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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자조정신으로 이룩한 간이상수도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동산1구 새마을지도자 황 종 철
성공내용
수인성 전염병이 연례행사처럼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던 이 마을은 위생적인 간이 상수도를 설치하기 위해 도로공사 논산관리사무소와 자매결연 하여 호남고속도로 부대공사에 전 마을주민들이 취역하여 얻어진 노임을 마을기금에 넣고 계속 끈질긴 사업의 추진으로 지금은 전 가구에 간이상수도 시설을 완료하였다.
마을현황
○ 가 구 수 : 218호 (농가 156, 비농가 62)
○ 인 구 : 1,340명
○ 경기면적 : 호당평균 0.8ha
「괴질」이 마을을 휩쓸던 지난날
호남 고속도로의 논산 진입로 입구에서 북으로 70여 m에 자리한 우리 마을은 80가구에 513명의 아늑하고 인심이 순후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입니다.
마을의 급수 원으로서는 3개의 공동우물과 22개의 사설우물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 수질과 수량이 극히 불량하여 해마다 갈수기의 물소동과 여름철의 수인성 전염병의 피해를 감수해야하는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었습니다. 특히 공동우물의 거리는 200m 정도의 먼 거리에 있어서 마을 부녀자들의 불편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가뭄이 닥치면 그나마도 3개의 공동우물 중 부락 최남단의 저지대에 위치한 1개의 공동우물을 제외하고는 그 수원이 완전히 고갈되어 부락은 온통 물 소동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급수난은 장티푸스,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의 감염을 동반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거나 죽어가는 참상을 빚어냈던 것입니다.
근자의 실례로는 68년 우리 마을에 「괴질」 이라 불리는 전염성 질환이 발생하여, 2명의 희생자를 낸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급수난으로 뜻하지 않는 고난을 치러야 하는 마을의 운명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뜻있는 몇몇 사람이 모여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에 이르렀으나, 호당 연간 소득 20만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우리 마을의 빈약한 경제사정과 일부 동민들의 무관심으로 뚜렷한 대책을 모색하지 못한 체 논의만을 거듭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71년 봄 새마을사업의 불길이 전국 방방곡곡에 번지기 시작하자 우리 마을도 이 민족의 대행진에 발맞추어 감연히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73년도 새마을사업의 최우선 사업으로 간이상수도를 채택하여 그 구체적인 계획을 구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약 200여만 원의 시설 자금이 소요되는 이 사업을 당년에 완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본 사업을 3년차 장기개발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계획하고, 2년차 까지는 우선 마을기금 조성과 기존 우물 개보수 및 소독에 주력할 것을 결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을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도로공사 논산관리사무소를 찾아 이와 같은 마을의 절박한 사정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동 사업소와 자매결연 하여 호남고속도로 보수 및 부대공사에 취역케 해줄 것을 간청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조 자립하려는 충정을 살펴주신 당시의 관리소장 이 재선 씨는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드려 주었으며 그 후 우리는 동 사업소와 자매결연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쁨은 비길 데 없이 컸으며 온 마을 사람들은 총궐기하여 새로운 희망 속에서 이 공동작업 수행에 온갖 힘을 다했던 것입니다.
거두어진 마을기금은 이의 증식을 위한 공동 양묘장 설치, 회관건립, 환경개선사업 등에 써졌습니다.
자조의 정신으로 이긴 고난의 벽
드디어 73년 이른 봄, 상당한 마을기금을 축적하기에 이른 우리는 계획대로 간이상수도사업을 착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뜻있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우선 농한기에 자갈 모래 등 골재채취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부락에서 보존하고 있는 우마차 5대를 동원하여 논산군 부적면 성덕리 앞을 흐르는 시냇물에서 자갈과 모래를 실어 나르는 작업입니다. 평야지대에 위치한 우리 마을은 골재 채취원이 12km나 되는 먼 거리에 있었고 그 길은 겨우 우마차가 빠져나갈 수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들길이었습니다. 골재 채취 반들은 이른 새벽에 집을 나가면 하루에 1회 왕복 밖에 할 수가 없었으며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3월 10일까지 연 78대의 우마차를 동원 60톤에 달하는 소요골재 전량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어려운 골재 채취 작업이 거의 끝나가던 3월 초순경 우리에게는 의외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간이상수도 사업비를 보조받게 된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하였듯이 우리의 자조 자립하려는 의지는 드디어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시 기술자를 초빙 현지답사를 실시하고 이에 필요한 사업계획서를 작성 제출하였으며 총 공사비 1,530,000원 중 630,000원의 소요 자재 대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만 뜻밖에도 본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려는 순간 우리는 예상치 않았던 난제 앞에 부닥치게 되었습니다. 온 부락민이 조상대대로 급수난에 허덕여 왔으며 저마다 갈구해 마지않던 이 사업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불협화음이 마을 한 모퉁이에서 부터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 사업을 앞장서서 추진해온 나와 추진위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공동사업에 앞장섰으나 날이 갈수록 이와 같은 비협조와 무관심은 온 마을에 급격히 번져가 더 이상 사업을 추진하기가 심히 어렵게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추진위원들은 동민들의 불 협조의 진원을 규명하고 조속히 그 대책을 강구할 것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 규명되었습니다.
