뒷간'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8) 정랑(淨廊)
중국 사찰에서 처음 쓰여진 용어로, '깨끗한 복도'로 직역된다. 정랑은 물로 뒷간을 씻거나 용변간과 수간(水間)이 겸용인 뒷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랑(廊)'은 '사랑(舍廊)'이나 '회랑(回廊)'에서 보듯이 집채와 따로 구분된 별도의 건물을 가리킨다. 지금도 여전히 사찰과 일부지방에서 쓰고 있다.
9) 목방(沐房) '세답방(洗踏房) 북수간(北水間)
이 말들은 뒷간에서 물로 씻는다는 의미이니, 뒷간과 욕실이 함께 딸려 있는 요즘의 화장실의 원형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10) 변소(便所)
일제시대 때 들어온 일본 용어이다. '便'은 똥오줌을 가리킬 때는 '변'으로 읽는다. 변소는 글짜 그대로 변을 보는 장소를 가리킨다.
11) 화장실(化粧室)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화장실은 곧 단장실(丹粧室)이다. 글짜 그대로 간단히 얼굴 화장을 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둔 작은 방이다.
12) 서각(西閣) 혼헌(渾軒)
이 말은 궁궐에서 쓰는 상당히 격을 갖춘 명칭이다. 궁녀들은 흔히 '작은집'이라고 불렀다.
13) 해우소(解優所)
사찰에서 쓰는 용어이다.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뒷간의 의미를 이처럼 적절하게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대소변을 버리듯 번뇌 망상을 남김없이 버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14) 서양에서는‘쉬는 방(Rest Room)’이라고 부른다.
2. 뒷간의 양면성
옛 사람들은 뒷간에 대해 부정과 긍정이라는 양가치를 갖고 있었다. 더럽고 냄새나는 혐오처이면서 더럽고 삿된 것을 삭혀 없애주는 정화적 인식도 함께 갖고 있었다.
뒷간은 병균과 삿된 것이 머무는 곳이므로, 가까이 하면 재앙을 입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뒷간의 혐오성은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 '뒷간과 우물은 떨어져 있어야 좋다' '뒷간과 부엌은 떨어져 있어야 좋다'라는 속담에서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 전통가옥에서는 뒷간을 본채와 멀리 두고 지었다. 그래서 본채와 멀리 떨어진 뒷간을 밤늦게 드나드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따로 요강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뒷간에 대한 혐오성과 부정성은 뒷간을 관장하는 측신( 神)을 만들어냈다. 지방에 따라 '뒷간귀신' '측신각시' '치귀[厠鬼]' '부출각시( 出閣氏)' '변소각시' '칙도부인' '정랑신' 등등으로 불린다.
이름에서도 보듯이 측신은 여성신이다. 제주도 <문전본풀이>에 따르면 첩인 노일저대가 죽으면 측신이 된다고 한다. 즉, 문신(門神)의 본부인은 죽어서 조왕신(부엌신)이 되고, 첩은 죽어서 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신은 원수간이므로 부엌과 뒷간은 멀리 지었다. 뒷간은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라서 측신이 항상 상주하지는 않고 6일, 16일, 26일에만 뒷간에 든다. 측신은 젊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면 연지 찍고 곤지 찍고 화장을 한다. 그리고, 늘 긴 머리카락을 발 밑에 감고 세고 있다가 사람이 갑자기 변소에 들어오면 깜짝 놀라서 세던 머리카락을 뒤집어 씌운다고 한다. 머리카락에 씌어진 사람은 병을 앓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뒷간에 일을 보러 갈 때는 들어가기 전에 기척을 내야한다. 그리고, 측신은 여신이라 자기의 소유물에 대해 애착이 강하고 성깔도 대단하다고 했다. 뒷간에 있는 지푸라기라도 함부로 들고 나오면 영락없이 벌을 준다. 그래서 뒷간에서 일을 보다가 고혈압 등으로 죽거나 쓰러지는 예가 많은데, 이를 막기 위해 측신에게 똥떡을 갖다바치기고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뒷간은 아무리 허술해도 아무 날에나 함부로 손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측신인 노일저대가 측간에 머무는 음력 6·16·26일은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측신이 놀라서 해꼬지를 하기 때문이다.
측신은 대체적으로 성주신(城主神) 밑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역할을 하는 악신이기 때문에 큰 굿에는 청입되지는 않았다. 막내 아들이 어머니인 조왕신을 되살리고 첩을 없앤 후 대청마루신이 되었다는 권선징악적 후일담은 한국인의 해학적인 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산간지방에서는 뒷간을 지은 뒤에 아무 탈없이 집안을 편안하게 보살펴달라는 기원에서 뒷간에 불을 켜놓고 제사를 지냈다. 짐승의 해꼬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뒷간은 성스러운 정화기능도 함께 갖고 있었다. 뒷간은 똥오줌을 발효시켜 양질의 거름으로 만드는 곳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뒷간은 삿된 것을 삭혀 없애는 정화성을 가진 공간이었다. 집안의 큰일을 앞두고 뒷간에 제사를 지내면 액이 물러간다고 했다. 필자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경북 영덕지방에서는 초상을 알리는 부고장을 받으면 함께 묻어올 액을 막기 위해 숯과 함께 뒷간에 버렸다. 손발톱을 깎은 뒤에도 뒷간에 버려서 정화를 시켰다. 심지어는 새 옷을 마련했을 때에도 옷에 묻어온 삿된 것을 삭혀 없애기 위해 뒷간에 하루 동안 걸어두기까지 했다. 그런가하면, 노름판에서 돈을 따는 사람에게 흔히 '뒷간에 가서 똥 만지고 왔나 ?'하고 말한다. 이 경우 측신은 돈을 잃게 하는 액을 막아주는 신으로 인식된다.
해몽에 있어서 똥은 재물이며, 뒷간은 곡간과 동가(同價)이다. 꿈에 뒷간에 떨어졌다가 나오면 좋다, 꿈에 뒷간 위에 오르면 재물을 얻는다, 꿈에 뒷간을 치우면 재물이 생긴다, 꿈에 뒷간의 똥이 넘치면 운수가 좋다는 속담도 거기서 생겨났다.
3. 뒷간 건축
1) 위치
뒷간도 집을 지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것저것 지켜야 하는 것이 많다. 뒷간을 지을 때에 동티가 없게 길일을 택해서 짓되 밤에 뒷간에 불을 켜고 고사를 지냈다. 새 뒷간을 짓고 나서 옛 것은 반드시 없앴다. 옛 것을 없앨 때는 동티가 나지 않는 윤달을 택했다. 이 때는 옛 뒷간의 똥을 말끔이 치워야 하며, 치울 때는 변조칸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퍼내야 한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는 속담에서 보듯이 뒷간은 냄새와 위생 문제로 대개는 집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마련하고 있다. 가족들이 사용하는 것은 담장 안쪽에 , 노비나 외부인들이 사용하는 뒷간은 담장 밖에다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본채 안에다 뒷간을 두는 곳도 많다. 강원도 산간과 남부지방에서도 그런 구조는 쉽게 발견된다. 구례 운조루의 경우나 삼척 신리마을의 뒷간은 집채에 붙여지었다. 겨울철에 적설량이 많고, 밤에 무서운 맹수들의 공격을 우려해서 집채에다 붙여 지은 것이다.
그러다가 일제를 통해 일본문화가 들어오면서 뒷간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일본식 뒷간이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료에 따르면 일본식 화장실이 처음으로 살림집 안으로 들어온 것은 1941년 영단주택(문화주택)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태어난 외갓집도 안방 한켠에다 겹문을 달고 뒷간을 마련했다. 안방에서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 뒤를 보도록 되어있었다.
뒷간의 용도를 보면 이용자에 따라 형태는 개인용·대중용·남녀공용이 있는데, 지체 높은 양반주택에서는 여성 전용의 안 뒷간[內厠]과 남성전용의 바깥뒷간[外厠]을 따로 두었다. 안 뒷간은 주로 여성들만의 공간인 후원에, 주로 남성용인 바깥뒷간은 사랑채나 행랑채 가까이에 두었다.
그리고, 사대부 집에서는 노비가 쓰는 뒷간과 주인이 쓰는 뒷간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필자의 처가집은 종가집인만큼 행랑채 바깥에 종들과 행인들이 쓰는 뒷간을 따로 두고 있다.
