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쇄동기의 간략한 풀이=금쇄동의 아름다움과 신비
금쇄동은 문소동 동편 제일봉의 높은 곳에 있으니, 참으로 해와 달을 가까이 하고, 바람과 비가 만들어지는 곳이라 할 만하다.
금쇄동의 하늘은 환하게 밝으면서 안개가 그윽하고, 천석(泉石)이 진귀하면서 아름다운 교태를 보인다. 산의 뒤편은 점점 험해지다가 위쪽은 심하게 험하지 않고, 그 주위가 멀고 높이 뻗어 있어서 사람의 흔적이 드믈다.
그 금쇄동 골짜기 입구에 이르면 동쪽으로 점로(店路 : 주막 가는 길)가 있고, 산세가 심히 급하고 험해서 그 아래를 왕복하는 사람은 다만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만 볼 수 있고, 높이 공중에 떠올라 있는 낭떠러지와 벼랑이 여름날 구름처럼 기이한 봉우리와 아득한 안개가 첩첩이 둘러 있어서 산봉우리만 보일 뿐 거기에 이런 골짜기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점로로부터 서편으로 문소천(聞簫川)을 건너 백 보 정도 가면 가파른 길이 바로 오르기 어렵다. 북방으로 꺾어 수 십보 가서, 또 南向하여 수십 보 가면 석문(石門)을 만나는데 그 모양이 심히 이상하다. 큰돌이 문 가운데를 가로질러 세상사람들의 수레를 막고 있는 둣하여, 언뜻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다. 이문이 금쇄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임이 분명하고 위로 통할 수 있으므로 불차(不差)라 이름 짓는다.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은 이 문이 정녕 제자리에 있더라고 한다. 아주 큰 바위더라고 하였다. 석문 들어서서 가다 만난 석대(石臺)를 하휴(下休)라 하고 남쪽으로 가다 마나나는 지붕 있는 바위를 기구대(棄拘臺)]라 부르기로 하고, 조용히 않아 깊이 생각하기에 마땅한 자리를 중휴대(中休臺)라 하였다. 아음의 것은 큰 바위도 아니고 기이한 모습도 아니나 몸을 편안히 할 수 있기에 상휴(上休)라 하였다.
상휴 북방 십 보위에 3층 석대가 있고 않아 마음을 차분히 하면 마음속의 근심을 풀 수 있을 정도로 상쾌하여 창고(暢高)로 불렀다. 상휴에서 동편으로 교묘하게 생긴 바위와 가까이 소나무 숲이 있어 건(巾)을 벗을 만해서 쇄풍(灑風)이라 하였다.
그 아래에 석실이 있는데 아무 데고 들어갈 길이 없는데 틈새 동편에 돌계단이 있어 석실로 내려갈 만하다. 이 석실에는 후토(后土: 토지신)를 두기에 마땅하다
보길도 세연정 방단 건축물의 용도가 이런 후토신(后土神)을 모시던 신사(神祠)일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게 되었다.
상휴에서 산등서이 너머 서펀으로 꺾어 칠 팔십 보 가다가 동족으로 꼬부라져 가면 또 석문이 잇다. 문 가운데에 사다리가 있어 오를 수 있고, 문 좌우로 대가 있어 얹을만하고, 복방의 절벽이 사람들이 간신히 통행하는 고삐 같은 길을 막고있다. 서편으로 올라가면 문이 문뜩 북방에 있어서 금쇄동으로 들어가는 길이 신묘함을 알린다
다시 지일(至一)이라는 석문을 지나면 동편 가장자리로 두 대(臺)가 열 지어 가지런히 있고, ,곧바로 복방으로 낭떠러지가 허공에 버티고 있어서 그 위가 보이지 않는다. 문으로 들어서서 서펀으로 꺾어 수십 보를 가면 수십 발이나 되는 층층의 병풍바위가 가로질러 있고 백여 보를 멈칫멈칫 나아가면, 여러 갈래의 폭포가 병풍 위에서 쏟아지는데 가운데 폭포 줄기가 쏟아지는 곳에는 오목하여 짧은 문과 같고, 그 아래에는 바위 있는데 바위가 병풍의 반과 폭포에 의지하고 있어서 그 형세가 평탄하고 넓으니, 이는 조물주가 대 위에 있는 정자에 바람이 부딪칠까 대비함이다.
