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능력(고전1:18-25)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형벌의 유래
십자가는 고대 로마인들이 범죄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형벌은 아시리아나 페르시아 등에서 백성의 불복종을 방지하고 패배한 적을 조롱하기 위해, 특히 흉악한 범죄자나 포로로 잡힌 적들의 시신을 말뚝에 걸거나 뾰족한 막대기에 몸을 꿰어 도시로 드나드는 통로에 세워 놓았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적이나 범법자,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우상을 숭배한 자들을 처형한 후 나무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할 만큼 치욕적인 것입니다. 모양은 처음에 일자 말뚝이었던 것이 후에 십자 형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다는 형벌은 로마인들이 많이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로마는 이 형벌을 반역, 살인, 폭동, 정탐, 해적질이나 폭력적인 강도 행위 등을 처벌하기 위해 도입했습니다. 그 대상은 로마 시민을 제외하고 노예나 범죄자들, 로마 통치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337년경 폐지되었습니다. 한편 오늘날에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십자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형태의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질 사람은 자기가 달릴 형구를 지고 처형장을 향해야 했는데, 흔히 생각하듯이 온전한 십자 모양의 틀이 아니라 가로 막대만 지고 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개는 처형장으로 가기 전에 먼저 금속이나 뼛조각이 박혀있는 가죽 채찍으로 매질을 당했습니다. 처형장으로 가서는 옷을 벗기고 지고 간 막대에 손이나 손목을 밧줄로 묶거나 못으로 박았습니다. 그런 후 그 막대를 땅에 이미 고정되어 똑바로 세워져 있는 말뚝에 가로로 붙인 다음, 발도 십자가에 묶거나 못 박았습니다. 죄목이나 이름을 적은 패를 범죄자의 목 근처나 십자가 위쪽에 부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을 형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예수님께서 달리심으로 인하여 전혀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하여 은혜받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이 받는 형틀입니다.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서 창조질서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거하시길 원하셨지만 그 기대가 깨진것입니다. 우리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약속이 깨어지면 속이 상하고 상대에 대한 신뢰감이 떨어집니다. 신뢰감을 상실한 사람과 거래하기는 꺼려지고, 이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단절로 인간은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상태에 놓인 인간에 대하여 가장 안타까워하셨습니디.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은 없습니다. 깨닫지도 못하고, 방법을 찾지도 못하면서 방황하며 살다가 원치않는 곳으로 가게됩니다.
이같은 상황을 개선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심각한 이 문제를 해결하셔야만 했습니다. 오시는 목적은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죄의 대가는 참혹한 죽음뿐이었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하여, 죄인들이 당하는 십자가의 형틀을 지셨습니다. 물론 죽음의 형태는 다양하겠지만 십자가의 죽음은 참혹하고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여기서 우리는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엄정하신 공의와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행13:34 곧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에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는 죄의 대가인 사망의 권세를 깨치신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대가인 죽음은 소멸로 연결되지만, 부활하심으로 소멸이 아닌 영생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라는 말씀 속에서 영원한 삶과 동행을 위해서는 죽음에서의 부활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부활을 위해서도 부활은 필연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광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로다”(고전15:16-19)
이러한 구원의 서정을 통하여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영원한 복락의 세계에 들어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 스올의 불길 보다 강한 힘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불길 속에서의 고통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고난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고,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고, 죄의 삯인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부활하셨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능력을 덧 입혀주셨습니다.
이 위대한 능력을 지닌 것을 깨달은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아멘
이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바울 사도에게나 우리 성도들에게나 가장 자랑스러운 상징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려움을 이기고 죽음의 권세도 깨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합시다.
예수사랑선교회 임 웅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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