2) 형태
뒷간은 용도에 따라 일반 뒷간과 목욕을 겸할 수 있는 겸용뒷간이 있다. 북수(北水)·목방(沐房)·세답방(洗踏房) 등은 세면장 겸용뒷간이다. 농촌에서 거름을 만들 목적으로 재[灰]나 볏짚 등을 헛간에 쌓아두고 뒷간을 겸하기도 한다.
남자들이 소변만을 간단히 볼 때는 따로 오줌통을 사용했다. 말하자면 똥오줌의 분리수거인 셈이다. 오줌통은 마당 구석 후미진 곳에 두거나 외양간이나 뒷간 한쪽에 놓아두었다. 오줌통은 주로 똥장군을 사용하거나 따로 오줌독을 땅속에 묻었다. 남아용(男兒用) 오줌통을 마을 골목에 마련해두기도 하였다. 여기서 받은 오줌은 쌀뜨물을 섞어서 밭에 뿌리기도 했다. 오줌 안에는 농사에 농작물에 좋은 질소 성분이 듬뿍 들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오줌은 감자·고구마·토란 등의 작물에 좋다고 했다. 뒷간에 구더기가 생기면 할미꽃으로 즙을 내어 뒷간에 뿌렸다.
3) 구조
원래 전통 뒷간은 채광과 통풍을 위해 열린 구조로 되어 있다.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닫힌 구조로 바뀌면서 오히려 비위생적 구조이 되었다.
뒷간은 주로 나무·흙·돌 등을 사용하여 벽체를 쳤다. 하층계급이 사는 민가에서는 지붕도 없이 거적만으로 사방에 둘러친 것도 있다. 양반주택에서는 아래쪽에는 흙과 돌을 사용하여 벽을 치고, 위쪽에는 널판으로 판벽을 쳐서 살창을 낸 경우가 많다.
뒷간의 문짝은 아예 달지 않았거나 거적으로 두른 것에서부터 판자를 사용하여 제대로 문짝을 짜서 단 것도 있다. 더러는 낡은 방문짝을 뜯어다 대신하는 곳도 있다.
지붕은 아예 두지 않는 간이형에서부터 새(때:茅)·볏집·기와 등이 보통이다. 울릉도 나리분지에 있는 뒷간은 원뿔형 또는 단칸 맞배 초가이며, 강원도 신리 마을의 뒷간은 너와나 굴피로 지붕을 이었다. 양반가에서는 주로 기와를 올렸고, 해방 후에는 함석지붕과 스레트지붕이 나타났다.
뒷간 구조는 단층과 중층으로 나누어진다. 단층구조의 원형은 잿간에다 구덩이나 독도 묻지 않고 그냥 큰 돌만 2개 갖다놓고 그 위에 올라가 일을 보는‘잿간 변소’이다. 잿간변소 외에 땅바닥에 구덩이만을 판 것에서부터 김칫독 묻듯이 큰 독을 묻거나 널판으로 목곽을 만들어 묻은 변조(便槽 : 분뇨저장장치.변통)가 일반적이었다.
전통 뒷간의 변조가 깊고 넓은 것은 똥오줌을 충분히 발효시키기 위함이다. 발효가 되지 않은 똥오줌은 채독을 일으킨다. 똥오줌은 발효가 되면 비중이 무거운 액비(液肥) 상태가 된다. 따라서 갓 떨어진 똥들은 소위 똥물 위에 뜨게 되어 있다. 똥거름을 풀 때는 곰삭은 액비만을 퍼서 거름으로 뿌리는 것이다. 간혹 용변을 볼 때 똥물(액비) 튀어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낙엽이나 짚을 변조에 넣기도 한다.
변조 위에는 양쪽 발을 올려딛는 두꺼운 널빤지(노둣대)를 걸친다. 원래 '노둣대'란 말을 타거나 내릴 때 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을 말한다. 신영훈은 이를 '부춛대'라 하고, 국어사전에는 '부출( 出)'이라고 되어있다.
중층구조의 뒷간은 사찰 해우소나 향교와 같은 대중이 모이는 곳에 만들어졌지만, 규모가 큰 사대부집에서도 작은 규모의 중층 뒷간을 두었다.
뒷간에는 어김없이 똥장군과 똥지게를 놓아두었다. 똥오줌을 밭으로 퍼다날리기 위해서이다. 똥장군은 남자들이 지고, 똥동이는 여자들이 이고 밭으로 날랐다. 똥장군은 옹기나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똥재를 퍼낼 때는 바소쿠리가 필수도구이다. 액비의 경우는 농작물에 곧장 주지 않고, 일차 소매구덩이에 옮겨서 발효를 시켜서 농작물에 준다.
4) 임금의 매회틀
궁궐의 뒷간 역시 냄새도 나고 위생상 좋지 않기 때문에 전각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두었다. 지금은 거의 모두 철거되었지만, 경복궁에는 뒷간이 28개나 있었고 창덕궁에는 21개나 있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큰 것은 7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임금의 편전이나 침전에는 화장실을 따로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임금이 멀리 떨어진 뒷간까지 곤룡포 걸친 채 체통없이 허겁지겁 달려갈 수는 없다. 그래서 대신 이동식 변기를 가까이에 두었다. 그것이 매회틀(煤灰)이다.
궁중에서는 일반인들이 쓰는 용어와 다른 특정용어를 쓰는 경우가 많아서 궁중에서는 똥을 '매우'라고 했다. 그래서 매회틀을 매우틀이라고도 했다. 매회틀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발을 올려 딛는 뒷간의 부출 구조와는 달리 좌변식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엉덩이가 닿는 부분은 차겁지 않도록 빨간 우단이 씌워져 있다. 매회틀 속에는 사기나 놋으로 만든, 함지박처럼 생긴 변통이 있어서 설합처럼 밀어넣고 빼낼 수 있게 되어 있다. 변통 안에는 어김없이 재(매회)나 잘게 쓴 짚(매추)을 깔아놓는다. 용변을 볼 때 대소변이 튀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아서 좋다. 그래서 매회틀이라고 했다. 우리 속담에 '똥 싸고 매화타령한다'는 말이 있는데, 매화는 곧 매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용무가 끝나면 복이나인(僕伊內人)이 임금의 밑을 씻겨준다. 이때 나인은 부드러운 명주로 임금의 뒤를 닦아준다. 그리고, 변통을 빼내다 깨끗이 씻은 다음 다시 끼워넣는다. 더러는 그 용기를 내의원으로 가져가서 건강상태를 진단받곤 했다.
제3부 사찰 해우소
1. 해우소의 어원
'해우소'라는 말은 한국전쟁 후 통도사 극락선원에 머물던 경봉(鏡峰·1892~1982)선사가 처음 지어냈다고 한다. 당시 경봉선사가 소변 보는 곳에는 '休急所', 큰일 보는 곳에는 '解憂所’라는 글씨를 써서 뒷간에 붙이게 했다. 그 후 통도사 스님과 신도들의 입을 통해 전국에 회자되었다는 것이 해인사 포교국장으로 있는 현진스님의 회고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경남 사천 와룡산 다솔사(茶率寺)에서 멀찌감치 뒷간을 지어놓고 처음 '해우정(解憂亭)'이라고 이름붙였다는 설도 있고, 계룡산 동학사의 한 비구니 스님이 처음 썼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동학사 뒷간에는 '해우실(解憂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해우실에 이르는 다리 이름 또한 '해우교(解憂橋)'라 부르고 있다.
어쨋거나 해우소라는 말의 역사가 1백년 안쪽의 일임은 분명해보인다. 그 후 인구에 회자되면서 일반 민가에서도 많이 빌어다 쓰고, 지리산 청학동 도인촌과 제주도 민가에도 붙어 있다.
'해우소'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뒷간'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사미승들의 교육교재인 <사미율의> 등에는 '뒤깐(뒷간)'으로도 나와 있다. 선암사 해우소에는 '대변소(大便所)'라고 쓴 이름패가 붙어있다. 여기서 '대'란 '크기'보다 '공중'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리고, 그 밑에다 한글 고어로 '뒤ㅅ간'이라고 병기(倂記)되어 있다(사진 : 선암사 해우소 이름패)
또, 중국 사찰에서 처음 쓴 '정랑(淨廊)'이라는 명칭도 현재 함께 사용되고 있다. 송광사 후원에 있는 스님들의 전용 뒷간, 비구니 수행처인 김천 청암사의 뒷간 등등 아직도 일부 사암(寺庵)에서는 여전히 '정랑'이라는 명칭이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송광사를 비롯해 외래인들의 출입이 많은 관광사찰은 '화장실'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영어와 그림을 함께 쓰기도 한다.
