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약돌을 팔다.
돈이 필요했다. 나는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소년소녀세계대백과사전 스무 권을 들고 한 시간 거리의 헌책방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무게가 2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전집을 통째로 들고 가기엔 벅차고 힘든 길이었지만 꼭 돈이 필요했다. 크리스마스 행사에 쓸 선물이 필요했고 고등학생인 나에겐 돈이 없었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야 했기에 시내에서 눈여겨 봐둔 헌책방을 향해 노끈으로 싸맨 책을 들고 짊어지고 걸었다. 키가 160센티나 되었을까. 손이 시리고 무릎이 꺾였다. 참 무모한 길이었고 쓸쓸하고 휘청대는 길이었다. 선물을 받고 싶었다. 줄 수 없다면 받지 못했기에 당장 몇천 원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강원도 태백에서 쫓기듯이 울산으로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이사라고, 해야 하나. 실상은 이모네 집에서 얹혀사는 더부살이였다. 1톤 트럭에 실린 처음을 잃어버린 가난이 짙은 세간살이에서도 내가 소중히 여겼던 책들은 고스란히 트럭에 실렸다. 버리고 가자는 걸 내가 끝까지 울며불며 매달렸다. 불우했다면 불우했던 나를 지켜주었던 책들이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가족이 흩어지고 첩첩이 쌓여가던 슬픔의 와중에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버지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고 학교도 아니었다. 오로지 책이었다. 계몽사에서 출판된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50권, 금성출판사에서 출판된 소년소녀세계대백과사전 20권, 그리고 한국위인전 20권, 위인전은 출판사가 기억나지 않는다.
소년의 밤은 캄캄하지 않았다. 호머 이야기, 별자리 이야기, 그리스 신화, 안데르센 동화, 이솝 이야기, 러시아 동화, 특히 북유럽 이야기 중에서도 눈의 여왕은 왜 그렇게 날 설레게 했는지…. 문학전집에 실린 2권 호머 이야기는 내가 아킬레우스가 되는 현재였으며 고통이었다.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파트로클레스가 죽고 비탄에 빠진 아킬레우스 삽화는 나를 흔들어 놓았다. 영웅이라면 반드시 신에게 꼭 물어봐야 할 존재 이유를 아킬레우스는 얼굴을 감싸 쥐고 묻는 장면은 트로이 전쟁사가 나올 때마다 머릿속에 실재처럼 그려진다. 셰익스피어는 이 장면에서 햄릿의 독백 ‘죽느냐, 사느냐’를 떠올렸으리라. 백과사전에서 보았던 아프로디테 탄생화는 볼 때마다 온몸이 붉어졌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사과를 들고 다투던 세 여신 중에서 사나이가 눈앞의 아프로디테를 선택한 이유는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그림만으로도 붉어진 나도 있었는데 파리스는 말해서 무엇하랴. 별자리 이야기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하늘의 그림이었다. 사냥꾼 오리온을 올려다보며 입도 많이 다셨다. 초코파이가 귀하고 맛있던 시절이었다.
팔천 원, 헌책방에서 받아 든 돈을 들고 이천 원으로 산타클로스 양말에 잔뜩 들어있는 과자 꾸러미를 포장하고 선물을 마련했다. 나도 선물을 받겠구나. 불우하고 불행하였지만, 그것들을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시절에 나를 지켜준 책을 팔천 원에 퉁 쳐버린 고등학교 1학년의 가슴은 뿌듯하였겠지만, 돈을 쥐고 올려다보았던 겨울 하늘이 지금은 시리고 차갑다. 그날부터 한동안 나의 신화를 팔아 버린 크리스마스가 가슴에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트로이 전쟁사의 아킬레우스처럼 크리스마스의 헌책방은 매년 겨울만 되면 나에게 각인된다. 정작 내가 받았던 선물은 기억도 나지 않고 시린 손을 호호 불며 굳게 들었던 헌책방 가는 길만 남았다. 걸어가는 길의 동선과 장면들, 지나치던 자동차와 사람들의 시선들, 참으로 철없고 힘겹던 그 길을 다시 걸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상황만 다를 뿐, 여전히 나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인정과 가치를 돈으로 환산해서 걷지 않고 싶었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날처럼 각인이 되지 않을 뿐이다. 모든 게 신화를 잃어버린 탓이다.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 속에서 시시포스를 이렇게 표현한다.
