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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眞心無知 진심무지 (38)
故로 祖師가 云하사대 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하야
고 조사 운 불축유연 물주공인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하시며
일종평회 민연자진
肇論에 云하사대 是以로 聖人은 處有不有하고
조론 운 시이 성인 처유불유
居無不無하나니 雖不取於有無나 然이나 不捨於有無일새
거무불무 수불취어유무 연 불사어유무
所以로 和光塵勞하며 周旋五趣하야
소이 화광진로 주선오취
寂然而往하고 忽爾而來하야 염淡無爲호대 而無不爲하시니
적연이왕 홀이이래 염담무위 이무불위
此는 說聖人의 垂手爲人하야 周旋五趣하야 接化衆生하야
차 설성인 수수위인 주선오취 접화중생
雖往來而無往來相이라 妄心은 不爾故로
수왕래이무왕래상 망심 불이고
眞心妄心이 不同也니라 又眞心은 乃平常心也요
진심망심 부동야 우망심 내평상심야
或이 曰 妄心은 乃不平常心也니라 何名平常心也이닛고
혹 왈 망심 내불평상심야 하명평상심야
曰人人이 具有一點靈明하야 湛若虛空하야 遍一切處하나니
왈인인 구유일점령명 담약허공 편일체처
對俗事하야 假名理性이요 對行識하야 權號眞心이라
대속사 가명이성 대행식 권호진심
無分毫分別호대遇緣不昧하며無一念取捨호대
무분호분별 우연불매 무일념취사
觸物皆周하야 不逐萬境勸移하며 設使隨流得妙라도
촉물개주 불축만경권이 설사수륙득모
不離當處常湛然하야 覓卽知君不可見이 乃眞心也니라
불리당처상담연 멱즉지군불가견 내진심야
或이 曰何名不平常心耶이닛가 曰境有聖與凡하며
혹 왈하명불평상심야 왈경유성여범
境有染與淨하며 境有斷與常하며 境有理與事하며
경유염여정 경유단여상 경유리여사
境有生與滅하며 境有動與靜하며 境有去與來하며
경유생여멸 경유동여정 경유거여래
境有好與醜하며 境有善與惡하며 境有因與果하니
경유호여추 경유선여악 경유인여과
境有를 細論하면 則萬別千差어니와 今乃且擧十對호니
경유 세론 칙만별천자 급내차거십대
皆名不平常境也라 心隨此不平常境而生하고
개명불평상경야 심유차불평상경이생
不平常境而滅하나니 不平常境心을 對前平常眞心일새
불평상경이멸 불평상경심 대전평상진심
所以로 名不平常妄心也요 眞心은 本具하야
소이 명불평상망심야 진심 본구
不隨不平常境生하야 起種種差別일새
불유불평상경생 기종종차별
所以로 名平常眞心也니라
소이 명평상진심야
或이 曰眞心은 平常하야 無諸異因이어늘
혹 왈진심 평상 무제이인
奈何佛說因果善惡報應乎이닛가
내하불설인과선악보응호
曰妄心이 逐種種境하야 不了種種境하고 逐起種種心일새
왈망심 축종종경 불료종종경 축기종종심
佛說種種因果法하사 治伏種種妄心하야 須立因果也어니와
불설종종인과법 치복종종망심 … 수립인과야
若此眞心인댄 不逐種種境일새 由是로 不起種種心이라
약차진심 불축종종경 유시 불기종종심
佛이 卽不說種種法하시리니 何有因果也리요
불 즉불설종종법 하유인과야.
或이 曰眞心이 平常不生耶이닛가
혹 왈진심 평상불생야
曰眞心이 有時施用이나 非逐境生이요
왈진심 유시여용 비축경생
但妙用遊戱하야 不昧因果耳니라
단묘용유희 불매인과이
禮拜影現法會
예배영현법회
그림자와 같은 법회예요, 그래서 영현법회(影顯法會) 라고요. 그렇지마는 그것 뭐 몇 마디 듣고 금방 갔다가 돌아올 것 뭐 하려고 가. 이렇게 하면은 또 유(有)에 떨어져요. 또 꼭 이것이라야 된다고 집착하면은 무(無)에 집착하는 병이 돼버려요. 영현법회지마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할 줄 알고 거기에 예배드릴 줄 알고 거기에 동참할 줄 아는 그런 자세가 바람직하다 이거죠. 영현(影顯)!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법회에 예배 드리고,
行道足躡虛空
행도족섭허공
행도하되 이것은 도량을 도는 것을 행도라 그래요. 부처님을 돌고 도량을 거닐고 하는 그것이 전부 행도에 해당 되는데, “발이 진공에 섭한다.” 참다운 공한 도리에 섭하고 거기에 젖어 들라고 그래서 행도를 한다 이거예요.
여기 행도(行道)라고 하는 것은 우리 한국 불교에 옛날에는 있었는데, 요즘은 좀 뜸해졌어요. 이것이 뭔고 하면은 옛날 법당에 가면요, 부처님이 꼭 그것의 중심에 있고 부처님 뒤로 이렇게 복도가 있습니다. 법당이 작은데도 불구하고 왜 뒤에 복도를 내놓았느냐? 예불하고나 서 부처님을 빙글빙글 돌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뒤에 복도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을 많이 수용한다고 부처님을 바짝 부쳐 가지고 뒤에 공간이 없는데, 그렇게 돌도록 하는 것이 행도예요. 법당 안에서는 그렇게 부처님을 돌고 또 도량에 나와서는 법당 전체를 돌고 그 다음에 또 탑에 와서는 탑을 돌고, 그 다음에
焚香妙達無生이라
분향묘달무생
향을 사르되 묘히 무생을 통달한다.
생사가 없는 도리를 통달한다 이거죠. 왜냐? 향을 이렇게 사르어 봐요. 향이 타서 향기를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향도! 향기도! 결국은 생사가 없는, 생멸이 없는 그런 어떤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도 저 향과 같이 본래는 생사가 없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통달하는 그런 이치를 거기서 깨달으면서 분향한다는 것입니다.
誦經深通實相이라
송경심통실상
우리가 경을 공부하는 것, 송(誦)!
