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여름날, 차를 마시며 나를 본다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어린 시절 우리의 마음을 밝고 씩씩하게 만들어주던 아동문학가 어효선님의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이다. ‘코로나19’라는 신종 전염병이 우리의 당연한 일상의 삶을 잠식하여 암울한 이 때 잠깐이나마 활기를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한 동요이다.
병이 들어 누워있는 것도 아닌데 바깥 활동은 자의반 타의반 제어되고 잠깐의 외출에도 마스크를 착용하려니 귓등에 진물이 생긴다. 자유롭게 소소한 일상을 편안히 보낼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오기나 하는 걸까. 거리의 산책도 자유롭지 못하니 그동안 별러오던 여행을 다녀오지 못한 후회가 갑자기 밀려든다.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병마. 질병도 인생의 한 일부요 동반자라면 그를 대하는 태도도 저마다 다르다. 고려 때 원감국사는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1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로, 출가하여 61세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동문선에 작품이 실려 있다. 그의 「병중에 고요히 회포를 읊다(病中獨坐書懷)」에서는 병에 걸려 괴롭고 외로운 때에 오히려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속세를 떠난 삶의 높은 가치를 일깨우는 득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默坐觀我生 고요히 나의 삶을 돌아보니
灼然同夢幻 마치 몽환 속이었던 듯
不是徒强言 그냥 억지가 아니라
自信固無間 진정 끝없는 고통이었을 뿐
何於夢幻場 어떻게 몽환같은 세상에서
歷歷足憂患 역력히 근심걱정을 견뎠을까
譁譁惡聞頻 떠들썩 나쁜 소문도 빈번하고
擾擾嫌見慣 어지러이 보기 싫은 광경도 잦았었지
豈無窮山中 어찌 산속이라 궁벽함이 없으랴
長松翳幽澗 우뚝한 소나무는 계곡물 가리고
不如歸去來 도연명의 전원생활만 못해도
於焉養疎慢 모르는 사이 느긋한 여유도 늘어난 듯
秋至拾橡栗 가을이면 상수리와 밤을 줍고
春來採藜莧 봄이면 명아주와 비름 뜯네
石銚茶七甌 돌솥에 차 끓여 노동의 칠완가를 읊조리며
瓦爐香一瓣 질향로에 피어나는 축복의 판향 한 줄기
嬴顚復劉蹶 진(秦)나라도 한(漢)나라도 망해 세상이 바뀌어도
聊樂我國晏 내 사는 곳 즐거운 무릉도원
寄謝世上人 세상 사람들에게 고하노니
逍遙異鵬鷃 붕새와 메추라기는 소요하는 법부터 다르다네
병이 들면 자신의 안위에 급급하건만 국사는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며 관조의 경지에 들었다. 먼저 젊은 날 속세에서의 삶을 돌아보았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불도에 매진하고자 했으나 부모의 허락이 없어 벼슬살이를 하다 29세에 비로소 출가하였다. 속인에게는 부러운 생활이건만 얼마나 하루가 고통스러웠을까. 무간(無間)은 불교의 지옥 중의 하나로 시주한 재물을 축낸 죄를 진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삶을 이에 빗대었을까.
자연에 내맡겨 사는 모습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건만 허깨비 같은 삶을 버리지 못하고 미망 속에서 허덕인다. 입으로는 구도를 논하지만 세상사를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 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출세를 논하며 주고받는 험담, 벼슬길을 탐내는 욕심. 세속의 우리에게는 일상이건만 국사는 그를 견뎌내며 마음속까지 병들은 자신을 반추하고 있다.
이제 그는 산 속 생활의 즐거움임을 은근히 내보인다. 나무는 울창하고 시냇물은 이태백의 거문고 소리인 양 졸졸 노래하며 흐른다. 벼슬을 버리고 전원생활로 돌아가는 기쁨을 노래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빗대어 궁벽한 산 속 생활의 느긋한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만족감이 덩달아 즐겁다.
가을이 오면 도토리와 밤을 줍고 봄이 오면 명아주와 비름을 뜯는다. 무심(無心)의 참모습을 보는 평상의 모습이다. 불가(佛家)의 탈속은 자연에 순응하는 선수행의 또다른 모습이며, 그로 인한 깨달음으로 중생을 계도한다. 오로지 주어진 사치란 차를 좋아하여 다가(茶歌) ‘맹간의가 보낸 햇차에 감사하는 즉흥시(走筆謝孟諫議寄新茶)’를 쓴 노동(盧同)인 양 차를 즐겨 마시는 일 뿐이다. 피어나는 향 한줄기. 그 속에는 선(禪)적 깨달음과 진면목을 찾는 구도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
국사는 산사의 생활을 무릉도원에 빗대었다. 무릉의 어부가 우연히 갔던 이상향. 진시황의 전란의 폐해가 그치고 한나라까지 기울어지도록 모르고 살던 피안의 세계.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대붕(大鵬)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 새이고 척안(斥鷃)은 메추라기와 같은 작은 새이다. 메추라기와 달리 붕새같이 격 있는 사람은 일상에서 돈오(頓悟)의 계기를 놓치지 않는다. 깨달음의 인연은 어느 것에나 존재하니 자연에 순응하는 삶 자체가 도(道)이다. 일상생활이 모두 깨우침의 문이니 돌솥 일곱 잔의 찻물은 다 마시지도 않았는데 신선이 되게 하고, 향로의 한 줄기 향은 깊은 법열의 세계로 젖어들게 한다.
메추라기가 죽을 때까지 붕새의 큰 세상을 보는 경험을 할 수 없듯이 큰 것을 보는 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인이라야 그것을 가늠할 수 있다. 노자는 ‘훌륭한 선비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上士聞道, 勤而行之)’며 인간을 상사(上士)ㆍ중사(中士)ㆍ하사(下士)로 분류했다. 사람은 본질부터 다르게 태어나니 그 노력에 따라 조금은 변화하나 본질을 보는 크기까지 바꿀 수는 없다.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며 자연에 내맡겨 사는 모습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세인(世人)들은 ‘어찌하여 꿈과 허깨비 세상에서 이것저것 근심걱정 많기도 한지 왁자지껄 나쁜 소문도 자주 듣고 요란하게 싫은 광경도 늘상 보며’ 사는 것일까. 메추라기는 구만리 하늘을 한 번 날갯짓으로 소요하는 붕새의 존재를 믿지 못하고 비웃지만 그것이 붕새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제각각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인생임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 주재할 수 없는 병마로 온 세계가 힘든 시기이다. 병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깨달음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일곱 잔의 차를 마시며 어려운 난국 속에서 한 줄기 향이라도 피우며 평안을 기원하고 싶다. 국사의 담담한 삶의 모습을 배우며 자꾸 흉내나마 내보고 싶다. 산, 들, 나무의 푸르름을 자유롭게 누리며 나를 찾아보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