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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북대서도회 원문보기 글쓴이: 2기 이우광
月田藝術의 成就 金 壽 天 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 월전미술관 학예연구위원 1 “위대한 예술의 배후에는 위대한 정신이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바로 월전(月田)선생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선생께서는 동양문화의 정수인 문인화의 정신을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계승하셨다. 문인화는 시(詩)?서(書)?화(畵)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특히 분업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 있어서는 좀처럼 섭렵하기 어려운 분야이므로 점점 우리의 곁에서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선생께서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서 다 표현하지 못한 감흥을 시(詩)를 지어 보완하는 문인화를 표현하는 데 있어 그 어느 시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서?화 삼절(三絶)의 교양을 완벽하게 쌓으신 분이다. 물론 이와 같은 작업은 지금도 작가들에 의하여 추구되고 있지만, 선생처럼 손수 시를 짓는데 구애됨이 없이 자유자재로 표현해내는 작가는 점점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월전 선생은 그림에 있어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천부적인 소질을 갖추신 분이다. 게다가 스승의 연(緣)이 좋아 그 천부적인 소질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한학(漢學)은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지도를 받았으며, 화(畵)는 당시의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김은호(金殷鎬) 선생을 모셨고, 서(書) 또한 일본사람들에게 까지 널리 알려진 김돈희(金敦熙) 선생의 지도를 받으셨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스승과의 선연(善緣)에 앞서 소시(小時)적부터 집안 어른의 보살핌 속에서 장차 문인화가로 대성(大成)할 기본소양을 쌓으셨다.
선생의 조부님과 선친께서는 한학자로서 일평생을 학자로만 사시다 돌아가셨다. 당시 선생의 집에는 한문서적이 수천 권을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집에서 학문을 닦는 데만 전념하신 어른들은 배일사상(排日思想)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그분들은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의병장들에게 남몰래 독립운동 비용을 대면서 나라사랑의 뜻을 피우셨다. 이렇듯 강한 항일정신과 학문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선생은 위로 네 분의 누님에 이어서 다섯 번째의 귀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른들은 요즘 부모와는 달리 엄격한 선을 둔 사랑을 베푸셨다. 그러기에 선생은 어려서 아버님 앞에서면 두 다리가 벌벌 떨릴 정도로 아버님을 어려워했다고 한다.
선생은 다섯 살 때부터 집안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아 천자문『千字文』?소학『小學』?동몽선습『童蒙先習』등을 익혔다. 그후 서당에 다니면서 10세 초반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다. 선생의 아버님은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신학교를 거부했다. 그래서 자식들을 전부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선친께서는 오직 하나뿐인 아들이 한학자가 되기만을 바라셨다. 당시 우리나라의 유명한 국학자인 정인보 선생과 친분이 깊었는데, 아들을 정인보 선생 같은 한학자로 만드는 것이 유일한 꿈이셨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은 한학(漢學)보다 서화(書畵)에 관한 관심이 더 많았다. 선생은 천부적으로 그림에 소질을 타고난 분이었다. 어느 날 집안 벽에 붙여져 있는 그림을 모방하여 그렸는데 여러 사람들이 선생의 솜씨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선생의 집안에는 벌써부터 유명한 화가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한다. 지관(地官)이 할머님 묘 자리를 잡아주면서 몇 십 년 뒤면 이 집안에 아마 유명한 서화가(書畵家)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집안 어른들은 선생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환쟁이가 돼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선친께서는 무척 완고한 분이셨지만 자식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막지는 않았다. 대신 그림 공부와 한문 공부를 병행해서 함께 할 것을 조건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하셨다. 선친께서는 정인보 선생한테 편지를 써주시며 서울로 그분을 찾아가 한학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선생을 시?서?화에 모두 일가를 이룬 화가라고 평한다. 그것은 모두 집안 어른들의 올바른 가르침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선친께서 꼭 필요하다고 느끼던 한문공부를 하게 하고, 자식이 좋아하는 그림을 함께 하게 함으로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이끌어주신 것이다. 이제 미수(米壽 88세)를 넘기신 선생께서는 선친을 생각할 때마다 두고두고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고 했다.