송경(誦經)이란 경을 읽는다 경을 외운다 또 경을 공부한다. 이러는데 그것은 전부 실상을 통달하는데 뜻이 있다. 우리 경 공부는요, 여기서 경전 공부만 하는 곳인데, 경전 공부는 전부 부처님의 실상을! 모든 존재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결국은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다른 게 아니 예요. 그러면 우리가 경 공부를 하는 것은 실상을 통달하는데 뜻이 있다 하는 뜻입니다. 인생의 실상! 사물의 실상! 사건의 실상! 모든 것의 실상을 통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은 중도정견으로서 그것으로 가능한 거죠. 그 다음에
散華顯諸無著이라
산화현제무저
이것은 부처님께 꽃을 올린다든지 또 꽃을 뿌리는 것, 옛날에 부처님께 꽃을 뜯어 가지고 이렇게 법당에 뿌리기도 하는 그런 것이 있었는데, 꽃을 꽂는다고 하는 것도 다 해당이 되겠습니다. 꽃을 흩되,
무착(無着)! 모든 문제에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꽃을 이렇게 뿌리면은 자기의 인연 따라서 날려서 가지 않습니까? 어디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거나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그대로 떨어지고 또 쓸면은 쓸어지고 이것이 우리가 꽃을 흩는데 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집착이 없음을 말하자 면은 나타낸다.
彈指以表去塵이라
탄지이표거진
탄지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을 퉁겨 가지고 소리를 내는 것을 탄지라고 그래요. 그러면 그것은 온갖 번뇌를 다 제거하는 것을 표하는 것이다.
施爲谷響度門이라
시위곡향도문
谷響道門(곡향도문)
도문이라고 하는 것은 육도문을 말하는 것이 예요.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인데 그 육바라밀이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그런 육바라밀을 말하자 면은 실천한다.
修習空華萬行이라
수습공화만행
공화만행! 만행도 아까 도문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육도만행! 말하자 면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이런 것을 공화와 같이, 허공에 꽃이 사실은 있는 것도 아닌데 허망한 꽃이다 이거죠. 그런 실제하지 아니하는 그런 꽃처럼 육도만행을 수습 한다.
그 허망한 만행을 뭐 하려고 닦느냐? 허망하지마는 닦는다 이거죠. 그것이 “수습공화만행”입니다. 그것이 중도적인 소견이 예요. 허망하다고 생각해도 안 되고 또 그대로 닦는 대로 있다. 하고 생각해도 그것도 안 되고
深入緣生性海라
심입연생성해
인연으로 해서 생기는 성품의 바다에 깊이 들어 간다. 모든 것은 전부 인연으로 생긴다. 그것을 깊이 이해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
常遊如幻法門이라
상유여환법문
환과 같은 법문에 항상 논다. 상유(常遊)!
법문 들으니까 뭐 남는 것이 있습니까? 남는 것이 없잖아요. 여환 법문이라. 그렇지만 늘 와서 들어야 돼. 항상 듣고 항상 또 새로 깨닫고. 남는 것이 없어도 “나는 들어보니까 남는 것이 없어서” 그래서 안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가면은 다른 무슨 좋은 일을 하는고?
남는 것이 없는 법문에 참석 안하고 그 시간에 뭘 또 남는 것이 있는 일을 하느냐 이거죠. 남는 것이 없는 법문이 이것이 진짜예요. 여기 해 놓았잖아요. 상유여환법문이라고, 환과 같다. 환은 환상이거든요. 허망하다는 뜻입니다. 허망하고 환화와 같은 그런 법문의 바다에 항상 놀아야 돼요. 뭐가 남는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은 그것은 오히려 사도라고요.
이런 것이 이해가 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불교에는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바른 이야기 밖에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올바른 이야기! 여기서 또 중도 이야기니까 더욱 더 그렇지요. 여환 법문에 항상 놀아야 된다. 그러니까 세상 사 어떤 이야기도, 또 법문으로 받아들이고 법문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자세가 또 필요하죠. 그렇게 알면은요,
세상 사 돌아가는 것이 전부 법문이고 깨달을 일거리 뿐이 예요. 보니까 꼭 부처님의 말씀! 경전의 말씀이라야만 법문이 아니더라고 요. 세상 사 돌아가는 것이 전부 법문이고. 신문이 전부 경입니다.
요즘 신문이 한 서른 페이지나 이렇게 되죠? 서른 두 쪽이나 그렇게 되는데 그것이 전부 경전입니다. 거기서 조금만 생각하면요, 정말 경전보다도 가슴이 더 아프고 더 감동적이고 충격이 더 크고. 경전 봐 가지고는 아무 감동도 없어요. 그런데 신문 보면은 그렇게 감동이 온다고요.
이번에 오늘 신문엔 가 또 보니까 무슨 다리! 쪼개지는 다리 이름이 뭐예요? 다리 이름이 그거 이상하데요? 그것이 1m나 이렇게 쪼개져서 길이는 1m, 폭은 50cm 박달 다리인 가요 뭐. 어떤 청년이요, 지나가다가 자꾸 세 멘 가루가 떨어져 있어 가지고 이상하게 생각이 들어서 쳐다봤다는 거예요. 그래도 자꾸 떨어지고 있어서 청년이 잘못 봤는가 싶어 가지고 차를 대 놓고 와서 육안으로 확인 하니까, 아니 거기에 금이 가 가지고 계속 시멘트 쪼가리가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마침 그 사람이 휴대폰이 있어서 휴대폰을 가지고 그자 리에서 전화를 했잖아요. 전화를 했는데 15분 간만에 119 구조대에서 와 가지고 차를 그 때부터 통제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도착할 때 까지 저 다리가 만약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랬대요. 그런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어요.
그 청년이 아주 큰 일을 한 거예요. 오늘 신문에 이만하게 나왔더라고 요. 아이고 정말 표창은 하기도 했지만 한 백 번쯤은 해야 할 사람이라고요. (ㅎㅎㅎ~) 한번 해 가지고는 안돼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어요. 참 그런 대목들은 경전 열 권 보는 것보다도 더 아주 감동적이더라고 요. “상유여환 법문이라.” 그게 좋은 법문 아닙니까? 여환 법문에 항상 노닐며
誓斷無染塵勞라
서단무염진노
맹세코 물듦이 없는 길로 번뇌진로를 맹세코 끊는다.
