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목회 : 21세시를 향한 한 대안
Ⅰ. 서 론
A.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 문명 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윤택해지는 반면 인간의 마음은 더욱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고, 인간의 정신문명 또한 병들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다. 이러한 역비례 현상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만남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인간의 정신적인 질병은 더욱더 가중되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질환은 육체의 질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우리는 점차로 자기 스스로를 치유되어야 할 대상으로 선정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교회의 치유목회에 대한 관심도가 날로 증대되고 있으며, 특히 20세기에 와서 주요교리 가운데 치유를 주장하는 다양한 분파와 이단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치유목회'란 의미는 주로 "신유", 또는 "능력행함"의 의미로서 많이 통용되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치유목회가 마치 목회의 전영역인양 인식되게 되었고, 그러한 오해로 인해서 여러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사례가 빈번해지게 되었다.
문제점으로 폴히비트는 체험에 바탕을 둔 신학, 자기 중심성, 진상과 소문의 혼동, 새로운 기독교적 마술, 세속주의의 강화, 불균형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 속에서 현대 교회의 목회는 좀더 신중해야만 한다. 오늘날 날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고독과 소외감으로 가득차 있는 현대인들의 고민을 일부 과학과 의학이 해결해주고 있긴하지만 영적, 정신적, 육체적 질병속에 깊이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영적인 차원과 정신적, 신체적 차원에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목회자는 인간의 질병과 치유에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목회활동에 있어서 치유는 중대한 비중을 차지한 사역이었다(마 9:35∼36). 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어 치유의 사역을 행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치유의 사역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인 것이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새로운 목회의 방향을 모색하며 고민하고 있으나 앞으로의 추구해야할 부분은 치유에 관심을 둔 목회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배, 설교, 교육, 심방 등 다양한 목회활들을 통해 병들고 신음하는 인간들의 전인적인 치유와 중병을 앓고 있는 창조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치유목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시고, 사도들에 의해서 전승되어온 치유사역을 오늘날 현대상황에 맞추어서 목회자들이 어떻게 적용해나갈 것인지를 말하고, 앞으로의 21세기를 향한 교회들이 추구해야 할 치유의 방안을 논하고자 한다.
B. 연구 범위와 방법
본 논문은 오늘날 현대의 위기적 상황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질병의 문제들을 우리가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이 문제들을 오늘날 현대교회가 어떻게 수행해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그 방향성을 설정하고, 전체적으로 교회내에서 행해지는 치유사역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고자 한다.
제 1 장은 서론으로서 본 논문의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그리고 연구범위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 2 장은 치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특히, 성경상에 나타난 치유의 내용들을 차례로 기술한 후, 신학적인 입장에서 치유의 의미를 살펴본다.
제 3 장은 교회사에 나타난 치유목회의 흐름을 고찰함으로써 치유목회의 역사적 맥락을 확인하고, 오늘날의 치유사역의 중요성을 가늠해 본다.
제 4 장은 오늘날 현대교회와 치유목회의 한 과제로서 치유의 대상인 인간을 이해하고, 앞으로 치유목회를 함에 있어서 수행해야 할 치유의 범위와 다양성에 대해서 짚어보고, 나아가 치유목회의 가능성에 대해서 살펴본다.
제 5 장은 결론으로서 전체의 중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21세기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통전적이며, 성서적인 치유목회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지시함으로서 본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Ⅱ. 치유에 대한 이해 - 치유란 무엇인가?
A. 일반적 의미의 치유
1. 질병에 대한 이해
질병이란 인간의 구성요소 예를 들면, 몸이나, 마음이나, 영 등의 부조화나 파편화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부조리를 포함시킨다. 포괄적으로 질병이란 신체적, 정신적, 영적 및 사회적 질서가 정상상태로 부터의 이탈된 상태를 의미한다. 환언하면 질병이란 자아와 인간과 환경과 신과 부조화를 이룬 상태이다.
질병의 원인에 관하여 보는 관점은 다양성을 띠고 있는데, 의학박사인 김춘원 교수는 병리학 교과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질병이 발생되는 원인을 연구하는 학문을 병리학(Pathology) 이라 한다. 사람이 한가지 질병에 걸렸을 경우 그 원인을 조사해 보면 2가지 이상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외적원인과 내적원인이 합하여졌을 때 질병이 발생되는 것이다."고 말한다.
이명수 박사는 질병의 원인을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들의 복합적 현상으로 보았으며, 네가지로 분류했는데 첫째는 유전적 요인으로서 알콜중독이나 마약상욕, 둘째로는 영양부족, 신진대사 및 내분비장해, 종양 등의 후천적 물리적 요인, 셋째로는 걱정, 불안, 외로움, 슬픔, 죄책감 등의 후천적 물리적 요인, 넷째로는 진리, 정의, 사랑의 결핍으로 오는 사회환경적 요인으로 분류했다.
투니어(Tournier)는 질병의 원인은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식이요법, 폭주, 과로, 도덕적 가책 등이 수년간 쌓여서 결국 자신의 존재 활력을 상실하게 됨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그는 이러한 근본 원인을 모두 일컬어 '개인문제'라고 표현한다. 게리 콜린스(Gary R. collins)는 질병의 원인으로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 병을 전염시키는 식물이나 동물과의 접촉, 영양이 적은 음식물, 운동이나 체력 관리의 부족, 상처, 유전적 결함, 해로운 물질의 섭취 등을 들고있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접근은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모든 질병은 같은 원인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질병은 개인적인 죄로 인해 발생할 수 있으며, 또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의 상처로 인해 발생한 병도 있으며, 사고나 질병의 원이 되어 생겨나는 병도 있으며, 귀신으로 말미암아 오는 병도 있다고 말한다.
질병의 원인을 성서에서 찾아보면 질병의 원인은 제일차적 원인으로, 영적요인인데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 '죄'로 부터 비롯된다(창 3:22-24, 롬 5:12, 6:23). 그러므로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영적인 삶의 손상과 타락으로 인해 여러 질병의 징조가 되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난 눈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출 4:11). 한번은 제자들이 소경으로 태어난 소녀를 보고 예수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하고 물었을 때, 주께서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고 대답하셨다(요 9:2-4).
셋째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욥기 1장에는 하나님쎄서 사탄에게 욥의 질병을 포함한 시련을 주도록 허용하신 사실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넷째로는 사탄이 질병의 원인 제공자에다. 피터 와그너는 사단이 사람들에게 질병과 고통을 가져오기 위해 직접 사단이 병을 유발시키거나, 박테리아, 바이러스, 영양실조, 사고, 싸움 등 인간 타락의 자연스런 결과들을 이용해 질병과 고통을 야기하며, 사람들을 유록하여 죄에 빠지게 해서 그 결과 하나님으로 부터 징계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윔버도 사단의 가장 강력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가 질병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살펴본것을 정리하면, 질병의 제일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곧 죄이다. 또한, 인간은 생리적, 정신적, 육체적 존재이므로 과학적인 객관성에 입각하여 물리적 요인, 정신적 요인도 고려해 보아야 하며, 각 요소중 한 요소가 영향을 받으면 다른 요소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평행이 파괴될 때 질병이 발생된다고 볼 수 있다.
2. 치유의 이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치유는 질병이나 사고 또는 선천적으로 발생한 육체의 비정상적이고 기능이 마비된 상태를 약품이나 그밖의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적인 관점에서 볼때는 그 방법론에서 기도나 안수 등의 특별한 방법이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인간의 파괴되고, 왜곡되어진 부조화속에서 발생한 질병은 영적인 상태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져야 하고, 그러한 의미에서 치유는 본래적인 온전함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터너(Turnur)는, 치유는 인간의 정신적 자아와 감정적 자아뿐 아니라 육체는 물론 영적인 본질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치유는 인간의 모든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또 주위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완전하게 성공적으로 기능하는 것이라고 본다.
투니어(Tournier)는 치유를 전인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치유란 몸, 정신, 영혼의 합일로 이루어지며, 치유와 구원은 연합된 상태라고 한다. 그는 엘롬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치유는 언제나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인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투니어는 진정한 치유란 단지 질병의 회복단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회복이후 계속적인 삶의 자세까지 연관시켜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자의 삶을 사는 것을 완전한 치유로 보고 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구원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치료이다. 다시 말하면 파괴되고 와해되어진 것을 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질병 자체보다는 질병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환자 내부의 내적인 책임과 환자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문제 그리고 질병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환자의 영적인 필요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심프슨(A. B. Simpson)은, "치유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간의 육체 속에 주입됨으로서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이며 육체의 연약하고 아픈 부분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교회의 치유목회에 오랜 세월동안 종사해 온 버나드 마틴(Bernard Martin)은 다음과 같이 치유를 정의했다.
