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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35년(1760)에 왕이 오셨을 때 왕세자 즉 사도세자가 함께 무술을 연마하던 사장을 기념하기 위해 왕이 온양군수 윤염에게 명하여 사장에 3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게 하였으며, 정조 19년(1795) 온양군수 변위진이 충청감사 이형원에게 온천 행궁의 활터보수를 건의한 결과 엽전 300민을 보냈다. 이 돈으로 활터의 느티나무 둘레에 사대를 쌓았는데 길이 15척, 너비 12.5척, 높이 3.1척이었고 외계의 길이 41척, 너비 18척, 높이 1척이었다.
공사가 끝난 후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자 정조는 비명에 세상을 떠난 생부 장헌 세자를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즉시 신하에게 명령하여 그 활터 자리에 비석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 해 8월에 충청도 보령의 남포에서 오석을 운반해 왔는데 길이는 3.9척, 너비 1.5척, 두께 0.8척이며 농대석의 길이는 3.1척, 너비 2.4척, 높이 2척이었다. 이 비석의 정면에는 정조 왕이 친히 어필을 들어 '영괴대(靈槐臺)'라 쓰고 어제(御製)의 '영괴대명'을 지어 당대 제일의 명필가인 윤행임으로 하여금 비석의 후면에 쓰도록 하였다.
'영괴대명'의 글씨를 쓴 윤행임은 영조 36년(1760)에 장헌 세자가 온천에 행차했을 때 온양군수를 지낸 윤염의 아들인데 정조 19년에 예조참의에다 규장각의 검교를 겸하고 있던 학자요, 명필가였다.
2. 역대왕실의 온양온천 행차
고려시대 이전에는 임금이 온양 온천에 행차했다는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조선 왕조에
서는 세종대왕께서 전국의 온천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어명을 내렸으며 온양 온천은 서울
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240리)에 있기 때문에 역대 왕실에서 온천욕(溫泉浴)을 하기 위해
자주 행차하였다.
〔1〕 세종대왕의 온행(溫幸)
세종대왕은 학문을 숭상하고 독서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안질(眼疾)에 걸려 자주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온천수에 눈을 씻으면 안질이 치료될 것으로 여겨 세종 15년(1433년) 1월
온양 온천에 행행(行幸)하신 세종대왕은 온천욕을 하시고 며칠 후에는 청주(淸州)의 초정 약
수터를 향해 출발하셨다.
그 후, 세종대왕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골몰하시면서 학문 연구에 과로하시어 온
양 온천으로 휴양을 하기 위한 행차를 하였다. 세종 22년(1440년) 3월과 세종 24년(1442
년) 3월에 온행(溫幸)을 하신 바 있다. 온천에서 휴양을 마친 세종 대왕은 1년 후인 세종
25년(1443년)에 훈민저음을 완성하고 이어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월인천강지곡(月印
千江之曲)을 훈민정음으로 지어 발표하였으며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훈민정
음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온양 온천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세종대왕의 건강
회복에 이바지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세 차례의 세종대왕 온행으로 인하여 온양온천에 임시 궁전인 온천 행궁(溫泉
行宮)이 건축되었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온양시 온천동 242- 10 온양 관광호텔 구내에 있었
다. 그러나 세종 당시의 행궁이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행궁 가까이 있
었던 온천탕은 질병 치료의 효과가 신기하였기 때문에 세종대왕 이후에도 왕실의 보호를 받
으며 온양온천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2〕세조(世祖) 대왕과 왕비의 온행
세조는 불치의 피부병으로 고생하였으며 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면서 불행한 노후를 지