위에서 밝혔듯이 월전선생은 처음부터 그림의 세계로 접어든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한학의 기초를 튼튼히 수학한 연후에 예술세계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학문과 예술이 처음부터 균형을 이루어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인(世人)들이 선생을 이 시대의 보기 드문 문인화가로 지목하는 것은 선생이 문인화적인 소재를 즐겨 다루는 것에 기인하고 있다기보다는 문인으로서의 깊은 소양을 체득한 화가임을 인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들 예술가를 이루게 하는 조건으로 재능과 노력을 이야기한다. 주위 분들에 의하면 선생은 스승을 사숙하기 전부터 이미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능을 뒷받침하는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의 월전예술이 결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대만 유학 후 월전미술관에 취직이 되어 3년간 선생님을 직접 모시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때 느낀 점은 아무리 무재주인 사람도 월전 선생님처럼 노력하면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선생님의 작업시간을 감히 여쭈어보았다. 붓을 잡으면 항상 시간을 잃어버리신다고 한다. 작업을 마치고 잠시 쉬기 위해서 시계를 보면 벌써 서 너 시간이 후딱 지나가 있어 건강을 위해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고 걱정하면서 작업시간을 조절해 보려고 하지만 그림에 몰입되면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림과 하나되는 몰아(沒我)의 정신과 그간 한 번도 외도한 적이 없이 정도(正道)를 걸으신 자강불식(自强不息)의 화업은 지금의 월전예술을 탄생케한 요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2 현대미술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복잡 다양하다. 근간 한 세기 동안의 미술양식의 변화는 아마 미술이 이 세상에 생겨난 이후 수 천년 동안의 양식변화보다 오히려 더 심한 변화가 있지 않았나 본다. 새로운 미술양식은 삶을 좀 더 다채롭게 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틀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과 소외되어 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의 그림은 이와 같은 현대의 미술 조류와는 다르게 누구든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어른과 아이, 그리고 동양화를 모르는 외국사람들까지도 아무런 거리감 없이 만날 수 있는 그림이다. 미국 스토니부룩대학의 막세튼 교수(뉴욕 스토니부룩 한국학과)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를 월전선생으로 지목했다. 풍토와 문화를 달리한 서양인의 눈에도 선생의 그림이 대단하게 보였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글이 쉬우면서도 깊은 내용을 전달할 줄 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글은 유난히 어렵게 느껴지는 글들이 많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지적(知的) 수준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배려가 없는데서 나타나는 폐단일 수도 있다. 조형언어를 다루는 미술의 경우도 마찬가지 현상을 빚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개항(開港) 이후 서구의 미술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서구의 것은 모두 선진적인 것이고 현대적인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들이 많다. 여과 없이 마구 베끼기는 현대문화의 혼란상황을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주범임을 지적하게 한다.