"치유란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인격의 완전한 성숙을 저해하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을 파멸로 부터 보호해 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치유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치유에는 그 밖에도 그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그의 인격이 활짝 꽃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 그리고 그에게 삶의 활력을 되찾아 주는 것 등이 포함된다.
질병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완전한 인격을 추구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치유된 사람이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계발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한 사람을 말한다. 치유란 단순히 병들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조용기 목사는 치유사역을 크게 두가지로 분류해 놓고 있다. 첫째로는 기적적인 것으로 일순간에 질병이 떠나서 건강을 회복하는 것과 두번째로 병고치는 은사를 통하여 서서히 병의 근원이 제거되고 치유가 시작되는 신적 치유라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치유는 인간의 모든 영역 - 육체와 정신과 영 - 에 관련되어 있다. 또한 치유란 순간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과정'울 의미한다. 그리고 치유에는 항상 목적이 있는데 그것을 인간의 완전하고도 건강한 삶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존재로 성숙해 가는 일을 가능케 해 준다.
B. 치유의 신학적 의미
1. 구약성서에서의 치유 이해
구약성서에서 명사로 "치료"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두개가 있는데 (arukhah)와 (marpe)이다. 전자는 의사가 상처를 고치기 위하여 사용하는 "긴 붕대"라는 뜻도 있는데 예레미야 8장 22절, 30장 17절, 33장 6절에 사용되고 있다. 후자는 예레미야 14장 19절, 역대하 21장 18절에서 "치료", "고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외에 "원기회복"이란 뜻도 있는데, 잠언 4장 22절의 "그의 온 몸에 건강을 준다"와 12장 18절의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악이다."가 바로 이런 예이다.
동사로는 (halam - 회복케하다, 사38:16), (rapha), 그리고 명사 와 함께 (samah-치료하다, 사58:8)가 사용되고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사용의 빈도수가 많은 것은 인데 자세히 세분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상처를 고치다, 치료하다(창 22:17, 욥 5:18), 하나님이 치료하다,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다(대하 7:15, 시 30:3), 수선하다(렘 9:1), 위로하다(렘 8:11, 겔 34:4), 치료받다(레 13:37, 사 53:5), 자신이 고침받게 하다(왕하 8:29) 등이다.
구약성서에서 최초의 치유사역의 모델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가죽 옷을 입히시고 '네가 어데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들 수가 있다. 이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전인격적인 치유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영적으로 두려워하는 아담에 대한 사랑의 접근이고 벌거벗은 수치에 대한 가죽옷으로서의 치유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이고 이에 대한 치유 주체자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있다.
인간의 죄는 창 2:17에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씀 처럼 인간의 타락성으로 인한 현 인간의 실존은 계속해서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치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속에는 예방과 실제적인 치유의 문제를 계속 선포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의 치유는 대개 예언자나 혹은 제사장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에 의해 행해진 치유의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예방과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질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다.
첫째로, 예방적 측면이라 함은 신명기 23장 12-13절에서 하나님은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배설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됨을 가르치도록 하고 있으며, 레위기 13장 4절에서 제사장들을 통하여 문둥병, 매독, 흑사병을 살피고 그러한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여 개인적인 접촉을 금하게 한 일,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 남자 아이가 출생하면 반드시 할례 의식을 베풀도록 한 일(창 17:10), 그리고 잠언 23장 19-21절에서 솔로몬을 통해 술에 관하여 경고한 사실들을 말한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제사장이나 모세와 같은 지도자 혹은 특정한 사람들을 통하여 건강을 위한 예방법을 가르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둘째로, 치유적 측면은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치유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치유'하는 낱말이 사용되기는 창세기 20장 17-18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의 불임을 '치유'받아 생산케 한 일이다.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 구스 여인과 결혼 하였을때, 모세를 원망하여 그를 비방하던 미리암은 문둥병에 결렸고, 7일간 격리된 후 모세의 기도로 깨끗이 치유받았다.(민 12:1-15).
사울왕이 악신에 시달이며 괴로워할 때 다윗은 수금을 위하여 연주함으로 그를 치유하였다(삼상 16:14-23). 엘리야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은 것을 그가 거처한 다락에 가서 뉘이고 기도함으로 다시 살려 내었다(왕상 17:17-24). 히스기야는 자기가 병으로 곧 죽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병을 치유받고 생명의 연장을 받았다(왕상 20:1-11). 욥도 기도함으로 그의 악창이 나음을 입었다(욥 42:10).
이상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치유에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스럽거나 불확실한 점이 있을 수 없다.
볼프(Hans W. Wolff)는 " 하나님만이 질병과 치료의 주인이시다. 이것은 성서의 일관된 확신이며 구약성서는 자연적인 치료와 기적인 치료를 근본적으로 구별하지 않으며 인간의 처방과 응용이 서로 부합되거나 부합되지 않거나간에 본질적으로 일관된 사상이었다. 즉 환자는 자기의 병을 통하여 그리고 병이 나아가는 환자는 자기의 치료를 통하여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병과 치료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은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병을 떠나게도 하시고, 보내주기도 하신다(욥 5:18, 신 7:15). 비록 환자 자신이 깨닫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질병과 치료에 관련된 과정은 하나님의 활동과 결코 분리할 수 없었다. 환자가 하나님을 특별히 체험하는 데까지 이르러 그것을 일생동안 지속하는 것은 환자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하였다.
폰 라드(Gerhard von Rad)도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치유의 하나님으로 보고 있으며(출 15:26), 하나님의 호의를 불신하고 의사들의 충고를 받으면 불신앙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하였다(대하 16:12)고 주장하고, 하나님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욥 5:18, 시 30:3, 103:3, 왕하 12:8).
이와같은 내용을 통해 몇가지 내용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육체적 건강은 영적 상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둘째, 구약에서의 질병과 치유에는 하나님의 왕적권위와 밀접하다.
셋째, 구약에서의 질병과 치유는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이루어졌다.
넷째, 구약에서의 질병도 치유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아야 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을 상대하신 이유는 진노 아래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기 위한 선민으로서의 경륜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 구약성경에서의 치유사건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치유사역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재앙과 질병을 내리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했을 경우 건강을 허락해 주셨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육체적 건강 상태는 그들의 하나님과의 상태를 대변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성경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치유사건들은 족장시대와 율법시대 선지자 시대를 거쳐 포로시대까지 길게 나타나며 치유되었던 질병의 영역도 꽤나 넓었음을 알 수 있다.
2. 신약성서에서의 치유 이해
신약성서 안에서 " "과 " "가 "치유하다"라는 의미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은 헬라 세계 속에서 비종교적인 의미로 "섬기다", "기꺼이 돕다" 둥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 "(시중들다), " "(노예가 되어 섬기다), " "(자기 돈으로 공적인봉사를 하다)등과 매우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인역에서 은 "섬기다"라는 의미로 쓰여진다. 비종교적인 의미에서 뿐만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섬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치료하다"라는 의미도 가지는데 이 때의 치료는 의학적인, 육체적인 치료만이 아니라 영혼의 치료에도 해당된다.
의 특징은 봉사하고자 하는 자발적 의사를 표현하는데 있으며, 봉사하는 사람과 봉사를 받는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봉사는 의사들도 제공하기 때문에 은 병든 자들을 염려하여 돌보는 의학적 치료를 묘사라는 데에도 쓰여진다. 그러나 신약성서 안에서의 은 실패할 수도 있는 의학적 치료가 아니라 참된 치료를 묘사하고 있다.
1) 예수님의 치유사역
기독교의 치유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선포(kerygma)와 교육(didache)과 봉사(diakonia)라고 요약할 수가 있는데 이 중 봉사는 치유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켈시(Morton T. Kelsey)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복음서들의 거의 1/5이 예수의 치유 및 그것에 의해 유발된 논의들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이 기본적인 사역(치유)을 계속하게 하였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그의 가르침들에서 이웃에 대한 동정과 돌봄을 끊임없이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 확실하다.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치유 이적은 여러 방법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26건의 개인 치유와 15건의 집단 치유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사역은 광범위하고도 다양한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셨다. 마귀들린 자, 병든자, 사고난 자, 죽은 자까지도 살리셨다. 병을 고치실 때마다 그는 자신을 신앙의 신실한 대상이라는 것을 들어내고 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치유하셨던 병자들의 유형을 구분한다면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는 몸에 생기게 된 선천적인 또는 후천적인 질병을 고치신 것이다. 4복음서 가운데 이러한 치유사역은 적어도 16회 이상이나 소개되고 있다. 두번째로 6번 이상 소개되는 귀신들린 자의 치유이다. 여러 종류의 귀신으로 고통 당하는 어린이, 장년, 여자등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한결같이 치유하셨다. 세번째 마지막으로 죽은자를 치유하신 것이다. 복음서 가운데 3회정도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으로 예수께서는 생명과 영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직접 목격하게 된 후에야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그의 인간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는 인간을 단순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예수는 첫째로 인간을 피조물 중에 가장 소중한 존재로 보았으며, 둘째로 인간을 전인(全人)으로 보았다. 그리고 예수는 인간을 고통당하는 존재로 이해하였다. 인간이야말로 죄와 질병, 죽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존재이며, 이 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괴로워하고 고통 당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마 11:28-30).
