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고경에 선산이 있다. 6000여평쯤
1년에 그 곳 재산세로 12만원 정도가 나온다
할아버지내외분, 삼촌, 5촌들 등등 먼 윗대 조상들까지, 그리고 할아버지 첩의 무덤까지~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좋은 것이 없어 20여년간 성묘를 간 적이 없다.
저명한 언론인이었지만 일제시대 협력언론인이었고, 5/16쿠데타 이후로는 군사정권의 편에서 글을 썻다.
좋은 기억이 별로 없고 할아버지 또한 내가 좋은 손자로 보였을 리도 없다.
초등학교 입학전6~7살 무렵,
집안이 종가라 제사를 거창하게 지낸다.
하얀 한복을 알뜰히 차려 입은 십여명이 넘는 할배들과, 서로 항렬을 따지는 아버지또래의 남자들 틈바구니,
나이는 제일 어렷지만 제사 지낼 때 내자리는 늘 상석이었다.
제사를 마치고 세배를 드리는데, 내 앞에 쌍둥이같은 두 할배가 앉아 있다.
꽤나 당돌했던 어린 시절의 나!
- 니가 내 할배가? 네가 내 할배가?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노기등등했고 엄마는 어쩔 줄 모른다.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를 내가 구분을 못 한 것이고 그게 그런 말로 튀어 나왔다.
하양에 사시던 작은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며,
- 그 자슥 그거 사나답고 기백있네~
오히려 나를 더 귀여워한다.
그런데 할바버지는 기분이 썩 좋지 읺은 듯 했다. 훗날 생각해 보았을 때 ~
서울에 사는 사촌 형 둘이 매년 성묘를 올 때면 자기 아버지 산소와 함께 할아버지 산소도 손을 보고 간다.
홍대 미대 다녔던,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 온 그 친했던 둘째 사촌 형도 세월이 지나고 서로들 삶이 바쁘다 보니 소원해졌다.
성묘를 와도 내게 연락도 없다.
심지어 어머님 장례에 얼굴도 비치지 않고 삐쭉 부의금만 전해왔다.
산 앞에 작은 샛강 하천이 흐르고 제방이 나즈막히 있다.
그 제방을 건너면 선산이다. 남향에 햇살이 잘 들고 터는 아주 좋다.
10여년전에 아카시아를 제거할 때, 빼곡한 밤나무를 베어 팔려다가 행정절차가 까다로워 포기했다.
그렇게 그 산은 지금은 내게서 거의 잊혀졌다.
한의대 본과 1학년때쯤인가~ 그 때즘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코스모스꽃앞에서 먼 산을 응시하며 찍은 사진.
저런 시절도 있었네~
그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문득 오래 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어렴풋하지만 선명한 기억~
영천 고경에서 조금 더 들어간 작은 동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본적지다.
아마도 추석을 조금 지난 시점이었던거 같다.
영천에서 포항으로 가는 국도변의 마을
내 기억으로는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였다.
지금은 넓게 확장되어 고속국도처럼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열악했다.
국도변 왼쪽이 마을이고, 오른쪽에는 포도밭이 있었고 포도밭을 에워싸고 넓은 하천주변 개활지가 있었다.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고 낮은 제방을 지나면 봉분이 흩어진 선산이 보인다.
포도밭 주변에는 촌가가 군데군데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마당이 가장 넓고 펌프로 물을 퍼올리는 우물이 있던 집
- 여가 니 5촌당숙의 재종형아이가? 니는 첨 봣제?
수십년째 선산을 관리하는, 우리 집안과는 성씨도 달라 孫씨성을 사용하는 아저씨가 나를 보고 말한다.
마당넓고 우물이 있는 집의 주인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영락없는 반중년 촌로였다.
피부는 그을럿고 머리는 반쯤 벗겨졌고 주름이 나이에 비해 많아보였다.
거무튀튀한 손에 핏기없는 손톱과 웃을 때 보이는 누런 충치~
웃으며 나를 반겨준다.
그래그래 니가 xx이가? 그래도 니가 우리 집안 종손아이가 종손!
종손대접을 깍듯히 해준다.
경주 이씨 익재공파, 그 중에서도 판x공파가 내 정확한 족보다.
집은 낡았고 시렁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시래기나 감 같은 것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빗자루와 낫도 기둥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툇마루가 앞에 있고 문지방이 있는 작은 방이 서너개정도~
삐이익~ 나무로 된 부엌문이 열리더니 어떤 여자가 다라이를 들고 나온다.
30대 중후반쯤, 촌스런 후리아치마를 입었다. 몸빼디자인같은 알록달록한 꽃무늬로 된 긴 치마
우물에서 펌프로 물을 긷더니 마당에 펼쳐놓은 말린 고추를 살핀다.
치마를 걷고 앉는데 피부가 희고 곱다.
- 여여 어야 와봐라, 여 인사해라 우리 집안 종손이다. 대구서 의대 댕긴다 의대~
5촌의 재종형이니 내게는 6촌이 되나?
