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소리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자는 순간까지 온갖 소리들이 우리 귀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 소리들 가운데는 듣기 좋은 것도 있고, 듣기에 짜증이 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유익한 소리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전혀 무익한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조용하다는 것이 이제는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루 종일 들려오는 자동자의 엔진 소리와 경적 소리, 교회당 옆을 지나가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종알대는 소리, 이제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 되어버린 텔레비전에서 들어오는 소리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고함치며 싸우는 소리, 심지어는 깊은 밤 조용하게 잠들려는 순간 짜증나게 들려오는 폭주족의 오토바이 굉음소리까지. 우리는 온갖 소리들 속에 파묻혀 산다고 표현해도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종종 '이런 모든 소리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우리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아름다운 소리들도 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틀어놓은 조용한 찬송가 경음악 소리,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에서나 들을 수 있는 새벽녘의 닭울음소리, 자연의 향긋함을 준해주는 여름의 매미나 풀벌레들의 소리, 서로 이해하고 품어주며 미소지으며 건네는 넉넉한 웃음소리, 가끔씩 바닷가에 나가서 듣는 파도소리. 그런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소리들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소리들은 자주 자주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더 중요한 소리가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음성, 거룩한 음성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해야할 가장 시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함으로 많은 혼란과 시행착오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 - 거룩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오늘 신약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절) 양들은 자기의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자기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가지 않습니다. 만일 자기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당하게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 양은 목자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곳에 방치되어 굶주림과 목마름고 야수의 위협에 직면하여 죽게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우리도 삯군을 따라간 양처럼 우리의 생명을 도적질 당하고 죽임 당하고 멸망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리에는 생명의 꼴이 없습니다.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원수 사단 마귀가 우리의 생명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 바른 신앙인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 귀를 하나님께로 향해 열어놓고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영원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분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누리게(10:10)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박사가 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란 책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4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물론 스탠리 박사가 제시한 그 4가지 방법 말로도 굉장히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조이 도우슨(Joy Dawson) 여사는 하나님께서는 24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두 가지 방법으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으로 스탠리 박사가 제시한 네 가지 방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첫 번째 방법은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또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실 때, 그리고 성경을 통해 들려지는 설교를 들을 때에 여러분의 영혼 깊숙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신앙인은 그 어떤 것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과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글씨를 읽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거룩한 음성으로 우리 귀에 들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신앙생활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두 번째 방법은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은 예수 믿는 신앙인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의 귀에 대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속삭이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욥바라는 성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베드로더러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서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행 10장)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일꾼들 가운데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보내라고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나바와 바울을 최초의 선교사로 소아시아에 파송합니다.
그 성령께서 오늘은 우리 속에서 말씀하지 않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성령은 오늘도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기보다 인간적인 욕심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과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이 들려지기 위해서는 욕체의 욕심의 소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세 번째 방법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해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언제나 사람을 사용하여 당신의 일을 행하십니다.
- 다윗이 범죄했을 때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 죄악으로 가득찬 니느웨를 회개시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도 가기 싫어하던 요나를 보내어 '회개하라'는 말씀을 외치게 하셨습니다.
-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눈에 비늘이 씌워진 상태로 기도하고 있던 청년 사울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아나니아라는 선지자를 보내어 안수하게 하셨습니다.
아모스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을 하더라도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을 외치게 한 다음에 심판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때로 나에게 선지자와 같은 존재임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내가 만난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네 번째 방법은 환경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자연적인 현상과 같은 것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잘 풀리던 사업이 갑자기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평생 동안 병을 안고 살아갔습니다. 그는 그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바울은 자신의 병든 약한 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귀한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그 약한 몸 때문에 자고하지 않게(교만하지 않게)된다'는 하나님의 뜻(음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병을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상황(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내 자리,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을 조용히 묵상하면 우리는 그 속에서 거룩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음성과 마귀가 우리 들려 들려주는 유혹의 소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하와에게 뱀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하와에게 이런 말을 해 줍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너희가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죽지 않을 거야. 오히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거야." 유혹의 소리였습니다. 하와는 뱀의 그 유혹하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선악과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선악과를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절대로 넘보아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의 소리를 듣고 난 다음 쳐다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죄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마귀가 우리 귀에 들려주는 음성이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유혹하는 음성이요 죽음으로 인도하는 음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절도요 강도"가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음성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마귀의 유혹하는 음성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나 자신에게 있으면 마귀의 음성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뭔가 엄청난 것을 줄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하와를 생각해 보세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입니까? 사단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라. 그러면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들이 너를 최고로 여길 것 아니냐?' 그렇게 유혹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발가락 하나 상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겠느냐? 그러면 너는 대단한 영웅이 될 거야?' '나게 딱 한번만 절해봐. 네가 갖고 싶은 것 다 줄 수 있어.'