냈다고 한다. 이러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하여 세조 10년 (1464년) 봄 2월에 속리산 복천사
(福泉寺)에 행행하여 혜각 존자(慧覺尊者)라는 고승을 만나 보았으며 이듬해 봄 3월 초하루
에 온양 온천 행궁에 도착했다. 세조 대왕의 온행에 앞서 행궁을 크게 증수하고 확장하였는
데 그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온천 행궁의 규모》
내 전(內 殿) : 16간
외정전(外正殿) : 12간
탕 실(湯 室) : 12간
혜파정(惠波亭) : 10간
함락당(函樂堂) : 12간
세조 임금이 온천 행궁에서 머문지 4일째 되는 3월 4일에 갑자기 신기한 사실이 일어났
다. 온궁의 탕실 바로 옆에서 맑은 물이 마치 분수처럼 뿜어 나왔다. 왕이 하도 신기하여
신하들에게 물이 나오는 곳을 파게 하였더니 맑고 시원한 물이 콸콸 솟아나와 온궁 뜰에 가
득히 괴였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정(溫井) 바로 옆에 얼음처럼 차고 맑은 물이 솟아나오
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우물을 파고 '신정(神井)'이라고 이름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백성들은 나라에 좋은 일이 일어날 길조(吉兆)라고 하여 기뻐했으
며 전국 방방곡곡의 수령방백(守令方伯)들은 온양 온천의 행궁으로 경하(慶賀)의 표문(表文)
을 지어 올렸다. 세조는 온궁에서 일어난 사실을 호종하는 신하 임원준(任元濬)으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주필신정기(駐필 神井記)이며 이 기록을 비석에 새겨
온궁 안의 신정(神井)옆에 세웠다. 이 비석은 11년 후에 없애 버리고 새로 비각과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이 때의 온행 기간 중에 우리 고장 아산과 온양에서 중요한 숙원 한 가지를
해결하게 되었다. 세조 5년 (1459년)에 충청도 관찰사 황효원(黃孝源)이 조정에 건의하여
아산현을 폐지시키고 그 관할 구역을 3등분하여 온양군, 신창현, 평택현 등 세 고을에 각각
나누어 붙이고 아산현 관아의 건물과 토지를 황수신이 모두 차지하였다.
이렇게 세 고을에 분산된 아산 고을 주민들을 대표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내고
아산 땅에 우거(寓居)하던 김구(金鉤)가 여러차례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세조
10년 (1464년)의 온행을 계기로 하여 현감ㄷ을 지낸 바 있는 조규(趙圭)등이 세조에게 상소
를 올렸다. 온궁에서 신정(神井)의 길조가 나타나 마음이 유쾌했던지라 세조는 신하를 아산
고을 현지로 보내어 사정을 살펴보게 한 후에 이듬해인 세조 11년 (1465년)에 아산현을 복
구시켰다.
세조 14년(1468년)에 세조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두 번째의 온행 길에 올랐다.
왕비인 정희 왕후 윤씨도 함께 동행하였다가 서울에 올라와서 세조는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로부터 8년이 지난 성종 7년(1476년) 2월에 세조의 왕비인 정희 왕후 윤씨와 덕종의
왕비인 소혜왕후 한씨가 함께 온양 온천으로 휴양차 거동을 하였다. 정희 왕후 윤씨는 11년
전에 세조가 세운 신정비(神井碑)가 비바람에 깎이고 손상되어 보기 흉하게 된 것을 애석히
여겨 다시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 때에 왕비를 따라왔던 월산대군(月山大君), 덕원군
(德源君), 정현조(鄭顯祖)등이 공사를 주관하고 임원준(任元濬)이 지은 '주필신정기(駐필신
記)'를 이숙함이 글씨를 써서 비서을 다시 조각하여 비각을 세우니 이때가 성종 7년(1476
년) 3월이었다. 이때에 세운 비석과 비각이 지금도 온양관광호텔 구내의 남쪽에 옛 모습 그
대로 보존되어 있다.
〔3〕현종 대왕의 왕비의 온행
조선 왕조 역대 임금 중에서 온양 온천을 가장 좋아했던 분은 현종(顯宗)이었다. 다섯 차
례의 온행을 통하여 온양에서 문과(文科)와 무과(武科)의 과거를 실시하기도 했고 대신들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있는 숨은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여 등용하기도 했으며 효자와 열녀를
찾아내어 포상하기도 했다.
(1) 현종 6년 (1665년)의 온행
현종 대왕이 온양 온천에 행행하여 '증광별시(增廣別試)'라고 하는 과거를 특설하고 전국
에서 모여든 선비 중에서 문과(文科)급제자 7명을 선발하였으며 무과(武科)에서 200명을 선
발하였다.