선생의 그림은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성(思考性)을 동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이 없다. 그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경물(景物)들을 대상으로 제작되는 선생의 그림은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소재가 일반적이라고 하여 그것이 쉽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화론(畵論)에 보면 흔한 소재를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비자(韓非子)(기원전 약280~233)는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이 귀신이고, 개나 말같이 실제 있는 대상은 가장 그리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왜 그런가? 개나 말은 사람들이 직접 보아 익히 알고 있는 반면, 귀신은 본 사람이 없으므로 제대로 닮게 그렸는지 어떤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의 화론(畵論)에 해당하지만, 지금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테면 우리가 언제나 대할 수 있는 소재는 누구든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묘사가 잘못되면 금방 어색함을 지적하게 된다. 서예에 있어서 해서가 다른 서체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해서에 대한 상식이 누구에게나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월전 선생은 가장 어려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명(簡明)하게 처리된 선조(線條)와 설채(設彩)에는 언제나 고도(高度)의 철학성이 있어 사람을 사고(思考)하게 만든다. 또한 선생의 그림은 동양적이면서 토속적이다. 한국의 전통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었으므로 중국화와 동질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각 민족에게는 서로 다른 문화색과 예술의 표정이 존재하고 있다. 민족의 정체성(identity)이 강조되는 현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중국과 한국을 구분치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종열(柳宗悅)은 이와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각 민족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독자적인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어떤 국민이 빈약한 표현밖에 하지 못했다면, 그만큼 국민 생활의 독자성이 빈약했다는 얘기가 된다. 선생의 그림은 전통 문인화의 기법을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쪽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중국의 것과 다르다. 우리는 한국의 회화사를 논할 때 겸재 정선(謙齋 鄭?)을 높이 평가한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한국의 토속미(土俗美)가 강하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월전선생의 작품 또한 우리의 풍토와 문화에 바탕한 토속미 넘치는 정취를 담고 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은 선생의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선생은 동양문화권 뿐만아니라 미국과 유럽쪽에 많은 펜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을 입증하는 예로 선생께서는 미국, 불란서, 독일, 일본에서 성황리에 초대전을 가진바 있다. 그리고 60년대에는 워싱턴에 동양예술학원(東洋藝術學院)을 건립하여 서양인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기법(技法)으로 본 선생의 화필은 빈틈없는 섬세한 묘사와 과감한 생략이 적절하게 조절되어 있다. 문인화는 본래 그림을 직업으로 하는 화공(畵工)들의 그림과는 달리 풍부한 교양을 쌓은 지식인들이 여기(餘技)로 하는 작업이므로 공필(工筆)면에서 뒤지기 쉽다. 역대의 문인화가들은 꼼꼼하게 묘사하는 것은 진정한 그림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할 정도로 기교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일반적인 문인화가들의 통념을 깨고 공필의 공부(工夫)를 탄탄하게 쌓으셨다. 그러므로 선생의 그림은 생략이 심한 백묘(白描)라 하더라도 형태묘사의 충실함을 이미 선조(線條)에 포함하고 있다. 텅 빈 여백과 감필(減筆)로 처리되었다 하더라도 엉성하지 않고 밀도(密度)있게 보이는 것은 바로 정세(精細)한 뎃상력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공필로 처리된 영정(影幀)이라 하더라도 선생의 그림에는 어떤 기교적인 요소보다는 서권기(書卷氣)를 느끼게 하는 오묘함이 있다.(圖1) 그것은 평상시 선생의 문인적 생활을 반영한 것으로서, 영정을 제작할 때에는 특별히 그 인물에 관한 책들을 여러 날 보시면서 인물의 특징을 착상하신다고 한다. 3
