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예수 부활승천하셨네
[마태오 27장63-64절]
"각하, 그 거짓말장이가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만에 자기는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것을 저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이 되는 날까지는 그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백성들에게는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떠들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심한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40-41절]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산 예수를 만난 사람들
<곧 뒤따라 온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 가 그도 역시 수의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수의와 함께 흩어져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 (요한20:6-7)>
몇 년 전에 국제적으로 조직된 탐사팀이 이천년간 기독교의 숙원이던 예수의 무덤을 드디어 찾았고 그 안에서 예수의 시체를 감았던 고운 베를 고스라니 발굴했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했지요.
그 베에는 당연히 예수의 몸 기름이 베어있었고 적외선 촬영으로 예수의 몸매와 얼굴의 생김새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물적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라디오 대담 푸로그램에 초대된 사람이 예수의 수의에서 유전인자 DNA를 채취하여 예수를 복제할 계획임을 밝혔습니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엄숙하게 자기가 복제할 예수의 양육권과 그 후 활동의 감찰권 또는 수익권을 자신이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이 복제예수는 곧 재림예수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곧 이어 청취자들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성경을 인용하면서 복제예수는 재림예수가 아니라고 반박하는 제법 성경에 통달한(?) 사람들과, 하느님의 아들 즉 하느님 자체를 복제해 내려고 하는 과학의 오만함에 통분한 신자들이 열띈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나는 이 라디오 대담을 여행하는 중 차에서 듣고 한참 웃었지요.
예수의 수의를 발견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비선폭포를 꼭 한번 더듬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이번에 예수를 복제한다는 소리를 듣고 또 한번 묘한 충동을 느낍니다.
선녀들이 벗어둔 옷자락을 발견했다.
그 옷자락에 묻어있는 선녀의 몸 기름에서 선녀의 DNA를 채취할 수 있었고 드디어 비선폭포에 내려왔다가 옷을 잃어버린 바람에 하늘에 돌아가지 못한 비운의 선녀를 복제하여 미스 월드에 출전시킬 예정임을 발표할 때가 되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해보았습니다.
쥬라직 팍이라는 영화는 분명히 가상이지만 사실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룡의 화석과 함께 그 피를 빨아먹은 모기의 화석도 있음직한 이야기이며 DNA를 뽑아 복제양을 이미 수백마리 생산해 낸 생명공학이 쥬라직 팍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쥬라직 팍이 사실일수 있다고 믿는 사람까지도 나의 선녀복제 계획을 들으면 나더러 완전히 맛이 갔다고 고개를 흔들겠지요?
아무리 우리가 어렸을 적에 옷을 잃고 돌아가지 못한 가련한 선녀를 생각하며 온 밤을 울어 지샜다 할지라도 그런 선녀와 선녀의 날개옷이 있었다고 믿는 현대인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항상 군중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셨습니다.
물론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가르치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군중들에게 가르치신 내용을 보다 자세히 이해시키고 또 자기를 대신할 사명을 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따로 구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이전의 포교활동과는 정 반대로 부활한 예수는 (사도행전을 쓴 제자의 증언에 의하면 40일 동안이나 세상에 계셨지만) 한번도 군중에게 나타나신 일이 없습니다.
극소수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을 뿐입니다.
어머니와 이모 등 너댓명의 여자들과 훨씬 후에 환상 중에 만나본 바울까지를 포함하여도 모두 헤아려 스무명을 넘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가장 절실하게 확인하고싶어한 사람들은 그를 죽이는 일이 불의임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고 나서 행여 그의 말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불안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여러 가지 혜택을 입은 사람들도 그의 부활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나흘을 굶은 후 떡을 배불리 얻어먹은 두차례의 사건을 겪은 9천여명의 군중,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고생하다 고침을 받은 수많은 병자들, 저주의 표본으로 인간사회에서 쫓겨났던 나병까지 깨끗이 고침을 받아 인권을 회복한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얻은 사람들만은 예수의 부활을 확인함으로써 자기들이 받은 은혜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확신하고 싶었을 것이며 은인의 승리를 축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 정의와 평화 그리고 온갖 속박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과 가족까지 그리고 얻을 수 있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철저하게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잡히러 가는 순간까지 자기들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 있다가 그 꿈이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송두리째 무너지는 좌절과 허무를 뼈저리게 맛보고 자신들의 생명까지 위협을 느껴 숨어서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입니다.
이들에게만 부활한 예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빌립3:10) 희망의 확신을 가지고(고후3:12) 예수를 증거하며 그가 뿌린 하느님의 나라의 씨앗을 가꾸어 모든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되게 할 일꾼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희생이 아니라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박해를 받고 그 때문에 좌절하고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하고 절규하는 자들에게만 예수는 부활하며 그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부활은 객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주관적인 사건이었음을 말합니다.
비록 누구든지 무덤에서 수의를 찾아내고 수의에서 체액을 채취하여 부활을 객관화 시켰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부활한 예수를 환희에 넘쳐 찬양할지라도 예수는 그들을 만나시지 않습니다.
물론 나는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 같은 확신을 주는 사람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정의를 위해 싸우다 절망할 만큼 박해를 받은 일도,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버린 것 하나도 없는 나에게 예수가 찾아올 까닭이 없겠지요.
해마다 부활절기가 되면 그를 죽이는 편에 버젓이 서있는 험상궂고 추악한 군상들을 발견할 뿐이지요.
그래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을 Good Friday로 기념하면서 축제일을 최대한으로 즐기기 위해 들놀이를 나갑니다.
그리고는 사흘째 되는 새벽, ‘부활절 헌금’이라 박힌 봉투에 들놀이에서 쓰고 남은 잔돈 몇 장 넣어 가지고 교회에 갑니다.
“할랠루야, 구주예수 부활 승천하셨네!” 구성지게 노래한 다음 “부활예수 만나러 새벽예배에 나오신 모범적인 성도님”이 되어 목사들, 장로들, 집사들과 근엄한 악수를 나눕니다.
설령 예수가 그들을 찾아 왔더라도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볼 시간여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