2. 해우소의 역사
1) 불교의 해우소
흔히 말하는 전통해우소는 우리나라 사찰의 전통뒷간일 뿐, 불교의 전통뒷간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비롯하여 여러 불교국가의 전통 뒷간들이 우리의 해우소 구조가 아닌 제각각 다른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국가인 인도의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발견된 뒷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실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수세식과는 다르지만, 물이 흘러 가도록 시설하여 그 위에 배설하는 구조이다. 이러한 수류식(水流式) 처리방법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던 양식이었다. 여러 경전에 크고 작은 수류식 뒷간 이야기가 나오는데, 기원정사에는 '유측(流厠)'이라고 번역되는 수류식 뒷간이 있었다고 전한다.
2) 불국사의 유구들
사찰 해우소의 역사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유물이 불국사에 남아있는 신라의 수세식 뒷간의 유구들이다. 지금은 극락전 옆에 놓여 있지만, 발굴되기 전에는 무설전 뒤쪽에 있었다고 하는 부출(노둣돌)이 그 유물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부출은 네모난 돌 가운데 배[舟] 모양의 구멍을 뚫은 것이다. 어쩌다 실수하여 구멍의 가장자리에 뒤가 지저분하게 묻었을 때 물로 씻어내리기 좋도록 안쪽으로 부드럽게 몰딩처리가 되어 있다.
그 옆에는 크기가 작은 부출도 놓여 있다. 일부에서는 여성용이라고 하지만, 엉덩이 크기를 비교하면 오히려 남성용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동용이거나. 어쨋거나 그 부출은 요즘의 수세식 변기처럼 물을 사용하여 배설물을 씻어내릴 수 있도록 배출구가 뒤쪽으로 나있다. 배출구 아래는 지금의 정화조와 같은 장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첨성대 부근에서 발굴된 거대한 석조 탱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진 : 불국사 노둣돌)
부출을 물로 씻으려면 물을 끌어들이는 파이프[水路] 장치가 있거나 아니면 뒷간이 욕조가 함께 북수간 구조여야 할 것이다. 불국사에 남아있는 뒷간 유구 가운데는 넓게 홈을 판 수로석(水路石)도 들어있다. 8세기에 이미 신라에 그런 고품위의 변기가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3) 우리나라 최고의 해우소
누군들 먹고 싸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더럽다는 인식 때문인지 똥오줌은 금기어로 인식되고, 뒷간에 대한 언급도 터부시되고 있다. 아무리 진지하게 이야기해도 똥오줌 이야기는 금방 우스갯소리가 되고 만다. 점잖은 체면에 어찌 그 더러운 곳을 논하겠느냐는 생각에서인지 우리 문헌에도 똥오줌이나 뒷간 이야기가 별로 없다.
사찰 해우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선암사 해우소의 기록도 한국전쟁 때 없어져버리고 지금은 사찰의 해우소에 관한 문헌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게다가 보존 가치가 있는 전통 해우소들마저 대중의 외면으로 점차 사라져 얼마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현재 남아있는 해우소 건물 가운데는 김룡사와 선암사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비록 고증을 거치진 않았으나, 김룡사의 해우소는 3백년 전 유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사진 : 김룡사 해우소)
2003년 영월 보덕사 옛 해우소에서 '龍盤光緖八年壬午四月初十日酉時立柱上樑伏願上樑之後萬事如意亨通龜踞”이라고 쓰여진 상량문이 나왔다. 해체복원되는 과정에서 나온 상량문에 따르면 보덕사 해우소는 '光緖八年(1882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해체되기 전의 보덕사 해우소가 선암사의 것보다 앞선 국내 최고(最古)의 해우소였던 셈이다.
3. 해우소 문화
1) 해우소는 신성공간(神性空間)
굳이 말하자면 불교는 범신론(汎神論)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은 하지만, 유일신이 아닌 범신을 인정한다. 즉, 모든 것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주장이다. 해우소도 예외가 아니어서 청측신(厠神)이 머문다. 불교전설에 따르면, 산신과 칠성신과 청측신은 원래 삼형제(兄弟)였는데, 두 아우가 서로 해우소 맡기를 마다하자 하는 수 없이 맏이가 나서서 청측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강진 도갑사 해우소 안에는 검은 나무명패에 흰 글씨로 '南無誓除不淨厠神之位(나무서제부정청측신지위)'라고 쓴 위패가 붙어 있다. 청측신을 위해 부정을 없애고 해우소를 잘 관리하겠다는 서원의 뜻도 함께 들어 있다.
2) 해우소는 수행공간
식사대사(食事大事)라는 말도 있지만, 식사는 배설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사흘 굶어 병은 되지 않지만, 사흘을 못 싸면 병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리적인 배설도 식사 이상의 대사임에 분명하다.
사람은 매일같이 탐진치를 먹고 산다. 그것을 내버리지 못하면 업장[憂]이 되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수행이란 탐진치를 끊임없이 버리는 과정이다. 출가수행자는 잘 싸고 버리는 무소유(無所有)를 덕목으로 한다. 결국 '해우'라는 말은 '버림'과 '무소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버림과 무소유의 공간인 해우소는 수행의 공간일 수 밖에 없다.
예로부터 불가(佛家)에서는 해우소를 드나들 때 입측오주를 암송해왔다. '입측진언(入厠眞言)-세정진언(洗淨眞言)-세수진언(洗手眞言)-거예진언(去穢眞言)-정신진언(淨身眞言)' 등 입측오주(入 五呪)가 전해오고 있다. 암송하기 쉽도록 용변칸이나 출입구에 붙여져 있다. 이 진언들을 통해서 수행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또, 이 진언들은 해우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예방하는 방편이자 이용자가 지켜야할 생활규범이기도 하다.
① 입측진언
먼저 문을 열기 전 손가락으로 세 번 노크를 하면서 입측진언을 외운다. '비우고 또 비우니 큰 기쁨일세. 탐진치도 이와같이 버려서 한 순간도 허물을 없게 하라. 옴 하로다야 사바하'를 세 번 외운다.
이렇게 해야 똥을 먹는 귀신(담분귀)가 똥을 먹다가 비켜준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담분귀가 화가 나서 들어오는 사람의 걷어차서 배탈이 나게 한다는 이야기가 불가에 전해온다. 해우소는 단순한 배설공간이 아니라 수행의 공간이 된다.
② 세정진언
용변을 마치고 왼손으로 뒷물을 하면서 외는 진언이다. '비워서 청정함은 최상의 행복 꿈같은 세상살이 바로 보는 길, 온 세상 사랑하는 나의 이웃들, 청정한 저 국토에 어서 갑시다.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③ 세수진언
손을 씻을 때 외는 진언이다.‘ 활활 타는 불길 물로 꺼진다. 타는 눈 타는 경계 타는 이 마음, 맑고도 시원스런 부처님 감로. 화택을 건너 뛰는 오직 한 방편일세. 옴 주가라야 사바하’를 세 번 외운다.
④ 거예진언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고 해우소를 나올 때 외는 진언이다. ‘더러움을 씻어내듯 번뇌도 씻자. 이 마음 맑아지니 평화로울 뿐. 한 티끌 더러움도 없는 세상이 이생을 살아가는 한 가지 소원, 옴 시리예바혜 사바하’를 세 번 외운다.
⑤ 정신진언
몸이 깨끗해졌음을 확인하며 외는 진언이다. 용변 후 법당에 들어갈 때 왼다.‘한 송이 피어나는 연꽃이런가. 해 뜨는 푸른 바다 숨결을 본다. 내 몸을 씻고 씻어 이 물마저도 유리계 푸른 물결 청정수되리. 옴 바아라 뇌가닥 사바하'를 세 번 외운다.
해우소를 이용할 때 지켜야 할 마음가짐이다. 배설이라는 가장 속스러운 행위를 가장 성스러운 수행으로 승화시켜준다. 이 불이(不二) 진언으로해서 속(俗)은 성(聖)과 하나가 된다. 한편, 이 진언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전통해우소의 구조와 이용법을 짐작케 해준다.