21세 때 제11회 선전(鮮展)에서 해변소견「海邊所見」의 그림으로 초입선하고 22세 때 제2회 협전(協展)에서 서예로 재입선한 이후 매년 선전에 그림을 연속출품하여 화명을 드날리게 된다. 29세이던 1941년 선전에서 「푸른전복(戰服)」(圖2)으로 총독상을, 42년, 43년에는 「청춘일기」와「화실」(圖3)을 출품하여 연이어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44년에는 기「祈」가 특선되어 연4회 특선됨으로써 추천작가가 된 그는 30년대 초에 이미 인물화가로 확고한 위치에 오른다. 해방이 되자 민족문화를 이루려는 거대한 각성이 일었다. 월전선생 또한 이제까지 바른 길을 가지 못했구나 하는 아픈 반성을 하게 되었고, 그 동안 배워온 일본그림의 요소를 지워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케 된다. 다행히 당시에 서울 미대 교수가 된 선생은 구경성제대 법문학부 미학과(舊京城帝大 法文學部 美學科)가 소장하고 있던 방대한 미술서적을 인수받아 밤늦게까지 읽으며 전통적이면서 현대성 있는 그림을 모색한다. 노력의 결실이 있어 선생은 화면을 가득 메우는 종래의 기법을 탈피하여 대상의 요점만을 간취(看取)하여 함축묘사하는 문인화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선생은 바로 그것을 우리의 전통적 미의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선생은 해방 후 월전선생의 그림변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40년대 후반과 50년대는 필선을 위주로 한 수묵담채의 고아한 형식에 새로운 시대의 기운을 담는 간결, 압축된 조형세계를 추구함으로서 한국화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문인화의 형식미에 현실적 리얼리즘이 융화된 경지는 고유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현실인식을 수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오광수 선생이 지적한 것처럼 월전 선생의 변신은 전통문인화로의 복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교한 필법을 앞세우는 북화(北畵)와 마음속에 뜻을 중시하는 남화(南畵)를 두루 섭렵한 선생은 새로운 감각으로 구래(舊來)에 없는 양식을 만들어 놓았다. 선생은 자신이 추구하는 문인화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문인화를 쉽게 얘기하면 안됩니다. 원래 문인화란 옛 선비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학문적 배경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 여기(餘技)입니다. 먹을 가지고 음풍농월(吟風弄月)을 노래하는 것이 문인화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데 동양적 교양이 결여된 그냥 붓 장난은 문인화가 아닙니다. 위에서 보듯이 선생을 문인화를 그리는 전시대적 사람으로 보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선생의 문인화는 정신적 세계와 현실적 소재의 적절한 융화로 그림의 리얼리티를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화제(畵題)에 자주 등장하는 현실고발과 문명 비판적 시각은 시대의 아픔을 그림으로 구체화시킨 노대가(老大家)의 곧은 현실의식에 바탕하고 있다. 88년 일본 세이부 미술관에서 열렸던 초대전을 보고 미술평론가 하북윤명(河北倫明)씨는 월전화(月田畵)에 관류하고 있는 인생?사회?시대에 대한 날카롭고 진지한 눈길을 특히 주목하게 되는데, 그 눈길의 절실함 속에서 그의 선비정신을 읽게 된다. 라고 하여 월전 선생의 그림이 얼마나 현실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월전선생의 그림에 등장하는 평범한 소재가 갖는 강인한 생명력(生命力)은 바로 현실(現實)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데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선생께서는 그림에 화제(畵題)를 즐겨 쓴다. 그래서 한문세대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그림의 화제가 오히려 거리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선생은 화제변「畵題辯」이라는 한시(漢詩)를 써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余常用漢詩文題畵 或者詰之曰繪圖已足何題之有 又曰漢文難解無讀之者 當韓字專用之世豈非時代逆行乎 余曰我之題卽畵之一部也旣非解說 又非裝飾耳?欲自適自誤不與爲人 誇示則人之不讀不解尙未必介意也 내가 항상 한시문(漢詩文)으로 화제를 쓰는데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그림이면 됐지 제(題)는 써서 무엇 하느냐. 그리고 한문이 어려워서 읽는 사람도 없고 더구나 한글 전용하는 세상에 시대역행 아닌가. 