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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신데렐라’ 이야기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
자정을 알리는 종이 ‘땡’하고 울리기 전에 신데렐라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밖에서 벌어지는 연회의 흥취에 젖어 마냥 놀다보면 재투성이 신세로 전락한다. 나는 얼마 전 나카자와 신이치(中澤新一)교수의 『신화, 인류최고의 철학』를 가지고 세미나를 하던 중, 『신데렐라』의 민담의 원형(原型)속에서 갖는 ‘자정의 경고’ 의미가 현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여성인 내게도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찍 들어와라, 조심해라” 같은 부모님이 말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늘 따라 다니며, 내 안에 있는 의존성과 길들여진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일깨워 주어, 스스로 사회적 활동의 영역을 좁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21세기를 맏이하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은 다음 세대의 여성들을 위해 단단한 주춧돌을 놓아주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이 자기실현을 위해 좀 더 분발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여성은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법률, 문화 등에서 구조적으로 약자의 자리에 있다. 1,2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하거나, 인사 고과 등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남자들을 재치고 승진하게 된 경우 그들에게 돌아오는 눈초리는 곱지 않다. 그들이 이룬 성취를 인정해 주지는 못할망정, ‘드세다느니’,‘재수 없다느니’,‘누가 저런 여자랑 살지 불쌍하다느니’, 비아냥거림이 난무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성공의 문턱 앞에까지 힘차게 달려와 놓고서도, 막상 자신의 성공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여성을 길들여 온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뿌리 깊숙이 여성의 무의식까지 박혀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나는 이와 관한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패션잡지 ‘런웨이(Runway)'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와 그녀의 개인 비서인 앤드리아 삭스의 직장생활 분투기를 다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그것이다. ’죽이는 캐스팅에, 죽이는 의상, 죽이는 대사‘라는 평과 함께 이 영화를 ’죽이지 못해 안달 난‘ 많은 이들의 인터넷 악플을 접한 뒤라, 영화를 보는 내내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직장 생활을 십 년 가까이 한 내 입장에서 공감 가는 내용도 많았고, 직장내에서의 수직 관계의 실상을 보여준 것은 어느 정도 통쾌했지만, 악마라고 불리는 편집장 미란다가 지위와 명성을 얻는 대가로 남편과 이혼하게 되는 설정은 여전히 여성의 성공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회적 편견이므로 씁쓸한 뒷맛을 느꼈다.
앤드리아 삭스가 ‘런웨이’에 사표를 던지고 신문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최고의 추천서를 써준 미란다가 자신의 차에 오른 뒤,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앤드리아를 보고 찡긋 윙크를 하던 장면을 통해, 나는 사회 초년병 앤드리아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던 것을 인정하는 미란다는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성숙한(물론 완벽한 직장 상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멘토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치 쓴 약 뒤에 주어진 사탕처럼 어느 정도는 사탕발림의 설정이지만 그 정도라면 21세기의 마녀(조력자)로 충분한 자질이 있다는 것이 내 고된 십년 직장생활 고충에서 얻어진 잠정적 결론이다. 영화에서 미란다를 악마라고 칭한 점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사실 악마보다는 마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원작가는 극렬한 여성주의자들을 의식했는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마녀 대신 악마란 칭호를 붙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녀에 대한 이미지는 어린 시절 읽은 동화책에서 시작된다. 동화 속에서의 긍정적 여성상은 착한 딸이고 말 없는 부인으로 소극적이고 비활동적으로 묘사된다. 반면 계모는 늘 자의식이 강하고, 마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되 사악한 존재로 그려져 있다. 한마디로 못쓸 여자, 매력 없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알게 모르게 어린 시절 읽고 들었던 동화를 통해, 그 속의 내재된 여자를 통제하려는 남성들의 이데올로기를 흡수하게 된 여성들은 자신의 주장을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다른 여성을 보면 불편한 감정이 앞서게 되도록 조건화 되어졌다. 게다가 조선 중기 이후 부계 혈통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삼종지도’는 주체적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여성의 자립성을 뿌리 채 뽑아내려 노력했다. 이런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에서 특히 한국 사회의 여성들은 스스로를 지나친 여성성에 묶어두며 자기 계발을 가정 안에서만 하려고 노력해 왔다.