3) <사미율의>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1년 동안의 행자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미율의>는 행자가 사찰에서 지켜야할 생활규율을 적은 책이다. 1973년 해인사에서 펴낸 <사미율의>에 보면, '뒤깐 가는 법'이라는 항목이 따로 나와있다. 간단히 줄여서 옮기면-
'大小便을 하게 되면 곧 갈 것이니, 오래 참다가 급하게 설치지 말거라. / 뒤깐 앞에 가서는 손가락을 세 번 튕겨서 안에 사람이 알게 한다. / 안에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하면 못 쓴다. / 뒤깐에 들어가서도 세 번 손가락을 튕기고, 가만히 게송을 외운다. '중생들과 같이 탐진치를 버리고 죄를 덜어지이다' /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면 못 쓴다. / 꼬장가리로 땅바닥을 끄적거리면 못 쓴다. / 힘쓰는 소리를 내면 못 쓴다. / 곁에 사람과 이야기하면 못 쓴다. / 벽에 침을 뱉으면 못 쓴다. / 사람을 만나 인사하면 못 쓰니, 몸을 기울여 비켜야 한다./ 걸어가면서 허리끈을 매면 못 쓴다. / 소변할 적에도 소매를 걷어 들어가야 하고, 장삼을 입고 용변보지 못한다. / 장삼 걸 적에는 잘 개어서 수건이나 허리끈으로 맬 것이니, 첫째는 안에 사람이 들어있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요, 둘째는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신발은 반드시 갈아신어야 하며, 깨끗한 신발로 뒷간에 가면 못 쓴다./ 뒷물하고 나서는 비누로 손을 씻어야 하고, 씻기 전에는 물건을 만지지 못한다.'
4) 화두(話頭), 그리고 시(詩)
① 똥막대기
운문선사는 육조혜능-청원행사-석두희천의 선맥을 운문종의 종조이다. 그가 남긴 일화에는 똥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누가 선사에게 찾아와 '만법(萬法.萬物)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라고 묻자 '똥더미에서다'라고 했다는 고사는 그대로가 화두이다. 또,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는 물음에 '마른똥막대기[乾屎蹶]'라고 했다는 유명한 화두도 있다.
② 장구성 이야기
자연은 중생에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모양으로, 색깔로, 소리로...온갖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다. 더러는 속삭임으로, 더러는 몸짓으로... 오만가지 모습으로 중생에게 법문을 해주고 있다. 다만, 눈 뜨이고 귀 열린 자들만이 보고 들을 뿐이다.
중국의 장구성(張九成)이라는 선객은 해우소에 들어가 똥을 누려고 힘을 주는 순간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일순간에 대오각성을 했다.
春天月夜一聲蛙(달 밝은 봄날 밤에 한 마리 개구리 울음)
撞破乾坤洪一家(천지를 온통 깨어 하나로 만들었네 !)
그에게는 똥 누는 일이 화두였으며, 해우소가 수행공간이었던 셈이다.
③ 참새의 불성
불상의 머리 위에 참새가 날아와 똥을 싸는 것을 보고 한 수좌가 마조의 제자인 동사여회선사에게 물었다. '참새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 그러자, 선사가 '있고 말고'하였다. '그러면, 참새가 어찌 부처님 머리 위에다 똥을 쌉니까?'하고 수좌가 되받아쳤다. 그 말 끝에 선사가 화두를 던졌다. '그것은 참새가 새매의 대가리에는 왜 똥을 싸지 않는지 가르쳐주는 것이지'
④ 오줌 누는 일
한 수좌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일이 무엇입니까 ?' 그러자, 조주가 '오줌이나 좀 눠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화에서 나온 화두가 그 유명한 '요시소사(尿是小事)'이다. 오줌 누는 일은 작은 일이지만,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먹는 일'은 '싸는 일'에 비하면 오히려 소사에 지나지 않는다.
⑤ 정호승의 시 <선암사>
시인 정호승이 지은 <선암사>라는 작품이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 선암사 해우소 앞 /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4. 전통 해우소 건축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통에 충실한 해우소가 아직 30여개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순천 조계산 선암사, 관리가 가장 잘 되고 있는 조계산 송광사, 최근에 원형을 복원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된 영월 태백산 보덕사, '해우소' 명칭을 처음 썼다는 사천 와룡산 다솔사, 3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경 운달산 김룡사, 서산 상왕산 개심사, 구례 지리산 연곡사 등 7개소를 표본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위치
① 가람중심축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들은 평지보다 산지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월등히 많다. 사찰의 가람배치는 전통적으로 일주문-금강문-천왕문-누각-석탑-석등-대웅전 등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다. 전각의 품격도 지대가 높을수록 높아진다. 따라서 하위에 속하는 해우소는 7개소 모두 가람배치의 중심축에서 멀리 벗어나 아래쪽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야 냄새를 줄이고 거름을 위생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② 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산중의 사찰은 평지사찰과는 달리 건축공간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개의 해우소는 쓸모가 적은 비탈이나 자투리땅을 이용해서 지어졌다. 비탈이라고는 하지만, 대개는 돌로 축대를 쌓은 석단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비탈은 채광과 통풍이 평지보다 유효하다. 해우소의 건축구조가 다락형으로 지어진 것도 그런 지형조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③ 채마밭을 가까이에 두고 있다.
해우소에서 생산되는 거름을 채마밭으로 쉽게 운반하기 위해 대개는 경작지 가까이에 해우소가 자리하고 있다. 밭이 멀리 있어서 작업동선이 길면 노동효율도 떨어질 뿐 아니라, 똥오줌을 실어내는 과정에서 냄새를 많이 풍기게 되는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영월 보덕사의 경우는 변조칸의 출입구가 아예 밭둑에 접해 있다.
④ 개울과 인접해 있다.
상당수의 해우소는 개울과 가까이운 거리에 있다. 개울물을 뒷물로 이용하기 쉽고, 청소를 할 때 쉽게 길러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⑤ 북향(北向)이 많다.
산중사찰은 남향이다. 따라서 대개의 해우소는 출입구를 기준으로 볼 때 북서향 또는 북동향으로 앉아있다. 그러나, 와룡산 다솔사의 경우처럼 지형에 따라 해우소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2) 형태
① 평면 형태는 한일(一)자형과 정자(丁)형이 있다.
선암사, 송광사, 연곡사 등 대찰의 해우소는 정자형이며, 나머지는 모두 일자형이다. 정자형은 한일자형에다 골마루[廊下]를 앞으로 길게 빼서 마치 복도처럼 출입구를 두고 있다. 일자형에서는 대개 정면에 출입구를 두기도 하지만, 사천 다솔사처럼 측면에 출입구를 낸 경우도 있다.(사진 : 다솔사 해우소)
② 대찰일수록 면적이 넓다.
해우소는 공중용이다. 따라서 기거하는 사부대중의 숫자가 많을수록 넓은 면적이 필요하다. 태고종의 본찰인 선암사 해우소는 정면 6칸에 측면 2칸이다. 정(丁)자형 건물이라 전체로는 26간이나 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우소이다. 삼보사찰인 송광사는 19평, 연곡사는 16평이다. 한일자형 구조의 작은 해우소들은 영월 보덕사 7평 등 대개 10평 미만이다.
③ 중층다락구조가 많다.
전통해우소는 중층다락[高床] 구조를 갖고 있다. 7개소 해우소 외에도 전국에 남아있는 전통해우소는 모두 다락구조를 하고 있다. 이 구조는 앞에서 보면 단층구조이지만, 뒤에서 보면 중층구조가 확연히 드러난다. 중층구조는 위층에 용변칸을 두고 아래층에 변조를 두고 있다.
해우소가 중층다락구조를 갖게된 이유는 해우소가 자리한 지형이 비탈이나 석단의 가장자리이기 때문이다. 황룡사나 분황사처럼 비탈 또는 석단이 없는 평지가람의 경우라도 지대를 북돋워서 중층다락 구조로 건축하여 사다리나 계단을 두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사찰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물증은 없지만, 구례 운조루를 비롯해 민가에는 아래층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용변을 보는 중층구조의 뒷간이 남아있다.
또다른 이유는 해우소가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중뒷간이기 때문이다. 즉, 많은 양의 변을 저장해야하기 때문에 아래층에 별도의 큰 변조를 두게 된 것이다.
