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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26강
불교는 그런 사상과는 정말 거리가 멀죠. 피리장부하여리이다. 그대도 장부고, 나도 장부다. 불향여래행청래. 여래가 간 곳 나는 안 간다. 그 사람 갔으면 됐지 내가 왜 또 거길 가야돼? 이렇게 당당하게 진정 자존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거든요.
不信自殊勝(불신자수승)하고, 스스로의 수승한 것은 믿지를 아니하고 달게 下劣人(하열인)을 삼는 것이다.
我此門中(아차문중)은 不論初機晩學(불론초기만학)하고 亦不問久參先達(역불문구참선달)이라
我此門中(아차문중)은
우리 문중에는 初機(초기)를 논하지 않아. 또 晩學(만학)도 논하지 않아. 초기만학도 논하지 아니하고 久參先達(구참선달)도 묻지를 않아.
若要眞箇靜(약요진개정)인댄 須是生死心(수시생사심)을 破(파)니 不着做工夫(불착주공부)하야도 生死心(생사심)이 破則自靜也(파즉자정야)리라
若要眞箇靜(약요진개정)인댄
참으로 고요하고자 할진댄
須是生死心(수시생사심)을 破(파)니
생사심, 생멸심이 깨져야 그게 진짜 고요한 거지. 그게 고요한 자리지, 고요한 데 앉아있으니 기분 좋고 또 일어나면 말짱 헛 것인 그런 건 진짜 고요한 게 아니다. 생사심을 파해야 하나니
不着做工夫(불착주공부)하야도
힘써 공부를 짓지 아니해도 생사심이 파한즉, 분별하는 마음이죠. 일었다 사라지고, 일었다 사라지는 그 마음이 깨트려 진다면 저절로 고요해진다.
先聖(선성)의 所說寂靜方便(소설적정방편)이 正爲此也(정위차야)어늘 自是末世邪師輩(자시말세사사배)_ 不會先聖方便語耳(불회선성방편어이)니라.
先聖(선성)의 所說寂靜方便(소설적정방편)이
옛날 성인들이 말한 고요하다는 그 방편이
正爲此也(정위차야)니라
적정을 자꾸 이야기했는데, 옛날 사람들도 적정, 적정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게 진정한 뜻이지 그 외 다른 건 아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自是末世邪師輩(자시말세사사배)가
스스로 말세의 삿된 스승의 무리들이
不會先聖方便語耳(불회선성방편어이)니라.
선성의 방편의 말을 알지 못할 따름이다.
左右_若信得山僧及(좌우_약신득산승급)인댄 試向鬧處(시향료처)하야 看狗子無佛性話(간구자무불성화)언정 未說悟不悟(미설오불오)니
左右_若信得山僧及(좌우_약신득산승급)인댄
그대가 만약에 나를 믿는다면, 정말 나를 깨달은 사람으로, 스승으로 믿는다면
試向鬧處(시향료처)하야
시험 삼아 시끄러운 곳을 향해서, 시끄러운데서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看狗子無佛性話(간구자무불성화)
구자무불성 화두를 볼지언정. 그러니까 ‘간’자를 나중에 쓰게 된다니까. 저 앞에도 간이니 그랬죠.
未說悟不悟(미설오불오)니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 말지어니
正當方寸(정당방촌)이 擾擾時(요요시)하야 謾提撕擧覺看(만즉시거각간)하라
正當方寸(정당방촌)이 擾擾時(요요시)어든
바로 속마음이, 방촌은 우리 심장을 말하지만 마음을 말하는 거예요. 마음이 시끄러울 때거든
謾提撕擧覺看(만즉시거각간)하라
화두를 은근히, ‘만’은 슬며시 화두를 제시해서 이끌어다가 한번 살펴보라. ‘무-’ ‘무’ 이렇게 제대로 한번 살펴보라.