예수께서 "질병과 죄"에 대해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한가지 이유는 그것들(질병과 죄)이 생겨나는 것은 사람들이 이질적인 영들에게 지배를 받기 때문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쫓아내는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랑으로 즉 아가페로 특징지워진다. 그러므로 그가 사랑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예수의 명령은 결코 단순한 "윤리적 격률(格率)"이 아니다. 그것은 치유적 의미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무엇보다도 그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구약에서부터 예언됐고 예수시대 모든 사람들이 고대했던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는 묵시문학에서 처럼 천재지변이나 우주적 대혼란과 함께 오는 것도 아니고 랍비들이 생각한 것처럼 철저한 토라의 실천속에서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는 도래한 하나님의 왕적통치를 구약의 예언자 정신에 서서(사 61:1-3, 시146:7)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으로, 병든자에게 복된 소식으로, 병든자에게 치유의 기쁨으로, 포로된자에게 자유로, 갇힌자에게 해방으로 선포하였다 (마 5:3 이하, 눅 4:16-21). 그래서 예수의 치유이적과 귀신축출 등의 이적은 그의 하나님의 왕적통치 선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확인 할 수있다. 예수는 자기 역사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왕국을 회복하여 새하늘과 새땅을 건설하는데 두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의 침입자인 질병에 대하여 분노하셔서 꾸짖고(눅 4:41), 우시고(요 11:35, 눅 19:41), 탄식(막 7:34, 요 11:33,38) 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의 치유사역에 대한 고찰로서 몇가지 구분을 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치유방법은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적으로 구분하면 첫째, 안수(Touch)이다. 병자들이 예수의 안수(손을 얹거나 손을 대심)를 통하여 치유받은 것이 성서에 종종 발견된다(마 8:31, 눅 13:13).
둘째, 안수는 없으시지만 말씀으로(Word) 고치신 경우이다. 몸의 접촉이 없었지만 예수께서 말씀 한마디로 치유하신 것이 나타난다(마 8:5, 8:19).
셋째, 같은 병인데도 다음에 고칠때에 다은 방법을 사용하신 것을 알수 있다. 누가복음 18장에서는 침을 바르시고 안수하여 치유하신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진흙을 침으로 이겨 눈에 발라주신 행동으로 치유하신 경우도 있다(요 9:6).
넷째로, 분석적인 대화의 힘을 통하여 치유하셨다.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과의 자랑스런 대화속에서 자신의 내면적 문제를 치유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요 4:7-30). 그러므로 예수의 치유의 방법속에서 어떤 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치유하시겠다는 의지가 더욱 중요하며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 그의 방법을 앞선다고 할 수있다.
2) 사도들의 치유사역
예수께서 지상 생활하시는 동안 수많은 병자를 고치실뿐 아니라, 제자들에게까지 능력을 주셔서 병을 고치게 하였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쫒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그 뿐아니라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자신의 모든 구원 사역을 교회에 위임하셨다. 초대교회의 역사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물론 성령께서 지휘권을 갖고 활동하시므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치유방법은 다양하였다. 명령에 의해서, 병고침을 행하는 사람의 그림자를 밟으므로, 병고치는 자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와같은 병고침의 목적은 대부분 사도들의 권위를 입증하면서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데 있었다. 기적같은 사건이 교회를 형성시키고 발전케 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의 특징을 보면 첫째로 치유는 초대교회의 일상적인 부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번째로는 초대교회는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증언하였다. 치유는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곤 하였다(행3:6,16, 19:11-13).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에는 언제나 성령이 임하셨으며, 사람들에게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줌은 물론 복음저도와 교회 성장의 계기가 되곤 하였다(행 2:43, 46-47; 3:8; 4:21; 5:14; 8:6-8). John Wimber는 초대교회가 성장하게 된 요인으로 치유, 축사, 죽은자의 부활, 돌연한 장소 이동, 자연이나 음식을 통한 기적등을 포함하는 표적과 기사들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은 예수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극적으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곤 하였다.
위와같은 고찰을 통해서 사도들의 치유도 단순히 병고침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한 방편으로서의 치유였으며 오히려 초대교회 후기로 오면서는 말씀과 찬양, 그리고 나눔, 즉 성찬의식, 복음 전도의 일에 힘 쓴 것을 알 수 있다. 치유사역을 병고침이나 능력 행함에 촛점을 맞추어 생각 한다면 마치 인간이 병고침의 주도자가 되어 성령을 조정하고 사람의 의도대로 할 수 있다는 오해에 빠질 수 있는데 사도들의 목회를 살펴 보면 병고치는 일이 하나의 은사로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은혜로 주어지는 일이며, 복음 사역을 이루어가는 한가지 방법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사역을 병고침의 사역에 국한 시키는 일은 오해의 소지가 많으며, 전인치유를 위한 치유목회의 차원의 한 방편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치유사역은 치유목회 안에서 행해지는 전인치유의 한 과정으로서 이해함이 마땅한 것이다.
Ⅲ. 치유의 역사
A. 교부시대
교부시대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교회를 인도하던 시대이다. 져스틴 마터에 의하면 기독교인들 중에서 성령의 역사가 여러가지 면에서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사람이 각양각색의 은사를 체험하였는데 그중에 치유의 은사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그는 치유의 은사를 중요한 은사로 생각하였으며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교부들에게도 중요한 영적 은사로 생각하고 있다.
192년 이레니우스(Irenaeus)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리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 또 어떤 이들은 병자에게 안수함으로 그 병자들을 고쳤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죽은 자들을 일으켰는데 그들이 여러해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주후 275년의 글에서 "그런고로 젊은 사역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금식과 기도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중보 역할을 하게 하고 세련되고 잘 정돈된 학문의 말로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또한 확실하게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써 사역을 하게 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오리겐은 이집트에서 태어나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의 평생은 기독교 서적을 집필하는데 바쳐졌다. 그의 저서「원리」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의 마음을 혼란케 하는 귀신을 쫒아내며 질병을 추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암브로스(Ambrose)는 밀란(Milan)의 감독인데, 그의 저서「성령」(The Holy Spirit)에서 치유(Healing)와 방언(Tongues)의 은사가 아직도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히포의 감독인 어거스틴(Augustine)은 그의 저서「성 어거스틴의 고백」이라는 책을 썼는데 제9권 7장 16절에 치유의 기적에 관한 글을 쓰고 있고,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이라는 그의 책에서 여러가지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고 목격한 것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제롬은 교회를 치유의 관심으로부터 떼놓으려는 노력을 했다. 제롬은 체유보다는 세례에 의한 성화와 죄의 용서를 강조하면서 치유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레고리 대교황도 치유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징계해서 교정하는 방법이지 결코 기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레고리 대교황이 사망한 후 아람 제국에 의해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쇠망하자 이런 해석은 더욱 강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추세에 따라 서방에서는 점차 치유에 대한 관심이 사후의 편안을기원하는 의식으로 기울어져 치유를 위한 안수가 사자를 위한 안수로 바뀌게 되기도 했다.
그외의 역사가들도 병고침에 대해 많은 기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이러한 신유의 은사가 계속 되어져 왔음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관심이 많이 가는 것도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살핌의 경우 단지 병고침의 기적에만 촛점을 둠으로 해서 기적이 왜 일어나야 했으며 그일로 인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섭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소홀해질 우려가 다분한 것이다. 여기에서 전체보다는 부분을 중시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오류를 범하는 실례가 적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유의 은사를 단지 기적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치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인치유의 차원에서 살핀 치유목회였다는 관점으로 이해할 때 통전적이고 무리가 없는 고찰이 이루어질 것이다. 과연 병고침이나 귀신을 내 쫒는 치유를 살피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할 때 본말이 전조된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B. 중세 카톨릭시대
치유의 사역의 맥은 중세 카톨릭 시대에도 이어져 내려왔다. 많은 사람들은 중세를 가리켜서 암흑시대(Darkness)라고 부른다. 그때에 카톨릭 교회가 서구 세계를 지배하였고 교회는 모든 삶의 중심지였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교회에 대하여 그의 치유의 사역을 계속해 오셨다.