신영훈은 해우소가 다락집으로 된 것은 행여나 있을 지 모를 짐승들의 해꼬지를 막기 위함이라고 했다. 산간 절에는 짐승들이 많아서 새벽 도량석에서도 만나고 새벽 뒷일 보러 가다가도 만나곤 했을 것이다.
④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이 흔하다.
해우소는 기와지붕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오대산 중사자암 해우소의 너와지붕은 유일한 예외이다. 개심사 해우소는 원래 기와지붕이었으나, 가벼운 스레트지붕으로 바꾸었다.
일(一)자형 해우소는 주로 맞배지붕 양식을 채택하고, 정(丁)자형 해우소인 송광사는 우진각지붕과 맞배지붕을 합친 형태이다. 어느 경우나 처마는 홑처마로 되어있다. 대개는 막새를 두지 않았으나, 송광사는 아름다운 문양의 암수막새로 마감했다.(사진 : 송광사 해우소)
⑤ 해우소 주변환경
송광사의 경우는 해우소 입구 좌우에 홍련지와 백련지 등 2개의 연못을 두고 있는데, 이런 구조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이다. 여름이면 연못에 수련이 피고, 고기가 놀고, 잠자리가 날아다닌다. 이 정도면 해우소가 아니라 해우정(解憂亭)이 된다.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해우소가 앉은 대지를 북돋워 높였다. (사진 : 송광사 해우소)
선암사의 경우는 해우소 앞에 사철나무로 바자울을 했다. 나머지 해우소들은 별다른 조경시설 없다.
3) 구조
① 기둥
전통 해우소에서는 아래층은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으로 세우고, 위층은 각기둥으로 세운다. 아래층의 두리기둥은 튼실하기도 하지만, 윗층의 하중을 시각적으로 상쇄시켜주고 있다. 두리기둥의 경우라도 대개는 다듬지 않은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송광사와 보덕사의 경우 근래 복원되기 전에는 아래위층의 기둥이 모두 자연목이었다.
조계산 송광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이다. 새로 복원하기 전에는 송광사의 해우소도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이었다.
② 벽체
해우소의 벽체는 널빤지를 이용한 판벽, 회벽, 토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가 큰 해우소는 판벽과 회벽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 해우소는 대개 아래위층이 모두 판벽으로 되어 있다. 7개 해우소 가운데 연곡사의 변조칸만 시멘트로 구조물로 되어 있다.
변조칸 벽체를 틈이 많은 판벽으로 칠 수 있는 것은 낙엽, 왕겨, 톱밥 등의 매질(媒質)이 수분(오줌)을 흡수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벽은 보온보습 기능이 탁월하다.
③ 출입구 골마루
정자형 해우소는 서양집의 현관과 같은 복도식 골마루[廊下]가 길게 나와 있다. 해우소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 골마루를 통과해야 용변칸에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골마루 아래층 공간은 낙엽, 재, 톱밥, 대팻밥 등 매질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예전에는 골마루 입구에 횃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장삼을 벗어서 걸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횃대를 볼 수 없다. 횃대가 없는 경우는 장삼을 개어서 깨끗한 곳에 얹어두고 들어가서 일을 보았다. 그래서 '해우소'라는 용어의 어원이 '해의소(解衣所)'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다.
<사미율의>에 보면 '신발은 반드시 갈아신어야 하며, 깨끗한 신발로 뒤깐에 들어가면 못 쓴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출입구 골마루에 뒷간용 신발을 따로 비치해두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해우소에서는 전혀 그것을 찾아볼 수 없다. 비구니 수행처인 오대산 영감사의 경우는 전통해우소는 아니지만,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④ 살창
해우소 벽체에는 살창이 있어서 채광과 통풍을 도와준다. 큰 해우소는 아래위층 모두 살창을 두고 있으나, 규모가 작은 해우소는 위층에만 살창을 두고 있다. 개심사와 연곡사의 경우는 살창 대신 벽체와 지붕 사이에 틈을 두어 채광과 통풍을 돕고 있다.
윗층의 용변칸 살창은 햇볕과 바람을 불러들여 용변칸을 쾌적하고 위생적으로 만들어 준다. 어쩌다 실수를 해서 부출에 오줌이 흘러도 살창을 통해 들어온 햇볕과 바람이 뽀송뽀송하게 말려준다. 살창은 용변칸을 반음반양의 청량쾌적한 상태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파리가 쉽게 범접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살창을 사이에 두고 안팎에 음양조도의 차이가 많아서 눈을 살창에 갖다대지 않는 이상 외부인은 용변칸 내부의 동정을 볼 수 없다. 반면, 내부의 용변자는 살창을 통해 바깥을 훤히 내다볼 수 있다. 선암사의 경우는 용변칸에 앉으면 절을 찾아 올라오는 내방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내다보인다. (사진 : 선암사 용변칸 살창)
영월 보덕사의 경우는 바깥 동정을 볼 수 있도록 +형 구멍이 뚫려 있다.
아래층 변조칸의 살창 역시 채광과 통풍을 위한 시설이다. 원활한 통풍은 똥오줌을 발효시키는 호기성 미생물에 산소를 공급하여 왕성한 활동을 도와준다. 살창을 통한 햇볕 역시 똥오줌을 건조시키고 냄새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살창은 똥오줌에서 나오는 메탄·질소·암모니아 가스를 밖으로 방출시켜 냄새를 줄여준다.
선암사와 송광사의 경우는 출입구의 낭하 좌우에도 살창을 냈다.
⑤ 용변칸
중층다락구조를 '고상(高床)'구조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높은 평상'이다. 중층다락구조에서는 고상이 곧 부출(노둣대)이 된다. 이용자는 그것을 딛고 용변을 본다.
용변칸은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일을 볼 수 있도록 여러 개 마련하였다. 용변칸의 숫자는 해우소 면적에 비례한다. 선암사 12칸(명), 송광사 10칸, 연곡사 10칸, 보덕사 12칸, 다솔사 6칸, 개심사 6칸 등이다.
원래 해우소에는 남녀용이 따로 없었으나, 근래 들어 '남·여' 표지를 붙인 곳이 늘어나고 있다. 정자형 해우소의 경우는 골마루를 중심으로 남녀칸이 좌우로 구분되어 있고, 일자형의 경우는 복도를 가운데 두고 남녀칸이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다.
해우소는 무문(無門)의 개방 건물이다. 들어가는 해우소 출입문은 물론 각 용변칸에도 칸막이만 있을 뿐 문이 없는 것이 특징이자 전통이다. 용변칸의 칸막이 높이 역시 어른 가슴께 정도이며,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가면 칸칸이 앉은 사람들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열린 구조로 되어 있다(사진 : 개심사 해우소 용변칸)
그러나, 개인주의적이며 폐쇄적인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전통해우소에도 하나둘씩 문짝이 생기고 조금씩 칸막이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7개의 해우소 가운데 송광사 해우소는 천정 가까이까지 판벽을 높이고, 칸마다 문짝을 달았다.(사진 : 송광사 해우소 내부)
용변칸 바닥은 모두가 마루바닥 형태이다. 용변칸의 부출에 앉으면 변조가 깊어서 마치 허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해우소를 '밑 빠진 배'에 비유되기도 한다.
해우소의 모든 천정은 써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이다. 천정이 높은 것은 통풍을 위함이다.
송광사에는 골마루에 따로 남성용 소변기 2개를 설치해 오줌을 분리하고 있다. 다른 해우소에서도 오줌통을 따로 마련하고 있다.
⑥ 변조칸
대개의 해우소는 북향이다. 따라서 변조칸 출입문이 있는 해우소의 뒤켠은 일조량이 풍부한 남쪽에 위치해 있다. 채광과 통풍의 효과를 높이고, 해우소 건물에 그늘이 지지 않도록 적당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이 공간은 변조칸의 발효된 거름을 실어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사진 : 선암사 해우소 뒤켠)
송광사는 해우소 뒤켠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는 대나무 가리개 문을 세웠다. 그러나, 영월 보덕사나 김룡사의 경우는 변조칸을 그대로 노출시킨 곳도 있다. 변조칸을 감추기 위해 애써 숲을 바짝 붙여서 조성하거나 담을 높게 쌓으면 나쁜 냄새가 잘 빠지지 않고 습해서 위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송광사 스님이 선암사 스님을 만나 자기 절간 자랑을 늘어놓았다. '솥이 얼마나 큰 지, 솥 안에 들어가 배를 타고 죽을 쑨다'고 했다. 이에 질세라, 선암사 스님이 '우리 뒷간은 어찌나 깊은지, 어제 눈 똥이 아직도 안 떨어졌다'고 대답해서 송광사 스님의 입을 막았다는 이야기다.