물이 안 들었는데 번뇌를 뭐 하려고 끊어. 그렇지마는 또 끊을 것이 없는 것을 번뇌를 또 끊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이거죠. 그래서 맹세코 끊어야 돼요. 번뇌가 본래 공해서 물현진로야. 물듬이 없는 진로인데 뭘 끊을 것이 있느냐?
아니다 이거죠. 그것도 맹세코 끊어야 돼. 끊을 번뇌가 본래 없는데 라고 생각해도 그것도 잘못이고, 꼭 있다고 생각해서 기어이 제거 해야 되겠다고 하는 것도 그것도 잘못이고 없는 줄 알고 말하자 면은 끊을 줄 아는 것,
願生惟心淨土라
원생유심정토
유심정토에 나기를 원한다 이겁니다. 유심정토! 뭐 저기 서방정토! 서방정토 그러는데 서방도 결국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서방이 예요. 그래서 유심정토라 그래요. 보통 우리가 정토 정토 그러지요. 극락정토! 극락정토! 그러는데, 극락정토가 되었던지 무슨 정토가 되었던지 간에 전부 이 한 마음으로부터 생긴 정토입니다. 그것을 유심정토라고 그래요. 사바세계도 유심 사바세계 입니다. 내 마음이 사바 세계니까 이 세상이 사바세계인 거죠.
履踐實際理地라
리천실제리지
실제의 진리의 땅을 기어이 밟는다.
出入無得觀門이라
출입무득관문
얻음이 없는 관문에 출입한다. 관문을 참선이라고 나 할까요? 참선해봐야 아무것도 소득이 없죠. 그런 소득이 없는 참선 문에 늘 출입한다. 열심히 한다 이거죠.
降伏鏡像魔軍이라
강복경상마군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 마구니를 항복한다. 마구니 가 실제하는 것이 아니 예요. 거울에 비치는 어떤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그런 마구니죠. 다시 말해서 마구니 이런 것도 내 마음에서 일으키는 환상이지요. 마! 마구니! 기도할 때 참선할 때 마구니 하는 것도 자꾸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렇게 알면은 잘못 아는 것이죠. 그 다음에
大作夢中佛事라
대작몽중불사
몽중 불사를 크게 짓는다. 사실 불사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허망하다고 생각하면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거든요.
그야말로 꿈 속에서 하는 일과 같다고요. 뭐 삶이라는 것이 다 어떻게 보면은 꿈 속이고. 여러분들 지나온 삶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은 하루 밤 꿈꾼 것 같지요 .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생각해 보면은 하루 밤 꿈꾼 것 같지 뭐가 있습니까? 하루 밤 꿈입니다.
몽중불사도 마찬가지죠. 어떤 큰 불사도 꿈 속의 불사예요. 그렇지만 크게 지어야 돼요. 또 내 인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루 밤 꿈과 같이 그렇게 허망하다. 지나 놓고 보니 그렇게 허망하다. 그러면 당장에 저녁에 가서 자살할 것은 아니잖아요. 해서도 안되고. 또 꿈 같은 삶을 살아왔지만. 꿈같이 허망한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이 그것이 삶이라고요. 그것도 사람이 사는 거예요. 그것 빼놓고 어디 다른 어떤 삶이 있나요? 허망하지만은 또 허망한 삶을 열심히 사는 것, 살 수 밖에 없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이라고요.
참 멋진 말이잖아요. “대작몽중불사라.” 불사라고 하는 것을 그냥 삶이라고 보세요. 꿈속의 삶이지만 크게 살아야 되고 열심히 살아야 그것이 대작이죠. 대작(大作)! 몽중불사를 크게 짓는다. 이런 구절이 우리 삶하고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죠.
廣度如化含識이라
광도여화함식
그 밑에 함식이라는 말은 중생이라는 말입니다.
화와 같은 중생을, 허망한 중생이라 이 말이죠. 허망한 중생을 또 널리 제도해. 중생 중생 중생 해봐야 사실은 중생이 중생이 아니고 이 이름이 중생이고 내용은 어떻게? 부처다. 그런 중생이지마는 널리 또 제도하는 것, 그것이 중도적인 소견이고 불교적인 소견이다.
同證寂滅菩提라
동증적멸보리
그래서 적멸한 보리를 똑같이 증득 한다. 깨닫는다. 적멸(寂滅)! 텅 비고 고요한 그런 보리를 뭐 어떻게 깨닫는다는 말이야? 텅 비고 고요한 깨달음이면 그 깨달음을 또 깨달아야 하는 것이 또 불교라. 그래서 동정적멸보리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도 마치 전부 불교적인 것이고, 또 우리의 현실과 연관되는 그런 구절들은 금방 말씀 드린 대작 몽중 불사! 그 다음에 저 앞에서 넷 째줄 첫머리에
鑒無身而具相
감무신이구상
이것은 꼭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일이지요. 이 몸이 허망하고 이 몸이 본래 몸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줄 감(鑑)! 거울 비추듯이 환히 안다 이거죠. 그렇지마는 모양을 또 뽐낸 줄도 알아야 돼. 구상! 구상이라는 말은 모양낸다 이말 입니다. 상을 갖춘다. 한껏 모양을 낼 줄 알아야 된다 이거죠. 그것을 이제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 같은 이들을 생각하면은 아주 바람직하죠. 그 다음에
莊嚴性空世界
장엄성공세계
집안 꾸미고 뭐 청소하고 다듬는 것, ‘하이고 뭐 저까짓 것 꾸미면 뭐하나?’ 그래도 허망하지마는 꾸며야 돼요. 꾸미면 뭐하나 하는 생각은 왜 그런 생각이 나느냐? 게으르고 하기 싫어서 하는 소리예요. 게으르니까 자기 게으른 것을 어떻든 합리화 시켜야 자기가 산다고요.