그리고 온양 지방에 은거하면서 효행과 학문으로 명성을 떨친 향현(鄕賢) 조상우(趙相寓)
에게는 효자 정려(孝子旌閭)를 명하였고 임금을 호종하여 내려온 영의정 이 경석(李景奭)은
조상우의 장남 조이후와 차남 조이중이 그 부친의 학덕을 계승하여 현명하고 효행이 탁월하
다고 임금께 천거하였다. 이에 현종대왕은 조이후에게 서연관(書筵官) 벼슬을 주고 조이중
에게는 침랑(寢郞)벼슬을 내렸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온양군 선비들이 윤대평의 효행과 아
름다운 행실을 낱낱이 기록하여 아뢰니 사직 참봉(社稷參奉)을 제수하였다.
(2) 현종 7년 (1666년)의 온행
1년 후인 현종 대왕은 또 온행을 하였는데 이 때에도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온양에서 실
시하여 문과(文科)에 5인, 무과(武科)에 90닌을 선발하였다.
이와 같이 을사년(1665년)과 병오년(1666년)에 걸친 2년 동안에 임금이 온양에 행차하여
전국의 선비와 한량들을 불러 모아 문과와 무과시험을 실시하였으므로 온양지방은 온갖 상
인들이 모여들어 전국에서도 이름난 대도회의 번영을 과시하게 되었고 특히 음식과 숙박을
고급하는 술막(주막:酒幕)의 경기가 대호황을 이루었다.
(3) 현종 8년(1667년)의 온행
현종 대왕은 온양 온천에서 두 차례의 온천욕을 경험한 결과 건강에 매우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이번에는 어머님 되시는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대왕의 왕비) 장
씨(張氏)를 모시고 온행 길에 올랐다. 이 때에는 연세가 많으신 자전(慈殿)을 모시고 행행하
였으므로 공식적인 행사는 베풀지 않았고 조용히 온천욕을 하면서 휴식을 취한 뒤에 상경하
였다.
(4) 현종 9년(1668년)의 온행
현종대왕의 네 번째 온행은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단촐한 행차였고, 이 때에는 자전(慈
殿)이신 인선왕후 장씨와 중궁전(中宮殿: 현종 대왕의 왕비)이신 명성왕후(名聖王后) 김씨를
함께 모시고 온양에 내려 오셨다.
이렇게 임금과 그 모후(母后)와 왕비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대거 행차한 기회에 온양·
아산 지방의 숨은 인재들을 유생들이 천거하여 포상과 은전을 받게 하였다.
지금의 아산군 염치읍 백암리에 살고 있던 이 지강(李之綱)은 이요신(李堯臣)의 손자이며
충무공 이순신의 종손인데 학문과덕망이 놓아 유림(儒林)의 신망이 두터웠다.
현종대왕이 온행하신 기회에 온양·아산 지방의효자 4명과 열녀 1명의 행실을 낱낱이 기
록하여 표창해 주시기를 상소하여 모두 윤허를 받았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효일(金孝一)
본관은 경주이며 판중추원사 영(纓)의 후손이다. 7세에 부친을 여의고 어려서부터 모친께
효성이 지극하여 출천대효(出天大孝)라는 칭찬을 들었다. 모친 강릉 김씨(江陵金氏)가 병환
으로 생명이 위독하므로 손가락을 끊어 약에 피를 화합하여 드리니 모친이 소생하였으며 모
친이 75세로 별세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겨우 장례를 치르고 나서
애통함이 지나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홍절(洪절)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자고(子高)이니, 만전(晩全) 가신(可臣)의 아들이다. 정성과 효행이
뛰어나 예의를 다해 부모를 섬기고 7년 동안 병환을 시중들면서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
았다.
출천(出天)의 효자라 하여 나라에서 호조좌랑(戶曹佐郞)의 벼슬을 추증했다.
◎ 권대평(權大平)
본관은 안동이며 효행이 뛰어났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아
예법에 따라 시묘하였으며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였을 적에 세 차례나 손가락을 끊어 위독한
병세를 회복시키기도 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후에는 새벽마다 사당에 나아가 절하였고 이렇게 하기를 평생토록 계속하
였다. 나라에서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를 추종하였다.
◎ 이덕민(李德 )
본관은 용이이며 자는 계도(季道)라 하고 호는 송파(松坡)라 하는데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
애가 돈독하였다.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친의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평생의 한이 되어 모친
상에 3년복을 입고 나서 다시 부친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삼년복을 입었다.