변조칸 내부는 사람이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있을만치 넓고 깊다. 특히 정자형 구조인 선암사와 송광사의 해우소는 리어카나 경운기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깊이는 1.7미터~2미터 사이이다. 넓고 깊은 변조칸 구조는 공기와 습기의 원활한 소통을 위함이다. 그래야 똥오줌에서 나오는 메탄·질소·암모니아 가스 냄새를 쉽게 배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똥오줌을 발효시키는 미생물에 산소를 원활하게 공급해줄 수 있다. 또, 똥오줌이 발효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며, 충분히 발효될 때까지는 그것을 변조칸 안에 저장해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변조칸이 너무 작으면 발효가 되기도 전에 똥오줌을 자주 비워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또한, 용변구 아래쪽에 분뇨가 계속 쌓여 양이 많아지면 적당한 때를 봐서 옆쪽 공간으로 옮겨서 뒤적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내부 공간이 넓어야 한다.
변조의 천장은 위층의 마루와 부출이다. 변조에서 올려다보면 위층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의 밑이 다 보인다. 요새는 훔쳐보기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서 각 사찰에서는 외부인이 변조 안으로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관리 감독을 잘 해야 할 것이다.
변조 바닥은 흙바닥이다. 바닥을 시멘트로 덮으면 숨을 못 쉬기 때문이다. 땅이 숨을 못 쉬면 똥은 건조되지도 발효되지도 못하고 썩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건조되고 발효된 똥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5. 해우소 관리
1) 해우소의 생태성
① 매질(媒質)
해우소의 용변칸이나 낭하에는 낙엽, 톱밥, 왕겨, 잘게 썬 짚, 대팻밥 등과 같은 매질을 담은 그릇이나 자루가 놓여있다. 매질은 용변을 본 후에 뒤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바가지로 그것을 퍼서 아래쪽 변조칸으로 뿌리도록 되어있다. 다음 사람은 뿌려진 매질 위에다 용변을 보게 되어있다. 그리고, 일꾼들은 변조칸 뒤에 따로 비치된 매질을 퍼다가 변조칸의 똥오줌 위에 수시로 덮어준다.
매질로 사용하는 낙엽은 대개 산에서 긁어다 저장해서 쓰고, 톱밥이나 대팻밥 등은 건축불사 때 모아두었다가 쓴다. 왕겨나 짚은 시중에서 구해서 쓴다. 재는 온돌방과 부엌에서 나오는 것으로 충당하고 있다. 김천 청암사의 경우는 여름에 풀을 베어 말려두었다가 쓰고 있다. 정자형 해우소는 골마루의 아랫칸을 매질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사진 : 선암사 해우소 매질 톱밥)
매질을 뿌리는 까닭은, 첫째는 똥오줌을 거름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며, 둘째는 보습력이 강한 매질이 수분(오줌)을 흡수하여 병균의 번식을 억제하고, 벌레들의 접근을 막아주기 위함이다. 셋째는 똥오줌을 덮어서 냄새를 줄여주고, 다음 사용자에게 시각적으로 혐오감도 주지도 않으며, 벌레의 접근이나 기생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박테리아는 산소(공기)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에 따라 호기성(好氣性) 박테리아와 혐기성(嫌氣性) 박테리아로 나누어진다. 똥에는 호기성 박테리아의 활동이 왕성하며, 오줌에는 혐기성 박테리아의 활동이 왕성하다. 호기성 박테리아는 똥 속의 영양분을 먹고 부식활동을 하는 과정에 발효와 더불어 열을 발생시킨다. 호기성 박테리아는 발효찌꺼기(컴포스트)만 남기는데, 이것이 식물에게 필요한 고단위 영양제인 거름이 되는 것이다.
낙엽이나 톱밥 등은 똥을 발효시키는 호기성 박테리아의 원활한 활동을 도와주는 통기성(通氣性) 매질(媒質)이다. 통기성 매질은 보습력이 강해서 똥 속의 수분을 흡수하여 호기성 미생물에게 산소를 공급해주고 활동을 도와준다. 중간 매질이 없이 공기가 차단된 채 똥이 그냥 쌓이기만 할 경우 호기성 박테리아의 활동은 매우 더디게 된다.
선암사의 경우는 재를 다른 매질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재는 습기를 빨아들여 냄새를 줄여주고, 똥의 고형화(固形化)를 도와주어 저장이나 운반을 수월케 해준다. 이렇게 된 똥재[분재(糞灰)]는 거름의 알칼리화를 촉진시키고, 땅의 산성화를 중화시켜준다.
사찰 해우소가 생태적 뒷간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똥을 거름으로 재활용(recycling)한다는 데 있다. 똥을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 흙 속에는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땅을 중화시켜 땅심(힘)을 길러준다. 산성화로 죽게 된 토양은 똥거름을 통해 다시 살아나 식물들을 먹여살리게 된다.
이렇듯 해우소는 똥과 오줌이 분리되지 않은 채 저장되고 수거되는 푸세식(수거식)보다 훨씬 위생적이고 효율적이다.
② 거름 이용
매질의 화학작용으로 똥이 발효되어 뽀송뽀송해지면 삽으로 쳐서 변조칸 한쪽에 모아둔다. 선암사에서는 그 과정에서 수시로 재를 덮어준다. 따라서 변조칸에는 발효를 거친 똥과 새 똥이 자연 분리되어 쌓인다. 재가공 과정을 거쳐 거름이 된 것은 1년에 1-2차례 수거하며, 수거된 거름은 곧장 농작물에 주지 않고 밭가에 웅덩이를 파고 모아두었다가 주기도 한다.
송광사의 경우는 매월 1회 공양간에서 나오는 음식쓰레기를 해우소에서 나오는 거름과 섞어서 1개월 가량 퇴비 창고에 저장해 발효시킨 다음 1만여평의 채마밭에 거름으로 공급하고 있다.
이렇듯 사찰 해우소는 인간이 섭취한 음식물이 마지막 처리되는 과정이자 또다른 생명으로 환원되는 곳이기도 하다. 해우소의 의미는 '음식→똥→거름→음식'이라는 생명의 순환시스템으로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다는 데 있다.
③ 오줌 이용
원칙적으로 해우소에서는 오줌통을 두고 오줌을 따로 받는다.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요강이 나온 것을 보면 당시에도 오줌을 따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도자기나 유기로 요강을 만들어 썼다. 오동나무에 옻칠을 한 요강도 유물로 남아있다. 원행을 갈 때는 말이나 가마에 길요강을 준비해 갔다.
혐기성 박테리아는 오줌 속에서 활동이 왕성하다. 이 혐기성 박테리아는 오줌 속에 있는 영양분과 세균을 잡아먹으면서 열을 발생시켜 수분을 증발시킨다. 발효된 오줌은 질소와 염분이 들어있는 일종의 액비(液肥)가 된다. 이 오줌은 주로 오이나 호박 등 열매채소에 좋은 영양제가 된다. 송광사 해우소를 비롯하여 대개의 해우소들은 사중(寺中)의 보살들에 의해 채마밭에 뿌려진다.
④ 밑씻개
옛날에는 항문을 '밑'이라고 했고, 용변을 보고 밑을 딲는 재료를 밑씻개라고 했다. '뒤'라고 할 때는 밑씻개를 '뒤지'라고 했다.
중국은 진나라 때부터 대나무 주걱[厠籌]이나 긴 나무 조각을 밑씻개로 사용해왔다고 한다. 일본 치쿠젠(筑前 鴻月盧館)의 백제 유적에서도 길이 20~25센티미터에 너비가 1~2센티미터인 뒷간 주걱이 나왔다.
운문선사의 화두인 '간시궐(乾屎蹶)'도 밑씻개 도구로 전해온다. 옛날 중국에서 해우소에 팽이처럼 나무를 깍아 만든 막대기가 있었는데 대변을 본 뒤에 휴지 대신 이 막대기를 썼다고 한다.
○ 뒷물
해방 후에 나온 <사미율의>에 보면 '뒷물하고 나서는 비누로 손을 씻어야 하고, 씻기 전에는 물건을 만지지 못한다' '손을 씻을 적에는 가만히 이렇게 외운다. 물에 손을 댈 적에 중생들과 다 같이 깨끗한 손 얻어서 불법을 받자오리'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용변 후에 물로 밑을 씻는 뒷물 풍습은 불가의 전통으로 짐작된다.