나는 말하기를, 나의 화제는 그림의 일부여서 그림 해설이 아니고 또 장식품이 아니며 더구나 자신의 감흥을 표현하는 일이기 때문에 남이 읽어주고 않고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의 시(詩)에서 보듯이 월전 선생은 자기세계를 펼치는데 있어 완고하다. 언 듯 보면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인상을 줄 수도 있지만, 아래에 소개될 그림 속의 화제(畵題)를 보면 선생께서 얼마나 세상을 걱정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추구하는 분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類人猿(圖4) 偶引禿毫寫猿? 形貌行態頗類人 却憶陀翁進化說 疑是重見原始人 看他怪奇狡獪相 還似今日無賴人 請君莫笑漫畵圖 只自誦諷類猿人 유인원 우연히 원숭이를 그려보니 모습과 행동이 사람 닮았네 옛날에 다윈이 진화론을 말했거니 이게 바로 원시인인가 보다 저 괴상하고 교활한 형태를 보라 마치 요즘 무뢰한 같구나 여러분 만화라고 웃지마오 그저 원숭이 닮은 요즘 사람 풍자한거요 題歡舞圖(圖5) 欲靜而動欲斷而續若無而有如訴如怨 切切興發於胸中深處者是東洋之性情 也韻律也頃者世人多傾倒於西風抛却 自我晏然無恥誠可嘆也今余以禿毫試 寫傳統舞踊圖其旋律絶妙難捉眞致只 自描出心像之一班而已 춤그림 조용한 듯 움직이고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며 없는 듯 있는 듯 호소하는 듯 원망하는 듯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멋, 이것이 동양의 정취다. 요즘 사람들이 서양흉내를 내느라고 제것은 다 팽개치고 부끄러운 줄 모르니 참 슬픈 노릇이다. 시험삼아 전통 춤 그림을 그려보는데 그 선율이 절묘해서 참모습을 잡기 어렵고 다만 내 마음의 일부를 그릴뿐이다. 呑 鉤(圖6) 錯認香餌呑銳鉤 可惜龍種誤身命 生物本性迷貪慾 知機安分是全生 낚시를 문 고기 미끼인줄 알고 낚시를 물었네 아깝다 용종이 신명을 잃었구나 생물이 원래 욕심으로 망하느니 때와 분수를 알면 안전할 것을 洋 蛙(圖7) 冽水本淸靜 魚鱉天惠域 石上靑蛙鳴 派問?鯉躍 春暖稚?育 秋晴文?肥 一朝外寇侵 沼澤大亂起 闖入者其誰 輸來洋蛙是 體大性且暴 隨處發狂威 鰻潛岩下伏 ?走叢中隱 毒?抗不得 竟被巨口呑 江河三千里 無處不辛吟 可恐外禍酷 實由人作災 主客旣顚倒 豈?蟲魚禍 堪悲弱者恨 ?嗟無良策 황소개구리 우리나라 물은 원래 깨끗해 물고기 자라들의 천국이었다 바위 위에서 청개구리 울고 여울에는 붕어 잉어가 뛰어 놀았다 따뜻한 봄에는 송사리 태어나고 가을철이면 쏘가리가 살 오른다 하루아침에 낯선 도적 뛰어들어 못과 늪에 큰 난리가 일어났네 뛰어든 자 그 누구냐 수입해 온 황소개구리 그 놈이다 몸통은 크고 성질이 포악해서 도처에서 광란을 부리니 뱀장어는 바위 밑에 숨고 개구리는 풀섶으로 도망친다 독사도 항거하다 힘에 부쳐 도리어 먹히느니 강하 삼천리 조용한 곳 없구나 외래(外來) 화(禍)가 이렇게 참혹한가 실상 사람들이 지은 죄지 주객이 뒤집힌 것 물고기와 벌레들일뿐인가 슬프다 약한 자의 한 오호 좋은 방법이 없구나 鶴 嘯(圖8) 獨立寒塘邊 愁聽亂鴉聲 ?望三山遠 臨風一長鳴 학 홀로 선 찬 호수가에 까마귀 소리 들려오네 아득한 고향 길 생각하며 바람결에 길게 한번 울어보노라 위의 화제(畵題)에서 보듯이 현실 고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화제가 주는 느낌은 그림이 주는 이미지만큼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 유행한 시의 모방이 아니라, 복잡 다변한 현대를 살면서 지나쳐버릴 수 없는 현실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과 예리한 통찰력이 담겨져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화제는 대부분 본인의 감흥을 읊은 자작시(自作詩)이다. 선생의 그림이 독창성에 두드러지듯이 화제의 내용도 마찬가지로 누구의 것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선생의 생활체험을 직접 그대로 쓴 것이다. 그 詩는 현실생활에서 절실하게 느껴온 문제의식을 가지고 쓴 것이기 때문에 그림에 한층 생기(生氣)를 북돋아 준다. 이점은 선생을 이 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보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오늘날에 있어 그와 같은 경지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은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설사 화가의 마음속에 그것을 표현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오랜 수련을 필요로 하는 한학수련(漢學修練) 없이는 결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도 문인화가 중 자작 제시(自作 題詩)와 제발(題跋)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분이 적다. 김정희, 이인상, 강세황, 신위 등 몇 분 이외에 많은 분을 거론하기 어렵다. 