그리고평소에 학문과 의리를 숭상하고 연구하여 명성이 높았고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
과 송곡(松谷) 홍익현(洪翼賢)으로 더불어 도의로써 교제하였다. 형현(鄕賢)으로 추앙을 받
았으며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열녀(烈女) 막개(莫介)
김석복(金石福)의 아내인 막개(莫介)는 병자호란 (1636년)이 일어났던 이듬해인 정측년
(1637년)에 아산지방으로 침입한 청나라 오랑캐 군사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 오랑캐에게 짓
밟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여인으로서의 정조를 지켰다. 현종대왕의 어명으로 막
개(莫介)의 열녀 정문(烈女旌門)을 세워 높은 절개를 표창했다.
〔4〕숙종대왕(肅宗大王)의 온행
숙종 대왕은 숙종 43년(1717년)에 온양 온천에 행행하여 증광 별시(增廣別試)룰 실시했
다.
전국에서 모여든 선비 중에서 문과(文科)급제 7인을 선발하고 한량들의 무예를 시험하여 ㅜ
과(武科)급제 200여인을 선발했다. 그리고 충청도에서 경학(經學)이 가장 뛰어난 선비를 천
거하라는 어명을 내리자 재상(宰相) 권상하(權尙夏)의 천거로 윤혼이 발탁되어 명릉 참봉(明
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윤흔은 2년 후에 문과 급제하여 지평(持平) 벼슬에 올랐다.
숙종 대왕이 온양 온천에 행행한 사실을 기록한 '정유온행록(丁酉溫幸錄)'이 온천 행궁(溫
泉行宮)의 댗엉에 보존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 문서가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
길이 없다.
〔5〕영조대왕(英祖大王)의 온행
영조(英祖)는 일찍이 왕자 시절에 부왕(父王)이신 숙종(肅宗)을 따라 정유년(숙종 43
년 년 :1717 )에 온양 온천에 다녀간 일이 있으며 왕위에 올라 첫 번째의 온천 행행을 하였다.
이때가 영조 26년(1750년)이었으니 34년만에 다시 찾은 온양 온천이었다. 9월 12일에 창덕
궁(昌德宮)을 떠나 온천 행궁에 이르러 휴양을 취하시고 9월 28일에 환궁하였는데 이 때에
서울에서 평택까지의 역로에는 경기 감사(京畿 監司)의 지휘 아래 임금의 행차를 보필하였
고 직산(稷山) 관할 구역으로부터 온양 온천 행궁까지의 모든 경비와 주선은 충청감사(忠淸
監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충청도 도차원(都差員)에는 충주목사(忠州牧使)가 차출되었고
온양참(溫陽站)에는 도차원 청풍 부사(淸風府使)를 비롯하여 군수 5명, 현감 19명, 판관 1
명, 차랑 3명 등 도합 29명의 지방 수령들이 차출되었다. 천안참(天安站)에는 도차원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비롯하여 군수 2명, 현감 9명,등 도합 12명의 수령이 차출되었으며 직산
참(稷山站)에는 도차원 홍주목사(洪州牧使)를 비롯하여 군수 3명, 현감 11명 등 도합 15명
이 차출되었다. 이와같이 임금이 온양 온천에 행행하게 되면 충청도에서만 수령 방백(守令
方伯)56며이 총 동원하였고 여기에 임금을 따라 내려오는 고관(高官)이하 호종 군마(軍馬)
의 수효와 수령 방백의 시중을 드는 아전까지 합하면 수천명의 인력을 동원되었다.
영조 26년의 온행 차비가 이렇게 거창하였던 이유는 온양에서 과거(科擧)를 실시하기 위
해 많은 관원들이 임금을 호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를 거의
같은 시기에 병행하였으므로 문무고관(文武高官)들이 대거 출동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온주지(溫州誌)'에 기록되어 전하는 바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英祖溫幸時 差員》
영조대왕(英祖大王) 26년(서기1750년) 7월 12일에 이궁(離宮)하여 온천(溫泉)에 행행(行
幸)하사 28일에 환궁(還宮)하시다.