자기 나름대로 전부 사람들은요, 합리화 시키는 길이 다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다 합리화 시키는 길이 있다고요. 참 묘해요. 가만히 보면은 그런 사람은 살게 되어 있어요. 청소를 하면은 하는 대로 이치에 맞고,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이치에 맞아요. 무슨 궁리를 해내더라도 사람들은 합리화 시키고 말아요. 참 묘하고 아주 영리해요. 자기 사는 데는 기가 막히게 아주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요.
어떤 둔한 사람도요, 아주 천재적인 소질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놓고도 당연히 자기는 어떤 이유가 있다는 거죠. 뭐 외제차를 타는 이유가 됐던지 무슨 이유가 되었던지 간에 자기는 자기 나름의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장엄성공세계! 감무신이구상! 그 다음에 장엄성공세계! 검무신이구상(鑒無身而具相)은 자기 개인에 대한 문제라면은, 장엄성공세계는 우리 가정! 환경! 주변 환경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게 소화 하면은 아주 그럴 듯 합니다. 그 다음에
羅列幻化供具라
나열환화공구
우리나라 사람들 반찬 안 먹어도 펼쳐 놓기 좋아하잖아요. 옆에 반찬이 안 먹는 반찬이 있어야 먹는 반찬이 맛이 있거든요. 숟가락 안 댈 것 뻔히 아는데 뭐 하려고 놓느냐? 그래도 숟가락 댈 것을 더 정확하게 잘 대게 하기 위해서도 안 먹는 것도 옆에 있어야 돼요. 꼭 먹는다고 그것만 먹을 수가 없잖아요.
우리가 걸어가는데요. 발 그것 하나 딛는 것이 얼마나 땅을 차지합니까? 얼마 땅을 차지 안 하죠. 폭 그 얼마 차지 안 한다고요. 한 삽 십 센티 폭이면 돼요. 그런데 삼 십 센티 폭만 남겨놓고 나머지 예를 들어서 전부 수 백미 터 낭떠러지를 만들어 놓으면 거기에 갈 수 있을 줄 알아요? 못간 다고요.
그러면 옆에 땅이 있으면 어디든지 왔다 갔다 하고 딛고 가느냐? 그렇지는 안 해요. 삽 십 센티 폭이면 충분히 가지마는 옆에 안 쓰는 땅이 있어야 겨우 삼 십 센티 폭을 쓰고서 간다고요. 세상은 그래요. 그것을 우리가 모르고 자꾸 자기 생각 일변도로 나가니까 이런 가르침이 중요합니다. 장엄성공세계 라. 성공세계! 우리 환경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나열 환화 공구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공양영향여래 이런 말도 참 좋네요. 전혀 어려운 게 아니지요. 그대로 공양영향여래(供養影響如來)! 영향여래에게 공양 올린다. 건립수월도량이 라든지. 아주 이것은 내가 스님들에게도 자주 소개하고 또 하고. 소개하고 또 하고 결국은 불교적인 그런 많은 공부를 통해서, 어떤 그런 소견으로 집약 되는가 하면은 이 한 페이지의 가르침으로 집약됩니다. 이 행위의 여러 가지 일들이 전부 중도적인 소견! 바른 소견! 그런 바른 소견으로 우리가 결론을 맺어야 되는데,
여기는 육바라밀이라든지 내 몸의 문제! 환경의 문제! 불사의 문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문제! 육바라밀의 문제! 뭐 별별 문제들이 이 속에 그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불교의 발 심에서부터, 보리 무발이 발! 발심에서부터 보리를 깨닫는데 까지 동정적멸보리! 그 보리를 깨닫는데 까지 아주 시작과 중간과 그 끝이 아주 잘 짜여진 그런 게송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에 중도(中道)!
常處中道(상처중도)일새. 거기까지 했죠. 그 다음에
故로 祖師가 云하사대
고 조사 운
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하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불축유연 물주공인 일종평회 민연자진
故로 祖師가 云하사대
고 조사 운
이것은 삼조 승찬 대사가 신심명에 있는 말인데
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
불축유연 물주공인
그러니까 유연을 따르지도 말고, 공인에도 머물지 말라.
이것은 쉽게 표현하면은요,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공(空)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렇게 알면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공양! 공양 올린다. 공양 그까짓 것 허망한 부처님께 뭐 하려고 등상불에게 뭐 하려고 올리나? 이것은 공인에 집착하는 것이 돼요. .
그러면 부처님한테 그냥 삼시 세끼 예를 들어서 공양을 못 올려 가지고 그리고 또 너무 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해 가지고서 집에 불상을 또 놓아두었다가 또 부처님 사진을 놓아두었다가 그만 거북스럽고 꿈에 뭐 자꾸 이상한 것이 나타난다고 그래 가지고 도저히 못 견디고 가지고 오는 그것도 또 어디에 떨어진다? 유연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있다고 하는데 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유연을 따르지도 말고 공인에 머물지도 말아서,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일종평회 민연자진
一種(일종)! 여기 일종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중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종으로! 하나의 종!. 平懷(평회)! 평등히 품으면은, 평등히 생각하면은, 중도적인 입장으로서 평등하게, 또는 평상하게 그렇게 생각할 것 같으면은
泯然自盡이라
민연자진
공(空)도 유(有)도, 그런 차질이
민연(泯然)! 없어진다 이말 이죠. 없어서 저절로 다하게 된다. 다 그런 차별이 없어진다 이거죠. 차별이 없어지면은 거기에 어떤 편협한 마음이 없어지고 편협한 마음이 없어지면 문제가 저절로 소멸되는 거죠. 우리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문제는 전부 어떤 편협한 마음! 치우친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肇論(조론)에 云(운)하사대
승조 법사! 저 위에 첫 줄에도 조론이 있었지요.
조론에 말하기를
是以로 聖人은 處有不有하고
시이 성인 처유불유
유에 처하되 유(有)가 아니고, 또
居無不無라
거무불무
무에 거하되 무(無)가 아니니
그러니까 성인들의 마음은 어디 있다 하더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우리는 있다 하면은 있는데 집착하고 거기에 떨어지고 거기에 껌벅 넘어가죠. 居無不無(거무불무)야, 성인들은 무(無)에 거해도 무가 아니나니,
雖不取於有無나
수불취어유무
비록 유와 무를 취하지 아니하나, 그러나
然이나 不捨於有無일새
연 불사어유무
그렇다고 유(有)와 무(無)를 또 버리지도 아니해. 유와 무를 취하지도 않고 유와 무를 버리지도 않는다. 참 멋진 표현입니다.
