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이 2월 28일 오후 7시 경 주석처인 중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직지사 한 관계자는 “스님이 오후 7시 경 원적에 들었다”며 “열반송은 없다”고 말했다.
관응 스님은 1910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해 29년 탄옹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일본 용곡대(龍谷大)에서 수학했으며 직지사 주지, 김용사 강원 강사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설법집 〈화엄의 세계〉 등이 있다.
다음은 본지에 소개된 관응 스님 법문.
317호 [2001-05-02]
“마음의 눈 뜨면 모두 부처님”
부처님 오신날 봉축하는 것도 좋은일이지만 자신속의 부처 찾는 일 중요
‘오늘은 기쁜 날, 부처님 오신 날….’ 한 찬불가의 노래가사처럼 우리는 매년 부처님 오신날을 기쁜 날로 봉축한다. 하지만 경전에 눈밝은 이들은 이것은 우리 중생들의 바람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오늘은 괴로운 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짓나’에 속아서 괴로워 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괴로움이 없었다면 부처님은 오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기 2545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김천 황악산에 토굴 하나 지어 수십년 간 두문불출 정진하고 계시는 직지사 조실 관응 스님을 만나 부처님 오신날의 의미와 수행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이 주석하고 계시는 중암은 해발 1천여m가 넘는 황악산 중심부. 이곳을 찾아간 날은 길목마다 봄의 향연이 한창이었다. 길가엔 이름 모를 잡초들이 연두빛 새순을 수줍게 내밀며 천연의 융단을 만들고, 노랑 분홍 등 갖가지 꽃들이 앞다퉈 수를 놓고 있었다. 여기에 계곡물 소리와 산새들의 지저귐이 봄의 향연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이러한 자연의 신비로움은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암자의 모습을 선뜻 내어 주지 않았다. 오색의 꽃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여러 번 되풀이되는 가파른 언덕이 발걸음을 잡는다. 중암의 첫 인상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법당과 요사채는 암자답지 않게 웅장했지만 세속의 자취라곤 어느 곳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선계가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관응 스님을 뵙고 예를 올린 후 법문을 청했다. 스님은 처음엔 “큰 절의 스님들이 잘 알지, 이 늙은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돌아가라고 손을 내저으셨다. 그러나 조용히 앉아 있자 한동안 침묵하시던 스님은 기왕에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덕담이나 듣고 가라 하셨다.
“부처님은 오신 적도 가신 적도 없습니다. 참나인 무아(無我)가 부처님인데 따로 부처님이 오시고 가시고 할게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오신 근본 이유를 살펴야 해요.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이나 수많은 설법을 했어도 ‘내가 한 말은 하나도 없다’고 하신 그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 속의 부처 찾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부처님오신날 연등을 다는 의미를 되새기며 일심으로 닦아 부처를 만나는 인연이 되는 기쁜 날이 되도록 서원하십시오.”
스님은 자신 속의 부처와 하나가 되어 부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볼 것을 권한다. 마음의 눈을 뜨면 중생이 곧 부처란 얘기다. 이처럼 스님께서는 우주만물의 형상만 보지말고 그 본디의 성질을 깊이 사유할 것을 강조하셨는데 물을 비유한 설명을 덧붙이셨다.
“물은 본래 티 없는 청정한 맹물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물에 커피가루를 타면 커피가 되는 것이고, 된장이나 국거리를 넣어 끓이면 국이 되는 법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몸 속에 들어가거나, 땅 속에 들어가 정화되면 본래의 성질인 맹물로 되돌아 옵니다.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식(識)이라고 합니다. 이 식 때문에 안으로는 육근(六根)이 생기고, 밖으로는 육진(六嗔)이 생겨서 18계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육감으로 보는 것은 모두 가짜이며 허상입니다. 물이 본래 한가지인 것처럼 생명의 실상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등이 ‘나’라는 명제를 세우고 자꾸만 그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다 라는 진리를 터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밥과 국과 반찬이 위에서 동화됨으로써 소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모두가 자기에게도 와서 하나로 동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몰두하다보면 우주 법칙의 기운이 하나로 체화되는 묘력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무심 속에서 ‘나’라고 하는 강한 아상이 사그라지면 자유자재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은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한 생명체로 보고 있다. 불교에서 말한 법이란 곧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법을 깨달아 인격화한 분이 부처님이란 것이다. 깨침의 세계는 너와 내가 따로 없고, 생사가 따로 없을 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불자들에게 이 깨달음의 세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법문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세계를 모르는 불자들에게 깨친 자의 입장에서 진리만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라고 이야기하니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란 것이다. 진리를 체득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하나로 환하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겐 육신 따로, 마음 따로 여서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생의 근기는 고려하지 않은 채 진리를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만 강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부처님께서도 근기에 맞는 대기설법을 하셔서 대중들을 이끄셨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정사(正思) 정념(正念)을 먼저 강조한다. 스님은 자주 법문에서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여러 개의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독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생명체예요. 인간이 죽어서 자연의 일부가 되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생명체를 상일주재(常一主宰)한 진여법신(眞如法身)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불교는 생명의 실체를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날부터 죽음의 고(苦)를 짊어지고 죽는 날까지 괴로움을 당하면서 무한한 생명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스님은 부처님 삶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생사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명쾌하게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 부처님이다. 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49년 설법은 모두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해답이며 이는 곧 인생철학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현상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주만물이 성(成)·주(住)·괴(壞)·공(空)의 법칙에 의해 유전하듯 인간도 생로병사의 법칙에 의해 삶과 죽음의 명암을 이룹니다.”