還覺靜也無(환각정야무)아 還覺得力也無(환각득력야무)아 若覺得力(약각득력)이어든 便不須放捨(편불수방사)하고
還覺靜也無(환각정야무)아
또한 고요함을 깨닫는가? 마는가?
또 득력을 깨닫는가? 마는가?
若覺得力(약각득력)이어든
만약 득력을 깨닫거든, 알게 되거든, 느끼거든. 이럴 때 ‘각’자는 느낀다는 거야. 고요함을 느끼는가? 득력을 느끼는가? 만약 득력을 느끼거든 곧
不須放捨(불수방사)하고
놓아버리지 말고
要靜坐時(요정좌시)에 但燒一炷香(단소일주향)하고 靜坐(정좌)호대 坐時(좌시)에 不得令昏沈(부득력혼침)하며 亦不得掉擧(역부득도거)니
要靜坐時(요정좌시)에
정좌를 요할 때. 고요히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사정이 되면
但燒一炷香(단소일주향)하고
향 하나 꽂고 조용히 앉을 때
不得令昏沈(부득력혼침)하고
절대 혼침하지 말고
亦不得掉擧(역부득도거)
도거도 하지 말라. 혼침은 잘 아는 거고, 도거는 흔들고 일어난다. 요란스럽게 일어난다. 망상을 말하는 겁니다. 혼침도 하지 말고, 망상도 하지 말지니. 대개 이 두 가지거든요. 공부가. 혼침 아니면 도거, 도거 아니면 혼침.
昏沈掉擧(혼침도거)는 先聖(선성)의 所詞(소가)니라 靜坐時(정좌시)에 纔覺此兩種病(재각차양종병)이 現前(현전)이어든 但只擧狗子無佛性話(단지거구자무불성화)하면
昏沈(혼침)과 掉擧(도거)는 先聖(선성)의 所詞(소가)니라
선성이 꾸짖은 바다.
纔覺此兩種病(자각차양종병)이 現前(현전)이어든
이 두 가지 병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을 막 알게 되거든, 자각. 재각이라고도 하죠. 막 알게 되거든. 그때 어떻게 해야 돼? 그걸 물리치는 방법이 점 하나 찍어놓고 던지고.... 이것도 아니다.
但只擧狗子無佛性話(단지거구자무불성화)하면
다만 狗子無佛性話(구자무불성화)만 든다면
兩種病(양종병)은 不着用力排遣(불착용력배견)하야도 當下(당하)에 帖帖地矣(첩첩지의)리니 日久月深(일구월심)하면 纔覺省力(재각성력)이 便是得力處也(편시득력처야)라
兩種病(양종병)은 不着用力排遣(불착용력배견)
힘써서 물리치려 아니해도 당장에 그 양종병은
帖帖地矣(첩첩지의)
조용해질 것이다. 화두만 있는데 그 때는 다른 것, 혼침이니 도거니 어떤 망상도 그 자리에 이미 있을 수 없는 거죠. 제대로 의심만 해 들어간다면. 그러니까 망상을 제거한다는 것은 간화선에, 이 정통 선법에는 없는 일입니다. 망상 제거한다는 것은. 화두 드는 일만 있지, 망상 제거한다는 말은 없어요. 여기 어디 망상 제거한다는 말이 있습니까? 화두 드는 일만 있는 거요. 화두 들면 망상은 저절로 없어지는 거요. 화두 제대로 들면 졸음도 저절로 없어지고.
日久月深(일구월심)하면 纔覺省力(재각생력)이 便是得力處也(편시득력처야)라
생력, 힘 드는 곳이 곧 힘을 얻는 곳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亦不着做靜中工夫(역불착주정중공부)하야도 只遮便是工夫也(지자편시공부야)니라
亦不着做靜中工夫(역불착주정중공부)하야도
또한 힘써서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를 짓지 아니하더라도
只遮便是工夫也(지자편시공부야)니라
다만 이것이야말로 곧 진정한 공부다.