所以로 和光塵勞하며 周旋五趣하야 寂然而住야
소이 화광진로 주선오취 적연이주
和光塵勞(화광진로)
진로(塵勞)라는 말은 번뇌라는 뜻이지요.
광(光)은, 내 마음을, 진로(번뇌)와 화한다. 한 덩어리가 된다 이거죠. 마음은 이 세상과 한 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한 덩어리가 되면은
周旋五趣하야
주선오취
五趣(오취)에, 다섯 갈래에 두루 두루 돌아다닌다.
주선오취! 오취는 뭔고 하니,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하고 아수라를 같이 겸해서 육취를 오취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에 갈 일이 있으면 지옥에 가는 거죠. 왜냐? 和光塵勞(화광진로)니까, 번뇌하고 내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니까요.
천당에 갈일 이 있으면 천당에 가고. 축생이 될 일이 있으면 축생이 돼요. 아귀가 될 일이 있으면 아귀가 된다 이거죠. 아수라 될 일이 있으면 아수라가 되는데 그렇다고 또 거기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和光塵勞(화광진로)해서 周旋五趣(주선오취)하는 도리입니다.
寂然而往하고
적연이왕
고요히 간다. 고요히 가고. 또
忽爾而來하야
홀이이래
홀연히 또 돌아와. 가는 것 같지 않게 적연히 가고 또 홀연히 제자리로 돌아와요.
廉淡無爲호대 而無不爲라.
염담무위 이무불위
廉淡(염담)! 염담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편안하고, 지옥에 가도 편안하고 천당에 가도 편안하고 항상 담담한, 아주 편안하고 담담해서 무위(無爲)야. 함이 없다 이거죠.
而無不爲라
이무불위
하지 아니함이 없다. 무위지마는 또 안 하는 것 없이 다 한다. 그것은 이제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아수라 그런데 다 갈 일이 있으면 다 간다 이거죠. 그리고 해야 할 불사가 있으면 열심히 하고, 그러니까 불교는 어떻게 보면은 廉淡無爲(염담무위)라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 하면은 아주 소극적인 그런 조용한 은둔의 삶을 말하고 권장하는 것 같지 만은,
而無不爲라
이무불위
무불위는 안 하는 것이 없다 이 말이거든요. 고요해서 함이 없이 또 안 하는 것도 없다. 열심히 산다 이것입니다. 아주 용기백배하고 아주 활발하게 열심히 그 자기 삶을 펼쳐가는 것, 그게 무불위야. 안 하는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조론에서 그렇게 이야기 했지요.
此는 說聖人의 垂手爲人해서
차 설성인 수수위인
성인들! 성인들의 손을 드리워서 사람을 위한다 이거죠. 성인들은 중생 건지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중생 건지는 것이 垂手爲人(수수위인)입니다. 손을 드리운다. 어디에다? 중생들이 사는 동네에다 떡 이 손을 뻗쳐 가지고서 사람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운다 이거죠. 관세음보살처럼 천수천안이 되어가지고 중생들을 건지는 일을 垂手爲人(수수위인)이라 그래요. 손을 드리워 사람을 위해서
周旋五趣라
주선오취
오 취(五趣)에 두루두루 돌아다닌다. 지옥도 가고 축생도 가고 . 아귀도 가고. 인도도 가고. 아수라도 가고 온갖 것에 다 돌아다니면서
接化衆生(접화중생)!
중생들을 제접하고 교화한다. 접화 중생한다 이거죠.
중생들을 위해서
雖往來而無往來相이라
수왕래이무왕래상
비록 왕래하지마는 왕래하는 상이 없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지옥에 가더라도 지옥에 있는 중생 건지로 간 것이니까 그 사람은 지옥에 간 것이 아니죠 그 사람은 죄가 있어 간 것이 아니고 건지로 갔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형무소에 위문을 갈 수 있다 이거죠. 위문 간 사람도 형무소에 간다 이거예요. 가지만은 죄가 있어서 형무소에 간 사람하고는 영 판이하게 달라요. 그렇게 간다 이거죠.
그러면 보살이 그렇게 갈 때에는 어디 못 갈 때가 없어요. 어디든지 가야 되고 못 갈 데가 있으면 그것은 보살이 아니고 불자가 아니죠. 어디든지 다 가야 된다고요. 어떤 상황에도 다 가는 것이 그게 보살이고 불자다. 그래서 여기 보면은
周旋五趣 接化衆生
주선오취 접화중생
오취(五趣)!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아수라 어디든지 다 다니면서 중생들을 접화 해 가지고서, 그렇게 가는 것은 비록 가고 오지만은 가고 오는 상이 없다 이거죠. 형무소를 예를 들어서 위문 갔다가 와 가지고 집에 와서는 자랑하잖아요. 부끄러워 하는 것이 아니고 자랑한다고요. 그 입장이 그렇게 되어 버리면은 그것은 열번이 아니라 백번 천번을 가도 자랑거리지요. 부끄러울 거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불교적인 그런 소견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적인 소견이고 불교적인 삶이다. 그런데
妄心은 不爾故로
망심 불이고
진심의 삶은 앞에 까지 그렇게 이야기 했고
妄心은 不爾故로
망심 불이고
그렇지 아니한 까닭으로
眞心妄心이 不同也니라
진심망심 부동야
같지가 않다.
又(우) 또 이야기 하자면은
眞心은 乃平常心也요
진심 내평심심야
진심은 평상심이고
妄心은 乃不平常心也니라
망심 내불평상심야
망심은 불평상심이라. 진심은 다른 말로 하자면은 평상 한 마음이고 망심은, 중생들 마음은 평상 치 못한 그런 마음이다. 그러니까 형무소로 치자면은 중생은 죄가 있어서 형무소에 갔고, 또 진심은 보살이 되어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형무소에 위문하러 간, 그런 입장에 형무소를 간 것이니까 그것은 평상심이고 죄받아서 형무소간 것은 불평상심 이죠. 일분 일초가 그게 부끄럽고 말할 수 없이 갑갑하고 죽을 지경이죠. 그 다음에
或(혹)이 曰(왈) 혹자가 말하기를
何名平常心也이닛고
하명평상심야
무엇을 이름해서 평상심이라고 하느냐?
