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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베를린으로 달려가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리우스에 있는 선교사 사모님과의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야간열차를 타기위해 빌리우스 기차역으로 나와 차표를 사기위해 리투아니아돈으로 환전을 하여야했고, 독일의 베르린까지의 차표를 구입하여 야간열차에 탑승했다.
베를린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거처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얼마나 나는 그곳에 가 보고 싶어 했고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들은 지난 두달전에 결혼을 하여 이곳에서 와서 살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독일에서 전공과목인 사회학을 넓고 깊이있게 공부를 하여 석사과정을 밟기위해 이억만리 머나먼 독일로 부모 형제와 떨어져 지낸지도 벌써 7년여나 되나보다....
사회학의 석사,박사코스는 이곳 독일이,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곳으로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 보다 더 유명하고 알아주는, 그래서 더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 곳 이란다. 아들은 영어를 하면서도 영어권국가에 가지 않고 힘들게 독일어도 공부하여 이곳 베를린 자유대학(독일어 Freie Universitat Berlin)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다. 현재 12학기중 9학기(2008년)를 진행중에 있다. 베를린의 자유대학은 가장 좋은 대학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1946년,훔볼트대학(노벨상 수상자 27명배출)이 유명한 대학이었는데 동베르린에 포함되어 공산당의 이데오르기에 충성하자 이에 반대하는 학생 및 교수요원들이 미국당국과 협의하여 서베를린에 따로 대학을 세울것을, 그래서 당시 서독에서도 좋은 대학으로 육성해야 하는 필요를 느껴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들여 설립한 대학이기도 하다.(1946년도 설립) 현재 훔볼트 대학과 함께 베를린에 2개 종합대학이 있으며,학생수가 4만4천명, 100여개학과와 매년 석사7천여명 박사 1천명을배출하며 교수진 660명,연구원1.870명,총직원 1만명이고 건물은 총250동이 산재해 있으며 독일에서 유일하게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이라는 특징때문에 유명하다. 한국인의 재학생도 현재300여명이된다.
자유대학은 2000.3.9. 김대중 대통령이 독일 국빈방문시 베를린 선언을 했던곳이기도 하며 동 선언은 그해 6,15일 평양에서 개최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대학이나 아들을 자랑하려는것이 결코 아니고 독일에서는 대학의 서열화가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심하지 않으며 중요시하지도 않는 좋은 풍토로서 실력 향상에 있다는 것을 우리국민들도 본받아야 되지 않을가 하여 기술 해 본다.
외국에서 학위는 우리나라와 같이 학점만 채우고 논문만 제출하면 쉽게 학위가 나오는 곳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학위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힘든 나라로 알려져있다. 그래서 폭 넓고 심도있게 공부하지 않으면 않되는 곳이 이곳이기에 장기전의 전략이 필요함으로 안정된생활을 하며 학업에 몰두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나의 생각에 나의 성화로 2개월여 전 아들을 결혼시켜 신혼의 입장이지만 힘들게 공부하고 있다.
지금 이글을 열차 안에서 쓰면서도 아들과 며느리를 보고싶은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베를린에 달려가는 아비의 마음을 그 누가 알수 있을까 ?...,
아들과 며느리를 생각하는 이시간도 열차는 힘차게 달려 간다....
베를린은 면적이 약 890 평방km로서 서울 면적의 약1.4배정도이며 전체면적의 1/4이 숲과 호수로 녹지공간이 아주 잘 조성되어 있는 살기좋은 도시임을 알게 되었다.
인구는 약 350만명으로 이중 외국인은 43만명, 전체인구의 12.3%나 차지한다고 한다.
13세기에 도시로 승격된 베를린은 17세기초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된 뒤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여 유럽의 대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2차 대전의 파괴가 있기 전인 1920년~30년대에는 독일 경제의 중심지겸 유럽 문화의 중심지 였다.
우리나라와 같이 분단되어, 동.서 대립의 체제에 있었던터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다른 시각으로 독일과 베를린을 보아야 할것이다.