특히 결혼 문제 앞에서는 남자가 선택권을 갖고 여성은 거부권만 소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무력한 존재인 냥, 그저 때 되면 나이에 밀려 또 다른 부양자의 그늘 속으로 이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사정이 많이 달라져서 이제는 비혼을 원하는 30대 초반의 여성들이 열 명 중 두 명이 된다는 뉴스를 접하게 된다. 인류의 미래나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이들 여성들의 선택은 위협적인 것이지만, 여북하면 결혼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킬 만큼의 용기를 갖게 되었을까? 이는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 여전히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으로 하여금 억압을 종용하는 제도라는 확실한 반증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500가지가 넘는 ‘결혼을 통해 신분의 변화를 모색하는 신데렐라’ 민담은 21세기에 와서 비혼을 통해 이를 깨어보려는 여성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여성들은 어디엔가 기대어 보호받고 싶어 한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안에 누적되어 온 억압과 차별의 벽을 오히려 자신을 감싸 주는 보호벽으로 생각하는 환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홀로 자립해서 살아가려는 독신 여성이나 이혼녀를 비정상적으로 규정하고 여성들 간의 분리를 조장하기도 하고, 분리를 조장해서 여성성을 상대적으로 남성성의 하등한 특성으로 몰고 가려는 남성 기득권에 교묘하게 이용되기도 한다. 나는 TV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덕분에 젊은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중심 소재를 공유할 수가 없다. TV 드라마에는 여전히 백자 탄 왕자님을 기다리며 동성의 여성들의 중상모략을 견디고, 남성의 바람을 인내하며 엄마와 같은 넓은 아량으로 결국은 왕자의 간택을 받는 현대판 신데렐라들이 ‘착하고 순하게 살자’의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내가 본 현대판 신데렐라의 전형으로는 줄리아 로버츠가 억만장자 리차드 기어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 뒤,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여성의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판타지로 변형한 80년대 헐리우드 신데렐라를 들 수 있다. 콜걸로 일하던 줄리아 로버츠의 다듬어 지지 않은 순박함에 매혹된 억만장자가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맏아 들였다는 논리는 지금처럼 많은 인구가 경제적으로 하류 계층으로 전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반드시 딴지를 걸어 봐야 한다. 가뜩이나 혼자 벌어서는 한 가족 부양하기도 힘든 판국에, 어느 세월에 자기계발이 채 되지 않은 여성을 교육까지 시켜 경제 전투에 전우로 동참시키겠는가? 시대를 막론하고 남성들은 사랑 앞에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이고, 결혼은 결혼이다’라는 양립 가능한 결혼관과 연애관이야 말로, 그들을 결혼 생활의 최대 수혜자로 만들었다. 그런 판국에 여기에서 반기를 들어봤자, 배려심 부족하고 드센 여자로 몰려 매 맞고 골병 나는 신세가 되었던 사례는 우리 어머니 세대에서도 넌더리나게 봐왔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감히 주장한다. 정말 성공하고 싶다면, 경제적 부와 명예와 합당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립하는 하나의 존재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여자가’로 시작하며, 여성이 갖고 있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약점을 교묘히 공격하는 사회와 제도와 못난 남성들 앞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뤄지는 횡포’ 속의 ‘억압 이데올로기’를 좀 바로 보고, 당당히 잘못 된 것을 지적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콜레트 다울링(Collette Dowling)은 의존성, 두려움, 열등감, 결혼에 대한 경제적, 정서적 집착과 무기력증, 취업이나 자시의 일에 대한 회의와 공포심을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본질로 파악했다.(『일곱 가지 여성 콤플렉스』84쪽, 현암사)