평삼심이라고 하는 말은 불교에서 참 좋아하는 말이거든요. 평상심! 이 평상심이 참 여러 가지로 쓰일 수가 있고 아무리 시원찮게 해석하더라도요, 이 평상심은 참 좋은 마음입니다.
평소에도 늘 평상심으로 마음을 쓰고 평상심으로 대하고 평상심으로 무엇을 관찰하고 그래야지, 거기에다 뭘 재주를 부린다든지 무슨 어떤 선입견을 갖는다든지 아니면 온갖 수단! 머리를 쓰고, 머리로 계산한다든지 이런 것은 다 평상심이 아니 예요.
그대로 평탄한 그런 마음! 차가 막히면 기다렸다가 그냥 가고, 그 뭐 샛길이 없을까 하고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러가지고서 샛길로 들어서면 그것은 불평상심 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 이제 막혀 가지고 별 볼일 없죠(ㅎㅎㅎ~) 그렇게 평상심과 불평상심을 그렇게 해석해도 가능해요. 괜찮아요.
曰(왈) 답입니다.
人人이 具有一點靈明하야
인인 구유일점령명
사람 사람이 具有(구유)! 갖추고 있다. 무엇을?
一點靈明을
일점령명
한 점의 아주 신령스럽고 밝은 것을 갖추고서
湛若虛空이라
담약허공
맑기가 허공과 같다. 허공이 텅 빈 허공처럼, 저 푸른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맑다. 그러면서, 변 일체 처에 두루 했다. 모든 곳에 이 허공이 미치지 않는데 가 없더라.
허공이 없는데 가 없죠. 그래서
對俗事 하야 假名理性이요.
대속사 가명이성
俗事(속사)를! 세속적인 일을 배워 가지고서는 그것을 거짓으로 이성이라고 이름하고, 그것을 이성! 이성 그러잖아요. 흔히 이성적으로 하라고 하고, 그런 소리 잘 쓰지요. 그것을 거짓으로 이름을 말을 하자니 이성이고
對行識하야
대행식
이것은, 行識(행식)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의 어떤 마음의 어떤 작용입니다. 마음의 작용으로 말해 가지고서는 방편으로
權號眞心이라
권호진심
방편으로 진심이라고 이름한다. 그것도 방편으로.
無分毫分別호대
무분호분별
그 진심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도 다 편의상 이름을 붙여 본거죠 사실은. 이 앞에 一點靈明(일점령명)이라는 말이 아주 좋은 말이죠. 그것을 이제 다른데 서는 일 물이라는 그런 표현도 쓰고 그렇습니다.
無分毫分別이라
무분호분별
分毫(분호) 만한! 털끝만한 분별도 없으되
遇緣不昧하며
우연불매
인연을 만나면은 매 하지 아니해. 환히 안다 이거죠.
원래 이 진심은요, 평소에는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인연을 만나면, 어떤 상황이 딱 벌어지면 얼른 안다 이거죠 불매(不昧)라! 매 하지 않다. 환하게 안다. 그래서
無一念取捨호대
무일념취사
일념의 취사도, 취하는 것도 버리는 것도 없으되
觸物皆周하야
촉물개주
사물을 만나면! 觸物(촉물) 이라고 하는 말은 사물을 만나면 이 말이죠. 부딪힌다 이말 이거든요. 사물과 만날 것 같으면은, 皆周(개주)야! 다 들어 주고 어떤 사물도 놓지는 것이 없다.
不逐萬境遷移하며
불축만천이
그렇지만 일만 가지 경계를 좇아서
천이(遷移)! 옮겨 가지도 아니하고,
設使隨流得妙라도
설사수륙득묘
설사 흐름을 따라가지고서,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지고 거기서 묘(妙)를 얻는다 하더라도, 거기 어떤 깨달음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不離當處常湛然하야
불리당처상담연
당처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당연해서, 그 진심의 마음자리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것을 찾으려면 찾을 길이 없는 것이 이 진심의 도리예요. 그래서
覓卽知君不可見이 乃眞心也니라
멱즉지군불가견 내진심야
覓卽(멱즉)! 찾은 즉 슨 알리라 그대는, 가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 것이다. 그대는 틀림없이 볼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전부 이 마음이 들어서 공부하고 무슨 말소리 듣고 춥다 덥다 분별하고 하지마는, 그래도 그 마음자리는 찾게 되면은 그게 찾아지지 않는 것이 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이 또한 이 진심이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覓卽知君不可見
멱즉지군불가견
찾은 즉 은 그대가 볼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진심의 도리다. 시간적으로 봐서 이것을 다 해드려야 되는데,
或이 曰 何名不平常心耶이닛가
혹 왈 하명불평상심야
앞에서는 평상심을 이야기 했고
여기는 불평상심을 뭐라고 하느냐?
曰境有聖與凡하며
왈경유성여범
경계에는 성인과 범부가 있죠. 대상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아, 성인이다. 범부다. 그 다음에
境有染與淨하며
경유염여정
염(染)은 물 들린 것,
경(淨)은 깨끗한 것 그런 것도 있으며
境有斷與常하며
경유단여상
경계에는 대상이죠. 대상에는 단(斷)! 끊어진 것.
상(常)! 계속되는 것, 영원한 것. 그것이 또 있고
境有理與事하며
경유리여사
경계는 이적인 면과, 또 사적인 것이 있고
境有生與滅하며
경유생여멸
경계는 생과 멸이 있고 전부 상대적이죠.
이(理) 사(事) 상대. 생(生) 멸(滅) 상대.
단(斷) 상(常) 상대. 또
境有動與靜하며
경유동여정
동(動)과 정(靜)이 또 있고
境有去與來하며
경유거여래
거(去)와 래(來)가 있어. 가고 오는 것이 있고 우리 세계는 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에는 다 그것이 있어요.