N유업의 TV 상품광고 가운데 사찰의 해우소를 소재로 한 광고가 있다. 동자승이 세수대야에 물을 담아들고 해우소에 들어가 일을 보고 있는 큰스님을 기다리는 내용이다. 그 장면에서 동자승이 들고 있는 물이 밑씻개물이다. 해우소 안에서 큰스님이 기침을 하면 뒷물을 해우소 안으로 들여 놓게 된다.
현재 동남아 여러 불교국가에서는 아직도 뒷간 안에 밑을 씻을 물을 준비해두고 사람들이 용변 후 그 물에다 손을 씻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뒷물을 이용하는 전통해우소는 없다. 다만, 서울 강남에 있는 불교환경교육원에서는 옛 전통을 되살려 최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뒷물을 시도하고 있다.
○ 뒤지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화된 뒤지는 식물의 잎이었을 것이다. 비교적 잎이 넓고 구하기 쉬운 것으로는 호박잎과 박잎이 있었다. 옥수수의 속껍질도 좋은 뒤지였다. 그것을 모아두었다가 부드럽게 비벼서 사용했다. 겨울철에는 주로 볏짚으로 대신하였다. 이러한 뒤지는 똥과 함께 섞여서 썩 좋은 퇴비가 된다.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풍신수길은 왕겨로 밑을 닦았다고 한다. 그의 원찰(願刹)이자 별장이었던 서본원사(西本願寺) 해우소의 큰 독에 왕겨가 항상 그득 담겨 있었다고 한다.
전통해우소에서는 낙엽이나 짚 등을 자루에 항상 담아서 용변칸에 비치해두고 그것으로 밑을 닦았다. 뒤지와 매질(媒質)의 겸용이다.
2) 해우소 관리 실태
전통해우소라도 현실적으로 모두 매질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매질 확보, 일손 부족 등으로 매질 공급이 원활치 못한 곳도 있다. 다른 전통해우소들은 대개 매질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매질을 사용하지 않은 해우소는, 울진 불영사처럼 퍼세식으로 변조의 구조를 바꾸거나 화순 쌍봉사의 경우처럼 아예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다. 매질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우소도 생태적일 수가 없다. 구조만으로는 친환경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해우소 이용자들은 대개 뒤지를 화장지로 쓰고 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일반 두루마리 뒤지(화장지)에는 방부제와 표백제를 비롯해 각종 화학물이 들어가 있어서 자연발효가 잘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미생물들을 죽이거나 발효를 방해하기까지 한다.
대개는 해우소 용변칸에 뒤지를 따로 모으는 그릇이 있지만, 이용자들이 잘 지키지 않는다. 뒤지 뿐만 아니라 변조를 쓰레기통 쯤으로 알고 포장지, 생리대, 담뱃갑, 비닐, 캔 등을 함부로 버리기도 한다. 때문에 변조칸에서 수거한 거름을 채마밭으로 그대로 실어내지 못하고 일일이 골라내는 수고로움이 있다.(사진 : 송광사 해우소 변조칸)
6. 전통 해우소가 사라지는 까닭
사찰 해우소는 수세식 화장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생태적 화장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점차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첫째,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서구화이다. 인식의 변화로 사찰을 찾는 외래객들이 전통해우소를 외면하고 쾌적하고 편리한 서구식 수세식 화장실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전통해우소의 개방구조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당국에서도 외국인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선입관에 얽매여 전통해우소를 버리고 수세식 화장실로 개조할 것을 끊임없이 압력을 넣고있다. 불교계 역시 전통해우소 개보수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는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35억원의 지원안이 통과되었다.
둘째,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사찰을 찾는 외래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앞으로 주5일제가 되면 사찰을 찾는 내방객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따라서 전통 방식의 처리방법으로는 늘어나는 분뇨량을 매질을 이용한 자연발효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변조의 분뇨가 빨리 차면 자연발효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관리와 수거가 쉬운 수세식으로 대체되고 있다.
셋째, 사찰의 경제구조의 변화이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직접 농사를 짓는 절이 거의 없다. 농사를 짓던 사하촌(寺下村)도 거의가 관광시설지구로 변하였다. 따라서 해우소에서 나오는 거름을 소비할 곳이 없어졌다. 설령 몇 뛔기 짓는다 하더라도 손쉬운 화학비료에 의존하기 때문에 해우소를 통해서 나오는 똥거름을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넷째, 생활패턴의 변화로 사찰 건축의 구조와 관리 시스템이 많이 바뀌었다. 난방과 취사의 주원료가 나무에서 석유와 가스같은 화학연료로 바뀌면서 온돌방이 없어지고 아궁이가 없어졌다. 따라서 중요한 매질의 하나인 재(灰)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다섯째, 일손 부족이다. 변조가 워낙 크다보니 관리하고 수거하는 일도 사찰의 대사(大事)이다. 예전에는 사중(寺中)에 기거하며 잡일을 하는 인력이 많았으나, 지금은 구인난에 처해있다. 따라서 인력부족으로 인해 해우소 관리가 매우 힘든 상황이다. 그리고, 현재의 기술로는 전통해우소의 분뇨를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섯째, 전통해우소는 건축비가 비싸다. 전통해우소는 목조와가(瓦家) 구조이기 때문에 건축비가 상상 외로 많이 든다. 더구나 사찰해우소의 규모가 날로 대형화되면서 재정에 압박을 더욱 가하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따라서 사찰에서는 전통해우소를 거부하고 적은 돈으로 손쉽게 지을 수 있는 수세식 화장실을 선택하게 된다.
7. 그 밖의 전통해우소들
1) 양산 내원사
내원사는 비구니 사찰로, 천성산 용연천의 최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비탈에 자리한 해우소는 맞배기와지붕에 중층다락구조의 전통형태를 갖추고 있다. 다만, 판벽을 대신한 회벽과 마루식 나무바닥을 대신한 시멘트 바닥이 전통과는 멀다. 해우소 안에는 톱밥을 담은 함이 있고, 작은 바가지로 톱밥을 퍼서 변조칸에 뿌리도록 되어 있다. 변조칸에서 나온 거름은 공양칸에서 나온 과일껍질 등과 한데 버무려져 삭힌 뒤에 봄에 텃밭 농사에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냄새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2) 안성 석남사
옛 해우소를 헐고 그 자리에 다시 복원한 새 해우소이다. 석축에 중층다락구조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아래위로 판벽을 치고, 맞배기와지붕을 앉었다. 아래위칸에 살창을 넣고, 용변칸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을 뚫었다. 변조칸은 널문 대신 대나무 발을 내렸다. 낙엽이나 톱밥과 같은 매질(媒質)을 보관하는 공간이 따로 없는 것이 아쉽다.
3) 김천 청암사
청암사는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이다. 해우소는 절 마당에서 뚝 떨어져 있는데, 스님들은 '정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해우소는 판벽을 친 맞배기와 중층다락집이다. 변조칸에 칸막이를 두고 낙엽이나 마른 풀잎 등을 한데 모아두었다. 용변을 보고는 바가지로 그것을 퍼서 변조칸에 넣어서 덮는다. 아주 깨끗하고 청결하다. 비구니 스님들이 그것을 모아서 채마밭에 뿌려 거름으로 쓰고 있다.
4) 송광사 불일암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집의 아담사이즈이다. 부연이 없는 홑처마인데도 처마를 길게 뽑았다. 아마도 비를 막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위층의 양쪽 옆면은 살창없이 널판으로 판벽을 쳤지만, 뒤쪽은 통풍을 위해 긴 살창을 두었다. 아래층 변조는 위쪽에다 살창을 두고, 아래쪽에는 기와와 흙으로 벽체를 쌓았는데, 벽체의 문양이 참 우아하다. 사찰의 토담에서도 흔치 않은 문양이다. 뒤쪽으로는 시원한 대숲이 있다. 대숲에서 나온 찬 공기가 변조의 퀴퀴한 냄새를 깨끗이 없애준다.
5) 삼척 영은사
산간절치고 해우소 덩지가 크다. 여러 차례 보수를 해서 그런대로 깨끗하다. 해우소의 위치가 좋다. 아래층 변조가 밭으로 이어져 있어서 작업동선이 짧고, 따라서 똥오줌을 밭으로 옮기기가 한결 수월하다. 해우소 안에 '측간 신위' 위패까지 놓여 있다.
