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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대 총선 녹색당비례후보경선
출마의 이유
부산녹색당 구 자 상.
1, 온산, 눈부신 바다에 서서
햇살에 반짝이는 온산의 앞바다는 눈부신 은총이었다. 처음 가는 당월, 이진, 오래 된 갯마을의 포구나무는 우리를 반겨주었다. 잎새 흔드는 바람은 참으로 따뜻하였다. 그러나 1985년의 봄 ,경상남도 온산공단에서는 700명의 주민들이 온갖 괴질과 공해병으로 신음하는 형극의 땅을 연출하고 있었다. 온산초등학교 아이들의 거의가 호흡기와 격한 피부질환을 호소하였다. 아름다운 땅, 그러나 돌아보면 검푸른 바다에서는 중금속이 삶의 신비를 비틀고 처용이 놀았다는 강의 하구는 여지없이 모습을 잃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석유화학 공단의 유독한 가스가 하늘을 덮어도 몸으로 봄을 맞이하는 할머니는 하얀 꽃이 핀 배나무 아래에서 봄나물을 케어 담고 있었다. 석유화학공단의 배나무는 어머니의 바램도 무색하게 하얀 꽃잎은 화학물질로 작은 구멍이 나고 가을이 되면 탁구공만한 기형의 열매가 되어버렸다.
한국 산업화의 어두운 얼굴이 공해와 환경파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서서히 그리고 무겁게 삶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지역주민들의 환경적 처지나 기본적인 생존권의 권리 따위를 거추장스럽게 여긴 결과 오래 된 마을을 그대로 둔 채 폭력으로 들어선 거대 공해공장의 검은 폐수와 매연이 아무런 장치 없이 그대로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의 자리를 여지없이 뭉개고 있었던 것이었다. 산과 들과 밭과 논, 하늘과 바다 그 속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설문조사의 형식으로 주민들을 만나는 것이 유일한 주민지원의 방식이었다. 병명도 모른 채 고통 받는 해녀, 아주머니, 아이들을 보면서 졸업을 앞둔 나의 길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 환경공학과라는 학과가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부산이었다. 일찍이 공해반대운동의 길을 열어가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나는 소위 환경문제를 전공한 우리나라의 첫 번째 환경운동가가 되는 셈이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온산공단을 벗어나 남쪽으로 부산으로 향해 한참을 갈 때 길모퉁이 어디에선가 긴 매미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온산에서는 여름에 매미도 울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매미도 울지 않는 온산에서 주민들은 그로부터 3년 후 집단으로 환경난민이 되어 덕신이란 곳으로 이주하였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첫 번째의 공해피해지역주민의 이주가 되는 것이었다. 당월이란 마을의 유래는 그 옛날 당나라로 가는 길목이란 뜻으로 유서 깊고 살기 좋은 지역의 특징을 가진 참으로 괜챦은 포구였다.
나는 환경운동가의 길로 가야 하였다.
2, 낙동강은 생명의 강이었다.
강에 하구둑을 축조한다는 막바지 박정희 정권의 계획이 알려졌을 때 80%의 부산시민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낙동강하구둑은 우리나라의 강에서 이루어지는 대형토건사업의 본격적인 시발을 알리는 사업이었다. 낙동강유역은 천만의 상수원이고 생명의 흐름 그 자체였다. 이 사업을 주관한 산업기지개발공사는 지금 4대강을 파헤친 한국수자원공사의 전신이었다. 흐르는 강을 막고 광대한 기수생태계를 황폐화시키고 어민들의 생존의 터를 빼앗는 이러한 사업을 나는 반대하였다. 이미 낙동강에서 기형의 물고기가 잡히고 하구의 시장의 언저리에서 실제로 팔리고 있었다. 이를 쉽게 살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기형어를 구입하여 사무실에 전시하기도 하였다.