李參政(이참정)이 頃在泉南(경재천남)하야 初相見時(초상견시)에 見山僧(견산승)의 力排黙照邪禪(역배묵조사선)이 瞎人眼(할인안)하고 渠初不平(거초불평)하여 疑怒相半(의노상반)이러니
李參政(이참정)이 頃在泉南(경재천남)하야
천남 쪽에 지난날 있었는데
初相見時(초상견시)에
처음 그 사람을 봤을 때
見山僧(견산승)의 力排黙照邪禪(역배묵조사선)이 瞎人眼(할인안)하고
힘써 묵조사선이 사람의 눈멀게 하는 것을 배척했다 이거야. 그러니까 공부하는 사람 만나기만 하면 묵조사선 배척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분이라. 대혜스님이. 자신이야말로 역배묵조사선이라. 힘써 배척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그것을 보고는
渠初不平(거초불평)하여
이참정도 처음에 보고는 불평을 했어. ‘뭘 선지식이 저렇게 열을 내어서 묵조선을 비판하는가?’ 그래서
疑怒相半(의노상반)이야
의심과 분노가 서로 반반이더라. 종교인이 되어서 남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것을 그렇게 열을 올려서 하니까, 이참정처럼 점잖은 사람이 대혜스님이 선지식이라고 만났는데 ‘진짜 선지식인가?’ 의심스럽기도 하고, 또 남의 욕을 그렇게 하니까 듣기 민망해서 속으로 화도 나고, 그게 의로야. 의로가 상반이로니
驀聞山僧(맥문산승)의 頌庭前栢樹子話(송정전백수자화)하고 忽然打破漆桶(홀연타파칠통)하여 於一笑中(어일소중)에 千了百當(천료백당)코사 方信山僧(방신산승)의 開口見膽(개구견담)이라
驀聞山僧(맥문산승)의 頌庭前栢樹子話(송정전백수자화)하고
정전백수자화의 게송 한 것을 문득 듣고는
忽然(홀연)히 打破漆桶(타파칠통)이라
홀연히 칠통을 타파했어. 캄캄한 무명 덩어리를, 무명의 통을 깨트려서
一笑中(일소중)에 千了百當(천료백당)이라
한 번 웃는 가운데, 깨달음의 소식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소중에 천료백당이라. 한 번 웃는 가운데 천 가지나 알고, 백 가지나 알고사
方信山僧(방신산승)의
바야흐로 믿게 된다. 무엇을? 산승의
開口見膽(개구견담)이라
입을 열고 쓸개를 보는 것을 믿게 되더라. 그리고
無秋毫相欺(무추호상기)하며 亦不是爭人我(역불시쟁인아)하고 便對山僧懺悔(변대산승참회)일러니라
無秋毫相欺(무추호상기)
추호도 서로 속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됐다.
亦不是爭人我(역불시쟁인아)하고
또한 내가 그 사람들하고 인상, 아상을 서로 아만 싸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리고
便對山僧懺悔(변대산승참회)라
“내가 스님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도 많이 내었습니다” 하고 고백을 하고서 참회를 했다는 거죠.
此公(차공)이 現在彼(현재피)하니 請試問之(청시문지)호대 還是也無(환시야무)아하라 道謙上座(도겸상좌)_已往福唐(이왕복당)이러니 不識(불식)커라 已到彼否(이도피부)아
此公(차공)이 現在彼(현재피)하니
지금 저기 훤히 있으니. 지금 저기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현’자는 우리가 말하는 현재가 아니예요. 저 앞에도 한번 있었지만 ‘분명히’ 이런 뜻입니다. 환하게 저기 있잖아! 환하게 저기 있으니
請試問之(청시문지)호대
청컨대 시험 삼아 그 사람에게 묻되
還是也無(환시야무)아
또한 옳은지 옳지 않은지 그렇게 물어보라. 대혜스님이 이런 사실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또 당신이 그렇게 깨달았는지, 또 의심하고 분노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참회까지 했는지 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 한번 내가 이렇게 했으니 물어보시오. 이러한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물어보라. 환시야무아.