(1) 충청도(忠淸道) 도차원(道差員) : 충주목사(忠州牧使)
일로(一路)의 도검식(都檢飾), 전내(殿內)의 도수리겸포진(道修理兼鋪陳)
(2) 온양참(溫陽站)
가. 도차원(道差員) : 청풍부사(淸風府使)
본참(本站)의 도검식겸금란관(都檢飾兼禁亂官)
나. 각무차원(各務差員)
온양군수(溫陽郡守) : 전내(殿內)의 수리(修理)
괴산군수(槐山郡守) : 탕내(湯內)의 수리(修理) 겸(兼)수랄(水剌)·급수간(汲水
間)의 시탄(柴炭)·잡물(雜物) 진배차원(進拜差員)
목천군수(沔川郡守) : 탕내(湯內)의 차비(差備)
연기현감(燕岐郡守): 수랄(水剌)·급수(汲水)·시탄(柴炭) 급(及) 잡물(雜物)
진배차원(進拜差員)을 겸(兼)함.
연산현감(連山縣監) : 천안참(天安站 )과 직산참(稷山站)의 내(內)구마(馬)
신창현감(新昌縣監) : 천안참(天安站 )과 직산참(稷山站)의 외(外)구마(馬)
해미현감(海美縣監) : 대기(大旗)의 봉지(奉持)
전의현감(全義縣監) : 배련군(陪輦軍)과 각색봉지군(各色奉持軍)
진천현감(鎭川縣監) : 내외(內外) 각사(各司)의 수리(修理)
부여현감(扶餘縣監) : 철물(鐵物)의 공작(工作)
목천현감(木川縣監) : 목물(木物)의 공작(工作)
공주판관(公州判官) : 일로(一路)의 도로(道路) 및 발마(撥馬)의 검식(檢飾)
회덕현감(懷德縣監) : 잡물(雜物)의 봉상(捧上)
서산군수(瑞山郡守) : 천안(天安)에서 온양(溫陽)까지의 도로(道路) 수리(修理)
결성현감(結成縣監) : 경중(京中)에서의 기후(祇侯:시중들기)
김정찰방(金井察訪) : 과천(果川)에서의 기후(祇侯) 겸(兼) 화재(火災) 방지(防
止) 및 수원(水原)에서의 기후(祇侯)
제천현감(堤川縣監) : 전어(傳語: 말의 전달(傳達))
태안군수(泰安郡守) : 시(柴: 땔나무)·거(炬:횃불)·탄(炭:숯)·촉(燭:초)
홍산현감(鴻山縣監) : 방료(放料: 나라에서 주는 료(料), 곧 녹(祿)을 나누어 주
는 일)
영동현감(永同縣監) : 염장(鹽藏: 소금과 장)
아산현감(牙山縣監) : 마조(馬糟: 말먹이의 겨)
청양현감(靑陽縣監) : 마초(馬草: 말먹이의 풀)
연풍현감(延豊縣監) : 진위(振威)에서의 기후(祇侯)
덕산현감(德山縣監) : 공석차지(空席次知: 빈 섬거적 擔當)
보령현감(保寧縣監) : 각양(各樣)의 품명(品皿: 그릇)
연원찰방(連原察訪) : 사복소촉(司僕所屬) 및 역졸(驛卒)의 공궤
성환찰방(成歡察訪) : 보제마(補除馬)·사복마(司僕馬)의 부축역졸(扶軸驛卒)의
영부(領付)
(3) 천안참(天安站)
가. 도차원(都差員) : 청주목사(淸州牧使)
천안참(天安站)의 도검식(都檢飾) 겸(兼) 금란관(禁亂官)
나. 각무차원(各務差員)
천안군수(天安郡守) : 수리(修理) 겸(兼) 포진(鋪陳)
연산현감(連山縣監) : 내(內)구마(馬) (溫泉站을 겸(兼)함)
진령현감(鎭岺縣監) : 가가(假家) 및 공석(空石)
음성현감(陰城縣監) : 연배군(輦陪軍) 및 각색봉지군(各色奉持軍)의 공궤
신창현감(新昌縣監) : 외(外)구마(馬)(溫泉站을 겸(兼)함)
은진현감(恩津縣監) : 시(柴: 땔나무)·거(炬:횃불)·탄(炭:숯)·촉(燭:초)·각양
품명(各樣品皿)과 방료(放料)
예산현감(禮山縣監) : 마조(馬糟:직산참(稷山站)을겸(兼)함)
석성현감(石城縣監) : 마초(馬草)
정산현감(定山縣監) : 금화(禁火: 화재방지(火災放止)
서산군수(瑞山郡守) : 사복소촉(司僕所屬) 역졸(驛卒)의 공궤 겸(兼) 도로(道