선생은 튼튼한 한문에 기초하여 제시(題詩)와 제구(題口)를 마음대로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 화제(畵題)에는 지금 우리와 우리의 산하(山河)가 지니고 있는 고민은 무엇이며 우리의 산하가 처해 있는 위기는 무엇인가 하는 절실한 고뇌가 그 속에 담겨져 있다. 5 선생이 미수(米壽)를 맞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서울미대 제자들의 후원으로 99년 6월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월전미수전(月田米壽展)을 가졌다. 그 연세에 회고전(回顧展)을 가진 이는 간혹 있지만 현역작가로서 창작전(創作展)을 하는 이는 조선조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미수(米壽)라고 하네요. 그러나 제 마음에는 아직 폭풍이 지나가고 화산이 터지는 듯한 예술적 에너지가 있습니다. 신작(新作)은 형태가 아닌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것을 생략하고 뼈대만 남겼습니다. 이제서야 그림의 초점이 좀 보인다고 할까요. 이렇듯 선생은 미수(米壽)에 이르러서도 엄격한 작업태도와 왕성한 창조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구십을 목전에 둔 노대가(老大家)의 그칠 줄 모르는 창의열(創意熱)과 작업에 임하는 엄격한 태도는 후학들이 본받아야할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미수전(米壽展) 오픈식 날 관람객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지만, 그림이 담고 있는 극도로 정화된 심간(深簡)함의 위력 때문인지 장내(場內)는 마치 선방(禪房)의 분위기를 연상케 할 정도로 숙연(肅然)하게만 느껴졌다. 이번 전시에서 관람자의 눈길을 가장 집중케 한 작품은「태풍경보」(圖9)였다. 선생께서도 본 작품을 이번 전시의 가장 특징적인 작품이라고 자평(自評)하셨다. 세기말에 무언가가 세상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갈 것만 같은 느낌을 담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렸는데, 역사적으로 바람을 그린 화가가 드뭅니다. 태풍은 본래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선생은 불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과감하게 변용시켰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 태풍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사실적(寫實的)인 단계를 넘어서 대상을 압축하고 생략하는 사의(寫意)나 상징적(象徵的)인 묘사는 동양회화사에 흔히 볼 수 있는 표현기법이었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없는 성질의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형상(形象)의 세계로 끌어낸 그림을 찾아내기는 어렵다. 바로 이점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시도한「태풍경보」의 화작(畵作)은 회화의 표현 가능성을 확장해준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에서는 보다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여백미(餘白美)를 살린 작품들이 출품되었는데 「태산이 높다해도」「가을밤의 기러기 소리」「수선」「매화」「고향언덕」은 선생의 회화세계가 다시 큰 변모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살피게 한다(圖10~14). 「고향언덕」은 나무와 언덕,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밑에 조그만 집이 있을 뿐이다. 이 그림에서 선생은 물(物)이 차지하는 비중을 최대한 압축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겨진 여백에서 전혀 허전함을 느낄 수 없음은 몇 가닥의 선조(線條)가 선생이 사시던 고향의 깊은 정취(情趣)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생께서는 옛날에 당신이 사시던 고향마을이 바로 이 모습이라고 하셨다.
선생은 시(詩)와 화(畵) 뿐만 아니라 서(書)에서도 일가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이 서예작품출품을 통해 더욱 부각된 것 같다. 월전선생께서는 20세 초반에 당시 명필로 꼽히던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선생 밑에서 손재형 선생과 함께 동문수학하였으며, 22세 때 제2회 협전(協展)에서 입선을 하였다. 꾸밈없이 물 흐르듯이 써 내려간 화개화락「花開花落」(圖15)과 결구의 공간미가 돋보이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圖16) 그리고 선생이 자리하고 계신 월전미술관을 아름답게 노래한 한벽원 사계「寒碧園 四季」(圖17)는 예술에 달관한 노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월전선생은 튼튼한 뎃상력의 바탕 위에서 문인화의 꽃을 피우신 분이다. 전시에 출품된 몇 점의 스케치 작품(圖18~20)은 후학(後學)들에게 그림에 있어서 기본공부(基本工夫)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고 본다.