그의 멋진 명문은 계속 이어진다.
머리를 돌려보면 대둔산(주: 대둔사. 대흥사의 뒷산)으로 부터 문소동 어귀까지 여러 봉우리가 십여 리 이어지고 있어서 마치 길고, 짧은 울타리를 수놓은 것 같고 굽이굽이 병폭(屛瀑)을 쳐놓은 듯 하며, 그 아래 계곡은 하늘의 삼분의 일에 걸쳐 있고, 세로(世路)를 굽어보면 사람과 말이 개미가 땅에 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니, 사물을 관찰 할 줄 아는 자가 여기에 이른다면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사는 선경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앉아 얼굴을 들어 눈으로 쳐다보면 험악하게 높은 한 봉우리가 땅에서 만 길이나 놓게 솟아 있으니 주가 그 의에 금쇄동 같은 고을이 깊숙하고 넓은 지세로 한가롭게 있었는지 알겠는가. 내가 꿈에서 자물쇠가 잠긴 궤(櫃)를 얻고 며칠 안 되어 여기를 얻게 되었는데, 하나 하나가 꿈에서 본 것과 부합되므로 그로 인해 금쇄동이라 이름짓는다.
이 글은 이후로도 상당히 길게 계속된다. 금쇄동 동부의 여러 가지 신비한 얘기들이 다 담겼다. 이 금쇄동은 고향인 연동리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다. 그 점을 고산선생도 지적하였다.
<옛적에 이르기를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은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고,.... 이곳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일찍이 듣고 보지 못한 곳이지만, 인경(人境)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나의 수정산 거처까지는 5리에 불과하고 문소동 거처까지는 1리 정도이다. 주먹 하나 막혀 있는 곳에 천년의 비경이 어찌 나를 위해 열려 있어서, 나날이 내 모습이 아름다워지며, 나에게 있는 주자(朱子)의 그림을 때로 보며 자위하고자 하는 그리움이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회심(會心)이란 것이다.>
북쪽 창문을 열면 고향에 있는 덕음산(德陰山)이 눈에 들어오고 <친척들이 밥 짓는 연기가 똑똑히 보이니 비록 가사(家事)를 잊고 궁벽한 오지에서 배어난 경치에 심취되긴 하였으나 송추(松楸)의 마음과 상제(桑梯)의 공경을 잊지 못한다. 우뚝 솟은 봉우리는 비록 멀기는 하지만 얼굴 펴고 가까이 오지 않음이 없고 인접된 언덕의 미미한 것들은 비록 가까우나 감히 담장 너머 문틈으로 엿볼 수 없으니 이는 현자(賢者)를 가까이 함에 영지와 난초를 취하는 둣이 하고 소인을 대함에 미워하지 않고 엄하게 함과 같다.
모든 아름다움이 함께 갖추어졌으나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있으니 이는 그 도(道)는 나타내고 그 몸을 숨김과 같고 능히 큰산으로 하여금 둘러서서 받들게 하고 처해 있는 곳은 지극히 작으니 이는 그 조화는 크나 지키는 것은 간략함이며, 새겨서 그리고 분(粉)으로 장식하여 군데군데 펼쳐 놓음을 여러 산에 붙이고 자신은 하나도 자랑함이 없음이 마치 원의 이정정(利貞亭)에서 토(土)의 금, 목, 수, 화와 같으니 이는 성인의 도는 하나의 선(善)으로만 지목하기 어렵다는 것과 같다>고 했다.
금쇄동의 산중신곡
孤山文學現場報告書(1996. 해남문화원)
이 책은 [고산문학 대축제 총서 지1집 간행한 것이라 하는데 그 목차에
1. 금쇄동의 위치와 원림 터 확인
2. 금쇄동기에 서술된 지명 22곳의 위치 비정
3. [산중신곡]의 무대 금쇄동과 고산의의 문학세계
4.고산문학과 유적.<부록> ① 국역 금쇄동기 ②고산 윤선도 연보 ③고산 시가집.
<영인> ① 金鎖洞記 ② 孤山詩歌集 등이 수록되어 있다.