81년 뜨거운 여름, 나는 후배 두 명과 함께 경북 안동의 댐 아래에서 부산의 구포다리 아래까지 뗏목으로 낙동강의 전 유역을 한 달 여에 걸쳐 탐사하였다. 흐르는 강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오래 전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만나고 싶었다. 하회마을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담담한 자존감이 좋았다. 그리고 여여히 전수되는 하회탈춤의 마을에서 나는 우리 문화의 깊이에 얼마나 무지한 내가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큰 비가 내리는 낙동강은 폭포처럼 흐르고 우리는 상주의 “물량리 2구”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며 밥값을 하느라 농사일을 도왔다.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계신지 모를 “이웅영” 이장님과 마을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에 이틀이 걸렸다. 우리는 너무나 큰 소음의 도시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강의 상류, 물길이 온전히 흐르는 곳의 사람과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들어 간 하류의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강은 나에게로 흐르는 것이었다.
낙동강은 생명의 강이었다.
1990년대 중반은 낙동강 중류 위천지역에 대규모 공단의 건설계획이 발표되면서 낙동강 유역에서 이를 반대하는 시민운동이 활화산 같이 일어나면서 이는 우리나라의 환경운동사에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내었다. “낙동강살리기 위천공단저지 부산시민 총궐기 본부”로 집결한 환경시민운동의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낙동강살리기운동은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수질관련법이 정비 되는 성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천만의 국민들이 상수로 이용하는 강에 대한 기본적인 환경법이 없었던 당시 시민들이 직접 법안의 초안을 만들어 정부에 이를 제안하였다. 이는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의 수질개선을 위한 특별법의 형식으로 성안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이러한 법의 기본적인 취지를 근간에서 파괴해 버렸다. 현재의 환경부는 강과 수질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아무런 역할과 책무가 없는 허수아비 조직이다. 이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역개발 시대의 시발이 되어야 한다. 4대강 파괴 토목 사업은 생태적 복원사업의 성공적인 사례가 되어야 한다. 녹색당은 이를 준비하고 이끌어가는 하나의 고리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0년 전 나는 낙동강하구둑의 축조를 반대하는 유인물을 가지고 을숙도에서 쫒겨 난 농민들을 만났다. 모래바람 날리는 임시천막촌에서 나는 내 생애에 낙동강하구둑이 해체 되는 꼴을 봐야 한다고 마음먹었었다. 축조 된 지 30년 만에 낙동강하구둑의 전면개방이 실현되려고 하고 있다.
아직도 나는 흐르지 않는 강둑에서 여전히 새로운 변화를 준비하고 생명의 강으로 몰려드는 은빛 물고기들의 노래를 기다려야 한다.
3, 녹색은 관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나는 현대의 민주주의 운동과 민주주의 정치운동의 내용과 방식이 여전히 인본주의 내지는 휴머니즘의 틀 속에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언제나 우주의 주인이어야 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어야 하는 절대의 인간중심에 근대는 여러 가지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나는 대개 환경문제를 대하는 서구의 환경운동 녹색당을 비롯한 집단들의 변화를 위한 행동의 방식은 개인의 변화를 우선의 과제로 하는 개인론의 방편과 구조의 변화를 우선적 방편으로 하는 구조론의 큰 줄기로 이해하는데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인간과 이를 둘러싼 문제의 근원을 여전히 이원론의 전 근대적 고리속에서 파악하는 단편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독일녹색당의 근본주의(푼디)와 현실주의(레알)의 대논쟁과 분당은 이러한 이원론에 바탕한 어쩌면 예고된 결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는 서구보다도 훨씬 서구화된 우리에게도 먼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우리의 녹색당이 한 석이라도 의원을 배출한다면 이러한 역사속의 논쟁이 얼마나 녹색의 정치에 어떤 후과를 남겼는지 새롭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속에 우리에게는 동아시아의 깊고 큰 울림의 인간과 문명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동학과 같은 운동속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개 인간과 인간간의 갈등과 평화를 논하고 탐구하는 근대의 해방론은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GMO, 핵방사능,벌과 곤충의 사멸등의 문제들에 대한 기술론적인 접근으로 언제나 자가당착의 결론에 이르거나 문제를 왜곡하게 된다.