통일 전에는 서베를린은 서독의 기본법 적용을 받았으나 전승4개국 협정에 의한 특수한 지위에 놓여 있었고, 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였었다.
서 베를린은 1948.6월부터 시작된 11개월 간의 소련 봉쇄를 미,영, 불 연합군의 생필품 공수 작전으로 극복해야 했다.
그후 61년 8.13일 동독 정권은 베를린 장벽을 구축 하기에 이르렀고,
63년 케네디 미댙통령은 "나는 베를린 사람이다"라는 선언으로 베를린 및 그 시민들과의 연대를 표명하여 세계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87년 레이건 미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소련측에 "장벽을 허물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게된다.
<브란덴부르그 문 : 사진아래>
*독일역사의 흥망 및 분단과 통일을 대표적으로 상징, 통일이후 국빈방문시 성문을 통과하는 의식 거행장소로 자주 이용한다. 규모:높이 26m(6m 높이의4두마차 포함), 전면 폭65.5m,길이 11m이다. *
89년 11월 9일 동독 시민들의 평화 적인 시민혁명으로 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베를린에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게 된다.
통일 후 1991.6.20, 연방하원의 결의로 통일 독일의 수도로 결정되었고,1998년말 시작된 연방정부(수상실등 주요 10개 부처)와 연방하원의 베를린 이전 작업이 2000년 말까지 완료되었다.
독일은 통일 및 수도이전과 더불어 베를린은 다시 독일문화의 중심지로 변모 하게 된다.
그중 오페라 하우스가 3개, 다수의 대규모 관현악단(베를린 필 하모니등)이 생겨났고, 150여개의 연극 공연장, 115개의 영화관 및 300여개의 화랑이 생겨났으며, 170여개의 박물관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박물관 도시중의 하나로 손꼽힐 만 하다.
그리하여 대규모 국제회의 및 박람회를 다수 개최하는 도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아들을 보게될 것을 생각하니 몸이 마치 깃털이 공중에 나는 기분이라 할까, 기쁘기가 그지 없다.
아들은 아빠가 이동하는 경로와 도착시간을 인터넷으로 미리 파악 했는지 며느리와 함께 베를린 기차역에 마중나와 있었다.
아들과는 진하게 허깅을 했으며 며느리와도 가볍게 허깅을 해 주었다.
베를린 기차역: 사진아래
아들집에 아침에 도착하여 처음 며느리가 해 주는 조반을 먹고 짐을 풀고는 그동안 피곤한 몸을 잠시 두어시간 쉬고는 오후부터는 아들 친구인 이경호(가명)라고 하는 친구는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동갑내기 친구인데 조선족이다. 그는 중국어,영어, 독일어,한국어를 구사하는데 한국어는 약간 조선족의 억양이 나온다. 그와는 교회에도 함께 다니며 운동도 함께 하는 단짝인 친구로서 그는 이미 이곳베를린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성공한 케이스인터라 고급 도요다승용차를 가지고 있다. 아들은 친구의 승용차를 이미 준비하여 그 친구가 운전을 하며 아들내외와 함께 2틀동안이나 베를린 시내 관광을 잘 할수 있었다.
<- 빌헤름 황제교회
빌헤름 황제의 교회. 2차대전의 폭격으로 반파가 되었으나 전쟁의 잔학상을 보여주기 위해 우측의 종탑과 같은 높은 건물은 그대로 보존시키며 죄측의 건물을 세움
베를린의 번화가- 도로가 우리나라처럼 4차선이지만 인도가 얼마나 넓은지 시내의 거리가 시원스럽게 보인다. 아마도 유럽에서 가장 도시계획을 시원하게 해 놓지않았나...
역사적으로 오래된 성당건물
제국의회 건물 (국회의사당) - 투명한 정치를 해야한다는 의미에서 건물 상단중앙에 돔식으로 된 투명유리로 지어져 있다. 상징이 좋지 않은가 ???....