‘억압된 태도와 불안이 뒤얽혀 여성의 창의성과 의욕을 한껏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미계발 상태로 묶어 두는 심리 상태’가 콜레트 다울링이 정의한 신데렐라 콤플렉스이다.(위의 책 같은 쪽) 홀로 자립하는 것은 분명 책임감과 노력이 필요한 대단히 어려운 삶의 과업이다. 또한 이를 위해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일생을 걸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현실이다. 내 주장이,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피하고 전사처럼 사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살아가자는 것이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필요하다면 여성들도 자신 안의 남성성을 계발하고, 습득된 여성성 중에서 그릇된 것을 걸러내기 위해 자아의 실상에 정면으로 맞선 다음 자신 내부에 있는 의존성과 두려움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고 오히려 주장하고 있다. 또한 남성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경쟁자로서가 아닌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격려자가 되어 주자는 보다 진보된 주장을 펴고 있다. 내 논제 속에는 밀림의 아마조네스는 존재할 수 없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 역시 바라지 않는다. 남성들에게 주어진 역차별도 갈수록 많아지는 신세기에,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인간 내면에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균형감 있는 성장을 꾀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제는 ‘내 남편이 놀아서 창피해’ 라거나, ‘내 아내가 나보다 돈을 더 버니까 기분이 좋지 않더라.’ 는 가십을 보고 듣고 싶지 않다.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자들도 남성들처럼 가정생활에서도 만족스럽게 영위하고 있다는 그런 헐리우드 영화가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여성성 속의 ‘여성스러움’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자기주장을 할 줄 아는 여성을 보면 불쾌한 도전을 하는 상대라고 인식해서, 여성답지 못하다는 억지 논리를 펼치는 자들의 괴변을 잘 못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여성스러움’과 ‘자기주장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설령 ‘자기주장’이 ‘남성성’의 한 요소라면 기꺼이 수용하고, 섬세하고 부드럽고 분별력을 갖춘 여성성 본연의 성질을 더욱 계발하면 된다.
이제 우리는 동화를 다시 써야 한다. 계모가 악인으로만 등장 하는 동화, 늙고 결혼안 한 여자는 마녀로 등장하는 동화, 자기주장이 강한 여주인공이 쇠락하는 동화는 시대착오적이다. 어린 아이들이 읽는 동안 알게 모르게 수용하는 기존 질서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라면 정정해 줘야한다. 독일의 사회 철학자인 이링 페쳐는 최근 ‘동화 혼란 놀이’를 통해 새로운 여성성과 남성성의 모델로 주인공들과 서사 구조를 바꾸는 시도를 하고 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폴 오 젤린스키(Paul O. Zelinsky)처럼 칼데콧 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남성 그림책작가가 『세상에서 제일 큰 안젤리카』에서처럼, 새로운 여성성을 화두로 내세운 것은 베티 프리단이 60년대 서구 사회에서 <우먼 립 Women Lib.> 운동을 펼쳤던 시대를 연상시켰다. 더불어 그들 사회와 우리 사회에서의 의식 진보의 시차를 절감하게 해준다.