道謙上座(도겸상좌)
이 사람이 대혜스님의 상좌로서 심부름꾼이예요. 이 사람도 깨달은 분으로서, 깨달은 분이라야 깨달은 사람의 심부름을 할 수가 있죠. 비서 노릇을 했어요. 그래서 이 분이 늘 편지를 들고 쫓아다녔어요.
가서 편지 전해주고 또 돌아올 때는 써놓은 편지 가져오고. 그러다가 또 아쉬운 점이 많은데 秦國太夫人(진국태부인)이라고 이 부인 집에 가서는, 말하자면 재상의 어머니야. 국부인 노릇을 하고, 그 다음에 재상의 어머니가 되고, 국태 부인이라고 아들을 재상으로 두면 말하자면 거기에 내리는 작위가 있죠. 그런 입장에 있는 보살이 한 분 등장하죠. 그 분의 집에 가서 아예 그 부인이 이 도겸 상좌를 집에 아예 모셔놓고, 심부름 가야할 텐데 붙들어 앉혀놓고서는 “대혜스님이 어떻게 사람을 지도하느냐?” “불교가 어떤 것이냐?” 하고 이런 것을 대혜스님의 상좌인 도겸 스님에게 물어서 그 보살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시간이 되면 그것도....되겠네. 한 장만 더 하죠.
道謙上座(도겸상좌)_已往福唐(이왕복당)이러니
복당에 이미 갔으니까
不識(불식)커라 已到彼否(이도피부)아
거기에 이미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찾아가 이 사람이
此子_參禪기辛苦更多(참선신고갱다)호대 亦嘗十餘年(역상십여년)을 入枯禪(입고선)이러니 近年(근년)에 始得箇安樂處(시득개안락처)하니 相見時(상견시)어든 試問渠(시문거)호대 如何做工夫(여하주공부)오하라
參禪기辛苦更多(참선신고갱다)라
이 사람도 참선하면서 애를 많이 먹은 사람이다. 애를 무척 많이 먹은 사람이죠.
亦嘗十餘年(역상십여년)을 入枯禪(입고선)이러니
십 여년 동안 그 묵조사선에 빠져서 공부를 하던 사람이라 경험이 많다. 입고선이라, 바짝 마른 선. 그래서 묵조선을 말하자면 국물도 안나오는 선이라고, 고선이라고, 바짝 마른 선이라고. 요즘만 국물도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옛날에도 국물도 없다. 이게 번역을 하면 국물도 없는 선 아닙니까? 고선이라는 게. 그런 말이예요. 그게 십여 년을 헤맨 사람이다. 내 상좌 도겸도. 당신도 그랬고. 이러니
近年(근년)에 始得箇安樂處(시득개안락처)라
근래에 와서 비로소 안락처를 얻었다. 깨달았다는 구질구질한 표현을 하지 않고 그냥 안락처를 얻었다.
相見時(상견시)어든
만약에 서로 만나게 되거든
試問渠(시문거)호대
그 사람에게 내 상좌 도겸에게 묻되
如何做工夫(여하주공부)오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한 번 그 사람에게 물어보라.
曾爲浪子(증위낭자)라 偏憐客(편린객)이니 想必至誠吐露也(상필지성토로야)리라
曾爲浪子(증위낭자)라 偏憐客(편련객)이니
일찍이 나그네 노릇을 많이 했어. 그래서 특별히 나그네를 편애하는 사람이라. 편린객이라. 자기가 객을 많이 해봤으니까 그렇게 나그네를 편애하는 거지. 그러니까 아마 당신처럼 병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애착을 가지고 지도할 거라는 절절한 마음이 이 한마디 속에 잘 스며들어 있죠. 증위낭자라 편린객. 아~ 한문도 요런 맛이 있어요. 번역해놓으면 이런 것이 많이 감소가 될 텐데.