그리스도교 치유사상에 영향을 끼친 초기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제롬(Jerome, 340-420 A.D)은 헬라어 성경에 나오는 '치유'라는 어휘를 라틴어의 '영원구원'을 의미하는 어휘 'Salvo'로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로인해 그리스도교 치유에 대한 부정적 사상이 16세기 종교개혁 이후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치유 사상은 11세기 이후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이 그리스도교 신학 사상의 발판을 이루면서 더욱 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 철학은 눈으로 확인하고 수적으로나 실험으로 결과를 얻어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진리요, 참지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 일부를 받아들여 중세기 최대의 신학 사상을 확립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이다. 아퀴나스는 중세 스콜라주의를 완성한 신학자이며 교황의 권위를 세운 사람이었는데 신유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은 보여주고 있지 않으나 귀신 추방과 기적들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신학에서 하나님은 체럼으로보다는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분으로 되어있다. 이들에게는 성령의 은사는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삶 속에 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이 지배하던 중세기 교회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치유는 자리를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C.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시대에도 하나님의 치유의 기적은 계속되었다. 다만 그러한 역사에 대해 강조가 약화되었을 뿐 결코 병고침이나 귀신 축출의 사역이 사라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루터(Martin Luther)는 초기에는 치유의 사역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치유의 체험을 함으로써 비로소 치유의 기적을 인정했다. 친구 멜랑히톤의 병을 기도함으로 체험 후에 인정한 것이다.
당시에 루터가 치유 사역을 부인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비성서적으로 치유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터무니 없이 비성서적인 것을 유포 시키는데 대한 강력한 반발에서 나타난 현성인 것이다.
존 칼빈(John Calvin)에게 있어서 치유사역은 회개하는 것에 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병고침의 은사활용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를 시사하는 목회활동의 범주로 여겼다고 본다. 칼빈이 치유목회를 강조하거나 논한 것은 보이지 않으나 그의 설교나 주석에서 영적치유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의 공관복음서 주석에서는 모든 질병이 하늘로 부터 오는 의약품으로만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칼빈은 다른 은사들과 함께 신유의 은사도 일시적인 것이지 계속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믿음으로 간구할 뿐이고 낫고 안낫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의존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존 칼빈은 치유 은사들은 복음 전파를 놀랍도록 하기 위하여 사도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말하기도 하였지만, 이것도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감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저서「기독교 강요」에서 로마교의 병자들이나 임종을 앞둔 자들이 성체를 받는 병자성사를 크게 반박하면서 기름을 붙는 행위는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도 친구 멜랑히톤의 죽음을 보고서 야고보서의 치유 사역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한 것처럼 보이고 칼빈에 있어서 치유 사역도 그 첫 걸음으로 보아 단순히 병고침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를 시사하는 목회 활동의 범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 주석을 보면은 그는 우리의 모든 질병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의약품으로만 효과적으로 치유된다고 믿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핵심적 견해는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구원의 자리로 이끄는 것을 온전한 치유로 이해하고 있다.
위와같은 종교개혁의 두 인물의 치유에 대한 견해를 살펴볼 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 온 정신을 기울이고 있었던 때인 만큼 신유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병고침이나 기적에 얽매여서 그것만을 절대시 하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유행되고 있는 치병만 부각되고 있는 치유사역도 이러한 입장에서 점검할 여지가 있다고 보여지며, 기적적인 치유자체가 단순히 의료적인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약함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목적이 있고 전인체유를 지향한 방편이라는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D. 종교개혁 이후 시대
16세기 종교 개혁과 더불어 수학, 물리학, 철학 및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론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런 이론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에 근거를 두는 것들이기에 그리스도교 치유가 자리잡을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었다. 16, 17세기를 거쳐 과학과 지성을 존중하는 시대로 가면서 이성적 사고를 강조하게 되었고 이성과 논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18세기에 등장한 역사 성서 비평학은 복음서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이들 역시 합리주의적 철학 사상의 소유자로서 신약 성서에 나오는 치유 기사들은 조작된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주의 성서 비평운동이 일기 시작했지만 이들 역시 합리주의적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기에 성서의 치유를 저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고든(A.J. Gordon)은 말하기를 왈드파(Waldeness), 모라비안 교도들(Moravians), 유그노들(Huguenotes), 카버넌트들(Covernents), 친구파(Friends), 감리교도들(Methodists) 등 많은 개신교 단체들이 그들대로의 치유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초창기의 영국이나 미국의 침례교에서도 치유사역이 있었으며 진젠둘프의 모임에서도 치유의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좀 더 정확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했던 청교도들은 영적치유에 치중하였다. 영적치유를 위한 주된 노력은 설교 사역이었으며, 심방과 상담을 중요시 하였다.
그들은 영적치유의 방법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청교도들의 치유사역은 여러가지 질병들에 복합적으로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목회에 있어서 치유를 병을 고치는 일에 제한 시켜 버린다면 큰 오류가 생긴다는 역사적 지혜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Wesley는 많은 하나님의 기적들을 증거하였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자신의 일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일례를 든다면 차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두통이 심했고 잠든 상태와 같았다 한다. 이 문제를 놓고 그는 기도할 떄 조금도 불편함이 없어졌다고 자신의 경험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치유를 현실적으로 믿고 적용하고 가르친 사람이었다.
Blumhardt는 초기 교회 이후 기적들이 사라진 주요한 이유를 인격적 성령이 부재 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는 승리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목회에 전념하였다. 당시 26세인 디투스라는 여인이 알 수 없는 으로 인하여 마비와 발작증세를 일으키며 상태는 악화되자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그녀가 완전 치유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이것을 시발점으로 각성운동을 전개하였다.
E. 20세기 치유사역의 흐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성령의 역사는 가시적인 현상으로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더욱 기적적인 체험들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치유사역, 또는 치유목회, 능력목회 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많은 신학적 논란을 거치고 있다.
1. 제 1의 물결- 오순절 운동
미국에서 시작된 현대 오순절 운동은 찰스파함(Charles Parham)목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감리교 목사로써 1900년에 미국 캔자스주 토페카 시에서 성경학교를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기독교 신앙체험을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1) 기본신학
오순절 운동의 기본신학은 치유를 통한 속죄와 병자의 믿음을 강조한다.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병의 원인을 대부분 사단의 역사로 본다. 성령세례의 방언을 특히 강조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비치기도 하였으며 이로인한 무리가 많았다. 그럼에도 20세기에 들어와서 오순절 운동은 전세계로 확산에 진전을 보여 주었다.
2) 방법론
방법론에 있어서는 치유부흥회나 목회자를 통하여 치유가 되며 기본적인 치유 방법은 지식의 말씀, 안수기도, 중보기도, 금식기도 등이다. 병자의 믿음을 강조하고 감정적인 표현들에 관심이 많다. 대부분 예배의 분위기가 요란스러우며, 기도도 통성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중적인 광고 전략을 중요시 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상당히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흠이 될 것은 없다고 본다.
3) 사역의 범위
20세기 치유의 사역을 열어 큰 성장을 가져 왔으며 저소득층에 집중 전도한다. 치유부흥사들의 생활이 본이 되지 못함으로 해서 치유사역을 거절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자신의 경험만을 생각함으로서 윤리적, 신학적인 면을 소홀히 했기 때문일 것이다.
4) 한국에서의 제 1의 물결
한국에서의 제 1의 성령의 물결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볼 수 있다. 성령께서 충만히 임함은 미국의 오순절 운동과 비슷하나 다른점은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성령운동은 큰 회개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령 운동은 1950년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를 통해 일어났으며 회개운동과 치유의 역사도 많이 일어났다.
2. 제 2의 물결 - 은사운동
1960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벤 나이스 성마가 성공회 교회의 목사 데이빗 바넬(David Bannet)신부가 예배 도중에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5개월 전에 자기가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을 고백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와 방언이 은사를 강조하지만 방언이 성령세례의 필수조건이라는 오순절 운동 보다는 부드러운 입장을 취한다. 공중예배에서의 방언도 절제를 요구하며 방언을 받은 후에도 자기의 교단에서 계속 활동한다. 은사운동에 속한 사람들은 오순절운동의 사람들 보다는 개방적이다. 아마도 은사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카롤릭 계통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특히 알코홀 음료수, 영화관 출입, 끽연, 유홍 같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화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점이 보수적인 교단이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히해하지 못할 문제가 되고 있다.
1) 기본신학
은사주의에서 말하는 치유는 구원의 한 부분이며 통전적인 치유를 강조한다. 기본치유 방법으로 종유, 교회성사, 성찬, 세례, 결혼 등을 간조하며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2) 방법론
치유는 훈련된 개인이나 팀 사역을 통해 하며 치유수련회, 특별집회, 교회와 가정에서 한다. 기도를 강조하며 지식의 말씀, 안수 등을 통해 치유한다. 오순절 운동과 정확한 구분은 쉽지 않으나, 오순절 운동이 동적이라면 그에 비해 덜 동적이다.