난 신데렐라가 아니야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신데렐라가 되기를 원한다.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로또 같은 행운을 바라는 심리 속에는 나약한 의존성이 숨어 있다. 그런데, 최근 번역 출판된 그림책 중에는 여자 주인공이 스스로 신데렐라가 아니라며 적극적으로 전세계가 구전 설화로서 원형을 공유하고 있는 ‘신데렐라’의 서사구조를 깨뜨린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주인공이기에? 글쓴이가 이렇게까지 호들갑일까 여러분도 궁금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암스테르담에 대학을 다닌 샤를로테 테마톤스란 그림책 작가에 의해 글과 이야기가 만들어 졌다. 그녀는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이본(異本)을 통해 들은 옛이야기와 민담을 한데 엮어 낸 다음, 로스라는 주인공 여자아이를 통해, 옛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재창조를 하도록 하는 독특한 시도를 해냈다. 책표지를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신데렐라’와는 상관이 없는 각기 다른 민담 속의 주인공들로 ‘<숲 속의 잠자는 공주>’, ‘<라푼첼>’,‘<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브레멘 음악대>’,‘<일곱 마리 아기 염소>’ 속의 주연들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겁 없는 소녀 로스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풍차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로스 앞에 빨간 모자를 쓴 소녀가 달려와 말한다. “신데렐라야 왜 이렇게 늦었어? 얼마나 걱정했다고.” 로스는 자신이 신데렐라가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지만, 빨간 모자를 쓴 소녀는 들으려고도 안한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본격적인 민담 속의 주인공들이 한데 모여 있는 창고이다. 그 중에는 멋진 구두 하나를 손에 들고 진짜 신데렐라를 천년만년 기다려온 왕자도 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 둘러싸인 로스는 왕자가 내민 구두를 신어 보게 된다. 구두는 로스의 발보다 훨씬 컸다. 로스는 확실히 자신은 신데렐라가 아니라며, 헐거운 구두를 보라며 왕자에게 말하지만, 결혼이 급했던 왕자는 로스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한다. 왕자는 로스를 말 잔등에 태우고, 헐거운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와 함께 왕궁으로 행한다. 숲 속을 가던 중, 어느 개암나무에 이르렀을 때, 숲 속의 비둘기 두 마리가 진실을 알려준다. “헐렁헐렁, 구두가 너무 크다.” 그제야 왕자도 로스가 신데렐라가 아님을 알고, 성질을 부리며 로스를 내려놓고는 훌쩍 떠나버린다. 구두를 챙겨가는 것조차 잊은 성급하고 멍청한 왕자가 불쌍했던지, 로스는 자신이 나서서 신데렐라를 찾기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난다. 그 때 갑자기 마녀가 나타나 로스의 앞을 가로막으며 또 다시 로스를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자신의 고양이를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제 로스는 마녀의 고양이도 찾아줘야 하는 과제를 맡게 된 셈인데, 숲 속을 헤매며 고양이를 찾던 중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배고픈 로스의 발걸음의 방향을 틀게 만든다. 잠시 후, 커다란 과자집이 나오고 헨젤과 그레텔이 등장해서 로스에게 과자를 권한다. 배를 채우고 다시 숲길로 들어선 로스는 거인이 벗어둔 장화를 신는 꼬마 아이를 만난다.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자 꼬마 아이는 마법의 힘으로 한 걸음에 10킬로미터나 가는 장화 덕분으로 쉽게 거인을 피하는데, 로스는 죽을힘을 다 해가며 거인의 추적을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뛰고 또 뛰어 좁다란 숲길로 들어섰을 때, 로스의 앞에는 둥근 문이 있는 저택이 보인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신데렐라의 마차가 보이고, 마부 역시 자신을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마차를 몰아 로스를 화려한 집으로 데려간다. 로스는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다.
호기심이 발동한 로스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랑곳없이 곳곳을 뒤진 뒤, 다락방에 올라간다. 깨끗하게 정리된 다락방에는, 무릎을 바닥에 대고 걸레질을 하는 여자 아이가 있다. 로스는 보고 들어서 알고 있던 바대로라면, 그 여자 아이가 신데렐라임이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역시 그 아이는 로스의 짐작대로 신데렐라가 맞았는지, 로스가 배낭에서 꺼낸 구두가 발에 딱 맞는다. 먼먼 이야기 속으로의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온 로스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창틀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마녀의 검정고양이를 발견한다. 또 다시 로스에게 해야할 일이 주어진 것이다.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마녀의 검정고양이를 돌려주는 일. 이렇게 로스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리고 로스는 기꺼이 모험을 무릅쓰고 옛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를 서슴지 않는다.