전승 기념탑 ->
ㅇ프로이센이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대 텐마크전쟁(1864),대 오스트리아 전쟁(1866), 대 프랑스 전쟁(1870~71)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1873년 독일황제 카이져 벨헬름1세의 참석하에 대규모 군사행진 속에서 완공식.
ㅇ구조:높이 69m. 기둥 내 285개의 계단을 통해 48m의 기둥 전망대에 도달할 수 있음.
샤르텐브르크2세의 궁전, 왕의 후궁들이 살던 별장, 좌우측엔 호수와 아름다운 정원이 있슴.
과거 베를린이 반으로 나뉘어져 있을때 체크포인트(검문소)
베를린 장벽에서 아들(우)과 아들친구 (좌)
여행중에 그의 사무실도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독일제복사기를 대량 중국에 수츨하고 싸게 용지는 중국에서 수입하는 무역업으로 꽤나 짜임새 있고 규모있게 사업을 잘하는 촉망있는 젊은 사장으로 내가 봐도 대견하기만하다.
그도 어렵게 공부하여 자수성가 한 케이스라고 아들이 귀뜀을 해 준다.
다른 나라와 도시에서는 지하철이나 버스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찾아다니며 힘들게 관광 다녔지만 우리를 태운 아들 친구는 아들과 함께 일류 가이드 역할까지 해 가며 우리를 지극정성으로 안내를 해 주어 베를린 시내에서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관광할 수 있었다.
아들덕분에 아들친구의 승용차로 편하게 관광하게 되니 얼마나 좋은지 이루 혀용할수 없다.
이틑날은 주일(일요일)이라 난 오래간만에 아들이 다니는 독일의 한인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또한 좋았다 . 목사님은 한승주 총리와 얼마나 많이 닳었는 꼭 같아 보였다. 식사시간에 나의생각을 얘기했더니 저도 한씨인데 그런말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한총리와는 한성한본이라고 하신다. 나이는 우리보다 약간 아래로 보인다.
한인교회에서 아들은 아들친구와 함께 교회봉사도 곧잘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은 청년부 리더로 봉사하면서 성가대도 하며 교회생활을 곧잘 하여 중직자들로 부터 귀여움을 받는다는 것을 듣고는 역시 아들은 속썩인 일이 하나도 없게 커준 것이 그저 대견하기만 했다... 아들은 엄마 뱃속에서 부터 교회에 다녓기에 그러하리라 믿는다....
예배를 마치기 전에 광고시간엔 목사님으로 부터 아무게 청년의 아버님이 여행중에 오늘 본 교회에 오셔서 함께 예배를 보게되었습니다. 잠깐 일어나시지요 하며 소개하시더니 덧 부쳐 아무게 형님인줄 알았더니 아버님이시라네요 하며 조크까지 하신다. 나는 일어나서 잠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예배 후에는 많은 교인들과 중직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데 목사님 바로 앞에서 식사를 하는 영광도 주어졌다. 노인 장로님들과 여러 중직자들과 환담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했다.
점심식사후 다시 베를린 시내관광을 승용차로 하계되었고 저녁이 되어 집에 아들네 집에 돌아와야 할 시간엔 그 교회 여전도회 회장님이시고 우리아들을 친아들 처럼 늘 돌보아 주신다는 나보다 2살이 많으신 여자 권사님의 별장에 초대가 되어 승용차로 시외로 나와 별장지대까지 40여분 달려 도착했는데 그 지역은 몇 십년 전부터 독일의 유명한 별장지역인 곳으로 그들은 가르텐이라고 부른다.
카르텐으로 불리우는 작은 별장
아마도 영어의 가든이 독일어로 가르텐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별장은 소형주택이 대부분이었지만 주변 환경과 그 지역 환경이 너무나 좋은 곳이 었다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 호수도 많지 않은데 그곳은 아주 크고 수목들로 우거진 아름다운 호수도 별장의 바로 옆에 있어 천혜의 아름다운 별장지역으로 손색이 없었다.