비록 육신은 쇠약해져 발음이 어눌하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스님의 설법은 막힘도 걸림도 없었다. 모든 사물의 이치를 깨달은 듯 스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은 자유자재했다. 스님은 지금까지 수십 년 간 법문을 해 왔으면서도 아직까지 한번도 법문 준비를 미리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미리 준비하는 법문은 참된 법문이 아니라는 것이 스님의 법문 철학인 셈이다.
“법회는 불자들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에게 자기를 희생시켜 중생과 한 몸이 되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런데 어찌 법회장에 온 불자들의 실상을 보지 않고 미리 법문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법사가 법문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꼴이지요.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만으로 미리 법문을 준비하는 법사는 불법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어떤 상황에서든지 진면목을 찾으려면 욕망의 집착에서 먼저 벗어나야 하는 법입니다.”
불자들의 알음알이를 잘 살펴 그에 적합한 설법을 해 오신 스님은 불교교리 특히 유식학의 뛰어난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스님의 설교적 재능은 부처님의 제자 ‘부루나 존자’에 비견될 만큼 탁월하다고 한다. 한 때 스님 슬하에서 공부한 정휴 스님(구미 해운사 주지)은 “스님에게서 받은 첫 인상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신라의 뛰어난 예술이 빚어낸 반가사유상에서나 느낄 수 있는 내밀한 미소를 볼수 있었다”며 “해박한 경전 지식은 물론이고 체계적인 논리 전개는 나의 학문의 허기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교학에 밝으신 관응 스님은 항상 “스님을 부처로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하셨다. 60년대 용주사에서 주지를 하면서도 강사를 자처해 학인들을 가르쳤던 일, 80년대 직지사에서 <선문염송> 강의를 열어 오늘날 각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10여명의 강사를 배출한 것 등은 인재 양성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교학에도 뛰어났지만 스님은 선(禪) 수행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환갑의 나이에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에서 6년여 동안이나 두문불출하며 수행한 일은 지금도 승가에서 회자되고 있다. 무문관이 어떠한 곳인가. 사방이 막힌 무명 속에서 모든 것을 최대한 단순화하여 생사일여의 활로를 찾는 곳이 아닌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중생들이 살아가는 이 시방세계가 거대한 무문관이며 생활이 곧 참선이 돼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수행론이다.
또 스님은 “참선 공부는 노장들에게 다년간 체계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덧붙이신다. 교학은 글자가 있기 때문에 쉽지만 선 공부는 글자를 떼어놓고 마음으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으면 헤매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인간의 6근을 지혜의 구멍이라며 나무가 뿌리를 통해 땅의 기운을 받아 성장하듯, 6근을 통해 깨달음의 씨앗인 지혜를 흡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또 자기의 본성인 법신을 파악하여 체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일념으로 닦아야 한다고 수행의 중요성을 말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의 함정에 속박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육체에 대한 속박은 될지 모르나 우리들 모두가 갖고 있는 자성까지 속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법신을 망각하고 무명과 생사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인간적인 조건을 초극하지 못하고서는 그것을 온전히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10여 년 전 관응 스님을 시봉한 혜철(상주 황령사 주지) 스님은 “스님은 컴퓨터 이상으로 엄청난 불교교리를 간직하고 계시지만, 항상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큰 스님의 이러한 겸손은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사표가 됐다”고 말했다.
스님은 상좌를 잘 두지 않으신다.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자 여러 사람들이 찾아 왔지만 지금까지 출가시킨 상좌는 10여명에 불과하다. “가르칠 능력도 없는데 상좌를 많이 둬서 어떻게 제대로 가르칠 것이냐”며 찾아오는 인연마저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는 불자들에게 “천당이니 극락이니 하는 헛된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꺼지지 않는 영원한 마음의 등불을 켤 것”을 당부하는 스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산길을 내려와야 했다. 삼도봉, 대덕산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연봉을 이루는 황악산. 그 심장부에 ‘이 시대의 대강백’ 관응 스님이 주석하고 계셔서일까 하산하는 길에 보는 산세 또한 지극히 자비스럽게 느껴졌다. 그곳에 계시다는 자체만으로도 수행심이 불 일어나듯 분발케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이심전심으로 느끼게 해주시는 큰스님, 관응 스님은 그러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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