路)·교량(橋梁)
보은현감(報恩縣監) : 직산(稷山)에서 천안(天安)까지 도로수리(道路修理)
(4) 직산참(稷山站)
가. 도차원(都差員) : 홍주목사(紅州牧使)
직산참(稷山站)의 도검식(都檢飾) 겸(兼) 금란관(禁亂官)
나. 각무차원(各務差員)
직산군수(稷山郡守) : 수리(修理) 겸(兼) 포진(鋪陳)
영춘현감(永春縣監) : 가가(假家) 및 공석(空石)
남포현감(藍浦縣監) : 시(柴: 땔나무)·거(炬:횃불)·탄(炭:숯)·촉(燭:초)
예산현감(禮山縣監) : 마조(馬糟: 천안참(天安站)을 겸(兼)함)
청안현감(淸安縣監) : 마초겸마료(馬草兼馬料)
단양군수(丹陽郡守) : 소사참(素沙站) 검식(檢飾)
한산군수(韓山郡守) : 일로(一路)의 예차(預差: 미리 정(定)해두는 차비관(差備
官)
연산현감(連山縣監) : 내(內)구마(馬)(온천참(溫泉站)을 겸(兼)함)
신창현감(新昌縣監) : 외(外)구마(馬)(온천참(溫泉站)을 겸(兼)함)
음성창현감(陰成昌縣監) : 연배군(輦陪軍) 및 각색봉지군(各色奉持軍)의 공궤(천
안참(天安站)을 겸(兼)함)
청산현감(靑山縣監) : 각양품명(各樣品皿)과 방료(放料)
문의군수(文義郡守) : 사복소촉(司僕所屬)및 역졸(驛卒) 공궤 겸(兼) 도로(道
路)의 수치(修治)
전의현감(全義縣監) : 소사(素沙)에서 직산(稷山)까지 도로(道路)수치(修治)
옥천군수(沃川郡守) : 천안(天安)과 직산(稷山)의 도예차(都預差)
(5) 배경경관(陪從京官)의 주접각사(住接各司) 및 고합(庫 )·가가(假家)의 분정(分定)
충주(忠州) : 승정원(承政院)의 양향(糧餉) 사간(四間), 낭청(郞廳)의 가가일간(假
家一間)
홍주(洪州) : 내병조(內兵曹)의 양향고(糧餉庫) 육간(六間), 낭청(郎廳)의 가가일
간(假家一間)
청풍(淸風) : 실(室)의 수리(修理)
단양(丹陽) : 내간안청(內間安廳)
직산(稷山) : 홍문관(弘文館)
임천(林川) : 사조(史曹)
한산(韓山) : 사헌부(司憲府)
목천(沔川) : 우의정(右議政)의 가가(假家)
목천(木川) : 빈청(賓廳)
평택(平澤) : 감찰사복청(監察司僕廳)
청주(淸州) : 양향고(糧餉庫) 사간(四間), 낭청(郎廳)의 가가일문(假家一間), 사
간원(司 院), 의장고(儀仗庫: 공주(公州)와 아울러 정함)
공주(公州) : 의장고(儀仗庫) 십간(十間: 청주(淸州 )와 아울러 정(定)함, 사복마
(司僕馬) 가가(假家) 이십사간(二十四間), 양고(糧庫 ) 사간(四間 ), 낭청(郎廳)
의 가가일간(假家一間 )
온양(溫陽) : 어실(御室)의 수리(修理), 상의원(尙衣院)의 의(衣)대방(房)과 종가
(鍾家)
옥천(沃川) : 별군즙청(別軍 廳), 의금부(義禁府)의 가가(假家)
대흥(大興) : 비변사(備邊司), 수어청(守禦廳)
태안(泰安) : 한림방(翰林房), 도총부(都摠付)의 마(馬)구 이간(二間)
합천( 川) : 외병조(外兵曹)
문의(文義) : 상서원(尙瑞院), 대청(臺廳)
아산(牙山) : 의빈부(儀賓府)
신창(新昌) : 왕자(王子)의 간안청(間安廳), 승정원(承政院)의 외하처(外下處)
예산(禮山) : 영의정(領議政)의 가가(假家), 사간원(司諫院 )의 가가(假家)
정산(定山) : 사복마(司僕馬)의 가가(假家)이십(二十)이간(二間)
당진(唐津) : 종친부(宗親府), 사복사(司僕寺)
영춘(永春) : 내인방(內人房)의 북변(北邊) 관내(關內)의 별전(別殿) 동연문(東庭
門)