여러분, 참으로 달콤한 유혹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 자주 그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빼앗기고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사단의 음성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음성을 듣는 결과는 언제나 멸망이요 실패요 불행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는 거룩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해 주지 않으셔요. 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지요?"
여러분, 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데,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우리 영적인 귀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파수와 우리의 주파수가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채널에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라디오를 듣기 위해서는 그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포항 극동방송 FM 방송을 듣기 위해서는 90.3MHZ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방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른 주파수를 가지고는 절대로 그 방송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예수님과 주파수가 맞지 않아서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내 육신의 음성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내 생각의 소리, 내 욕심의 소리, 내 정욕의 소리, 내 절망의 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깨끗한 마음에 들려옵니다. 내 욕심의 소리와 정욕의 소리로 더럽혀진 마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따라오라고 부르고는 앞장서서 갑니다. 그런데 양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목자를 따라서 그리로 가는 것보다 저쪽으로 가면 훨씬 더 좋은 풀이 있는데' 그러면서 목자 따라가기를 거부하면, 그 양은 이리나 늑대의 밥이 되기 십상입니다. 양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무조건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앞세우고 내가 먼저 판단해 버립니다. 그런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내 생각이나 내 사정에 대한 불안한 마음, 내 욕심대로 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런 것들을 먼저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해야 합니다. 비워져 있는 곳에 말씀과 하나님의 음성이 채워집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음성을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께서 즐겨 들으시던 라디오가 한 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실 때면 종종 그 라디오가 내 차지가 됩니다. 그러면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우리가 좋아하는 어린이 프로를 듣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해서 텔레비전이 들어왔습니다. 저희 동네에서 가장 먼저 저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기 때문에 저녁만 되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밤 늦게까지 보고 가곤 했습니다. 텔레비전이 들어온 이후에는 라디오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라디오와 멀어지면서 한 가지 잃어버린 게 있습니다. 상상력입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는 온갖 상상력에 풍부했습니다.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기 때문에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맞게 상상력을 동원하여 상황을 설정하고 내 나름대로 그 세계를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은 모든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에 상상력이 필요 없습니다.
텔레비전 시대를 사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 이유도 그런 영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귀로 듣는 훈련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뭔가 눈에 보여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꿈에 보여지는 것을 더 의존하게 됩니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을 보아야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혹 그렇지 않나 생각해 봅시다.
네 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인데 우리는 우레와 같은 음성을 들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절망에 빠져 있는 엘리야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온 땅을 뒤집어엎는 지진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고, 모든 것을 삼킬 것같은 맹렬한 불 속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중요 세미한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있는 고요한 자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만한 고요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하나님과 나만이 만나는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도를 할 때도 내 이야기만 쏟아놓고, 내 요구만 쏟아놓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틈도 주지 않고 뒤돌아 가버리는 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기도할 때도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고요한 중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거룩한 음성을 듣기 위한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은 '위엄을 울리는 음성이요, 그 음성을 들을 때에 번개 빛이 발하는 것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은 세미한 음성이지만, 그 음성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순간 그것은 우레와 같은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귀에는 세미한 음성이지만, 그 음성이 우리 마음에 들어간 후에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음성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음성, 우레와 같은 음성을 들으려 합니다. 그러니 그 음성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거룩한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음성이 우리를 영적인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이 기갈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리와 늑대에 의해서 유린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을 신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앙가족 모든 식구들은 늘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들으며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