자신이 신데렐라가 아니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과업을 만들어나가는 모험정신과 개척 정신을 갖고 있는 자의식 강한 로스야 말로, 21세기 ‘신데렐라’의 주인공임을 샤를로테 데마톤스는 많은 옛이야기를 꼬아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로스가 진짜 신데렐라를 만나는 대목에서 석연치 않은 대목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 신발 맞지? 얼른 왕자님에게 가 봐. 널 애타게 찾고 있어.” 라는 로스의 권유와 진짜 신데렐라의 대답 “고마워. 이제 힘들게 청소하지 않아도 되겠다. 정말 고마워.”은 여전히 <신데렐라>의 민담이 갖고 있는 고루하면서도 여성차별적인 가치관을 답습하고 있는 소심한 작가관을 보여준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하여, 원형 속에 숨겨진 이야기의 화소와 스토리의 사회적 기능을 밝힌 나카자와 신이치(中澤新一)교수의 책『신화, 인류최고의 철학』에 따르면, 신데렐라의 ‘원형’은 중석기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이태리 지역에서 민담으로 구전되어 온 <신데렐라>를 1630년대에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한 『고양이 신데렐라』가 활자화된 최고(最古)의 <신데렐라>라고 한다. 이후 프랑스 루이 14세는 왕실용으로 만들기 위해 당시의 시인 샤를 페로로 하여금, <상드리용 Cendrillon>이란 프랑스 식 제목의 이야기로 꾸미게 했다. 이 이야기는 1697년에 발행된 『엄마 거위 이야기집 Contes de ma mere l'oye』에 실려있다. 샤를 페로의 이야기가 현대에 와서 월트 디즈니의 <신데렐라>의 근간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구전 문학으로서의 설화적 성격이 많이 상실되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미담을 채집하여 책으로 엮은 그림 형제의 경우에는, 『그림 형제의 독일 민담집』속에 당시 사람들이 직접 들려준 신데렐라 이야기인 <쥐를 뒤집어 쓴 소녀>를 담고 있다. 사실 원형에서부터 몇 가지 화소(話素)만 다를 뿐, 전체 서사에서의 핵심 요소는 한 뿌리에서 파생된 것이 입증된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유럽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9세기 것으로 알려진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실린 중국판 <신데렐라> 역시 서양식 신데렐라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나카자와 신이치의 위의 책 제 5장으 참조)
<신데렐라> 이야기는 전 세계에서 채록된 것만도 450종이 넘는다. 아궁이, 재, 연회, 개암 나무 등등, 많은 이본 속에서도 공통되는 화소들이 입에서 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재화되어 시대 상황에 맞게 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페로의 이야기나 그림 형제의 <신데렐라>는 당시 가장 낮은 층에 속한 부엌일을 하는 여자(본래 상드리용이란 뜻은 ‘재를 뒤집어 쓰다’임)가 임금이나 귀족 등 높은 사회 계층과 혼인을 통해 신분을 상승한다는 대리 욕망의 판타지이다. 봉건 지배구조 사회의 억압된 평민들이 도저히 현실적으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모순들을 상상의 세계 속에서나마 전복시켜 아쉬운 대로 만족했던 것이다. 민담은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입담 좋은 이야기꾼에 의해, 혹은 글발 좋은 작가에 의해 새롭게 거듭나는 순환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벌써 21세기. <신데렐라>의 원형이 만들어진 구석기 시대로부터 한참을 진화해도 꽤 했는데, 여전히 우리들의 아이들은 근세 봉건 시대에 페로에 의해 정착된 <신데렐라>의 이야기 속에서 나약한 여성성을 아무런 여과 없이 전수받는다. 월트 디즈니의 패권주의가 내건 상술 속에 희생된 우리들의 정서와 우리 다음 세대 아이들의 정서에는 교묘하게도, 보수적인 남성우월주의, 사회경제적 상층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의 자기정당화 패러독스가 숨어 있음을 이제는 두 눈 크게 뜨고 직시해야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장한다. 많은 옛이야기들은 시대에 맞게 다시 쓰여 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야기의 생명력이 살아날 수 있다.
발레 <신데렐라>도 현대화 되고 있다.