은진(恩津) : 무예청(武藝廳), 선전관청(宣傳官廳)
진령(鎭岺) : 약방(藥房)
회인(懷仁) : 내인방(內人房)과 수랄간(水剌間: 음성(陰城)과 아울러 정(定)함),
도총부(都總府)의 마(馬)구 이간(二間)
석성(石城) : 대전반감청(大殿飯監廳)
홍산(鴻山) : 신리청(薪里廳)
남포(藍浦) : 서수문청(西守門廳), 북수문청(北守門廳)
결성(結成) : 호조(戶曹)의 낭청(郎廳) 가가(假家)
보령(保寧) : 사복마(司僕馬)의 가가(假家) 이십이간(二十二間)
연기(燕岐) : 호조(戶曹)의 약고(藥庫)
진천(鎭川) : 약방(藥房), 승정원(承政院), 간안청(間安廳)
서산(瑞山) : 배설청(排設廳)
제천(提川) : 향실(香室), 동수문청(東守門廳)
황간(黃澗) : 태시청(泰時廳)
청양(靑陽) : 사복마(司僕馬)의 가가(假家) 이십이간(二十二間)
덕산(德山) : 별예별감청(別藝別監廳)
해미(海美) : 공사청(公事廳), 남수문청(南守門廳)
노성(魯成) : 의방청(醫房廳)
연산(連山) : 대전사알청(大殿司謁廳)
청안(淸安) : 예조(禮曹)
음성(陰城) : 수랄문(水剌間)과 내인방(內人房)의 수리(修理: 회인(懷仁)과 아울
러 정(定)함)
정풍(廷豊) : 대전협문(大殿挾門), 홍화문협문(弘化門挾門)
영동(永同) : 어영청(御營廳)
청산(靑山) : 내취라청(內吹螺廳), 도총부(都總府)의 마(馬)구 이간(二間)
회덕(懷德) : 별감대령청(別監待令廳), 내인측간(內人厠間), 영고(永庫)이간(二間)
전의(全義) : 형조(刑曹)
부여(扶餘) : 도총부(都總府)
비인(庇仁) : 사복마(司僕馬)의 가가(假家) 십간(十間)
보은(報恩) : 사(司)약방(房), 별감청(別監廳), 사알방(司謁房)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장엄한 위의를 갖추고 온양에 행행한 영조대왕은 전국에서 모여든
선비 중에서 7명의 문과 급제자를 선발하였고 또 용감한 한량들의 무예를 시험하여 200여
명의 무사를 선발하였다.
〔6〕장헌세자(莊헌世子)의 온행
영조대왕의 세자(世子)인 장헌 세자는 영조 36년 (1760년)에 온양 온천에 행차하여 휴
양하면서 온궁(溫宮) 뜰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때마침 8월의 늦더위 때문에 땀을 흘린 장헌
세자는 온양 군수 윤염(尹琰)에게 명령하여 활을 쏘던 자리에 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윤염
은 즉시 온천 사람들을 동원하여 느티나무 (槐木) 세 그루를 심었다.
그 후에 장헌 세자는 부왕(父王)이신 영조에게 죄를 짓고 뒤주 안에 갇히어 죽음을 당하
였다. 영조의 뒤를 이어 장헌 세자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 분이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다.
정조 19년(1795년) 3월에 온양 군수 변위진(卞緯鎭)이 충청감사(忠淸監司) 이형원(李亨
元)에게 온천 행궁의 활터보수를 건의한 결과 엽전 300민(민: 엽전을 꿰는 끈)을 보냈다. 이
돈으로 활터의 느티나무 둘레에 사대(射臺)를 쌓았는데 길이가 15척(尺),너비가 12.5척(尺),
높이가 3.1척(尺)이었고 외계(外階)의 길이는 41척(尺), 너비 18척(尺), 높이 1척(1尺)이었
다.