고산선생의 이력서를 구체적으로 서술한 연보(年譜)에는 이 금쇄동을 발견한 것은 선생의 연세 54세이던 인조18년(1640)이었다고 하였다. 처음에 연동이 있는 덕음산에서 멀지 않은 수정동(水晶洞)에 머물다가 문소동(門簫洞)을 얻고는 그리로 거점을 옮겼었다. 보길도 부용동을 얻은 뒤에 고향에 머물다가 꿈에 보았던 자리 금쇄동으 발견하고는 문소동, 보길도의 부용동과 더불어 금쇄동에 터를 잡고 은둔의 생활을 하였다. 고산은 금쇄동을 일종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고산선생은 금쇄동에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약 9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산중신곡(山中新曲)]19수, [속산중신곡]2수, 기타 5수와 [금쇄동기]를 지었다.
고산의 나이 56세에 유명한 [오우가]와 더불어 시조 [만흥], [조무요], [하우요]등이 창작된다. 이상향을 얻은 만족스러움에서 발로된 창작활동인 듯이 느껴진다.
고산의 작품 중에서는 "산중신곡"과 "금쇄동기"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자신의 은둔지인 해남의 금쇄동에서 지었다.
산중신곡은 山中生活에서 촉발된 감흥을 읊은 시가이고 금쇄동기는 아름다운 금쇄동의 산수 경관을 술회한 한문 수필이다
보길도 부용동이 "어부사시사"로 널리 알려진데 비해 고산의 50대 은거처이며서 위의 두 작품의 창작실인 금쇄동은 그 동안 연구자들의 관심권 밖에 있었다. 이처럼 연구가 소홀했던 것은 원림터의 확인 작업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고산은 금쇄동의 자연물에 22곳의 이름을 부여하여, 이를 ‘금쇄동기’에 서술하였다. 바위나 석대, 그리고 건물 터 등에 부여한 이들 이름은 금쇄동의 아름다운 산수경관을 표현하는 적절한 경로를 만들어 주었다.
지명22곳은 [금쇄동기]에 불차(不差), 하휴(下休), 기구대(棄拘臺), 중휴대(中休臺, 상휴(上休), 창고(暢高), 쇄풍(灑風), 첨홀(瞻忽), 지일(至一), 금쇄(金鎖), 월출암(月出巖), 휴회(有懷), 추원(追遠), 인빈(寅賓), 국고대, 집선대(集仙臺), 흡월(吸月), 연화(蓮華), 난가대(爛柯臺), 고송(孤松), 휘수(揮手), 회심(會心)등의 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들 지명은 금쇄동으로 오르는 길에 9곳, 금쇄동 정상부위에 11곳, 그리고 건물 터에 2곳에 부여된 것이다.
금쇄동기의 내용에 따르면, 고산은 금쇄동의 중심을 회심당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회심"이라고 붙이게된 이유를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여러 가지 근거를 열거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금쇄동기에 "千年의 비경(秘境)이 어찌 나를 위해 열려서 나로 하여금 날로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게 하는가”라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고산은 금쇄동을 신선이 사는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겼던 것 같다.
[금쇄동기]의 말미에 적힌 한시(漢詩)를 보면
하늘과 神이 몹시 아껴 한 구역을 숨겼으니
뉘라서 낙은 선경이 眞景圖錄임을 알리.
만길 신선의 굴 옥으로 깎아 세운 듯 하고,
山海는 千겹 수묵도를 펼쳐 놓은 듯 하네.
조수들은 가파른 봉우리에서 자유로이 노닐고
비바람은 잡초 우거진 들에 어둡게 깔려있네.
이곳에 오르니 전날밤 꿈 생생하구나
하느님은 무슨 공으로 金鎖의 궤를 나에게 주셨나요.
라고 하여, 고산은 금쇄동을 신선이 사는 선경이자 자신이 꿈꾸어온 이상향으로 여겼던 듯하다. 정치에서의 염증을 달래는 수단으로 자신의 꿈을 원림경영으로 실현해보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첫댓글 고산선조의 고택 이 있는 금쇄동 해남어딘지 궁금하고 가보고싶은데...........
해남읍에서 완도방면 으로 화산면 소재지를 지나가서 1킬로쯤 가다 보면 좌측으로 삼산면(대흥사)가는 도로가 나오면은 그길로 진행하여 상구시리가 나오면 마을을 지나 팻말에 금쇄동 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옵니다. 이길로 시멘트길,비포장도로로 4킬로를 산속으로 들어가시면 금쇄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