想必至誠吐露也(상필지성토로야)리라
아마도 반드시 지성토로할 것이다. 지성을 다해서 다 드러내어 이야기할 거요.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아까 역사상 보살인이 깨달은 대목, 한 번 볼까요? 139쪽 넘겨 보십시오.
答 秦國太夫人 [莫着尊貴 興悲度生]
당당하게 이렇게 역사 속에 어떤 보살님이 깨달은 그런 대목입니다. 秦國(진국)이라고 하는 것도 나라 이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 지역이 옛날에 진나라 때 지역이라면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또는 이 진시는 성이기도 하고. 그래서 국태부인이다.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그래서 진나라라는 뜻은 아니고 姓(성)이 진 씨고, 국태부인이다. 그렇게 보는 것이 옳죠.
莫着尊貴(막착존귀)
존귀에 집착하지 말고
興悲度生 (흥비도생)
존귀라고 하는 것은 깨달았다고 하는 거기에 너무 도취되지 말라. 자비를 일으켜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의무다. 깨닫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아까 보현행 이야기 했듯이. 흥비도생, 자비를 일으켜 중생제도하려고 깨닫는 거지 깨달았으면 당연히 중생 제도하는 데 마음을 쓰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보살님은 평소에 아주 신심있게 하루에 절을 몇 번하고, 경을 얼마 읽고, 아침저녁으로 천수경치고, 예불하고 하루 종일 일상에서 신행 생활을 부지런히 해온 사람이라. 그러면서도 늘 한쪽에 ‘진정한 불법이 무엇일까?’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 당시 또 참선이 상당히 유행했으니까 참선도 했어요. <자비의 전화>들어보면 신도를 기도하는데 하루 종일 하는 게 많대. <천수경>하고, 또 다라니 좋다하니까 다라니 서너 번 외우고, 그 다음에 관세음보살 몇 번 외우고, 또 지장보살이 세다고 하니까 지장보살 좀 하고, 온갖 것 다, <보원품> 한번 읽고 <금강경> 한 번 읽고.... 이 보살이 그랬어요. 그러면서 참선 좋다고 하니까 참선도 했어. 그러다가 아까 이야기한 도겸이라는 사람이 그 집에 편지 심부름을 갔죠. 그 아들도 장덕원이라고 다 나와요. 재상 노릇한 사람. 그 사람이 오니까 “대혜스님은 어떻게 가르칩니까?” 이렇게 보살이 물었어요. 그러니까 도겸상좌가 “우리 스님은 그렇게 여러 가지 잡다하게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나 깨나 참선만 하십시오. 경보고 천수경하고 그런 것 다 때려치우고 오로지 화두 드는 것, 하나만 하십시오.”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이 보살이 그대로 듣고는 다 때려치워버리고 화두 드는 것, 딱 그것만 했어요. 얼마 안해서 바로 깨달았어. 여러 가지 하면서 마음이 아주 한 곳으로 뭐랄까? 순화가 되었다고 할까? 집중이 되어 얼마 안되어 금방 깨달았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도겸이라고 하는 상좌에게 게송하고 이 편지를 지어서 대혜스님에게 보냈어요. 보냈으니까 대혜스님은 그 편지를 받고 이 보살님에게 회답하는 거죠. 답장이니까.
謙禪(겸선)이 歸(귀)에 領所賜敎(영소사교)와 幷親書數頌(병친서수송)하고 初亦甚疑之(초역심의지)러니 及詢謙子細(급순겸자세)코사 方知不自欺(방지불자사)하야
謙禪(겸선)이 歸(귀)에
도겸 상좌가, 아까 있었던 도겸 상좌가 참선객이니까 그렇게 ‘선’자를 붙입니다. 이렇게 아주 자유자재로 겸선자, ‘子’ 자를 붙여도 좋은데 그냥 겸선, 그러구요.