境有好與醜하며
경유호여추
경계에는 좋은 것(好)도 있고
추한 것(醜)도 있고. 또
境有善與惡하며
경유선여악
경계에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어.
우리가 좋다는 경계에는 다 이것이 있습니다.
境有因與果하니
경유인여과
경계에는 원인과 또 결과가 있어. 이런 것이 있는데
境有를 細論하면
경유 세론
이런 경계가 있는 것을 세세하게 논할 것 같으면은
則萬別千差어니와
칙만별천차
천차만별! 우리가 그러지요. 그것을 만별 천차나 마찬가지입니다. 만별 천차려니와,
今乃且擧十對호니
급내차거십대
지금의 십대를 또한 들었다. 그것이 십대예요.
성(聖)범(凡). 염(染)정(淨). 단(斷)상(常). 리(理)사(事). 생(生)멸(滅). 동(動)정(靜). 거(去)래(來). 호(好)추(醜). 선(善)악(惡). 그 다음에 인(因)과(果) 이것이 이제 열 가지로 서로 상대한 거죠. 허니,
皆名不平常境也라
개명불평상경야
다 이름해서 불 평상경계다 이거죠. 어떤 것이 불평상 심이냐 그랬지 않습니까? 불평상심으로 만나는 경계다 이 말입니다. 이런 차별된 것, 상대되는 것, 우리는 항상 차별과 상대의 어떤 갈림길에서 치다꺼리를 하다 볼일을 다 보는 거죠. 거기서 갈등이 생기고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 갈등이 생기고 좋다 나쁘다 전부 거기서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거죠.
心隨此不平常境而生하고
심유차불평상경이생
마음이 이 불평상의 경계를 따라서 생기고
不平常境而滅하나니
불평상경이멸
이 불평상 경계를 따라서 또 멸하니
不平常境心을 對前平常眞心일새
불평상경심 대전평상진심
앞의 평상 한 진심에다가 대할 때
所以로 名不平常妄心也요
소이 명불평상망심야
그리고 이것도 상대적으로 평상심! 불평상심! 이렇게 상대적으로 해 가지고서 불평상심이라고 이름을 했고
眞心은 本具해서
진심 본구
진심은 본래 갖추고 있어 가지고서,
不隨不平常境生하야
불유불평상경생
불평상 경계를 따라서
起種種差別일새
기종종차별
종종 차별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所以로 名平常眞心也니라
소이 명평상진심야
평상 진심이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或이 曰 眞心은 平常하야 無諸異因이어늘
혹 왈 진심 평상 무제이인
진심은 평상해서 모든 다른 원인이 없거늘
奈何佛說因果善惡報應乎이닛가
내하불설인과선악보응호
내하 불설 인과 성악 보응 이런 것을 부처님은 왜 그런 것을 말씀하십니까? 이 말이죠. 그러니까
曰(왈) 대답하여 말 하기를
妄心이 逐種種境하야
망심 축종종경
가지 가지 경계를 좇아가지고서
不了種種境하고
불료종종경
가지가지 경계를 알지를 못하고
逐起種種心일새
축기종종심
드디어 가지가지의 마음을 일으킬새.
佛說種種因果法하사
불설종종인과법
그래서 부처님이 가지가지의 인과 법을 설 하사
治伏種種妄心하야
치복종종망심
가지가지의 망령된 마음을
치복(治伏)! 다스리고 항복 받아서
須立因果也어니와
수립인과야
모름지기 인과를 세웠다.
우리가 인과 인과 하는데 인과가 우리의 입장에 있어서는, 참으로 우리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는 거죠. 우리의 가지가지 망령된 마음이 있어 가지고 그 마음 때문에 가지가지 인과를 만들어 가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이 가지가지 인과 법을 말해 가지고서 결국은 가지가지의 망령된 마음! 이것을 다스려서 조복 받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인과 이야기를 아니할 수가 없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인과로 풀어가는 거죠. 그런 깨달음은요, 인과의 그런 어떤 굴레에서 매이지를 않습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는 거죠.
若此眞心인댄
약차진심
만약 이 진심일진 댄
不逐種種境일새
불축종종경
종종 경계를 쫓지 아니할새,
由是로 不起種種心이라
유시 불기종종심
이로 말미암아 종종심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라.
진심은 종종 경계를 안 따라 가죠. 설사 따라가더라도 경계가 아니고 진심이죠. 꽃을 봐도 진심 꽃이요, 사람을 봐도 진심 사람이요. 뭐 나무를 봐도 마음 나무고. 하늘을 봐도 마음 하늘이고. 강을 봐도 마음 강이고. 여름은 마음 여름이고. 겨울은 마음 겨울이고. 더움은 마음 더움이고. 추움은 마음 추움 이야. 전부 마음이라고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라고 덥다 춥다 생각을 못하고 덥다 춥다 밖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지 내면은 안보니까 그것에 문제가 있다 이거죠. 그래서 여기서는 진심은 종종 경계를 쫓지 아니하고 마음만 본다 이거예요. 그런 까닭에 뭐라고? 가지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라. 경계를 따르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래서
佛이 卽不說種種法하시리니
불 즉불설종종법
그래서 부처님이 종종 법을 아니 설하지 아니하실 것인 댄. 하시니
何有因果也리요
하유인과야
어찌 인과가 있겠는가.
진심의 세상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진심만 누리고 사는, 진심만 쓰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이 가지가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가지가지 인과법도 이야기 안 하고. 가지가지 마음도 이야기 안 하고. 뭘 그렇게 가지가지 이야기할 것이 있어요? 통째로 진심뿐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보니까 부처님이 할 수 없이 인과 법을 이야기 하고 인과 법을 또 조복 받는, 가지가지 망심을 조복 받는 법을 설했다 그런 말입니다.
或이 曰 眞心이 平常不生耶이닛가.
혹 왈 진심 평상불생야
평상해서, 생 하지 않는 것입니까? 물으니까
曰 眞心이 有時施用이나
왈 진심 유시여용
진심이 안 생기면 되나요?
