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사당 압구정
1995.07.10 압구정 마을의 역사 제10회 글 / 임 시 현
기록에 보면 압구정은 산장 비탈위에 정자 본체가 웅장하게 있고 그 주변 산 밑에 큰 부속건물이
여러 개 민가와 같이 있다. 그러니까 부속건물은 압구정에 속한 관원들과 흥청대는 압구정을
시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을 장자마을이라 했고 장자마을이라는 말은
부자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나중에 말이 변천되어 양지마을 이라 했으며 느티나무
근처 압구정리 210번지 일대를 말한다. 그리고 압구정리 188번지인 동쪽야산 강 언덕 위 은행나무
밑에 또 작은 정자를 압구정과 같이 세웠는데 그 작은 정자는 현판도 모르고 용도도 기록이 없다.
겸제정선의 진경산수화에도 이 작은 정자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아 틀림없이 압구정은 큰 정자와
작은 정자를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림에 나타난 집의 구조를 보아 정자 같지는 않다.
그러면 이 알 수 없는 건물을 몇 가지 역사속의 근거를 바탕으로 생각해서 정리해 보자.
첫째. 한명회는 자기의<과거를 깊이 스스로 뉘우치는 마음에서 압구정을 짓는 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본성이다. 한명회가 과거를 뉘우치는 마음이란 정란 때 단종과
왕족 정승판서 고관들 70명을 기록한 살생록을 작성한 것이 한명회였다. 살생록에 기록한 사람들을
전부 죽여 가며 한명회는 권좌에 앉았지만 그의 마음은 평생 괴로웠을 것이다. 이것은 정사에 기록된
한명회의 말과 행적이다.
둘째,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광주에 있는 자기농장을 갈 때는 언제나 두모포에서 배를 타고
압구정 강변으로 건너와서 강변의 은행나무 밑의 작은 정자를 바라보며 강변을 거쳐 지나 다녔다.
이것은 야사에 기록된 한명회와 신숙주가 압구정에서 술을 마시며 환담을 하고 있을 때 김시습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오는 모습을 보고 대화 하는 이야기중의 일부이다.
이 두 가지 근거를 풀어보면 한명회는 살생록을 작성했지만 한명회 손으로 직접 죽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살생록에 기록된 인물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부 살해되었다. 그러니까
한명회는 악연의 종자인 인을 제공했으니 살생과 다를 것이 없다. 한명회는 부귀와 권세가 높아
갈수록 참회의 마음도 컷을 것이며 무참하게 죽은 영혼들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달래지 않으면 못
견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뉘우치고 또 뉘우치고 해서 풍수 좋은 곳에 압구정을 짓고 자기도 즐기며 압구정과
거리가 떨어진 건너편 강 언덕 은행나무 앞에 사당을 짓고 영혼들을 모셔놓고 제사를 모셨을 것으로
본다. 형식은 유교의 제례 나무속의 진혼제 중에 어떠한 형식이든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행사를 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여기서 행사를 할 때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자세한 내막도 모르고 구경삼아
동참하고 많은 음식들은 마을사람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당에서의 의식은 한명회가 압구정을 떠난 이후에도 오랜 세월을 계속하다 세월이 지나고
압구정을 관리하던 사람도 철수하고 이 사당행사도 차차 희박해질 때 압구정 마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이 사당행사에 참가하면서 압구정 마을 사람들이 사당 행사를 주도하게 될 무렵은
의식자체가 완전히 변질되어 마을의 무사태평의 기복신앙으로 무속 굿을 하는 이 마을 도당으로 되어
매년 이곳에서 마을 도당 굿을 했다.
긴 세월 마을 도당으로 쓰여지다. 압구정이 훼철되기 이전에 한강 홍수로 강 언덕이 무너지면서
이 도당도 강물에 떠나갔다. 나는 이작은 정자를 사당으로 정리해 보고 있는데 어느 사람은 숙몽정
이라고 말한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숙몽정은 압구정 서쪽에 뒤진이 큰 산밑 강 언덕에 참판 홍석보가
지었다고 되어있다. 은행나무 밑 사당은 압구정 동쪽 야산언덕에 자리 잡고 동쪽 까치 벌을 바라보며
숙몽정은 압구정 서쪽 홍무개울을 바라보아 위치상으로 정반대에 있었다.
압구정 마을 사람들은 도당을 잃고 신앙의 의지 처를 찾아 구렁밖의 선왕당을 다니며 오랫동안
마음을 의지하고 살다. 일본통치 시대에 와서 압구정의 자기 사재로 이 은행나무 밑 언덕에 도당을
뚝섬 자기 집과 마주 보게 짓고 매년 도당 굿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도당을 압구정리 마을에 인계
했다. 그때부터 압구정리 사람들은 매년 거르지 않고 겨울이 오기 전에 집집마다 쌀과 돈을 거두어
도당 굿을 했으며 이 마을은 도당 굿을 했으며 이 마을은 도당 굿 날이 곧 축제일 이었다.
도당은 규모가 작은 편이며 정면에 탱화류가 있었는데 불화는 아니고 인물탱화로 보아 산신탱화나
용왕탱화로 볼 수 있으며 그때 무당의 굿 하는 형식이나 집집마다 개별적으로 소지를 하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의식도 없고 보통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는 토속신앙의 도당 굿 이었다.
그 당시에 개인이 집에서 무당굿을 하면 일본경찰의 심한 제재를 받았는데 아무 제재를 받지 않았다.
이 글은 압구정리의 도당이 있기까지 유래를 정리 해본 것이지 어떠한 고증은 없다. 원래 역사에서
정사는 절대 권력자가 사관을 통해 기록하는 것이어서 권력자 중심으로 평가 되어있고 야사는 후세에
학자들이 자기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필자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그래서 역사는 수학답안과 같이
정확한 평가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