3) 한국에서의 제 2의 물결
한국 개신교에 은사운동이 끼친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 세계적인 은사 운동자들이 카톨릭을 통해 내한 했지만 별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형테의 예배, 생동감 있는 음악, 소그릅 활동, 제자훈련, 기독교 공동체 형성, 기도, 성경공부, 명상, 금식 등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은사운동은 신오순절운동이라고도 불리운다.
3. 제 3의 물결
제 3의 물결의 태동자는 존 윔버이며, 제 3의 물결이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 교수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제 3의 물결은 성령세례보다는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성령세례는 거듭날 때 단 한 번 경험하는 것으로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방언은 영적인 은사이다. 하나님이 주신 27가지의 은사 중 하나라고 와그너는 생각한다. 방언은 성령충만한 자들에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1) 기본신학
그들은 하나님의 신학을 강조하며 표적과 기사를 통한 능력전도, 능력치유를 강조한다. 성령충만의 목적을 전도의 목적으로 보며, 교회 분열을 조작하지 않는다. 전인치유와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다. 특정인이 아닌 어느 누구나 치유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치유가 일어나는 특별한 방식이나 의식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그분께 처방전을 써 들릴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운동의 문제되는 교리를 보안한 것이다.
2) 방법론
윔버는 치유사역의 과정을 5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상담, 진단을 통한 결정, 기도 방법의 선택, 기도를 행함, 기도후의 지도 등이다. 이를 통해보면 치유의 단계가 상당히 논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유되어야 할 내용에 대한 진단이라든지, 기도후의 처리등에도 관심을 쏟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 사역 자체이다. 이러한 운동들이 전형적인 신학적 전환을 꾀함에도 계속 노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지나친 치병에 대한 강조이다.
3) 한국에서의 제3의 물결
미국에서의 제 3의 물결은 복음주의적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종교개혁 사상과 개혁주의 신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한국에서 이 물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이나 세분하면 개혁주의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전인치유를 강조한다. 제 3의 물결에 대한 깊은 고찰은 좀더 시간을 두고 진행 시켜야 할 것이다. 아직은 시작의 단계인 것으로 보이나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이 보여준 신학적, 윤리적 약점을 많이 보완한 운동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는 상당한 호응이 기대 되지만 운동으로 그칠 위험이 있고, 일반적인 목회 방법과 큰 차이를 얼마나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는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Ⅳ. 현대 교회와 치유 목회의 과제
A. 치유의 대상인 인간이해
1. 전인적인 인간이해
전인적인 인간이해는 치유사역을 목표로 하는 목회상담을 위하여 중요한 위치일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질문이다. 전인적인 인간이해에서 전인(Whole Person)이라는 개념에 대해 올포트(Gordon W. Allport)는 '성숙한 사람의 가치관'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인간의 실존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프랭클(Viktor E. Frankl)은 "육체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차원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상호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올포트의 인간이해
올포트는 인간의 종교적 동기이론을 통해서 성숙한 가치관에 대해 전체적 또는 전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성인의 동기는 어린시절의 동기가 연장되었거나 더 잘 다듬어진 것은 아니고, 어린 시절의 동기의 기능적 자율화라고 하였다.
올포드가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성격을 이해하게 된 배경에는, 1920년 여름에 프로이드를 만난 이후 정신분석학의 근본인 무의식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기 시작한데에 있다. 여기에서 올포트는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을 그 어떤 알지 못하는 암담한 일들을 캐내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바깥 모양 또는 인간의 의식, 동기 등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더욱 의미있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올포트는 "인성이란 개인의 내부에 있는 그의 특징적인 행동과 사고를 결정하여 주는 정신. 물리적 체계로서의 역동적인 조직체"하고 정의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인성의 정의와 함꼐 중요한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데, 그 개념의 하나가 "프로프리움(proprium)"이다. 올프트는 이 프로프리움을 '느끼고 인지된 나'라고 언급하고, 이 프로프리움에 대해 발달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성격의 이해를 돕고 있다.
첫째, 이 프로프리움에는 신체적 감각, 자아 정체감, 자아 행상성, 합리적인 동인, 자아상 인식 및 통일성 추구 등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 요소들이 개인안에 있는 인성의 내적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러한 통일성의 실현 기능은 두 세살 떄 작용하기 시작하며, 이와 함께 성격의 발달이 시작된다고 한다.
둘째, 이 프로프리움은 출생후 3년간에는 신체적 자신감, 자기 동일성, 자기 존중감이나 자부심을 4살에서 6상 사이에는 이성과 사고에 의해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기 의식성을 발전시키고, 청년기 동안에는 의도, 장기적 목적과 원형목표가 출현하도록 작용한다는 것이다.
셋째, 이 프로프리움은 자기 혹은 고유자아의 일곱단계를 통해, 유아시절부터 사춘기까지 발달하고, 모든 발달의 양상이 완전히 나타날 때, 프로프리움리라는 하나님의 개념으로 단일화 된는데, 이 프로프리움은 이러한 자아의 일곱 양상들의 복합체라는 것이다. 올포트는 이 프로프리움의 출현은 건강한 성격의 필요조건이라고 한다.
올포트는 인성의 발달에 이르는 또 다른 핵심적 요소의 하나로 "기는적 자율성"이라고 일컫는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인생이 자주적으로 새 창조할 수 있는 행동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슐츠는 이러한 올포트의 이론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자기 정체감을 형성하는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라고 언급하면서, 이것은 "나는 내가 되고자 추구하는 것이다"라고 부연하고 있다.
올포트의 이러한 인간이해는 국극적으로 인간의 심리적 욕구에 대하여 자기 정체감을 형성하고 있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심리적 욕구는 인간이 어떠한 소망에 촛점을 두고, 성취보다는 그것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이고, 또한 성공보다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2) 프랭클의 인간이해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극소수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프랭클은 이 떄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인간 존재를 위해 의미에의 의지를 중요시 하는 의미치료라는 이론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 의미치료에서 추론한 인간의 본성 이론을 "의지의 자유", "의미에의 의지" 그리고 "삶의 의미"라는 세기둥 위에 세뤄져 있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각자가 자아를 초월하여 자기의 삶에서 발견하여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프랭클의 이론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심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여기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욕구를 "쾌락을 지향하는 의지"라고 보며, 프로이드를 어느정도 계승한 아들러의 기본경향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프랭클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의 자세는 "의미에의 의지"라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인간이해에 접근하고 있다.
첫째, 프랭틀에 의하면, 프로이드는 인간을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 즉 본능적인 인간으로 보았고, 아들러는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은 이 두 가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으나 긍정적으로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의미(logos)"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이 의미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모든 것은 의미가 있으며 책임, 사랑, 노동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고통과 죽음에도 그것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인간의 승화된 동물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억압된 천사를 그 속에 숨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영성의 인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인데, 그는 인간 실존에는 적어도 세가지 차원이 구별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유기체적 혹은 신체적 차원, 정신적 혹은 심리적 차원, 그리고 이성 혹은 영적인 차원이라고 말한다.
셋째, 플랭클은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동물은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인 욕망 그 자체이나, 인간은 다만 이것(영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근본 차원이 영성임을 밝히고 있다.
넷째, 프랭클은 이러한 영성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본질적으로 무의식이며 무의식적인 것이므로 객관화되거나 분석될 수 없다" 고 영혼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 무의식이란 바로 영적 무의식이며, 영적 무의식이란 말은 본능적 무의식과 대비되는 말이고, 이 "영적 무의식 안에서 우리는 경험적을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발견되고, 처음에는 자아 의식에 직접 나타나며 그 다음에는 인간의 사고능력과 상징적인 언어적 재능에 나타나는데, 이 영성으로 인간은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사물과 인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프랭클에 의하여 이성으로 표현된 영적인 차원은 사람의 결정하는 자유와 책임적인 자아로서의 국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영적 차원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성을 의하여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이며 자아를 넘어가는 존재임을 '인간의 실존' 안에서 가장 완전히 풀어 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초원적인 존재는, 인간이 자기실현을 목표로 했을 때 그 목표에 달성될 수 없고, 자기 초월을 할 때 부차적인 것으로 달성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실존심리학으로 인간의 의미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또는 전인적으로 이해에 접근하는 프랭클의 인간이해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플랭클의 인간이해는 왜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 경험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의미를 말하고, 자아를 초월하여 인간의 존재를 말하는 실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존재에 대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2. 성장심리적 인간이해
성장심리학에서의 인간이해에 대하여 슐츠(Duane Schultz)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생황을 풍요롭게 해주는 건강한 성격에 관하여 이론적인 정당성이나 그 모형을 제시하여 보고자 하는 시도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특성을 가진 존재인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현대심리학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또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성장 심리학분야에서 대표적으로(Abraham H. Maslow), 에릭슨(Erik E. Erikson), 로저스(Carl R. Rogers)의 이론에 대해서 살펴본다.