작년 10월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는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신데렐라>로 선보였다.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는 샤르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동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안무가인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는 새롭게 이를 각색해, 자의식인 강한 현대 여성 신데렐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게다가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닌, 약간의 금가루를 발등에 뿌리고 맨발로 춤을 추는 자연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아주 가끔 무용을 보러 가는 나는,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춤사위 보다는 무대 뒤쪽 모습과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의 시간들에 더 궁금증을 갖고 있다. 이 날 멋진 현대발레극 <신데렐라>의 배경음악은 1940년에서 1944년 사이에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Sergey Prokofiev)각 작곡한 <신데렐라>를 아주 드라마틱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는 유대인 대지주인 아버지와 음악성이 뛰어난 어머니 덕분에 5살 때 이미, <인도풍 갤럽>이란 곡을 작곡했다. 1904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림스키코르사코프로부터 피아노와 작곡, 음악이론, 지휘 등을 배웠고, 졸업과 동시에 당시 러시아(아니 세계 최고의) 발레 안무가인 S.P. 디아길레프로부터 발레 음악 작곡을 권유받아 발레과 연을 맺게 된다.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1918년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예술가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던 러시아는 1933년 여러차례 귀국 종용을 통해 그를 러시아로 다시 불러들인다. 당국의 비판 속에서도 프로코피에프는 <로미오와 줄리엣>,<알렉사드르 네프스키>등의 대곡을 작곡하는 한편 총 8편의 오페라, 7편의 발레, 10곡의 교향곡과 10곡의 협주곡을 남겼다.
그가 샤르를 페로의 동화 <신데렐라>를 주제로 만든 3막 극의 발레 음악은 1945녀 11월 21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 후 그는 이 3막의 발레 음악을 오케스트라 모음곡과 피아노 모음곡으로 편곡하여 세상에 다시 내어놓았다. 이번에 소개하고 있는 음반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행한 것으로, 마카일 플레트네프(Mikhail Pletnev)와 마르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h)가 함께 피아노로 연주한 모음곡 중, 작품 87번에 해당하는 곡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르헤리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가족과 함께 10대 중반에 빈으로 이주해, 프리드리히 굴다와 스테판 아쉬케나지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은 현존하는 여성 피아니스트 중 가장 타건이 강력한 팜프 파탈이다.
1957년 제네바 국제 콩쿨 우승을 시작으로 196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쿨에서 우승함으로서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한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모습을 살펴 본 사람은,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이 영락없이 저런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하게 될 것이다. 바하에서부터 베토벤, 슈만, 리스트, 라벨 뿐 아니라, 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에프 등등의 작곡가들이 만든 피아노곡과 피아노 협주곡들을 섭렵하고 최고의 기량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웬만큼 기가 세지 않고서는 누구든 압도당하게 된다. 도끼자루처럼 굵은 팔목으로 내리치는 피아노, 본질을 꿰뚫어볼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 거침없이 펄럭이는 다듬지 않은 머리칼은 그녀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바로 그녀가 <신데렐라>를 피아노로 연주한 이 음반은 그녀와 함께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는 프레트네프에 의해 2대의 피아노 연주로 재편곡된 곡이다.