이 공사가 끝나자 충청감사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 장계를 받아 본 임금 정조
(正祖)는 비명에 세상을 떠난 생부(生父) 장헌 세자를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즉시
신하에게 명령하여 그 활터 자리에 비석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 해 8월에 충청도 보령의 남
포(藍浦)에서 오석(烏石)을 운반해 왔는데 길이는 3.9척(尺), 너비 1.5척(尺), 두께 0.8척(尺)
이며 농대석의 길이는 3.1척(尺), 너비 2.5척(尺), 높이 2척(尺)이었다. 이 비석의 정면에는
정조대왕이 친히 어필(御筆)을 들어 '영괴대(靈槐臺)'라고 쓰고 어제(御製)의 '영괴대명(靈槐
臺銘)'을 지어 당대 제일의 명필가인 윤행임(尹行恁)으로 하여금 비석의 후면에 쓰도록 하였
다.
'영괴대명'의 글씨를 쓴 윤행임은 영조 36년 (1760년)에 장헌 세자가 온천에 행차했을 때
에 온양군수를 지낸 윤염(尹琰)의 아들인데 정조 19년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다 규장각(奎
章閣)의 검교(檢校)를 겸하고 있던 학자요, 명필가였다.
이 때에 세운 영괴대비(靈槐臺碑)와 그 비각(碑閣)이 지금도 온양관광호텔 구내에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비명(碑銘)은 다음과 같다.
《어제영괴대명: 御製靈槐臺銘》
온수(溫水)의 물가에서 지난 자취를 우두커니 바라보니
세 그루 느티나무가 울창(鬱蒼)하게 무성(茂盛)하여 제왕(帝王)의 일산(日傘)같구나
온양(溫陽)의 물이 혼혼(混混)이 솟아 흘러 신영(神靈)한 뿌리에 물을 대어 주니
수척(數尺) 높이의 대(臺)를 에워쌌구나
가만히 홀로 이 후황(后皇)의 가종(嘉種)을 사랑하노라니
그 위에 오색(五色) 구름이 아름답게 덮여 있구나
이 나뭇가지의 백세(百世)를 점(占)쳐보니
장차(將次) 후세(後世)에 올 사람에게 쌓인 경사(慶事)가 유전(遺傳)됨을 경험(經驗)하
노라
면왕적어온수지애혜(면往績於溫水之涯兮)
울평동동이여화개자유삼괴(鬱平童童而如華蓋者有三槐)
온양지수혼혼이개영근혜(溫陽之水混混而漑靈根兮)
요요이고수척지대( 繞以高數尺之臺)
절독애차후황가종혜(竊獨愛此后皇嘉種兮)
기상개유오색운주(其上蓋有五色雲住)
점본지지백세혜(占本枝之白世兮)
장이험적경지유어후래(將以驗積之流於後來)
소자(小子)가 즉위(卽位)한 지 이십년(二十年)되는 을묘년(乙卯年: 정조(正祖 십구년(十
九年 ), 서기(西紀) 1795년) 가을 구월(九月) 소자(小子)의 생조(生朝 (왕(王 )의 생진(生辰)
전(前) 삼일(三日)에 두손을 모아 절하고 공경(恭敬)하여 명(銘 )을 쓰노라.
지난날 경진년(庚辰年:英祖 三十六年, 서기(西紀) 1760년) 팔월(八月)에 장헌세자(莊獻世
子)께서 온궁(溫宮)에 행행(行幸)하사 군수(郡守) 윤염(尹琰)에게 명하여 세 그루의 괴목(槐
木)을 사대(射臺)에 심어 놓으셨는데 지금은 거의 한아름이나 되어 아름다운 녹음(綠陰)이
땅에 드리웠다.
금년(今年) 춘초(春初)에 온양군수(溫陽郡守)가 그곳을 증축(增築)하여 그 유적(遺跡)을 표
식(表識)하였다는 말을 처음으로 듣고 윤염(尹琰)의 아들 윤행임(尹行恁)이 지금 각신(閣臣)
으로 있으므로 그로 하여금 비석(碑石) 후면(後面)의 글씨를 쓰게 하노라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禮曹參議) 규장각(奎章閣) 직각지제교(直閣知製敎) 신(臣)
윤행임(尹行恁) 봉교근서(奉敎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