겸선이 돌아오매
領所賜敎(영소사교)와
소사교, 갖춘 바의 교시, 교서라고 해도 좋구요. 교서와 아울러 가르침과
親書(친서), 친히 쓴 몇 개의 게송. 그것을 받고, 용수하고 그런 말입니다.
初亦甚疑之(초역심의지)러니
처음에 편지 형식이겠지요. 처음엔 또한 심히 의심했더니
詢謙子細(순겸자세)코사
겸상좌에게 묻기를 자세히 하고서
方知不自欺(방지불자사)
스스로 속이지 아니하기를 바야흐로 알았다.
曠劫未明之事(광겁미명지사)_ 헐爾現前(할이현전)호대 不從人得(부종인득)이라 始知法喜禪悅之樂(시지법희선열지락)은 非世間之樂(비세간지락)에 可比(가비)리니 山野_爲國太(산야_위국태)하야 歡喜累日(환희누일)에 寢食俱忘(침식구망)호이다
曠劫未明之事(광겁미명지사)
오랜 세월 동안 밝히지 못했던 이 일이
豁爾現前(활이현전)이라
활연하게 앞에 딱 나타나서
不從人得(부종인득)이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게 아니라. 도겸 상좌가 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꿈에 현몽해서 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바야흐로 알았다. 그리고
始知法喜禪悅之樂(시지법희선열지락)은 非世間之樂(비세간지락)에 可比(가비)리니
비로소 당신도 알거요. 법희선열의 즐거움! 깨달음으로서 얻는 즐거움은 세간의 낙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도 잘 알거요.
山野_爲國太(산야_위국태)
산야가 그대를 위해서, 국태 부인을 위해서
歡喜累日(환희누일)이라
여러 날 기뻐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도를 깨달은 게 아닌데, 도를 깨달은 사람은 또 다른 제자가 도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설사 자기 제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손자 제자가 되겠죠. 왜냐? 자기 상좌가 가서 지도를 해서 깨닫게 된 거니까. 환희누일에
寢食俱忘(침식구망)이라
여러 날 너무 기뻐서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다 잊어버렸다. 이렇게 깨달았다는 사람의 소식을 제대로 듣고는 기뻐했다. 기쁨을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 깨달음의 문제를 새삼 우리가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다. 굳이 그런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만 여기 그런 가치관에 대해서 좀 언급을 하고 있어요.
兒子(아자)는 作宰相(작재상)하고 身作國夫人(신작국부인)은 未足爲貴(미족위귀)어니와 糞埽堆頭(분소퇴두)에 收得無價之寶(수득무가지보)하여 百劫千生(백겁천생)에 受用不盡(수용부진)이라사 方始爲眞貴耳(방시위진귀이)라
兒子(아자)는
아들은 재상이 되고
身作國夫人(신작국부인)이라
몸소 자신은 국부인이 된 것. 그건
未足爲貴(미족위귀)라
부족할 것 없어. 그까짓 귀한 것 아니다.
부산에 있을 때 어떤 보살이 아들이 연대에 들어갔어. 일 년을 자랑하고 다녀. 일 년을. 본인은 일주일 만에 잊어버리고 어느 학교에 가도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똑 같은데, 본인은 일주일이면 잊어버려요. 그 이상 더 기쁨은 없어. 그런데 이 보살은 일 년을 자랑하고 다니더라니까. 그러니 여기에 아들이 재상이 되고 자기 몸은, 자기 자신은 국부인이 됐어. 그건 족히 귀할 것 없어. 그까짓 것. 그런데 뭐가 그리 귀하냐?
糞埽堆頭(분소퇴두)
이 똥덩어리, 이 퇴비 덩어리, 이런 이 쓸모없는 몸뚱이. 여기에서
收得無價之寶(수득무가지보)야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거둬 들였어. 그래서 그 보배로 인해서
百劫千生(백겁천생)에 受用不盡(수용부진)
백겁천생에 수용할래야 수용할 수가 없어. 아무리 쓰고 쓰고 써도 남는 그런 보물이다.