1) 머슬로우의 인간이해
머슬로우는 애부분의 인간행동은 그의 이성과 자유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입자에서 인간의 합리성과 자율성의 역할을 믿고, 인간의 고급 본능 또는 욕구로 자아실현을 강조하면서, 이에 따라 그의 인성 이론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머슬로우는 이러한 인성 이론을 전개하는 가운데 유기적인 접근을 하면서 전체적- 역동적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뒤에 심리학계에서 인간주의 또는 인본주의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
머슬로우에 따르면, 인본주의 심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관점중의 하나는 각 개인을 유일하면서도 통합된 전체로서 연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학파는 인성의 결정은 3세부터 5세 이내에 확정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 인성의 변경 또는 발전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견해를 계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장, 발전, 자아실현, 전인적 완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결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본주의 학파에서 대표주자인 머슬로우는 인간의 본성을 고정적인것이나 성장 불가능하다고 보는 비판적인 인간론을 지적하면서, 아울러 과도한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전인성과 본성이라는 기본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각각의 분리된 사건으로만 보는 전통적 분석에 치우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머슬로우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성장 동기 이론 또는 초동기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동기는 그들에게 인격의 상징이며, 표현이고 성숙, 그리고 발달이라고 하는데, 그는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자아실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은 하급동기에서 점진적으로 고급동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계적인 성정 또는 발달에 대하여 머슬로우는 자아실현을 향한 성정동기에서 발달의 측면에 해하여 아동, 청년, 그리고 장년기의 연령별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첫째, 아동기를 관찰해 보면, 건강한 아동은 계속 성장하며 활동하고 다니며 새로운 기술과 능력, 힘을 습득하는 것에 매우 즐거움을 느낀다고 언급하고 있다. 머슬로우는 아동에게 가혹하게 지배적으로 대하거나 통제하는 것과 지나친 자유의 허용은 해롭다고 말하고, 가장 효과적인 아동양육방법은 통제와 자유의 적합한 혼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동이 아동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 후에 자아실현에 지극히 중대하다고 한다.
둘째, 청년기에 대하여 머슬로우는 젊은이들은 정체감이나 자율감이 아직 강력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은 아직 충분히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갖지 못했고, 자시이 헌신하고자 하는 사명을 발견하지 못했고, 자치관이나 인내심, 용기와 지혜를 발달시키지 못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완전히 자아를 실현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심리적인 성숙과 건강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툭성들, 즉 자아실현으로 향한 훌륭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은 가능하다는 점을 발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셋째, 중년기에 대하여 머슬로우는 자아실현자는 중년이나 그 이상에 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아실현하는 사람의 일반적 특성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차례로 충족시킨 바가 있으므로, 자기들의 능력과 특질을 최고 상태까지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수행하고 성숙하는 건강한 인간의 본보기로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술한 바와 같이 머슬로우의 인간이해에 관한 이론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성장, 성숙, 또는 발달의 동기에 관해 전인성을 향한 자아실현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측면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에릭슨의 인간이해
에릭슨은 인간의 이해를 위하여 성장의 단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자아형성과 발달, 그리고 발달과정에서 만나는 위기를 극복하므로서 이루어지는 성숙한 인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에릭슨의 이론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성격이론에서 비롯되고 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비합리적인 힘, 무의식적인 동기, 생리적인 본능적 욕구와 필요 등이 태어나서 5년간의 경험들에 의하여 성격이 결정되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에릭슨은 프로이드와는 달리 리비도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자아형성과 발달을 강조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자아가 발달하는데에는 프로이드가 말하는 성적 에너지의 역할이 크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자아나름의 발달계획이고 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에릭슨은 그의 저서인「아동기와 사회」에서 인간의 발달을 여덟 단계로 나누고, 인간과 사회간에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일반적인 접촉을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여덟 단계 발달이론은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1) 환상기 (기본적 신뢰 대 기본적 불신: 생후 1년) : 프로이드의 심리 성적 단계에 의하면 구순기로서, 엄마의 젖을 빨면서 식욕과 쾌락의 욕구를 만족하며, 이 시기는 기본적인 양육을 필요로 하지만 후에는 탐욕과 획득욕이 발달하는데, 구순기의 고착은 구순 만족의 박탈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릭슨에 의하면, 이 시기에 중요한 타인이 기본적인 신체적,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신뢰감이 발달하지만, 만약 기본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불신의 태도가 발달하면서, 특히 인간관계에서 장애가 생기므로, 이 시기의 기본 과제는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세계에 대한 신뢰를 발달시키는 것이며, 이 신뢰감은 보호받고 사랑받는 데서 학습된다고 한다.
(2) 아동초기 (자율성 대 수치심과 회의 : 1-3세) : 프로이드의 심리. 성적 단계에 의하면 항문기로서, 항문대가 성격형성에 중요성을 갖으며, 주요한 발달과제는 독립성의 학습과 개인적인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로서, 분노와 적개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학습 등, 부모의 훈련 모형과 태도가 아동의 성격발달에 대해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고 한다. 그러나 에릭슨에 의하면, 이 단계는 자율성을 발달시키는 시기로서, 기본 갈등은 자신의 신뢰감과 회의감에 있으며, 아동은 탐색하고 경험하며 실수하고 한계를 점검하지만, 부모가 의존심을 촉진시키면 자율성은 금지되고 세상을 성공적으로 다루는 능력이 장애를 받는다고 한다.
(3) 학령전기 (주도성 대 죄의식 : 3-5세) : 프로이드의 심리. 성적 단계에 따르면 남근기로서, 기본 갈등은 무의식적인 근친상간적 욕구에 따라 반대편 성의 부모를 좋아하는 감정 때문에 위협을 느껴서 억압되는데, 언어적, 비언어적으로 아동의 성욕에 대해 부모가 반응하는 방법이 후에 외적태도와 감정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에릭슨에 의하면 이 단계는 능력과 구조성의 감각을 성취하는 것을 기본 과제로 하며 아동에게 의미있는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면 그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갖게 되고 과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만약 자신의 결정을 할 자유가 허용되지 않으면 주도권을 잡는데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선택해 주기를 바란다고 한다.
(4) 학령기 (근면성 대 열등감 : 5-12세) : 프로이드의 심리. 성적 단계에 따르면 잠복기로서, 전 단계의 성적 충동의 고통이 지나고 이 단계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이며, 성적 관심은 사회적 관심, 놀이집단, 운동, 기타 새로운 활동으로 대치되는데, 이 시기는 아동이 외부세계로 눈을 돌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에릭슨에 의하면, 이 시기에 아동은 외부세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성격을 발달시키며 학교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학습하는데, 이 단계의 기본 과제는 근면성을 획득하는 것이며, 이것에 실패하면 그 결과로 열등감의 위기가 생긴다고 한다.
(5) 청소년기 (정체감 대 역할 혼란 : 12-18세) : 프로이드의 심리. 성적 단계에 의하면 성기기로서, 이 단계는 과거의 남근기의 문제가 다시 재생되어 사춘기에서 시작되어 노년기까지 계속되며, 사회적 규제나 금기는 있지만 청소년들은 친구들과의 사귐, 예술, 운동, 직업준비 등 사회적으로 인정된 활동에 자신의 에너지를 투자함으로써 정욕을 처리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에릭슨에 의하면 이 단계는 아동기와 성인기의 과도기이며, 의존적인 끈을 풀기 위해, 자신의 정체감을 형성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데, 이 시기의 주요 갈등은 자아정체감, 인생목표, 인생의 의미를 명료화시키는 것이지만, 정체감의 확립이 실패하면 역할의 혼란이 생긴다고 한다.
(6) 성인초기 (친밀감 대 고립감 : 18-35세) : 에릭슨에 의하면, 이 시기의 발달과제는 친근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인데, 이러한 친근감이 실패하면 이 단계의 위기는 소외와 고립의 상태를 맞이 하게 되는데, 이는 친밀감과 관련되는 이는 친밀감과 관련되는 접촉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한다.
(7) 중년기 (생산성 대 침체성 : 35-60세) : 에릭슨에 의하면, 이 시기는 자신과 가족에 대한 욕구를 넘어서 다음 세대를 도우려고 하며, 자신의 꿈과 현실적인 성취 사이의 불일치를 조정하는 시기이므로 생산적인 의식을 얻는데 실패하면 심리적인 침체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8) 노년기 (자아통합 대 절망 : 60세 이상) : 에릭슨에 의하면 이 시기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개인적인 가치감, 자아 정체감을 느끼는데, 정체감의 확립을 느끼지 못하면 절망감, 무력함, 죄의식, 분노, 자기거부감을 갖게 된다고 한다.
