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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곡리(南谷里) |
본래 상주목의 지역이었다. 칠봉산의 남쪽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앞실(압실), 또는 남곡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미산리(眉山里)와 덕산리(德山里)를 병합하여 남곡리라 했다. 행정구역을 남곡 1리(마산)와 남곡 2리(남곡. 압실)로 나눈다.
가시 골 |
덕산에 있는 골짜기.《:1시+골=:2시 골→가시 골.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
개 남 골
덕산에 있는 골짜기. 남산의 북동쪽에 있는데 삼산골의 동쪽이고, 큰골의 서쪽이다. 새동네 동쪽에 있는데, 북쪽 끝인 황령골 계곡에 뒷골보가 있다.《개(川)+나미(踰)+골(谷)=개 나미 골→개남 골→개 나무 골. ‘개’는 ‘물 가’를 뜻하므로 ‘개울 건너’의 뜻이다.》
굴 골
개나무골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인데, 굴이 있다.
굴 골 굴
굴골에 있는 굴.
남곡리
남곡.《남+곡(谷)=남곡. ‘남’은 ‘늠(緩)’의 음차(音借)로 본다. ‘넓은 골’의 뜻이다.》
남곡지(南谷池)[남곡 소류지, 압실 못]
남곡 2리 압실 남쪽에 있다. 뒷골의 북쪽이다.
남 산
남곡리 우리골 남쪽과 외서면 대전리의 성애골. 파라골의 북쪽에 있는 높이 821.6m의 산.
넘 바우[덕산]
덕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 뒷골보의 동쪽에 있다. 《넘+바우(岩)=넘 바우. ‘넘’은 ‘늠(緩)’의 뜻으로 본다. ‘넓은 바우’, 즉 ‘큰 바위’의 뜻이다.》
노루 목 고개
솔안에서 황령리 야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노루목처럼 생겼다고 한다.《노루+목(項)+고개(峴)=노루 목 고개. ‘넓거나 늘어진 목(지점)’을 뜻하는 ‘너르 목, 널 목’에 있는 고개다. 산줄기가 늘어진 곳에 있는 지형이다.》
농 골
지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넘바우 남쪽에 있다. 《는+골=는 골→능 골→농골. 늘어난 골짜기(連谷)》
늦은 목 고개
솔안에서 황령리의 어항리로 넘어 가는 고개. 경사가 완만하다.《낮은 곳에 있는 목, 또는 늘어진 목에 있는 고개》
다만 골
남곡소류지 서쪽에 있는 골짜기. 횟골의 남쪽과 안마골의 북쪽에 있다.《‘담+안(內)+골(谷)=담 안 골→다만 골’으로 짐작한다. ‘담’은 ‘덩어리’를 뜻하는 ‘둠’에서 나온 말로 ‘고을이나 마을의 한 부분’을 뜻하는 말이다.》
당산(堂山)① |
남곡리 154-2번지인 미산 마을 입구에 있는 2기의 돌탑 중 하나다. 우리 밀 가공 공장 건물 앞에 있다. 직경 2~3m. 높이 70~80cm 크기로 자연석을 쌓아 탑을 만들고, 윗면 가운데 조그마한 선돌을 세웠다.
당산(堂山)②
남곡리 154-2번지인 미산 마을에 있다. 남곡리 당산①에서 동쪽으로 90m 가량 떨어진 마을 입구에 있다. 돌탑은 직경 3m. 높이 1m 크기로 조금 크게 자연석을 쌓아 석단(石壇)을 만들고, 윗면 가운데 조그마한 선돌을 세웠다.