그 첫째의 이유는 90만원이란 주민부담이 과중하여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과 지난 71년도를 통하여 계속 마을 공동작업을 수행해 온 부락민들이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원인은 수량이 풍부한 부락남단의 공동우물에서 흐르는 물로 농사를 지어오던 3세대의 경작자들이 이 수원을 음료수만으로 전용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원인은 간이상수도의 배수지로 책정 계획된 뒷동산의 산주가 반대하고 나섰으며,
네 번째의 원인은 이와 같은 반대자들의 은근한 충동으로 집수정으로 책정 계획된 우물물의 수량이 부락민의 급수량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회의가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어 결국 우리 마을의 간이상수도는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여론이었습니다.
"호사다마"란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을 사람들의 반대를 달래어 본 사업을 성공적으로 매듭지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선 참여의식이 높은 부락의 지도급 인사 5사람을 초치하여 수대를 통하여 급수난과 괴질에 시달려온 우리 부락의 수난사와 이와 같은 악조건이 우리 마을의 부흥과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고 간이상수도의 경제성 효용성 위생적 등을 역설하여 기왕에 부락 자력으로라도 추진하려고 착수하였던 사업인 만큼 기필코 이번 기회에 완수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초치된 다섯 사람은 입을 모아 우리의 의사에 찬동하여 주었으므로 우리는 즉시 마을 사람들의 반대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행동과 실증으로서 부락민 앞에 우리의 굳은 신념과 결의를 보여주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집수정으로 책정한 우물의 수량을 측정하여 그 량이 온 마을 사람들이 먹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6월 4일 읍사무소에서 양수기 1대를 빌려온 우리는 이를 우물가에 설치하고 물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녀노유 할 것 없이 우물가에 모여 앉은 수많은 마을 사람들 속에서 나는 희망과 냉대와 혐오에 찬 갖가지의 얼굴들을 읽을 수가 있었으며 마을을 뒤흔드는 요란한 양수기 소리와 함께 나의 심장은 두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습니다.
2분 30초 만에 용량 200리터의 드럼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꼬박 24시간을 품어 내었으나 아직 남아 있는 수량은 충분하였으며, 24시간에 96,000리터의 엄청난 물을 품어낸 셈이었습니다.
96,000리터의 수량은 573명의 부락민들의 1일 급수랑 51,300리터보다 거의 배에 가까운 풍부한 수량이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우리는 한동안 계속 물을 뿜어냈으나 우물의 수위는 언제까지나 1.3m의 기본수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우리는 우선 이 우물물을 이용하여 경작하고 있는 3명의 몽리자들을 찾아가 설득하기로 하였습니다.
추진위원들은 몇 명씩 조를 짜서 반대자들의 문전을 노크했습니다. 의외로 그들의 반대는 완강하였으나 우리의 설득도 그에 못지않게 집요하였으며 드디어 전답에 물이 필요할 때에는 식수공급을 중단하고 농업용수공급을 책임지겠다는 조건부 승낙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추진위원들은 용기를 배가하여 전체 동민들의 설득작업에 나섰습니다.