3) 로저스의 인간이해
로저스의 인간이해는 일반적으로 "자아이론", "현상학적 이론", "실현이론" 이라고 불리운다. 이러한 명칭은 모두 그의 사상의 중요한 어떤 측면을 강조한 것인데, 로저스의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는 정서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치료한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다.
로저스는 인간본질의 가장 깊숙한 핵심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이며, 전진적이고, 건설적이며, 현실적이고 아주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로저스는 인간이 때때로 비정한 살인의 감정, 비정상적인 충동, 기묘하고도 반사회적인 행동을 표출하는 점을 동의했으나 인간이 그들의 진실된 내부의 본성에서 우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인간본성의 가장 깊은 내부는 본질상 긍정적이며, 근본적으로 사회화되어 있으며, 진취적이고 합리적이며 현실적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인간본성에 대하여 상담과정에서 얻은 이해한 바를 언급하기를 "내담자가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그리고 무슨 문제가 결정적인 것인지, 어떤 경험이 깊게 감추어져 있는지를 알고 있다"하였다.
로저스의 인간이해에 대한접근은 비지시적 상담방법으로, 그가 창시한 치료적 접근인 소위 내담자 중심 또는 인간 중심의 치료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적 감정들을 탐색하고, 충분한 자기인식에 기초하여서 삶을 선택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로저스의 인간이해를 목회상담의 과정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장과 발달 그리고 전인성에 대하여 기준을 세우고 접근함으로써, 성숙한 자아실현을 향해 독려하는 방향으로 목회상담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B. 치유목회의 범위와 방법
현 시대는 과학의 발달과 물질적인 풍요로 말미암아 외적인 생활의 넉넉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영적, 정신적 상황은 큰 방황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례에 따른 다양한 목회처방이 요청되고 있다. 더구나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의 유리로 인한 갈등도 해소해야 하는 얽혀있는 시대가 예상되는바, 목회도 거기에 합당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성서로 돌아가야 하며, 또한 성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꼐서 보여주신 목회방법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1. 치유목회의 범위
1) 예배의 갱신을 통한 치유목회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신앙행위이다. 예배없는 기독교는 있을수 없다. 예배가 성서적으로 회복되어야 하며 바른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즉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경배가 있어야 하지만 아울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재의 체험이 곧 치유이며, 이것이 곧 치유목회의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예배에는 말씀, 기도, 찬양, 성례전을 포함시킬 수 있다.
말씀을 통한 치유목회는 가장 우선해야 할 치유목회 방법이다. 고난과 연약함 중에 있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들을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래서 순교가 가능한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는 치유사역을 감당해 온 사람들에 의해 많이 연구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로 이름이 나 있지만 경제가 좋아지면서 기도에 대한 열정이 식어져서는 아니될 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특정인의 안수 기도에 매이기 보다는 스스로의 기도훈련이 중요하다. 이는 제3의 물결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와도 상통하는 것이지만 특별한 기도와 함께 오히려 지속적인 기도가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찬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과 함께 위험 요소도 내재되어 있음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찬양을 통한 치유는 청소년들이나 젊은 층에 효과를 보고 있으며 이를 신학적 뒷받침과 함께 잘 다스려 나감이 중요하다고 본다. 특히 찬양에는 문화적 요소의 배려가 중요하다. 우리의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더 큰 연구가 있어야 하리라고 판단된다.
성례전에 대한 관심은 통전적인 치유목회의 관점과 21세기를 향한다는 인식에서는 크게 주의를 요하는 영역이다. 성례전이 치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개신교가 무관심해 온것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의미에서, 또는 성례전이 갖는 의미나 구속적 성격, 이를테면 세례와 성만찬이 갖는 죄 용서,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수여, 교회의 소속, 구원의 은사, 유월절적 의미, 은혜의 방편, 구원의 확신과 현재성 등을 감안할 때 치유 목회적 차원에서 대단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2) 공동체성 확립을 통한 치유목회
미래학자들은 인류가 고독과 소외에 고통을 당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조짐은 이미 현실로 다가와 있다. 고독과 소외는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되찾을때 치유될 수 있다. 여기에는 나눔의 행사와 봉사의 기회를 부여하고 거기에서 참그리스도인들의 기쁨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특히 외로움의 문제를 더해가고 있는 노인들과 소가족 제도로 인한 아이들의 소외를 교회는 치유목회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주로 이러한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힘없고 갈 곳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라는데 더 큰 배려가 요청되는 것이다. 즉 소속감을 갖고 보람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치유목회의 중요한 관심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3) 은사운동 - 협력목회를 통한 치유목회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명을 부여해 주신 은총이다. 은사는 다양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이에 대한 개발이 현대교회에서는 더욱 관심을 끌게 하는 영역이다. 이미 목회자만의 노력만으로는 다양한 고민과 갈등 속에 있는 현대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엔 역부족이다. 요즈음은 평신도 목회라는 말도 등장하고 있지만 여러가지 다양한 은사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과 연합된 목회가 연구 , 추진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신유의 은사가 거론 될 것이며, 거기에 따른 찬양, 교육, 의료, 상담, 레크레이션을 통하여 다양한 치유방법이 논의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목회자가 다 담담할 수는 없으며 적재적소에 은사가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훌륭한 목회 지도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협력목회는 더울 적극적으로 연구, 추진되어야 할 영역이라고 판단된다.
4) 선교활동을 통한 치유목회
선교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다.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의 빚을 지고 있다. 선교를 통해 얻는 기쁨과 만족은 치유목회의 중요한 영역이다. 그러나 돈 만으로 해외 선교사를 돕는 수준에서는 치유목회 차원에서는 미흡하다. 개개인의 직접적인 전도를 통한 기쁨이 있을 때 치유목회는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대단히 적극적인 치유목회 방법이 될 것이다. 선교가 없는 목회를 생각할 수 없듯이 신앙의 침체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전도인 것이다. 이는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의 순종이며, 이러한 순종이 엄청난 치유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5) 예방교육을 통한 치유목회
치유사역 중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모든 병을 귀신의 장난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실수와 관리의 잘못까지도 귀신의 역사로 보는 것으로 인해 많은 헛점이 야기되고, 물의를 빚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전례적인 샤마니즘의 영향이 큰 것이며, 확실치 않은 풍문에 의한 내용들이 많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건강에 대한 예방적 교육이 요청된다. 이를테면, 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학적, 신학적 이해라든가, 건강관리문제, 그리고 음식과 운동에 대한 관심을 통해 병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목회적 차원에서 교육시켜야 된다고 본다. 그럴때 병과 치유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으며 바람직한 치유목회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2. 치유의 방법
1) 일반치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지으진 만물들이 질서있고 조화있게 운행되어지도록 필요한 법칙들을 만들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생활하게 되면 반드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아이들아 내 가르침을 잊지말고, 내 계명을
네 마음에 간직하여라. 그러면 그것들이 너를
장수하게 하며, 해가 갈수록 더욱 평안을 누리
게 할 것이다." (잠 3:1-2)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보전하시기 위해 여러가지 법칙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는데 이것이 곧 일반 치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건강과 치유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들을 폭넓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특별치유
하나님께서 일반법칙을 초워하여 특별한 섭리와 방법으로 치유하여 주시는 것을 일컬어서 특별치유라고 할 수있다. 예수는 특별치유를 성서에서 수없이 나타내 보여 주셨다. 그리고 초대교회 때에도 사도들을 통하여 치유가 많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치유가 필요한 곳에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유의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 여기서는 치유를 위한 영적이고도 초자연적인 방법으로서의 특별치유에 대해서 목회자의 치유사역과 관련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1) 기도를 통한 치유
기도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바운즈(E. M. Bounds)는 기도를 정의하기를 "기도란 하나님의 현존을 나의 현존으로 인식하여 그 분에게 나의 모든 필요를 요구하고 그 요구가 충족되면 충족된 것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사업을 위하여 투자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열망이다."고 했다.
힐트너(S. Hiltner)는 "성도 자신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고 그것에 주의하면 뚜렷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보다도 더욱 큰 힘이 되어 그의 곁에 서서 싸워 주셨고 현재도 싸우고 계시며 앞으로도 싸워 주실 것을 믿을 때 영적으로 육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프란시스 맥너트(Francis S. MacNutt)는 치유기도와 현대의학을 대립시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기도를 통하여 직접 치유를 행하시며, 때로는 육체를 괴롭히는 질병을 아는 의사의 도움으로 자연적으로 치유되오록 인도하기도 한다.