게다가 이 음반은 샤를 페로의 <어미 거위 이야기 집>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만든 <잠자는 숲속의 공주 파반느>,<미녀와 야수의 대화>을 포함한 다섯 편의 소품도 담고 있어, 그야말로 동화를 위한 음반이다. 내가 이 음반 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곡은 5번째 트랙에 있는 <신데렐라 왈츠>이다. 왈츠이지만, 비엔나 풍의 왈츠를 예상했으면 뜻밖의 스산하고 약간의 으스스함에 꺄우뚱해질 것이다. 하지만, 대단히 동화적이며 몽상적이다. 이런 음악적 분위기가 계속 깔린다면, 나 역시 요정이 나오는 짤막한 동화 하나는 뚝딱 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첫댓글 제 생각에는 페로의 신데렐라는 그런 혐의가 분명히 짙지만 그림 형제의 이야기는 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도 둘 사이의 차이를 지적했더랬지요. 더 나아간 이야기로 들고 있는 미크마크 인디언의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점은 보이고 있는데요. 그걸 단지 신분상승의 욕구로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 안에서 여자주인공의 능동성이 충분히 살아나고 있다고 보거든요. 주어진 환경 속에서 그들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해내지요. 그래서 저는 옛이야기를 다시 쓰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작업이 될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만약 그 일을 해내고자 한다면 엄청난 공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구요. 전 옛이야기는 옛이야기인 채로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새로운 옛이야기를 쓰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는 옛사람이 아니니까요.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고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쓰는 것들이 새로운 형태를 지니게 된 거라고 봅니다. 동화나 소설들 말이지요. 그리고 옛이야기를 자세히 깊게 들여다보면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이미 풍자하여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페로의 상드리용도 저한테는 그렇게 보이더라구요. 이 이야기가 궁정의 귀족층에게 주로 들려졌다는 사실도 꽤 재미있는 역설인 거 같구요.
많은 신데렐라 이야기 가운데 페로의 이야기가 채택되고 그렇게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이미 현대인들에게 그런 속성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콩쥐팥쥐 이야기도 여러 판본이 있는데 뒷부분이 잘린 이야기를 우리는 흔히 알고 있지요. 이번에 고혜경 선생님 책을 읽을 때도 콩쥐팥쥐 이야기를 그런 이야기를 선택하셨더라구요. 또 선녀와 나뭇꾼도 뒷부분에 수탉으로 변한 이야기를 선택하셨구요.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어쩌면 그 이야기들이 좀더 현대인들의 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더 긴 콩쥐팥쥐 이야기에서는 콩쥐는 죽어서도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결국은 감사를 제정신을 차리게 만들지요. 신데렐라도 그렇고 콩쥐팥쥐도 그렇고 남자들은 거기서 좀 어리숙하게 나오잖아요. 야무지고 제 앞가림 잘 하는 건 바로 여자들이지요. 그들은 결코 착하기만 하지는 않거든요. 나카자와 신이치도 그래서 신데렐라는 샤만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잖아요. 그들은 그런 힘을 가졌던 거지요. 그 힘에 대한 은유가 전 그림형제의 동화에는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콩쥐팥쥐의 원래 이야기에서도 그렇구요. 전 이렇게 옛이야기를 현대인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해석에는 문제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한답니다. 이런 점이 극대화된 것이 아마 옛이야기를 잔혹동화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인 것 같습니다. 하나의 우스개거리로 만드는 거지요. 청소년들이 요즘 이런 놀이에 빠져있다고 하지요. 전 청소년기에는 이런 경향이 과장되게 나타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어른들까지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어른들은 좀더 균형있게 하나의 사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거니까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인가요. 제게는 그것이 현대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읽히네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계모가 우리를 억압하는 바로 그 현실과 맞닿아 있으니 말입니다. 계모의 역할을 사회제도가, 구조가, 남성의 의식이, 또한 오랜 세월 길들여진 여성의 의식 자체가 해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을 뚫고 왕자와 결혼
하기 위해서는 그때보다도 더 처절한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지요. 근데 여기서 왕자와 결혼하는 것을 신분상승이라는 사회적 욕구로만 읽지 말고 심리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어떨까요. 지난 번에 고혜경 선생님도 왕, 왕자, 공주가 진정한 자기를 나타내는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진정한 자기실현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거지요. 옛이야기는 특히 상징과 은유로 씌어진 시적인, 다분히 심리적인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제가 옛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다보니 이렇게 길게 옛이야기를 두둔하고 있는가 봅니다. 역시 저의 비교적 주관적인 견해지요. 거울님 이야기도 현대인들에게는 충분히 수긍되는 이야기죠.^^
재작년에 신데렐라 신데룰라 라는 뮤지컬을 본적이 있어요. 요즘도 공연을 하는지 모르지만...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신데룰라 이야기가 신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