6 예술작품을 몇 마디의 말로서 표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될 확률이 높다. 특히 월전선생은 수십 년 동안 다양한 기법과 화풍으로 수작(秀作)들을 많이 남기신 분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 그러나 필자에게 월전선생 작품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청정(淸靜)”이라고 말하겠다. 선생의 작품은 초기부터 근년에 이르기까지 주밀하게 청정한 기운을 유지하여 왔다. 그림의 청정함은 관자(觀者)의 마음을 맑히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미술을 평가하는 기준도 다양해지고 있다. 청정이라함은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는 무형(無形)의 것이기 때문에 즉물적(卽物的)인 것에 익숙한 사회에서는 가치의 권역(圈域)에 있지 않다. 그러나 청정한 그림은 오염된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효능이 있으며, 특히 혼탁(混濁)의 극을 달리는 현대사회의 정신환보(精神還補)에 근본적인 대안일 수 있다.
예로부터 수양을 하는 사람들은 청정(淸靜)을 화두(話頭)로 삼았다. 청정은 사욕(私慾)의 티끌이 모두 사라질 때 나타나는 정신경계(精神境界)이다. 마음 한구석에 조금이라도 욕망이 떠오르면 구멍난 배에 물들어오듯 청정은 유지될 수 없다. 청정경『淸靜經』에 보면 “사람이 늘 청정하면 천지가 모두 돌아온다 人能常淸靜, 天地悉皆歸”고 했다. 맑음을 희구하는 생각은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카타르시스는 청정(淸靜)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청정심(淸靜心)은 본래 종교와 예술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고대인들은 종교적 의식이나 예술행위에 앞서 반드시 철저한 재계(齋戒)의 절차를 거친다. 세속에서 더럽혀진 마음을 청정케하기 위하여 재계(齋戒)는 꼭 필요한 통과의례(通過儀禮)에 속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월전선생의 위대한 예술정신을 발견한다.
오늘날에 있어서의 종교예술은 어떤 특정한 상(像)을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종교의 소재는 종교예술을 완전히 규정하는 틀이 될 수 없다. 길을 지나다가 노변(路邊)에서 가끔 돌로 조각된 불교조각전시물들을 대할 때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아무런 종교적인 느낌을 받을 수가 없다. 모습은 부처이고 보살이지만 그 얼굴과 자태는 어딘가 모르게 탐욕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아마 그것을 제작한 사람의 마음에서 찾아질 수 있다. 반면에 소재(素材)와 관계없이 종교적인 느낌을 주는 예술과 만날 때가 있다. 나는 그 예술을 월전선생의 문인화에서 발견한다. 선생의 그림은 마치 경전(經典)을 보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과 같은 “청정(淸靜)의 에너르기”가 작용하고 있다. 월전선생은 그림을 통하여 현실에 대한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러나 시인(詩人)이 마음속의 감정을 마구 분출시키지 않고 시상(詩想)을 가다듬어 절제(節制)된 표현을 하듯이, 선생의 그림은 화풍과 기법과 소재에 관계없이 깊은 계곡의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정화(淨化)되어 있다. 선생의 그림은 자타(自他)를 맑히는 물과 같은 속성이 있다. 톨스토이는 예술의 목표를 “선(善)의 감염(感染)”이라고 정의했다. 선생은 바로 예술을 통한 선행(善行)의 실천자로서, 수십 년 화업을 통해 탁해진 세상공기를 부지런히 순화(純化)하려 했다.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지성인들이 물질문명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기우는 인간성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자신이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언설(言說)은 오히려 인간들의 의식을 더욱 혼탁하게 할 수도 있다. 선생의 예술은 어떠한 이야기를 하건 세상을 순화시키는 힘이 느껴진다. 나는 이것을 월전예술(月田藝術)의 성취로 보며, 선생의 그림을 통해 종교와 예술이 본래 한 뿌리임을 새삼 실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