여튼 그 사람이 자기 아내를 내게 소개한다.
6촌 형수인가, 6촌아주머니인가?
- 엄마! 안녕하세요 도련님이시네
얼굴이 이런 벽촌에 있기 아까울 정도로 희고 곱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가 하얀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한다.
이렇게 이쁘고 고운 여자가 이런 촌에 있다니~
들어 보니, 부산에서 시집왔다고 한다.
중학교 마치고 공장생활하다가 중매로 결혼하고 이 곳으로 온 것이다
- 여 밥이라도 좀 채리온나, 머하노, 대구서 귀한 손님 왔는데, 허 참 내.. 이 사람이~
작은 소반이 넘쳐난다
고깃국도 있다.
나물무침에 묵과 양념장 두부와 김치~
- 채린거 별로 없지만 마이 잡수세요~
생긋한 미소가 보기 좋다.
20대 초의 어린 남동생같은 사람을 보니 이런 촌에서 얼마나 반가웟을까~
사과를 깍아서 접시에 포크와 같이 내온다.
가장 고급스러워보이는 포크를 내온거 같았다.
물론 도회지의 고급포크에 비하면 퇴물이엇지만~
나른한 가을의 오후였다.
밥을 먹고 툇마루에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멀리 국도변의 차들이 한 두대 생생 달린다.
그 형수는 부끄러운 기색으로 살며시 내 옆에 앉더니
- 도련님은 공부 디게 잘했는 모양입니더, 의대 댕긴다카이~
- 의대 아니고 한의대에요. 그 침놓고 약짓고... 운운
- 나중에 나도 침 놔줄끼지예? 약도 지주고 그란다꼬 약속하이소..
순수하다. 때묻지 읺은 순수함이란 얼마나 신기루같은 것일까 생각했었는데 여기 그런 사람을 본다.
- 도련님 여 앞에 코스모스 보러 갈랍니꺼?
- 코스모스가 많이 피었나요?
- 예예 진짜 좋아예 가끔 거기 걷고 하는데.. 휴~
말끝에 한숨을 쉰다.
힘겨운 일과중에 혼자 코스모스길을 조용히 걷는 것이 큰 행복이었던 모양이다.
고x국민학교, 자동차중장비업체가 있다.
샛강이 여기까지 흐르고 잇구나
모래를 채취하는 트럭들이 보였던 기억이 난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햇살은 따가웠고 가을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도 없이 헤매일 때에~ 가을하늘 드 높은 곳에~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름다웠다. 국도변의 코스모스길
연분홍, 짙은 분홍, 하얀 꽃들과 섞이고 들꽃들이 분주히 보조를 맞추는~
멀리 나즈막한 언덕 야산은 코스모스로 덮였다.
경계가 뚜렷하지 읺은 도로를 들꽃과 잡초가 침범하고 있었다.
내가 앞서 걷고 몇발짝 뒤떨어져 형수가 따라왔다.
돌아보니 코스모스를 꺽어들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차가 생생 지나가서 위험해 보였다..
- 조심하이소, 도로가 좁네예
나를 보며 웃는다
- 도련님, 이렇게 코스모스 보고 잇으면요, 아침에는 노래부르고 저녁에는 술에 취해서 그렇게 살고싶어져예~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천사의 삶을 산다해도 흑백으로만 세상을 보며,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무채색이다.
6촌형수, 이 어여쁘고 순수한 여자는 티끌없는 여름날의 햇빛같구나~
코스모스를 닮은 은은하고 잔잔한 순수하고 불순물 없는 색채의 삶을 살아 갈 여자~
그렇게 코스모스길을 나란히 걸었다.
나팔꽃이 하나 보인다.
코스모스 핀 국도변, 어여쁘고 순수한 6촌형수와 함께 걸었던 기억
이슬이 마르면 꽃의 생명 또한 짧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코스모스를, 그 국도변의 추억을 떠올려본다.
그 이후,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려 그 곳에 간 적은 없다.
학교생활, 국시준비, 개업, 결혼, 아내의 출산, 일상의 몸부림, 생활의 압박, 강렬한 생의 의욕으로
소소한 그런 것들을 잊고 지낸 세월
십여년전에 모처럼 그 곳에 갓을때, 그 집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당은 시멘트로 덮였고 포도밭은 사라졌으며,
집은 벽돌로 알록달록 포장되고 칼국수와 순두부를 파는 식당으로 변해 있었다.
주차된 차들이 드문드문하고 손님들이 출입구를 드나든다.
시렁에 달린 곶감도, 물을 퍼 올리던 펌프도, 돌을 쌓아 만든 둥근 우물도 사라지고 없었다.
6촌형과 아름답던 그 형수도 더는 그 곳에 살지 않았다
물어 볼 용기도 나지 읺았다.
달리 무슨 관계인 것도 아닌 것을~
지금 쯤 그 형수는 70대는 되엇을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그 오랜 세월을 살았을까!
가슴에 스며드는 가을바람 소리가
눈송이처럼 녹아내리는
그 옛날 코스모스 국도변의 작은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