이튿날 마을 한가운데의 광장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은 우리는 식수난으로 고생했던 지난날의 쓰라린 추억을 상기시키고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3인의 경작자들이 승낙해주었다는 사실을 통고했습니다. 당장 30여명의 협조자를 얻게 된 우리는 즉시 그 명단을 작성하고 이튿날부터 공동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우물을 파헤쳐 집수정을 확장하고 송배수관을 매설할 수로의 터파기 작업을 벌려 그 공사는 순조롭게 진척되었으며 그 동안 예치되었던 다소의 부락기금으로 자재대의 일부를 충당하고 나머지는 외상으로 사들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온 부락민들은 자진하여 공동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각자의 소질에 따라 웬만한 기술을 요하는 작업들도 우리 손으로 하였기 때문에 시공비가 크게 절약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난문제가 또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배수지를 시설할 예정인 뒷동산의 사용 승낙 문제였습니다. 다른 마을 사람인 산주는 끝내 한 치의 땅도 내어줄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물론 산주가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명분과 이해를 가려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괭이와 삽을 들고 공동 작업에 나섰던 젊은이들은 격분한 나머지 승낙 없이 무조건 강행하자는 강경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민족의 지상명제인 새마을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방편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우리 추진위원들은 전후 12차례에 걸쳐서 산주의 설득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끈질긴 설득과 애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뜻은 관철되지 않았으며 하는 수 없이 피 눈물 나는 노력으로 저축해 놓은 100,000원의 거금을 주고 이에 필요한 3정보의 임야를 매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은 드디어 집수정, 펌프시설, 배수지와 이에 연결되는 송배수관 공사를 8월 13일까지 완료하고 그렇게도 고대하던 통수가 실현되는 감격적인 순간을 한 발작 앞에 두고 또 하나의 큰 문제점에 부닥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펌프 실에서 아무리 물을 품어대도 배수지에 물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전출장소에 부탁하여 현지조사를 한 결과 우리 마을 일대는 저전압 지대로서 현재의 6,600V에서 20,000V이상으로 승압시키지 않으면 전혀 가망이 없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이 마지막 절벽 앞에 마주서자 눈앞이 캄캄한 절망을 느꼈습니다.
연일 공동 작업에 시달린 동민들, 어려운 살림을 쪼개어 갹출해낸 주민부담이 이 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방안은 없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이마를 멋대로 논의를 거듭한 우리는 마지막 방안을 상의하기 위하여 기왕에 자매결연 한바 있는 도로공사 논산사업소를 찾았습니다.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들은 소장님께서는 그 자금 염출 방법의 하나로 담장이 계약재배를 약속해 주었으며 이에 힘을 입은 우리는 당장 23만원이나 드는 승압시설 공사를 착수하여 13일 만에 22,900V 승압을 실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딛고 넘어서 지난 9월 26일 우리의 숙원이었던 간이상수도는 드디어 준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투입된 인원은 연 665명, 총 공사비는 정부 지원 630,000원 주민자력 1,875,000원 도합 2,505,000원이 소요되었습니다. 아직도 약간의 외상분이 청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마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자매기관인 도로공사에서 주선해주신 담장이 계약재배와 노변 정리작업에서 벌어드리게 될 250만원의 노임으로 연말까지는 말끔히 청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수돗물처럼 줄기찬 내일을 위하여
수도꼭지에서 소독약 냄새가 물씬한 맑은 물이 쏴- 하고 쏟아져 나오던 그 감격의 순간, 남녀노유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올리고 눈물을 뿌리던 그 아름다운 정경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룩된 간이상수도의 성과를 분석해볼 것 같으면,
첫째, 온 마을 사람들이 자조 자립 협동하는 소중한 정신적인 자산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위생수 공급으로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했던 수인성 전염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 일입니다.
셋째, 먼 거리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데 소요되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대폭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도로공사 담장이 재배와 노변 떼 붙임 작업을 연내에 완수하고 이미 확보해 놓은 바 있는 1,500평의 부락 공동양묘장에 장미 49,000주, 밤나무 21,000주를 심어 복차파상 사업으로 추진함으로써 국민소득 1,000불을 목표로 하는 잘 살 수 있는 80년대를 향하여 어느 마을 보다 앞장서 나아갈 것을 굳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자료출처 : 새마을운동 시작에서 오늘까지(내무부)1973
편집자 덧붙임 : 동산1리 마을은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여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낙후마을 지도자들에 대한 현지생활교육마을로 새마을운동 확산 발전에 크게 기여 하였으며 이 마을 황종철 지도자는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으로도 봉사하였음.