덕교리
덕산
덕산(德山)
압실 남쪽에 있는 마을. 뒷골의 남쪽과 미산의 남서쪽 마을로 남곡 1리다. 둔덕으로 되어 있고 앞에 다리가 있다. 마을 앞 내에 다리를 놓으면 큰 덕이 온다는 풍수설에 따라 다리를 놓고 덕교리(德橋里)로 불리다가, 마을이 산 밑으로 옮겨지면서 덕산이라 한다고 한다. 동북쪽에 수령을 알 수 없는 큰 팽나무가 서 있다.《덕(德)+산(山)=덕산. ‘덕(德)’은 여진족 말로 ‘비탈, 언덕, 고원’의 뜻이 있다.》
도둑 골
이심이골의 동쪽과 진나무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동네 골
개남골 위에서 큰골의 동쪽으로 난 골짜기.
뒷골
남곡소류지 남쪽에서 넘바우로 이어지는 골짜기.
뒷골 보
개남골 북쪽 황령골 계곡에 있는 보. 넘바우 서쪽이다
먹 뱅이 골
덕산에 있는 골짜기. 이파골의 동쪽에 있다.
모산(牟山)[밀 미, 밀 뫼, 밀개 산]
덕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 마을 뒷산이 밀을 가리(露積)해 놓은 모양같다고 밀뫼라 하고, 한역(漢譯)하여 불려 진다고 한다. 밀개는 곡식을 말리기 위해 널어놓았을 때 저어 주는 기구이다.
못 바탕이 굴
굴골굴
미산(眉山)
덕산 동쪽에 있는 마을. 남곡 1리다. 지형이 눈썹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마을 뒷산의 월경(月景)이 아미산(蛾眉山)같이 아름답다고 함. 《우리의 옛말에서 ‘산(山)’을 ‘뫼→미’라고 했다. ‘산(山)+산(山)’의 뜻으로 보인다. ‘미’가 ‘용(龍)’을 뜻하는 옛말 ‘미르’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밀미
덕산 남쪽에 있는 마을. 앞에 못이 있었음. 《우리의 옛말에서 ‘용(龍)’을 ‘미르, 미리’라고 한다. 그러나 ‘미’가 ‘모’와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 ‘산(山)+산(山)’의 뜻으로 보인다.》
밭 있는 골
덕산에 있는 골짜기. 밭이 있음
봉덕재(鳳德齋)
남곡리 327번지 덕산 마을 서쪽 끝에 있는 풍양(豊壤) 조씨(趙氏) 재실이다. 재실과 솟을 삼문을 =자 형으로 배치하고, 주위로는 토석담장을 둘렀다. 재실은 가운데 2통칸 마루방에 양쪽으로 온돌방 칸 반씩을 배치시킨 4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고, 앞면엔 툇마루를 놓았다. 툇마루 양 측면에는 두 짝 울거미띠장 널문을 달았고, 온돌방 옆에는 쪽마루를 놓아 툇마루와 연결시켰다. 상부가구는 건실한 5량가이고, 지붕가구 중 중도리 위치는 옆 기둥 열 안쪽에 편재해 있다. 현재 마루방은 현대식 부엌으로 개조했고, 지붕은 기와를 내리고 골함석을 얹었다. 솟을 삼문은 가운데 대문칸에 왼쪽은 방, 오른쪽은 두지(뒤주)로 사용한다.