方始爲眞貴耳(방시위진귀이)라
이것이야말로 바야흐로 비로소 참으로 존귀한 것이 된다.
然(연)이나 切不得執着此貴(절부득집착차귀)어다 若執着則墮在尊貴中(약집착즉타재존귀중)하야 不復興悲起智(불부흥비기지)하야 憐愍有情耳(연민유정이)리니 記取記取(기취기취)어다
그러나 切不得執着此貴(절부득집착차귀)어다
이 깨달음에 대한 귀함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若執着(약집착)
너무 깨달음에 집착하여 귀하게 생각만 한다면
墮在尊貴中(타재존귀중)이라
또 존귀하다는 그 마음에 떨어져 있을 수가 있다. 그래서
不復興悲起智(불부흥비기지)
더 이상 자비를 일으키고 지혜를 일으켜서
憐愍有情耳(연민유정이)니라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지 아니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깨달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흥비기지야. 자비를 일으키고 지혜를 일으켜서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고 중생 제도하는 것이 의무다. 그게 깨달은 사람의 필수적인 의무니까 그것 하려고 깨달았다 이거야. 그러니까 꼭 그것을 하도록 하라.
記取記取(기취기취)어다
꼭 그 점을 분명히 기억하고 기억하라.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당부의 말씀을 전합니다. 보살님이 깨달은 대목입니다. 여기에 여성 불자가 한 분 있고, 묻는 편지가 세 통, 그 다음 뒤에 가서 스님에게 보내는 편지가 세 통.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한정된 시간이 오늘 여기까지인데, 지난 시간에 중도 문제, 이론상으로는 중도라고 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거든요. 평생 중도만 말씀하신 큰스님도 계시지 않았습니까? 중도가 그만치 중요한 문제는 중요한 문제예요. <초전법륜경>이라고 정말 부처님이 최초에 설했다고 하는 경전, 그게 무슨 경전일까? 수많은 학자들이 여러 해를 두고 연구를 했는데 결국 <초전법륜경>이다. 율장에 있는 경이예요. 아함부도 아니고....
첫댓글 切不得執着此貴(절부득집착차귀)어다 若執着則墮在尊貴中(약집착즉타재존귀중)하야 不復興悲起智(불부흥비기지)하야 憐愍有情耳(연민유정이)리니 記取記取(기취기취)어다... 깨달음에 대한 귀함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깨달음에 집착하여 귀하게 생각만 한다면또 존귀하다는 그 마음에 떨어져 있을 수가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자비를 일으키고 지혜를 일으켜서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지 아니할 수도 있다. 그 점을 분명히 기억하고 기억하라...고맙습니다._()()()_
若要眞箇靜인댄 須是生死心을 破니 不着做工夫하야도 生死心이 破則自靜也리...참으로 고요하고자 할진댄 생멸심이 깨져야 그게 진짜 고요한 거지 힘써 공부를 짓지 아니해도 일었다 사라지는 그 마음이 깨트려 진다면 저절로 고요해진다...불퇴지님, 감사합니다. _()()()_
간화선(정통선법)에 화두 드는 일만 있지 혼침이니 도거니 망상 제거한다는 것은 없다. 화두 들고 제대로 의심만 해 들어간다면 망상은 저절로 없어진다...... 불퇴지님! 감사드립니다... _()()()_
우리들의 안목을 열어 지혜의 빛을 주고 계시는 스님께 감사 드립니다._()()()_
깨달았으면 자비를 일으키고 지혜를 일으켜서 [興悲起智]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고 중생 제도하는 것이 의무다. 그게 깨달은 사람의 필수적인 의무이므로 꼭 그렇게 하도록 하라...불퇴지님, 수고하셨습니다.._()()()_
생사심, 생멸심이 깨져야 그게 진짜 고요한 자리지, 고요한 데 앉아있는게 진짜 고요한 게 아니다. 생사심을 파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삼배 올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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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日久月深 纔覺省力 便是得力處也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