6) 화순 쌍봉사
해우소가 둘 있다. 수세식으로 지은 스님들 전용 해우소는 담장 안에 있고, 공중용 해우소는 담장 바깥 주차장 옆에 있다. 원래는 경내에 있었으나, 담장을 새로 쌓고 주차장을 만들다보니 해우소가 바깥에 남게 되었다. 윗층의 용변칸은 판벽과 회벽은 반반씩 쳤다. 남녀 구분이 되어 있으나, 칸칸이 문짝은 따로 달지 않았다. 내부는 비교적 깨끗하지만, 아래층 변조를 콘크리트로 쳐서 옛 모양을 잃어버렸다. 그 바람에 냄새도 나고 관리까지 잘 되지 않아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게다가 비가 오면 똥오줌물이 개울로 스며들 위험이 있다.
7) 울진 불영사
개울이 있는 비탈에 중층다락구조를 두고 맞배지붕을 얹었다. 근래 새로 지으면서 용변칸은 판벽을 치고 바닥도 마루를 깔았다. 용변칸에 전통을 지켜 따로 문을 달지 않았으나, 변조칸은 콘크리트를 쳤다. 시멘트 변조는 분뇨수거차가 1년에 몇 차례 와서 똥오줌을 수거해가는 절충형이다. 지난번 루사 태풍 때 빗물에 의해 흙이 패이는 바람에 시멘트 변조가 무너질 뻔했다.
8) 오대산 중대사자암
오대산 중사자암의 너와지붕 해우소는 국내 유일한 해우소이다. 너와는 능에라고도 하는데, 지름 20센티미터쯤 되는 소나무를 길이 60-70센티미터로 잘라, 도끼로 세로로 쪼갠 작은 널빤지를 말한다. 적어도 5년 안에는 한번씩은 너와를 갈아주어야 하는데, 게으럼을 피워서인지 지붕이 엉성하고 허술해져 있었다.
9) 안동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목조건축물을 지닌 전통사찰이다. 그러나, 모두가 근래 새로 개조한 정화조식 화장실이다. 세 곳 가운데 한 곳만 전통 칸막이 해우소를 흉내내고 있다.
10) 오대산 영감사
비구니 사찰인 영감사의 해우소는 깔끔하고 위생적이다. 외양이나 내부구조는 전통해우소와 약간 다르지만, 나무바닥에 기름칠을 해서 매우 깨끗하다. 스님이나 신도들은 맨발로 드나든다.
11) 여천 흥국사
범종각 아래 저만큼 따로 떨어진 위치에 있다. 일(一)자형 중층구조의 작은 해우소이다. 기와지붕에 판벽을 사방으로 둘러치고, 측면과 뒤쪽에 살창을 두고 있다. 남녀 출입구가 따로 되어 있지만, 칸칸이 문짝은 따로 달지 않았다. 변조 뒤로 터밭이 멀지 않다. 현재도 사용 중이긴 하지만, 지은 지 오래 되어서 부출에 올라 앉으면 불안할 정도로 매우 허술하다. 곧 퇴역하게 될 해우소이다.
12) 괴산 각연사
비탈에 있던 옛 것을 허물고 그 자리에 깔끔하게 새로 지었다. 원형을 흉내낸 중층구조이지만, 용변칸에는 칸칸이 문짝을 달고, 아래층 변조는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치고 정화조를 설치했다. 뒤쪽으로는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13) 남원 실상사
경내에 해우소가 둘 있다. 옛것은 평지에 단층구조이며, 맞배지붕에 판벽을 두른 것이다. 옛 것은 폐쇄된 지 오래되어 현재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근래 새로 지은 생태해우소는 판자를 이용해 평지에다 다락구조로 지은 것이다. 용변칸에는 각기 문을 달고 내부에는 각각 가로 세로 20센티 크기의 창구멍을 내어 부출을 딛고 앉으면 먼 산과 들이 보인다.
14) 안성 칠장사
맞배지붕 중층다락식에다 남녀 출입구를 따로 두고 있다. 용변칸은 목조이지만, 아래층 변조칸은 시멘트벽을 치고, 살창을 두고 있다. 용변칸에는 소구유처럼 생긴 소변기를 마련해두었으나, 이용자들이 조심하지 않아서 주변이 지저분하다. 변조칸이 밭에 한데 붙어있어서 똥오줌을 운반하기에 쉬운 위치에 있다.
15) 영주 부석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로 손꼽히는 영주 부석사의 해우소는 비탈에 세워진 중층다락구조이지만, 관리시스템은 정화조식이다. 용변칸은 목조에다 회벽을 쳤고, 변조칸은 콘크리트로 벽체를 만들었다. 남녀로 구별된 용변칸에는 각각 문이 달려있고, 내부의 변조는 사기제품이다.
16) 부안 내소사
내소사에는 해우소가 둘 있다. 두 칸 짜리 맞배지붕 건물이 옛 것이다. 중층다락구조는 전통해우소 모습 그대로이다. 변조칸 뒤켠에 대나무가 우거져있어서 채광과 환기에 장애를 주고 있다. 작은 절이 아닌데도 해우소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다.
17) 공주 영은암
경사지에 다락형으로 지은 전통해우소이다. 너무 낡아서 곧 새로 지을 계획으로 있다. 공주시에서 마곡사 일원을 관광지로 개발 중이기 때문에 시멘트를 써서 수세식으로 짓게 될 것으로 보인다.
18) 고성 건봉사
낙서암 옛 터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 가운데 길이 나있다.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로이다. 연못을 지나 왼쪽으로 저만큼의 자리에 해우소가 있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지만, 건봉사의 규모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해우소였을 것이다. 계곡 건너 대웅전 지역에도 대중이 두루 쓰는 큼지막한 해우소가 있었을 것이다.
8. 나가는 말
지금 시대에 똥은 애물단지다. 각종 화학비료가 똥을 대신하기 때문에 똥의 소비처가 없어졌다. 반면, 공급은 인구증가와 비례해 자꾸만 늘어나 똥은 골칫거리로 등장하였다. 게다가 쾌적한 환경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가 팽창하면서 똥의 재화적 가치는 커녕 환경문제의 오염원(汚染原)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새로 건축되고 있는 사찰 해우소의 형태는 세 가지이다. 자연발효식 전통해우소와 수세식 화장실, 그리고 그 둘을 혼합한 화장실이 그것이다. 혼합 화장실의 경우는 겉만 중층다락형일 뿐 내부구조나 시스템은 공원에서 볼 수 있는 수세식 화장실이다. 모두다 나름대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시도로 최근 화성 신흥사 등 몇 곳의 사찰에서는 수세식 화장실에 중수도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리고, 초기 투자가 부담이 되지만, 유기물 제거효율이 비교적 높고 유지 관리가 쉬운 미생물 조정조를 이용한 발효식 화장실도 여러 사찰에서 선호하고 있다.
전통해우소가 생태적인 해우소임에는 분명하지만, 앞서 언급한 조건 아래에서는 옛 전통을 고수하기가 무척 어렵다. 다만, 자연과 인간이 하나되는 '음식→똥→거름→음식'이라는 전통해우소의 생명 시스템을 현실에 맞게 연구개발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끝)
첫댓글 에구~~ 울 주인님이 올리는 자료들은 언제나 질어서 한번엔 절대 못 읽어봄... 몇번 들락 거려야 겠당~~~ 앤경도 찌고 와야겄네.
헥헥~ 저 글을 다 읽느라 @@ 저도 앤경 찌고 두 번에 걸쳐서 읽었슴다~~ ㅋㅋ
출가수행자는 잘 싸고 버리는 무소유(無所有)를 덕목으로 한다. 결국 '해우'라는 말은 '버림'과 '무소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버림과 무소유의 공간인 해우소는 수행의 공간일 수 밖에 없다... 와~ 힘들다. 잘 읽었습니다.
음....................................어흐흐... 아무생각없었거늘...--" 음.......이토록.. 쪼깨보다가 말았음..--" 다시 보겠나이다..--" 괜히 긴글 올리시진 않았을터...ㅎㅎ
아이고~~~그 좋은 말들이 와 이래 길게 설명이되어야 하는지...좀 간단하게 하면 좋을낀데요..어쨌거나 저는 징검다리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