사가정(四可亭) |
용추폭포 위에 있는 정자. 김석엽(金錫燁)가 세웠다. 아래에 반석과 폭포가 있어서 매우 아름답다. 2001년 상주시 주관으로 중수하였다. 「사가정 중건기」를 보면, “백두대간의 영산(靈山) 속리산이 동으로 그 맥을 뻗쳐 칠봉산(七峰山)을 짓고, 칠봉산이 성주봉(聖主峰, 聖祖峰)을 마주한 발치에 은자골을 놓아 남곡리 명추대(鳴湫臺)를 두었으니, 이 곳은 하늘이 갈무리한 상주 옛 고을 은척(銀尺)의 명구(名區)였다. 대(臺) 밑은 3층의 명연폭포(鳴淵瀑布)가 구슬 같은 물을 멀리 낙강(洛江)에 보내며 사람을 기다린 지 여러 천 년, 천 팔백 년을 전후하여서야 순천(順天) 김석엽(金錫燁, 1751~1817) 선생이 대(臺) 위에 사가정(四可亭)을 세웠으니, 자연은 사람을 만나 명승(名勝)에 인문(人文)을 더하였고, 사람은 자연을 만나 사덕(四德)에 순리(順理)를 더하였다. 사가(四可)란 『소학(小學)』 감주(紺珠)에서 취한 말로, “힘쓸 것은 행실(可勉者行)이요, 미덥게 할 것은 말(可信者言)이며, 맡길 것은 운명(可委者命)이요, 기억할 것은 하늘(可記者天)”이란 뜻이다. 네 가지 마땅히 지켜야 할 일로 좌우명을 삼았던 선생이 자연을 벗하여 수양하고 독서하던 자리요 후진을 양성하던 자리니, 사가정은 한 갓 산수경(山水景)만 즐기던 자리는 아니었다. 이 후 자손들이 선생의 뜻을 만들어 정자를 지켜 오더니 나라의 운이 막히어 외환(外患)의 암흑기(暗黑期)를 겪어야 했고, 내우(內憂)의 권란을 만나 미처 돌볼 여가가 없는 사이에 세월의 비바람조차도 비켜 가지를 않았다. 끝내는 붕괴 직전의 선조 유물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자손들이 뒷날을 기약하여 1980년에 철거하였으니, 유서 깊은 땅을 주춧돌만이 지킨 지도 20여 년이나 되었다. 때마침 상주시가 성주봉 자연휴양림을 조성하고 산촌(山村) 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함에 김동원(金東源) 주손(:1孫) 및 희연(熹淵) 보(甫)를 비롯한 본손들의 열원(熱願)과 덕산(德山) 주민추진위원회 성익환(成益煥) 위원장의 적극적 후원에 힘입어 총 공사비 팔천 여만원을 들여서 2001년 3월 26일 착공, 동년 9월 27일 옛터에 옛 모습 그대로 중건하였다. 정자(亭子)가 앉은 이 길은 상주(上州)시대 고기(古基)로 통하던 길이요,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국난에는 호국의 의병열사들이 황령사로 모이던 충의 길이며, 오늘은 하늘과 땅의 큰 기운을 받으며 성주봉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게다가 정자에 오르는 이는 분명 사가(四可)로 거울을 삼았던 조선(朝鮮) 선비와 만날 것이요, 북으로 칠봉산을 우러러는 백두(白頭)의 맥(脈)을 감지할 것이며, 남(南)으로 성조봉(聖祖峰)과 서(西)로 조운(趙子龍) 굴을 올려 보면서는 설화(說話)의 배경을 음미할 것이요, 동(東)으로는 동학교당과 은자산을 굽어보면서는 우리 정신을 생각할지니 새 천 년 첫 머리에 사가정을 중건한 일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겠다. 일을 마침에 그 전말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기문(記文)을 청한 이는 금중현(琴中絃) 보(甫)요, 사가정 중건을 도모하고 마무리한 이는 상주시 김근수(金瑾洙) 시장임을 특기한다.:2:3: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 2001년 12월 일:27:28:29:30:31:32 문학박사 안동 권태을(權泰乙) 짓고:33:34:35:36:37:38:39:40:41:42 청암(靑菴) 김시웅(金時雄) 쓰고:43 호제(湖濟) 경주 김봉기(金鳳基) 새기다.“
사 넘을 들
남곡 소류지 동쪽 들이다. 압실의 남쪽이 된다. 《‘사’는 ‘산’을 뜻하는 옛말 ‘몰’에서 온 것으로 본다.》
삼선 골
우리골의 동쪽과 개남골의 서쪽에 있다. 덕산에 있는 골짜기. 새동네에서 남쪽 산 위로 이어지는 골짜기.