인간이 참으로 우주의 주인이라면 물건과 나무와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고 살고 변화한다는 인식의 넓은 지평에 이러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에게 물건과 함께 산다는 의식과 실천의 전변없이 녹색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실천의 수많은 증거들이 동아시아 살림의 문명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유는 프리덤이 아니라 자기의 이유인 것이다. 돌과 물건과 각각이 처지에 놓인 인간들이 자신의 이유를 모두가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녹색당의 자유의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구 소련의 붕괴가 체르노빌핵발전소 폭발과 거대한 내륙의 바다“ 아랄해” 의 사막화에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과대한 생산력주의 조절되지 않는 재화의 양산은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무너뜨렸고 무너지고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녹색당은 다른 모든 정당 진보적인 정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들과의 존재기반이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녹색당의 독자 노선에 찬성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향후 이러한 원칙은 변화하는 현실의 정도에 언제나 조응할 때 단순한 정당운동의 한계를 넘는 것일 수 도 있다고 보인다.
여기에 녹색당은 환경운동단체가 아니라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나는 그러한 지적이 일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우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관계속에 살아가고 생명의 세계를 이룬다는 관계론의 결정판이기 때문에 너무 우려할 일도 아니고 너무 급하게 돌아갈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진보를 포함한 정당들은 존재론의 결정판이다) 전통적인 과제로서의 노동 여성 등에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론의 녹색당은 지금보다도 훨씬 나아간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녹색당이 왜 황색도 회색도 적색도 아닌 녹색의 정당인지 우리는 실천의 과정에서 증명하여야 한다. 그것은 생명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고 보는 것이다.
당연히 인간과 함께 그리고 물건과 함께 공존과 평화의 관계론은 녹색당의 정치철학이다. 그리하여 재앙의 시대를 넘어서는 녹색의 인간은 보편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귀농학교와 후쿠시마, 19대 총선 출마, 에너지전환민주주의.
지난 1997년 많은 기업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지고 시민의 삶이 무너지던 IMF 구제금융의 시기에 환경운동이 과연 어떤 의미로서 역할하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은 나에게 큰 과제로 다가왔다. 아무리 산업이 발달하고 아무리 첨단의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사람은 생명체로서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건강한 농업의 기반이 없는 사회가 먼저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은 부산귀농학교를 설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생명을 기르는 농업은 녹색당의 주요한 정치방략이 되어야 한다. 로마 2천년의 반성일지 모르나 로마시는 에너지의 자급과 함께 향후 40년 안에 로마시의 구역 내에서 거의 대부분의 농산물을 자급할 것이라고 한다. 부산귀농학교는 17년 동안 천 명 정도의 수료생이 있었다.
후쿠시마의 핵폭발을 며칠 동안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 시기 우리의 반핵운동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 동안 지속적으로 핵발전소는 늘어나기만 했는데, 드디어 일본에서 폭발하였다. 고리 1호기의 수명연장의 모델이 되었던 그 발전소가 멜트다운되었다. 대응점이 형성되지 않는 절대적인 힘 앞에 무엇을 할 것인가.
녹색당의 출범과 당원으로서의 참여는 핵방사능의 시대에 취해야 하는 환경운동가의 자기 실천이 되어야 했다. 돈과 조직과 경험이 전무한 선거의 경험속에 제19대 총선은 정치권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리 1호기 즉각폐쇄“의 슬로건을 전면화하였다. 선거의 과정에서 균도와 균도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하였다. ”선거가 끝나고 반드시 방사능피해소송을 하자고 하였다.“ 2년간의 갑상선소송은 1심의 승소이후 이제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방사능피해국민소송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올해 고리 1호기의 폐쇄가 결정되면서 새누리당과 같은 곳에서는 이것을 자신들의 정책의 성과로 홍보되고 있다. 이제 2호기, 3호기, 4호기, 23개의 핵발전소의 폐쇄의 사업이 매일 새로 거듭나는 녹색당의 운명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반핵의 과제는 새로운 에너지전환의 정책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중앙 집중의 거대 에너지체계는 독점의 관료주의를 필요로 한다. 밀양의 대송전탑저지싸움의 경과는 얼마나 이러한 에너지 독점의 이해관계가 강고한지 그리고 얼마나 우매한 집단이 이러한 폭력의 배후인지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부산민주공원 4.19 기념공원에 지난 2008년에 5 Kw 태양광발전을 부산 경남에서는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FIT(고정가격구매제도)제도가 살아 있을 때 발전소 허가를 받았다. 1호 시민발전이었다. 2호, 3호가 하수처리장 옥상에 만들어 졌다. 에너지 전문시민기업도 만들었다. 부산 경남 지역에 50여 곳 이상의 지역에 태양광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성과도 많았지만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빚도 많이 있다. FIT제도는 노무현 정부 2년차에 만들어 지고 이명박 정부 2년차에 없어져 버렸다. 에너지는 권력이다. 관련된 정책이 후퇴하면서 3천여 개의 태양광업계가 침몰하였다. 반면 지난 일 년 동안에만 중국의 태양광발전소는 무려 67%가 성장하였다.