진심은 유시(有時)에는,
어떤 때는 여용을 베풀어. 쓴다 이거죠. 그러나
非逐境生이요
비축경생
경계를 쫓아서 생기지 않고
但妙用遊戱라
단묘용유희
묘한 작용으로 유희한다 이거죠.
유희(遊戱)! 우리가 유희라고 하는 것은 놀이 아닙니까? 노는 거죠. 노는 것은 안 놀아도 괜찮아요. 노는 것은 즐거우라고 노는 거죠. 하고 안 하고는 내 마음에 달렸어. 그런데 노는 것은 억지로 놀 필요는 없는 거예요. 억지로 놀 필요도, 억지로 노는 사람도 없고. 노는 것은 즐겁자고 노는 것이고 즐겁기 위해서 노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진심은 우리가 마치 놀이하듯이 안 해도 되는 놀이를 더 즐겁자고 하는 것이 되듯이, 말하자 면은 그렇게 내가 쓰고 안 쓰고를 알아서 하는 것이 진심이라. 그런데 우리 망심은 안하고 못 배기는 것, 어떤 굴레 속에 따라가지 안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망심의 세계다 그렇게 말 할 수가 있는 거죠.
但妙用遊戱하야 不昧因果耳니라
단묘용유희 불매인과이
인과에 매 하지 않는다. 어둡지 않는다.
불매인과(不每因果)! 불락인과(不樂因果)! 이런 고래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말하자 면은 이 진심은 인과에 꺼달리는 것이 아니고, 말하자 면은 인과에 어둡지 않고 모든 그런 펼쳐진 자기 삶을 관조하고, 또 자기가 능동적으로 그것을 운용하는 놀이를 하듯이 묘용 유희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중도게송이 들어가서 내용이 너무 긴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_()()()_
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하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공(空)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중도적인 입장으로서 평등하게, 그렇게 생각할 것 같으면 차별이 없어지고, 차별이 없어지면 거기에 어떤 편협한 마음이 없어지고 편협한 마음이 없어지면 문제가 저절로 소멸되는 것이다... 감사드립니다... _()()()_
마음 하나 ..최선을 다 해 쓴다고 해도 지나고 나면 ...저는 참 어렵습니다. 無影樹님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_()()()_
眞心은 平常心也요 妄心은 不平常心也니라...無影樹님 수고하셨습니다.._()()()_
不離當處常湛然 覓卽知君不可見- 당처를 떠나지않고 항상 당연해서 가히 볼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것이다. _()()()_
眞心은 本具해서 不隨不平常境生하야 起種種差別일새 所以로 名平常眞心也니라...진심은 본래 갖추고 있어 불평상 경계를 따라서 종종 차별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고로 평상 진심이다 라고 한다...無影樹님, 고맙습니다. _()()()_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라鑒無身而具相(감무신이구상) 莊嚴性空世界(장엄성공세계)하야...삶의 이치...고맙습니다._()()()_
鑒無身而具相(감무신이구상).이 몸은 항상 아무것도 아닐 줄 알지마는 또 내몸을 뽐 낼 줄도 알아야 한다.감사합니다._()()()_
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하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스님! 무영수님! 감사합니다.
周旋五趣 接化衆生 _()()()_
眞心(진심)은 乃平常心也(내평상심야)요 妄心(망심)은 乃不平常心也(내불평상심야)니라 ... 그런데 眞心보다 妄心이 항상 앞장 섭니다 ... 無影樹님,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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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 유(有)에도 집착하지 말고 공(空)에도 집착하지 말라....감사합니다_()()()_
수수위인(垂手爲人)......감사 합니다._()()()_
不離當處常湛然하야 覓卽知君不可見이 乃眞心也니라.....무영수님, 감사드립니다...._()()()_
모든 것은 전부 인연으로 생긴다...._()()()_
‘誦經深通實相. 경 공부를 하는 것은 실상을 통달하는데 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실상! 사물의 실상! 사건의 실상! 모든 것의 실상을 통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은 중도정견으로서 가능한 거죠.’ _()()()_
不逐有緣하며 勿住空忍하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盡이라 차별이 없어지면 편협한 마음이 없어지고 편협한 마음이 없어지면 문제가 저절로 소멸되는 거죠. 우리 인간 관계의 문제는 전부 편협한 마음! 치우친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_()()()_
‘處有不有하고 居無不無. 然이나 不捨於有無.’ _()()()_
眞心은 乃平常心也 ←보살→ 위문하러 형무소가고, 중생 건지러 지옥가고... 妄心은 乃不平常心也 ←중생→ 죄가 있어 형무소. 지옥에 가고... _()()()_
'眞心本具: 진심은 본래 갖추고 있어서, 起種種差別: 종종 차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_()()()_
‘不逐種種境. 不起種種心.:진심은 종종 경계를 쫓지 아니하고 마음만 본다 이거예요. 그런 까닭에 뭐라고? 가지 가지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함이라. 경계를 따르지 않는다 이거예요.’ _()()()_
'不昧因果. 不樂因果. 진심은 인과에 꺼달리는 것이 아니다.' _()()()_
_()()()_
無影樹님,공부 할수있는 인연이 오늘따라 더 고마음을 느낌니다 창 밖에 비가 내립니다 차 한잔 마시고.. 다시.또 열심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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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망하지만은 또 허망한 삶을 열심히 사는 것, 살 수 밖에 없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이라고요. 참 멋진 말이잖아요. “대작몽중불사라.” 불사라고 하는 것을 그냥 삶이라고 보세요. 꿈속의 삶이지만 크게 살아야 되고 열심히 살아야 그것이 대작이죠. 대작(大作)! 몽중불사를 크게 짓는다. 이런 구절이 우리 삶하고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죠. ..()()()
眞心은 平常心也요 妄心은 不平常心也니라. 유,무에 집착 말고 중도의 삶으로..._()()()_
-()()()-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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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妙用遊戱하야 不昧因果耳니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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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心直說 - 無比스님 眞心直說 法門 錄取 第38講 (眞心無知)
감사합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_()()()_
眞心은 本具하여 不隨不平常境生하고 起種種差別 하면 名平常眞心也니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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