삼신당(三神堂)
성주봉에 있는 샘. 이 샘물은 비상해서 아이를 못 낳는 부인들이 떡을 해 가지고 올라가서 잘 빌고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나 빌러 올라갈 때 음식을 잘 장만하지 않거나, 올라가기 전에 상가에 가거나 죽은 사람을 보면 안 되고, 잘못 빌면 샘물이 바짝 말랐다고 한다. 또 부정한 것을 먹거나 음식을 잘못 먹고 가면 샘물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이 샘물의 명칭이 그래서 삼신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새 동네
남곡 1리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 황령골의 남쪽에 있는데, 개남골의 서쪽이 된다.
서낭당 보
모산의 동쪽 내에 있는 보
서낭 댕이 들
덕산 동쪽에 있는 들. 전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성주봉 약수 터
성주봉 상봉에 있는 약수터. 성주봉의 북쪽 9부 능선에 큰 바위가 경사가 져서 처마같이 생긴 곳이 있는데, 그 안에 방아 확과 같이 생긴 구멍에서 솟아 나오는데 맑고 차다.
솔 안
모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앞에 소가 있었음. 1970년 경 마을의 북동쪽에 황령못이 생기면서 마을 사람들이 황신동과 동전 마을로 대부분 이사를 갔다.
솟대 배기
덕산 가운데에 있는 터. 지금 동 회관 옆길에 있는 곳으로 전에 솟대가 서 있었다고 한다. 《솟대+백이=솟대 백이→솟대 배기. 솟대가 박혀 있던 곳》
안마 골
남곡소류지 남서쪽에 동서로 난 골짜기. 뒷골의 북쪽에 있다.《안(內)+마을+골(谷)=안 마을 골→안마 골. 마을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
압실(鴨室)
남곡소류지 북쪽 마을. 문경시 농암면 선곡 2리의 압실과 길을 경계로 한 마을이다. 칠봉산 남쪽 기슭의 마을로 남곡 2리다. 산의 형상이 오리가 물에서 헤엄치며 노는 것 같이 생겨서 산이름을 압부산봉(鴨浮山峯)이라 하고, 마을 이름은 압실이라 했다고도 한다.《서울 성동구 광나루 북쪽 워커힐 뒷산이 ‘아차산’이고,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 묘 앞길이 옛날 작은 고갯길이었는데 ‘아차고개’라고 했다. 압실 마을은 절반이 문경 관할(문경시 농암면 선곡 2리)인데 그 곳에 ‘아자리 들’이 있다. ‘앗(앗)’은 ‘작은, 버금, 새로’의 뜻이 있고, ‘자’는 ‘산’이므로 ‘작은 산’이라는 뜻이다. ‘앗, 아시’는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부터 써 오던 몽고어라고 한다. ‘압실’의 ‘압’은 ‘앗’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은 현대 말에서 자립형태로는 쓰이지 못하고 지명의 후부요소로만 사용되고 있다. ‘谷’에 대응하고 있는 ‘-실’은 『삼국유사』에도 ‘사포금울주곡야(絲浦今蔚州谷也)’라고 사용하고 있다. ‘실=곡(谷), 골=동(洞)’으로 대응하는데 이것은 ‘동(洞), 곡(谷)’을 의미하는 말이 모두 ‘kol’이었으므로 이것이 동음충돌(洞音衝突)을 일으켜 ‘곡(谷)’이 ‘실’로 쓰인 것 같다. 다른 형태로는 ‘-일’이 있는데 모두 모음 아래서만 나타난다. ‘실→일’로 변하여 ‘ㅅ‘이 탈락된 것이다.’-실‘은 ’곡(谷)‘으로 훈차(訓借)표기되거나 ’실(室)‘로 음차(音借)표기되고 있고,’-일‘은 모두 ’일(日)‘로 음차표기 되고 있다. 의미상으로는 마을로 많이 사용된다.》
압실 못
압실 남쪽에 있는 마을.
옻 샘 골 |
모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