<별장의 정원> -> 나를 초대한 누님같은 별장주인
별장에 도착 해 보니 의외로 집이 13여평 정도 되는 조그만 가옥에 미니 2층으로 만들어 져 있고 대지는 50~60평 정도 될까 하는 넓지 않은 공간에 사과나무등 과일 나무와 꽃 밭, 채소등 기가막히게 훌륭한 가든으로 한 가족이 살기에는 좁은듯 보이나 한편으로 독일인들의 검소한 면을 그곳에서 다시 발견 할수 있었다. 별장은 크지않아도 얼마나 내실있게 잘 만들어져 있는지 감탄했다. 나도 만일 전원주택을 마련 한다면 이 별장과 같이 조그마하게 만들고 그곳처럼 봄 부터 가을까지만 활용 하며 주말에 와서 쉬어가는 곳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독일은 우리나라보다 면적도 넓고 부자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살고 있는 모습은 검소한 면을 볼수 있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환대는 극진하여 저녘 늦게까지 파티가 이어졌으며 우리는 포도주와 약간의 샴페인을 마시면서 9월 초순인데도 날씨가 차가워져 야외의 벽 난로에 장작 불을 지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분은 아들이 2명이 한국에 있었으나 이혼후 그곳에 가서 20여년 전에 독일인과 국제 결혼을 하여 살고 있으며 그에게서는 자녀가 없어 (그의 자매들은 독일 간호원들로 일찍이 기반을 닦어놓은 듯)서인지 한국학생인 우리 아들과 아들 친구인 이경호(가명)를 친 아들처럼 챙겨주고 사랑해 주는, 그래서 가끔은 별장에서 대접도 해 주며 그 분과는 모자간의 사이처럼 친한 사이임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된 곳도 아들이 다니고 있는 한인 교회내에서 이루어 진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만나는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 며느리와도 그 권사님과도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어 저녘 만찬준비도 며느리와 그 분과 둘이서 했다. 마치 딸이나 그집 며느리 같이 말이다.
나와 친구는 그날 저녘 극진한 만찬에 극진한 대접을 받고 늦은 시간에 아들집으로 돌아와 이틀째 아들네 집에서 쉴수 있었다.
우리는 더 있으며 더 많은 곳을 보자고 하였지만 신혼부부집이라며 친구는 이틀로 족하다고 마다하기에 스위스의 "알프스산"을 보러 내일아침에 열차로 또 여행을 계속해야 한다. 내일을 위해 눈을 부쳐두자...
이제 계획된 40일 중에 보름정도가 지나는 것 같다...
일본의 소니회사 센터 앞에서 아들과
성당
히틀러가 자살했다고 하는 건물 옆의 강가에서 친구와 함께
역대 왕궁으로 후궁들이 거처 했다는 건물, 서양도 왕들은 왕비가 많았는가봐...
왕궁의 별장 호수가에서 우리를 승용차로 운전하며 가이드를 하는 아들 친구와 대화.
가르텐 별장 뒤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가에서
가르텐 별장주위에서 저녁식사 준비시간에 한바퀴 돌며
가르텐 앞 정원에서 베치카에 불을 피워놓고 저녁 만찬중 며느리와 한컷
* 계속 이어짐(상기 내용은 초고로서 약간의 수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 *
첫댓글 여행중에 기록을 꼼꼼하게 남겨두었네요 ~~
덕택에 리얼한 여행기 잘 보구 있구요 ~~
문장력 또한 대단합니다.
여행기 발간해도 좋을 듯 ~~~
조금 섬머리 해둔것 가지고 엮어보며 백과사전 뒤지며 인터넷 등등...
쉽지가 않는데 졸필을 과찬해 주시니 감사,감사드립니다...
석정님께 검증받고 여행기 내라하시면 생각해 보겠슴다....
졸작을 들킨 소년과 같이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과찬에 감사드리며 용기를 주시는 말씀으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