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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사로 번 거액의 전 재산을 바친 절세 미인 노블리스 오블리주
2. 상인의 딸로 태어나 12세에 고아가 된 후 기생의 수양딸 되어
3. 고관들 만덕 보려고 제주목사 자원, 어사는 만덕 미모 때문에 왕명도 잊어
김만덕의 수양모 월중선은 13세 만덕이 노래와 춤 등 기예에도 출중한 것을 보고 그녀를 제주 최고의 기생으로 키울 욕심이 발동하여 제주 관아에 관기로 적을 올렸다. 김만덕은 평민의 딸임에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생이 되었으나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에 따라 기생 수업을 열심히 받았다. 15세가 지나서는 노래, 악기, 춤, 예의범절 그리고 시와 그림 등 모든 면에서 제주 최고의 기생이 되었다.
그녀에 관한 소문은 육지에도 알려져 어떤 사대부는 김만덕을 보기 위해 육지의 높은 수령직 대신 제주목사로 좌천 발령을 원했다고 한다. 제주도에는 중앙정부의 감찰관이 자주 감찰하러 내려와 제주 목사에게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감찰관의 마음을 녹여 놓으면 제주 목사는 감찰도 잘 받고 승진의 기회도 생길 수 있었다.
배비장전에서 보듯이 제주도에는 관리들을 유혹하는 관기들이 많았는데 제주 목사는 행실이 단정한 김만덕을 선택하여 미인계로 활용하려고 기생으로보다는 예인으로 우대하였다. 영조 때 왕의 밀명을 받은 한 안찰어사가 제주에 왔는데 한 달간 김만덕의 미모와 기예에 완전 빠져 왕명을 잊고 임무 수행을 못한 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떠나면서 “만덕아! 너는 황진이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아, 내가 너한테 홀려 죄인이 되었다” 하면서 선물을 주고 이별을 아쉬워 했다. 그런 칭찬 속에서도 김만덕은 본래 양인의 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생 생활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제주판관 부인에게 귀중품 등을 바쳐 그 부인이 남편인 제주 판관을 움직이게 하여 10년 만에 기적에서 제명되는 판정을 받아 24세에 양인이 되었다.
4. 상인이 된 김만덕은 미모와 기예, 기생 네트워크를 사업 무기로 활용
1762년 24세에 양인이 된 김만덕은 평소 잘 알고 있던 외가 친척 객주(조선시대의 종합 중개 상인) 고씨의 도움을 받아 제주 여인으로는 처음 객주를 창업했다. 예로부터 여성의 미모와 기예는 남성에게 강력한 무기였고 김만덕은 기생 생활을 통해 남성들 마음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을 쌓았다. 당시 객주는 모두 남자였다.
김만덕은 절세미인이 객주를 한다고 널리 광고를 하였다. 광고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미녀 객주가 개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인들은 빨리 달려가 그 미녀를 보고 싶었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감찰하러 온 고관들을 녹여버린 김만덕이 아닌가? 그 김만덕이 상인들과 공물 수집 관리들을 녹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녀는 기생시절 사귀어 놓은 부자 상인들을 네트워크로 활용하여 고객들을 유치했다. 돈 많고 실력 있는 상인들을 미모의 선후배 기생들을 불러 환대하여 완전 사로잡았다.
제주도와 육지의 상인들 모두 김만덕과 미인 기생들에게 서비스 받기 위해 김만덕의 영업지로 몰려들어 성시를 이루었다. 김만덕과 대화만 해도 즐거운 고객 상인들은 기꺼이 정치와 경제, 물가 동향, 물류 동향 등 각종 최신의 고급 정보를 다 제공해 주었고 그녀는 그 정보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김만덕은 불과 1년 만에 1,000냥(영조 때 경복궁 근처 고급 주택 가격 150냥 정도이므로 1,000 냥은 지금 100억이 넘는 큰 액수임)이상의 거금을 벌었다. 김만덕은 빌린 돈을 다 갚고 제주 특산물인 말린 미역 건어물 등을 쌀 때 대량 구매해서 저장해 놓았다가 성수기에 이윤을 붙여 팔아 많은 돈을 계속 벌었다.
5. 동반성장 철학의 절세 미녀 재벌 김만덕은 경영의 천재
(상)편의 내용과 같이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만덕은 12세에 고아가 되어 모진 고생을 하다가 돈 몇 푼에 기생집 심부름꾼으로 팔려갔다가 뛰어난 미모와 성실한 품성으로 기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녀는 제주 최고의 기생이 되었는데 그녀를 보기위해 육지의 고관직을 포기하고 제주 목사로 좌천 발령을 원하는 고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기생으로부터 탈출 노력을 하여 24세에 제주 목사로부터 양인 판정을 받고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24세의 젊은 그녀는 유통업 발달이 시대적 추세임을 인지하고 제주 여인으로서는 최초로 객주를 창업한다. 김만덕은 자신은 물론 선후배 미인 기생들과 함께 고객들에게 최고 서비스를 제공해 제주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객주가 되어 단 1년 만인 25세에 현재 가치 100억 원의 거액을 벌었다.
김만덕은 미모와 기예가 뛰어남은 물론 누구에게나 배려가 깊은 탁월한 경영자였다. 제주도는 돌섬이므로 갯벌이 없고 농토가 적어 소금과 곡물이 매우 귀했다. 김만덕은 제주도에서 구할 수 없는 소금과 곡물을 육지에서 수입해 오고 제주 특산물인 미역(당시 제주 미역은 전국 생산량의 약 50% 차지), 귤, 양태와 말총 등을 육지로 수출하는 교역을 하였다. 육지에서는 제주산 같이 좋은 미역과 귤 그리고 양태와 말총을 구할 수 없었다. 현대의 성공적인 주식 투자와 같이 비수기에 쌀 때 매수해 값이 폭등하는 성수기에 파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폭리를 취할 수 있었는데도 폭리 대신 적정 이윤을 붙인 가격을 받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사람이 함께 이익을 취하면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동반성장 철학을 실천했다.
당시는 “장사꾼은 제 부모도 속인다.”고 할 정도로 정직하고 신용이 있는 상인을 찾기 매우 어려웠다. 그 시대에 정직과 신용이 사업성공에 가장 중요한 핵심 역량(core competence)임을 깨달은 그녀는 판매된 물품을 실은 배가 제주도에서 육지로 가다 폭풍을 만나 침몰하면 다시 똑 같은 물품과 수량을 육지로 보내 주었다. 탁월한 서비스를 하는 아리따운 미녀가 좋은 물품들을 좋은 가격에 신용을 철저히 지키며 장사를 하니 3년 만인 27세 때에 자신의 선박까지 소유한 제주도 최대의 거상이 되었다. 아래는 김만덕 객주 집터 앞의 건입 포구 모습이다.
6. 김만덕은 250년 전에 하바드 경영대의 전략경영 패러다임 구축해
7. 굶어 죽어가는 제주도민들 위해 전 재산 다 바쳐
8. 한국 대기업들은 김만덕의 신뢰, 동반성장 경영철학을 배워야 해
첫댓글 월중선.
양부모님의 죽음.
어려서의 아품.
누구라도 의식주 해결은 최대과제죠.
당연히 제주기생들이 눈독을 드리지요.
노블리스 오블리주.
현대판 김만덕,
배고품을 아는 자..... 반드시 동반상생을 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