‘신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시포스는 자신의 비참한 전모를 알고 있다. 시시포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그가 밀어 올리는 바위보다 더 강하다.’
시시포스의 길은 정해졌다. 산 정상으로 전력으로 돌을 밀어 올리며 끙끙거리는 그에게 우뚝 솟은 정상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정상에 다다르더라도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시시포스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수만 번 정상에 올랐던 시시포스의 내리막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을까. 오르기만 한다면 지치니 꼭대기에서 돌이 굴러떨어지는 걸 보는 기분도 썩 괜찮지 않을까. 처음 몇 번은 힘들겠지만, 형벌이 직업이 되었다면 내려가는 길은 휴식 시간 같을 것이다. 천천히 터벅터벅 내려오는 사나이를 상상해 본다. 땡볕의 태양도 등을 지니 어느새 석양이 되었다. 내리막 끝에는 다시 올라가야 할 오르막이 있다. 사람의 호흡처럼 내 쉬는 숨 끝에 들이마셔야 할 숨이 있듯이 결국 고통과 휴식의 시작은 결이 같지 않을까. 나는 프롤레타리아 시시포스가 좋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새로운 숨을 비축하는 그의 내리막은 비극 속에서도 석양처럼 빛난다.
철없던 시절에 팔아 버린 스무 권의 백과사전은 내가 굴리고 가야 할 바위였나 보다. 아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만질수록 윤이 나는 잘생긴 조약돌이었을 거다. 슬픔을 대신하는 영웅이었고 여신이었다. 손에 잡히던 조약돌이 지폐 꾸러미로 내 손에 잡혔을 때 난 신화를 잃었다. 모든 방황의 시간은 그날부터 시작이었다. 내 또래에서 느꼈던 포만감과 설렘은 사라지고 한탄과 불만만 남아 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서울로 도망을 가고 싶었다. 그냥 또래들의 일원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덩그러니 나는 떨어져 혼자 남았다. 내가 시시포스의 바윗돌이 되어 버렸으니 몸을 일으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차라리 오르막도 내리막도 모르고 굴러다녀야 했는데 말이다.
시시포스는 지금도 돌을 밀어 올리고 있다. 형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정상을 향해 사람들은 힘을 다해 끙끙거리며 돌을 굴린다. 정상에 서면 돌은 꿈쩍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착각한다. 돌은 둥글고 산은 뾰족하다. 신이 굴리라고 던져 준 돌은 살아있는 자석과 같아서 사람들의 손발을 끌어당겨서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다만 죽는다는 것,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사람에게 얼마나 행운인가. 영원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다.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시시포스는 영원히 윤회의 쳇바퀴를 돌아야 하는 불우한 신일 뿐이다. 그래도 시시포스는 행복하다.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우주에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내고 내려올 줄 아는 성실성, 정상을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무는 정직성, 권태를 고통으로 이겨내는 무모성이 있다. 시시포스의 팔뚝에서 ‘불 속에서 통째로 단련된 의지’가 꿈틀댄다.
시시포스 신화는 참 위로가 된다. 영원한 형벌도 그렇지만 죽음, 타나토스를 감금해 버리고 세상의 죽음을 없애버린 배짱은 비탄에 빠진 영웅보다 더 영웅답다.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이 굴러다니고 방황하던 시절에 서점에서 집어 든 책이 알베르 카뮈의 ‘시찌프스 신화’였다. 시찌프스가 지금의 한글 표기로 시시포스다. 어려운 철학에세이인 줄도 모르고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으로 집어 들었는데 덕분에 다시 조약돌을 모을 수 있었다. 그 시기에 내 첫 번째 연애가 시작됐고 크리스마스도 다시 시작되었다.
단지 기억만 하고 있어도 다시 생을 더듬어 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그게 신화다. 신화는 어떤 식으로든 길을 만든다. 시시포스의 길이라도 망국의 길이라도 아폴론의 태양 마차는 내일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