이제 유럽공동체는 2050년이 되면 탄소제로국가로 변하는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에너지전환의 정책과 제도가 진정 생태국가로 가는 가장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제1차 대전, 제2차 세계의 전쟁은 따지고 보면 석유전쟁이었다. 그리고 석유와 강과 산을 쟁탈하기 위해 인류는 제3차 대전을 하고 있지 않은가.
에너지전환을 통한 생태경제의 구축은 또한 녹색당의 주요한 경제 정책이 되어야 한다.
석유체제의 경제는 이제 망하였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 먹으려는 석유시대의 틀을 녹색당이 바꾸어야 한다. 유럽의 거의 모든 에너지전환정책의 정치적 그리고 정책적 배후가 녹색당이었다. 전환을 통한 새로운 일자리 전환을 통한 새로운 관계, 에너지전환민주주의를 통한 생태국가 그것이 녹색당의 목표이다. 실로 가슴 뛰는 목표이다. 그리하여 녹색당원인 것이 나의 자존을 한결 높이는 것이다.
석유로 조직된 사회의 모든 종류의 불평등은 빛나는 태양경제 생태경제의 틀 속에서 해체되고 재조정되고 새로운 생명감각의 토대를 가져 올 것이다. 노동자 농민 여성 어린이 노인 소수자 장애를 가진 자, 사회적 약자 생물학적 약자가 자유(自由), 즉 자기의 이유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5, 계절의 변화가 보인다.
깡패 같은 시절 43세의 나에게도 봄이 왔다. 데모만 하던 나에게도 봄이 왔다. 온 산에 하얀 꽃무리가 왜 나에게 보이지 않았던가, 울산 온산의 바닷가에서 생각을 굳힌 나의 지난 시절부터 왜 봄은 나에게 오지 않았던가. 혈안의 분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봄날, 초량 국제빌딩 꼭대기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환경운동으로 떠들고 다닌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울의 상념은 오래 간다. 심하면 자기를 기만하기도 한다.
시인의 말처럼 사십이 넘어야 꽃이 보인다는 말인가.
30년의 환경운동에 터무니없는 완성이나 결론은 없다. 단지 흔들리는 주체의 설레임, 기다림, 슬픈 느낌, 좋은 감정, 선명한 분노감 등이 나를 푸른 녹색당으로 이끄는 힘의 원천일 것이다.
지난 해 범어사 아래 용성마을에 무너지고 오래 된 폐가를 오 개월 동안 고쳐 보았다. 처음으로 구들장을 놓아 보았다. 마루도 놓고, 부엌을 개조하기도 했다. 에너지자립을 위해 로켓보일러도 만들어 보았다. 텃밭을 하여 오이, 가지, 호박을 길러 보았다. 그리고 연구해 오던 벌 기르기도 시작하였다. 지난 달 11통을 늘려서 공식적인 농부도 되었다. 이런 벌기르기는 앞으로 급여보험이나 퇴직금이 없는 시민운동가에게는 생태연금이 될 것이다. 오월에는 꽃의 제왕 모란도 처음으로 보았다.
나에게 지난 총선의 참여는 나름으로 비장했으나 아내의 표현대로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선거” 라는 비판 때문은 아니었다. 다시 바라보는 청사포의 바다는 쓸쓸하였다.
지난 19대 총선 이후 나는 사실 좀 외로웠다. 출마의 이유이다.
부산녹색당 구 자상 모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