맥너트는 기도를 통한 치유는 어떤 때는 즉각적으로, 어떤 경우에는 점차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그의 경험으로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병 떄문에 기도한 사람들 중 3/4 정도는 완전히 치유를 받거나 또는 현저한 양상을 경험하였다고 추산하였다.
존 터너(John Turner)는 "기도는 하나님이 치유의 에너지를 내어 보낼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채우는 것이다. 기도로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잘 통할수 있도록 통로를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는 방법으로서는 일대 일로 개인적 기도를 할 수 있으나 몇 사람이 그룹을 만들어 동료들이 환자를 위해서 서로 기도할 수 있으며 설교, 찬양을 결합시키는 방법이 좋다고 하였다. 맥너트는 그룹 기도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2) 명상을 통한 치유
투르니에는 영적 치유 방법으로서 명상을 중시했으며 자신도 매일 아침 명사을 했고, 명상한 것을 기록해 두며 그날 그날의 생활을 했다. 투르니에는 명상을 통하여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고, 하나님과도 교제하며 대화하는 방법이 곧 명사을 통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투르니에는 명상은 꿈과도 다른 것이요, 비논리적 회상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이념을 늘어 놓는 것도 아니고, 사념의 집단을 체계화시켜 놓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투르니에가 말하는 명상의 대상은 치유자와 환자 모두를 포함하는데 우선적으로 치유자 자신이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검토하기 위하여 준비하여야 하며, 그 이후 치유자는 치유를 위하여 환자와 더불어 명상의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한다. 명상자는 하나님의 현존에 자신을 개방하고 명상하는 바를 기록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읽고 다시 명상에 잠기는 방법을 권한다.
(3) 고백을 통한 치유
투르니에는 영적 치유 방법 중 죄의 고백과 용서의 확신에 의한 치유 방법을 중요시한다. 죄는 전인적인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고 파괴한다. 어떤 육체적인 질병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댓가로서 주어지기도 한다(민 12: 1-15). 또한 육체적이지 않더라도 정서적으로 심한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시 32:1-15). 그러므로 매일의 생활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건강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모두가 약하고 죄를 범하는 존재들이므로 죄의 용서가 필요하게 된다.
성서 전체는 사죄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 은혜받을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인 행위이며, 모든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는 지름길인 것을 가르치고 있다.
치유는 사죄의 결과라고 볼때 죄의 고백과 그에 따른 용서는 치유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 고백을 통한 용서의 감격과 기쁨은 육체에 영향을 미쳐서 육신의 병도 치유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런 사죄의 고백과 용서받은 감격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도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받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럴때 하나님으로부터의 치료의 에너지가 우리의 영혼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적시고 흘러서 건강한 공동체와 개인을 만들 수 있다.
(4) 성서를 통한 치유
죤스(Martin Loyd Jones)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것과의 관계를 밝혀줄 뿐만 아니라 성서만이 인간의 문제 해결에 적당하다. 즉 가장 난해한 문제, 죽음, 파탄에 이르는 결혼, 동성애 문제 등에 대해서도 인간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로 해결시킬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가 있다.
투르니에는 성서 속에서 인간의 생활규범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성서 속에서 인간의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서는 역사책으로 사람의 생과 사건에 대해서 묘사한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말씀에 대해서 경청할 수 있고 우리들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고, 피조물을 위한 창조주의 무한하신 목적과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샬(Millard Sall)은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 만으로는 문제와 실패를 치료해주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적합한 해석과 적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성서를 하나님의 감동으로 받아들이느냐 부인하느냐 하는 것이다.
(5) 예배를 통한 치유
모든 예배 의식 속에는 누군가에게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즉 성도의 교제를 통해 외로움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깨달을 때 과거의 심각한 죄책감이 치유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때 새로운 희망이 싹터 슬픔이 치유되고,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 될 때 실망한 영혼이 치유되고, 하나님은 인생의 사소한 일 조차도 처리해 주실만큼 위대함을 깨달을 때 근심이 치유되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가 인식할 때 자기 비하가 치유되고, 예배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때 돈에 대한 강박관념이 치유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열어놓고 깨끗함과 치유와 능력을 가져오는 성령의 파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C. 치유목회의 실천적 과제
1. 기독교인이 신유를 구해야 하는 이유
첫째, 그것은 주님의 엄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의 치료자이심을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신자는 병이 났을때 그에게 낫기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때에라도 하나님께 기도할 의무가 있다. 더더구나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할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기적은 설명되어지지 않은 자연에 불과하다. 인간의 방법은 설명된 자연일 뿐이다.
둘째, 그것은 영적 축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5:15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은 죄를 범할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하였다. 육체적 질병의 치유에 영적 결과가 따름을 말하고 있다. 질병의 영적 성격을 이해하고, 사단이 그 배후 세력임을 알고, 또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서 그 자녀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하심을 알게 된다면 마땅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병 낫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 질병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때문에, 병낫기를 구해야 한다. 지붕을 뚫고 달아내린 중풍병자(마 9:8), 많은 무리(마 15:31),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눅 17:16), 18년간 구부러져 산 여인(눅 13:13), 감사하는 문둥이(눅 17:15), 나사로의 부활(요 11:15) 기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믿게 하였다. 그렇다면 질병이 들었을 때에 우리가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주께 낫기를 구하여 기적적 치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들
치유를 위하여 기도해도 사람들이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나, 대체로 죄악과 불신이 그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제 치유되지 못하는 이유는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하여 보겠다.
(1) 어떤 사람은 구원보다 육체의 치유를 더 바라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치유받지 못한다. 치유는 주께서 주시는 약속의 축복이다. 이 축복은 하늘나라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권속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도 똑같이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마 5:45). 이처럼 불신자를 고치실 경우에도 그가 구원으로 인도될 것을 아심으로 고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나 육체의 질병을 고침 받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받아들어야 할 것이며, 그의 생애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맡기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 어떤 사람은 잘못된 목적으로 치유를 구하여 얻지 못한다. 주님은 단순히 편해지기 위해서나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이기적인 건강을 바란다면 고쳐주시기 않는다. 야고보는 분명히 말하기를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신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며 봉사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3) 어떤 이는 그리스도보다 목사를 더 의지하여 고침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적을 행사하심에 있어 인간이란 통로를 사용하시지만 낫기를 구하는 사람은 통로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고 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님만이 참된 의사이다.
(4) 불순종은 고침을 받지 못한다. 출애굽기 15:26절을 보면, 신유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에 불순종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에 거역한다면 고침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
(5) 미처 회개치 못한 죄 때문에 고침을 받지 못할 때가 있다.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한 십자가의 고통으로 값을 치룬 위대한 축복이다. 죄는 믿음을 방해하고 주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한다(시 66:18, 약 5:16 참조).
(6) 불신앙 때문에 고침을 받지 못한다. 기도를 하면서도 "믿음의 기도는 병든자를 구원하리니"(약 5:15).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니니"(막 16:17). 또 믿음이 없이는 기쁘기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 등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이 흔들리는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약 1:6-7).
(7) 주의 뜻으로 응답이 안되는 (치유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의 사자, 곧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한 듯하다(고후 12:7). 그래서 세번씩이나 이 가시를 에해 달라고 주께 간구하였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니라" 말씀하시고 질병을 낫게 해주지 않으셨다(고후 12:8-9). 이 경우도 주의 뜻이 바울의 질병을 계속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Ⅴ. 결 론
지금까지는 여러가지 자료들을 통하여 '치유'라는 중요한 사역이 오늘의 교회가 시급히 되찾아야 할 과제임을 살펴보았다. 즉 오늘의 교회는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치유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하여 목회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치유의 본질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을 갖도록 이끌어야 하며 그들에게 치유의 근원에 접촉하는 방법을 가르치며, 능력있는 치유활동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과 교회성장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21세기는 예측이 어려운 다양한 시대가 될 것임을 염두에 두며 치유목회를 살펴보고 전망하여야 한다. 21세기는 과학의 발달에 따른 테크노피아의 시대이며 다양함을 당연시하는 복잡한 시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와 함께 사람들의 외적인 생활은 풍요를 구가 하겠지만 영적, 정신적 상황은 더 큰 방황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례에 따른 다양한 목회 처방이 요청되리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의 유리로 인한 갈등도 해소해야 하는 얽혀있는 시대가 예상되는 바, 목회도 거기에 합당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성서로 돌아가야 하며, 또한 성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목회 방법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목회는 예술이다. 이러한 지적은 목회가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더 크게 부각되는 목회영역이 있어야 하겠지만 전 영역을 골고루 다루어야 하는 시대가 21세기임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